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부에노스아이레스, 지금은 전쟁 중!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3월호

부에노스아이레스, 지금은 전쟁 중!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4:34

부에노스아이레스, 지금은 전쟁 중! :1)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위기와 봉기, 그리고 되살아나는 정치 

아나 디너스테인(Ana Dinerstein)


“¡Que se vayan todos, que no quede ni uno solo!”2)

“이론적 성찰의 출발점은 반대, 부정, 투쟁이다. 사상을 낳는 것은 고민하는 이성이 아니라 바로 분노이다.… ”3) 

“내 나라는 현기증이 나는 나라이다. 여기서는 로또복권이 가장 중요한 현실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4) 


들어가는 말


2001년 12월 19일과 20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대중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다. 끝내 대중봉기는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자본이 대량 유출되고 국제구제금융(아래에서는 IMF)이 새로운 차관을 승인하지 않자, 부도와 자산 가치 하락, 그리고 파산사태는 정부가 내놓은 여러 가지 해결 방안에도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중은 몇 개월 동안 불만을 품었고, 마침내 아르헨티나 국민 대부분은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잃어버린 앞날을 개탄하며 “바스타(Basta!)”(그만 됐어!)라 말했다. 지난 8년 동안 실업률은 언제나 두 자리 수였고, 인구의 거의 절반이 공식 통계에 잡힌 빈곤층의 수준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 국가경제는 마비되어 있었고 금융체계는 무너져 버렸다.



2002년 1월, 긴급명령을 통해 달러와 페소의 태환이 중지되었고 페소화는 평가 절하되었다. 이 조치는 대다수 국민을 위한 게 아니라, 한 줌의 토착자본가집단과 국제자본가집단을 살리려는 것이었다.5) 외채에 대한 지불불능사태를 막기 위한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민간 부채와 신용 그리고 주택금융에 대한 결제화폐가 페소화로 전환되었다.6) 이 글을 쓰고 있을 때에도(2002년 6월) 정부는 “현실적인 거시경제의 틀”7)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바라고 있다. 그 틀에 따르면, “지방정부의 재정적자가 60% 쯤 줄어들고, 인플레이션은 억제되며, 산업의 생산 감소는 최소화되고, 금융체계의 신용은 다시 확립될 수 있다.”8)고 한다. IMF의 비위를 맞추려고 의회는 자본유출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고소할 수 있는 경제제재법을 폐지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을 보호하려고 파산법을 고쳤다.9) IMF와 은행들이 보통사람들의 저축을 공채로 강제 변경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자본은 끊임없이 유출되었고, 이에 따라 금융위기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심지어 이미 우루과이와 브라질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지역위기가 일어나게 할 만큼 심각했다.


IMF가 내놓은 ‘정책제안’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실행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이를 테면, 그 해 12월에 실업률은 약 29%였고, 그 해 말에는 국민 3천6백만 명 가운데 거의 절반이 빈곤층이나 다름없었다.10) 달러에 대한 페소화의 환율이 상승하고 있었지만, 가계의 식료품 부담비용이 35.2%나 증가했지만, 임금은 아무런 보상을 바랄 수도 없었고 심지어 “폭락”11)했다.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찾는 일, 비공식적인 돈벌이와 거래, 물물교환, 범죄, 그리고 파산하는 은행들과 재정기구들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탈법적이고 격렬한 시위가 지난 몇 개월 동안 걱정스러울 정도로 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과도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지만, 사회적 동원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연대네트워크와 연대조직도 연이어 생겼다. 이를 테면 실업자운동(MTD)12), 물물교환클럽13), 부도난 공장을 노동자조합공장으로 전환하기 등등. 봉기가 일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Que se vayan todos!’의 구호 아래 새로운 저항운동형식, 보기를 들어 냄비 두드리기 (cacerolazos), 그리고 새로운 참여형식인 이웃 사이의 연대(asambleas barriales)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1990년대에 만들어진 여러 가지 연대네트워크와 연대조직들이 하나로 결합되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떤 논평가들은 위기가 지닌 재정․경제․정치․사회적 근원에 주목하면서, 봉기와 저항의 새로운 형식들을 다만 그 결과로 해석함으로써, 봉기와 저항이 담고 있는 정치적 함의를 배제한다. 반면에 다른 논평가들은 봉기를 혁명운동의 초기형식으로 파악하는 데에 열중하면서 연대(asambleas)를 혁명조직형식으로 여긴다.14) 그러나 봉기를 혁명 운동 초기 형식으로 바라보는 견해에는 그 조직들이 하나의 자율적인 힘으로 파악되고 있고, 따라서 그러한 조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물적 토대가 빠져 있다.


이 글은 12월 봉기가 지닌 정치적 뜻과 봉기 뒤에 나타났던 사회적 동원과 참여형식이 나타내는 정치적 뜻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나는 12월에 일어난 사건들이 단순히 구조적 위기가 낳은 결과이거나 또는 자율적이고 혁명적인 힘이 빚은 결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12월에 일어난 사건들은 지난날에서 지금까지 아르헨티나 자본주의 사회관계들의 전환이 “결합된 장소”로서, 봉기를 통해 촉발되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쟁이 동시적으로 상호 결합된 두 과정의 압축적 결과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두 과정은 지난 25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며, 독재와 민주화 그리고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포괄하고 있다. 하나의 과정은 1976년에 시작된 자본축적형식이 무너지는 것이고, 그리고 자본이 사회에 명령할 수 있게 하는 특수한 형식의 조직이 무너지는 것, 즉 ‘안정성’을 담보하는 힘이 무너진 것이다. 반면에 다른 하나의 과정은 ‘안정성’의 내면에서 일어나 그에 맞서는 저항들이 확대되고 서로 결합되는 과정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과정을 “불안정으로 회귀”, “사회적 무정부상태”, 불확실성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봉기가 자본주의가 지닌 무정부상태의 특수한 형식을 끝장내고 정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과정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은 어쌈블레아스 바리알레스(asambleas barriales)와 실업자운동의 독립적인 소 조직들과 같은 새로운 조직형식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돋보기〕실업자 운동(Movimiento de Trabajadores Desocupados ; MTD)


아르헨티나에서 12월 봉기의 도화선이 된 것은 실업자 운동이다. 아르헨티나가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자, 외국 기업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고 투기가 붐을 일으켰다. 아르헨티나 자본가들이 외국에 투자한 1,300억 달러가 아르헨티나로 들어왔다.1997년에 경기후퇴가 시작되었고 2001년에는 경기침체가 깊어졌다. 30~80%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실업상태이거나 불완전고용에 빠졌다. 경제적 어려움은 정치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잇달아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라울 알폰신, 카를로스 메넴, 페르난도 델 라 루아 대통령은 관직에 있을 때, 중요한 공적 부문을 외국 기업에 헐값으로 팔아넘겼을 뿐만 아니라, 군부독재 시절 ‘살인기계’이거나 ‘공모한 사람들’30,000명에 면죄부를 주었다. 이에 대중은 들고 일어났다. 실업자 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지난 5년 동안 싸움의 결과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무대에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 이 운동은 원주민 지역과 자치단체 회원들이 주도하여 조직되고 지도되는 풀뿌리 운동에서 나왔다. 이 운동은 정부에게서 생존권과 최소한의 실업자를 위한 공공의 일자리를 보장받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운동은 시위대가 주요 고속도로를 점거해서, 상품과 수송의 순환을 마비시키려고 했다. 왜 고속도로를 점거하는가. 교통이 마비되고 트럭은 움직일 수조차 없으며, 물품은 공장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다시 말해 도로점거는 공장이 물품을 공급받지 못한다. 이는 공장노동자들이 일손을 놓는 것과 같았다.  


이 글은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2001년 12월의 사건들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한다. 2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쟁을 전후한 사건들을 분석한다. 3부는 구호 ¡Que se vayan todos! 가 지닌 뜻을 해석한다. 그 구호는 저항정치의 변형이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나기에 적합한 이념으로 발생했고 봉기가 낳은 것이었다. 결론인 4부는 12월 봉기가 지닌 뜻을 탐구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본가 폭력의 특수한 형식, 즉 안정성에 한계를 덧붙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부정의 정치로 정치가 되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1. 자본의 폭력과 노동의 힘 : 2001년 12월을 역사적 맥락에 놓기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위기를 불안정으로 회귀로 여기거나 노동의 힘을 재현하는 계기로 여길 수 있다. 사실 두 관점은 서로 보완적이다. 아르헨티나 자본주의, 특히 1970년대 이래 아르헨티나 자본주의에는 하나의 역사적 유형이 있었다. 그 유형은 계급적대가 화폐 테러리즘15)과 이에 대한 극적인 형식의 저항으로 표출된다. 12월 위기도 이러한 유형에서 벗어나지는 않지만, 자세히 연구해 볼 만한 중요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봉기의 중요한 뜻을 포착하려고 나는 그에 앞선 세 시기, 즉 1976~82년, 1982~89년, 1989~99년을 간단히 고찰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고찰이 1999년에 시작되어 2001년 12월에 일어난 대중 봉기를 통해 또렷이 드러난 위기와 저항의 급진성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역사적 맥락을 제공해줄 것으로 바란다. 


국가 테러리즘과 경제 불안정(1976~82년)


지구적 위기와 자본의 재구성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1976~82년의 기간은 아르헨티나에서 자본축적의 새로운 형식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이 새로운 형식은 국내 산업을 희생하는 대신에 좀 더 대외지향적인 경제부문을 강화함으로써 농업-수출 모델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환은 자본의 재무 상태를 안정시키는 데에 이바지했고, 국가 테러리즘을 통해 유지되었다.16)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일어난 전체사회에서 극단화와 게릴라운동이 확대된 것은 이러한 전환을 방해하였다.  투옥, 고문, 협박, 경제적․심리적 탄압, 추방, 노동운동의 탄압, 산업의 쇠퇴, 빈곤, 실업 등으로 30,000명이 죽었다.17) 이러한 희생 때문에 신용확대가 통제되지 않았고 경제 불안정이 조장되었다. 돈을 쉽게 벌려는 화폐의 속성 때문에 금융투기가 연이어 일어났고, 그 결과 한꺼번에 많은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또한 한 줌밖에 안 되는 기업들이 경제력을 손아귀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실업과 임금하락 때문에 노동계급이 더욱 가난해졌다.


