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특집] 착취, 소비, 미국 자본주의의 특이성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4월호

[특집] 착취, 소비, 미국 자본주의의 특이성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7:26

착취, 소비, 미국 자본주의의 특이성(Exploitation, Consumption, and the Uniqueness of US Capitalism)1)

레스닉 & 울프(Stephen Resnick & Richard Wolff)


우리는 미국 자본주의가 가진 여러 모순들의 특정한 독특성들에 관련하여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주장을 내놓으려고 한다.2)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지난 150년 동안 미국 노동자들에게 놀랄만한 생활수준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아마도 어떤 자본주의 나라보다도 뛰어난 것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국의 노동자들은 예외적 수준의 개인적 소비와 부와 형식적인 정치적 여러 자유들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측면들은 미국 자본주의의 성공을 대표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 미국 자본주의는 생산적 노동자들을 아마도 자본주의 세계에서 최고의 계급 착취율(필요 노동에 대한 잉여 노동의 비율)에 복속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착취는 미국 노동자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 든 예외적 수준의 고갈, 스트레스, 약물 중독, 고독감, 공공 생활에 대한 대중적인 무관심, 결손 가정, 폭력의 만연 등이 나타나는 것에 한 몫을 하였다. 특출한 정도의 착취를 통해서 건실한 미국 자본주의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깊은 곤경에 처한 노동 계급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며 또 결국 그들의 움직임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부자와 권력을 가진 소수와 대중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낳았고 또 갈수록 그 간격이 더욱 넓어지고 있다. 남북 전쟁이 끝난 뒤 미국 역사의 흐름은 대단히 강력하면서 또 대단히 약한 자본주의를 발생시켰다. 


미국 노동조합 운동과 좌파가 상대적으로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계급착취가 다른 나라에 견주어 훨씬 더 심했지만, 자본주의를 제한할 성공적인 조직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도 일어나지 못했다. 그 대신 우리는 노동자들의 늘어나는 소비가 그들의 상승하는 계급 착취를 보상하였고 따라서 그 계급 착취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식도 억누르도록 이바지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사실상 미국의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와 문화는 이렇게 많이 일하고 많이 소비하는 식의 제도야말로 지상 최고의 것이라고 지지하고 찬양 고무하며 또 자연적인 것으로 신비화시킨다. 따라서 미국을 지배하는 경제 이데올로기인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 전제 가운데 하나처럼 노동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것 (“비효용(disutility)”)인 반면 소비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 (“효용”)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이란 두 가지의 차이를 극대화시킨다고 하는 목표로 추동되는 것으로 가정된다. 계급 조직을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삶속에서 체현되는 생산의 경험 또한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대안적인 목표는 아예 헛소리이고 기술적으로도 있을 수 없으며 우스꽝스런 유토피아적 망상으로 여겨지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실상 잉여 노동이 생산의 영역에서 어떻게 조직되는가라는 생산의 계급적 구조라는 개념 자체가 의식 있는 공공 담론에서 추방된 것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착취는 절대적이며 도전받지 않는 주어진 것, 즉 바뀔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로서 우리가 적응해야 하는 것이고 그저 소비를 통해 보상받아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잘 사는 것만이 단 하나의 위안이자 단 하나의 복수라는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그래서 홉스나 로크의 저작들이 갖는 위험한 유산에 대해 아담 스미스가 대응했던 바를 역사적으로 입증한 모습을 띤다. 로크는 홉스가 쓴 『리바이어던』을 읽고 공포에 질린 적이 있었다. 홉스가 두려워했던 것은 봉건제의 위계질서(장원, 교회, 국가)가 몰락하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지각변동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문명을 수호할 강력한 국가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다. 로크는 반대로 그러한 강력한 국가가 사회 진보(그가 보기에 농노에서 토지 소유 자영농으로 전환하는 것)를 거꾸로 돌릴 것을 두려워했다. 로크에게 있어서, 강력한 국가란 저 혐오스런 봉건제의 후퇴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크도 홉스가 가졌던 어두운 전방에 대해 걱정하였던 것, 독립적인 농부들이 만들 새로운 세계를 위한 일정한 기본 규칙을 찾고자 하였다. 강력한 국가가 없는 가운데 그 독립적인 생산자들이 사회를 파괴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나 경쟁 말고 다른 방법으로 개인들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을까? 그는 경제적 평등이라는 절대적 체제로부터 그 보장을 찾아내었다. 즉 모든 개별 농부들은 오로지 자신이 경작할 수 있는 만큼 토지를 소유한다. 이렇게 생산 수단에서 사적 소유의 평등을 이룬다면 사회적 평화와 평안과 번영이 보장되는 한편 강력한 국가에 대한 필요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가 훗날 아주 불안한 심정으로 묘사하고 있듯이, 로크의 전망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개별 농부들 사이에 평등은 사라지고 불평등이 들어섰다. 수많은 독립 자영농들이 기후, 질병, 토질 불량, 기술 변화 등의 요인으로 파멸해버렸고 종국에는 생존을 위해 그들의 토지와 가축까지 팔고 그리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것 까지 팔아야 했으니, 그것이 바로 그들의 노동력이었다. 번창했던 비교적 소수의 농부들은 그렇지 못한 다수의 토지, 가축, 노동력을 살 능력도 있었고 또 실제로 사버렸다. 대략 평등한 농부들에 의한 독립적 생산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영농이라는 불평등(이는 경제적인 것이지만 정치적 문화적인 것이기도 하다.)의 팽창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독립적인 기술자들도 결국 자본가적 제조업자와 산업 임노동자들이 나란히 서있는 상태로 진화해나갔다. 결국 홉스의 딜레마에 대한 로크의 해법이라는 것이 역사의 진행에 의해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고, 아담 스미스는 홉스의 도전에 다시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노동력의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어가며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시기, 절망, 분노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상황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의 위험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면, 이로 인한 문명의 몰락은 이제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스미스의 대답은 자유 시장이었으니, 이것이 고삐 매임 없이 팽창한다면 생산성이 올라갈 것이며 따라서 노동력 판매자들의 절대적 소비 수준도 올라갈 것이다. 사적 소유자들의 흥정으로 이루어지는 자유 시장(토지, 노동력, 그리고 자본주의적 산업의 상품으로 생산된 것들의 시장)은 생산력의 성장에서 최고의 결과를 가져 올 것이었다. 이를 통해 사회적 평화가 가능해진다. 소유가 없는 대중들이 (생산 수단의 소유라는 점에서) 비록 생산에서 착취를 겪는다고 해도 개인적 소비의 증가로 보상받을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는 무한히 번성할 수 있을 것이다.3) 대중이 생활수준의 상승을 요구하고 또 보통 그것을 받는 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계급 관계 그리고 그 정치적ㆍ문화적 결과들도 용인될 것이다. 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 이러한 스미스의 희망은 미국의 경험과 놀랄 정도로 맞아 떨어진다. 


