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의회제도의 대안, 서구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1915~1920년)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3월호

의회제도의 대안, 서구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1915~1920년)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5:09

[기획 3] ‘소비에트’를 다시 본다.


이번 호에서는 [‘소비에트’를 다시 본다.]가 새로 들어간다. 10회에 걸쳐 글이 실릴 예정이다. 도니 글룩슈타인이 쓴 책 『의회제도의 대안, 서구 소비에트 노동자 평의회 1915~1920년』이다. 러시아 혁명의 밑바탕이었던 ‘소비에트’, 그것과 관련된 역사를 다시 보는 것은 러시아 혁명 90주년을 앞두고 그 혁명이 남긴 꿈과 좌절을 차근히 되짚어보는 시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의회제도의 대안, 서구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1915~1920년)

(The Western Soviets Worker's Councils Versus Parliament 1915~1920)


도니 굴룩슈타인(Donny Gluckstein)

<감사의 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준비하고 집필하는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특히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 토니 클리프(Tony Cliff), 피터 굿윈(Pete Goodwin), 크리스 하먼(Chris Harman), 데이브 힐(David Hill), 데이비드 커비(David Kirby), 제임스 힐튼(James Hinton), 피터 마스댄(Peter Marsden), 해리 맥샤인(Harry Mcshan), 패니 팩햄(Penny Packham), 거윈 윌리엄스(Gwyn Whilliams) 등등의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책을 라이안(Rhian)과 오웬(Owen)에게 바칩니다. 


목차


들어가며

1장. 페트로그라드에서 소비에트와 혁명

2장. 위기에 봉착한 서구 제국주의

3장. 글래스고우: 터 닦기

4장. 실패의 교훈

5장. 전쟁에 휩싸인 독일

6장. 1918년 11월 혁명의 화학공식

7장. 혁명 대 반혁명

8장. 이탈리아 : 평의회와 그 너머

9장. 재평가와 대결

10장. 결론


들어가며 


자본주의 체제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 1960~70년대에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했던 사람들은, 맑스주의자들이 예견한 경제적 붕괴(자본주의의 자동 붕괴 : 편집자 주)와 계급전쟁의 필연성이 현실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 때문에 거짓으로 드러났고,  사회변화가 의회 민주주의라는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야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회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변화의 방법론은 계급착취의 본질을 뒤흔들지도 못했고 심지어 대량실업과 기초 복지제도를 축소하더라도 노동자의 생존조건을 유지할 수조차 없었다. 의회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변혁론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혁명적 변혁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다시 내놓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의회주의 제도를 의혹과 냉소를 가지고 바라볼지라도, 무기명 투표방식이라는 의회 제도를 뛰어넘는 대안으로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통치방식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노동자는 없다. 하지만 역사는 노동자 평의회가 의회제도와 스탈린주의 통치방식을 극복한 진정한 대안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노동자 평의회는 어떤 천재 사회 설계자(social planner)가 머릿속에서 ‘발명해낸’ 산물이 아니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1918년 독일에서, 1956년 헝가리에서, 1972년 칠레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은 주도면밀한 사회변화의 기획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다수인 민중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발생시킨 위기를 극복하려고 대중 민주주의를 창조해 냈다. 역사를 보면, 평의회(또는 러시아에서 소비에트)로 조직된 노동자 권력은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세력이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더욱 쇠퇴하고 있는 지금, 노동자 평의회가 지닌 뜻은 이를 반대했던 반동주의자, 개량주의자, 스탈린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유포시킨 모호함에서부터 다시 발견되어야만 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있어 왔던 노동자 평의회의 모든 사례들을 살펴보는 역사기술적인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 있었던 소비에트 경험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의회주의 질서와 대중 개량주의라는 상황에서 활동했던 서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관련된 몇몇 사례들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 활동의 세 개의 핵심 지역이지만, 서로 다른 영국,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를 좀 더 집중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이 책은 ‘거짓에 지나지 않는’ 가치중립성과는 거리를 둘 것이다. 맑스주의자는 역사서술이 단순히 지적추구만을 위해 계급사회 안에 있는 착취자와 피착취자라는 근본적인 사회적 분화를 뛰어넘어 이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혁명적 전복을 필요로 한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제가 노동 계급의 활동과 조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러한 혁명과정의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이 오늘날 노동 운동을 고취시키고, 혁명정당이 건설되는데 한 몫을 하고, 지난날의 투쟁을 이해하는데 얼마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은 제국주의가 낳은 위기와 이에 대한 볼셰비키 혁명으로 혁명적 활동의 폭발을 경험했다.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독일과 같이 다양한 국가 사이에 있는 차이를 견주어 보는 것은 쓸모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교에서 일반적 교훈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나라만 연구하는 것은 그 나라가 지닌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색칠될 수 있다.  


1차 대전 동안 영국 노동운동세력은 노동조합의 문제에만 매달렸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하고 있었다. 그와 달리 독일 노동운동세력은 주로 정치적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만, 작업장 수준에서 벌어졌던 변화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조차 없었다. 한 국가의 사례에 제한된 연구는 이 책의 각 장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닌 목적은 어떻게 노동 운동이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전체적인 계급투쟁의 일부로 되었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책이 의도하고 있는 국제적인 비교연구방법은 그때를(1915~1920년 : 편집자 주) 다룰 때 더욱 쓸모 있는 방법론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가로질러 일어났기 때문에, 한 나라에서 일어난 노동 계급의 투쟁이 낳은 많은 차이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제도권 정치영역에서 형성되지 않았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그 밑을 바라보아야 한다. 공장과 자본주의가 자신의 법으로 지배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호한 의식 속에는 ……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의 관계만이 있으며, 착취와 피착취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노동자는 자유도 없고, 민주주의도 없다.”1) 


이 지점에서 역사가들은 피할 수 없는 문제들에 부딪치게 된다. 지배계급은 꽤 많은 공무원, 비서, 정치평론가를 동원하여 자신의 논쟁과 결정사항들을 기록하고 유포하려고 한다. 억압받는 계급조직으로 노동자 평의회는 결코 자신의 진행사항을 기록하는 의사 진행록(Hansard)를 갖고 있지 않다. 월급을 받는 상근직원도 없이 거친 계급투쟁의 한 가운데서 움직이기 때문에, 현장(rank-and-file)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적절하게 기술한 표현물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노동자 평의회와 현장조직(shop steward)은 흔히 노동자 정당에 있는 정례화 된 의사록 작성 조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장조직 활동가들과 노동자 평의회의 회의장소, 또는 정기적인 노동자 평의회의 대회기간, 심지어는 출석수준과 대표하는 범위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때때로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정확하고 세부적인 정보가 없다는 사실은 평의회를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문건으로 만들어진 정보가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자율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충분히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노동자 평의회는 무엇보다도 행동을 위해 고안된 조직이기 때문이다. 


각 사업장과 각 산업부문에 흩어져 있는 현장 노동자의 투쟁과정은 밝혀져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글래스고우와 베를린, 튜린으로 연구범위를 한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이곳 투쟁에서 뜻을 넉넉히 파악하려면 이 투쟁들이 러시아, 특히 페트로그라드라는 도시를 출발점으로 하여 유럽으로 확산된 더욱 광범위한 운동의 일부였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1장. 페트로그라드에서 소비에트와 혁명 


서유럽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아주 폭넓게 발생한 노동계급 투쟁 가운데 하나였다. 이 운동은 피로 물들였던 끔직한 1914~18년 1차 대전 때문에 일어났다. 1,300만 명이 죽고, 3,600만 명이 부상당한 이 전쟁은 자본 사이에 벌어진 시장경쟁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쟁은 시장에서 경쟁관계가 전쟁터에서 제국주의 전쟁으로 한발 짝 더 나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15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감옥에서 쓴 편지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부르주아지 사회가 딜레마에 빠졌다. 즉,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야만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딜레마이다. ……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제국주의의 승리, 즉 문명의 쇠퇴 …… 절멸, 파멸, 퇴폐, 파헤쳐진 묘지들이냐, 아니면 사회주의의 승리, 즉 제국주의와 그 위기해결방식에 목적의식적으로 대응하는 국제 노동자 계급의 승리냐. 우리는 이러한 선택에 부닥쳐 있다.”2)


전쟁이 끝날 무렵에 눈앞에서 자본주의 세계가 파멸되고 있다고 느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만은 아니었다. 로이드조지(Lloyd George)는 파리평화회담에 모인 각국 정치가들에게 잔뜩 겁을 집어먹고 “지금 유럽은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전 유럽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현존하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질서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했다.3)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안정되어 있다고 뽐냈던 영국에서조차도 1918년 말 발표된 정부비밀문서에 의하면 “볼셰비즘이라는 박테리아의 확산”이라는 제목으로 “왕권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고 소비에트가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좋은 정부형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노동계급 안에 폭넓게 퍼지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혁명가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닌 듯싶다.”4)고 덧붙였다. 


그때 계급투쟁은 광범위 규모와 다양한 모습을 보이면서 넓게 퍼졌다. 1916년 더블린(Dublin)에서 일어난 부활절 봉기를 시작으로 러시아 혁명까지, 시애틀(Seattle)에서 터진 총파업에서 암리짜(Amritsar)에서 일어난 폭동까지 곳곳에서 계급투쟁은  폭넓게 터져 나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중부유럽 대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제국은 노동자들의 봉기 때문에 무너져 버렸다. 프랑스에서 파업 물결은 부두 노동자들과 선원들, 광부들과 기술자들이 철도 노동자 파업에 함께 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러시아와 헝가리, 독일 바이에른에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등장했고,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가 정점에 다다른 1919년에, 새롭게 만들어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의 서기장 지노비에프(Zinoviev)는 “이러한 운동노선들이 현실에 자신의 궤적을 남기며 진행된다면, 우리가 세 개가 아니라 여섯 개 또는 더 많은 소비에트 공화국을 갖게 되더라도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럽은 지금 맹렬한 속도로 혁명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5)고 내다보았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이다. 1917년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차르 전제정권을 타도하고, 짧은 이행기를 거쳐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노동자혁명은 세계 모든 곳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을 한껏 고무시켰다. 러시아 혁명은 혁명정당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또는 노동자 평의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유형의 국가가 만들어질 수 있음도 보여주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19세기에 일어난 부르주아 혁명의 전체과정을 평가할 수 있게 하는 시금석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프랑스 혁명의 경험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의 (계급) 발전을 깨달았다. 부르주아 계급은 각자 자신의 의회, 자신의 자코뱅당(Jacobins), 심지어 자신의 나폴레옹을 가지고 있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맑스주의자들에 이바지했고,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난 혁명 운동도 처음이자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러시아 혁명이라는 시금석에 견주어 평가되었다.


레닌과 소비에트 국가         


노동자 평의회는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러시아 소비에트를 통해 가장 높은 수준의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특히 레닌은 실천적 측면과 이론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이바지를 했다. 레닌이 1917년 8월에 『국가와 혁명』이라는 소책자를 썼을 때, 레닌은 그 책자에 파리코뮌에 나타난 ‘맑스의 가르침’과 러시아에서 일어난 두 혁명, 즉 1905년  혁명과 1917년 2월 혁명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풀어냈다.


레닌은『국가와 혁명』에서 국가란 “계급 적대에서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자 그 산물이다.”6)라며 논의를 시작했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사회적 부를 통제하고 대다수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라는 특수한 억압기구는 마침내 계급지배를 유지하는 데 쓰인다. 그에 의하면, 국가기구는 “자신의 통제 하에 감옥 등을 가진 무장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특수한 기관들로 이루어져 있다.”7) 


이것에서 레닌은 “지배계급이 만든 국가권력기구를 파괴해야만, 억압받는 계급이 해방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8) 이는 억압받는 계급이 자신을 억압하는 계급에 맞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자신 스스로의 권위를 창조해야 하는 혁명과정을 포함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이 점을 명쾌하게 언급했다. 


