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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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4월호

[기획]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7:44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빌헬름 라이히 


* 이 텍스트는 1934년 6월 라이히가 덴마크에 망명하고 있었을 때 팸플릿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그때 이 글은 에른스트 파렐(Ernst Parell)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그는 계급의식을 지도부의 계급의식과 대중의 계급의식으로 나누어서 분석하면서 계급의식의 구체적 구성요소들과 저해요소들을 알아내고,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가 그 전 해(1933년)에 압도해 버린 공산주의 정치를 비판하고 있다. 번역 텍스트로는 Wilhelm Reich, Was ist Klassenbewusstsein?, Arbeitstexte Verlag O, 1972를 사용하였다. 두 번에 나누어서 싣게 된다. 


서문


이 글의 근본적인 관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온 세상의 혁명가들은 많은 전선에서 벌여온 소모적인 투쟁 때문에 인간의 삶을 오직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만 보거나, 또는 자신들의 사유 및 투쟁과 밀접하게든 멀게 든 어느 정도 연관된 사회적 삶의 그러한 사실들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을 투쟁대상으로 삼은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혁명가들의 노력이나 고통, 의도를 아예 모르거나 조금밖에 모른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자신들의 예속된 존재를 점점 더 무의식적으로 이끌고 가며, 그러한 방식으로 자본의 지배를 위한 지지대로 이바지한다. 4천만 성인 독일 시민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이 신문에서 읽는 독일 혁명가들의 처형에 대해 진정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또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소간이나마 확고부동한지 자문해 봐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글이 이루려는 것을, 즉 혁명적 전위의 의식과 평균적 시민의 의식의 결합을 파악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제까지 노동자운동이 무시해 왔던 몇 가지 가능한 출발점들을 지적하고 몇 가지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일부는 부정확할지도 모르겠고, 일부는 잘못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현실생활은 사회혁명의 투사들이 믿는 것과는 다른 수준에서 발생한다는 것, 그럼에도 그들의 잘못된 믿음은 사회적 존재에 대한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통찰력에 정확히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에 노동자운동의 실패의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있다. 

사람들은 이 글을 비정치적인 평균적인 사람들이 혁명의 미래지도자들에게 하는 호소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역사적 과정”에 대한 파악을 적지 않게 고집하면서 더 잘 이해하라는, 그들의 현실 문제들과 욕망들을 더 적절하게 밝히라는, 역사에서 “주체적 요소”에 대해 좀 덜 이론적으로[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라는, 대중의 삶에서 주체적 요소가 나타내는 것들을 더 잘 이해하라는 호소로서 말이다. 


1934년 6월 에른스트 파렐[빌헬름 라이히]


1. 두 가지 계급의식


설명


노동자운동의 개혁과 관련하여 생기는 몇 가지 어려움을 대중심리학의 관점에서 드러내고 밝히려는 다음의 시도는 많은 결함 때문에 처음부터 힘들다. 우리 독일 망명인들이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 실천적인 상황과 생활조건들은 수월하지 않다. 첫째로 정치적 삶, 무엇보다도 대중의 삶과 우리의 밀접한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단지 불충분하게만 확립되었을 뿐이다. 신문들은 우리에게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 모순되며, 대중심리학의 문제들을 무시하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오류의 원천이다. 도서관은 망명자들에게는 이용할 수 없거나 단지 불충분하게 이용할 수 있다. 존재[생존]를 둘러싼 힘겨운 투쟁과 주인 국가의 당국자들에 의한 추방 또한 그 흔적을 남긴다. 노동자운동 안에서 최근 조직들과 논의들이 쪼개지는 것은 과업수행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것에 정치 심리학의 영역들의 새로움을 덧붙이면, 우리는 실천적 정치학으로 직접 번역될 수 있는 100% 정확하고 완벽한 연구를 생산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충분한 이유들을 갖는다. 만약 우리가 이제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해온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그들 가운데 몇 가지에 대해 답하는데 성공한다면 기쁠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우리의 후속 투쟁가들이 주도할 수 있도록 하고 그리고 혁명전선이 현재 채택하고 있는 지적 방법들과 기법들을 결정적으로 재검토하도록 하기 위한 일정한 방향들을 개관하는 것 이상을 하려고 바라지는 않는다.


여기에 제시한 글은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출간 이래 제기되어온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며, 부분적으로는 내 생각에 많은 정치경제학자들이 심리학적 문제들을 파악하지 못하여 감내하는 개별 비판들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다양한 정치집단들과의 토론들은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전에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의 심각한 패배는 이미 다른 나라들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파시즘은 오늘날 곳곳에서 혁명운동에 대해 빠르게 우세를 점하고 있다.

제2, 제3 인터내셔널 둘 다 실천적인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이론적으로도 그 상황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왔다. 즉 제2 인터내셔널은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정치에 의해서. 제3 인터내셔널은 자기비판의 부족과 잘못된 태도를 완고하게 고집함으로 인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의 진영 안의 관료제를 뿌리 뽑을 수 없음-부분적으로는 의지의 부족-으로 인해서이다.


사회주의노동자당(Sozialistische Arbeiter-Partei)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en Communisten)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원한다. 그러나 새로운 당을 창건하는 방식과 관련해 심각한 차이점들이 생겨났다. 트로츠키는 이미 제4 인터내셔널 창설을 요청해 왔다. 사회주의노동당은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트로츠키가 원하는 대로 먼저 제4 인터내셔널을 만들고 나서 노동자들을 구호로서 그 주위에 결집시키는 것 대신에, 새로운 인터내셔날은 노동자들의 결집의 결과이기를 원한다.  


성정치(섹스폴, SexPol) 운동 속에서 우리가 묻고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조직이 일단 설립되고 그 조직에의 충원은 그 선포된 강령에 기초해 이뤄져야 하는가? 또는 강령과 이데올로기가 대중에게 확산될 시간을 허용하고, 조직적인 수순들을 광범위한 토대 위에서 나중에만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두 번째 방식을 선택하였다. ‘더 느슨한’ 준비 조직이 많은 이점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이런 조직이 너무 빨리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나 분파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또 다른 조직들에 침투할 수 있는 보다 좋은 기회를 제공하며, 기타 이점이 더 있다는 점에서.


게다가 그 이상의 정치적 발전에 대해 우리가 어떤 전망들을 가지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섹스폴 노동공동체는 세 가지 주요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1. 가까운 미래에 독일에서 예측할 수 없는 봉기의 가능성이 있다. 현존하는 어떤 조직도 멀리서나마 이러한 사건에 대해 준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어떤 조직도 그런 운동을 통제할 수 있거나 의식적으로 끝까지 이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가장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일어난다면 상황은 혼란스러울 것이고 결과는 극도로 불확실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최상의 해결책일 것이며 우리는 바로 처음부터 모든 방식으로 그것을 지지하고 촉진할 것이다. 2. 노동자운동이 이론과 조직 측면에서 한 번 더 결집하려면 몇 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 다음에 노동자운동은 훌륭한 고도로 훈련되고 과단성 있으며 결연한 지도부 아래 폐쇄된 운동을 형성할 것이며, 독일에서 권력 획득을 위해 투쟁할 것이며, 말하자면 이는 다음 20년 안에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이 전망이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이지만, 지금 시작해야 하는 에너지 넘치고, 확고하며 지치 않는 준비를 필요로 한다. 3. 마지막 주요한 가능성은 새롭고 훌륭하며 신뢰할만한 지도부 아래 노동자운동의 결집이 충분히 빠르게 일어나지 않거나 발생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국제적 파시즘이 설립될 것이며 특별히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내재적 기술 덕택에 도처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할 것이다. 그리고 파시즘은 영원한 대중적 토대를 획득할 것이며 아무리 주변적일지라도 경제적 정세들에 도움 받을 것이다 라는 가능성이다. 이런 경우에 사회주의 운동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야만주의라는 긴, 아주 긴 시기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때 사회주의운동의 과제는 원칙적으로 자신이 잘못되지 않았으며 최종적으로 그럼에도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것이다. 이 전망은 우리가 견뎌야할 책임의 전체 범위를 드러내 준다.


우리는 조건이 허락하는 한 첫 번째 가능성을 고려하고, 두 번째 가능성은 좀 더 일어날 것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작업의 현실적 목표로 삼고, 세 번째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인간의 힘이 닿는 모든 것을 하면서 우리의 모든 노력을 두 번째 가능성을 가져오는데 집중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만약 우리의 목표가 노동자계급 안에 통일성과 투쟁력을 창출하고 모든 노동 주민층의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라면, ‘통일성’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만 실천에서는 이것이 진정으로 그들의 의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불협화음만을 촉진하는 사람들과 우리 사이의 예리한 구분선을 그림으로써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독일의 재앙[파시즘의 권력 장악] 이후 지금까지도 왜 분파적 파벌의 형성이 저지되지 않고 지속되는가? 왜 독일 내부와 외부 모두에 있는 책임 있는 서클들에서 사태가 그렇게 황량해 보이는가? 왜 빈약한 학문적 논의와 쓸모없는 상호비난이라는 낡은 방법들이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의 현실에 더 잘 맞는 좀 더 활기 있고 좀 더 효과적인 방법들로 넘어가지 않는가?


이런 불행한 사태는 우리가 과거의, 낡아빠지고, 경직된 도그마, 말들, 도식들, 논의방법들에 집착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집착은 이번에는 문제를 제시하는 새로운 방식들, 완전히 신선하고 부패하지 않은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새로운 방식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바로 하나의 훌륭한 새로운 아이디어, 바로 하나의 효과적인 새로운 구호가 완전히 희망 없는 논쟁 중독자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규합할 것이고 쓸모없는 논쟁을 끝낼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을 우리는 생각한다. 다음 과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논의하는 방식으로 살아있는 맑스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국제조직을 창설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만약 이러한 목적으로 소집된 회의가 낡은 방법들과 구호들, 사고방식들, 논의방식들만을 생산한다면, 그 조직은 실패할 것이다. 자본의 몰수, 생산수단의 사회화,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들∙농민들∙병사들∙피고용인들의 지배의 확립, 이것들은 낡은 개념들이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노동하는 인민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고 권력은 투표소에서가 아니라 무기를 가지고 장악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며 그 이상을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공포하고 이를 강령 속에 고정하는 것은 이전에 모두 시도했었기 때문에 별로 가치 없을 것이다. 중요한 질문은 왜 인민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왜 우리의 조직은 동맥경화증에 희생되었는가, 왜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의 관료제에 의해 질식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왜 대중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이익과는 반대되는 히틀러가 권력을 획득하도록 행동했는가 이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 대중을 우리 편에 둔다면, 우리는 전략과 전술의 문제(비록 중요할지라도)에 그렇게 무한정한 양의 에너지를 소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운동하고 있는 다양한 집단들은 서로 대립하는 전략과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완전히 새로운 생각들, 완전히 새로운 방식들을 가지고, 이데올로기와 인적 구성원 모두에서 완전히 새로운 구조를 가지고,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처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은 반동의 승리를 확인해줄 광범위한 대중 - 비정치적인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억압받은 광범위한 대중 - 의 언어를 말하는데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세한 주장을 제시할 필요가 거의 없다. 대중은 우리의 결의들을 또는 우리가 사회주의로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대중은 우리를 믿지 않았으며 여전히 믿지 않는다. 대중은 의무감에서 우리의 글들을 읽거나 또는 전혀 읽지 않는다. 운동에 참여한 대중은 불분명한 사회주의적 정서(느낌)를 지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정서를 유리하게 사용할 수 없었으며 결국 그것은 히틀러에게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광범위한 대중을 획득하고 대중에 영감을 불어넣는데 우리가 가장 크게 실패했다는 사실은 노동자운동의 크고 작은 많은 결점들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 결점들은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당에 대한 완고한 충성심, 많은 프롤레타리아 지도자들이 느끼는 분노와 모욕감, 공허한 논쟁에의 중독 그리고 학문적 맑스주의의 중독이다.