계급 분석의 틀


잉여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가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맑스주의의 계급 분석 틀에 비추어 볼 때, 미국 자본주의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4) 첫째, 우리는 미국의 생산적 노동자들이 생산하고 또 그들의 자본가 고용주들이 전유해간 잉여의 특출할 정도의 양적 차원을 인식하고 또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생산 가운데  노동자들에 의해 부가된 가치에서 임금으로 그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계속 줄어들었고, 반면 그들의 고용주들에게 불어나는 몫, 즉 잉여 가치는 계속 늘었다. 고용주들의 전형적인 형태는 산업 자본주의 기업들의 임원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들은 그 전유된 잉여 가치의 일정 부분을 자본주의적 착취가 계속되고 확장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건들을 확보한다는 목적 아래에 여러 사람들, 여러 기업들, 여러 제도들에게 지불한다.5) 보기를 들어 경영자들에게 (투입물들을 구매하고, 산출물들을 판매하고, 노동자들을 훈육하고, 자본을 축적하고, 새롭게 생산할만한 사용가치를 발명하려고) 잉여가치 가운데 일정 부분이 돌아가고, 신용 제공자들에게 (대부에 대한 이자로서) 가고, 주주들에게 (배당금) 가고, (도매 및 소매) 상인들에게 가고, 국가에 가고 (조세), 지주에게 간다(지대). 이들이 전유한 잉여의 확장은 또한 산업 자본가들이 자본 축적에 배당된 잉여의 몫을 늘이도록 해준다. 즉 새로운 농업과 산업 기계를 맞춘 생산적 노동자의 군대가 더욱 커지고 또 더욱 효율적이 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미국의 산업 자본가들은 그들이 전유한 잉여 가치의 다른 부분을 기업 경영 관료 조직에 분배하고 있는데, 이 조직은 이 팽창하는 산업 자본주의의 기업들을 조직하고 감독하고 훈육하고 기술적인 혁신을 가져오며 계속 새로운 상황에 맞게 적응시키는 일을 맡은 조직으로서, 그 크기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의 잉여 가치의 몫이 흘러 나가는 부분이 또 있으니, 그것은 도매와 소매상들의 복잡한 연결망으로서, 산업 자본가들이 생산한 상품들을 판매하는 활동은 드넓은 대륙과 그 너머로까지 뻗쳐 있는 것이다. 게다가 1) 자본주의적 영농, 광업, 제조업 등에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토지 소유자들의 지대로서 2) 대부를 원하는 산업 자본가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은행과 금융가들에 대한 이자와 수수료로서 3) 미국식 사적 자본주의가 오늘날처럼 성장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많은 서비스를 제공해온 국가의 운영 자금을 댈 조세로서 그 잉여가치의 다른 부분들이 배분된다. 


맑스가 주목한 바 있듯이, 기업 경영자들, 상인들, 지주들, 은행가들, 그리고 국가는 모두 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들은 모두 그 노동자들에게 자본가들로부터 배당받은 잉여가치의 일부를 써서 임금을 주는 것이다. 이 노동자들은 산업 생산에서 자본가들의 착취가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조건들 (경영, 신용, 유통, 경찰, 법률 분쟁 등등)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노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잉여를 생산하는 노동과 같은 것은 아니다 - 후자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따라서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자)과 비생산적 노동(자)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비생산적 노동자들도 생산적 노동자들처럼 노동력을 판매하며 또 노동력의 가격을 놓고 투쟁을 벌인다. 둘 다 모두 임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잉여가치의 생산과 분배라고 하는 관계에서 차이가 난다. 


이러한 틀을 놓고서 본다면, 잉여의 증가, 즉 잉여 가치가 그 총량과 비율에서 증가하는 것은 생산적 노동자들의 소비 수준의 증가는 물론 점점 더 많은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소비 수준의 증가를 또한 가능케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 역사야말로 스미스의 안정된 자본주의에 대한 희망을 충족시키는 특수한 경우로서, 둘 다 모두의 증가를 보여주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사실 미국의 소비의 패턴을 보면, 생산적 직종과 비생산적 직종 사이에서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급/하위, 블루칼라/화이트칼라, 숙련/비숙련 등등의 이분법적 틀로 사고되어 왔다) 노동자들이 그 각각에 달려있는 소비의 질과 양을 보고 이동하도록 몰아가는, 복잡하고도 위계 잡힌 구조적 체제로 발전해왔다. 이렇게 소비의 양과 질을 놓고 미국 사회가 보여준 집착은 사람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음속에 문화적으로 뿌리박게 되었다. 이와 놀라운 대조를 보이는 것은 생산 조건들이 비교적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전문가들 말고는). 그리고 더 많은 소비를 원하는 욕망은 인간에게 보편적이라는 전제하에 생산 조건이란 기술적 조건 하나에 의해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생산의 잉여와 관련된 여러 측면들은 거의 완전히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야기의 뼈대


