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정세분석] 요즈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급투쟁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4월호

[정세분석] 요즈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급투쟁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8:10

요즈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급투쟁1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


오늘 내가 발제할 미국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앞부분은 좀 더 오래된 역사이고, 뒷부분은 지난 20여 년 동안 일어난 것이다. 역사적인 부분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역사가 미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인종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대중적인 노동자 운동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대중적인 노동자 정당은 없었다. 그것 때문에 유럽 사람들은 미국을 아주 이상한 나라로 바라본다. 187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미국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어떤 주요 유럽 국가의 노동자 운동 역사에 견주더라도 가장 격렬했다. 나는 그러한 격렬한 역사 속에서 왜 사회당 또는 공산당 같은 노동계급 정당이 미국에서는 한 번도 실제로 발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17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몇 가지 역사적인 지점들을 아주 간략히 다루겠다.


미국의 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1676년에 일어났다. 물론 그때 미국은 없었고 영국의 식민지가 있었을 때였다. 1676년에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은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백인 노동자들과 아프리카 노예들이 함께 농장주들에 맞서 일으킨 폭동이었다. 이 폭동에서 중요한 점은 그때 백인 노동자들과 흑인 노예들이 거의 비슷한 노동조건 아래 있었고 뒤에 나오는 인종 차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폭동을 진압한 뒤 농장주들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인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현 체제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 줌으로써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대다수 백인 노동자들이 그들 스스로를 먼저 백인으로 인식하고 그리고 이차적으로 노동자로 인식하게 하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단 한 번도 대중적인 노동자 정당이 들어서지 못했다. 


1676년에 일어난 두 번째 사건은 북동쪽 뉴잉글랜드 주에서 일어난 전쟁, 이른바 필립왕의 전쟁이었다. 영국에서 건너온 극단적인 개신교도들인 청교도들은 이 전쟁에서 3만 명의 인디언을 살해했고, 미국의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적 통제를 수립했다. 미국의 초기 역사는 극단적인 개신교도들, 아프리카 노예들, 그리고 인디언들이 서로 맞부딪치면서 전개되었다. 1676년에 함께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사회 안으로는 인종 억압으로 사회 밖으로는 서부를 향한 확장으로 나타나는 미국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 동학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줄곧 지속되고 있다.


이어서 미국 노동자 운동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점을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1820년대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노동조합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1820년대 후반에 첫 번째 사실상의 노동계급 정당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들 노동조합과 독립적인 정당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 속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고, 노예 주민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이데올로기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다. 단지 백인들만이 참여하는 한, 계급투쟁처럼 보이는 어떤 것도 실제로는 집안싸움에 더 가까운 것일 뿐이다.


이 운동들은 민주당 속에서 그들의 첫 번째 정치적 표현을 성취했다. 민주당은 1820년대와 1830년대를 거치며 백인 남성 노동자들의 당이 되었다. 민주당은 한 번도 반(反)자본주의 정당이 되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언제나 노동계급 속에 중요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 민주당은 1828년부터 1860년 남북전쟁 발발 전까지 미국 정치를 지배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공산주의가 노동계급의 진지한 경향으로 등장하였던 1848년에 미국 노동자 운동은 완전히 노예 문제에 붙잡혀 있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잘 알다시피 1860년대 초반에 미국은 5년간의 남북전쟁을 치렀다. 그것은 미국을 실질적으로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 이전에 미국은 거의 두 개의 나라였다. 하나는 자본주의였고, 하나는 노예제였다.


1877년에 온 나라를 가로지른 철도 파업에서 첫 번째 진정한 대중적 계급투쟁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1877년은 아주 흥미롭게도 북군이 남부 주에서 철수하고 과거에 노예를 가진 엘리트가 권력을 되찾도록 해준 바로 그 해였다. 또한 그 해는 서부에서 인디언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였다. 우리는 2백 년을 건너뛴 1676년과 1877년의 사건들을 견주어보면서 몇 가지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인디언에 맞선 확장의 동력, 사회 내부의 노예 문제, 본질적으로 백인 노동자 운동이었던 노동자 운동.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예외가 있다. 바로 IWW(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다. IWW는 백인 엘리트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운동이 되는 것을 거부했고, 남부 흑인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이주 노동자 집단들을 조직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IWW는 실제로 남부의 여러 주들에서 백인과 흑인 노동자들을 함께 노동조합과 파업을 조직했다. 꽤 험난한 일이었다. 미국의 자본가 계급은 백인 노동자들에게도 무시무시한 폭력을 사용하였지만, 흑인들과 백인들이 서로 동등한 기반 위에서 함께 조직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훨씬 더 거대한 폭력을 썼다. 불행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IWW는 탄압과 기계화를 통해 무너져버렸다. 특히 IWW가 아주 강력한 기반을 지녔던 농업의 기계화가 중요했다. 