혁명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권위적인 것에 틀림없다. 혁명은 전체 인구 가운데 하나의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 총검, 대포 등의 강제력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행동이다. …… 그리고 만약 승리한 당이 그 투쟁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자신들의 무기가 불러일으키는 반-혁명세력 안에 있는 두려움을 통해 통치규율을 유지해야 한다.9) 


그러나 맑스주의 국가론은 국가 권위를 찬양하는 찬송가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노동계급이 승리한 다음에, 코뮤니즘 하에서 계급들이 마침내 사라지는 과정은 국가가 “소멸되는 과정”과 함께 이루어 질 것임을 보여준다. 일단은 국가라는 억압적 기구가 사라진 뒤에야  “오직 그런 다음에야 진정한 뜻에서 자유”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0)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혁명과 무계급 사회 사이에는 이행기간이 있어야 한다. 그 이행기 동안에는, 


억압은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착취 받던 다수가 착취하던 소수를 억압하는 것이다. …… ‘국가’도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 이 국가는 더 이상 문자 그대로 통상적 뜻에서 국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 임금노예였던 많은 사람들이 한 줌에 지나지 않는 착취자들을 억압하는 것은 비교적 너무나 쉽고 단순하며,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압과정은 지난날 노예, 농노, 임금 노동자의 봉기를 탄압한 것보다 훨씬 적은 피를 흘릴 것이고 또한 사람들을 거의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특수한 억압기구의 필요성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민에게로 민주주의가 확장되는 과정과 나란히 설 수 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결론 맺는다. 


민중은 아주 단순한 ‘기구’를 가지고서 …… 즉 (노동자, 병사 위원회의 소비에트와 같이) 민중의 단순한 무장조직으로도 …… 착취자를 억압할 수 있을 것이다.11) 


이러한 논지에서 볼 때,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1920년대 뒤에 자라났고, 소수의 국가 관료들이 다수 민중을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체제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 또렷해진다. 레닌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헌법의 족쇄들도 아니었고, 스탈린이 계속해서 소비에트라고 말했듯이 통치 체제가 스스로 붙였던 명칭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피착취 계급이 착취계급을 지배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즉 임금 노예들이 자본가들을 통제할 수 있는지 또는 통제할 수 없는지 여부였다. 스탈린이 지배한 러시아에서 국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게 아니라, 서구와 마찬가지로 자본축적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하는 소수 지배 계급에 복무했다. 이것이 스탈린 시대가 지난 다음 러시아가 “국가 자본주의”라고 지칭되는 이유이다. 그 국가는 레닌이『국가와 혁명』에서 기술했던 노동계급의 독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12) 


안타깝게도 레닌은『국가와 혁명』에서 자신의 주장을 좀 더 심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 소책자는 앞으로 이어질 소비에트에 대한 분석을 암시하는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라는 표제에서 갑자기 끊긴다. 그러나 레닌이 언급하고 있듯이, “‘혁명을 경험하는’ 일은 혁명에 대해 쓰는 것보다 훨씬 즐겁고 쓸모 있는 일이다.”13) 그 다음에 나온 책에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맑스주의 국가이론에 실제적으로 이바지한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그는 1917년에 출현했던 소비에트 공화국을 다음과 같이 바라보았다.


국가가 소멸될 때까지 과도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 ……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은 착취 받는 대중에게 기껏해야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 자유를 입법화함으로써 그들의 조직을 용인해줄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은 피착취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조직화하는 과정에 무수히 많은 장애물을 설치해 놓으며 나아가 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깊은 관련이 있는 또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보호하는 무수한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없게 한다. 역사에서 처음으로 소비에트 권력은 대중조직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 그 조직을 전체 국가기구의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토대로 만들었다…….


소비에트 유형의 국가에서는 노동자 대중들이 국가와 행정부에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좀 더 높게 영향력(좀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을 미칠 수 있다. 그 증대된 영향력은 먼저 선거절차를 개선하고 빈도수를 늘리는 것을 통해, 그리고 대표자들을 다시 뽑을 수 있고 소환할 수 있는 조건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고 …… 그 다음으로는 지난날처럼 지역을 선거단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산업단위(공장)를 기초선거단위로 설정함함으로써, 공장을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국가구조의 바탕으로 삼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자본주의 때문에 단결하고 진보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들과 국가기구 사이에 밀접한 상호결합 과정은, 좀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착취 받는 민중들과 밀접히 연계된 노동자, 농민의 군대를 창출함으로서 한층 더 심층적인 사회주의적 변혁들을 달성할 수 있게 할 것이다.14) 


이전의 모든 국가는 한 줌에 지나지 않는 착취계급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하려고 발명되었다. 반면 소비에트라는 국가유형은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피착취 계급의 밑바탕을 이루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소비에트와 이에 체화된 직접 민주주의는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맑스가 파리 꼬뮌의 시기에 지적했듯이, “노동자 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장치를 장악하여 그 국가장치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없다.”15) 새로운 장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존의 국가는, 그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자본주의의 이해를 체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갖고 있는 외적 모습이 나라마다 다를지라도, 그 공통점은 부르주아 지배의 기반, 즉 생산수단(공장과 사무실)과 사회의 물리력(군대, 경찰, 감옥) 모두를 관리하면서, 그러한 기반에서 노동자 대중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된 부를 독점적으로 유용하며 관리자의 감시와 실업의 공포 등을 통해 노동력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규율하고 협박한다. 또한 자본가가 독점한 부는 두 번째 방어선, 즉 국가라는 물리력을 형성하는 무기들과 인원을 사들이고 (전열을) 갖추기 위해 사용된다. 


자본가가 이러한 두 가지 과제(생산영역에서 노동력 규율과 국가영역에서 강제력 구축)를 해내는 형태와 방식에서 피상적인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리력을 폭넓게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1930년대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스트 독재나 또는 오늘날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국가 자본주의에서 스탈린주의 일당독재에서 시작하여, 시장의 채찍 또는 노동조합 관료들의 협조가 늘 충만해있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권과 다른 정치 권리들은 다수의 근로인민에게 권력을 제공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자본가 계급의 절대적 권력을 더 크게 만들 뿐이다. 이에 대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높게 발전하면 할수록, 부르주아 의회는 주식 거래소와 은행가들에게 더욱 더 종속된다. ……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국가조차도, 억압받는 인민은 순간마다 자본주의의 ‘민주주의’가 선포한 형식적 평등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임금노예로 전락하도록 하는 몇 천 가지의 실질적 한계와 속임수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마주치게 된다.16)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때, 그 지배의 형태는 유연할 수 있다. 외견상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지배방식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 계급에게는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자본주의를 뒤엎으려고 노동 계급도 중앙 집중화된 국가 권위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노동 계급은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또 다른 사안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맑스가 언급했듯이, “노동 계급의 해방은 노동 계급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이것은 도덕적 원칙에 대한 선언이 아니다. 자본가들의 거대하며 집중된 경제적, 정치적인 힘을 뒤엎으려면 노동 계급 대다수의 직접적이며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대중 참여는 계급을 위해서 활동하는 소규모 관료 집단을 통해 성취될 수는 없으며, 다만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려고 스스로를 조직하는 대중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그러한 조직은 할 수 있는 한 대중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관료제도 최소화시켜야 한다. 이 조직은 또한 자유롭게 형성되어야 하고, 다수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철저하게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노동자들에게 그저 추가적인 선택사항이 아님에 틀림없다. 그것은 노동자 국가의 건설에서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실질적 민주주의가 없다면, 그러한 국가조직은 대중의 역량을 동원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중앙 집중화된 권위가 없다면, 노동자들은 자본의 저항을 돌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와 독재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것이다. 노동자의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독재는 평의회 국가, 즉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구체화된다. 생산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대의원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평의회 국가의 대의원들은 공장과 사무실에 있는 노동자들의 직접적 통제를 받게 된다. 그와 함께 평의회와 소비에트는 계급의 집단적인 힘을 지배를 위한 무기로 통일시킨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개별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부의 집합적 생산자로서만 사회적인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생산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힘을 집중시키며 나아가 국가 권력의 정점에 오를 것을 요구받는다. 


소비에트는 모든 점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에서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있다. 선거는 단지 몇 년마다 한번 씩 일어난다. 지역에 자리를 잡은 선거구 투표는 공장선거와는 달리, 노동자에게 어떠한 실질적인 이점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공장선거의 경우에 대표자들은 그들을 뽑아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났을 때, 언제나 감사를 받고 소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 현장보다는 거주지에 바탕을 둔 선거에서는 노동자가 집합적인 정치적 토론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표자들은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대중 매체의 내용들에 더 민감해지고 계급의 구성원으로서보다는 고립된 가족의 개인들로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선거 결과와 부르주아 의회 구성이 어떻게 되는 간에 주요한 의사결정들은 늘 자본가의 경제적 이해를 통해 이루어지며 더욱이 선출직이 아닌 사람들, 즉 공무원들, 판사들, 경찰서장들의 처분에 따라 결정된다.


위선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소비에트는 맑스나 레닌이 만든 것이 아니라, 1905년 러시아에서 처음 나타났던 노동자 자신들의 투쟁들에서 직접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1905년


1905년 혁명은 그때 러시아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시위를 하던 대중에게 군대가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대중의 행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형성되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10월 13일부터 시작하여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던 12월 3일까지 50일 동안 유지되었다. 트로츠키에 의하면, 그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모든 사건의 중심축으로서, 모든 운동노선들이 소비에트로 향했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지침이 그것에서부터 퍼져 나왔다.”17)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처음에 대표자들이 정치 총파업을 조직하려는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소비에트는 원래 러시아 사회민주당 멘셰비키 분파를 통해 제기되었던 것이고, 대중 조직화를 위한 노동자들의 자발적 요구를 통해 발생한 것이었다. 3일 만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공장 노동자들 500명 당 한 명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226명의 대표자들을 집결시켰다. 이 시기에 러시아에는 조직화된 노동조합은 전혀 없었고, 좌익 정당들도 겨우 몇몇 노동자만을 조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조직도 경찰의 감시 때문에 엄격하게 제약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그때 소비에트가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명실상부한 대중조직이었다는 점을 뜻한다. 트로츠키도 쓰고 있듯이, 소비에트의 자생적인 대중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다. 


객관적인 필요성, 즉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필요성에 따른 산물인 소비에트. 소비에트는 권위 있는 조직이었지만, 아직 정착된 전통이 없었고, 실질적으로 어떤 조직적 기구도 가지지 않은 채 흩어져 있는 몇 십만 명의 민중들을 즉시 포괄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있는 혁명적인 흐름을 통일시켰다. 그리고 소비에트는 독창적이고 자발적인 자기 통제를 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가 24시간 만에 생산현장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18)


처음부터 소비에트는 목적의식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보여주었다. 소비에트는 첫 선언에서 “전 세계 노동 운동의 결정적이고 강력한 무기, 즉 총파업을”19)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 총파업이 일어났고 일주일 동안 도시를 마비시켰다. 총파업이 끝나자마자, 노동자들은 1일 8시간 노동제를 자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는 그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했으나 다만 부분적인 승리만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투쟁에서 얻은 공장수준에서 이루어진 현장투쟁과 국가권력 장악투쟁 사이에 있는 밀접한 연관들은 캠페인 속에서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한 소비에트 연설가는 “ ‘8시간 노동제와 총!’이라는 슬로건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모든 노동자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20)고 말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전쟁법이 공표되고 페테르부르크 인근의 크론슈타트(Kronstadt) 해군기지에서 항명자(mutineer)들이 사형 집행되어 대중운동이 위협받았을 때, 대중은 자신들의 개별적인 이해관계를 넘어 총체적 쟁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1월 초에 몇 십만 명이 소비에트의 지도를 받아 다시 한 번 총파업을 일으켰다.


이러한 투쟁이 이루어지는 동안 소비에트는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군대도 무장력도 규모에서 보잘 것 없었다. 곧 차르 정부는 자신감을 되찾았고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체포했으며, 소비에트 조직을 무너뜨렸다. 그 시기에 모스크바에서 일어났던 봉기는 진압되었다. 곧바로 러시아는 암울한 반동의 시기로 들어갔다. 