일단 미국 원주민들이 서부로부터 인종적으로 쓸려나가고, 남부의 노예제 경제 체제로부터 경쟁이 군사적으로 진압된 다음, 자본주의적 기업들은 극적인 팽창을 이룰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력 공급을 놓고 자본가들과 자영농들과 여타의 소규모 기술 생산자들 (마르크스의 “옛날” 계급 구조) 사이의 대결이 폭발할 수도 있었지만 저렴한 이민자 노동력의 물결이 그것을 누그러뜨렸다. 옛날 관념에 찌들어 버린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 창의성, 자조, 그 밖의 농촌적인 가치들에 바탕을 둔 문화를 육성할 수 있었고 또 육성하였다. 자본가들은 이에 대해 산업적 그리고 대개는 도회적인 대항문화를 건설하였다. 이 후자가 전자를 종속시키고 거의 말살시켜버리는 일이 서서히 벌어졌지만, 옛날식의 자영 생산자들의 다수가 살아남았고 새로운 자영 생산자 집단들이 계속 나왔다. 이러한 뜻에서 미국의 기업 경제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자본주의 계급 구조와 비자본주의 계급 구조 사이에서 그 배합 비율이 변하는 혼합물이었다 할 것이다. 


이민자들의 물결이 계속 이어진 전형적인 근원은 경제적인 궁핍에 있었다. 이들은 보통 미국의 규범보다 더 낮은 산업 임금을 받아들였고, 그로서 미국의 임금 수준을 저하시키는 압력으로 작동하였다. 자본가들은 이렇게 노동력의 구매 가치가 저하하거나 상승을 멈추는 가운데 잉여가 급속히 상승하는 것을 통한 생산력 증가를 자기들 몫으로 만들 수 있었다. 자본가들이 그 잉여의 더 많은 몫을 축적 (자본 - 노동자 비율의 증가와 새로운 기술의 도입), 경영 개선을 위한 봉급과 예산, 국가의 보건과 교육 시절에 대한 지출 증가를 위한 조세 등등으로 배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생산성 증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민 노동자들의 새로운 물결이 밀려올 때마다 그들은 질적으로는 특정한 품목들을 소비하게 되었고 또 양적으로는 더 많이 소비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미국화”되었는가를 규정하도록 압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미국인들의 심리에는 일정한 패턴이 자리 잡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심각하게 착취적인 노동 조건들(따라서 높은 착취율)을 받아들이는 반면, 소비 패턴에 관심을 집중시켜 이를 통해 시민권과 사회적 위신이라는 기준의 진정한 뜻에서 자신들이 미국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도록 되었던 것이다. 


이민자들이 팽창하는 미국 자본주의에 경제적ㆍ정치적ㆍ문화적으로 통합되는 것이 잉여 생산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 혜택을 주는 것이었던 간에, 미국에서 자본주의 성공의 주된 메커니즘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본론 1권에서 맑스의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한 논의는 그러한 방식을 추상적인 차원에서 논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자본주의적 경쟁이 자본가들에게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유된 잉여를 배분하는 데에 생산성을 가장 많이 올린 자들이 (즉 그들이 생산한 상품 1단위당의 비용을 가장 많이 낮춘 자)가 생산성 경쟁에서 뒤처진 자들을 희생시켜서 “특별 잉여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었다. 만약 그 뒤처진 자들이 따라잡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국 사업을 접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쟁은 궁극적으로 그 대립물인 독점과 과점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렇게 덜 효율적인 자본가들에게 생겨나는 부정적인 효과는 모든 생존한 자본가들에게 나타나는 긍정적인 효과와 나란히 벌어지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상품의 단위 비용을 낮춤으로서 자본가들의 경쟁이 어떻게 노동자들의 임금재 묶음의 비용을 또한 낮추게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만약 후자가 자신의 생산 과정에서 사회의 노동 전체 가운데에서 가져가는 양이 줄어든다면, 자본가들이 전유할 잉여를 생산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노동의 양도 많아 질 것이다. 마르크스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들이 창출해낸 가치에 비해 떨어지게 되며 따라서 상대적 잉여가치를 발생시키게 된다. 사실상, 아마도 미국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적인 천재성은 이것이다. 즉, 임금재의 단위 가치의 하락이 노동력 가치의 하락보다 일반적으로  더 크다. 결국 노동자들은 그들이 생산하고 자본가들에게 넘겨주는 잉여가 노동자들의 임금에 비해 절대적 상대적으로 모두 증가하는 가운데에서조차 생활수준 (실질 임금)의 상승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 식으로 이야기하면,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덧붙는 부와 노동자 대중에게 덧붙는 부의 격차가 늘어나는 것이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적어도 미국에서는 부의 격차가 늘어나지만, 실질 임금의 상승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다음의 두 그래프가 미국에서 장기적인 계급 착취율의 상승을 암시하고 있다. [그림 1]에서 미국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이 19세기 대부분과 20세기 전체에 걸쳐 연간 1.5퍼센트씩 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림 2]는 1870년이 지난 뒤 노동 생산성이 거의 평균 2퍼센트씩 올랐음을 보여준다. 이 둘을 함께 본다면 자본주의 상품 생산의 단위 가치가 실질 임금 상승 이상으로 떨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논지이기도 한데, 노동력 가치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 즉 착취율이 미국 역사에 걸쳐 극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이다. 실로 이러한 두 시계열의 비교는 1870년대가 지난 뒤 평균을 놓고 관찰하면 훨씬 더 충격적으로 보여 진다. 1870년대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연간 평균 1.29퍼센트 증가하였지만 그들의 생산성은 1.97퍼센트 증가하였던 것이다. 130년 동안 계속된 그 차이가 거의 연간 0.7퍼센트에 달한다는 것은 미국의 산업사의 대부분에 걸친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의 증가와 그 노동자들에게 돌아간 몫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음을 일정하게 보여주는 척도라 할 것이다. 