결국 미국에서 실질적인 노동조합 조직은 CIO(산업별노동조합회의)로 이어졌다. CIO는 훨씬 덜 급진적이었고 반자본주의 노동조합 운동이 아니었다. 또한 CIO는 실제로 전국적인 운동이 아니라 지역적인 운동이었다. 남부에 있는 여러 주에서는 흑인들이 여전히 완전 배제된 채 남아 있었으며, 대다수 법률들과 1930년대 뉴딜정책의 진보적인 측면들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 노동자들이 미국 자본주의를 지지하도록 결집시키는 데서 CIO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다. 또한 CIO의 부상은 미국 자본주의가 세계 제일의 자본주의 권력으로 등장하던 바로 그 때에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미국 자본주의의 부상과 미국의 공식 노동자 운동의 부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일련의 투쟁들을 통하여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된 쇠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이러한 변화에는 네 가지 측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무엇보다 1955년에 시작된 제조업의 비공인 파업운동이다. 두 번째는 흑인 운동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흑인 운동은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1960년대 후반부에 가장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베트남 전쟁의 맥락 속에서 일어났다. 1860년대 남북전쟁 이후 베트남 전쟁만큼 미국 사회를 갈라놓은 사건은 없었다. 결국 이것은 마치 남북전쟁 전에 그랬던 것처럼 두 번째로 민주당의 지배를 무너뜨렸다. 따라서 우리는 1676년의 사건들과 청교도들의 시기로부터 급진적인 흑인 운동과 베트남 전쟁 패배로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에 종말이 시작되기까지 사태가 일직선으로 전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비공인 파업운동과 흑인 운동 양자는 때때로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 대응해서 미국 자본가들이 제조업을 캐나다, 유럽, 그리고 아시아로 이동시키면서 미국을 탈산업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미국 자본주의 세계 패권이 공공연하게 쇠퇴하는 시대를 열었고, 미국에 결코 채워지지 않은 일종의 정치적 진공상태를 만들어 냈다.


지금까지 역사적인 부분을 개괄적으로 보았다. 이제 쇠퇴와 정치적 진공상태의 시기라고 할 최근 20년 동안 투쟁을 이야기해보자. 이것은 1980년대 들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쇠퇴한 것은 일련의 매우 광범한 공장폐쇄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들을 통해서였다. 이 시기는 1981년 항공관제사 파업으로 아주 극적으로 시작되었다. 항공 관제사들은 정부에 고용되어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단호하게 해고하고 군사요원들로 대체하였다. 아주 우습게도, 그때 레이건 정부는 폴란드의 연대노조를 추켜세우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에 신문에는 사슬에 묶여 직장에서 호송당하는 미국 항공 관제사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미국 정부는 소련의 세력권에서 벌어지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파업을 사랑했지만, 그들 자신의 세력권에서 일어나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파업을 분쇄했다.


그 뒤 노동자 계급이 잇달아 패배했다. 1983년에 그레이하운드 버스 기사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완전히 박살나 버렸다. 1984년에 아리조나에서 수천 명의 구리광산 노동자들은 회사가 광산을 폐쇄하고 칠레로 옮기려 했기 때문에 파업에 나섰다. 파업 기간 동안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주 방위군과 주 경찰에 맞서 싸웠다. 1985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과일포장 공장 노동자들은 18개월 동안 파업을 벌였다. 그들은 잘 싸워 파업에서 승리했지만, 몇 달도 안돼서 회사들이 공장을 폐쇄하고 멕시코로 이동했다. 1986년에 미네소타의 육류포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터져 나왔다. 그들 또한 18개월 동안 파업을 했지만 완전히 패배했다. 이 시기에 중요한 몇 개의 파업 가운데 하나이며 실제로 뭔가를 획득했던 것이 1989년에 터진 미국 동부 석탄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1989년 여름 파업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 5천명의 석탄광산 노동자들이 2천명의 주 경찰과 맞붙었는데, 노동자들에게 싸우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얘기하려고 노조 지도자가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와야 했다는 것이다. 이 파업은 실제로 광산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몇 가지 양보를 성공적으로 획득했다.