이 기간 동안 라틴아메리카에서 외채는 시카고 싱크탱크의 지도를 받는 국제적인 사적 자본, IMF, 세계은행, 국내자본가와 지주계급 등의 역동적인 개입을 통해 더욱 늘어났다.18) 국제적인 사적 금융은 유러달러 시장의 형성과 그에 따른 지구적 규모의 신용공급을 통해 확장되었다. “외채는 무제한적인 공급(해외자본의 유입 : 편집자 주)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19) 이것은 유럽연합과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정부에 압력을 넣은 결과였다. 1976년 12월에 아르헨티나가 진 (사적부문과 공공부문을 포함한) 외채는 82억7천9백만 달러였으나, 1983년에는 472억3천4백만 달러에 다다랐다. 이 외채 가운데 90%는 재정 부채였다.20) 이와 같이 외채를 증가시킨 주된 ‘죄인’은 280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유출(capital fugado)이었다.21) 1979~81년 사이에 아르헨티나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자신의 돈을 해외에 예치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한 거래의 산물”22)이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로 자신의 돈을 다시 가져왔다. 이러한 거래는 새로운 예금으로 나타났다. 1979~81년 사이에 이루어진 자본유출은 162억 달러에 달했다. 자본유출은 아르헨티나 국내총생산(GDP)의 약 23%에 들어맞았다.”23) 그러나 1982년에 신용공급이 중단되자, 군정이 끝나기 전 몇 달 동안 도밍고 까발로는 외채문제에 대한 강력한 해결책을 실시했다. 까발로는 1991년에 경제 안정을 창조한 사람이자 아울러 2001년에 경제 안정을 파괴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실시한 해결책이란 금융개혁, 보증계약과 통화스왑형식의 중앙은행 보조금을 통한 사적 부문의 채무감소이다.24) 이것은 사적 부문이 자신의 외채를 보조금에 의해 경감된 비용으로 탕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중앙은행이 사적 부문의 달러표시 채무를 떠맡음으로써 국내 채무기업들에 대한 국내화폐표시 채권자가 됨”25)으로써 사적 부문의 외채가 국유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공공부문은 1979년에 외채의 52.3%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비율은 1982년에 62.2%로 늘었다.


자본의 재무상태안정을 먼저 추진함에 따라 국내 산업은 차츰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거대자본이 형성되었다. 이 거대자본은 통합적이거나 또는 다각화된 초국적 기업으로 조직되었고, 다른 경제부문들을 통괄하는 복합기업의 형식을 띠었으며, 고도의 자본집중을 이루게 되었다.26) 이러한 전환이 지닌 또 다른 측면은 노동 계급의 궁핍화였다.27) 1974년에 임금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0.5%였으나, 1981년에는 그 비율이 32.5%로 떨어졌다.28) 경제정책의 효과는 산업노동시장에서 임금노동이 감소하고 서비스 부문이 참여를 확대하는(desalarizacion and terciarizacion)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고용주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비용은 1974년에 43%에서 1976년에 35.7%로 감소하였고 …… 생산성은 1974년과 1983년을 비교할 때 37.6% 증가하였다. 이러한 두 요소는 절대적인 이윤율이 증대했음을 뜻했다. 임금이 감소함에 따라, 산업 고용주들이 획득한 자금은 1974년과 1983년 사이에 69% 증가한 것으로 계산되었다.29) 


그러나 군사정부는 경제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이 실패는 인플레이션의 형식, 즉 소득분배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화폐적 표현으로 나타났다.30) 비록 “연간 인플레이션 비율은 1980년에 줄어들었지만 …… 1981년에 경제가 무너지고 1982년에 경제정책이 실패함으로써, 인플레이션 비율은 세 자리 숫자로 되돌아갔다.”31) 한편으로는 “투기산업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발전함”에 따라 서로 다른 자본분파들 사이에서 격렬한 경쟁이 일어났다.32)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테러리즘과 경제 테러리즘이 있었지만, 새로운 형식의 저항이 이루어졌다.33) 전체 사회는 저항과 파업, 그리고 군사적 폭력과 자본의 폭력이라는 거의 비슷한 적들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운동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경제 불안정 (1983~1989년)  


1983~89년 기간에는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전도 있었지만, 경제 불안정은 이어졌다. 계급 사이의 적대는 민주주의가 담고 있는 뜻과 내용을 둘러싼 투쟁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 인권 투쟁은 아르헨티나에서 1976년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열었다. 독재시대에 형성된 인권운동(Movimiento por los Derechos Humanos)은 민주화를 부추기는 촉매제였다. 이 운동의 내부에서  5월광장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운동(Movimiento de Madres y Abuelas de Plaza de Mayo)은 “유령은 살아있다(aparicion con vida)”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처벌을(juicio y castigo a los culpables)”이라는 구호 아래 모여 실종자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다른 한편,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의 중요한 부문이 노동자들의 적절한 임금과 적절한 생활수준을 되찾으려는 공개 투쟁을 다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제도적 재조직화와 민주화를 강화하였고, 자신들의 협상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투쟁했다. 인권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주의자들은 민주적인 국가가 자신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민주주의는 인권운동단체들의 요구를 합법화하고 노동운동의 재출현과 정치적 부활을 용인함으로써 이전 시대 국가테러리즘이 저지른 결과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그들에게 중대한 장애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인권운동단체와 노동운동이 내놓은 요구는 그것들이 경제의 안정화를 위협하지 않는 조건에서만 충족될 수 있었다. 경제안정화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밑바탕이자 아울러 민주주의를 막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1985년 2월에 이르러 인플레이션이 증대되었고, 정부는 IMF로부터 외채 재협상을 위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때에도,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일이 민주주의가 지닌 본성을 통해 위협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분명해지고 있었다. 부채위기는 국가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부채위기는 실질임금의 하락과 이에 따른 라틴아메리카 노동자에 대한 국내외 자본의 착취율 증가를 함께 가져왔다.34) 정부는 쟁점을 정치화하는 데 실패했다. 아르헨티나와 IMF를 포함한 국제 채권단이 첫 금융 조정에 합의한 다음, 외채 이자의 절반은 국가 수출총액의 70%에 달하게 되었다.35) 1985년에는 결국 부채상환은 말할 것도 없이 채무불이행도 할 수 없었다.36)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둘러싼 투쟁이 민주주의의 ‘형식적’ 또는 ‘참여적’ 성격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해졌다. 민주주의로 이행은 다른 이행, 즉 경제적 불안정에서 1990년대의 안정이라는 형식을 빌린 합법적 화폐테러리즘으로 이행에 대한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 위에 군림하는 화폐테러리즘의 합법화37)에 대한 찬반 투쟁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자본 가치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자 노동을 탄압하는 수단이 되었다. 외채에 대한 이자부담에 부닥친 정부는 1989년에 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그들의 채권자의 지시에 복종하려는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국가통화의 신용하락과 금융위기로 나타났다. 달러의 공급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아르헨티나의 외채창출을 쉽게 했던 바로 그 은행들이 이번에도 사회적 강제를 위한 수단으로 화폐를 조작하고 있었다. 1989년 2월 중앙은행은 달러의 판매를 중지했고 이에 따라 달러의 가격이 폭등했다. 인플레이션이 뒤를 이었다.  


달러의 교환비율은 2월에 14.7 오스트랄레스(australes)에서 7월에는 650 오스트랄레스로 폭등했다. 중앙은행이 고갈된 외화보유량을 기껏 며칠 만에 보충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의 인플레이션 사태를 “시장의 쿠데타”라 한다.38)   


이 사건들은 ‘화폐테러리즘’의 국가적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화폐테러리즘의 “첫 번째 결과는 국민국가가 자율성을 상실하는 것인데, 이것은 국가권력이 화폐 테러리즘이 작동하는 세계 차원으로 이전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39)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엄청난 화폐투기와 빈곤의 증대를 극적으로 연출했다.40)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통화’가 약하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가격기구, 즉 비인격적이지만 눈에 보이는 적에 맞서 생존투쟁을 벌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2001년 12월과 마찬가지로 1989년에도 약탈, 경찰의 억압, 중산층의 불만, 금융투기, 국제기구와 외국은행에서부터 압력 증대 등이 나타났다. 알퐁신은 끝내 경제 불안정, 인권단체와 노동단체의 저항, 군대의 반란, 국제 채권단과 IMF의 사임압력 등에서 비롯된 잠재적 ‘사회적 폭발’에 부닥쳤다. 알퐁신은 그 때문에 자신의 공직 임기를 끝내지 못하고 차기대통령으로 이미 선출되어 있던 메넴에게 권력을 넘기고 말았다.41) 1990년대에는 경제 안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밀려서 민주주의의 내용을 둘러싼 토론이 활성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2001년 12월에 뚜렷이 드러났다.


