사회실천연구소

[편집자의 말] 자본주의, 풍요로운 인간의 삶(?)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3월호

[편집자의 말] 자본주의, 풍요로운 인간의 삶(?)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5:58

그렇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아주 풍요롭게 해 주었다. 자본주의가 자리 잡은 다음, 사람들이 먹지 못해서 죽는 일은 없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거둔 엄청난 물질적 부에 따른다면. 


그러나 세상은 그와 같지 않다. 

한쪽에서는 물건이 넘쳐흐르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다.


토마스 칼라일(T. Carlyle)은 자본주의 사회를 “현금 거래 관계라고 하는 금과 지폐로 맺어진 무자비한 사회적 유대 말고는 모든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버린 세상이다.”라고 표현했다. 그 표현은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참’인 것 같다. 돈만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생명줄’이었다.  


1780년대 어느 시점인가, 인간 역사에서 커다란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의 생산력을 속박하던 굴레(자연)에서 벗어나서 재화와 용역을 끊임없이, 신속하게, 그리고 무한하게 증식시킬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자립적 성장으로 도약”이었다. 


그와 같은 도약이 일어나기 전, 인간은 전(前)산업적 사회구조와 불완전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이 때문에 발생했던 주기적 붕괴와 기근, 그리고 죽음 등이 생산에 부여했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자연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다. ‘홀로’ 성장이 가능하게 되자, 인간은 완전히 자연의 껍질을 벗어 던졌다. 이제 인간은 ‘당당히’ 자연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 즐거운 비명 소리는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가진 자’의 몫이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지닌 ‘힘 또는 위력’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런 인식이 있고 난 뒤,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담고 있는 다음과 같은 시가 조용히 퍼져 나갔다. 


한 냉혹한 왕이 있다.

그는 시인의 꿈속에나 있는 왕이 아니다.

그러나 그 무서운 왕을 백색 노예들은 잘 알고 있다.

이 무자비한 왕은 바로 증기이다.


그의 팔은 무쇠로 되어 있다.

비록 팔은 하나뿐이라 할지라도.

저 힘센 팔에는 마법이 담겨 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파멸된다.


고대의 잔인한 Moloch와 같이

저기 서 있는 천상의 골짜기에는

그 내부에 타오르는 불길이 있다.

어린이들이 그의 먹이이다.


그의 승려들은 배고픈 무리이며

피에 굶주리고 교만하고 뻔뻔스럽다.

그들은 그의 거대한 손을 휘두른다.

그와 함께 피는 황금으로 변해간다.


노예의 사슬을 가지고 더러운 이윤을 위해

그들은 모든 천부적 권리를 속박한다.

그들은 사랑스런 여성들의 피눈물을 조롱한다.

또한 남성들의 눈물을 외면한다.


노동자의 자식들의 한숨과 신음들.

이것이 그들의 귀에는 음악으로 들린다.

소년, 소녀들의 뼈만 남은 그림자가

증기 왕(Steam King)의 지옥에서 나타난다.


저 지옥이 바로 지구 위에 있다.

증기 왕이 생겨난 뒤 

절망이 여기저기를 휘감고 있다.

하늘을 꿈꾸는 인간의 마음,

그리고 인간의 육체가 그곳에서 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Moloch 왕 앞에 엎어져 있다.

너희 수백만의 노동자들이여!

그의 손에 묶인 채, 우리의 조국은 

그에 의해 파멸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 폭군은 소름이 끼치며, 교만한 공장 귀족은

황금과 노동자의 피를 빨아 먹고 있다.

국민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그들의 극악한 신과 마찬가지로. (증기 왕, 영국노동계급의 상태)


이제 그런 “증기 왕(Steam King)”을 가진 사람들, 아니 “돈”을 가진 사람들은 나머지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려먹는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같은 인간이 아닌 ‘노동’ 또는 ‘도구’로 여기며, 몇 푼 안 되는 돈을 주고 굶주림에 허덕이도록 한다. 그렇게 구조화된 자본주의 사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 300여 년 동안 변한 게 있을까. 