사회주의 실패의 근본적 원인 가운데 하나의 요소 - 하나의 요소일 뿐이지만,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고 더 이상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 - 는 효과적인 맑스주의적 정치심리학 독트린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독트린이 여전히 창조될 수 있는 영역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전체로서 노동자운동이 심리학적 검토와 의식적인 실천심리학에 극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이런 결점은 계급 적에게 가장 큰 이점이 되었으며 파시즘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우리가 대중에게 제국주의의 모순들에 관한 뛰어난 역사적 분석들과 경제적 논문들을 보여준 반면, 히틀러는 대중의 가장 깊은 감정적 뿌리를 자극했다. 맑스가 표현했듯이, 우리는 주체적인 요소의 실천을 관념론자들에게 남겨두었다. 우리는 기계론적이고 경제주의적인 유물론자들처럼 행동했다. 내가 과장하고 있나? 내가 문제를 협소하게 제한된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구체적 보기들, 즉 중요한 보기들과 분명히 덜 중요한 예들의 도움으로 이 문제에 답해보자. 우리는 만병통치약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을 위해 작은 이바지를 하려고 할 뿐이다.


두 가지 “계급의식”


사회주의의 달성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지배의 확립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효과적인 정책은, 생산력발전의 결과물로서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발생하는 운동들과 변화들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야만 한다. 이 정책은 또한 동시에 그리고 동일한 수준에서 “머리 속에서”, 즉 이러한 과정들에 예속되어 있고 실제로 그러한 과정들을 수행하는 인간들 - 다른 나라들과 도시들에서 온 사람들, 직업∙연령∙성별이 다른 사람들 - 의 심리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계급의식 개념은 사회주의 운동과 그 정치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나라의 피억압 주민층이 “계급의식화”되는 것이 현 사회체계를 혁명적으로 전복시키는 가장 긴급한 전제조건이라고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인간이 경제적 사회적 과정의 효과 아래서 혁명이라는 사회행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되도록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의미한다. 우리는 또한 레닌이 보통의 남자와 여자에게서 이런 변화를 격려하기 위해 - 그 변화를 가속하고 집중하여 정치적 세력으로 주조하기 위해 - 정치적 전위와 혁명당을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의식적인 사회주의 전사들로 구성된 전위에서, 사회적 상황에 대한 - 그것을 장악하는데 필요한 수단들에 대한, 사회주의로 전진해 나가는 방식에 대한 - 의식은 혁명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성취되려면 노동대중이 대체로 끌어올려지는 단계에 집중되어야 했다. 이것은 ‘통일전선’이라는 용어로 요약된 정책의 정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음 두 가지 사례는 우리가 계급의식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이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여주기에 그 자체로 충분할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새로운 시작」(Neu Beignnen)이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요구는 바로 즉각적으로 “혁명당”을, 문자 그대로 혁명적인 지도부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프롤레타리아트 속에 계급의식의 존재는 부인되고 있다.


“그들(제2, 제3의 인터내셔널)의 모든 통찰력과 행동의 기초는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내재하는 혁명적 자발성[자생성]에 대한 믿음이다. …… 그러나 그러한 혁명적 자발성이 사회주의당의 머릿속에만 있고 현실적으로는 없다면 어찌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 내부로부터, 즉 자연적인 사회적 힘에 의해 ‘최종적인 사회주의 투쟁’으로 결코 추동되지 않는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 그들[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론과 도그마를 통해서가 아니면 달리 생각할 수 없으므로 자발적인 혁명의 힘들 안에 있는 진정으로 종교적인 열정을 믿는다. ……” (s. 6)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이 1934년 2월 12~16일 사이에 보여주었던 보기 드문 영웅주의는 혁명적 자발성이 ‘최종적인 사회주의 투쟁’에 대한 의식 없이도 아주 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혁명적 자발성과 “최종 투쟁”에 대한 의식은 두 가지 사뭇 다른 사안이다. 


지도부가 혁명의식을 대중 안에 가져와야 한다고 우리는 듣는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래야 한다. 그러나 - 이번에는 우리가 물을 차례다 - 우리가 혁명의식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을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어쩔 것인가? 독일에는 마침내 대략 3천만 명의 반(反)자본주의적인 노동자들 - 사회혁명을 일으키기에 숫자로는 충분한 것 이상인 - 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가장 완강한 반자본주의적인 심성의 도움으로 파시즘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반자본주의적 심성은 계급의식인가 아니면 단지 계급의식의 시작일 뿐인가, 단지 계급의식이 만들어지는 전제조건일 뿐인가? 어쨌든,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레닌은 전위 개념, 혁명당 개념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대중 스스로가 자발적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 자체를 창조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노동자들은 사실상 사회-민주적 의식을 가질 수 없다고 이미 말해왔다. 그런 의식은 오직 외부로부터 도입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나라의 역사는 노동자계급이 방임되면 노동조합주의적 의식을 획득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즉 노동조합에서 함께 연대하고 기업가들에 대항해 투쟁하며 정부 등으로부터 합법적인 다양한 노동법률 형식들을 요구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달리 말해서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계급상황으로부터 ‘의식’을 끌어낸다. 그런데 이 의식은 사실이지만 자본의 지배를 뒤흔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자본의 지배를 뒤흔들기 위해서는 견고하게 조직된 당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른바 계급의식 또는 혁명의식의 예비적 형식들이나 요소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마 있지 않을까? 이 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일까?


피억압 계급 안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서 계급의식이라 불릴만한 것, 또는 그 요소, 또는 계급의식의 전제조건을 부인하는 것은 이러한 구체적 형식 안에서 계급의식이 인식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것은 지도부를 가망 없는 위치에 빠뜨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도부가 아무리 용감하고 잘 훈련되고 다른 점에서는 우수하다 할지라도,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이라 불릴만한 것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왜, 그 어떤 지도부도 계급의식을 부여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대중 안에 도입해야 한다고 상정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사회과정과 그것의 모순들에 대한 고도로 전문화된 이해인가? 자본주의 착취법칙에 대한 완벽한 지식인가? 혁명적인 러시아에서 빨치산들은 그렇게 장엄하게 싸웠을 때 그런 지식을 가졌는가? 아니면 아마도 그들은 아예 그것을 필요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과 농민들이었는가 아니면 단지 폭도들이었는가? 우리는 단지 그들이 그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단순한 실천과 경험에서 시작해 보자. 


얼마 전 어떤 정치집단 안에서 계급의식과 “대중적 규모에서 계급의식을 증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 관해 상당히 많은 논의가 있었다. 참석자들은 아마 처음으로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계급의식이라고 부를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논의 내내 아주 침묵했던 참석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필요에 대해 특수한 열정을 가지고 주장했던 지도적인 당 관리에게, 계급의식의 구체적인 다섯 가지 특징을, 그리고 아마도 계급의식의 발전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을 열거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만약 누군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려고 한다면 그 발전시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계급의식은 물질적 가난의 압박 아래에서 저절로 발전하지 않는지를 아는 것은 확실히 필요하였다. 질문은 논리적인 것처럼 보였다. 당 관리는 처음에는 약간 놀랐으며 잠깐 망설인 다음 확신에 차서 선언했다. “왜, 굶주림, 물론이지!” 즉각 “배고픈 돌격대원은 의식적인가?”라는 반대질문이 나왔다. 배고픈 도둑이 소시지를 훔칠 때 계급 의식적인가? 또는 반동적인 데모에 참여하기 위해 2 마르크를 받는 실업노동자는? 또는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청소년은? 그러나 공산당이 자신의 전체 대중심리학의 근거로 삼는 배고픔이 그 자체로는 계급의식의 요소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의 구체적인 특징들은 무엇인가? 사회주의적 자유는 히틀러가 약속하는 민족적 자유와 어떻게 다른가? 


지금까지 대답들은 아주 불만족스러웠다. 좌파 신문은 이런 종류의 질문을 제기하거나 답한 적이 있는가? 그러지 않았다. 피억압계급이 지도부 없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생성된 혁명적 의지에서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관념은, 확실히 잘못일 것이고 잘못이다. 그러나 그 반대 - 중요한 것은 지도부가 계급의식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지도부일 뿐이라는 것 - 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어떤 지도부도 계급의식의 시작이 이미 나타나지 않으면, 계급의식이 이미 자발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이제까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대중 속에 어떤 심리적 상황이 존재하고 그것이 사회혁명을 위한 주체적 전제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해서 혁명적 지도부의 고도로 발전된 의식과 조화를 이룬다면, 그러면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더욱 더 본질적이다. 우리의 정책은 늘 노동자들의 일상적 요구를 만족시키는데 있기 때문에 그 질문은 불필요하다고 누군가 반대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작업현장에 전기 선풍기를 설치해달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인가? 만약 나치 직장대표가 같은 일을 하고 우리의 대표 보다 더 말을 잘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는 노동자들을 자신의 편에 둘 것인가? 그래 그는 그럴 것이다. “일상적 관심사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방어와 파시스트적 방어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자유구호와 나치의 <기쁨을 통한 힘>이라는 구호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프롤레타리아 초심자의 계급의식과 프롤레타리아 청년 지도자의 계급의식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같은 것을 의미하는가? 대중들의 의식을 혁명적인 계급의식의 수준으로까지 증진시켜야 한다고 얘기된다. 만약 이것으로 우리가 혁명지도자가 지녀야 하는 역사과정에 대한 세련된 이해를 의미한다면 우리의 목표는 유토피아적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우리가 어떤 선전방법들을 사용하든 간에 그렇게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을 실제로 혁명과 전복의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광범한 대중 속에 결코 주입할 수 없을 것이다. 선거모임들에서 우리가 단순히 구호를 외치곤 할 때, 또는 베를린의 스포츠 궁전에서 가끔 일어나는 것처럼 당관리가 부르주아지의 재정정치학이나 미국과 일본 사이의 모순들에 관해서 박학하게 외치면서 수 시간을 소모할 때, 매 시간 대중의 자발적인 열정주의는 살해되었다. 대중이 객관적인 경제 분석에 관심을 가졌고 그 분석을 따라갈 수 있는 지적 도구를 가졌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수천의 청중의 ‘계급감정’이라고 옳게 불리는 것을 진정 죽여 버렸다.