‘민주주의’, ‘안정성’ 그리고 안정성의 폭력 (1989~99년)


1989~99년의 기간은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었으므로 외관상으로 볼 때는 과거와 단절된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메넴대통령의 선출은 1983년에 시작된 민주화의 공식적인 과정이 완결되었음을 뜻했다. 경제적 안정성이 최우선적인 과제가 되었다. 워싱턴 컨센서스42)는 경제 안정이라는 과제를 정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에 긴축재정과 경제 안정성, 그리고 외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할 수 있는 성장과 경제를 초국적 자본에 개방할 것 등을 요구했다. 1991년 4월에 우호적인 국제관계를 담보하는 태환계획이 IMF의 승인을 받아 실행되었고, 그 결과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퇴치되었다. 이 새로운 안정화계획은 페소화의 평가절하와 달러와 페소의 일대일 연동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국내의 화폐공급이 통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 결과로 나올 수 있는 통화안정은 외국인 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산업 가운데 가장 생산성이 높은 부문에서 생산성 향상과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한 구조조정과 기술현대화를 촉진할 것으로 기대되었다.43)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강력한 국가개입으로 잡은 것은 경제 기적에 버금가는 일로 생각되었다.44) 달러-페소 태환이라는 보호 장치 아래 주로 “긴급명령조치” - 이것은 정부에게 “청산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 를 통해 이루어진 전환은 빠르고 심층적이었다.45)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발동된 긴급명령(decretos de necesidad y urgencia)이 법을 대체했다. 긴급명령은 의회가 반대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46) 부패는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달성하는 수단이었다.47) 민주적 과정은 포기되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구조조정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보기를 들면, 


정부는 국가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구조들을 제도적으로 파괴하였다. 많은 일들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경제적 긴급사태법은 민주적인 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법은 만들어져야 했고 …… 근원적인 전환을 향해 움직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었다.48)


이 시기의 특수성은 자본의 폭력을 독특한 방법으로 조직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운데 있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태환계획은 말할 것도 없이 워싱턴 컨센서스가 제안한 일련의 정책이 의도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안정성’이 성취되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계급 적대를 합리화하는 새로운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안정성은 과거와 단절, 즉 민주주의의 강화와 인플레이션의 퇴치를 나타내는 하나의 사회적 표상으로 나왔다. 그러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은 확실성과 경제성장, 즉 미래에 대한 통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불확실성과 빈곤과 환멸, 즉 미래에 대한 포기를 단계별로 합법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유지되었다. 한편으로 안정성은 자본을 스스로 움직이는 사물로 만들었고 거대자본과 초국적 자본에 좀 더 이로운 환경을 조성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성은 노동과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안정화의 목적을 훼손하고 2001년 12월의 위기를 낳았다. 



‘위대한 전환’은 세금면제, 93개 국유기업의 사유화, 산업보조금, 금융시장과 노동시장에 대한 탈규제, 노동의 유연화, 단체협상의 개별화, 생산성 연동 임금제, 조합복지기금과 사회보장에 대한 고용주의 의무경감, 의료보험과 사회보장보험 그리고 산업재해보험의 민영화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49) 이러한 전환을 유지하려고, 지역별로 아주 엄격한 경제적 조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정은 재정적자를 축소하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 i) 지역정부의 세입을 제한하려는 세입공유체계의 개혁; ii) 지역 공공은행들의 민영화; iii) 국가예산부담을 줄이려고 건강과 교육에 대한 재정․ 행정적 책임을 지역정부로 분산하는 것.50)


지역 사이에 불균등 발전이 심화되었다. 실업과 빈곤은 보기 드물게 확산되었다. 태환계획이 실행된 다음, 실업은 1991년의 6%에서 1995년 18.5%로 급증했다.51) 다시 말해 실업자는 5년 만에 24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 주변에 있는 그렌 부에노스아이레스(Gran Buenos Ares : 이곳에 실업자의 절반이 모여 있다)에서 실업률은 1995년 5월에 20.2%까지 치솟았다. 2000년 7월에 실업률은 15.4%였고, 그해 8월에는 20%가 되었다.52)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업과 불완전고용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1996년에 그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제활동인구 중 41.2%가 직업문제를 안고 있었다. 다시 말해 1,300만 명 가운데 약 500만에서 700만의 노동자들이 고용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다.53) 빈곤과 실업은 서로 결합하여 악순환관계를 만들어냈다. 왜냐하면 이 두 문제는 상호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업률이 높아서 사회적 배제가 우세하게 될 때, 가난한 사람들은 영양부족문제, 교육문제, 주거문제 때문에 경쟁에서 불리해지며, 이에 따라 노동시장에 다시 진입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사회보장과 사회정책은 역사적으로 일반 시민보다는 공식적인 노동자들을 고려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결핍과 긴축 그리고 노동의 근본적인 전환을 고려할 때, 사회정책과 고용정책은 대부분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부패, 온정적 간섭주의, 대립,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되어버린 불평등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54) 일반적인 실업급여가 모자라자, 중앙정부는 IMF의 요구대로 경제조정을 실행한 지방자치 단체장에게는 정치적 보상을 하고, 그렇지 못한 단체장에게는 벌을 주는 수단으로, 고용과 사회보장프로그램들의 배분을 활용하였다. 자치단체장은 선거에서 정치적 동맹자를 돕거나 또는 노동조합을 통제하려고 이러한 배분을 활용하였다. 노동조합의 제도적 역할이 무너져 자체의 사회정책을 해내려고 노동조합에 지원되던 공공자금이 끊기게 되자, 사회정책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원조정책들을 요구하고 동원하는 주변부문들의 능력에 의존하게 되었다.55)


태환계획이 실행된 3년 동안에 국가경제는 외국인투자에 힘입어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초국적 자본과 금융시장의 변덕스러운 움직임에 취약했다. 그것은 1994년에 미국이 이자율을 올리고 이에 따라 외국인투자가 감소함에 따라 훼손되었다. 이것은 주식시장과 달러-페소 관계에 악영향을 준 멕시코의 ‘테낄라’ 위기와 함께 일어났다.56) 이러한 ‘금융적’ 요소들은 왜 태환계획이 실업을 증가하고 자본유출을 더욱 빠르게 하며, 금융비용을 증가시키는 것 등을 막지 못하고 무기력해졌는지를 설명해주는 이유들로 거론되었다.57) 1997년에 이르러 경제는 ‘테낄라’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되었지만 불완전고용율과 실업률이 1994년보다 각각 30%와 10%씩 증가했다.


왜 태환계획이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거시경제 조건들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2001년 12월의 위기를 초래했는가를 이해하려는 열쇠 가운데 하나는 1990년대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사적 부문은 세계와 상업․ 금융 거래에서 적자를 기록함으로써 그 나라를 위한 외국통화를 창출하는 데에도 적자를 기록했다. …… 이러한 적자는 적자를 메우려고 외채를 빌려오고 이를 준비금으로 적립하여 국내 신용을 확장한 공공부문을 통해 해소되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IMF의 조언을 따르는 국가가 자본의 해외유출을 위한 자금을 지원해주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 국내로 유입된 돈은 1달러 당 30센트만이 직접투자자금이 되었고, 30센트 가운데 10센트만이 아르헨티나 경제의 생산능력을 넓히는 데 쓰였다.58)


1990년대의 재정적자 증가는 일반적으로 믿고 있듯 공공지출이 확대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금융제도를 통한 연금개혁의 결과로 사회보장에 대한 고용주의 분담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은퇴기금(AFJyP)은 공공부문이 많은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실행되었던 것이다.59)


1995년에 메넴대통령은 명백하게 하이퍼인플레이션 시기를 떠오르게 하는 ‘나 또는 카오스’라는 구호에 기대어 다시 당선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메넴의 재선은 그의 안정화 정책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표시로 생각되었다.60) 그렇지만 안정성의 폭력에 저항한 투쟁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투쟁은 ‘안정성’이 낳은 보기 드물게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삶에 저항하여 일어섰고, 그 결과 안정성을 실현할 수 없는 정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의 부활은 먼저 언급될 만하다. <5월광장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운동>은1970년 후반에 시작된 “유령은 살아있다”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처벌을”이라는 구호 아래 투쟁을 이어갔던 반면에, 새로 등장한 H. I. J. O. S.61) 조직은 지난 독재시대에 실종된 사람들의 아이들을 결속하였다. H. I. J. O. S.는 새로운 저항방식인 escrache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지난날에 저지른 나쁜 짓을 대중에게 알리려고, 나쁜 짓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몸짓을 본 따서 이름 지은 것이었다. 1990년대에 H. I. J. O. S.는 escrache를 군사정부에 연루된 공범자지만 메넴정부가 만든 법률을 통해 사면되어 자유롭게 활보하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데 쓰였다.62) 두 번째로, 노동운동은 주로 두 개의 전국 조직에 의해 조직되었다. 즉 i) Movimiento de los Trabajadores Argentinos (MTA)는 운송연맹이 주도하는 페론주의 CGT의 분파로서 1994년 1월에 노동개혁에 반대하려고 Union General de Trabajadores del Transporte (UGTT)에 결집한 20개 이상의 조합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ii) Central de Trabajadores Argentinos (CTA)는 1992년에 만들어졌다. MTA는 페론주의를 유지하면서 노동유연화에 반대하는 투쟁에 자신의 노력을 집중했다. CTA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항하는 투쟁성을 회복하면서 그와 함께 더 광범위한 반대운동을 만들어내려고 하였다.63)


[돋보기]


에스크라체(escrache)는 H. I. J. O. S.조직을 통해 세기 전환기에 아르헨티나에서 나타났던 특별한 정치 시위이다. 그 단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쓰고 있는 속어 lunfardo에서 나왔고 공중에 폭로하는 것을 뜻한다. H. I. J. O. S.(독재 권력이 저지른 범죄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아이들로 이루어졌다.)의 구성원들은 독재정권(1976-1983)이 저지른 처벌되지 않은 범죄를 공동체에 낱낱이 들추어내는 한 방식으로서 에스크라체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많은 다른 집단과 개인들이 그것을 공개적인 시위의 한 방식으로 이용했다. 에스크라체는 공개적으로 모욕하기(public shaming)로 특징 지워지고, 다른 종류의 대중 의례와 결합되기도 했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할 것 http://hemi.nyu.edu/cuaderno/politicalperformance2004/totalitarianism/WEBSITE/texts/the_escrache_is_an_intervention.htm, 편집자 주)


세 번째로, 파업 말고도, 작업장 투쟁과 대규모 집회, 실업자들이 조직한 도로봉쇄(roadblocks), 공공부문노동자와 지역공동체가 요구한 고용프로그램, 직업창출과 투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것 등이 메넘 정부시기에 활용된 가장 가시적인 저항형식이었다. 1996~97년 기간에 도로봉쇄는 커다란 규모로 성장하였다.  Cutral-Co 와 Plaza Huincul 같은 몇몇 도로봉쇄들은 집회참가자들이 스스로 직접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공동체의 연대를 고취시킨 ‘대중봉기’로 간주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도로봉쇄는, 고용프로그램과 공동체 관련사항에 대한 배분과 관리에 대한 자신들의 협상력을 통해서, 새로운 정체성(Piqueteros)과 새로운 조직(Comisiones de Piqueteros)을 형성해냈다. 그 뒤 몇 년 동안 도로봉쇄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2001년 8월에는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하였다.64) 네 번째로, 도로봉쇄는 직접민주주의의 발전과 전체 공동체의 연대를 위한 새로운 형식을 시험하기 위한 공간을 열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실업자들의 조직화를 촉진하였다. 보기를 들면, Movimiento de Trabajadores Desocupados (MDT : 아르헨티나 실업자 운동), Federacion Tierra y Vivienda (FTV).