자본가는 그 동안 노동자들에게 ‘혼 줄이 났었다.’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을 생각해보면, 그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혼이 난’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방식을 훨씬 더 ‘기술적 또는 예술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필요하면, 그들은 경쟁을 중지하고 그들끼리 ‘단결’하여 노동에 맞서기도 했다. 자본가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자신의 존재조건을 더욱 교묘하게 강화시킨다. 자본가가 물러서는 것은 노동자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일보후퇴, 이보전진”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노동자에게는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노동자는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또렷이 알게 되었고, 자본에 맞서 싸우는 법을 배웠으며, 단결하는 법을 배웠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법도 배웠다. 그런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300여 년 동안 자본가와 노동자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줄다리기를 이어왔다. 누가 승리했을까. 아니 이렇게 물어보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노동자는 자신들의 요구를 채운 다음에 무엇을 더 요구했나. 요구한 것도 많았겠지만, 오히려 노동자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훨씬 더 ‘후퇴’했다. 노동자가 승리감에 한껏 취해 있게 된 계기는 바로 자본가들이 쏟아내는 엄청난 ‘선전, 곧 광고’이다. 노동자는 광고를 통해 소비문화에 흠뻑 취해버린다. 소비에 취한 나머지, 그들은 스스로의 계급적 정체성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 노동자는 소비에 취했을 뿐만 아니라, ‘중독 되어’ 버렸다. 그들은 기계처럼 일할 뿐만 아니라, ‘기계처럼 쓰기도 했다.’ 


그와 함께 지금 노동자는 자본주의 발전 초기 단계에 있던 그런 노동자 계급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 자본가가 얼마나 ‘쾌재’를 불러댈까. 자신이 노린 목표는 이로써 이뤄졌다고! 그러면 지금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더 이상 적대적인 계급관계가 아닌가. 아니 노동자는 정말로 '생산수단'을 지녔는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노동력을 팔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런 '허위의식'에 빠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들은 왜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으로 인식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을까. 여기에는 분명 오랜 역사 과정이 있을 것이다. 이 역사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기 전에,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렇다. 

다시 한 번,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었는가. 

이번 호 [특집]에 실린 글들은 그러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번 호에는 이런 글들을 실었다.



[특집] 자본주의, 풍요로운 삶(!)에는 자본주의가 인류에 끼친 영향을 다룬 글을 실었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병들게 한다.」(제프 산츠)와 「자본주의의 괴물들」(스티브 샤비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행동주의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 혁명이나 개혁을 넘어서는 다른 길을 상상하며」(신시아 카우프먼)이다.


제프 산츠는 캐나다에서 발생한 ‘사스’가 그저 질병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낳은 산물이라 주장한다. 특히 1995년부터 캐나다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친 것이 ‘사스 위기’에 부채질을 했다. 공공의료보건체계의 ‘사유화’가 커다란 재앙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글에서 스티브 샤비로는 몬스터(괴물)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는 몬스터를 자본의 가치를 유지하려는 조치와 근대 과학과 기술의 합리화에 저항하는 우리의 원시적인 상상이 만들어낸 상상물로 여긴다. 또는 그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나 고질라처럼 기술이 만들어낸 통제할 수 없는 부산물로 볼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접근 방식은 모두 다 괴물이 자본주의 그 자체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실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업신여긴다. 그런 괴물들은 사회 현실 속에 있는 것이지 외부에서 침입한 것이 아니다. 흡혈귀와 좀비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런 괴물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능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한다. 맑스는 자본을 “흡혈귀처럼 살아있는 노동을 빨아 먹으며 사는 존재, 그리고 빨아 먹은 노동의 양에 비례하여 살아가는 죽은 노동”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흡혈귀는 스스로의 생산적인 활동이 아니라 살아있는 노동이 만들어낸 잉여를 착취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한 단면만 보여줄 뿐이다. 그 어떤 포식자나 기생충도 희생자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유형의 ‘정보’가 어떤 눈에 보이는 매개체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할 필요가 있듯이, ‘흡혈귀-자본’도, ‘좀비-노동 군단’을 만들어내야만 자신의 잉여를 뽑아낼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진보 확장함에 따라 이 군단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조직되어야 한다. 19세기는 고전적인 산업자본주의의 영역과 더불어 흡혈귀의 시대였다.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의 네트워크 사회의 특징은 좀비의 전염병이 휩쓰는 사회에 있다고 하는 편이 더 낫다. 살아 있는 시체들인 좀비의 신화는 노동의 신화이지 전쟁의 신화가 아니다. 그것은 생산의 산물이다. 