1905년 소비에트는 러시아 자체의 역사에서도 독특한 것이었다. 이 시기 전까지는 사회민주당에서 분리되어 있으며 아울러 전열을 갖춘 노동자 조직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within the proletariat)” 조직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좀 더 선진적인 부분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소비에트는 그 모두를 포함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of the prolerariat)” 조직이었다.21) 이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당은 자발적인 조직이다. 개인들이 거기에 가입하는 이유는 당의 정치적 지향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혁명적 노동자당이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에 알맞는 세계관을 통해 지도될지라도, 혁명 이전에 당은 자신의 지향점을 공유하는 소수만을 가입시킨다. 1905년의 소비에트는 그람시가 “자생적” 노동자들의 조직이라 한 것처럼 비-자발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소비에트는 개량주의자이건 혁명주의자이건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집합적 단위들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레닌은 1905년 뒤에는 당과 소비에트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아울러 이러한 노동자의 두 가지 조직형태 모두를 중요하다고 보았다. 즉 “노동자들의 대표체인 소비에트를 선택할 것인가 당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질문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한 답변은 노동자들의 대표체인 소비에트와 당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이어야 한다.”22) 레닌도 소비에트의 한계들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다. 소비에트는 노동 계급의 의지를 조직하고 반영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은 혁명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의 계급 이해에 대해 명확한 목적의식성을 획득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 계급과 다르다. 자본가 계급은 봉건제도를 타도할 즈음에 이미 자신들의 부를 수단으로 하여 (자유도시들, 대학들 등등을 통해) 독자적인 자신만의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확보했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부르주아 혁명은 이전 봉건시대의 틈새 속에서 자본주의가 건설되어 왔던 매우 오랜 과정을 마무리 짓는 행동이었다. 


자본가 계급과 달리, 노동자 계급은 착취의 직접적인 대상이다. 노동자 계급은 독립적인 부와 문화를 박탈당하며, 매체, 교육, 상품생산 그 자체를 통해 지배계급의 독점적 이데올로기에 실질적으로 종속된다. 대중은 혁명 시기에 최고점에 이르게 되는 자기활동(self-activity) 때문에 스스로를 바꾸면서 그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을 얻어야 한다. 그러한 시기가 도달해야 만이, 민주주의 기관으로서 소비에트는 대중의 의식변화를 반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도 소비에트는 대다수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대중을 지도하거나 이끌 수는 없다. 


지도성은 혁명에 참여하여 앞서서 최종적인 목표를 인식하고, 그 목표를 향해 노동자들을 이끌 전략을 줄 수 있는 조직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한 조직은 바로 당이다. 이러한 구별을 염두에 두면서 레닌은 이렇게 썼다. “소비에트와 그것과 비슷한 대중조직들은 그 단어의 엄밀한 뜻에서 볼 때, 투쟁의 역량을 즉각적으로 조직하거나, 봉기를 조직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23) 


1905년 혁명의 실패는 소비에트를 역사의 뒤편으로 밀어 넣었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17년 2월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는 농업이 경제의 중요한 부문을 차지한 사회였다. 그때 전체 인구 1억 2천만 명 가운데 단지 1천만 여 명만이 노동계급이었다. 그러나 1917년에 이르러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명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는 발전된 자본주의의 모든 특성을 극단적인 형태로 지니고 있었다. 튜린이나 베를린처럼 페트로그라드는 거대한 산업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1890년과 1914년 사이에 공장 노동자의 숫자는 세 배로 늘어, 그 수가 243,000여 명에 이르렀다. 1차 대전 시기에는 150,000여 명이 더 추가되어 1917년 이 도시에는 러시아 노동 계급의 1/8이 거주하게 되었다.24) 신규 노동자 대부분은 그때 성장하고 있던 군수산업 부문에 채용되었다. 3년 동안 금속 노동자의 숫자는 135%까지 증가했다.25)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가운데 2/3이 금속산업 부문에서 일했기 때문에, 글래스고우(Glasgow)나 베를린처럼 금속산업 노동자들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유럽 도시들처럼 소수의 거대한 회사들이 산업을 통제했고, 그 회사들은 몇 천 명의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밀집시켰다. 1917년에 페트로그라드는 2,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38개의 주요 공장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베를린조차도 앞서고 있었다.26)


이들 공장들 내에는 수많은 숙련공들이 있었으나 서유럽과는 달리 러시아 숙련공들은 어떠한 분파적인 직종별 노동조합 조직을 가질 수 없었다. 이것은 서구 유럽의 주목할 만한 특징인 숙련 노동귀족과 반-숙련 또는 비숙련노동자들 사이의 심원한 간극이 페트로그라드에서는 거의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27)  


1914년 온 유럽을 삼켜 버렸던 애국주의적 광란의 물결은 러시아에서는 매우 빨리 사라졌다. 인플레이션의 요동이 거세지자, 잠시 잠잠했던 파업의 물결이 1914년 들어 거세게 재등장했다. 그 선두에 페트로그라드가 섰으며, 페트로그라드는 러시아 전체의 정치적 파업 가운데 72%를 차지했다. 통계적으로 볼 때 처음부터 정치적 쟁점들을 둘러싼 파업들이 경제적인 분쟁들보다 훨씬 많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28)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서 즉자적 이익을 위한 경제적 투쟁들과 정치적 투쟁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알기 시작한 운동세력이 있었다는 확고한 증거는 1915년에 그들이 볼셰비키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Russian Social Democratic and  Labour Party)에서 떨어져 나와 1903년에 설립되었다.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는 가장 용맹스러웠던 현장 투쟁성에 더하여 높은 수준의 혁명적 사회주의적 원칙들을 결합시켰다. 전쟁 기간 동안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패배가 노동자들에게는 득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비록 볼셰비키의 한 극단인 국제주의적 관점이 있었지만, 이들은 차르 정부가 군수품 생산을 촉진하려고 세운 전시산업위원회(War Industry Committees)의 1915년 선거에서 다수파가 되었다. 1903년 사회민주주의노동당이 분리되면서 생긴 또 다른 당은 멘셰비키였다. 그들은 러시아 노동계급 안에서 주로 개량주의적 경향을 대변했고, 멘셰비키의 많은 지도자들은 전쟁을 지지했다. 


짜리즘은 1917년 2월 혁명으로 결국 붕괴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다음의 두 가지 직접적인 원인에서 나왔다. 하나는 페트로그라드의 푸틸로프(Putilov) 공장 노동자들의 학살(victimisation)에 대항했던 파업이다. 다른 하나는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외쳤던 빵을 달라는 요구였다. 2월 23일 거리시위들은 군대와 대치하기에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많은 군인들이 노동자의 편으로 넘어왔다. 5일 뒤에 차르 체제는 붕괴되었고, 두개의 새로운 권력들이 창출되었다. 즉 임시정부(러시아 자본주의를 대변하고, 과거의 국가유산을 계승함)와 소비에트가 그것이었다. 


비록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 27일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2월 혁명이 시작될 때부터 소비에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몇 대표자들은 2월 24일에 곧바로 선출되기도 했다.29) 얄궂게도 2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감옥에서 풀려난 멘셰비키가 이러한 노동자의 노력을 집중시킨 최초의 조치, 즉 소비에트를 조직했다.30) 멘셰비키는 1,000명의 노동자 당 한명의 대표자를, 군인 한 중대 당 한명의 대표자를 뽑는 것을 기초로 한 선거를 요청했다. 일주일 내에 약 1,200명의 대표자들이 날마다 열린 회의에서 만났다. 


소비에트는 어떠한 질서정연한 구조적 틀 거리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었다. 소비에트의 첫 모임을 목격했던 수하노프(Sukhanov)에 따르면, 그때 소비에트 의장은, 


행동을 위한 총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회의가 왁자지껄하면서, 아주 혼란스럽게 진행되며 회의 자체를 통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는 결코 소비에트가 첫 회의에서 자신의 기본적인 과제, 즉 혁명의 사활이 걸린 과제인 페테르부르크 민주주의의 모든 이념적, 조직적 힘을 하나의 중심으로 집중시키는 일 을 방해하지 않았다. 소비에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신속하게 결단력 있는 행동을 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31)   


1905년에 소비에트가 필요로 한 핵심적인 요소는 군의 지지였다. 하지만 1917년 2월은 그렇지 않았다. 


의자 위에 서있는 군인대표자들은 손에 소총을 지니고 있었고, 흥분되고, 무언가를 더듬거리며 말하면서도, 그들 각자에게 부과된 연설메시지를 전달시키려고 온 힘을 다했으며…… 군인 대표자들은 번갈아가며 자신의 중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말했다. …… 


혁명에 착수했던 위대한 각 연대의 이름들이 호명될 때마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우리는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의무적으로 말을 하도록 했다.……’ ‘장교들은 숨었다.……’ ‘노동자평의회에 참여할 것……’ ‘우리모임에서는 우리가 더 이상 민중을 억압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거부하자는 의지를 소비에트 당신들에게 전달하도록 결의했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형제들과 함께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민중의 대의를 방어하기 위해서 뭉쳤다. …… 우리는 이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것이다.’ ‘우리 모임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당신을 환영한다는 것을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혁명이여 영원하소서!’ 군인 대표자들의 외침은 모임의 격정적인 시끌벅적함에 묻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32)   


7백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 군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차르를 거부하게 될 것인지 여전히 불투명했던 때에, 이러한 물리적 힘의 결합은 소비에트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일이었다. 


몇 시간 안에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위원회의 소비에트는 과감하게 1905년의 한계를 넘어서 지배계급을 억압할 수 있는 권력, 즉 국가의 성격을 획득했다. 1905년에 만들어진 소비에트는 주로 정치적 총파업을 이끌던 위원회의 성격을 지녔다. 트로츠키가 설명했듯이, 그때에는 “파업이 지닌 혁명적 힘은 그것이 국가권력을 해체한다는 …… 사실에 있었다.”33) 1917년에 세워진 소비에트는 지배계급을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피지배계급 자신의 국가권력을 조직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는 단지 페트로그라드에서 나타난 게 아니라, 러시아 전역을 가로지르는 현상이었다. 3월 17일까지 49개 도시들에서 소비에트가 구성되었다. 5일 뒤에는 그 숫자가 77개가 되었으며, 6월에 이르러서는 519개가 되었다.34)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탄생 직후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통제력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적법한 국가권위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임시정부가 있었다. 3월 22일 전쟁 장관인 구추코프(Guchkov)는 그때의 전체 정치지형에서 임시정부가 지닌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임시정부는 어떠한 실질적인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명령은 단지 군대, 철도, 우편과 전보설비와 같이 권력의 핵심적인 구성요소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승인해 주는 한에 있어서만 실행될 뿐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임시정부는 그것이 오로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승인해주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35)


이러한 확고한 정치권력 지형이 있었지만, 맑스주의자는 2월에서 10월 사이에 있었던 상황을 ‘이중권력’의 한 유형으로 보았다. 트로츠키는 이중권력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혁명의 정치적 메커니즘은 하나의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권력이 이동함으로서 이루어진다. 강렬한 전복은 보통 짧은 시간에도 달성된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적 계급도 하룻밤 사이에 종속적인 위치에서 지배자의 위치로 자신을 상승시키지 못한다. 심지어 혁명의 밤일지라도 말이다. …… 역사적으로 혁명의 준비기간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발생시킨다. …… 새로운 사회체제를 실현하도록 요청받은 계급이 아직 국가의 지배자는 아닐지라도 국가권력의 중요한 부분을 자신의 수중에 실질적으로 집중시켜 나간다. 그와 함께 그러는 동안에도 국가 내 공공기관들은 여전히 이전 지배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이것이 모든 혁명과정에서 나타나는 초기의 이중권력상태이다.36) 


2월에 노동자들은 빵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군대에 도전해야 하며, 병사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소비에트에 결합시킬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러나 빵을 위해 효과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곧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고 의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일반적 의지가 있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지어 혁명의 시기에도 “죽은 세대의 낡은 전통이 살아있는 자들의 두뇌를 악몽처럼 내리 누르고 있었다.” 2월 시기에도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들은 소비에트를 통해 권력의 독점적 쟁취를 추구하지는 않았으며, 과거의 국가잔재를 일소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본가들에게도 자신들의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때 ‘이중권력’ 상태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개된 일시적인 힘의 균형 상태였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중권력은 혁명과 더불어 대중 활동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낳았다. 