II. 예측된 종말의 연대기: 안정성의 붕괴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쟁(1999~2000)


12월 봉기가 일어나기 전 2년의 기간은, 자본의 폭력이라는 조직형식인 안정성이 빠르게 약화되고 그런 안정성을 지탱해온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금융적 형식들이 해체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저항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되고 사회적 분규가 확대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1999년 12월, 시민급진동맹(Union Civica Radical)과 구페론좌파( FREPASO)가 만든 알리안차(Alianza) 당의 후보 델 라 루아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새로운 연립정부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폐기하리라는 기대가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새 정부는 강력한 안정화정책을 유지했고 사회적 불만족이 감지되고 있었지만 긴축을 강화했다.65)


시민사회와 노동의 지속적인 요구와 금융기구들의 압력 사이에 빚어진 긴장은 2001년 4월에 정치적 위기를 낳았고, 그 결과 연립정부가 붕괴되어 FREPASO 소속 정치인들은 Alianza 내각에서 사퇴하였다.66) 정치가 불안해지자, 경제 불안정성은 더욱 깊어졌다. 일반적인 좌절감, 정치적 위기, 투자자들의 공황상태, “정치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공간의 축소”67)등이 팽배해진 가운데, (메넴시절 안정화정책을 만들어낸) 까발로가 델 라 루아 내각의 경제장관으로 복귀한 것은 “좌절속의 어쩔 수 없는 선택”68)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코미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1999년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Alianza를 지지했던 것은 까발로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커다란 이유였기 때문이다. 외채의 이자상환 때문에, 그리고 4월에서 6월 중순 사이의 자본유출로 빚어진 “약 100억 달러의 출혈”69)때문에, 까발로는 ‘적자 없는’ 예산을 실행에 옮겼다. 이것은 공공부문노동자의 임금과 500페소/달러가 넘는 연금의 30%를 삭감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사회적 저항이 심화되었다. 2001년 7월 24일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마탄자(La Matanza)에서 여러 조직들은70) 막 노동자와 농업노동자 그리고 실업자들의 조직들을 망라한 전국 연합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그때 있었던 50개의 실업자조직을 연계해서 전국적 조정을 할 수 있게 만들려는 것이었다.71) 도로봉쇄는 전국적인 저항형식이 되었다. 7월 31일에서 8월 17일 사이에 실업자운동은 세 번의 도로봉쇄를 조직했다. 이 도로봉쇄는 각각 24시간, 48시간, 36시간 동안 전국을 마비시켰고,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72) 도로봉쇄가 ‘전국화’된 것은 저항정치를 질적으로 한 단계 올려놓았다. 


노동자들의 저항이 강화되고, 대기업과 은행들이 금융체계를 마비(vaciamiento)시키자, 2001년 8월 1일에는 13억1천8백만 달러의 부채상환이 취소되었다. 전염될 수 있는 아르헨티나의 질병을 예방하려고 미국에서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8월 21일, IMF는 지역예산을 삭감하는 조건으로 아르헨티나에 80억 달러를 제공하는 데 동의하였다.73) 2001년 9월에는 세수실적이 14% 감소했고, 경제 불황이 심화되었으며, 이른바 ‘국가위험지수’는 높아졌다.



같은 달에, ‘적자 없는’ 예산안을 거부하려고 마탄자74)에서 MTD의 집회가 열렸다. 실업자들은 12월 6일에 또 다시 전국적인 도로봉쇄를 할 것을 요구했다. 도로봉쇄와 함께 5월 광장(Plaza de Mayo)에서 행진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불법적이며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외채에 대한 지불거부를 요구했고 은행과 지난날 국가소유였던 기업들의 재국유화를 요구했으며, 앞으로 진행될 경제적 구조조정을 모두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75) 과거에 흔히 그랬던 것처럼, 자본은 금융체계의 붕괴를 유발하며,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시민사회와 노동부문에서 투쟁이 강화되었다. 정부는 점점 더 그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11월 30일에 “13억 달러가 은행에서 빠져나갔고,” “중앙은행의 순 보유액은 17억 달러로 급격히 줄어들었다.”76) 



대규모 투자자들이 예상했던 이러한 “시장 쿠데타”는 2001년 12월 3일에 보기 드문 금융조치, 이른바 “코랄리토(corralito), 즉 예금인출제한조치”77)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위기에 앞서 이미 대량으로 빠져나갔던 자본 유출은 전혀 멈춰지지 않았다. ‘corralito’는 또 다시 노동계급과 이미 빈궁해진 중산층에게 피해를 주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긴급조치가 발동되는 90일 동안에는 일주일에 250달러 넘는 현금을 인출할 수 없고 …… 해외송금은 달마다 1000달러로 제한되는 것이었다.78) 수표, 신용카드, 직불카드 등을 통해 결제가 이루어졌고, 공식적인 승인 없이는 돈을 해외로 보낼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조치를 취했지만, 정부가 IMF에 요청한 신규 차입은 거부되었다. 정부가 “적자 없는” 예산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IMF의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2년 예산을 15.2% 삭감하라는 워싱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79)


중앙은행이 보유한 현금이 모자랐고, 유통되는 현금도 부족했으며, 게다가 현금인출이 제한되자, 팁이나 구걸 또는 자영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그리고 각종 수당이나 고용안정프로그램에 의존하던 사람들은, 특히 자신의 소득이 은행체계나 국가재정구조에 포함되지 않는 아르헨티나 노동력의 40%에 이르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무일푼’으로 내팽개쳐졌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소외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돈이 전혀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돈은 있지만 은행에서 인출할 수 없게 된 사람들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corralito'는 정부에 통일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중산층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함께 하게 만들었다. 금융제한조치와 IMF에 저항하는 총파업이 12월 13일에 있었다. 같은 주에 3백만 명의 대중이 Frente Nacional Contra la Pobreza (FRENAPO)가 조직한 국민투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모든 가구에 달마다 380달러의 일반 실업수당 지급, 최소연금의 보장, 모든 아이에 매달 60달러의 수당지급의 실행을 촉구하였다.80)


12월 16일, 돈과 생명을 놓고 싸움이 격화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멘도자, 콘코르디아, 로자리오에서 슈퍼마켓이 털렸고 식료품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다. 이것은 1989~91년에 있었던 초 인플레이션 시기를 떠오르게 한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위기를 풀기 위해 식료품과 폭탄을 함께 보내는 미국정부의 엄청난 모순을 그대로 본받아서, 정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빈곤이 심화되어 있고 실업자 조직이 강력한 지역에 2만 상자의 식료품 상자와 몇 백 명의 경찰관을 함께 보냈다. 같은 시기에 IMF는 경제정책, 특히 태환계획이 이어질 수 없다는 비판과 함께 까발로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채무지불중지와 페소화 평가절하 그리고 재정에 대한 구조조정을 권유했다.81)


그러나 12월 19일, 불가사의한 힘이 수천 명을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전국의 모든 도시의 거리로 뛰어나오게 만들었다. 이들은 대규모의 냄비 두드리기(cacerolazo)82) 시위로 까발로 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하나의 냄비소리가 났을 뿐이었는데 곧 이어 다른 냄비소리들이 뒤를 이었고, 결국 엄청난 냄비소리가 마치 우리더러 나가서 싸우라고 외치는 것 같았어요!”83) 대규모 대중시위로 정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사회적 소요사태를 통제하려고 30일 동안 계엄이 선포되었다.84) 그러나 대통령의 계엄선포는 대중을 겁먹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봉기를 야기하였다. 계엄에 대한 투쟁을 통하여 사람들은  공공장소, 특히 아르헨티나 정치의 역사적 장소인 5월 광장(Plaza de Mayo)을 되찾았다. 냄비소리를 따라 수천 명이 광장에 집결했고, 이번에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밤을 새워가며 소음을 만들어 냈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으며, 자신들의 분노를 보여주었고, 경찰진압에 저항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쟁은 10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시위대와 경찰의 대결로 몇 백 명이 체포되었으며, 6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85) 폭력과 진압은 2001년 7월 제노아 사태를 연상시켰다.86) 델 라 루아 대통령은 헬리콥터를 타고 도피했다.

[돋보기] "CACEROLAZO"는 무엇인가.


카셀로라조는 몇 백 명, 몇 천 명, 몇 십만 명이 함께 모여 그들이 가지고 온 카세로레스(caceroles : 냄비와 후라이팬 (pots and pans)를 앞으로 나아가거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크게 두드리는 집단 저항이다. 카셀로라조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맞선 아르헨티나 대중 봉기의 상징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초국적 자본주의에 대한 집단 저항과 빠르게 연결되었다. (http://www.jmk.su.se/global02/herminia/anti/cacerolazo.htm 편집자 주)


III ‘¡Que se vayan todos, que no quede ni uno solo!’