1992년에 LA 폭동이 사흘 동안 지속되었다. 그동안 대략 60명의 흑인 또는 라틴계가 살해되었다. 여기서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LA 폭동이 있기 10년 전에 LA 지역에서 열 개의 큰 공장이 폐쇄되어 4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LA 폭동으로 미국의 자본가들은 이데올로기 방향에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 때문에 빌 클린턴이 1992년에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클린턴의 정강은 1980년 레이건 때부터 실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정강을 계속 이어간 것이었다.


클린턴은 공화당의 지지를 받으며 통치했다. 그는 20세기에 대통령으로 재직한 민주당원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끝까지 밀어붙여 체결함으로써 캐나다, 미국, 멕시코를 포괄하는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한 것이다. NAFTA가 체결되자, 캐나다와 미국에 있는 몇 십만 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멕시코로 이전했다. 클린턴이 시도한 두 번째 일은 국가 의료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보험자본이나 제약자본의 이해관계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국가 의료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클린턴이 한 다음번 큰일은 미국의 복지(welfare)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그것을 ‘생산적 복지’(workfare) 시스템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생산적 복지’가 뜻하는 것은 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은 예전에는 급료가 좋은 조직된 노동자가 주로 맡아했던 것이다. 그 다음 클린턴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도록 만들었다. 미국 노동조합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민족주의와 보호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삼아 강력히 반대했다. 이를테면 1999년 시애틀 시위에서 다수의 철강 노동자들은 드러내놓고 중국인들을 반대하거나 보호주의에 찬성하는 내용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제 마지막으로 몇몇 새로운 유형의 투쟁들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 투쟁들은 최근 8년 사이에 나타난 것으로, 패배적 경향에 맞서기 시작하고 있다. 첫 번째로 1995년에 존 스위니가 미국의 주요 노총인 AFL-CIO를 장악했다. 그러나 그가 당선될 때 미국 노동자들의 14%가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제 9%로 떨어졌다. 


그러나 존 스위니가 당선되고 난 2년 뒤에 아주 중요한 파업이 일어났다. 전국적인 택배 시스템에서 일하는 트럭기사들이 벌인 UPS 파업이다. UPS 파업이 크게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5년 동안 적용되는 협약에서 노동자들은 해마다 시간당 10센트씩의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그것은 5년에 걸쳐 시간당 8달러 50센트에서 9달러로 상승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파업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게서 제법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파업은 미국 자본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결과 파업이 끝나고 몇 달 뒤에 트럭기사노조 위원장인 캐리가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혐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트럭기사노조에 들어갔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운동으로 캐리가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언론과 미디어들은 그 파업의 평판을 끌어내리려고 캐리에 맞선 캠페인에 열중했었다.


새로운 유형의 투쟁이라는 이 과정의 두 번째 단계는 1999년 시애틀 시위였다. 시애틀 시위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그 시위가 경제의 전반적인 세계화에 대한 토론을 제기하고 강제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토론은 이전에는 전문가들만의 것이었다. 물론 조금 전에 내가 말했듯이 시애틀 시위에 참여했던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는 보호주의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에 기울었다. 특히 중국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가 두드러졌다. 시애틀 시위가 있고 난 몇 달 뒤에 고도기술 주식시장 붐이 무너졌다. 2000년과 2001년을 거치면서 괴텐부르크, 프라하, 제노바에서 일어난 시위를 비롯하여 세계적 수준에서 반세계화 세력들이 탄력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와 달리 자본가들은 아주 방어적인 태도로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9·11 테러가 터졌다. 9·11 테러는 전체적인 정치 사회 정세를 다시 바꾸어 놓았다. 2000년 여름에 동부 연안에서 전화국 노동자들의 전투적 파업이 있었다. 그 노동자들이 아마 이번 주나 다음 주에 또 파업을 벌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9·11 테러가 있은 뒤 정세 속에서 일어난 두 개의 파업을 얘기하면서 발제를 마무리하겠다. 첫 번째는 2002년 가을에 일어난 서부해안 부두노동자들의 파업이다. 이 파업은 미국 서부 해안의 모든 항구들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정부는 이 파업을 테러와 전쟁 속에서 전국적인 안전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재빠르게 진압했다.