권력을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이전시키려면 국가의 강제력이라는 외피(이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방어하고 영속화시킴)를 파괴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혁명은 단순히 국가를 변화시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에도 분명히 국가권력의 극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단순히 자본주의적 지배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바꾸었을 뿐, 계급권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데 실패한 많은 사례(1945년 뒤 동유럽과 1948년의 중요한 사례를 보라)들이 있다. 사회혁명은 사회의 근본적 토대, 즉 생산에서 권력관계를 관통해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상황은 2월 혁명 뒤에 일어났다. 차르는 사라졌지만, 혁명은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들, 즉 전쟁, 농민들의 토지소유욕구, 공장에서 자본주의의 야만적 지배를 해결하는데 실패했다. 노동자 계급의 주도 하에, 대중은 이러한 쟁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들을 즉각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비록 서로 다른 접근법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중 스스로 조직하는 일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여성 노동자와 같은 주요 집단은 자신의 행동을 직접적이지만 탈-중심화된 투쟁을 통해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선전 선동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잘 조직된 집단들에서 나타나는 고질적인 보수적 경향(conservatism)도 없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심지어 볼셰비키와 같은 혁명가들조차도 처음에는 주저하고 있을 때, 차르에 맞서서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운동이 형성되고, 운동에 일관된 형식이 부여되고 있는 시기에 여성들은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활동성(self-activity)의 중심으로 행동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문들 사이에 있는 일정한 불균등성도 보여줬다. 



대중은 집단을 이루어 사회주의자로 전향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소비에트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노동자들 그리고 후방의 거대한 주둔지에 있던 군인들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와 그 사무국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도시의 다양한 소규모 인민들 -기계공, 노점상, 하급 공무원, 택시 운전사, 수위, 모든 종류의 고용된 자들- 은 더욱 가깝고, 더욱 접근 가능한 권위를 찾고 있었다.


고통 받고 있던 대중 모두가 소비에트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즉 그 모두가 한꺼번에 자각했던 것이 아니었고, 억압받던 자의 모든 계층이 대담하고 즉각적으로 혁명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던 것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의 의식 속에는 다만 혼재된 희망만이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의 모든 활동적인 요소들은 소비에트로 흘러 들어갔으며, 활동성은 혁명의 기간 동안에 퍼져나갔다. …… 이것만이 혁명의 유일한 참된 토대였다.37)


소비에트가 무장된 병력을 통해 보호받게 되자, 대중조직들이 광범위한 영역에서  나타났다. (지역적 수준에서 중앙 소비에트의 일들을 수행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중앙 소비에트의 권위에 도전하기도 했던) 지역 소비에트, 노동조합, 다양한 의용군, 다양한 위원회 -군사 위원회, 농민 위원회, 공장 위원회, 주택 위원회, 대기행렬들(queses)을 줄이고 관리하기 위한 위원회- 등,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대중들의 창조적인 재능이 해방되었다.


아무래도 이러한 대중조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집단은 혁명의 중심에 서서 사회적 힘을 이끄는 노동계급이었다. 왜냐하면 대중 가운데 다른 집단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내적 단결력이나 생산과정에서 점하는 위치로 핵심적인 역할은 산업 노동계급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집합적인 기구는 공장위원회였다. 공장위원회는 각 공장들에서 열린 대중회합을 통해 선출되었다. 그들은 가끔 다른 부문에서 선출된 현장위원(shop stewards)으로 보충되거나 대체되었다. 


 20세기 초에 조직화를 위한 첫 노력들에서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를 떠받치고 있던 현장조직을 위한 실천이 시작되었다. 끊임없이 억압받았지만, 현장조직은 틈만 나면 늘 표면 위로 다시 떠오르곤 했다. 러시아의 현장 조직화는 영국에서 볼 수 있었던 경향, 즉 협소하게 정의된 직종별 분파적 조직에서 전개되었던 조직화와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장조직화 경향성은 많은 산업을 성장시켰던 대량생산이라는 조건들을 나타내고 있다. 1905년의 경험이 “8시간 노동제와 총!”이라는 슬로건 속에서 정치와 경제를 결합시켰듯이, 국가의 구체제에 맞선 1917년의 소비에트의 공세는 공장에서 자본에 대한 직접적 공세와 나란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두 번째 전선(공장에서 자본에 대한 직접적 공세)의 적절한 사례는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진 케레스텐(Keresten) 공장에서 뜨개질 노동자들이 제기했던 요구목록이다. 


1) ‘그의 취임에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고’, ‘그가 노동자들을 야만적인 방식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뜨개질 부서장(長)은 곧바로 해임될 것. 

2)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즉각 도입하고, 임금 수준에 대한 정밀조사에 근거해 총임금을 50%까지 상승시킬 것. 

3) 혁명 기간 동안에 대한 임금을 지급할 것.

4) 임금이 2주마다 지급되도록 할 것.

5) 불량품은 노동자들에게 한정된 가격으로 판매할 것.

6) 초과노동은 자발적이게 하며 1.5배의 임금을 지급할 것.   

7) 공장장이나 관리자 대표의 허락 없이도, 참석 없이도,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이러한 요구들은 그때에 가장 일반적인 요구들로, 모임을 가질 권리라는 단순한 요구에서 가장 진보된 권리, 즉 경영할 사람을 결정할 권리와 혁명적 파업동안에 임금을 받을 권리까지 담고 있다. 


노동자들은 제일 먼저 과거의 공장 관리자(administration)를 제거하는 일을 했다. 푸틸로프 공장에서는 감독관들과 그 측근들이 실제로 살해당했고, 그와 함께 또 다른 40명의 관리자는 쫓겨났다.38) 3월에 공통되게 목격되던 광경은 특별히 미움을 받고 있었던 고용주와 공장 감독관이 작업수레에 실려 생산 현장 밖으로 ‘퇴출’당한 것이었다. 임금 문제도 공장위원회의 핵심적인 관심사였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는 7월까지 달마다 적어도 평균소득의 두 배를 받을 수 있었다. 


2월 혁명 때문에 경찰력은 무너졌고, 혁명 측은 약 4만정의 소총과 권총을 얻었다.39) 두 개의 의용군이 경찰력을 대신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시민의용군이다. 이들은 대체로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다른 하나는 주로 공장단위를 바탕으로 삼아 결성된 노동자 의용군이었다. 페트로그라드 전선 공장을 보기로 들자면, 천명의 노동자 당 100명의 자원병들이 소집되었다.40) 노동자 의용군에 대한 임금은 고용주들에게서 징수되었고 노동자 의용군의 지원자들은 순번제로 활동했다. 그리하여 대중의 외부에서, 대중에 반하여 조직되었던 낡은 경찰력 구성방식은 결정적으로 해체되었다. 


공장위원회의 대표자들은 외견상으로는 지엽적인 문제들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보통 당 노선에 기초하여 선출되었다. 이러한 점은 대부분 노동자 계급이 지녔던 심오한 정치적 성격을 반영한다. 소비에트처럼 공장위원회도 처음에는 개량주의자들, 즉 농민대중의 지원을 받으며 일부 노동자들의 동조를 받았던 당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s)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공장위원회 지도자들도 소비에트의 핵심에 있었던 개량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단지 비민주적인 차르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그들이 지닌 우선적인 목표는 생산과 분배와 관련하여 “노동자 통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종의 이중권력을 수립하는데 있었다. 임시정부가 해내는 일을 조사하고 감독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던 소비에트처럼, 공장위원회는 공장 경영에 대한 감시를 지속하려 했다. 그러나 작업현장에서 세워진 이중권력은 국가적 수준에서 이중권력 만큼 안정적이지 못했다. 


국영기업에 대한 경영권이 맨 먼저 대체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국영기업의 경영권이 차르 체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산을 중단하고, 사업장을 폐쇄하려고 한 민간부문 자본가들도 대체되기 시작했다. 현장노동자들은 2월 혁명 뒤에 만들어진 대중조직 가운데 지역 소비에트나 중앙 소비에트보다는 공장위원회에 가장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대개 지역 소비에트나 중앙 소비에트에서는 상대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제복을 입은 농민들’, 즉 군대가 더욱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장위원회는 계급적 분위기의 많은 변화들을 가장 먼저 드러내었다. 


노동조합도 2월 혁명 뒤에 놀랄 만큼 성장했다. 혁명 전 페트로그라드에는 14개의 작고 영향력 없는 노동조합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11개가 불법 노동조합이었다. 그러나 6개월 동안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가운데 약 390,000 명이 여러 가지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이 때문에 이 도시는 전 세계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이 가장 높은 도시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41) 노동조합도 다른 노동 계급의 대중조직처럼 혁명이 끝난 다음에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지배를 받았다.


많은 대중조직은 다양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민중의 긴급한 요구를 반영하면서 서로 결합되어 나갔다. 소비에트는 완전한 국가권력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노동자와 농민, 병사의 다양하고 즉자적인 투쟁이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나 연대 단위의 군대위원회와 같은 부문 조직들로 구성된, 분절적인 조직형태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소비에트가 이러한 부문조직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정치적 자유의 공간을 지탱해 주지 않았다면, 이러한 부문조직들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비에트에서 정치  


당원 자격은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 같은 대중 조직들보다 더욱 엄격했다. 해당 도시나 공장의 노동자 모두를 통합시켜낼 수 있었던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와 같은 대중조직들과는 달리, 당은 동질적인 정치적 이념들을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그러한 집단만을 포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치지향적인 당 조직은 대중조직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할 수 없었던 의식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닐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 점은 당이 출발할 때부터 명백한 것이었다. 


1917년 2월부터 8월까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연합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들은 주로 관료주의적으로 일처리를 했지만, 초기 소비에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지닌 생각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동안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 총회에서 2,800명 대표자 대부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주요한 반대 세력이었던 볼셰비키는 겨우 65명의 대표자들에게만 지지를 받았다.42) 


멘셰비키-사회혁명당의 프로그램은 노동 계급이 권력을 쟁취할 수는 없으며, 임시정부로 대표되었던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차르 체제를 대신할 것이라는 견해를 골자로 하고 있었다. 멘셰비키인 체레텔리(Tseretelli)는 망명지 이르쿠츠(Irkutsk)에서 돌아와 소비에트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멘셰비키-사회혁명당의 프로그램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말할 것도 없이 당신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타협한다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를 논쟁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 말고는 혁명을 위한 다른 경로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임시] 정부는 우리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재앙을 뜻하게 될 것이다.43)


이러한 정치적 견해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임시정부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많은 부분에서 축소하도록 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내린 ‘모든 소비에트에 대한 지침’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전 러시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생각되어야만 한다. 임시정부가 내린 모든 결정사항은, 소비에트의 이의제기가 없다면, 수행되어야만 한다. 그들이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유의 근원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모든 임시정부의 기관들과 위원은 합법적인 권위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44)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민주적인 문구들로 자신의 프로그램을 위장하려 했다. 보기를 들면, 그들은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제헌의회(Consituent Assembly)만이 러시아 민중을 대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소비에트는 제헌의회가 기껏해야 소수의 사람들만을 대표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의 정책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에게로 몇 백만 명의 노동 계급과 농민 계급을 종속시키겠다는 것을 뜻했다. 또한 각 시기마다 좌파적 문구들로 자신을 숨기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프로그램 대부분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기를 들어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전쟁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지지했지만, 평화협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소비에트는 자본주의의 유지를 지지했지만, 자본가들에게 그들의 노동자를 친절하게 대하라고 촉구했다. 농민대중을 바탕으로 삼았던 사회혁명당은 겉으로는 농민의 토지 소유를 지지하면서 곧 실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토지에 대한 농민의 직접적인 점거를 반대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좌우했던 이들의 일반적인 정책들은 끊임없이 소비에트가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인민들의 직접적인 요구들과 부딪혔다. 이것의 분명한 사례는 그 유명한 ‘명령 1호’였다. 이 명령은 군대에 관련된 것으로, 모든 부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위원선출, 소비에트의 권위에 맞서는 어떠한 지시도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 병사 위원회의 손아귀로 무기를 통제해야 한다는 점을 포함해 모두 7개의 사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데니킨(Denikin) 장군에 따르면, 이러한 단순한 조치들만으로도 “낡은 군대의 해체과정에 처음이자 가장 주요한 영향을 주었다.”45) 여기서 그가 말하는 낡은 군대는 절대 권력을 쥐고 있던 상류 계급의 소수 장교집단을 뜻했다. 이제 낡은 군대는 대중과 그들의 대표 조직을 위하는 새로운 군대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병사대표들 사이에서 나타난 미묘한 의견 차이는 차르 편에 있던 장교계급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 때문에 통일될 수 있었다. 병사대표들은 소비에트 지도부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집행위원회를 점거하여 집행위원들이 ‘명령 1호’를 쓰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한 역사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듯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 문서에 대해 아주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집행위원회는 소비에트로 반란자들의 지지가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지지가 불가피하게 ‘소비에트가 권력을 획득하라’는 요구로 나아가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병사들이 느끼던 강렬한 분노와 두려움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병사들이 장교들에 대한 광범위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46) 