2001년 12월이 지난 다음, 모든 것은 결정적으로 변했다. 봉기는 먼저 자신감을 주는 계기, 즉 두려움과 좌절이 권력에 저항하는 집합행동으로 전환되는 계기, ‘가능성’의 계기87)로 경험되었다. 2001년 12월에 일어난 대중봉기는 아르헨티나 자본주의가 지닌 무정부적 폭력에 대한 인간적 한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12월 19~20일의 봉기는, 중층결정의 한 계기로서, 내가 총체적 위기(total crisis)라 한 것, 즉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사회관계를 조직하는 제도적 형식의 물신성이 깨뜨려졌기 때문에 생기는 위기에서 발생했다. 2001년 12월 봉기가 지닌 급진적 성격은 자본의 위기가 예전처럼 금융적․경제적 또는 정치적 위기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일깨웠다는 데에 있다. “나는 집에서 뛰쳐나와 걷기 시작했다. 내면의 어떤 힘이 다른 사람과 함께 나를 계속해서 거리로 이끄는 것 같았다. ……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88)


12월 봉기는 지난날의 많은 투쟁을 응축하고 있으나, 지난날의 투쟁과 달리 특정한 어떤 집단이나 ‘이해관계’에 의해 주도되지 않았다. 그것은 주체도 목적도 없는 봉기였다.89) 그것은 ‘통합’의 계기로 설명될 수 있다.90) 2001년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서 목격된 권력은 사실상 부정적 권력이었다.91) 봉기를 동원한 힘은 사람들이 소속되어 있는 조직이나 정체성 또는 그들이 제기한 요구의 형식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실현되지 않은 것”(the unrealised)으로 부르고 싶다.92) 실현되지 않은 것은 지금의 우리와 다른 것이다(what we are not). 그것은 비판이다. 그것은 미뤄왔거나 억압되어온 일반적인 욕구, 이념, 실천, 경험, 욕망, 좌절, 꿈들이다. 실현되지 않은 것은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일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으며, 될 수도 이뤄질 수도 없는 것이고, 발전될 수도 실현될 수도 없는 것이며, 설명될 수는 없지만 느껴질 수는 있는 것으로, 2001년 12월 거리에 넘쳐났고 아직도 거리에 남아 있는 어떤 것이다.


대중봉기를 추동한 이념, 즉 ¡Que se vayan todos!(Out with them all!)은 지난날과 단절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닌 정치적 뜻은 무엇인가?93) 첫째, ¡Que se vayan todos!은 ‘민주주의를 풍자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암시한다.94) 지난 독재시절, 특히 1983년 뒤 독재시절에 민주주의는 새로운 “동원 가능한 유토피아”가 되었다.95)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 대중의 요구는 억압되었고, 이에 따라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곧바로 깨지게 되었다. 1990년대 동안에는 민주주의가 강화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그것은 차츰 그 내용을 상실한 채 자주 무시되거나 간과되어온 형식적 규칙이 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의해 만들어진 화폐의 테러리즘과 사회적 곤궁을 합법화했을 뿐이었다. ¡Que se vayan todos!는 1990년대 동안에 민주주의가 강화되어왔다는 널리 퍼져있는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96)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2001년 9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 선거에서 voto bronca(부정투표용지)는 전국적으로 20%에 이르렀고,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로사리오 지역에서는 각각 30%와 40%였다.97) 이에 따라 델 라 루아 행정부와 의회는 차츰 정당성을 잃게 되었다. 한 단계 더 나아가면, 대중봉기는 정치적 대표성의 전체 체계를 문제 삼고 있었다.98) 이것은 asambleas barriales에 반영되어 있다. 직접민주주의를 정치체계를 위협하는 무정부주의로 여긴 사람들과 달리,99) asambleistas는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하였고, 이웃들, 인권운동가들, 노동자단체들 그리고 시위조직들의 직접적인 결정을 그들의 지도원리 가운데 하나로 옹립하였다.100) 


둘째, ¡Que se vayan todos!은 자본의 폭력, 특히 그것의 화폐형식, 즉 코랄리토, 인플레이션, 외채부담, 금융투기, 평가절하, 끊임없는 자본유출, 실업, 빈곤, 부패, IMF개입 등을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은행에 대항하여 cacerolazos 또는 시위에 참여한 중간계급의 동기, 다시 말해 쁘띠부르주아가 corralito로 묶이게 된 자신들의 예금을 보호하려는 것은 정치적 행위를 구성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해석한다.101) 이러한 해석은 돈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돈은 교환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본의 가장 추상적인 형식이다. 자본은 외부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며, 존재하고 있는 인간에게 실천을 강요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고, 추상적인 노동 (즉, 돈)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102) 자본의 가장 추상적인 형식으로 돈은 국가와 법률처럼 특정의 사회적 주체(보기를 들어 실업자, 가난한 사람, 은행계정에 예금을 갖고 있는 시민 등)들을 창조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돈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추상적인 경제이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동등한 시민들 사이의 단순한 교환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사회적 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103) 자본유출, 파산, 긴축, 현금부족, 직업부족 등은 거의 모두 어쩔 수 없이 주관성에 충격을 준다. 그것은 정체성위기로 발전될 수밖에 없으며, 특정의 저항을 촉진시킬 수밖에 없다. 채무자클럽104)과 같은 새로운 조직형식들은 금융안정과 경제안정이 개인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들의 지속가능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내는 데에 기반을 두지 않을 경우 결코 달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셋째, ¡Que se vayan todos!은 자본가의 제도인 법률의 억압적 속성을 문제 삼는다. 왜냐하면 국가와 의회체계는 바로 법률을 통해서 자본의 권력을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대법원은 긴축정책, 그리고 특별히 민영화와 관련해서는, 노동법개정, 경제구조조정 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법관들이 수많은 부패에 연루되어 고발당했다는 사실이다.105) 2001년 12월, 전국적인 cacerolazo는 대법관들에 대한 정치적 재판을 요구했으며, 델 라 루아 대통령이 물러난 뒤 세워진 첫 번째 임시정부를 사퇴시켰다. 2002년 4월, 대법원은 장단기 예금의 권한위임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리고, 이에 따라 달러의 대량구매로 발생한 통화의 대량유통을 줄이는데 이바지함으로써, 새로운 긴축정책들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6)


넷째, ¡Que se vayan todos!은 지난 25년 동안 이어진 경제적 테러리즘에 대한 노동의 저항과 사회의 저항을 매개했던 일부의 정치적 실천과 정체성, 조직들을 의제로 만들고 있다. 12월 봉기와 봉기에 뒤따른 동원형식들은 ‘좌파’의 재출현을 뜻하거나, 전통적인 정당과/또는 노동조직들의 권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구조, 역학, 전략 등은 동일하지 않음에 기초하며 수평적이고 민주적이며 반제도적인 정치, 그리고 2001년 12월에 시작된 정치적인 것의 재창출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를 정치적으로 대표해 온 전통적인 정당들이 극도로 심각한 위기들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근본적 좌파와 노동운동은 봉기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asambleas barriales와 실업자운동(아래를 볼 것) 안에 있는 독립부문들과 같은 새롭고 신실한 조직형식과 저항형식들에 대한 자신들의 전략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07)  


IV. 결론 : 봉기와 ‘부정’의 정치학에 대하여


12월 봉기는 단순히 실업과 빈곤의 증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 등을 야기한 정부의 금융정책과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반응에서만 비롯되었던 것이 아니다. 12월 봉기는 오랜 과정의 결과이자 아울러 새로운 계기를 아르헨티나에 드러낸 것이다. 이를 통해 지구적 화폐테러리즘은 급진적 형태의 자기 자신의 생산물과 맞대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주장이었다.


우리가 논의했듯이, 군사정부(1976~82년)는 여러 혁명시도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했지만 장기적인 안정 상태를 이뤄내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 지구적 자본이 확대되자, 아르헨티나에서 금융투기, 금융부채, 자본유출, 불황 등이 일어났다. 계급적대가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고, 자본의 여러 분파들이 투기행위를 통해 격렬한 경쟁에 몰입하였다. 이러한 화폐 테러리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과 군대의 이중적 폭력에 대항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지향하게 만들었으며, 사회가 점점 더 파업과 민주화운동 같은 저항운동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1983년에서 89년까지 기간 동안 계급적대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둘러싼 형태로 나타났다. 인권운동과 노동운동의 요구 덕분에 군사정부가 저지른 엄청난 범죄행위, 즉 실종과 빈곤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1990년대 기간 동안 또 다른 전환, 즉 자본폭력의 한 형태(경제적 불안정성 형태)에서 자본폭력의 또 다른 형태(즉 화폐 테러리즘이 정당화되는 ‘안정성’ 형태)로 전환에 부닥쳤다. 이 기간은 정치에 대한 지구적 자본의 규제권력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자신의 논리에 따라 노동을 종속시키는 자본의 규제권력은 1989년과 1991년 하이퍼인플레이션 형태로 나타났다.


1990년대 기간 동안 ‘안정성’은 자본에 날개를 달아 주었으며 세계적 차원에서 화폐-자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나왔다. 이러한 통제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었고, 익명의 힘에 의해서 추동된 것이었으며,”108) 막대한 유동성을 지님으로써 “점점 더 실물경제에서 이탈”109)한 화폐의 운동에 의해 지배되었고, 결국 통제할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진 채무를 통해 교란되었다.110) 안정화정책과 긴축정책뿐만 아니라 1990년대의 ‘안정성’ 패러다임을 뒷받침했던 정치적 담화들도 안정성에 맞서 싸운 투쟁들을 억압하는 데에서 한 몫을 담당하였다. 지구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유동화에 대한 사회적 허상은 개별 국가들 안에서 자본의 지속적인 수출과 국가의 끊임없는 부패를 통해 강화되었으며, 그 결과 사회적 재생산이 될 수 없었다. 안정성의 ‘기적’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질서에 적응할 수 있는 것들을 그렇지 못한 것들에서부터 골라내는 ‘자연적’ 선택수단이 되었다.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한 투쟁은 가끔 정치 엘리트들의 부패로 나타났다. 이것은 salvense quien pueda(할 수 있다면 네 자신을 구하라)의 논리 아래, 달러-페소 환율의 덕을 본 몇몇 전문 직종 중간계급과 결탁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1999년에서 2001년 사이에 자본의 금융안정화는 한계에 다다랐다. 사회에 대한 자본의 명령을 조직하는 주요형식으로 ‘안정성’ 패러다임은 약화되어 마침내 무너졌다. 점차적으로 중간계급들도 경제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들은 안정화 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경제적 구조조정을 미래통제의 수단으로 여기고 지지했었을 뿐만 아니라, 1990년대 동안 노동자계급, 실업자운동, 인권운동 등이 끊임없이 제기한  안정성의 파괴적 힘에 대한 비판을 업신여겼다. 