[그림 1] 1820-1999 실질 소득

그림 1 http://www.panix.com/~dhenwood/Stats_ears에서 가져온 데이터에 근거 

자료: Historical Statistics of the United States, Colonial Times to 1970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U.S. Bureau of Labor Statistics 

실질 임금은 명목 임금을 소비자 물가 지수로 나눈 것.  

주간 실질 소득, 10년 단위로 나타낸 연간 증가율, 1820-2000


소비 수준의 증가는 남북 전쟁이 끝난 뒤 미국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와 정치를 규정하면서 그런 부문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노동조합의 발달에서 보자면, 노동조합이 주된 초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 실질 임금의 상승에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명백한 것으로 보였다. 반자본주의적 사회 운동의 등장에서 보자면 그 운동은 미국 자본주의가 임금을 올려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충족” 시키는 데에 “성공” 했다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였다 (따라서 그 “성공”에 의해 침식되었다). 노동자들의 목표는 생산을 둘러싼 계급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사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증가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이 끝도 없이 되풀이되었다 - 적지 않게는 노동자들 스스로에 의하여.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의 광고 산업은 미국에서 사회적 지배의 위치로까지 성장하였고 이는 그 밖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광고는 소비야말로 최고의 목표이며 미덕, 즉 사회에서 사회적 성취와 지위를 측정하는 오직 하나뿐인 척도로 소비가 자리매김하도록 한 것이다. 광고는 단지 미국의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에서 생산된 소비재들을 위한 커다란 시장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소비에 대한 대중의 집착을 광적인 수준으로 유지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작동한다. 광고는 미국 대중의 의식을 깊게 형성하여 마침내 아담 스미스의 희망을 충족시킬 정도가 된다. 즉 소비야말로 그들의 노동 착취와 그로 인해 그들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결과들에 대한 단 하나뿐이고 충분한 보상이라고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림 2] 1870-2001 생산성의 평균 연간 변화

         생산성 변화 (%) = % NNP_R/L 변화

그림 2 데이터는 http:// pythie.cepremap.ens.fr/levy/ 

분석 단위는 미국의 사적 경제이며, 다룬 기간은 1869-2001이다.  

여기에 사용된 변수들은 L : 노동 시간 수 (백만) 1869-2001 

NNP_R: 96$에 매어놓은 국민순생산 (백만) 1869-2001 


물론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광고나 소비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보상으로 기능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미국의 다른 점은 소비와 그리고 자본주의 착취에 반응하고 대응할 대안적 형태들 사이의 균형에 있다. 미국의 독특한 자본주의 발전 경로에는 그 어떤 불가피성이라는 것도 없다. 보기를 들어 유럽 자본주의의 대부분의 경우 좌익적 노동조합, 정당, 사회 운동들은 미국에서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이들은 다른 종류의 노동자의 반응을 대표하는 바, 즉 개인적인 소비 수준을 올리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집단적 (때론 정치적) 노력들을 더욱 대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들에서는 미국의 노동자들이 누리는 것 보다 더 긴 휴가, 더 많은 노동 시장 통제, 더 유리한 노동 규율, 더욱 집단적인 소비 (국민적 의료 보험, 공공 교육에 더한 더 많은 보조금 등등)를 따낼 수 있었다. 유럽 노동자들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이익을 노조와 좌파 정당들을 통한 집단적 행동에 의존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그리하여 시민적 참여의 정도에서나 이념적으로 더 다변화된 매체 환경 등등을 보여주게 되었다. 미국 노동자들은 그런데 자신들의 이익을 개인적 소비 수준의 상승을 보장한다는 훨씬 더 협소한 초점으로 제한해 왔던 것이다.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의 차이점들이란 정도의 차이이다. 아담 스미스의 소망을 얼마나 제대로 실현시켰는가 하는 차이인 것이다. 많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이 미국의 경험을 복제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지금까지 선두는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의 부를 소유한 자들이 미국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본주의 경제라는 집단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는 듯 하며, 그로 인해 여전히 세계의 부는 미국에 불균형하게 투자된 상태이다. 


다른 한편, 높은 수준의 착취와 높은 수준의 개인적 소비를 짝 지우는 미국 자본주의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소망을 실현시키는 것에는 스미스도 또 그의 이념적 후예들도 알지 못했던 종류의 비용이 뒤따랐다. 무수한 통계 시계열이 그렇게 관련된 비용들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는 합법ㆍ비합법의 약물 남용, 노동 탈진, 우울증, 환경 악화, 배우자와 아동에 대한 성폭행, 이혼, 개인 사이의 폭력, 총기 숭배, 시민적 참여 (선거, 학부모로서 활동, 세계적 문제는 물론 모든 공적 정치 토론에 대한 무관심의 팽배)의 거부, 도로에서 차량 질주, 일상생활에서 고독과 고립 등이다.6) 그 결과는 미국 노동 계급의 지극한 취약성으로 나타난다. 여러 사람들이 이러한 취약성을 분석한 바 있지만, 물론 이렇게 높은 착취와 높은 개인 소비를 결합시킨 자본주의의 성공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식으로 분석되지는 않았다.7) 미국 자본가들은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도박 중독 등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착취적인 자본주의의 온갖 사회적 비용의 목록들에 대해서 무수한 “12 단계 갱생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지원하고 있다. 이는 마치 여기에 오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종교와 같은 분위기로 미국의 수천만 노동자들을 등록시키고 있다. 대기업들은 노동자들의 땡땡이, 작업에 대한 무관심, 심리적 감정적 스트레스 등 생산성을 갉아먹는 여러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의 자본 축적의 잉여의 일부를 쓰고 있지만 대부분 별 효과가 없다. 대기업 지도자들은 학교, 매체, 교회, 국가도 마찬가지의 노력을 하라고 압력을 넣지만 그 결과는 똑같이 실망스럽고 한심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 자본주의의 성공의 표면 아래에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심한 착취라는 가혹한 인간적 비용이 계속 누적되면 작업 실적 그리고 자본가들의 잉여에 대한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결국에 가서 무너뜨리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계급적 관점에서 보면, 미국 자본주의의 성공적인 착취(즉 높은 착취율)의 한 주요 비용은 가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정에서도 인간은 역시 노동하며 원자재들을 최종적인 재화와 서비스로 변형시키기 위해 도구와 장비를 사용한다. 어떤 가족 성원들은 자기들만이 아니라 가족 성원들 전체를 위해서 쇼핑, 요리, 청소, 수리 등의 일을 한다. 그 결과 가정 경제도 계급 구조를 가지게 된다. 가정 경제에서도 잉여가 생산되고 전유되며 배분된다.8) 