최근의 혁명적인 맑스주의 정책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규정할 수도 없으면서 프롤레타리아트 에 이미 만들어진 계급의식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왔다. 그 정책은 사회적 과정에 대한 그 자신의 종종 부정확한 생각을 피억압계급의 의식 속에 투여해 왔고, 그럼으로써 최근 누군가 지적했듯이 스스로를 “주관적 관념론”이라는 죄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든 공산주의 모임에서 대중의 계급의식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으며, 그 분위기는 다른 정치 모임들의 분위기와는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광범한 대중 안에 계급의식 같은 어떤 것이 있음에 틀림없고, 이 의식은 혁명지도부의 계급의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도부의 계급의식과 대중의 계급의식이라는 두 가지 계급의식이 있고, 이 둘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지도부는 객관적인 역사과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획득하는 것 이외에 다음을 이해하는 것을 가장 긴급한 과제로 갖는다. 


(1) 각기 다른 사회층, 직업, 연령집단, 성별에 속한 사람들 안에 잠재해 있는 진보적인 욕망, 관념, 그리고 생각들은 무엇인가. 

(2) 이러한 진보적 욕망, 생각 등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욕망, 두려움, 사유, 관념(“전통적 속박”)은 무엇인가.


대중의 계급의식은 공산당 지도자들이 믿은 것처럼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 당 지도부가 믿는 것처럼 완전히 없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계급의식은 많은 구성요소들로 나타나며, 이 구성요소들은 그 자체로는 아직 계급의식을 구성하지 않지만(보기를 들어 단순한 배고픔) 서로 결합되어 계급의식이 될 수 있다. 이들 요소들은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반대의 심리적 의미들과 힘들에 침투되고 혼합되고 엮인다. 혁명당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제, 즉 대중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현재의 수준에서 더 고도한 수준으로 정제해 간다는 과제를 완수하는데 실패한 한에서만, 히틀러는 대중은 작은 어린아이들처럼 영향 받을 수 있다 - 대중은 당신이 그들에게 주입한 것을 단순하게 당신에게 되돌려 준다 - 는 자신의 공식을 가지고 성공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독일에서 진행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혁명지도자의 계급의식의 내용은 개인적(persönlicher)인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개인적 관심사(야망 등)가 있을 때 그 관심사는 혁명지도자의 활동을 금지한다. 그에 반해 대중의 계급의식은 (우리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소수의 의식적으로 혁명적인 노동자들을 말하고 있지 않다) 완전히 개인적이다.


전자(지도자의 계급의식)는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모순들에 대한 지식,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무한한 가능성들, 사회혁명이 생산양식과 전유양식 사이의 균형을 확립할 필요성, 역사의 진보적인 힘들과 퇴보적인 힘들 등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후자(대중의 계급의식)는 그렇게 장기적 측면의 통찰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대중의 계급의식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전자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회경제적 과정,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종속되어 있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외부조건들을 다룬다. 이 과정은 만약 그것의 노예보다 그것의 주인이 되기 원한다면 반드시 이해하고 파악하며 다뤄야만 한다. 보기를 들어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의 재앙과도 같은 위기를 제거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위한 굳은 근거를 창조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를 창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일본의 모순들에 대한 엄밀한 지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후자 유형의 계급의식은 미국-일본의 모순들에 또는 영국-미국 모순들에, 또는 심지어 생산력의 발전에 관해서조차 관심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 이것(대중들의 계급의식)은 엄청나게 다양한 사소한 일상적 문제들 안에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이러한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주체적인 반성들과 효과들에 의해서만 인도된다. 그 내용은 음식, 의류, 패션, 가족관계, 가장 좁은 의미에서 성만족의 가능성, 더 넓은 의미에서 성적 유희와 오락 즉 영화, 극장, 오락장, 공원, 댄스홀 등, 그리고 또한 어린이 양육, 주거공간의 배치, 여가 활동 등과 같은 그런 질문들에 대한 관심이다.  


존재 그리고 존재조건들은 남성과 여성의 심적 구조를 형성함과 동시에 그 구조 속에 반영되고, 닻을 내리고, 재생산된다. 객관적인 과정과 그것을 금지하는 또는 격려하는 그리고 통제하는 방식들은 이 심적 구조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접근 가능하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을 통해서만, 인간의 노동의지를 통해서만, 인간의 행복추구를 통해서만 - 간단히 말해 인간의 심리적 존재를 통해서 - 세계를 만들고 변화시킨다. “경제주의자들”로 타락해 온 “맑스주의자들”은 이것을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 전지구적 경제정치 정책은 만약 그것이 국제사회주의(민족사회주의가 아니다!)를 만들고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모든 나라 모든 수준에서 가장 광범위한 대중의 욕망과의, 사소하고 진부하고 일차적이고 단순한 일상생활과의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 이 방식을 통해서만 객관적인 사회학적 과정은 남성과 여성의 주체적 의식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둘(두 가지 계급의식) 사이의 모순과 거리를 없앨 수 있다. 부와 문화의 물질적 기초를 창조하는 노동자들에게 문화와 교육이 “최고에” 달한 단계를 보여주어야 하며 그것과 그들 스스로 사는 방식을 대비시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겸손한지 또 그들이 얼마나 겸손의 덕을 만드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비록 이것이 때때로 실제 혁명적 덕이라 불리어 왔을 지라도! 이 두 가지 계급의식을 합하는데 성공할 때만이 그리고 그러고 나서만이 우리는 전술 등에 대한 철학적인 당내 논쟁을 해 나갈 것이다. 또 오직 그러고 나서만 우리는 활기 있는(살아있는) 대중운동의 살아있는 전술로, 삶에 진정으로 연관된 정치활동으로 돌파해 나갈 것이다. 만약 노동자운동이 책에서 뿐 아니라 일차적으로 대중의 삶에서 자신의 선전과 전술들과 정책들을 도출해 냈다면, 노동자운동이 끊임없이 연속되는 분파적 학자적 투쟁이나 분파와 분리집단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다고 - 노동자운동은 가장 자명한 것, 즉 사회주의를 향한 험난한 길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결코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상황의 한 측면은 젊은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많은 문제에 있어 그들의 “지도자들”에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젊은이들이 당연한 일로 이해하고 있는 성과 같은 것들에 관해 “전술적으로” 또는 “재치 있게” 지도자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반대여야 한다. 즉 지도자는 첫 번째 계급의식의 축약도이어야 하며 두 번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도록 일해야 한다. 


노동자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익숙한 사람이면 누구나 다소간 기꺼이 멀리까지 우리를 따를 것이며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왜 이야기[담론]가 긴가? 우리가 핵심을 찌르려고 할 때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많은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맑스와 레닌을 우리와 대립시키려고 촉구할 것임을 그는 머지않아 알 것이다. 그렇게 경도된 사람은 누구나 그 이상의 것을 읽기 전에, 우리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계급의식의 다섯 가지 구체적인 요소들과 계급의식의 다섯 가지 장애물을 밝혀보라고 시험적으로 다시 한 번 권한다. 


다음 진술은 계급의식을 윤리의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 쪽의 상당한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정점에 파시즘과 교회를 두고 있는 정치적 반동은 대중이 현세에서의 행복을 거부해야한다고 요구한다. 정치적 반동은 정조[순결], 복종, 자기 부정, 민족과 인민과 조국을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 문제는 반동들이 이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이런 요구에 순응함으로써 그 반동들을 지지하고 반동들이 살찌도록 하며 그들의 힘을 키우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동들은 대중 개개인이 죄의식, 타고난 겸손함, 궁핍을 조용하고 기꺼이 때로는 행복하게 감내하는 경향을 이용하며, 영광스런 지도자[총통](그 지도자의 “인민에 대한 사랑”이 대중에게는 그들의 욕구의 모든 실질적인 만족에 대한 대체물이다)과의 동일시를 이용한다. 혁명전위는 자신의 존재조건들과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들을 통해서 스스로 유사한 이데올로기에 빠진다. 그러나 청년지도자들에게 타당한 것이 그들이 이끈다고 하는 젊은이들에게 결코 타당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주민대중을 자본에 대항해 전쟁으로 이끌어 나가고, 그들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그들을 반란지점으로까지 이끌어 가기를 원한다면, 그 때 그는 체념의 원리가 해롭고, 생기 없으며, 어리석고 반동적임을 알아야 한다.


사회주의는 사회적 생산력이 모든 나라의 가장 광범위한 대중에게 사회의 평균적 문화에 상응하는 삶을 확보해주도록 충분히 발전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정치적 반동이 설파하는 체념의 원리에 대항하여 우리는 지상에서의 행복과 풍요로움의 원리를 세워야 한다. 이것으로 우리가 볼링 시합과 맥주 마시기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지적할 필요는 거의 없다. “단순한 사람”의 겸손함은, 파시즘과 교회의 눈으로는 최상의 덕이지만, 사회주의적 관점에서는 가장 큰 잘못이며 자신의 계급의식을 방해하는 많은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자라도 모든 노동자에게 행복한 삶을 제공하기에 충분한 부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것보다 좀 더 철저하게 좀 더 일관되게 좀 더 자세하게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는데 관련이 있는 과학적 학식에 모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독일이나 다른 곳의 평균적 노동자는 혁명적인 경제적 성과 자체로서 소련의 5개년 경제계획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것이 노동자들의 욕구만족의 증대를 의미하는 한에서만 관심을 가졌다. 평균적 노동자의 생각은 다소 다음과 같다. 즉 만약 사회주의가 우리에게 희생, 체념, 가난 그리고 궁핍만을 의미하게 된다면, 그 때 우리는 그런 빈궁이 사회주의라고 불리든 자본주의라고 불리든 상관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경제가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욕구의 성장과 보조를 맞춤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게 하자.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도부의 영웅주의는 광범위한 대중에게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대중이 혁명기간 동안 궁핍을 견딘다면, 그들은 이런 궁핍이 자본주의 아래서 겪는 궁핍과는 다르며 단지 지나가는[과도적] 국면일 뿐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것이 “일국 사회주의”론에서 생기는 많은 어려움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이런 진술이 분노한 부정들을 만날 것이라고 충분히 기대한다.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쁘띠 부르주아적”이고 “쾌락주의적”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비록 그가 토지분배가 “쁘띠 부르주아 심성”을 촉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에게 지주의 토지를 분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구호의 힘 위에서 바로 레닌은 농민들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농민들과 함께 혁명을 완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매우 고상한 사회주의 정치이론의 원리인 집합주의 원리를 의심의 여지없이 깨뜨렸다. 다른 한편 1919년에 헝가리 혁명가들은 고상한 원리들을 지녔지만 주체적인 요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역사의 요구들을 알았지만 농민의 요구들을 몰랐다. 그들은 토지를 단번에 사회화했고 그리고 혁명을 잃어버렸다. 이 예는 다른 여러 요소들을 대신해서, 사회주의의 궁극 목표는 대중 개개인의 즉각적인 목표들을 충족시킴으로써, 대중의 욕구를 훨씬 더 커다란 정도로 만족시킴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단지 그 이후에만 혁명적인 영웅주의는 광범위한 대중 속에서 발생할 수 있다. 