봉기는 무정부상태로 회귀를 뜻한 것이 아니라 안정성 자체가 그 자신의 본성 때문에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주었다. 봉기는 자본의 폭력이 지닌 이러한 특수한 형식에 한계를 덧붙였다. 그것은 ‘안정성’의 폭력을 낱낱이 드러냈다. ¡Que se vayan todos!이 담고 있는 비판은 지극히 중요한 뜻을 지녔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정치로서 정치의 혁신운동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봉기는 새로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형식으로 대중과 정치를 점차적으로 화해시켰다. ¡Que se vayan todos!(또는 반-정치)와 정치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화해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반란의 심화와 사회적 불복종은 우리로 하여금 “시민사회의 부정적 이념”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시민사회의 개념이 분리와 독립의 이념을 통해 국가와 일체감을 생산한다면, 그것의 부정적 개념은 시민의 일반적 범주 속에 내재된 동질화의 폭력성과 정치적 추상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국가를 비판할 수 있게 한다. 그 개념은 시민사회에서부터 주체로의 전환을 위한 투쟁을 함축한다.111)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해주는 좋은 보기가 적어도 두 개 있다. 즉  asambleas barriales 와 Coordinadora de Desocupados Anibal Veron. asambleas는 수많은 대중들이 참여했다는 점112)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정치의식과 정치구조에 포섭되지 않고 자신들의 민주적 역동성을 지켜나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정치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를 회복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우리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로서 …… 정당이 아니라 연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치형태이다.”113) 공적 공간을 다시 얻음으로써 각각의 아쌈블레아(asamblea)는 다양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사회적 실천들을 응축하고 있다.114) 이것들 각각은 하나의 시공간적인 공동체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실행되고 비-동일성의 정치115)가 이루어진 덕분에 이념들, 논쟁들, 느낌들이 표현되었고, 노동자, 실업자운동116), 학생, 퇴직자의 연대행위들이 조직되었다. 아쌈블레이스따스(asambleistas)는 공장점거117)를 지원했으며, 지역의 병원, 학교, 물물교환클럽, 노숙자, 무단거주자,118) 그리고 학생들과 연대했다. 그들은 다양한 워크샵과 토론회 등에 참여하고 있고, 금융기구와 대중매체, 그리고 부패한 정치인들에119) 대항하는 직접적인 행동들(cacerolazos and escraches)120)을 계획하고 있다.


봉기가 끝난 다음 실업자운동은 분열의 고통 끝에 3개의 주요 그룹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노동조합인  Central de Trabajadores Argentinos (CTA)에 소속되어 있는 FTV, (좌파정당들과 가까운) Bloque Nacional Piquetero, 그리고, 남부 그레이트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 실업자운동(MTD)의 11개 독립조직들의 연합인 Coordinadora de Piqueteros Anibal Veron. 이 가운데 Coordinadora Anibal Veron은 특별히 주목될 만하다. 왜냐하면 Coordinadora Anibal Veron은 CTA에 소속된 FTV와 달리 실업자운동을 제도화하는 데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Bloque Nacional Piquetero와 달리 Coordinadora Anibal Veron은 정치적 귀속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좌파 정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에서 독립되어 있음을 선언하였다.121) Veron은 남부 그레이트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웃들 속에서 조직의 활동가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강력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작업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조직에는 지도자가 따로 없다. 조직은 직접민주주의의 원칙과 인간존엄과 연대의 중심성에 바탕을 둔 수평 조직의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122) 그들이 선언하고 있듯이,


우리는 ‘권력의 획득’을 믿지 않는다. 우리의 투쟁은 사회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체제에서 어떻게 권력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는 게 아니다. …… 우리는 체제를 바꾸려고 일하고 있다. 체제를 바꾸는 출발점은 우리들 안에서 또는 우리 아래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인간적인 것의 회복, 그리고 우리 동료들 사이의 집합적인 연대관계를 만들어내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다.123)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아르헨티나에서는 두 세계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교만한 권력의 세계로서 IMF가 두알데 정부와 함께 아르헨티나의 ‘미래’를 협상하기로 되어 있는 세계이다. 이곳에서는 자본의 유출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지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이미 브라질과 우루과이로 확산되고 있고, 가까운 장래에 멕시코, 칠레, 파라과이에까지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124) 다른 하나는 IMF가 대표하고 있는 자본의 프로젝트를 죽음의 프로젝트로 여겨 거부하고,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다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저항의 세계이다. IMF 프로젝트에 대한 거부, 비판, 분노 등에 전혀 대응하지 않는다면, 두알데 정부와 IMF 사이의 협상은 그런 만큼 실패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 piqueteros, ahorristas,125) deudores,126) 퇴직자, 인권단체 등은 자본주의, 특히 화폐형식의 자본주의를 날마다 규탄하고 있다. 길거리는 사회적 재생산이 자본논리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정치를 재창출하는 장소가 되었다.


목표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러한 ‘거부’의 새로운 정치과정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한다. 특히 그러한 의심은 전통적인 노동조직과 정치조직들 사이에서 그러하다. 어떤 사람들은 ¡Que se vayan todos! 만으로는, 정치변동을 만들어내는 데 충분치 않다거나, 복잡성 때문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데 충분치 않다거나, 모든 사회변동 프로젝트가 대면하게 되는 권력이해관계를 통제하는 데에 충분치 않다고 주장한다.127) 인구의 거의 절반이 빈곤층에 속하고 있고, 최근의 실질임금감소와 달러-페소 환율상승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는 오늘날, 심각한 경제구조조정을 초래한 IMF 긴급사태는 1976년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된 약탈적 축적형태를 영구화하여, 아르헨티나를 새로운 나라로 전환시키려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어 국내소비를 축소하고 양질이지만 값이 싼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수출 지향적이면서도 수입은 낮은 수준으로 억제하는 경제를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장소로 전환되고 있다.128)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지금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의 맥락에서 볼 때, 정치권력의 회복은 오직 주체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정치회복의 주체적 과정은 결코 개인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다. 집합 행위에서부터 나오는 권력 그리고 인간존엄성과 연대성의 회복은 이러한 혁명적 정치의 디딤돌이다.


¡Que se vayan todos!는 그것이 새로운 ‘적절한 이념’을 제공하기 때문에 질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따라 제안하듯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행위 할 수 있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129)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최근의 경향은 12월 봉기를 통해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의 대응물로서 권력에 저항하는 다양하고 때때로 보이지 않는 반란형식의 확장운동을 낳고 있다. 12월 19~20일이 지닌 근원적인 힘은 지구적 자본의 권력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는 형식들에 저항하는 다양한 개인적․집합적, 사적․공적 봉기를 아르헨티나에서 발생시켰다. ‘파렴치한 자본’에 저항하는 ‘도시의 반란’130)은 이번에는 세계의 남부지역에서 발생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쟁은 자본의 세계에 저항하여 새로운 정치형식을 도모하는 글로컬 봉기의 전체짜임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맺음말 : 경의를 표하며


2002년 6월 26일, 달러-페소 환율이 1대 4로 치솟고, 아르헨티나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고 IMF가 우겨대고 있는 동안, 남부 그레이트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벨라네다 다리에서 도로봉쇄가 일어났다. 그 봉쇄에 2명의 젊은 실업자가 참여했다. 경찰은 그 두 명을 무참히 죽였다. 


다리오와 막시밀리아노가 살해당했다. 그들의 죽음은 2001년 12월 대중봉기가 지난 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막시밀리아노 코스테키(25세)와 다리오 산틸란(21세)은 모두 실업자로서 Coordinadora de Piqueteros Anibal Veron의 활동가들이었다. 도로봉쇄가 있던 날, Coordinadora de Piqueteros Anibal Veron은 일련의 요구를 내세웠다. 그 가운데 실업자들에 대한 보조금 증대, 가족생계수당, 의료보험의 민영화거부, 실업자에 대한 탄압중지, 교육투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당한 요구에 대한 대답은 , 바로 경찰이 저지른 무자비한 진압이었다. 진압이 얼마나 잔인했으면 심지어 두알데 정부조차도 경찰의 진압을 “사냥”으로 여겼다. 이 진압 때문에 90명이 다쳤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다.


살인이 벌어질 때, 아벨라네다 기차역에 있었던 언론인들과 그 밖의 활동가들은 그때의 참혹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찰은 막시밀리아노에게 발포했고 쓰러진 그를 기차역의 복도에 방기하였다. 죽어가는 그를 발견한 다리오는 다른 사람들이 구조를 요청하러 간 사이에도 막시밀리아노 옆에 계속 붙어 있었다. 그러자 부에노스아이레스 경찰의 최고책임자가 직접 다리오를 역 밖으로 끌어냈고 평범한 경찰간부 한 사람이 그의 등을 쏘았다.