가장 단순하게 본다면, 최근 몇 십 년 동안 자본주의 기업들의 성공적인 착취는 미국 가정 경제의 계급 구조의 해체라는 비용을 낳았고 결국 그 성원들 사이의 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전통적인 미국의 가정 경제에서는 아내가 잉여를 사용가치의 형태로서 생산하고 남들에게 전달하며, 남편이 그것을 가족 성원들에게 분배한다. 특히 지난 50년 동안 이 아내들은 가사 노동에 더하여 기업에 고용되는 일까지 더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움직임이 엄청난 규모로 나타나게 된 주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다시 한 번 소비이다. 앞에서 말한 온갖 이유로 개인적 소비 수준을 올리려는 목적에서 그리고 또는 1970년대 이후 남편들의 실질 임금이 계속 떨어져 왔던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국의 여성들은 임노동으로 계속 옮아왔다. 이는 가정 경제 내에서 계급 구조에 긴장을 가져 왔는데, 여성들이 가정 경제 바깥에서 임노동을 하게 되어 가정에서 잉여 노동을 줄이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가정 경제의 계급 구조에 대해 좀 더 전반적인 도전 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계급적인 용어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 되자 많은 가족들이 참을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버렸고, 이는 이혼, 자녀 방기, 배우자 폭행 등등에 대한 여러 통계 자료에서 드러나 있는 바이다. 가족 관계가 붕괴함에 따라서 노동 현장에서 착취를 집에서 소비로 때운다고 하는 것이 그다지 잘 이루어질 수 없었다. 미국의 좌파들은 기업에 대해서이건 가정 경제에 대해서이건 계급적 분석(잉여라는 관점에서)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스런 사태가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전략을 수립한다든가 계급적-혁명적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 정치의 기독교 우익들은 그렇게 하였다. 이들은 “가족의 가치”라는 깃발 아래에 뭉쳐 최소한 개인적ㆍ가족적 삶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함에 호소하였다. 심지어 이들이 제공한 대책이라는 것이 미국 자본주의가 지금 가차 없이 파괴하고 있는 전통적 봉건적 가족의 계급 구조를 재건하자는 반동적이고 효과도 없는 제안들이라도 말이다. 물론 기독교 우익들은 이 범인이 자본주의라고 밝히는 짓은 할 리가 없다. 이들은 그저 낙태와 동성애를 “가족”의 적으로 낙인찍고 “가족적 가치”를 내거는 정치가들을 지지하는 데에 그 힘을 쏟고 있을 뿐이다. 


미국 예외주의 : 왜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가?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배경 가운데 하나는 자본주의가 아담 스미스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소비의 증가는 착취를 보상함으로서 착취의 증가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약세를 보이는 또 하나의 토대는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성공의 취약성을 파악하여 그들의 반자본주의 전략에 포함시켜 드러내놓고 자본주의를 겨냥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보기를 들어, 실질 임금에 초점을 두는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은 때때로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었다. 그들이 대중(주로 가장 낮은 임금 부문의 사람들이라는 것도 자연스럽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대중의 많은 숫자는 소득 증대의 수단에서 훨씬 더 강력하게 횡행하는 개인주의적 수단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더 교육을 받고, 더 좋은 직업 훈련을 받고, 복장과 식습관 등의 생활 방식을 개선하고, 거주지를 옮기고 등등). 이런 이들에게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그러한 소득 증가를 가져온다는 것이 별 효과가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가 빈곤 극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특히 사회적으로 인정된 개인주의적 해결책에서 완전히 실패한 빈민들과 연결되는 경우, 그러한 빈곤에서 헤어 나온 노동자들은 사회주의가 최소한 이제부터는 자신들과 무관한 것이라고 제쳐놓는 것이다. 요컨대 미국의 사회주의는 그 목표를 임금 상승과 노동자들의 소비 수준 상승으로 너무나 자주 너무나 협소하게 제한함으로서 스스로의 운동을 약화시키고 만 것이다. (강조는 편집자)


이는 사회주의의 목표를 미국 자본주의가 약속하고 또 실제로 많은 개별 노동자들에게 가져다주었고 또 아주 주의 깊게 그 노동자 개인이 생산에 이바지했기 때문에 일어난 개인적 소비 수준 상승과 같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대중적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학계에서 패권을 쥔 신고전파 경제 이론은 임금 상승이 순전히 개별 노동자들이 생산에 질적ㆍ양적으로 이바지한 것 때문이라고 확언하였다. 반면 사회주의 운동, 아니 사실상 모든 집단적 운동은 개인적 위험을 가져올 뿐 아니라 결국 그러한 목표를 이뤄내는 데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널리 낙인 찍어놓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의 사회주의가 “계급”과 “여러 계급들”을 부의 양으로서 규정하고 그 계급적 강령을 노동 계급의 부를 늘리는 것으로 규정하게 되면서, 잉여의 관점에서 맑스가 제시한 전혀 다른 계급의 정의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미국의 사회주의는 부의 양에만 초점을 둠으로서 미국 내의 중요한 사회 세력으로 부상할 기회를 망가뜨리고 만 것이다. 