“계급의식”이 윤리적 개념이라는 견해만큼 멀리까지 나아간 실수들은 거의 없다. 금욕적인 혁명관은 말썽을 일으키고 패배를 가져왔을 뿐이다.  


우리는 몇 가지 보기를 살펴봄으로써 계급의식이 윤리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비윤리적이고 합리적인 현상인지를 쉽게 시험할 수 있다. 


만약 ‘가’와 ‘나’라는 두 사람이 굶주리고 있다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도둑질 하는 것을 거부하고 구걸하거나 배고파 죽을 수 있다. 그에 반해 다른 사람은 음식을 얻기 위해 린치를 가할 수도 있다. 종종 “룸펜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불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많은 부분이 ‘나’의 원리에 따라 살아간다. 비록 범죄적인 지하세계를 낭만적으로 추앙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에 관해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유형 가운데 어느 쪽이 자신 속에 계급의식의 더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가? 도둑질은 아직 계급의식의 신호가 아니다. 짧은 순간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의 내적 도덕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배고플 때 법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훔치는 인간, 즉 살려는 의지를 분명히 보이는 인간이 저항하지 않은 채 푸주간 널빤지 위에 앉아 있는 인간보다 자신 속에 더 많은 에너지와 싸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올바른 심리학의 근본 문제는 왜 배고픈 인간이 훔치는가가 아니라 그 정반대의 것, 왜 배고픈 사람이 훔치지 않는가 라고 계속 믿는다. 


우리는 도둑질은 아직 계급의식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걸 고수한다. 벽돌은 아직까지 집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벽돌들을 사용해서 집을 짓는다. 물론 그밖에 판자, 회반죽, 유리, 그리고 (여기서 나는 당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다) 엔지니어, 석공, 목수 등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만약 우리가 계급의식을 윤리적 정언명제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결과적으로 청년의 성, 매춘부와 범죄자의 사악함, 그리고 도둑들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는데서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보다 더 나아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갈 데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만약 우리가 반대의 관점을 택한다면 우리가 혁명의 이해를 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정치적 반동이 우리의 비도덕적 계급의식 개념을 우리에 반대하는 선전으로 돌릴 수 없었을까? 확실하게 그럴 수 있었으며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더할 나위 없는 도덕성을 증명하려고 해도 정치적 반동은 어쨌든 그렇게 간다. 도덕성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희생자들을 이해한다고 그들이 느끼지 않으므로, 도덕성은 자본주의의 희생자들을 정치적 반동의 품 안으로 끌어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반동의 눈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더 낫지는 않다. 정치적 반동의 눈에 우리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없애려 하기 때문에 도둑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근본적인 의도를 포기하거나 숨기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 반대해서 인용되지 않는가? 


예외 없이 오늘날 도덕성과 윤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노동하는 인간의 억압에 기여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생활의 새로운 질서가 정확히 비도덕적인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혼돈을 실질적인 질서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윤리라는 질문에 대한 레닌의 태도는 분명히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었다. 혁명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이든 윤리적이며, 혁명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비윤리적이다. 자 이제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정식화해보자. 부르주아 질서에 모순되는 것은 무엇이든, 전복의 싹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계급의식의 요소로 간주할 수 있다. 부르주아 질서와의 유대[속박]을 창출하거나 유지하고 부르주아 질서를 지지하고 강화하는 것은 무엇이든 계급의식에 방해물이다.


1919년 11월 혁명 동안 대중이 베를린에 있는 동물원(Tiergarten)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을 때 시위자들 대부분은 잔디를 밟지 않으려고 상당히 신경을 썼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건 단지 그럴듯하게 꾸민 이야기이건 간에 혁명운동의 비극이 지닌 중요한 측면을, 즉 혁명 담지자들의 부르주아화를 요약해 준다.  


2. 대중개인에게서 계급의식의 몇 가지 구체적 요소들과 몇 가지 저해요소들


우리는 지금 이론적인 설명으로 아주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서 평균적인 인간의 일정한 행동방식을 기술하려고 할 것이다. 그 행동방식 가운데 일부는 혁명의식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반면에 다른 일부는 혁명의식의 발전을 방해한다, 즉 반동적인 심적 태도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좌익 또는 우익 어느 쪽으로든 향하는 그런 심적 사실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지, 정치적으로 무관심 하지만 어떤 정치적 지향에 이득이 될 수 있는 사실들, 가령 웅변가적 재능, 비판능력, 자연사랑 등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음 예들은 자유롭게 부풀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 특수한 예들은 두 젊은이의 도움으로 내가 만들었다. 


청소년들(사춘기와 사춘기 이후)의 경우


모든 색깔의 정당은 청년들을 획득하기 위해서 늘 투쟁해 왔다. 젊은이들이 그들 앞에 어떤 미래를 가지고 있기 (익살스럽게 말하면 “자신들 뒤에 미래를 가지고 있는” 대개의 어른들과는 달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년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다. 청년들이 열광하고 기꺼이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은 성적 성숙의 결과인데 청년을 가장 능동적인 연령집단으로 만든다. 이러한 특질들은 아직 그 자체로는 특별히 좌익 또는 우익 쪽으로 향하지 않는다. 보기를 들면 교회는 좌익정당들보다 더 많은 청소년들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청소년들을 좌익이나 우익으로 정치적으로 추동하는 그들의 삶 경험 속에 있는 요소들을 구별해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모든 청소년들에게는 권위주의적 억압에 대해, 특히 보통 국가권위의 집행인들인 부모에 대해 반항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바로 이러한 반항이 청소년들을 정치적인 좌파 흐름으로 끌어간다. 그 반항은 청소년들의 성생활을 실현하고자 하는 다소 의식적이고 다소 긴급한 욕망과 늘 연관되어 있다. 청소년의 자연스런 이성애적 이끌림이 더욱 분명하게 발전될수록, 그 청소년은 더욱 더 혁명사상에 열린다. 그에게서 동성애적 욕구가 강할수록 또한 성 전반에 관한 그의 인식이 더욱 더 억압될수록, 그는 더욱 더 쉽게 우익으로 끌려갈 것이다. 성금지, 성행위에 대한 두려움, 이와 함께 하는 죄책감은 늘 청소년들을 정치적 우파로 밀고 나가는 또는 그들의 혁명적 사고를 적어도 금지하는 요소들이다.


부모와 부모의 집에 묶이는 것은 중요하고 불가역적인 금지요소이다. (우리는 결코 계급의식의 긍정적 요소가 될 수 없으며 그래서 사회혁명을 위해서 혁명당이 결코 사용할 수 없는 그러한 심적 사실들을 불가역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러한 규칙에 유일한 예외들은 이미 혁명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부모들의 어린이[자녀]들이다. 부모에의 속박은 그러한 경우에 긍정적인 효과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부모에의 속박은 종종 부모에 대한 대항으로서 반동적 심성으로 이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청년을 움직이는 특별한 욕구가 있다. 이 욕구의 만족은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이상의 것을 의미할 것이지만 아직 그 욕구는 청년을 위한 어떤 선언이나 강령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살 공간에 대한 요구이다. 이 요구는 계급의식의 긍정적인 요소로서 부모에 반대하는 저항으로 분류될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정치적 반동이 설립하거나 유지하기를 원하는 종류의 질서로는 만족시킬 수 없는 욕구이다. 그것은 어떠한 금지요소와도 대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반동적인 소녀들 사이에서조차 강력하다. 청년집합체 안에서 살고 싶어 하는 욕구는 더욱 긍정적인 요소이지만, 이것은 그 집합체가 가정의 자리를 차지하면 제거할 수 있는 가족속박들, “가정생활에 대한 사랑” 등과 대립된다. 무도장의 매력은 거의 모든 청소년에게 강력하게 작용한다. 부모의 속박과는 달리, 이것은 가역적인 요소이다. 즉 그것은 일상적인 환경 아래에서는 혁명의식을 금지하는 반면, 정치와 사생활 사이의 문제가 혁명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면 혁명의식을 강하게 촉진할 것이다. 독일의 몇몇 예외적으로 재능 있는 청년조직가들은 종종 이와 관련하여 성공적이어 왔다. 


오늘날 집합 본능과 댄스홀의 매력 둘 다 독일의 정치적 반동에게는 상당이 유리하다. 독일의 정치적 반동은 이런 요소들을 조직화해왔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집결(Kranzchen)의 형식으로, 나치는 의심의 여지없이 집합적 청년결사체들로 조직해 왔다. 


다음 보고는 독일에서 받은 것이다. 


나는 최근 휴일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베를린에서 온 17살 여학생과 얘기를 하였다. 그녀는 빌머스도르프(Wilmersdorf)에서 학교에 다니는데, 우리의 대화에서 우연히 나온 몇 가지 사태는 확실히 여러분은 흥미롭게 할 것이다. 


히틀러청년대와 독일소녀연맹의 소년소녀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전대미문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무엇보다도 성행동과 친구관계에서 나타난다.


과거에는 어떤 여학생도 방과 뒤에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감히 보이지 않았다. 요즘에는 소년들(특히 히틀러소년대원들)이 학교 밖에서 군중 속에서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모두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독일소녀연맹은 ‘나는 안기고 싶어요’를 의미한다고 모두 말한다. 독일소녀연맹의 다렘(Dahlem) 집단은 18세 이하의 여섯 소녀들이 임신하게 되어서 해체해야 했다. 


청년들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부모집의 구속을 느슨하게 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은 흥미롭지 않은가? 그동안 내가 확인한 바대로 이러한 사례들은 확실히 징후적이다. 