이와 같은 소비에트 안에서 지도부와 일반 대중 사이에서 생긴 의견충돌은 하루 8시간 노동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을 때 좀 더 분명해 졌다. 많은 노동자들은 혁명을 촉발시킨 총파업이 차르를 처단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노동일 단축이 수용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멘셰비키 의장이었던 치크헤이제(Chkheidze)는 군수산업에서 작업혼란이 곧 끝나기를 원했다. 3월 7일까지 업무에 복귀할 것을 요구하는 그의 안건이 소비에트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그 결정사항은 일반대중의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공장 소유주 단체는 복귀가 명시된 날에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공장이 111개 공장 가운데 28개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7) 마침내 소비에트 지도부는 또다시 인민의 요구에 응답하라는 외적인 압력에 굴복하여, 3월 10일에 고용주와 8시간 노동제를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명령 1호’의 통과 과정과 노동시간 단축 운동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대중 사이에 놓인 정서적 간극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간극이 벌어지는 현상은 집행위원회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지도하에서 활동할 때마다 나타났다. 집행위원회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수하노프는 그 뒤에 소비에트의 전체 회기 동안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은 채, 우리 일에만 집중했다.”고 썼다.48)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노동자 대표들과 병사 대표들의 첫 모임을 조직해왔던 지식인 집단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임시로 이루었다. 소비에트의 위상은 첫 번째 전체회의를 통해 확고해졌다. 그때 주도적이었던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당이 첫 모임을 통해 공동 추인되자, 집행위원회는 긴급한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12개의 하부위원회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조직을 확대시켰다. 그 다음에 7명으로 이루어진 ‘집행위원회 사무국’이 많은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대중들과 분리된 특정집단이 등장하고 행동하는 것은 소비에트와 같은 민주적인 대중조직들에서 조차도 관료제가 등장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알려주었다. 또 다른 혼란스러운 면도 있었다. 150,000명 병력의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약 2,000 명의 대표들을 소비에트에 파견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그 수가 병사들보다 두 배나 많았지만 단지 8백 명의 대표들만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대표구성에서 이러한 불균형은 노동 계급이 얼마나 병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바랐는가를, 그리고 농민계급과 동맹을 확고히 하고자 했는가를 보여줬다 (왜냐하면 병사들 대부분이 ‘제복 입은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농부 개인들은 산업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집단적인 경험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군대에 징집되기 전까지 그들의 사회적 안목은 경작하던 논밭의 범위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비에트 대표들 가운데 병사들이 우세한 것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정치를 왜곡시켰고 또한 병사들의 보수적인 측면에 소비에트 말고는 다른 방법으로는 가질 수 없었던 강한 목소리를 제공했다. 


공식적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요소들은 소비에트를 비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적인 조직들은 무엇보다도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직이 체화하고 있는 계급적 내용과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권력을 갖지 못한 계급에게는 어떠한 민주주의도 있을 수 없다. 소비에트의 불안정함, 즉 즉흥적인 성격과 대중 속에서 통치경험이 모자랐고 정치적인 이해가 빠졌지만, 소비에트는 아주 면밀한 선거과정을 통해 선출된 의회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었다. ‘명령 1호’와 8시간 노동제의 실시 과정 속에서 대중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물리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 민주주의는 오히려 더 활기를 띠게 된다는 점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는 소비에트 안에서부터 끊임없이 침식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소비에트 지도부가 임시정부의 권력을 보강해주려고 하는 한, 소비에트는 자신의 실질적인 대중 기반을 상실할 위험, 즉 마치 여느 부르주아 의회처럼 민주주의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회 안의 중요한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껍데기, 말만 무성한 곳이 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볼셰비키 당은 소비에트 내부 논쟁에서 좌파적 입장이었지만, 3월 동안에는 참 혼란스러웠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븨이보그(Vyborg)라는 금속노동자 구역에 있는 볼셰비키의 조직이 극좌적 입장, 강력한 반 임시정부 노선을 취했다. 반대로 당의 중앙 기관지 『프라브다』(Pravda)를 장악하고 있던 스탈린과 카메네프(Kamenev)는 다른 정치 정당들에 대해서나 임시정부에 대해 다소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4월에 와서야 망명지에서 돌아온 레닌은 이러한 당 내 불일치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2월 혁명이 별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계급 사이의 협력을 통해 평화로운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에 대해 즉각 단절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함으로서 당을 설득하고 장악했다. 


레닌이 1917년 소비에트를 분석하는 데에서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은 자신이 기존에 주장했던 원칙이라기보다는, 그때 계급이 지닌 역량의 수준에 대한 엄밀한 판단이었다. 그가 ‘이중권력’(Dual Power)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듯이 말이다. 


모든 혁명의 기본적인 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 혁명에 대한 지도는 말할 것도 없고, 혁명에 대한 어떠한 지적인 참여도 할 수 없다.49) 


대안 권력으로 소비에트가 지닌 중요성은 제도적 절차들에 있지 않았다.


이러한 정부(소비에트)의 정치적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혁명적 독재이다. 즉, 혁명적인 장악, 아래로부터 인민의 직접적인 주도성에 바탕을 삼은 권력이지 법률에 바탕을 둔 중앙 집중화된 국가권력이 아니다.50)


4월 테제(April Theses)에서, 레닌은 앞으로 나아가야할 경로를 설명했다. 레닌은 노동자 국가를 세우는 데에서 소비에트를 당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라든지, 반대로 당을 소비에트에 합치는 과정을 통해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목표를 망각한다든지 그 다음 과정에서 소비에트를 무시하려는 경향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나는 4월 테제에서 아주 분명히 산업 노와 농업 노동자 소비에트와 농민과 병사 평의회 안에서 영향력을 획득하려는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나는 테제에서 대중의 실천적인 요구에 부합할 수 있도록 참을성과 끈기 있는 ‘설득(explanatory)’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 블랑키주의는 소수에 의한 권력 장악을 뜻한다. 반면에 소비에트는 명실상부하게 인민 대다수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조직이다. 소비에트 안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 집중시키려는 과제 때문에 (역주: 소비에트 일반 대중이 아니라 오직 소비에트 대표들의 비공식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으로 관심을 좁히는) 블랑키주의라는 함정에 빠져들어도 정말로 안 된다. 그것은 아나키즘의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이행시기에 국가와 국가권력에 대한 필요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51)


레닌은 다음과 같은 점을 뚜렷이 하려고 했다. 즉 볼셰비키 당은 소비에트 내부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자본주의적 지배를 위장하는 뒤범벅된 당의 한 부분으로가 아니라, 대중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권력을 철저히 장악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해 주는 슬로건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이다. 레닌이 주장하는 태도의 명확성은 민주주의 제도와 이에 대한 추상적 요구들로 파생되는 환상에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모든 것을 현실 계급투쟁과정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근거하도록 함으로서, 당이 철저하게 혁명을 급진전시키고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귀중한 지침을 주었다는 점이다.


세 번의 시위


비록 혁명이 대중의 모든 영역에 활기를 불어 넣었지만, 밑바탕에 깔린 사회 세력 사이의 역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세력 사이의 역관계는 다음의 세 가지 정치적 위기들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 위기의 폭발은 사회적 토대에 쌓인 긴장의 결과이자 아울러 앞으로 투쟁과정의 향방을 결정한 것이었다.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 즉 정치적으로 앞서 있던 노동계급의 전위집단과 전투적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에만 집착했던 현장 투사 집단 사이의 상호작용은 ‘4월의 날들’, ‘6월’과 ‘7월의 날들’에 있었던 시위의 배경을 이룬다. 그때 레닌은 이러한 시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세 번의 위기들 모두에서, 운동은 시위의 형태를 취했다. 반정부 시위였다는 점이 그때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공식적인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평범한 시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시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는 했지만, 혁명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혁명과 반혁명이 함께 폭발했던 것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가끔 중간계급의 요소들이 갑작스럽게 제거되고, 프롤레타리아적 요소들과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보였다.52)


4월에 있었던 첫 번째 위기는 임시정부 외무장관인 밀류코프(Miliukov)가 동맹국들에게 현재 진행된 평화에 대한 모든 논의들을 무시해야 한다는 문서를 발행했을 때 발생했다. 그에 따르면, 임시정부의 진정한 의도는 “세계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 것”이라 했다.53) 4월 20일,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대중시위가 거리를 매웠고, 밀류코프의 제국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우익 시위대와 충돌했다. 볼셰비키의 슬로건(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이 노동자 쪽에서 많은 각광을 받았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기관지인 『이즈베스치야』(Izvestia)에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했다. 


소비에트는 자신의 수중으로 권력을 획득하고자 갈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던 현수막들에는 정부 타도 및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시키라는 요구들이 쓰여 있다.54)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임시정부로 권력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대와 마주치지 않고자 했다. 그들은 더 이상의 거리 활동들을 금지한다고 공표했다. 사실상 거리활동 금지라는 공표가 현실화된 것은 대중의 소비에트에 대한 신망과 더불어 볼셰비키가 즉각적인 봉기보다는 자신의 정책들을 ‘끈기 있게 설명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임시정부가 이전의 입장으로 되돌아간 새로운 외교문서를 발행하고, 밀류코프와 전쟁장관 구추코프가 사임했을 때, 위기는 종결되었다.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소비에트가 한 역할에 대해 쓴 트로츠키의 설명도 이어질 위기를 다루고 있다. 


대중의 공세적인 결의와 이를 마지못해 정치적으로 반영하려는 것 사이에서 좌시할 수 없는 모순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혁명의 시기에, 억압받는 대중은 자신들의 대표들을 통해 공식적인 요구를 표현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좀 더 쉽고 빨리 직접 행동을 시도한다. 대의 체계가 더욱 추상적일수록, 그것은 대중의 활동성을 결정하는 사건들의 리듬에 뒤떨어질 것이다. 가장 적게 추상화된 소비에트라는 대의 체계는 혁명의 조건 속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공장들과 군대들과, 즉 활동적인 대중들과 유기적 결합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었지만, 소비에트는 대의 기관이기 때문에, 결국은 의회주의로 수정과 변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의성(representation)에 내재하고 있는 모순은, 비록 소비에트 형태라도 할지라도, 그것이 한편으로는 대중의 행동을 위해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의성은 쉽게 대중의 행동에 보수적인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모순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실천적 방법은 지속적으로 대표들(representation)을 갱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단순할지라도 그 대의체계 운용은 혁명 속에서 직접적 행동의 결과이므로 늘 행동에 뒤쳐져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4월의 봉기시기 뒤에도 …… 동일한 소비에트 위원(역주: 4월 혁명기간 동안 대중의 의지에 반해 행동했던 소비에트 위원)들이 예전처럼 소비에트에 앉아 있었다. 정상 상태로 되돌아가자, 대중은 낯익은 지도자에 투표를 했다.55)


‘4월의 날들’(April Days)은 2월 뒤에 있던 모순을 더욱 악화시켰다. 소비에트의 지도력은 우파 쪽으로 옮겨갔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장악하고 있던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임시정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로지 소비에트가 임시정부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서만이 가능하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연립내각구성에 6명의 장관급 직책을 받아들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데 동의했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에트의 기층현장 분위기는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금속산업공장에서 대표자를 다시 뽑으려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 첫 결실을 맺었다.56) 5월이 되자 븨이보그와 바실리예프스키(Vasilievsky)와 콜롬나(Kolomna)에서 좌익세력이 지역 소비에트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우익 멘셰비키가 딛고 서 있는 바탕을 무너뜨렸다.