맑스는 그의 주요 경제 저작인 『자본론』 전반에 걸쳐서 계급을 잉여의 생산과 전유, 분배라는 관점에서 정의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잉여가 증가됨으로써 인간 계발의 잠재력이 엄청나게 증대하였다는 것과 하지만 생산이 자본주의의 계급 구조에 갇혀버림으로서 그러한 잠재성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의 모순을 독자들에게 설득시키려고 애를 썼다. 『자본론』3권에 잘 나와 있는 것처럼, 잉여를 전유한 자본가들은 그것을 특정한 목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에게 배분한다. 그 잉여의 배분이란 그 자본가들로 하여금 잉여의 전유를 보장하는 데에 필요한 정치적ㆍ문화적 헤게모니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노동자 대중은 생산적이건 비생산적이건 똑같이 모두 자본주의적 착취와 그들의 정치적ㆍ문화적 헤게모니 아래에서 고생하게 된다.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맑스의 계급 분석을 이해하고 적용했었더라면 소비 수준의 중가보다는 잉여의 사회적 조직에 도전, 즉 누가 그 잉여를 전유하며 어떤 목적에서 누구에게 분배하는가에 도전하는 데에 더 초점을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전략들은 국가가 노동자들 임금 수준을 넘는 혜택을 제공해야 하는가 보다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그들이 생산한 잉여의 전유와 분배에 또한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두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자들은 임금 상승을 넘어서서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임금 체제의 종식이라는 맑스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하여 높은 착취와 그를 통해 가능해지는 억압적인 사회적 헤게모니를 높은 수준의 소비로 보상한다고 하는 아담 스미스의 희망을 좌절 시킬 전략을 규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업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시민적ㆍ문화적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삶에 축적되고 있는 비참함을 작업장에서 자본가의 착취의 심화와 연결 짓는 사회주의가 가능했다면 임금이 오른다고 해서 어려움에 부닥칠 이유도 적어지는 것이다. 


비록 무의식적이고 의도하지 않은 바였다고 해도, 미국에서 주도적이었던 사회주의와 맑스주의 경향들은 아담 스미스의 안정된 자본주의에 대한 희망을 실현시키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착취율이 소비 증가를 가져오지 않든가 그러한 소비가 자본주의적 착취와 그것이 돈을 대는 헤게모니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보상하거나 호도하는 기능을 하지 않든가 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그 나라 노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하게 된 것을 설명하는 데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미국을 빼고 다른 곳에서 사회주의가 훨씬 더 강력한 정치적 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 사회주의에 가한 비판은 다른 나라에도 적용된다. 다른 자본주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주로 임금 수준, 소비 수준에 초점을 두었고 또 그 원인으로 여겨진 생산 수단 소유의 불균형적 배분에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이들은 주로 생산 소유를 재분배할 국가 권력을 목표로 하였고 각국의 전통에 따라 차이는 있어도 임금과 대중 소비를 증가시키려고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노렸다. 잉여의 사회적 조직을 변형시키는 것, 즉 잉여를 자본주의에서부터 생산자들 스스로가 그 잉여를 집단적으로 분배하고 전유할 공산주의적 형태로 바꾸는 것은 때때로 비현실적이고 불필요하며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의제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또는 이는 그저 해마다 돌아오는 노동절의 수사적 제스처로 쓸모가 있는 모호한 미래의 유토피아로 후퇴해버렸다. 


미국의 “경제 위기”, 자본주의, 사회주의


우리의 중심 주장은 대중적 담론, 공식적 경제 분석, 그 밖에도 자본주의 지지자들과 사회주의자들 모두의 대립된 정치 전략에서 “경제 위기”가 관념되어온 이상한 역사를 검토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또 그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생존 가능한 자본주의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희망에 비추어보면 위기란 쉽게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노동자들이 소비 수준에서 증가가 아니라 지속된 감소에 부딪히는 일정 기간을 모두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의 소비가 감소하면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보상을 빼앗기는 셈이므로 그것에 대한 인정도 위협받게 된다. 개인적 소비 수준이야말로 노동자들이 바라고 있는 위안으로 그들에게 약속되었고 또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많은 다른 희망들을 포기해가며 얻고자 했던 것들이다. 자본주의의 전투적 옹호자들은 “위기”를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감소하는 상황들이라고 보았다. 이들 사이에는 노동자들의 소비의 상향 행진을 새롭게 하려면 어떤 해결책이 가장 좋을 것인가가 주된 논쟁거리였다. 


일부는 실질 임금의 상향 운동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장치는 스스로를 고칠 수 있도록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을 허락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케인즈와 같은 다른 이들은 시장의 자기 교정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사회적 비용과 위험이 크다고 두려워했다. 이들은 먼저 일시적으로건 무한정으로건 국가 수입에서 노동자들의 하락한 사적 임금을 보충할 국가 활동 그리고 사적 자본가들이 그들의 “정상적” 성장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보조하는 국가 활동을 선호하였다. 두 집단 모두 자본주의가 꼭 필요하고 가장 알맞은 경제 체제라는 헌신적 믿음에는 다른 여지가 없었다. 그들의 차이점은 오로지 그들이 “위기”라고 본 것에 대한 최선의 단기적 대책이 무엇인가였다 - 물론 이는 간혹 아주 긴박하고도 첨예한 것이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때때로 이렇게 위기를 정의한 것을 공유하였고 어떨 때에는 심지어 이를 자본주의의 “붕괴”와 같은 것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들이 국가 개입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지지자들과 다른 점은 오로지 곤경에 처한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보상과 더 깊은 국가 개입을 요구했다는 것뿐이었다. 좀 더 좌익적인 사회주의자들은 간혹 이러한 관점을 새로운 단계로 끌고 갔다. 이들은 국가가 사적인 자본주의 기업들을 인수하여 시장 대신 국가 계획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어떤 이들은 아예 국가 소유와 계획을 사회주의로 정의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공산주의의 달성이라고까지 하였다.9) 