좀 더 가까운 때 일어난 사례는 2002년 12월 뉴욕시에서 벌어진 파업이다. 이 파업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거의 일어날 뻔했던 것이었다. 3년 전인 1999년 12월에도 뉴욕 지하철에서 파업이 일어날 뻔했다. 둘 다 모두 12월에, 즉 한창 장사가 잘 되는 크리스마스 시즌 한복판에 벌어진 일이었다. 두 경우 모두 뉴욕 시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만일 파업을 벌인다면 막대한 벌금과 징역형을 선고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상황에서는 반테러주의 이데올로기가 추가로 사용되었다. 뉴욕의 신문들은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뉴욕 시의 마비를 파업 노동자들이 성공시킬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또 다른 신문은 운송노조의 파업 위협은 뉴욕 시를 상대로 벌이는 지하드(이슬람 성전(聖戰) -옮긴이)라고 말했다.


9ㆍ11 테러가 벌어진 다음, 거의 모든 저항은 곧 테러리즘이거나 또는 테러리즘에 동조하는 것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미국의 헌법이 찢겨 나가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미국의 헌법 전문가들이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려고 이라크에 간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2001년 9월에 이슬람 배경을 갖고 있는 2~3천 명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변호사를 만날 수도 없었고, 그들의 가족을 만날 수도 없었으며, 기소되지도 않았다. 지난 한 두 달 사이에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석방되었는데, 전혀 기소당한 것도 없고, 어떤 사과도 받지 못했으며, 2년 동안 취조 상태에 있었던 것에 대해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여기까지 발제를 마치고 이제 질문을 받겠다. 다른 측면들을 얘기할 수 있겠고,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질문] 당신은 미국 정부의 위헌적인 행동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이곳 뉴스는 당신이 말한 내용을 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광란이 미국의 반세계화 운동에 어떤 충격을 준 게 있는가?


[로렌 골드너] 그 내용이 신문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마녀사냥이 별로 새로운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692년에 신교도들은 많은 수의 마녀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동북지역에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광란을 낳은 마녀재판이 있었다. 이것은 미국 역사에서 사회 결속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일어난 일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50년대 초반에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벌어진 매카시 광란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이슬람 혈통이면 누구든 테러리스트들과 연결 짓는 마녀사냥의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은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명확하게 성장하고 있던 세계화 반대 흐름을 반격하는 데서 미국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주었다.


[질문] 이러한 반테러주의 이데올로기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 노동자 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다시 통합시켜 내고, 자발적인 저항의 모든 가능성을 박살내며, 미국 지배계급의 전쟁노력을 위해 노동계급을 동원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복무할 수도 있는가?


[로렌 골드너] 지금 상황과 관련해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광란이 미국 안에 있는 아주 뿌리 깊은 사회적 문제들을 은폐하려고 고안된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매우 빠르게 알아차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최근의 전쟁들은 모두, 즉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무엇보다 이라크 전쟁은 테러주의에 맞선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었다. 그와 함께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30개 주는 사실상 파산 상태이며, 모든 종류의 사회복지 사업을 삭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 전쟁과 점령으로 인한 비용이 2천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점이 명확해지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점령으로 인한 비용은 그 뒤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2006년 말 미국의 이라크연구그룹이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는 이 비용이 총 2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옮긴이) 이미 1991년 첫 번째 걸프 전쟁에서 아버지 부시가 거둔 위대한 승리는 경제위기와 노동자 계급 생활수준에 대한 공격 때문에 거의 잊혀졌다. 따라서 아들 부시가 미국의 병원과 학교와 일터들이 문을 닫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해외 전쟁에 쏟아 부은 이처럼 거대한 지출을 정당화하려면 훨씬 더 큰 어려움에 부딪칠 것이다.


[질문] 당신이 얘기한 최근 20년 동안 파업에 대해서, 특히 노동자 계급 반격의 새로운 물결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다. 그들은 주로 노동조합을 통해 조직되어 있었나? 아니면 그들은 노동조합과 관계없이 파업을 일으켰는가?