샤비로는 이 좀비를 빗대어 21세기 자본주의가 내적으로 무너지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온갖 괴물들을 거론하면서, 어떻게 자본주의의 내적 붕괴 가능성을 설명하는 지 궁금해진다.


세 번째 글에서 저자 신시어 카우프만은 ‘북아메리카 자유무역 협정’을 무력화시키는 반대 투쟁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녀는 끊임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북아메리카 자유무역 협정’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결국 의미 있는 일이 될까. ‘북아메리카 자유무역 협정’을 무력화시키는 일이 자본주의를 무력화시키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면서 느낀 부적절함을 부분적으로는 나와 다른 이들이 우리가 하는 작업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더 이상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조차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없애버리는 일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당혹스럽게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틀림없이 해답의 일부는 우리가 (자본주의에 맞선) 크고 작은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는 시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회의’가 널리 퍼져 있지만, 카우프만은 우리의 일상적 활동이 지니는 의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효과적인 전략을 계발할 수 있게 하는 유토피아적 시각을 다시 구성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녀는 지금 미국에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사상이 그것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전망에서 세 가지 핵심적인 측면을 탐구한다. 그녀는 자본주의의 정의, 독립적인 경제라는 개념(다른 요인들과는 분리된 독자적인 요인이라는 뜻), 그리고 경제가 혁명을 통해서만 전복될 수 있다는 관념과 관련된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그러면 신시어 카우프만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을 꿈꾸는 방식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기획 1] 요동치는 지구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지금은 전쟁 중 :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위기와 봉기, 그리고 되살아나는 정치」(아나 디너스테인)를 실었다. 

지난 2001년 12월, 전 세계 언론은 하나같이 ‘아르헨티나 위기’를 보도했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주류 언론은 아르헨티나를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이상적 모델이라고 선전했다. 그들은 그 뒤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경제위기와 비참한 삶에 대해 입을 다물다가, 사태가 터지자 아르헨티나에 무정부적인 폭동과 혼란의 이미지를 덧칠하기에 급급했다. 그런 주류 언론이 가린 아르헨티나 ‘사태’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저자는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혁명’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2001년 12월 19일과 20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대중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다. 끝내 대중봉기는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자본이 대량 유출되고 국제구제금융이 새로운 차관을 승인하지 않자, 부도와 자산 가치 하락, 그리고 파산사태는 정부가 내놓은 여러 가지 해결책에도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중은 몇 개월 동안 불만을 품었고, 마침내 아르헨티나 국민 대부분은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잃어버린 앞날을 개탄하며 “바스타!(그만 됐어!)”라 말했다. 

이 글은 12월 봉기가 지닌 정치적 뜻과 봉기 뒤에 나타났던 사회적 동원과 참여형식이 나타내는 정치적 뜻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12월에 일어난 사건들은 지난날에서 지금까지 아르헨티나 자본주의 사회관계들의 전환이 “결합된 장소”로서, 봉기를 통해 촉발되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아르헨티나 ‘혁명’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신자유주의가 아직도 칼날을 세우고 있는 지금, 아르헨티나가 우리에게 주는 뜻은 클 것으로 보인다.


[영화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밑거름 삼아 발전한 초기 자본주의」가 있다.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 어린이 노동이 어떻게 부르주아지의 주머니를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는지, 그리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린이 노동이라도 착취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가 지닌 ‘욕망’을 읽어 볼 수 있다.


[기획 2] 욕망과 혁명에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정신분석의 사회적 위상」과 「정신분석을 역사에 적용하는 것」(빌헬름 라이히) 

사회학의 탐구 대상으로 정신분석은 어떤 사회적 사실들에 힘입어 탄생했는가. 정신분석은 어떤 사회학적 뜻을 지니는가. 오늘날 사회에서 정신분석은 어떠한 위상을 지니는가. 사회주의에서 정신분석은 어떤 과제를 지니는가. 그리고 정신분석을 역사에 적용하는 것은 무슨 뜻을 지니는지 고찰하고 있다.