얄궂게도,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해한 방식은,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자본주의의 목숨이 노동자들에게 실질 임금을 얼마만큼 높여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관점과 일치하며 결국 그것을 강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보상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문제에 싸이게 된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하강이 상승으로 돌아서서 실질 임금을 상승하려는 운동을 또한 쇄신하게 되면 자본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긴장을 푸는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이번에도 자본주의의 위기가 “붕괴”를 피하게 된 것일까를 의아해 한다. 이러한 주기가 되풀이되면, 마침내 사회주의자들이 묘사한 “자본주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내적인 붕괴를 가져온다.”라는 주장은 점점 더 설득력을 잃고 정치적으로도 그 효력이 없어진다. 그 붕괴는 차츰 아득한 먼 미래의 일로 축소된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은 심지어 자본주의가 부딪힌 위기 상황에서 설득력이 떨어지게 보인다. 사회주의자들이 설득하려고 기를 썼던 노동자들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심지어 사회주의자 자신들의 마음속에서조차 자본주의에서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 즉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의 사회적 이행 대신 “좀 더 현실적인” 목표가 된 것들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하강 국면의 기간과 낙폭 그리고 고통을 줄이는 국가 개입이었다. 사적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사회주의의 대응은 그리하여 많은 또는 적은 양의 국가 자본주의를 처방하는 것으로 후퇴하였다. 이는 케인즈주의와 사회주의를 땜질한 것일 뿐이다. 이 “국가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적용될 수 있는 이유는, 생산에서 창출된 잉여를 자본주의적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여전히 노동자들이 생산하며 타인들에 의해 전유되고 분배된다. 이 전유자들은 중대한 국가 개입에 종속된 사적 자본가들이든가 극단적인 경우에서는 그 사적 자본가들을 대체해버린 국가 공무원들이다.10) 


맑스가 이야기한 자본주의 위기 이론은 달랐다. 그는 자본주의가 보통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자본주의는 대단히 불안정한 경제적 체제로서 그 스스로의 반복되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대응으로 주기적으로 “그 자본의 창조적인 파괴”의 불황과 경기 후퇴의 하향 나선형을 긋게 되는 것이었다. 파산, 실업, 디플레, 축적 감소 등은 비용이 높지만 보통 효과적으로 자본주의 기업들을 다음의 성장과 번영의 기간을 위해 재조직하는 수단이었다. 하강 국면 동안 노동자들은 전형적으로 낮은 소비 수준을 겪게 된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주기가 곧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는 아니며 오히려 그 정상적인 작동 과정에서 쌓인 불균형을 바로잡는 정상적인 장치라고 강조하였다. 이 경기 순환과 자본주의의 붕괴를 잇는 필연적 연관 고리 따위는 없으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맑스의 관점에서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는다는 것은 다양한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변화가 합쳐지고 응축되어 잉여를 조직하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계급 관계가 위협 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주기적인 하강은 실질 임금의 하락 기간을 포함하여 그러한 위협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되지 못한다. 사실상 맑스가 그의 자본주의 분석을 발전시킨 목표는 잉여의 사회적 조직, 특히 착취야말로 노동자들의 고통에 중심적임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착취는 그 자체로 고통(소외)의 직접적 원천이지만 이는 또 수많은 다른 부담들에도 원인을 제공한다. 주기적으로 하락하는 실질 임금은 그 하나의 보기일 뿐이다.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맑스의 관점에 서서 사회주의 전략을 세웠다면, 착취와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적 비용을 폭로하는 문화적ㆍ정치적ㆍ경제적 운동이 나왔을 것이다. 그 사회적 의제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그들이 생산한 잉여를 전유하고 분배하도록 생산을 조직하는 체제로 이행할 것을 강조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경기 순환은 그저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틀을 잡고 정치적 작업을 적응시키는 특정의 계기 정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주기적인 실질 임금 감소는 아담 스미스 식으로 자본주의 위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처럼 그렇게 중심적인 위치를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실질 임금 증가로 착취적인 계급 구조의 사회적 비용들이 보상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고 또 그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생각을 비웃었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그들 사회의 실제 자본주의 사회의 궤적, 즉 착취율의 증가에 개인 노동자들의 소비율의 증가가 뒤따르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에 전념하였을 것이다. 착취에 따르는 다양하고도 엄청난 크기의 경제적ㆍ정치적ㆍ문화적 비용들을 폭로함으로서 그러한 사회주의적 운동은 미국의 장기적인 실질 임금 상승에도 [그림 1]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효과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


미국 자본주의가 두드러진 안전성과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착취가 유발하는 저항과 적대를 자본주의가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채널로 충분히 돌려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ㆍ문화적으로 미국 자본주의는 개인 소비 수준의 증가를 최고의 가치이며 인생의 만족과 즐거움에 대한 궁극적 열쇠이자 사회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경제적으로는 비록 간헐적인 단절은 있었지만 그래도 인구의 충분한 비율에게 소비 상승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미국 자본주의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지출되었지만, 착취율의 놀랄만한 장기 상승을 실현시켜 냈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의 이사회가 가져간 잉여의 흐름도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거대한 또 증가하는 계층이 생겨났다. 이들은 무수한 방식으로 착취가 성장하는 것을 원활하게 하도록 돈을 받는다. 여기에는 착취에 대한 저항을 세계에서 가장 히스테릭한 대중적 개인 소비재 축적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들어간다. 