6월 26일에 아벨라네다 역에서 벌어진 사건은 경찰이 범한 우연한 과잉진압이 아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테러리즘에 맞서는 사람들의 의미 있는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무자비한 탄압을 계기로 아르헨티나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살인이 벌어진 다음, Coordinadora Anibal Veron을 중심으로 계급을 뛰어넘는 사회적․정치적 연대가 형성되었고 신속하게 확대되었다. 총파업과 piqueteros, asambleas barriales, 좌파정당, 노동조합, 인권운동단체, 기타 진보적인 조직들을 망라하는 세 번의 대중회가 6월 28일, 7월 3일, 7월 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5월 광장에서 열렸다. 시위자들이 외친 구호 “나는 볼 수 있다, 나는 볼 수 있다, 오늘 밤, 우리는 모두 삐께떼로스다!(Ya lo veo, ya lo veo, esta noche somos todos piqueteros!)”는 자본에 맞서 싸우려면 독자성의 정치와 사회적 분열을 타파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적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다리오와 막시밀리아노의 죽음은 경찰진압으로 두 명의 삐께떼로스가 죽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의 육체는 저항의 힘을 대변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결과로 아르헨티나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날마다 죽어가고 있는 몇 백만의 소리 없는 죽음들에게 하나의 목소리를 부여하고 있다.


[돋보기]


삐께떼로(piquetero)는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 통치하던 1990년대 중반에 아르헨티나에서 실업자들이 주창했던 사회운동의 한 성원이었다. 삐께떼로스(piqueteros)의 70%는 삐께떼라스(piqueteras), 즉 여성이다. ‘삐께떼로’라는 말은 아르헨티나의 스페인화 과정에서 생긴 신조어이다. 그것은 영어 피켓(picket)에서 나왔다. 삐께떼로스는 아르헨티나의 반(半) 실업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주로 고속도로를 점거하여 물건의 유통을 막는 투쟁을 한다. 97년 이래 실업률이 지역에 따라 30~80%를 넘나드는 아르헨티나에서 정규직 중심의 노조 운동은 어떠한 대안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업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빈민들, 청소년들,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 노동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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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 김진업




1) 이 논문의 초고는 라틴아메리카연구회의 학술대회(2002년 3월 22-24일, Norwich의 East Anglia 대학교)에서 발표되었다. 학술대회에서 초고를 토론해 준 패널참가자들, 특히 매우 큰 도움을 준 Greg Schwartz에게 감사한다. 또한 이 논문의 초고를 검토해 준 Werner Bonefeld, Massimo De Angelis, Glenn Rikowski, Peter Waterman, Historical Materialism의 편집위원들과 심사위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2) “모두 바꿔야 한다, 단 하나도 남김없이!” - 운동단체인 cacerolazos와 asambleas populares 의 간판 슬로건. 

 

3) Holloway 2002, p.1. 

 

4) Borges 2000, pp.51-2. 

 

5) Basualdo et al. 2002. 

 

6) Harald Tribune 2002년 1월 5-6일, El Pais 2002년 1월 5일 

 

7) Singh 2002, 그리고 2002년 4월 23일자 The Economist 

 

8) IMF 2002를 볼 것 

 

9) 이에 관해서는 Cafiero and Llorens 2000을 볼 것. 

 

10) 2002년 2월 28일자 La Nacion.  La Nacion의 지난 기사들은 www. lanacion.com.ar에서 볼 수 있다. INDEC(National Institute for Statistics and Census)는 4인 가족을 기준으로 4월  598.75 페소 이하의 월 소득으로 살아가는 가구를 빈곤층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은 2001년 6월 월 소득이 월 150달러에 못 미치는 것을 뜻한다. (INDEC in Clarin report 10 May 2002, pp. 12-13 와 CASH Pagina/12, 26 May 2002 를 참고할 것). 

 

11) CASH Pagina/12, 26 March 2002. Pagina/12의 글은 <www.pagina12.com.ar>에서 볼 수 있다. 


12) 보기를 들어, 소라노의 Movimiento de Trabajadores Desocupados(MTD) 사례를 볼 것(Solano in Colectivo Situaciones 2001.). 또한 MTD Anibal Veron in Pagina/12, 2 January 2002, pp. 14-15를 볼 것. 

 

13) 이미 클럽 5,000개가 조직되어 있었고, 클럽의 회원 수는 2백50만 명을 넘고 있었다. 이 가운데에서 58%가 실업자였다. Stancanelli 2002, pp. 8-9를 볼 것. 

 

14) De la Siega 2002; Altamira 2002; 그리고 Politica y Teoria, 2002, no. 48 을 볼 것. 

 

15) Cleaver 1996 와 Marazzi 1996 을 볼 것. 

 

16) Basualdo et al. 2002 을 볼 것. 

 

17) 실종된 사람에 대한 국가위원회(CONADEP: National Commission on Disappeared People)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통계는 9,000 명이지만, 인권단체들은 30,000명이라고 주장한다. CONADEP 1986을 볼 것. 

 

18) Petras 1981, p. 100 과 Teubal 1986, p. 23 을 볼 것. 

 

19) Canitrot 1994, p. 79. 

 

20) Minsburg 1987, p. 100. 이를테면 9개의 주요 국제은행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출한 금액은 그들 자본의 135%에 달했다.(Teubal 1986, p. 23). 라틴아메리카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외채에 의존한 (그리고 인플레이션에 의해 매개된) 성장이 이루어진 기간이었다.(Dinerstein 2001c). 1976년 이 지역의 (사적 부문과 공공부문을 합한) 총외채는 1000억 달러를 넘지 않았지만, 1983년에는 3362억3천만 달러가 되었다. “가난한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신용 총액은 1976년에 400억 달러로 추산되었고, 미국의 주요 은행이 거둔 이윤 가운데 약 50%는 이들 나라에 대한 대출금에서 충당된 것이다. - 이것은 모라토리엄이 널리 허용될 것이라는 주장을 그럴듯하지 않게 만드는 상황이다.”(Marazzi 1996, p. 86; Teubal 1986, p. 36도 볼 것) 

 

21) Minsburg 1987, p. 102. 

 

22) Tedesco 1999, p. 44. 

 

23) Tedesco 1999, p. 45. 

 

24) Peralta Ramos 1988, p. 72. 

 

25) Canitrot 1994, p. 80. 

 

26) Azpiazu et al. 1988. 

 

27) Tedesco 1999, p. 40. 

 

28) Tedesco 1999, p. 27. 

 

29) Tedesco 1999, pp. 40-2. 

 

30) Peralta Ramos 1988. 

 

31) Dinerstein 2001c, p. 149. 

 

32) Peralta Ramos 1988, p. 52. 

 

33) Fuchs and Velez 2001 을 볼 것. 

 

34) Dinerstein 2001c, p. 172. 1982-89년 기간 동안 워싱턴 콘센서스의 통제아래 라틴아메리카에서 선진국으로 이전된 “자원의 순유출은 2,030억 달러에 달한다.”(Tedesco 1999, p. 83). 

 

35) Dinerstein 1999. 

 

36) Richards 1997, p. 23. 

 

37) Marazzi 1996 와 Cleaver 1996 을 볼 것. 

 

38) Canitrot 1994, p. 86. 

 

39) Marazzi 1996, p. 85; Martinez 1991 도 볼 것. 

 

40) 1989년과 1990년에 ‘인플레이션이 폭발’하기 전에 900만이던 빈곤계층은 1990년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있은 다음 1,500만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인구의 47.2%에 들어맞는 것이다.(Boron 1995, p. 4). 

 

41) Latin American Weekly Report, 1 June 1989. 

 

42) 워싱턴 컨센서스란 IMF, 세계은행 그리고 미국의 담당부서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이다. 

 

43) Dinerstein 1999, p. 14. 

 

44) Dinerstein 1999. 

 

45) Dinerstein 2001c, p. 14. 

 

46) Dinerstein 1993 와 Ferreira Rubio and Goretti 1999를 볼 것. 

 

47) Casella and Villarruel 2000을 볼 것. 

 

48) Dinerstein 2001c, p. 185. 

 

49) 보기를 들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왜냐하면 파산한 국가체계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주식시장에서 자율적 투자를 위해서 민영으로 설립된 은퇴기금 Aseguradoras de Fondos de Jubilaciones y Pensiones (AFJyP)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법이 만들어짐에 따라 Aseguradoras de Riesgos de Trabajo (ART), 즉 재해보상에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고용주들을 고객으로 하는 영리기업이 설립되었고, 이에 따라 돈의 논리는 직업안전과 보험에도 도입되었다. 건강과 작업장에서 안전과 관련하여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은 파괴되었다. 노동자들은 산업재해와 관련하여 노동재판소나 일반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다. 새로운 법은 불공정과 불평등을 신성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고용주들이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인센티브를 줄이는 데에도 기여하였다.(Dinerstein 2001c) 

 

50) Feletti and Lozano 1992, p. 16. 

 

51) INDEC EPDH (Permanent Survey on Households) May 1995. At <www.indec. mecon.ar>. 

 

52) INDEC. 

 

53) Dinerstein 2001c, p. 277. 

 

54) Dinerstein 2001c, p. 295; Grassi 2002 와 Auyero 2001 를 볼 것. 

 

55) Dinerstein 2001c, p. 294. 

 

56) Dinerstein 2001c, p. 271 을 볼 것. 아르헨티나의 주식시장도 브라질의 안정정책인 Plan Real로부터 악영향을 받았다. 이 정책은 브라질 국내시장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MERCOSUR 안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수입 감소를 야기하였다. (INDEC 1999 at <www.indec.mecon.ar>). 

 

57) Dinerstein 2001c, p. 239. 

 

58) Verbitsky 2002. 

 

59) Ministerio de Economia, in Clarin 26 May 2002, Suplemento Economico, p. 7. 또한 <www.mecon.gov.ar>를 볼 것. 


60) Dinerstein 1999. 

 

61) H. I. J. O. S.는 Hijos por la Identidad y la Justicia, contra el Olvido y el Silencio(Children for Identity and Justice against Oblivion and Silence)이다. 망각과 침묵에 맞서 정체성과 정의를 위한 어린이들 (편집자 주) 

 

62) Colectivo Situaciones 2000을 볼 것. 

 

63) 전통적인 CGT는 노동자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또 노동관계와 작업조건을 유연화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것은 또한 사유화, 연금과 직업적 재해보험의 시장화, 그리고 의료체계의 자율화 등으로부터 사업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성공적이었다.  