[로렌 골드너] 1970년대 이후 노동조합 바깥에서 많은 투쟁들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비공인 파업 물결은 1950년대 중반부터 1973년까지 이어졌다. 그 물결은 석유위기의 시작과 함께 그리고 미국 경제의 실질적인 쇠퇴가 시작된 것과 함께 끝났다. 1973년이 지난 뒤, 그리고 엄청난 대량해고가 이루어진 다음에, 여전히 일자리를 가진 미국의 산업 노동자들은 그들이 일자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아주 만족했고, 더 이상 비공인 파업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물론 1970년대 이래 어떤 유형의 자주적인 비공인 파업 활동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산업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몇 십만 명이 정리해고된 다음에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그들이 실제로 엄청난 양의 힘을 갖게 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중요한 파업들이 대부분 운송 영역에서 벌어졌다. 왜냐하면 운송 영역에서 노동자들은 상품의 순환을 틀어막을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저스트인 타임’(just in time)이라고 하는 일본식 생산방식에 대해 알고 있나요? 잘 모른다고요? ‘저스트인 타임’이란, 팔리지 않은 상품을 쌓아놓는 일이 어떤 식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도록 기업이 생산과 상품유통을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상품이 어떤 날 오전 8시까지 배달되도록 되어 있다면, 그 상품을 그날 오전 8시에 배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업들이 많은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지만, 반면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이런 방식의 작업구조를 매우 쉽게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1970년대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비공인 파업 활동의 양이 크게 줄어들었다. 미국에 있는 전체 노동력의 거의 1/3이 파트타임이나 임시직으로 비정규직화 되었다. ‘저스트인 타임’ 시스템과 관련하여 볼 때, 노동조합 틀 밖에서 비공인 파업에 관련된 활동은 안정된 일자리에 여전히 고용되어 있으며 모종의 조직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질문] 당신이 말한 유형의 노동자 저항은 미국에서 아나코 생디칼리즘,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부활로 이어질 것 같은데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로렌 골드너] 미국에는 아나코 생디칼리즘 흐름들이 조금 있다. 그리고 IWW가 작은 흐름으로 부활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작고 주변적인 작업장들에서만 조직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성공했던 많은 경우에, 기업은 즉시 파산해 버렸다. 나는 상황이 좀 더 낙관적이기를 바라지만, 그들은 여전히 주변적인 조직화 방식에 너무 많이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옛날 IWW에 대한 기억은 미국에서 여전히 중요하며, 아마 언젠가는 큰 공장의 노동자들도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신호를 보지 못했다.


[질문] 노동자 계급 저항의 새로운 국면이 온다면 일종의 생디칼리즘 형태, 즉 노동조합 조직 또는 그와 비슷한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까?


[로렌 골드너] 지금 상황에서 대다수 미국 노동자들은 여전히 새로운 국제 노동 분업에 대해 철저히 방어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앞으로 10년 동안, 350만개의 서비스직 일자리가 인도로 넘어가게 될 예정이다. 그와 함께 엄청난 수의 공장들이 미국과 멕시코에서 문을 닫고 있으며 중국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 노동자들이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국제 분업에 길들여져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


안타깝게도, 여기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녹음이 되지 않았다. 이후 토론에서 있었던 질문들을 정리해 놓았다.


[질문] 미국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하락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질문] 일부 반전 활동가들은 최근의 이라크 전쟁을 미국의 힘 과시로 보았다. 하지만 세계 최고 자본주의 권력으로서 미국에 대한 당신의 묘사는 뭔가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오늘날 미국 대외 정책의 본질에 대하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질문] 자본주의 축적의 새로운 지구적 축이, 새로운 세계 권력으로서 아마도 아시아에서 부상하고 있다는 전망이 있는데,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까? 많은 공산주의 옹호자들은 데카당스 이론을 갖고 다른 주장을 합니다. 즉 현재의 위기는 단지 미국의 지배에 기초한 시스템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 자체의 위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가 기계 등으로 대체됨에 따라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노동력을 훨씬 적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이 더 이상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위기는 아마도 축적의 새로운 축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는 거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 좋다. 당신이 얘기한 것처럼, 아시아가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 권력으로 차츰 등장한다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새롭고 혁신적인 노동자 계급 운동, 다음번의 혁명적 격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될 운동을 낳게 될 것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이들 나라들은 여전히 상당한 농업문제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번의 혁명적 격돌은 1차 대전 이후에 일어났던 일과 비슷할 것 같은데요. 즉 이 나라들에서의 노동자 운동은 새로운 틀로 나타나는 일종의 사회민주주의 반혁명, 즉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완수하고 자본을 발전시키는 (아마도 지금 반세계화 운동의 다양한 사고들에 기초를 둔) 반혁명 속에 갇혀 버릴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다른 부분의 프롤레타리아트들 또한 주도적이지는 않다 해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요? 특히 아마도 투쟁이 훨씬 더 국제화되어 갈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옮긴이 양준석.)

  1. 이 글은 체크 공화국 브루노에서 2003년 8월 2일에 한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