한 역사학자는 이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오로지 사회혁명당의 상대적인 쇠퇴와 더불어 공장에서 멘셰비키가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반대급부로 볼셰비키가 성장했던 현상은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지지가, 비록 배타적이지는 않았지만, 노동자 계급의 숙련공 집단에서 나온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의 숙련공들이 바로 좌익과 우익의 주요한 전투장이었던 사회 민주주의적 지지기반이었다. 6월 말까지 숙련공을 둘러싼 투쟁은 대체로 끝이 났다. 반면 비숙련 노동자 집단에서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투쟁은 거의 결정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57) 


비숙련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한 볼셰비키의 노력은 그 뒤 몇 년 동안 민감한 사안으로 등장할 경제위기에 대하여 당의 분명한 입장을 제시함으로서 원칙에서 승리했다. 정치적으로 경험이 많은 숙련공 집단은 계급투쟁에 새롭게 합류한 노동자 집단들에 비해 더 쉽게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대안에 도달했다. 반면 계급투쟁에 새롭게 합류한 노동자 집단들이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대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지엽적인 경제투쟁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해야만 했다. 


6월에 전개된 사건들은 다음에 다가올 위기를 예견했다. 6월 3일 처음으로 러시아 소비에트 전국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약 2천만 명의 유권자를 선거 국면에 등장시켰다. 혁명 집단은 3월보다는 훨씬 더 영향력이 커졌지만, 유권자 가운데 1/5에 못 미치는 지지를 받았다. 소비에트 전국회의에서 여전히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지지 기반은 3달 여 동안 혁명적인 폭풍을 목격했던 페트로그라드보다는 여타 지역에서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때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임시정부와 타협하려는 정책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곧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당은 6월 10일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를 했다. 나아가 페트로그라드 공장 위원회의 1차 회의는 경제적 혼란(dislocation)의 유일한 대안은 ‘권력을 소비에트의 수중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58)


규율 잡힌 볼셰비키 당은 있는 힘을 다해 위기에 대한 해결책과 프로그램을 설명함으로서 공장수준에서 나타나는 이중권력과 국가수준에서 위기를 서로 연결시켰다.59) 볼셰비키는 공장 노동자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삼아 근본적이며 장기적인 이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으로 연계시킴으로서 (공장체험과 정치적 요구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보여 주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 통제를 위하여!’라는 슬로건 하에서 전개되었다. 스티븐 스미스(Steven Smith)는 ‘민주화된’ 공장에 대한 욕구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개념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노동자 통제는 기초 단계에서 생산을 감시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생산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로까지 발전했다. …… 3월부터 4월까지 첫 번째 시기에 노동자 통제는 주로 국영기업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공장 위원회는 모든 곳에서 공장 내 관계의 민주화를 위하여 고용과 해고에 일정한 통제력을 구축하려고 했다. 이 시기에 자본가들은 대체로 불안해하지 않았고 또한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양보를 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5월부터 6월까지의 두 번째 국면에 들러서면서 대부분의 공장 위원회는 원자재와 연료 공급에 대한 감시와 더불어 공장들에 대한 효율적 가동여부를 점검/개입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가 이러한 노동자 통제 운동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것은 이 시기였다. 7월부터 8월까지 세 번째 국면에는 경제 위기가 분출했고 계급갈등은 심화되었다. …… 9월부터 10월까지 네 번째 국면에는 ……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가 있었고 계급투쟁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 공장 위원회들은 권력을 소비에트에 이전시키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60)



소비에트 전국회의(Congress of Soviets)는  일반 대중의 요구가 공식화되지 못하도록 했다. 이처럼 소비에트로 권력을 넘길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에 대한 소비에트 전국회의(Congress of Soviets)의 방해와 함께 진행되었던 역설(paradox)적 과정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비에트 전국회의는 공장들과 각 부문들에서 소비에트의 국가권력화를 반대하도록 하기 위해 절반이 넘는 대의원들을 공장과 각 연대(regiments)에 파견하는데 6월 9일 밤을 모두 써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다음날 발표했던 아래와 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이 소비에트 정부를 설립하려는 시위를 막은 것은 그들의 노력들이 아니었다.


대의원들은 어디에서든 극도의 적의를 가진 사람들과 마주쳐야 했고 긴 논쟁들을 거친 뒤에야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 중앙의 소비에트 전국회의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든 조그만 권위도 갖지 못 했다. 그것들은 단지 임시정부와 다름없는 것처럼 이야기되었다. 이를 테면 멘셰비키-사회혁명당 다수파가 소비에트를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에 팔아먹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 오로지 볼셰비키들만이 신뢰를 받고 있으며 시위가 발생하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달린 문제였다.61)


6월 10일에 시위를 취소하게 만든 것은 때 이른 한 판 대결을 방지하려 했던 볼셰비키의 노력이었다. 


한 번의 혼란을 겪은 뒤 소비에트는 ‘민주주의 세력들(democratic forces)’ 사이의 단결성을 보여주는 시가행진을 즉각적으로 전개함으로써 투쟁의 다른 형태를 창조해냈다. 이러한 사건 전개는 볼셰비키의 완벽한 승리이자 ‘소비에트 다수파의 면전에 내리꽂히는 통렬한 채찍질’62)에 다름 아니었다. 6월 18일에 행진했던 40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의 깃발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배후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0명의 자본가 장관(Down with Ten Capitalist Ministers) 타도’라는 볼셰비키의 슬로건이 있었다.


6월의 위기는 국방장관 케렌스키(Kerensky)가 새로운 무력 진압을 취함으로써 다시금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무력 진압은 다만 위기를 1~2주 지연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에게 진압을 하라고 명령했을 때 위기는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7월 3일, 제 1 기관총 연대는 이 명령에 불복하여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오기로 결정했다. 제 1 기관총 연대는 수도에 있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운동의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은 볼셰비키당의 일부를 자신의 운동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비록 볼셰비키 당이 그때 자신들이 지닌 정책 방향과 반대될지라도 말이다. 4월과 6월에 드러났던 계급 적대의 심화는 수도를 전쟁 상태로 이끌 수도 있는 어떤 거대한 시위가 있을 것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페트로그라드가 러시아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았다. 수도에 사는 대중은 그때 그 어느 곳보다도 훨씬 더 앞서 나갔다. 이러한 진보적인 발전은 볼셰비키 당이 성장하는 과정에도 반영되었다. 5월 쯤 들어 볼셰비키 당은 공장위원회의 다수파가 되었고 지역 노동조합들에도 얼마간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군대도 차츰 볼셰비키의 생각에 찬성해갔다. 하지만 그 구성이 복잡했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경직된 멘셰비키-사회혁명당 다수파들에게는 아직은 혁명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오로지 노동자 계급만이 재선거를 통해, 즉 7월 3일 저녁 늦게 볼셰비키를 다수파로 만듦으로써 상황을 반전시켜냈다. 


시위의 자생적인 폭발현상에 직면하여 레닌은 다음의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야 했다. 즉 소비에트의 현재 상태, 첨예화된 계급투쟁.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적 전위들이 고립될 위험성. 레닌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소비에트로 권력을 평화롭게 이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땅에 파묻어버려야 한다. 권력은 이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총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일련의 사태들은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우리 조직의 힘을 파악하고, 대중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무서운 속도에 대해 고려한 후, 우리에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주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며, 대중들을 탄압할 빌미를 주고 이들을 분쇄하고 분리시킬 수 있는 시위를 촉발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명확한 슬로건(평화적인 수단으로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는 슬로건)을 제시함으로써 바로 당장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가까운 미래에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 가능한 한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우리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도록 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63) 


볼셰비키 중앙 지도부가 걱정했지만, 7월 3일과 4일에는 무장 시위대들이 페트로그라드 거리를 가득 매웠다. 시위대들은 광범위한 공장들과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운동 전략은 혼란스러웠다. 보기를 들어, 제 1 기관총 연대는 오로지 ‘정부가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들(deputies)로 이루어진 전 러시아 소비에트로 대표되는 민주주의 세력에 의해 장악될 때에만’ 그 정부의 명령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현재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도전하기 위해 무력을 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만약 ‘노동자, 병사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우리 또는 여타의 혁명적인 연대들(regiments)을 강제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한다면, 우리는 이에 대응해 임시정부와 이를 지원하는 다른 조직들을 분쇄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64) 


두 개의 또 다른 진술들이 ‘7월의 날들(July Days)’의 모순들을 선명하게 묘사해준다. 사회혁명당의 지도자였던 빅토르 체르노프(Victor Chernov)가 시위자들을 잠잠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을 때, 어떤 사람이 외쳤다. “개새끼, 너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걸 가지고 꺼져버려라!”65) 다음에는 한 공장 대표가 손에 총을 쥐고 소비에트 집행위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이 [임시정부에서] 물러나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소비에트를 신뢰한다. 하지만 소비에트가 신뢰하는 자들은 신뢰하지는 않는다.”66)


트로츠키는 이러한 태도들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묘사했다. 


7월의 시위대들은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전시키기를 원했으며 이 때문이라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권력을 접수하는 것에 동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비록 수도에서는, 대다수의 노동자와 수비대 가운데 적극적인 집단들은 이미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있었을지라도 소비에트의 다수파는 -모든 대의제 체제에 적용되는 관성의 법칙으로 인해- 여전히  쁘띠부르주아 정당들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부르주아지에 맞선 시도들을 곧 자신들에 맞서는 시도라고 여겼다.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소비에트 다수파들의 성향과 소비에트의 정책의 차이, -다시 말해, 그들의 현재와 과거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명확하게 느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 정부 수립에 지지를 보낼 때, 그들은 소비에트 내 타협주의적인 다수파들을 결코 신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 다수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 방도를 알지 못했다. 폭력으로 그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소비에트에 권력을 부여하는 대신에, 오히려 소비에트를 해체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소비에트의 인적 구성을 변화시키는 방도를 찾아내기 전에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직접행동이라는 방법을 통해 소비에트를 그들의 의지에 종속시키려고 노력했다.67) 


비록 볼셰비키는 시위에 반대했지만, 대중의 분위기는 볼셰비키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최고 50여 만 명이 참여했던 이 운동에서 지도력(leadership)을 행사하도록 요구했다. 볼셰비키는 충돌이 더욱 격해지지 않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다. 볼셰비키가 대중을 조직화하고 이를 통해 자제시키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하튼 7월의 운동은 레닌이 예상했던 대로 페트로그라드를 고립시키려는 반혁명 시도가 움직일 기회를 제공했다. 시위는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들은 볼셰비키 당을 금지시키고 우익 관료들과 군대들을 끌어들여 질서를 잡고자 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구체적인 성과를 획득하는데 실패했고 아울러 레닌은 ‘독일의 첩자다’라는 비방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좌편향에 있던 대중들의 운동은 일시적으로 답보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7월의 날들(July Day)은 소비에트, 대중, 혁명 정당 사이의 차이를 첨예하게 드러내주었다. 혁명의 첫 번째 시기에 대중 자체에 의해 창출되어진 소비에트는 대중의 자생성이라는 이유로 인해 개량주의자의 손에 장악되었다. 소비에트 내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소비에트로의 권력이동을 반대했으며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내려던 어떤 시도들도 봉쇄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도시 노동자들이 좌편향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한참 뒤쳐지게 되었다. 그때 수 십 만 명의 사람들은 소비에트의 형식에 갇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운 투쟁들에 참여했고 시급한 쟁점들에 대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들, 즉 공장위원회, 군사위원회 등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4월과 6월의 경험은 일반 대중이 중앙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나머지 지역 소비에트들까지를 어떻게 좌편향 시켰는지를 보여줬다. 대중에 의한 거리봉기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레닌과 그 추종자들이 나아가기를 바란 수준보다 훨씬 더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이 도시(페트로그라드)가 고립됨에 따라 다가올 수 있는 우익 쪽의 공격과 이로 인한 패배라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비록 볼셰비키 혁명정당이 대중과 소비에트 사이에 에워싸여 있을지라도, 볼셰비키 당은 독립적인 힘으로 있었다. 볼셰비키는 노동 계급들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의식화되었던 사람들을 통일시켜내고 있었고, 사태들에 대해서 맑스주의적인 분석을 제시했다. 오로지 이들만이 모든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했던 7월 봉기가 끝난 다음에 닥쳐올 재앙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10월을 향해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그 성격이 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에게, 소비에트의 일차적인 목적은 그들의 집합적 의지를 중앙 집중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4월과 6월에 소비에트와 대중운동은 서로 긴장관계에 놓여있었다. 7월의 날들(July Days)에 들어 결국 그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렸다. 왜냐하면, 그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부가 페트로그라드 지역의 군 사령관으로 혁명적 좌파를 분쇄시키려고 애쓰던 코르닐로프(Kornilov) 장군 같은 반동적인 차르 관료 편에 섰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새로운 연립내각(coalition)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임시정부를 양도받게 되었다. 새 연립내각의 정상에는 알렉산더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가 ‘수상(Minister President)’ 이었다. 수상이 되기 전에 그는 2월 혁명 뒤에 비로소 사회혁명당에 가입했으며 그 뒤 법무장관과 국방장관(Minister of War and Marine) 직책을 맡아 왔었다. 