이 소년 소녀들이 “전대미문의 자유를 즐긴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 거기에 포함된 진정한 관계들, 모순들, 요구들을 알 수 없다. 임신하고 남자친구들이 학교에서 기다리는 것 등은 쁘띠부르주아적 관점에서만 “성자유”로 나타난다. [베를린 중산층 거주지역인] 다렘의 젊은이들이 오늘날 얻고 있는 자유는 [노동자계급 지역인] 노이쾰른(Neukolon)에서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왔다. 전체적으로는, 먼저 히틀러소년단의 심각하게 모순된 상황, 즉 한편으로는 매우 엄격한 권위주의적 군사훈련과 남녀분리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집단화를 통한 가족예속의 파괴를, 즉 완고한 파시스트 가족이데올로기의 강요에 대한 강조와 함께 가족도덕의 극심한 교란을 보아야 한다. 독일 혁명가들은 이러한 모순들의 전개를 면밀히 따라가 관련된 당사자들에게 그 모순들을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특정한 사례에서 우리는 젊은이들이 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환영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벗어남[분리]과 지도자[총통] 및 가족이라는 공식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모순을 분명하게 분석해 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가부장적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자기결정으로 가기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이 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입을 닫아야만 하는 또 다른 권위주의적 관계 - 노동수용소나 파시스트 조직의 권위주의적 관계 - 속으로 들어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정확히 성 영역에서 이러한 모순들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보고서에서 기술된 ‘더 자유로운 행동’은 아무리 주관적이고 모호할지라도 혁명적인 한에서 히틀러청년단 안에서의 진보적 경향들에 일치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혁명적 사회지도부도 몇몇 소녀들이 임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집단을 폐쇄한 적은 없다. 우리의 통신원이 순진하게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은 그가 기술하고 있는 행동형식들이 결코 나치당을 즐겁게 하지 않으며, 진정 나치당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히틀러 청년들과 소년들이 완전한 자기결정권을 가지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성 욕구를 포함하여 그들의 욕구를 위해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의무라는 것을 그들에게 완전히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만약 요즘에 발생하고 있는 것을 성자유로 여긴다면 우리는 두 가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이 작은 정도의 자유조차도 국가기관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것. 두 번째, 이것들은 단지 자유의 단순한 미광에 불과하다는 것. 


전체 국가와 사회이데올로기가 자유에 반대하는 한, 

소녀들과 청년들이 방해받지 않고 있고 싶어 할 때 갈 데가 전혀 없고 피임도구가 없고 성생활 일반의 어려움들과 필수품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한, 

그들이 그들의 성생활의 출발부터 갈등을 동반하는 식으로 양육되는 한, 

그들이 자신들의 학교의 성격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생활을 위한 준비방식에 대해서 그들의 선생님들과 함께 결정할 수 없는 한, 

그들이 프러시아왕들의 생일과 죽은 날을 공부해야 하지만 베를린 및 함부르크의 교외에, 쥐터보그에 그리고 가장 먼 시골마을에 사는 빈민들의 역사를 배우지 않는 한, 

자유에 관해서 말할 수 없다. 


단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지도자[총통]를 섬기거나 ‘조국의 이익’으로 가장된 자본가적 이익을 위하여 죽는 것이 젊은이들의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의 이상은 그들 자신의 삶을 소유하고 그것을 그들이 원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일 것이다. 젊은이들은 오직 그 자신에게만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오직 그리고 나서만이 사회와 그 사회의 젊은이들 사이의 틈이 사라질 것이다. 


청년들이 오늘날 자신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그 틈의 본성을 이해한다면, 청년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억압받고 있다고 인식할 것이며 사회혁명을 위해 무르익게 된다. 청년들이 그 틈을 없애고 사회현실을 자신들의 욕구에 맞추어 나가고 자유를 향한 자신들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충동할 수 있는 길을 밝힌다면, 청년들은 사회혁명의 집행자가 된다. 


우리는 모든 나라와 대륙의 청년들에게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우리는 청년의 욕구들과 모순들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이 필요성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욕구들과 모순들 중심에는 청년의 성생활이라는 엄청난 문제가 있다. 


정당들이 보통 지니고 있는 생각들과는 반대로, 우리의 청년작업은 평균적인 청소년의 계급상황에 대한 통찰이 매우 피상적이고 불확실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진정한 통찰은 아주 드물며, 지적으로 조숙한 청소년들이나 억압을 전혀 겪지 않은 혁명적 가정의 청소년들 사이에서만 발견된다. 산업적 견습생이 되는 것은 혁명적 심성 보다는 둔중한 무관심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견습생 심성은 계급의식의 다른, 좀 더 구제적인 요소들과 보기를 들어 만족스러운 여가활동에 대한 요구와 결합해서만 적극적이게 될 수 있었다. 통속적인 견해와는 달리 배고픔도 그 자체로는 계급의식으로 이끌기보다는 갱 등으로 이끄는 퇴폐시키는 요소이다. 


우리는 청년공산주의자동맹에서 보다는 기독교조직들에서나 청년 친위대에서 종종 또는 더욱 종종 배고픔과 다른 궁핍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만난다. 궁핍은 낭만적인 경험을 향한 욕망, 성적 요구, 부모관계와 관련되면 강력한 적극적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배고픔이 퇴폐화하지 않을 때는 저절로 종종 젊은이들을 다양한 부르주아 복지조직의 품속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경험은 배고픔은 보기를 들어 쉽게 계급제도라고 인식할 수 있는 집에 처박히는 것에 대한 공포를 동반하면 젊은이들에게 훨씬 더 혁명화 하는 효과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도자들과 이념들에 속박되는 청소년들의 경향은 정치적으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한 경향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혁명당이 개입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틀어나가지 않으면 쉽게 해로운 요소가 된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 군복(이것은 소녀들을 즐겁게 만들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을 입은 남성을 좋아하는 것, 행진곡 등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조건 아래에서는 일반적으로 반혁명적 요소들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반동은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보다 큰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축구는 직접적으로 탈정치화하는 효과를 지니고 청년의 반동적 경향을 고무시킨다. 그럼에도 이러한 경향들은 원칙적으로 반대로 바뀔 수 있다. 즉 우리가 순전한 배고픔의 강력한 본성에 대한 경제주의적 견해를 버린다면, 그 경향들을 좌익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청년혁명조직들에서 아주 높은 조직원이동은 내가 기술해 온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혁명조직들은 혁명적 경향들을 적절하게 개발하지 않아 왔고 금지하는 요소들을 적절하게 다루지 않았다. 젊은이들에게 계급감각(klassenmässigen Fühlen)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혁명적 작업의 심리학적 결점들 때문이다. 아주 작은 소수만이 조직에 머물고 그들조차도 몇 년 동안만 머문다. 나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어떤 그림들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경험은 지난 10년 동안 모든 삶의 여정에서 수백만의 어른 남성과 여성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이 혁명조직에 대한 어떤 지속적인 충성심이나 유대를 형성하지 않고 혁명조직을 통과해 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이 그들을 우리 조직 속으로 끌어들였는가? 제복이나 물질적 혜택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불분명한 사회주의적 헌신, 그들의 계급감각일 뿐이다. 왜 그들은 (우리 조직에) 머물지 않았는가? 조직이 이러한 [계급]느낌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무관심이나 정치적 반동에 빠져들어 갔는가? 그들은 또한 자신들 안에 우리가 파괴하지 못한 반혁명적인 부르주아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지 못했는가? 또는 왜 적극적인 요소들을 개발하고 촉진하는데 실패했는가? 우리는 무엇을 파괴해야 할지를 그리고 무엇을 촉진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단순한 “훈련”은 충분하지 않았다. 음악과 행군도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에서 훨씬 더 나았기 때문이다. 구호들 또한 구체화시키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정치적 외침에서는 우리보다 더 나았기 때문이다. 혁명조직이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실제로 혁명조직이 대중에게 제공하지 못한 것, 우리에게 몰려온 대중을 붙잡아두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매혹했던 유일한 것은, 자유와 권위주의적 보호를 동시에 갈망하는 이러한 무지하고 억압받는 자본주의의 쿠리들이 실현하지는 못하지만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다른 말로 표현하고 그들을 위해서 그들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그들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심리학을 반혁명적이라고 거부하는 조직은 그런 과제를 감당할 수 없었다. 


여성의 경우


여성의 경우 계급의식은 어떻게 보이는지 거칠게 묘사해 보자. 

“생산과정 속에의 통합”, “남성에 대한 의존의 종결”,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라는 정식들(그리고 그 정식들을 반복하는 것 이상으로 행해진 것이 없다)은 많은 것을 획득해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독립에 대한, 남성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무엇보다도 성적 독립에 대한 바람은 무엇보다도 여성의 계급의식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한편 속박되고자 하는 여성의 강한 경향은 몇 가지 특징적인 공포들에 의해 다시 강화 된다. 즉, 부양자로서의 남편의 상실을 포함하는 소련식 결혼입법에 대한 공포, 법적으로 허용된 성 상대를 갖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 자유로운 삶 일반에 대한 공포. 이것들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적어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금지요소들이다. 