[기획 3] 잊혀 진 글 다시 읽기에는 지난 호에 이어지는 「레닌주의 조직론」(에르네스트 만델)이 있다. “레닌주의 조직론은 세 가지 요소의 변증법적 통일로 나타난다. 즉,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 후진국 혁명의 현재적 적합성에 대한 이론(이는 나중에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시대에 전 세계로 확대 적용되었다), 서로 구별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불연속적이고 모순적인 발전과 그 가장 높은 단계에 대한 이론, 그리고 맑스주의 이론의 본질과 맑스주의 이론이 한편으로 과학과,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계급투쟁과 맺는 특정한 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만델은 레닌주의 조직론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과 현재적 적합성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과정은 이론의 발전과 실제 노동자 계급투쟁의 발전 사이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내적 모순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는 레닌이 세운 조직론을 맑스주의의 역사적 발전과 전개과정 속에서 올바로 위치 지으려 했다.   


[정세분석] 「중국의 현실적인 생산관계는 무엇인가」

중국 사회에 대한 분석은 ‘사회주의’를 되살리려는 사람들에게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지금 중국 사회의 성격이 무엇인지 문답식으로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 중국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분석을 쫓아가다 보면, ‘지구화 시대’에 ‘정치경제학’이나 ‘역사적 유물론’이 어떤 임무를 가지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기획 4] ‘소비에트’를 다시 보자에는 도니 굴룩슈타인(Donny Gluckstein)이 쓴 책 『의회제도의 대안, 서구 소비에트 노동자 평의회 1915~1920년』(The Western Soviets Worker's Councils Versus Parliament 1915~1920)를 몇 번에 나누어 실을 것이다. 이번에는 「서론」과「제1장 페트로그라드에서 소비에트와 혁명」을 실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의회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변화의 방법론은 계급착취의 본질을 뒤흔들어 놓지 못했고 심지어 대량실업과 기초 복지제도를 축소하더라도 노동자의 생존조건을 유지할 수조차 없었다. 의회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변혁론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혁명적 변혁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다시 내놓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의회주의 제도를 의혹과 냉소를 가지고 바라볼지라도, 무기명 투표방식이라는 의회 제도를 뛰어넘는 대안으로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통치방식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노동자는 없다. 그러나 역사는 노동자 평의회가 의회제도와 스탈린주의 통치방식을 극복한 진정한 대안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한 뜻을 지닌 소비에트, 즉 노동자 평의회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시도되었는가. 혼란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힘은 바로 역사가 아닐까. 그 역사를 밑거름 삼아,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을 모색해보자. 


이번 호 [역사 속의 반란자들]에는 두 개의 글을 실었다. 「‘17세기 공산주의자’ 제라르 윈스탄리와 디거스 운동, “세상이 뒤집어지기를”」와 「태평사회를 향한 민중의 열망, 장각」이다. 억압과 불평등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것을 뒤 엎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시기와 나라는 다르지만, 그때 그 곳에서 그러한 움직임은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


다음호에는 이런 글이 선보일 것이다.


[특집] 왜 자본주의가 아닌가.

- 미국 자본주의의 착취, 소비, 그리고 독특성

- 신자유주의의 본질과 모순

[기획 1] 요동치는 지구별

-룰라와 브라질에서 신자유주의의 연속성

[영화이야기] 청년 전태일

[기획 2] 욕망과 혁명

[기획 3] 잊혀 진 글 다시 읽기

 -레닌 (루카치)

[기획 4] ‘소비에트’ 다시 보기

- 위기에 봉착한 서구 제국주의

[정세분석]

- 요즘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급투쟁(로렌 골드너)

- 뉴욕에서 운송 노동자 파업이 노동계급의 힘을 보여주다 (혁명정당추진동맹LRP)

- 몇 백만이 이주노동자의 권리 확보를 위해 행진하다 (혁명정당추진동맹 LRP)

[역사 속의 반란자들]

푸카초프

수나라의 이밀(李密)

[서평]

빅토르 세르주 「러시아 혁명, 그 첫해의 경험」


2007년 3월 5일 정인(丁人)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