소비에트와 임시정부가 양대 권력을 이루고 있던 그때까지의 이중권력 상황은 앞에 설명한 새로운 세력관계(arrangement)로 인해 변화될 것이 분명했다. 트로츠키는 그때 발생된 사건의 전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중권력은 다시 구성되고 변형되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공장에서는 예전처럼 노동자들의 의지에 반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지주들이 재산권을 갖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령관들은 병사들 앞에서 어떠한 자신감도 가지지 못했다. ……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점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바였다. 그렇다고 해서 타협적인 지도자들이 잃어버린 모든 것이 부르주아지들에게 돌아갔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류이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그룹들은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의 지지까지도 잃었다. 즉 군벌들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장과 연대(regimental) 위원회들의 이익도 대변할 수 없었다. 권력은 탈중심화되고 분산되었던 것이다. ……68)


소비에트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소비에트는 더 이상 소비에트 전국회의를 열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Tsik) 같은 상위 기관들, 소비에트 회의에서 선출된 전 러시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이 모두가 자신의 대중적 토대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움직였다. 이 시점에 레닌은 공장위원회가 대중의 집합적 조직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핵심적인 문제는 ‘소비에트’라는 이름이 아니라, “혁명의 성과물(seizure), 아래로부터 인민의 직접적 주도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권력”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69) 레닌의 새로운 입장은 집합적 대중조직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투쟁의 다음 국면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소비에트는 새로운 혁명 속에서 나타날 것이며, 실제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 발생할 소비에트는 지금의 소비에트는 아닐 것이다.”70) 



판명되었다시피, 소비에트 체제는 내부로부터 다시 발생할 수 있었다. 일단 7월의 날들(July Days)의 충격이 사라지자, 많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노동자, 병사들에 의해 다시 소환되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을 선출했고 이들의 환호 하에 차르 시대 장군들이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소비에트의 갱신을 위한 강력한 추동력은 8월 27일부터 30일까지 코르닐로프(Kornilov)가 중심이 된 성공하지 못한 우익 쿠데타에서 나왔다. 여러 상급 장교들과 연합하여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고 혁명을 분쇄하려고  코르닐로프가 행동을 취했다는 소식이 도시에 전달되자,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려면 어쩔 수 없이 대중의 역량, 즉 자신들이 질식시켜 버리려고 그토록 애썼던 바로 그 대중역량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상황변화를 반겼다. 이러한 변화는 극우파에 일격을 가하고 케렌스키와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의 유약함을 폭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제 자신들이 부패한 것과 대중과 분리된 것을 현실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소비에트의 권위를 ‘반혁명에 맞선 소비에트 투쟁위원회’에 넘겼다. ‘반혁명에 맞선 소비에트 투쟁위원회’에서 볼셰비키는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이제 볼셰비키의 지도하에 놓이게 된 지역 소비에트는 그때까지 중앙 소비에트가 해냈던 많은 기능을 독자적으로 담당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 공장위원회들 역시 무장된 군대들과 붉은 수비대(Red Guard)를 조직했다. 노동조합도 코르닐로프에 대해 사보타지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노동계급의 권력이라는 볼셰비키의 변혁 프로그램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의 (변혁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내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감정과 변혁 프로그램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부르주아 역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대중조직에 대한 당의 지도력은 어떤 계략이나 폭력으로 획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그때그때 상황의 논리에서 나온 자연스런 결과물이었다. 아래로부터 혁명적 독재(레닌이 규정했듯이 착취를 받는 자들이 소수 착취자들을 지배한다는 뜻에서의 독재)를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혁명정당은 이제는 이러한 독재를 형성시킬 수 있는 기구들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의 단결된 행동은 코르닐로프가 일으킨 쿠데타를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3일 만에 노동자들의 저항 또는 하극상에 의해 코르닐로프 쿠데타 세력은 포위되었고 결국 붕괴되었다. 7월에 입었던 피해는 아물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되찾은 자신감은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승리했다는 사건으로 표현되었다. 9월 1일에 볼셰비키 당은 많은 멘셰비키-사회혁명당의 대의원들을 자신들 편으로 만듦으로써 279표 대 115표의 투표결과로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세우자는 제안을 통과시켰다.71) 그 다음 4일 뒤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도 같은 안건을 통과시켰다.


코르닐로프가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한 다음, 소비에트 조직은 전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선거가 있었고, 전체 회의가 자주 열렸으며, 빈번한 소환과정에서 집행위원의 대표들은 대체되었다. 트로츠키가 수상으로 선출됨으로써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확립되었다. 


볼셰비키가 여러 지역에 있는 두마(dumas : 의회)와 젬스트보(zemstvos :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력, 특히 직접적으로 노동계급 조직들에 대한 지도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제안한 것이 일련의 승리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영구적인 조직이든 임시적인 조직이든 노동조합들, 공장위원회들, 노동계급의 경제적, 문화적 결사체들은 전반적인 상황을 통해 발생할만한 모든 사적인 문제들에 대해 하나의 똑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질문이란 ‘누가 그 집의 주인인가?’이었다.72) 


단지 볼셰비키들만이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제시했다. 볼셰비키 당은 상이한 노동계급 내의 집단들을 연대하게 했다. 이러한 연대는 대중조직을 달라지게 한다.


이러한 확고한 연대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는 않았다. 운동에서 상이한 계급과 집단들이 서로 작용하여 결국에는 공통된 정치적 전략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과정은 푸틸로프 공장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3만 6천여 명의 노동자들 가운데 1만여 명은 시골지역에서 올라온 신규 산업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농민의 신발을 신은 채 진흙탕을 밟고 온 ‘흑색 노동자들’로 알려진 집단들이었다. 그들은 1917년 4월에 들어서야 임금상승을 요구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장위원회는 그 대부분의 구성원들을 숙련 노동자 집단에서 끌어냈다. 또한 공장의 전체 노동자들을 하나의 대오로 유지시키려 했기 때문에 공장위원회는 ‘흑색 노동자들’만의 독자적인 임금 투쟁을 제한하고자 했다. 6월에 공장위원회는 임금 인상을 위한 자생적인 현장파업을 자제하길 원하며 노동조합에 의한 협상을 통해 더 많은 임금을 확보하고자 했다. 볼셰비키들은 때 이른 봉기를 피하길 바랐기 때문에 공장위원회의 전술을 지원했다. 6월 21일에는 여러 공장위원회들, 금속노동조합, 사회주의 정당들이 모여 아래와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우리는 …… 지금은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이 갈등해결을 차일피일 미루어왔던 경영진들(ministers)에 대한, 정당한 불만표출을 자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지금 신속하고 총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역량을 쌓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 비록 지금 임금 인상이 받아들여지더라도 상품과 주거시설(accomodation) 가격의 끊임없는 상승은 이러한 성취를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생산과 분배에 대한 통제력을 구축하는 것은 꼭 필요하며, 나아가 권력을 소비에트의 손아귀에 넘겨주기 위해서는 모종의 결정적인 투쟁이 꼭 필요하다.73)


7월에는 이러한 대기 작전(holding operation)이 깨졌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투쟁은 그 시기 대중 시위들을 촉발하는데 이바지했다. 일단 7월의 날들(July Days)이 아무런 성과 없이 지나갔고, 뒤이어 페트로그라드에서 대규모 산업 위기가 닥치자, 심지어 푸틸로프 공장에 있는 비숙련 노동자들까지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볼셰비키의 전략을 받아들였다. 


가을에 수도의 노동자들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전쟁 때문에 일어난 혼란으로 기초 원료가 부족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공장을 폐쇄하거나 이전시킨다는 핑계로 회사 자원들을 주도면밀하게 빼돌리고 있었다. 9월에 이르러서 러시아의 공업 산출량은 그해 초에 비해 40%가 감소했다.74)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들로 하여금 생산을 조직하도록 함으로서 대응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일시적인 해결책일 수밖에 없었다. 10월 제 1차 러시아 공장위원회 전국회의(All-Russian Factory Committee Conference)에서 통과된 볼셰비키의 결의안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지역에서 개개의 공장위원회들을 통해 이루어졌던 노동자 통제는 전국적인 체계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자 통제는 그 실질적이고, 진정한 성과물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75)


산업위기와 농민들에 의한 토지 몰수, 그리고 군 내부의 혼란, 이 모든 것들은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한 방향이란 바로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전할 필요성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파업 전술마저도 비효율적으로 보였으며, 투쟁의 일반적인 수단으로서 그 뜻이 쇠퇴해가고 있었다.76)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은 자생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봉기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봉기는 볼셰비키들에 의해 조직되고 지도되어야 했고, 소비에트에 의해 그 정당성과 국가권위가 주어져야 했다. 10월 혁명의 반대자들은 당과 소비에트, 대중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고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이다. 2월이 지난 다음 처음으로 당, 소비에트, 대중이라는 세 부문의 운동방향성이 서로를 보강시켜줬다. 이러한 당과 소비에트, 대중들 사이의 바람직한 연계는 보호되어야 했고, 그것도 빨리 그래야 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연계는 반-혁명세력과 독일군이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함으로서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도시를 넘겨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긴급한 행동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 첫 조치는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에 레닌이 쓴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제목의 편지로 제기되었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 수도에서 노동자․병사 평의회 소비에트의 다수를 장악하고 있던 볼셰비키는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또한 장악해야 한다. …… 대부분의 민중은 우리 편이다. …… 우리에게는 소비에트와 민주적인 조직들 같은 기구들이 있다.77)



비록 얼마간 저항이 있었지만, 볼셰비키 당은 새로운 봉기를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에 설득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레닌이 1905년에 말했던 것처럼, 소비에트는 ‘가장 협소한 뜻에서’봉기를 주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요 지역에 있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소비에트는 여전히 어쩔 수 없이 무장봉기에 대한 비밀스러운 세부적인 작업을 논의할 수는 없었던 공공 포럼 정도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수준에서 대중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 따랐다. 그러나 레닌은 혁명적인 정당만이 이러한 슬로건을 구체적인 현실로 바꿀 수 있는 단일한 목적과 과단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몇몇 볼셰비키 당원들은 형식적인 이유로 봉기는 10월 말에 소비에트 2차 회의가 개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회의에서 대의원들 다수가 볼셰비키 당에 대한 지지를 보내주길 바랐던 것이다. 이에 대해 레닌은 가차없이 답변했다.


볼셰비키에 대한 다수의 ‘형식적’인 지지를 확보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지금까지 어떠한 혁명도 그러한 형식적인 지지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 케렌스키와 그 일당들은 그런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서도 지금 페트로그라드를 포위할 준비를 하고 있다.78)   


9월 29일에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소비에트 회의가 개최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완전히 바보 같은 짓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몇 주 그리고 심지어는 며칠이 모든 것들을 결정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몇 주를 잃어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겁을 먹고 권력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 그것은 (정치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권력 장악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보처럼 ‘지정된’ 봉기가 일어나는 동안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코사크 군대들이 동원될 것이기 때문이다).79) 


봉기를 성공시키려면 다음의 세 가지 관련된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첫째, 봉기는 긴급한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주어야 하며 반-혁명의 끊임없는 위협을 일소시켜야 한다. 둘째, 승리하는데 필요한 기술적/군사적 과업들을 손아귀에 장악해야 한다. 셋째, 러시아 대중이 최대한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대중의 참여가 있었어야 봉기는 편협한 음모 작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몰수하는 것을 포함하는 정치적 도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세 가지 모두를 함께 충족시키려면 레닌이 “봉기의 예술(art of insurrection)”80)이라 한 기예가 필요했다. 