특히 아이의 집단양육은 부모로부터 “아이를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공산주의적 여성들 사이에서조차 분명한 정치적 사유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왔다. 그들이 종종 그러한 제안들을 지지하여 말하는 정당모임들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그들의 남편과의 사적인 갈등들에서. 물론 훨씬 더 커다란 범위의 쁘띠 부르주아 여성들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경제적 속박과 성적 제한으로서의 결혼에 반대하는 반항은, 여성의 관심사의 바로 중심에 있는 이러한 가슴 아픈 문제들을 객관적이고 진실로 밝혀낼 때에만 혁명운동의 가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대신에 우리의 선전가들은 이러한 것들 자체에 관해 결코 분명하지 않았는데 한편으로 소련결혼체계를 칭송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에서 결혼들이 다시 더욱 견고해졌다는 사실을 환영함으로써, 그 쟁점을 혼동하였다. 이것에 대한 평균적인 여성의 반응은 “당신이 결혼과 가족의 폐지를 선전하고 있는 동안 그곳의 여성들은 여전히 남편들에 의존해 있다”든가 또는 반대로 “당신은 바로 우리를 무력하게 남자의 손에 집어넣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모순들은 전문적 심리학자 집단에 의한 가장 자세한 과학적 조사와 정치조직들에 의한 가장 세심한 처리를 요구한다. 결국 우리는 바로 그들의 노동의 본성에 의해서 더욱 정치적으로 성숙하고 더욱 확실히 좌익적인(그리고 우리가 또한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산업여성노동자들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개는 가정주부들, 가사하인들, 가정부들, 소상인들, 상점보조자들 등의 압도적 다수를 다루고 있다. 경험은 보기를 들어 혼외정사나 그것에 대한 욕망이 반동적인 영향력들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아주 효과적임을 증명할 수 있는 요소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것은 늘 결혼 안에서 안정욕망과 함께 간다. 따라서 우리는 소련에서 혼내정사와 혼외정사의 전통적 구별이 사라져 왔다고 여성들에게 말함으로써 그것을 적합한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다. 많은 여성들은 일에서는 혁명적이지만 집에서는 반동적이다. 이것은 주로 여성들의 도덕적 문화적 태도가 아직 그들의 비판능력과 그들의 경제적 성적 관심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부르주아 조직의 “여성권리”활동은 강한 혁명적 충동에 근거하고 있다. 일부는 의식적이고(경제적 의존에 대하여) 일부는 보통 무의식적이지만(성적 의존에 대해서) 그러나 모두 현존질서를 바꾸려는 데로 향하였다. 사회주의만이 그들의 질문에 대한 실천적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여성들의 이데올로기적 혼동을 밝히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은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상호 모순적이며 여성들이 목표를 정식화할 수 없고 그래서 팽크허스트 스타일의 반란이나 감상적인 반란의 형식에 의거해 왔지만 그들의 목표는 진정 사회주의적이라는 것을 여성들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사회생활과 관련하여 개인생활의 수많은 사소한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적어도 사태를 활기 띠게 할 수 있었다. 토론이 시작될 것이고,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사람들(보기를 들어 사회주의자들)이 만약 정통적인 유형에 관한 당논쟁들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 토론들을 장악할 것이다. 반동들은 어떤 실제적인 객관적 논증에서도 완전히 패배할 것이다. 


1933년 말에 매우 기이하고 자극적인 운동이 일부 독일여성들 사이에서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책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좋은, 일에서의 이러한 변증법의 사례였다. 이 여성들은 가정에 구속되는 것에 항의했다. 이것은 혁명적일 수 있던 항의지만, 그럼에도 그 여성들은 “브룬힐데 같은 독일활동가”가 됨으로써 (그런데 이것은 이 형식에서는 반동적인 것이다) 그것을 대체하기를 원했다. 우리는 나치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촉진했던 모성 이데올로기는 폭로되어야 할 반성적(antisexullen) 핵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어머니라는 것은 연인이라는 것의 반대로 제시된다. 여성들은 어머니이자 연인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성들은 자본주의적 도덕성이 그들 안에 창조해놓은 모순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반동의 압박 아래에서 여성들은 스스로가 성적 존재임을 부인한다. 


여성권리운동은 그것이 계급감각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 현재 형태에서는 반동적이지만, 사회변화를 향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쉽게 반대로 바꿀 수 있다. 여성들의 경우에 현실의 배고픔과 자녀를 먹여 살리는데 대한 불안만으로는 혁명적인 심성으로 거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발견한다. 훨씬 더 종종 이것은 남편들이나 다 자란 어린이들의 정치활동과는 반대로 정치 일반에 대한 공포로, 우둔함과 매춘으로 이끌고 간다. 그러한 걱정들과 공포들을 관련된 다른 힘들 및 반대힘들과 올바른 방식으로 결합시키면 계급의식의 효과적인 추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보기를 들어 오늘날 여성의 혁명적 사상과 느낌에 심각한 방해물인 예쁜 옷을 좋아하는 것, 화장 등이 반대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혁명조직이 여성대중을 공산주의적 여성의 검소한 외모에 적응하도록 설득시키는데 성공할 것 같지는 않다. 부르주아적 매력과 공산주의적 금욕주의 사이에서 계급투쟁의 요구와 여성의 자연스런 건강한 허영 양자를 만족시키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그러한 것들에 관심을 둘만한 가치가 없다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정치적 반동이 독일 여성을 매혹하고 장악하는 강령을 연구하도록 조언한다. 


여성운동이 직면한 주요한 문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가족의 미래와 아이의 양육이다. 독일의 성정치(섹스폴) 운동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란 남성, 여성, 어린이의 공동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새로운 형태를 제기할 뿐이고 볼셰비즘 아래에서 이른바 가족의 폐지는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성적 이해관계를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수많은 여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오늘날 독일에서 가족이데올로기의 발전은 가장 세심한 관심을 받을만하다. 보기를 들어 가족생활과 친위대 복무 사이의 갈등 말이다. 여성과 관련한 우리의 미래의 정책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세심한 이해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파시즘의 성적이고 도덕적인 경향들 아래에서 매춘이 필연적으로 증가할 것이므로, 프롤레타리아정책은 또한 매춘부들을 우리의 대의에 끌어들이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독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계급의식이나 계급의식의 시작이 주민 속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지를 가리킬 수 있다. 사건들은 혁명지도부가 유용하게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암시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미 “브룬힐드처럼 하기”운동, 즉 결혼과 부엌의 예속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모호한 반란을 언급해 왔다. 


얼마 전에 괴벨스(Goebbels, 나치 선전장관)는 나치들에게 극도로 황당하게 하는 관련 질문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는 정권을 잡은 후 낙태와 피임에 관한 현행법을 상당히 옥죄었고, 어린이의 교육을 종교조직 및 군사조직에 넘겼으며, 가족을 민족과 국가의 그 기초라고 선언하고, “독일 여성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라는 모토를 시작으로 하여 단발머리를 비난하고, 갈보집을 다시 열었으며, 남성들에게 다양한 태고적 특권들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나치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능과 일치하여 극단적인 문화적 반동의 과정에 착수했다. 많은 나치당 관리들이 이러한 조치들을 그것들이 의미하는 대로 정확히 수행했다는 것은 당연했다. 어떤 작은 시골에서 비누회사가 손에 비누 세트를 들고 있는 작은 소녀를 보여주는 포스터를 발행했다. 그것이 주민의 “도덕감각”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지역 나치 보스[지도자]는 즉각 그 포스터를 금지했다. 이러한 것과 유사한 사건들이 괴벨스로 하여금 “정조에 대한 허가받지 않은 도덕적 판사들과 위선적 사도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도덕적 참견”과 “소도시와 농촌에 자경단을 세우는 것을 가장 귀중한 바람으로 삼는” 사람들을 경멸하였다. 그러한 체계는 정보제공자들과 협박자들을 북돋울 수 있을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여성들은 이미 외출하거나 혼자 음식점에 가는 것을, 여성보호자 없이 젊은 남자와 저녁을 보내는 것을, 보석을 걸치거나 화장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이 집에서나 파티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들을 도덕적 일탈자들로 만들지는 않는다.” 국가사회주의는 경건주의 운동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즐거움을 빼앗겨서는 안 되었다. 목표는 더 많은 삶 긍정과 더 적은 위선, 더 많은 도덕성과 더 적은 도덕주의적 태도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한 진술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연설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평균적인 독일 여성은 격렬하게 분개하면서 나치의 문화정책에 반발해야 했거나 그렇지 않았다면 괴벨스는 그가 했던 것처럼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분노는 엄청나야 했거나 그렇지 않았다면 괴벨스는 좀 더 초기의 경우에 로엠(Roehm)처럼 나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 움직임에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치 지도자들은 대중심리에 극도로 능숙하며, 자신들의 세계관의 한 원칙을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맘대로 지워버릴 것이다. 

셋째, 현실에서, 괴벨스는 이런 문제에 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반동적인 이데올로기를 지닌 나치즘과 혁명적인 그 추종자들 사이의 모순 - 모든 영역에서 분명한 모순 - 을 이해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는 순수하지 않고 모호한 형식 속에서 여기에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의 요소를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분명하게 하면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나치 추종자들로 하여금 나치즘의 반동적 결과들을 깨닫게 만함으로써 그들이 지닌 혁명적 심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올바른 종류의 선전에 의해서 사회당원으로 하여금 자신의 쁘띠부르주아적 금지들을 깨닫게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친위대를 단지 반동분자로 대하고 사회당원을 단지 아직 “빛을 보지” 못한 혁명가라고 대하는 대신에, 모든 모순들을 끊임없이 강조해야만 한다.

다섯째, 괴벨스가 한 그런 연설은 최근 들어 의심을 품기 시작한 나치 추종자들을 즉각적으로 안심시켰음에 틀림없다. 제3제국[나치독일]에서 여성의 성이란 전체 문제의 해결할 수 없는 본성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는 한 그러한 연설은 새로운 지지자들을 얻고 적들의 확신을 흔들 것이 틀림없다. 

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가?


가족을 공동화하고 여성을 부엌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일부 과열된 나치 관리들이 적용한 것과 같은 억압적 조치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들은 괴벨스가 그에 따른 불만족을 줄이려는 자신의 시도에서 연설하는 “삶 긍정”과 완전히 모순된다. 더욱이 나치이데올로기의 바로 핵이자 핵심은 그것의 도덕성(명예, 순수성 등)이다.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모임에서 일어서서 “도덕성”과 “도덕주의적 태도”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 질문은 (늘 그것이 완전히 말해진다는 조건에서) 심각한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만약 한 여성이 젊은 남성과 외출하는 것을 금지시킨다면, 그것은 도덕주의적 태도이지 나치가 요구하는 도덕성은 아니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젊은 남자가 그 여성과 키스를 한다면 어찌되는가? 또는 더 나쁘게는, 그가 그녀와 성교를 하고 싶어 한다면 어찌되는가? 그것은 삶의 즐거움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나치 관리가 이 점에서 양보하고 실제로 자유연애(이것은 결코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을 것이다)의 가능성을 허용한다면, 다음 질문이 나올 법 하다. 그러한 것들이 공공연하게 허용된다면 그것은 결혼의 역할과 가족을 약화시키지 않을까? 그리고 그 결과로 태어날 수 있는 모든 어린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나치의장이 지금 어린이는 그 부모가 아리아인인 한에서만 어린이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교할 때마다 임신을 해야 할지를,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 반대하여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를 당연히 물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천개의 불법적 소책자들보다 훨씬 더 나치들을 당황하게 만들(그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를 대신해서 선전을 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완전히 비정치적인 형식의 살아있는 공적 논쟁을 개시할 것이다. 계급의식은 없는가? 왜, 그것을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찾아낼 수 있다! 감옥에서 방황하기 때문에 대중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가 없는가? 모든 나치를 괴롭히는 몇몇 질문들, 반동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바로 질문해라, 그러면 당신은 계급의식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중단할 수 있다. 비합법적인 전위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감춰져 있다! 이것들은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이지, 100명중에 99사람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에 관한 단순한 말들이나 구호들이 아니다. 수천의 사례들을 모든 생활영역에서 만들어서, 종교에 대해서, 노동조합에 대해서, 노동자와 고용인의 관계에 대해서, 부르주아지의 미래 등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잘 생각하고 제기하면 나치들이 대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질문도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오늘날 혁명지도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나치즘의 약점을 지적하고 대중 사이에서 토론을 유도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위험 없이 그 토론이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혁명은 미국과 일본의 모순에 관한 논쟁이나 수행될 수 없는 파업촉구에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오늘날 살고 있는 삶의 모순들에서 발전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모든 나치를 범죄자나 사디스트라고 계속 여긴다면 혁명은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대중의 주체적 열망과 그 문제도 풀 수 없는 그들의 무능력 사이의 대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이 100% 옳고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너무 중요성을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관점의 정확성은 실천에 의해 증명된다. 중요한 것은 실제 무엇이 일어나고 있고 광범한 대중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야하고 모순들을 정확히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 행위를 시작할 때에 이론이 이미 만들어져 있을 수는 없다. 이론은 행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전할 수 있을 뿐이고 자신의 실수들을 벗어버릴 수 있다. 이것은 성인남성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촉진하거나 방해하는 구체적 요소들에 대한 다음 스케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인 남성노동자의 경우