노동자들의 삶에 끼치는 그 대가는 심오한 것이었으며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긴장에 시달리다가 무너져버린 가정 경제의 계급 구조, 심각한 심리적ㆍ육체적 긴장, 공공 생활에서 고립과 개인적 고독감, 폭력과 절망 같은 것들이 미국 자본주의의 착취율과 실질 임금의 증가가 성공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취약성과 실패의 증거들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사회주의 비판이 포용될 기회는 차고 넘친다. 이러한 기회들을 활용하려면 계급을 부와 빈곤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과 또 실질 임금 상승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두는 강령들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할 것이다. 물론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 직업 불안정성 등이 끊임없이 사회주의적 비판의 주요 타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뿌리 뽑는 것은 새로운 사회주의에서 한 부분일 뿐이다. 더 많은 부분은 잉여의 주된 조직, 자본주의적 착취를 지금 미국 시민 대중들이 경험하고 있는 무수한 근본적 문제들과 고통들에 연결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착취의 종식을 그 강령과 비전의 필수불가결의 요소로 만들 것이다. 맑스의 말을 한 번 더 풀어서 한다면, 임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임금 체제를 폐절하는 것이 핵심이다. 자본주의 착취의 희생자들을 위해서 그러한 핵심 목표를 건드리지 않고 임금 상승과 같은 ‘소소한’ 요구를 한다는 것은 노예제의 폐적이 아니라 노예들에게 배급을 더 줄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짓이다. 


참고 문헌


Blau, Joel 1999, Illusions of Prosperity: America’s Working Families in an Age of Economic Insecur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Chasin, Barbara H. 1997, Inequality and Violence in the United States, Atlantic Highlands: Humanities Press International. 


Fraad, Harriet, Stephen Resnick and Richard Wolff 1994, Bringing it All Back Home: Class, Gender, and Power in the Modern Household, London: Pluto Press. 


Lane, Robert E. 2000, The Loss of Happiness in Market Democraci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Perrucci, Robert and Earl Wysong 1999, The New Class Society, Lanham: Rowman and Little.eld Publishers. 


Resnick, Stephen and Richard Wolff 1987, Knowledge and Class: A Marxian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Resnick, Stephen and Richard Wolff 2002, Class Theory and History: Capitalism and Communism in the USSR, London: Routledge. 


Sullivan, Teresa, Elizabeth Warren and Jay Lawrence Westbrook 2000, The Fragile Middle Class: Americans in Debt,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옮긴이 홍기빈





1) 이 글은 Historical Materialism Vol. 11 : 4 (pp. 209-226), 2003에 있다. 

 

2) 이 논문은 지금 진행 중인 연구에서 나온 보고서이다. 그 연구 계획은 미국 사회 구성체에 대한 체계적인 계급 분석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연구 계획의 목표 가운데에 우리가 포함시킨 것들로서 미국 자본주의의 독특한 성질들 그리고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반(反) 자본주의 운동들의 상대적 약점에 대한 이해가 있다. 우리는 특히 몇 개의 경제 통계 시계열들을 고르고 조직하여 그려준 막스 프라드-울프(Max Fraad-Wolff)에게 감사한다. 또 이 논문의 그래프에 필요한 통계 데이터를 사용하도록 해준 더글라스 헨우드(Douglas Henwood), 제라르 뒤메닐(Gerard Duménil), 도미니크 레비(Dominique Lévy)에게 감사한다. 

 

3) 스미스는 이윤이란 노동자들의 생산물로부터 “빼내어진”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착취의 산물로서의 마르크스의 잉여 개념과 접근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저작에서 임금, 이윤, 지대의 관계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였다. 이로 인해 이후 스미스의 경제학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스미스를 높게 평가하는 마르크스의 비판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학설사]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4) 마르크스주의적 (그리고 다른 종류의) “계급적” 분석들에 있어서 계급을 정의하는 방식은 매우 다르다. 마르크스보다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두 개의 가장 오래된 전통은 소유와 권력에 각각 초점을 맞춘다. 즉 계급이란 부의 분배를 가르키든가 (가난한 자 대 부자, 유산자 대 무산자) 권력의 분배를 가르키든가 (지배자들 대 피지배자, 권력있는 자 대 권력없는 자)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양쪽 모두의 계급 개념에서는 다양한 등급 매기기 (예를 들어 다양한 “중간” 계급들)가 존재한다. 우리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여기에 또 다른 계급의 관념을 추가 하였으니, 생산에서 달성된 잉여에 초점을 맞추는 개념이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여러 계급들이란 이 잉여를 생산한 이들과 그것을 전유하는 이들의 대결이 되며 또한 그 잉여가 생산되고 전유된 후 그 분배 과정을 행하는 자들과 그것을 받는 자들 사이의 대립이다. 이렇게 계급을 잉여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이 논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와 여타의 계급 개념들과의 차이에 대해서는 Resnick and Wolff 1987, Chapter 3 을 참조하라. 

 

5) Resnick and Wolff 1987, Chapter 4. 

 

6) 우리는 심한 계급 착취가 이러한 비용들의 유일하다든가 심지어 가장 기본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력의 소위와 그 잉여 노동을 자본가에게 전유당하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분노와 황당함을 가져온다는 점을 오랫동안 인정해왔다. 하지만 계급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한 이들은 그들이 이런 식으로 착취당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또 다른 이들이 이들을 돕기 위해 개입할 수도 없다. 그들의 짜증, 불만족, 분노의 이러한 원인이 계속 인식되지 못한 채 그들의 무의식 영역에 남아 그들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다른 노동자들, 자신들의 가족과 공공 생활 일반에서 상호 관계를 맺는 데에 계속 영향을 끼치게 된다. 

 

7) 그래서 로버트 레인은 “행복의 상실”을 논하면서 이를 시장과 연결 지었다(Lane 2000). 설리반, 워렌, 웨스트브룩은 개인적 소비에 대한 초점이 자본주의와 모순되고 또 그것이 과도하여 노동자들이 지속될 수 없는 채무에 앉게 되면 심지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훌륭하게 문헌을 제시한다(Sullivan, Warren and Westbrook 2000). 개인 소비가 늘어났지만, 노동자가 겪는 복합적 취약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문헌이 나와 있다. 그 보기로서는 Blau 1999, Perrucci and Wysong 1999, Chasin 1997 등을 볼 것.  

 

8) Fraad, Resnick and Wolff 1994. 

 

9) Resnick and Wolff 2002, Chapter 3. 

 

10) Resnick and Wolff 2002, Chapter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