10월 봉기를 향한 구체적인 첫걸음은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아직 극복하지 못한 …… 한 가지 난점은 봉기의 기구들을 선거제 하에서 심지어 (봉기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대표들까지 참석하는 소비에트의 공개적 운영방식과 조화시키는 문제였다.81)


이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은 멘셰비키들이 수도에서 수비대를 철수시키려는 임시정부의 계획에 대응할 위원회를 제안했을 때였다. 이 위원회는 소비에트 기관의 일부였지만 (자격 조건을) 충분히 제한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볼셰비키가 봉기의 조직화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정치적 구성물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소비에트 본회의에서 승인 받아 그것을 설립하기까지는 10일이 걸렸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소비에트는 당이 아니다. 소비에트 기구는 비대한 것이다.”82) 


10월 25일 이 위원회가 조직했던 봉기와 그 뒤 제 2차 소비에트 회의로 권력을 넘기는 것에 대한 세부사항들이 여기서 다 다루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 적은 인명 손실만으로 임시정부를 전복시켰다. 제 2차 소비에트 회의의 투표 결과, 667 명의 소비에트 대표들 가운데 505명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가 장악해야 하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혁명이 지닌 정치적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했다. 


당은 소비에트를 움직이게 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들, 병사들 그리고 일정 정도의 농민들을 움직이게 했다. 대중 속에서 얻은 것은 금방 잃을 수도 있었다. 만약 당신들이 이러한 행동 기구들을 하나의 톱니바퀴 체계로 표현한다면,…… 당신은 당이라는 톱니바퀴를 대중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중간 규모의 소비에트라는 톱니바퀴를 생략하면서 ―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려고 서둘러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당의 톱니바퀴 이빨을 깨뜨릴 위험을 발생시키고,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대중을 움직이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위험 -소비에트 수준에서 내적 논란과 쟁투(friction)의 결과 정세의 우호적인 상황을 놓쳐버릴 위험- 역시 실제적으로 존재했다.83) 


10월 혁명은 소비에트가 지닌 중요성과 그 한계 모두를 뚜렷이 드러내줬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옛 권력을 뒤엎고 그것을 대체시키는데 사용할 수 있는 조직은 소비에트이다. …… 그러나 소비에트가 독자적으로 그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소비에트는 프로그램과 지도력이 어떻게 구성 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목표에 이바지할 것이다. 소비에트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당에서부터 받아들인다. 반면 혁명의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철저한 후진부위, 활동적이지 못하거나 우왕좌왕하고 있는 계층을 뺀 계급의 모든 부위를 포괄하며 혁명 정당이 그 계급의 두뇌로 기능했다. 권력 장악의 문제는 오로지 당과 소비에트  또는 소비에트에 필적할만한 다른 대중조직들의 명확한 결합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84)


러시아 혁명은 성공했던 노동자 봉기의 값진 모델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가진 단 하나의 모델이다. 그러나 1917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은 러시아를 그러한 모델로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때까지 러시아는 예외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았고 오로지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1917년이 지난 다음 러시아는 가장 훌륭한 사례가 되었다. 모든 혁명은 각각 ‘2월 혁명’과 ‘7월 봉기’를 거쳐 10월 혁명으로 전진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한 규격화된 경로들은 우리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결코 동일한 일련의 패턴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 활동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기 마련인 사건들이 실제로 전개되는 것을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러시아와 영국, 독일 같은 나라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1917년까지 러시아 노동계급은 서구 유럽의 노동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 보기를 들어 의회 체계, 강력한 합법적 개량주의 정당들, 관료들을 가진 노동조합 같은 것들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서구에 앞서는 하나의 거대한 진전이 있었다. 그들은 대중의 지원을 받고 맑스주의에 서 있는 지도부를 갖춘 혁명 정당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1915년~1920년 동안에는 비슷한 점도 분명히 있었다. 이를 테면, 유럽의 모든 곳에서 대중운동은 사회주의라는 공통된 목적을 이루려는 혁명적 수단을 통해 크게 번창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서구 사이에 있는 차이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러시아 혁명을 소극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넘어 더 많은 것을 배우려 한다면, 러시아 혁명의 교훈을 개량주의 기구들이 정치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쓸모 있도록 다시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세계의 광범위한 부분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관계를 중재해주는 의회, 대중적 개량주의 사민당과 노동당, 노동조합이 지배하고 있는 조건에 부닥치고 있다. 


이러한 재해석을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발생한 서유럽의 역사적 유산이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노동자 평의회, 즉 소비에트에 알맞은 집합적 조직은 대중적 개량주의에 맞서 성장했다. 노동계급의 극소수에서 시작되었던 혁명은 기회를 잡기 위해 도전하는 법을 배웠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냈다. 이 책의 중심부분에서 나는 대부분 이러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옮긴이 : 심용보.





1) G A Williams, Proletarian Order(London 1975), 214쪽에서 재인용. 

 

2) R Luxemburg, Rosa Luxemburg Speaks, a selection of her writings (New York 1970), 269쪽. 

 

3) J Braunthal, History of the Internaltional, volume 2(London 1967), 168-169쪽(각주)에서 재인용. 

 

4) British Government Cabinet Papers, GT6 323 과 326(1918년 11월 13일). 

 

5) Die Kommunistische Internationale, no 1(1919년 4월), English Translation in Braunthal, 168쪽(각주). 

 

6) V. I. Lenin, Collected Works (Moscow 1965) volume 25, 387쪽. 

 

7)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389쪽. 

 

8)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388쪽. 

 

9) Marx, Engels, Lenin, Anarchism and Anarcho-Syndicalism(USSR 1972), 103쪽. 

 

10)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462쪽에서 맑스의 언급 재인용. 

 

11)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492쪽. 

 

12) 러시아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위해서는 T Cliff, State Capitalism in Russia(London 1974)를 보라. 

 

13)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492쪽. 

 

14) Lenin, Collected Workers, volume 29, 106-108쪽. 

 

15)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414쪽에서 재인용. 

 

16) V. I. Lenin, The Proletarian Revolution and the Renegade Kautsky (Moscow 1976), 22쪽. 

 

17) L. Trotsky, 1905 (London 1971), 122쪽. 

 

18) L. Trotsky, 1905, 122쪽. 

 

19) Trotsky, 1905, 123쪽. 

 

20) Trotsky, 1905, 201쪽. 

 

21) Trotsky, 1905, 266쪽. 

 

22) T Cliff, Lenin, volume 1(London 1975), 163쪽에서 재인용. 

 

23) Cliff, Lenin, volume 1, 166쪽에서 재인용. 

 

24) D. Mandel, The Petrograd Workers and the Fall of the Old Regime(London 1983), 44쪽. 

 

25) S Smith, Red Petrograd (London 1983), 10쪽. 

 

26) Mandel, 44쪽. 

 

27) 이런 점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C. Goodey, “Factory Committees and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Critique, no 3(1974년 가을); S Smith, Red Petrograd 그리고 D Mandel, The Petrograd Workers and the Fall of the Old Regime를 볼 것.  

 

28) Smith, 50쪽. 

 

29) T. Hasegawa, The February Revolution in Petreograd, 1917 (Seattle 1981), 326쪽. 

 

30) 볼셰비키들 중 일부는 바리케이트 위에서 싸우느라 바빴고 다른 일부는 ‘당의 공장 위원회(party factory committees)’를 건설하는데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들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Hasegawa, 328쪽을 보라. 

 

31) N. N. Sukhanov, The Russian Revolution 1917 (London 1955), 60쪽. 

 

32) Sukhanov, 61쪽. 

 

33) Trotsky, 1905, 267쪽. 

 

34) M. Ferro, The Russian Revolution of February 1917 (London 1972), 60쪽 그리고 M. Ferro, The October Revolution (London 1980), 183쪽. 

 

35) W. H. Chamberlin, The Russian Revolution (New York 1976) volume 1, 101쪽에서 재인용. 

 

36)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London 1977), 224쪽. 

 

37)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212-213쪽. 

 

38) Smith, 55쪽. 

 

39) Smith, 98쪽. 

 

40) R A Wade, “Workers' Militia and Red Guards,” in R Carter Elwood (edtion), Reconsiderations on the Russian Revolution (Columbus, Ohio, 1976), 29쪽. 

 

41) Smith, 104, 109쪽. 

 

42) 이는 전체의 2.4%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J H Keep, The Russian Revolution, A Study in Mass Mobilisation (London 1976), 146쪽을 보라. 

 

43) Sukhanov, 258쪽. 

 

44) O Anweiler, The Soviets (New York 1974), 130쪽에 번역되어 있음. 

 

45) Hasegawa, 402쪽에서 재인용. 

 

46) Hasegawa, 402쪽. 

 

47) Mandel, 87쪽. 

 

48) Sukhanov, 86쪽. 

 

49)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4, 38쪽. 

 

50)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4, 38쪽. 

 

51)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4, 49쪽. 

 

52)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171쪽. 

 

53) Cliff, Lenin, volume 2, 171쪽에서 재인용. 

 

54)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363쪽에서 재인용. 

 

55)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364쪽. 

 

56) ‘5월 23일, 온건파가 장악하고 있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 재선출을 위한 절차적 규칙들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유권자들의 단지 4분의 1만이 요구하던 것을 받아들인 것이었고 그들이 바라던 다음과 같은 절차적 규칙들이 정규적인 통로들을 통해 소비에트에 보고 되었다. 선거위원회를 설립할 것, 선거기간이 7일을 넘기지 않는 한에서 모든 당들에게 충분한 선거운동 기회를 줄 것, 기존의 대의원들이 투표에 참여할 것, 마지막으로 그 결과들이 소비에트의 “자격심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을 것.’ Keep, 145쪽. 

 

57) Mandel, 125쪽. 

 

58) Mandel, 127쪽. 

 

59) 물론 볼셰비키당이 동질적이었다는 것은 과장일 수 있으며, 이는 스탈린 시대의 왜곡들 중 하나이다. 최근의 많은 연구들은 볼셰비키 내에서 빈번했던 내적 차이들을 드러내주었다. 일반적으로 이 당이 일관된 정책들을 제공해주면서도 대중들의 모든 변화들에 재빨리 그리고 전체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유연했던 것은 이 당이 민주집중적 당 조직이었다는 점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60) Smith, 149쪽. 

 

61) Sukhanov, 395쪽. 

 

62) Sukhanov, 418쪽. 

 

63) A Rabinowitch, Prelude to Revolution(Indiana University Press, 1968) 114쪽. 

 

64) Rabinowitch, 119쪽. 

 

65) Rabinowitch, 188쪽에서 재인용. 

 

66) Rabinowitch, 194쪽에서 재인용. 

 

67)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575~576쪽. 

 

68)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825쪽. 

 

69)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4, 38쪽. 

 

70)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189쪽. 

 

71)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804쪽. 

 

72)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928~929쪽. 

 

73) Smith, 124쪽. 

 

74) Smith, 125쪽. 

 

75) Smith, 157쪽에서 재인용. 

 

76) U. Brügmann, Die russischen Gewerkschaften in Revolution und Bürgerkrieg (Frankfurt-am-Main 1972) 86쪽의 1917년의 파업 통계를 보라. 

 

77)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6, 19-21쪽. 

 

78)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6, 21쪽. 

 

79)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6, 83쪽. 

 

80) 과학과는 달리 기예(art)는 방법과 해석의 광범위한 변이를 허락한다. 그러한 봉기는 10월 봉기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를 두고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에서 나타났던 광범위한 의견 차이가 낳은 ‘기예(art)’였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트로츠키가 조직했던 권력 찬탈의 재빠른 성공으로 트로츠키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Cliff, Lenin, volume 2, 367~376쪽을 보라. 

 

81)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943쪽. 

 

82)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961쪽. 

 

83)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1130쪽. 

 

84)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1021쪽(강조는 인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