집합적 산업노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계급감각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라는 것과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이 그 사람이 계급 의식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노동조합원이라는 것도 그 사람이 계급 의식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이 양자가 계급의식의 본질적인 전제조건들이지만 말이다. 이것의 증거는, 이전에 자유로운 조합조직에 속했던 많은 독일노동자들이 오늘날 기계적으로 나치노동조합조직에 가입한다는 사실이다. 조직된다는 것이 독일노동자처럼 몸에 박혀버릴[노동자의 피와 살의 일부가 되는] 때에는 [계급]의식은 그 조직의 종류에 따라 종종 훼손된다. 


노동의 “명예”, 노동자와 고용주의 “평등”, 공장과 민족의 통일 등에 관한 나치의 선전은 특히 평균적 노동자가 사회민주당의 “산업평화”론을 흡수한다면 그를 쉽게 눈멀게 만들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심리적으로 아주 왜곡되어 있어서 자신이 “사회의 충분히 가치 있는 성원”이라고 단순히 말만 들어도 더 좋게 느끼게 될 것이고 특히 그에게 어떤 종류의 입을 제복을 주면 그러하다. 


관념의 물질적 힘을 과소평가하는 어떤 혁명가도 실패할 것이 확실하다. 우리의 역사시대에 관념의 물질적 힘은 물질적 빈곤의 힘 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어 왔다. 그렇지 않다면 히틀러와 티센(Thyssen)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이 오늘날 집권했을 것이다. 나치들은 자신들이 산업노동자들을 설득할 때 얼마나 값을 치를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1934년 1월의 노동입법과 같은 것이 법으로 될 수 있기 전에 자신들이 노동자들에게 주입해야 하는 이데올로기적 독약의 정확한 양을 알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신들의 철학에 복속되어 있다고 미리 확신하지 않는 한, 실제로 자살을 감행하지 않고는 그러한 법률을 통과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만큼 충분히 똑똑하다. 레이(Ley)는 새로운 노동법을 만들기 전에 몇 달 간 이데올로기적인 준비 작업을 하였다. 우리가 노동자의 마지막 의지처를 빼앗는 이 법률의 순전한 잔인성을 놀라 쳐다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이데올로기적으로 부드러워져 온 노동자와 그것을 다른 눈으로 보고 다르게 느낀다는 것을 우리가 잊는다면, 그 때 그들에게 말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모순을 표현할 뿐이지 그들의 생각과 모순을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노동조합작업에 앞서 노동자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되어온 영역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이데올로기적 작업-천천히 조심스럽게 생각해낸 작업-을 해내야 한다. 결국 노동자는 언제 사태가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돌아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며, 그것에 대한 충분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또한 즉각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공포를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온갖 범위의 생각과 감정을 생각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그는 환상에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된다. 히틀러가 모든 노동자에게 준 한 자루의 감자라는 선물은 99%는 이데올로기이며 오직 1%만이 실제적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최근의 전차요금 할인 등에 대해서도 똑같다. 계급투쟁 속에서 단련된 노동자는 종종 속지 않지만, 그러나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순해진다. 아주 소수만이 단련된다. 자유노조 덕택으로 다수는 결코 파업을 알지 못해 왔다. 공장에 남아 있는 “위험한” 노동자는 거의 없다. 그래서 평균노동자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올바른 감각을 가질 수 있지만, 그는 지도부가 없으며 결국 히틀러가 잘 나타내는 희망에 그리고 “그가 우리 노동자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희망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평균적 노동자는 자신이 진정한 주인이며 아무도 자신에게 줄 어떤 선물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떡고물을 받아들인다. “한 자루의 감자가 무조건 야단치는 것 보다 낫다”는 생각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은 사람만이, 국민의 일원으로서 자신과 평등한 사람이라고 상정되는 자신의 고용주가 자신의 것보다 천배의 많은 소득을 올리기 때문에 화를 낼 수 있다. 


실제로 무엇이 한 노동자로 하여금 한 자루의 감자라는 치욕적인 선물에 대해서도 분노를 저지하는지를 우리가 묻는다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의 가족에 대한 책임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로 하여금 단순히 파업에 참가시킨다면(노동자의 머리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정말 우둔한 사람만이 이것을 한다), 또한 그가 결코 믿지 않는 비밀스럽고 상당히 위협적인 노동조합에 참여하라고 재촉해서는, 우리는 그 노동자 속에 계급 의식적 사고를 발전시키지 못할 것이다.  


어떤 혁명적 노동자는 처음에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나치노동조합원이었고, 자신의 작업동료들에게 자신은 그들의 깊고 표현되지 않은 걱정들을 이해한다고, 보기를 들면 그들이 가족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분노를 억압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표현하는 것조차 거부한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틀림없이 보여준다.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이와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그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임금을 제외하고 평균적인 청년 노동자에게 주요한 문제가 연애와 개별 숙소의 문제라면, 가족책임의 문제(이것을 우리는 부르주아적 가족이데올로기와 등치시켜서는 안 된다)는 성인 노동자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파업을 하러 가라고 말하면, 그는 당신이 그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는 그냥 당신에게 등을 돌릴 가능성이 크다. 만일 당신이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설명에 대한 거친 도식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한 자루의 감자라는 모욕적인 선물에 자신의 분노를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부분적으로는 그가 히틀러가 정말 고용주들의 조연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 곁에서 옳은 일을 하려는 진정한 민족지도자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그가 온갖 연설과 행진에 의해 다소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다고, 그러나 대부분 그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그에게 설명한다면, 여러분이 이것과 유사한 것들을 설명한다면, 그러면 여러분은 노동자를 이해한 것이고 그는 즉각 그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즉각적인 파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확실히 미래의 파업을 위해서 지지자를 얻었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를 진정한 혁명가임을 증명한 것이다. 대중심리학에 대한 그러한 고립된 통찰력들이 증식하여 더 커다란 영역을 포괄하기 시작하면, 노동자들은 곧 자신들을 걱정하게 하는 것과 분노하게 하는 것, 자신들을 뒷걸음질하게 하는 것과 전진하게 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불법 소책자 속에 넣어야 할 종류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소책자들을 배포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을 우리 손에서 빼앗을 것이며, 소책자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똑같은 구태의연한 작은 일들을 계속 반복해서 해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좀먹는 공허감을 떨쳐버릴 것이다. 그들은 현실과의 직접적 접촉감을 획득할 것이다. 환상의 선전은 현실로 대체될 것이고, 쓸모없는 정치적 외침은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으로 대체될 것이다. 


작은 사건들은 종종 큰 사건들 보다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내가 계급적 사유와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러한 사건 하나를 인용해 보자. 종종 그렇듯이 이러한 경우에 부르주아적 성 이데올로기는 금지요소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느린 기차로 여행하는 일부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일, 정치, 여성 등에 관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분명 결혼한 한 젊은 남성노동자가 모든 법률은 부자를 위해서 만들어져 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농간을 부린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계급의식적인 노동자가 다른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를 듣기 위해 귀를 세웠다. 그는 계속했다. “보기를 들어 결혼법을 들어 봅시다. 그 법은 자신의 아내를 때릴 수 있는 남자의 권리를 말합니다. 자,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부자만이 자신의 아내를 때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가난하다면 당신은 늘 그 때문에 움츠러듭니다.” 그가 말하고 있던 것이 옳은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평균적인 노동자의 머리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가난한 남자로서 그는 자신을 부자 남자와 대비시키고 그 불평등을 느낀다. 즉 그렇게 가는 한 그는 계급 의식적 심성의 싹들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법 안에서 자신의 아내를 때릴 수 있다면 끔찍이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계급감각은 그로 하여금 이 특수한 측면에서 불이익을 느끼게 한다. 부르주아 성도덕은 그의 마음속에서 계급의식과 싸우고 있다. 남성이 계급사회에서 향유하는 성적 소유권과 아내 및 자녀에 대한 지배권이 가족 전 구성원의 계급의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악의 장애물 가운데 하나다. 모든 사람은 그것에 의해 타락하고 특히 남성은 그것에 의해 부르주아 질서와 확실하게 연결되어, 결과적으로 그는 비밀스럽게 또는 공공연하게 소련의 결혼체계를 두려워하고 정치활동 등에 참여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며, 지금까지처럼 정치의 뒷문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고 혁명적 선전의 주요 쟁점으로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정치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보기를 들어 방갈로를 소유하고 봉급을 받는다는 이상이 쁘띠부르주아지에게 하는 것과 같은 반동적인 역할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한다. 