 

64) Cotarelo, 2000; Dinerstein 2001a; Klachko 2000; Inigo Carreras and Cotarelo 2001 를 볼 것. 

 

65) Dinerstein 2001b. 

 

66) Alianza 내각의 붕괴는 실제로 2000년 10월에 시작되었다. 그 당시 FREPASO를 대표하는 실력자였던 Chacho Alvarez 부통령은, 노동개혁과 관련하여 의회와 내각에 부정이 있었고, ‘정치적 위기를 풀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사임하였다.(Dinerstein 2001b; Granovsky 2001도 볼 것.) 

 

67) The Economist, 24 March 2001, p. 24. 

 

68) Ibid. 

 

69) Lewis 2002; Sabanes Plou 2001. 

 

70) Central de Trabajadores Argentinos (CTA), the Movimiento de los Trabajadores Desocupados (MTD), Corriente Combativa Clasista (CCC) and the Federacion Tierra y Vivienda (FTV). 

 

71) Observatorio Social de America Latina, 5, 2001, p. 37. 

 

72) Observatorio Social de America Latina, 5, 2001, pp. 60-7. 

 

73) The Guardian, 25 August 2001. 

 

74) Federacion Tierra y ViVienda, Corriente Combativa Clasista; Polo Obrero, Polo Social, Movimiento de Desocupados Teresa Rodriguez and Movimiento de Desocupados Anibal Veron. 마지막의 두 이름은 1997년 Cutralco와 2001년 Tartagal에서의 도로봉쇄 중 경찰진압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딴 것이다. 

 

75) Observatorio Social de America Latina, 5, 2001, p. 41. 

 

76) The Economist, 8 December 2001, p. 53. Cafiero and Llorens 2002를 볼 것. ‘예금동결조치’(corralito)가 취해지기 전 10개월간 대규모 투자자(단순한 예금주가 아니라)들의 은행예치금은 이미 29% 감소했다.(새 정당 Asociacion para una Republica de Iguales, ARI 에 소속되어 있는 MPs의 조사결과로서 Sevares 2002, p. 6 에 인용되어 있다.) 

 

77) Corralito는 스페인왕국이었던 카스티야의 놀이 이름이다. 여기서는 돈이 놀이 틀에 갇혔다는 뜻이다. 코랄리토는 아르헨티나 페소화 체제를 지키려고 취해진 부분적인 은행 예금 동결 조치를 뜻한다.(편집자 주) 

 

78) BBC News online, 3 December 2001, <news.bbc.co.uk>. 

 

79) Pagina/12, 9 December 2001. 

 

80) FRENAPO 2001 을 볼 것. 

 

81) Montenegro in Pagina/12, 19 December 2001; The Guardian online, 21 December 2001의 Denny and Teather를 볼 것. 

 

82) 이웃 사이(the neighbourhood assemblies)와 냄비두드리기운동( the pot-banging movements )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다음을 이용할 것. http://www.plazademayo.com/ ;  http://argentina.indymedia.org/ ;  http://elcacerolazo.com/ ;  http://www.piketes.com.ar/ ;  http://www.calsnet.net/argentinaarde (편집자 주) 

 

83) 2002년 6월 14일에 인터뷰한 12월 시위참가자의 증언. 

 

84) 계엄에 따라 공공장소에서 3명 이상이 모일 경우 군대는 이들의 해산을 위해 발포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85) Observatorio Social de America Latina 2002, p. 72 을 볼 것. 봉기주간 동안 시위대에 대한 경찰진압과 약탈 등으로 전국에서 희생된 사망자는 총 32명이었다. 

 

86) Seoane 2001 을 볼 것. 

 

87) ‘가능성(potentia)’에 관한 Negri 1991의 주석을 볼 것. 

 

88) 2002년 6월 14일에 인터뷰한 12월 시위참가자의 증언. 

 

89) Colectivo Situaciones 2002를 볼 것. 

 

90) Colectivo Situaciones 2002, p. 58. 

 

91) 부정적 이론과 부정적 권력에 관해서는 Holloway 1999, 2001 and 2002를 볼 것. 

 

92) Dinerstein 2002. 

 

93) 이 구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 Catterberg y Asociados의 조사에 따르면 602명의 표본 중에서 90퍼센트가 다음 선거에서는 선거로 뽑힌 기존의 모든 공직자들을 갈아치워야 한다고 주장했다.(Pagina/12, 19 May 2002). 이 주장은 두 개의 주요 저항세력(E. Carrio가 이끄는 ARI 와 L. Zamora가 이끄는 Autodeterminacion y Libertad)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94) ‘Por quien doblan <www.clarin.com/suplementos/las cacerolas’, at Zona/200201-27/>. 

 

95) Sondereguer 1985, p. 27, Dinerstein 2001c에서 재인용. 

 

96) Acuna 1994. 

 

97) Gambina et al. 2002, p. 23. 

 

98) ‘La democracia en zona de riesgo’, La Nacion, 28 February 2002. 

 

99) ‘En Lugar de las instituciones, la “accion directa”’, La Nacion, 27 March 2002. La Nacion editorials on February 14 and 17, 2002. 

 

100) Minutes of the First National Inter-Neighbourhood Assembly, 17 March 2002를 볼 것. 

 

101) Pagina/12, 28 January 2002. 

 

102) Dinerstein and Neary 2002의 서론을 볼 것. 

 

103) Dinerstein 1999. 이러한 생각은 J. Lanata가 진행하는 TV 프로그램 ‘Detras de las noticias’의 2002년 3월 19일자 방영분에서 한 asambleista에 의해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 싸우는 데, 왜냐하면 그것이 삶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104) 예컨대, 달러를 담보로 개인 또는 공적 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즉 자신들의 채무가 물가에 연동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뭉쳤다. 

 

105) Comision de Juicio Politico, Camara de Diputados de la Nacion at <www. diputados.org.ar>을 볼 것. 

 

106) La Nacion, 15 April 2002. 의회의 Comision de Juicio Politico는 대법관들을 기소하기 위한 서류들을 완성했다.(16 May 2002). 

 

107) Veloso 2002, and Zibechi 2002를 볼 것. asambleas와 정치적 좌파들 사이의 긴장에 대해서는 Several Authors 2002를 볼 것. 

 

108) Clarke 2002. 

 

109) Negri 1992, p. 73. 

 

110) Harvey 1999, p. 163. 

 

111) Tischler 2001, p. 178; Holloway 1999 and 2002 도 볼 것. 

 

112) 조사에 따르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랜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서는 주민 3명 중 1명이 cacerolazo 또는 asamblea barrial 에 참여하였다.(Pagina/12, 10 March 2002). 2002년 3월, 전국적으로는 272개의 asamblea 가 형성되었는데, 이 중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는 112개,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는 105개, 산타페 지역에 37개, 코르도바 지역에 11개, 그리고 나머지는 그 밖의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Several Authors 2002, pp. 25-6). 

 

113) In Castillian, ‘una politica solidaria y no partidaria’. Asambleistas in TV Detras de las Noticias, 19 March 2002, Buenos Aires. 

 

114) Pagina/12, 29 April 2002 에 실린 M. Moreno의 M. Bellucci와의 인터뷰기사를 볼 것. 

 

115) vecino(이웃)의 동일성은 무계급적이고 다원적인 것으로서 정치적 동일성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동일성은 asamblea의 자유정신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116) developments of the Asamblea of Liniers in Lopez 2002 를 볼 것. 

 

117) 예컨대, San Cristobal의 asamblea는 부도와 소유주의 공장포기로 위태로워진 자신들의 직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2001년 12월에 공장을 점거한 Bruckman 공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을 지원하였다. 

 

118) 각각 Bulletins of the Asamblea Vecinal Plaza Rodriguez Pena nos. 1 and 2, April and May 를 볼 것. 

 

119) Guerrero 2002을 볼 것. <www. caceroleando.8m.com> 에서 asambleas interbarriales의 활동들을 볼 것. 부에노스아이레스 Asambleas Barriales, 또는 asamblea interbarrial의 첫 번째 대표자회의는 1월 13일에 열렸다. 그 이후 전국적 차원의 조정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Parque Centenario neighbourhood에서 열린 최초의 Inter-Neighbourhood Assembly 전국대회(2002년 3월 17일)에는 전국에서 모인 150 asambleas가 참여하였다.(Minutes, 17 March 2002). 

 

120) H.I.J.O.S.는 독재정권에 연루된 사람들을 겨냥하여 escraches를 사용하였으나, 이것은 2001년 이후 부패한 정치가나 은행들을 비난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121) Pagina/12, 23 June 2002. 

 

122) El rostro de la Dignidad. Memoria del MTD Solano, Documentary by Argentina Arde, Cine Independiente, September 2002 and Colectivo Situaciones 2001 을 볼 것. 

 

123) Andres Fernandez, MTD Solano, L. Viales, ‘Los proyectos politicos piqueteros’, Pagina/12, 23.6.02, p. 17 에서 재인용. 

 

124) Pagina/12, Report 21.6.02 를 볼 것. Financial crisis in Uruguay and Brazil in Pagina/12, 31.7.02 and 1.8.02 online 를 볼 것. 

 

125) 자신들의 예금이 은행에 묶여서 언제 되찾게 될 지 알 수 없게 된 사람들. 

 

126) 자신들의 달러표시 대출을 환률변동에 따른 정산 없이 페소표시 대출로 전환해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 

 

127) 예컨대 asamblea of Parque Rivadavia가 매주 개최하는 ‘asambleas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와 같은 워크샵에서 asamblea들은 권력문제와 미래에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asambleas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Perez Esquivel in Several Authors 2002, pp. 56-68을 볼 것. 

 

128) H. Valle ‘Estamos en otro pais’ in CASH, Pagina/12, 26.5.02, p. 2 를 볼 것. 

 

129) Deleuze 1992, p. 283. 

 

130) Gilly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