계급의식의 발달을 저해하는 다른 요소들은 쁘띠부르주아지 사이에서의 소규모 사유재산의 숭배에 다시 비교할만한 남성전용 클럽과 술주정이다. 매우 적은 소자산가들만이 혁명이 우선 첫째로 자신들에게서 재산을 빼앗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출세야망, 기업과의 동일시(보기를 들면 어떤 자본주의 회사의 성장에 대한 자부심), 영구적 경제적 안전성에 대한 욕망과 연금에 대한 기대감은 늘 계급의식에 장애물들로 작용한다. 혁명당은 모든 사회계층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모든 질문들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공해야한다. 혁명은 나의 방갈로에, 나의 배당에, 선술집에서의 나의 저녁들에, 나의 볼링클럽에, 아내와 아이들의 주인이자 지배자로서의 나의 지위에, 나의 연금 권리에, 내가 그렇게 자부심을 느끼는 나의 회사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우리는 보기를 들어 성 정치학이 차지하는 위상을 미리 한정하고 결정하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이제 안다. 성 정치학은 우리 가운데 일부가 믿고 있다고 잘못 비난받은 대로 정치적 반동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가 아니며, 단순한 성 개혁의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성 정치학은 이제 계급의식의 적극적 요소로서(보기를 들어 청년들에게서), 이제 계급의식의 발전의 장애물로서(보기를 들어 결혼한 여성들에게서) 생활의 많은 구체적인 측면들 속에 들어간다. 성 정치학은 혁명작업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거기서 성 정치학은 경제학이나 문화와 관련된 비성적인 쟁점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성 정치학은 정치적인 작업에 있어서의 그러한 쟁점들과 분리될 수 없고 생활에 있어서의 쟁점들과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어린이의 경우


어린이에게서의 계급의식의 요소와 그것을 저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혁명적 어린이운동의 조직화는 늘 우리 당이 지닌 가장 약한 지점들 가운데 하나였다. 종종 비난받았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할 수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실들을 관찰하거나 발견해 왔고, 우리가 우리의 동지들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은 그들이 순전히 파괴적인 비판을 그만두고, 레닌주의에 대해 얘기하는 대신에 “늘 배우고 배우고 배움”으로써 모든 것을 살펴보고 새로운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려고 함으로써 레닌주의를 실제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당의 아동정책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몇몇 개별적인 어린이 집단의 지도자들을 제외하고 어린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대해 어떠한 실제적인 지식도 없기 때문에, 너무 메마르고 합리주의적이어서 어린이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나는 이미 말해왔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자세한 도식이 아니라 윤곽그림을 제시하고자 할 뿐이다. 전체 문제는 자격 있는 조직들의 객관적 연구를 기다린다. 


배고픔, 신체적인 영양부족 상태는 가난한 아이들과 부유한 아이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없는 틈을 만드는 아동기 경험이지만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자산가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오히려 보기를 들어 궁핍한 아이들의 무리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질투, 비굴함, 절도를 가져온다. 만일 우리가 어린이들에게서의 우리의 작업을 단순히 배고픔에 근거해서 하려고 했다면, 우리는 그런 근거는 너무 협소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굶고 있는 아이들보다 더 많은 아이들에게 도달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빈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궁핍으로부터 발전하여 혁명적 감정에 제동을 거는 질투와 복종을 어떻게 다루는가이다. 관찰들은 계급의식을 가진 더 나이든 친척들 또는 부모와의 동일시가 아이들의 혁명적 감정에 가장 강력한 자극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이런 것은 드물게만 일어난다. 종교 없이 양육된 혁명적 아이만이 학교 전체를 휘저을 수 있지만, 이런 효과가 적절하게 조직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우발적인 것으로 남을 것이다. 당이 독일의 아이들에게 배포한 텍스트들은 별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텍스트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문제들과 쟁점들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을 불러내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암기해야 할 구호들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역적 규모 및 전국적 규모의 아동조직 지도자들로부터의 반대의견(실천적인 경험에 근거하거나 그것에 바탕을 둔 구체화되지 않은 반대들)을 예상하면서, 아이들을 정치적 문제에 가장 기꺼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방법은 성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라고 강조해야 겠다. 특히 또한 어린이들과의 어떤 동지적인 관계를 수립하는데 성공하려면 말이다. 아이들의 삶에서의 성 억압은 모든 아이들이 직접적으로 느끼는 반면 계급문제는 적어도 처음에는 파악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서 선택의 문제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성에 관해 일찍 아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가정하면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과의 매우 긴밀한 결속을 만들고, 아이들이 어른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느끼는 불신을 제거할 뿐 아니라 비종교적 사고와 결과적으로 계급감각에 가장 확실한 기반을 제공한다. 


이른바 “착하다”는 것에 대항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전선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여야 한다. 불행하게도 프롤레타리아 교육자들 자신의 부르주아적 왜곡이 심각한 장애물을 창조한다. 늙은 아내의 이야기들, 악귀들과 위협들(“내가 경찰을 데려올 때까지 기다려라”)은 정치적 반동의 가장 강력한 무기에 속한다. 공장에 하루의 쿠리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아버지(드문 예외만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좌절을 자신의 아이에게 쏟아낸다. 여기서 적어도 그는 지배자이길 원한다. 그리고 지배자라는 것은 들볶을 어떤 사람을, 개가 없으면 아이를 자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아이를 때리는 것은 이러한 태도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를 때리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가장 광범위한 국제적 규모의 선전이다. 거리에서 자신의 아이를 때리는 어떤 어머니도 공적으로 잘못을 빌어야 한다. 그러한 조치는 조직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곧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아이를 위한 투쟁에, 아이를 가족가재도구로서 다루는 것에 대항하는 투쟁에 모든 사람을 참여하게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아이를 ‘소유’하는 것에 찬성하고 결과적으로 아이를 때릴 권리를 갖는데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공산주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압도적 대다수는 그런 통념에 반대할 것이고, 이것은 그들을 곧바로 계급투쟁으로 이끌 것이다. 즉 그것은 휴지통에 읽지도 않고 던져버릴 문 아래에 밀어 넣은 소책자들보다 천배나 더 효율적이고 유용하게 그들을 참여시키고 활성화시킬 것이다. 물론 우리는 모든 세세한 것을 여기서 제시할 수 없고 정확한 안내물을 발행할 수 없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지시받기를 기다려선 안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우리의 대의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유용한지 그리고 무엇이 그 대의에 잘못되고 해로운가에 대한 자신들의 내면의 감각으로부터 행동해 가야 한다. 우리는 조직들에서 주도권에 대한 요구에 관해 말하기 보다는 그러한 주도권이 적용될 수 있는 사회생활 영역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우리의 선전방법을 전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우리는 종이[글]의 현명함을 살아있는 쟁점들로 대체해야 한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두려움은 무감각으로 이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실수를 기꺼이 해야 하며 그리고 나서 고쳐야 한다.  


어린이에게 돌아가자. 성경제학적 탐구는 이른 엄격한 화장실[용변] 훈련은 활동의 측면에서 가장 엄한 성격억압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문화정치적 전선에 관해 작업한다면, 우리가 어린이들을 위한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른 용변 훈련의 해로움을 널리 알려내야 하고 그것을 객관적 방식으로 토론해야 한다. 그러한 주제로부터 정치로 나아가는 길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기 꺼려하는 것 보다 더 짧다. 정치적 반동은 도덕과 규율의 옹호자라는 자신의 역할에서 우리와 민감하게 대립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제기된 문제들이 일상생활의 어려운 쟁점들이기 때문에 대개의 주민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토론을 시작하기를 원한다. 정치조직들을 보조하고 토론들을 지도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정신분석의 과제일 것이다. 


또 다른 구체적인 예. 어린 아이들의 자위와 이 주제에 관한 부모·교사·성직자의 위협은 오랫동안 활발한 공적 논쟁의 주제를 형성해 왔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그것에 대해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그들 자신이 부르주아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이른바 ‘프로이트주의’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이 주제에 대해서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았듯이 이것은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고 다른 데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이를 복종하도록 키워야하는가 아니면 활기 있고 독립적으로 키워야하는가? 이것들은 계급문제이지 "개인"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당혹케 하는” 쟁점들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게 유아의 자위는 정치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될 수 있다고는 한 순간도 믿지 않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것을 열어젖힐 수 있고, 그것에 관해 토론을 시작할 수 있으며, 우리의 작업을 좀 생기 있게 할 수 있다. 


누군가 우리가 위험한 지반 위를 걷고 있으며 그러한 주제는 어떤 사람들을 기피할지도 모른다고 반박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잘 다루는 전문가들에게 그 걱정을 맡기라고 제안할 것이다. 아동기의 문제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혼란스럽게 하고 얼마나 긴급한지를 이러한 문제들에 전문적인 우리들 보다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정치적 계보와는 상관없이 모든 엄마들과 모든 어린이들을 선점하고 있다. 그리고 당의 어린이정책의 모든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당 정책을 우리는 일상적 실천에 적용된 근대 교육학의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현재 순간에 우리의 행동은 정치적 토론과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제한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이 얼마나 환영받지 못하는지를 나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하자. 그러나 우리 존재의 이러한 중심 문제들을 열어젖힘으로써만이 우리는 정치적 경화증으로 일찍 죽는 것을 피하기를 바랄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몇 가지 사례들만을 언급해 왔다. 일부 학자연하는 사람들이 아이양육과 관련한 문제들은 여전히 과학적 논쟁의 문제라고 반박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은 배운 사람들의 연구들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고 오직 살아있는 능동적인 투쟁에서 나올 것이다. 우리는 몇몇 세세한 것들에서는 실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의 자위에 관해서 반동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논쟁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즉 그들이 그것을 억압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유아의 성에 개입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다른 모든 것은 살펴볼 것으로 남아 있다. 


나는 다음 사례가 어떤 직접적인 실천적 결론을 지적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작은 세세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모든 중요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중요한 것들을 찾고,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사실들과 비전형적이고 개별적인 사실들을 구별하도록 가르친다. 독일의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처럼 대량으로 히틀러에게 넘어가고 있다. 히틀러가 아이들을 구애하는 주요한 방법은 그들에게 전쟁게임과 전쟁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임무는 왜 그러한 방법이 성공적이고 그것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탐구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에 대한 단순한 관찰과 이해의 문제이다. 6살에서 10살에 걸친 작은 소년들 집단은 도시 안마당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다. 한 작은 소년이 옆구리에 칼을 차고 손에는 나무총을 들고 자신의 놀이상대들에게 소리치면서 둥들게 뛰고 있다. 나는 그에게 자신의 친구들을 죽이고 싶은가하고 묻는다. 그는 돌다가 멈춰 서서 놀란 채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그들을 죽여요?” 나는 말한다. “왜 그래, 물론 네가 쏘면 너는 죽이고, 그걸 모른단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들을 결코 죽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너는 왜 칼과 총을 들고 주위를 뛰어다니니?” “칼이 아주 빛나고 길기 때문이예요.” 라고 그는 대답한다. 나는 그에게 평화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과 시민전쟁 사이의 복잡한 구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어린이들이 죽이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전쟁게임의 즐거움을 이러한 욕망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순전한 운동적 만족, 무기를 잡는데 따른 증가된 자신감, 행진리듬 등에서도 끌어낸다는 것을 다른 경험들로부터 알고 있다. 그러한 통찰력이 우리의 프롤레타리아적 어린이정책에 사용되어선 안 되는가? 아니면 그것은 유토피아적인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들은 확실히 삶, 곧 어린이의 삶의 사실들이고, 우리가 어린이들을 파악하지 못해 왔다면 그것은 확실히 그러한 사실들을 아주 다양하게 연구하고 있을 수 있는 사실들을 이용하는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들이고 즉각적인 해결이 어렵다. 우리가 그 문제들을 환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질적으로 그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옮긴이 윤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