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기획_소비에트 다시보기] 의회제도의 대안, 서구 소비에트 노동자 평의회 1915~1920년: 제2장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4월호

[기획_소비에트 다시보기] 의회제도의 대안, 서구 소비에트 노동자 평의회 1915~1920년: 제2장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6:33

2장. 위기에 빠진 서구 제국주의 


우리가 그때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부딪힌 위기를 이해하려면 1914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쟁의 발발은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권력구조를 철저하게 재구조화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전쟁에서 승리는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있었다. 보기를 들어, 1918년 9월 20일 하루 동안에만 영국군은 40,000톤에 이르는 943,837개의 탄을 발포했다.1) 이러한 거대 전쟁은 국민경제를 효율적이고 통합된 생산체제로 작동하기를 요구했다. 


영국은 경제통합을 앞서서 이끌며, 국가와 사적 자본 사이의 이해가 결합된 국가자본주의 체계를 구축했다. 전쟁이 발발했던 첫날부터 정부는 철도를 ‘접수’했다. 주요 사기업들의 경영자들과 무역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구성된 철도 집행위원회(A Railway Executive Committee)는 철도를 운영했다. 정부가 ‘예상치 못한’ 간섭을 했지만, 정부는 당연히 사적 소유자들에게 ‘간섭’의 대가를 주었다. 즉 사적 자본가들의 이익은 보장받았다. 국왕과 조국을 위해 생명은 버릴 수 있을지언정, 이윤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차츰 각종 산업이 전쟁을 위한 국가기구로 편입되자, 국가와 자본 사이의 상호침투 현상은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1918년 말 경에는 국가는 수입품의 90%와 대부분의 기초원료 사용을 통제했고, 3백 50여만 명의 사람들을 군수부(Ministry of Munitions)에 직접 고용하였다. 


국가가 경제영역으로 개입하는 만큼 자본가들도 또한 국가로 이동해갔다. 로이드조지(Lloyd George)가 장관으로 있으면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군수부(Ministry of Munitions)는 이러한 과정을 전형적인 것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말대로 이 기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업가들의 조직이었다. 성공한 사업가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했던 것은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2)


그때 전쟁은 각국을 서로 대립하게 했지만 아울러 개별 국가 정책들이 기묘할 정도로 같게 만들었다. 독일 국가지도자들은 장기전을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곧 자원을 철저히 다시 조직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정부는 조달청(the Raw Materials Section)이라는 특수 공급조직을 설립했다. AEG 전기회사의 회장(head)인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는 이 조직을 운영했다. 짧은 시일 안에 독일 사회의 가장 깊은 심층까지 국가와 기업 사이의 융합이 관통해 들어갔다. 라테나우가 관리했던 정부 산하 거대기업체계는 대부분의 산업 생산과 분배에 적용되었다.3) 국가의 조치는 으레 장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자본의 집중화 과정을 단기에 완성시켜주었다. 


1915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이어 이탈리아가 전쟁에 들어섰다.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로 경제를 재편하는 일은 산업자본가들에게 맡겨졌다. 1918년 1,976개의 회사들을 포괄하는, 정부 산하의 생산체제 재편과정은 튜린의 산업 사용자 협회(Industrial Employers League)에게로 돌아갔다. 


전쟁 수행을 위한 끝없는 요구들은 모든 경제생활을 왜곡시켰다. 군수품 생산의 필요성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금속 산업으로 끌어들였던 반면 다른 산업들을 침체시켰다. 전시 동안 영국에서 금속 숙련공의 수는 34%가 증가하여 2백 4십만 명에 육박했다. 독일에서는 44%가 증가하여 군수분야 노동자들이 3백만 명에 달했다. 이탈리아는 미미한 군사력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으나 종국에 가서는 905,000여명의 사람들이 군수 산업에서 일했다.


국가 자본주의 체제가 급격히 다시 구성된 것은 재구성이 시작되었을 때, 과거에서 놀라운 괘도이탈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1914년 이전에 몇 십 년 동안 있었던 경향들이 가속화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개별 기업들은 경쟁에서 이기려고 점점 더 큰 생산단위로 집중되어 갔다. 그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량 생산 부문으로 끌어들였다. 기업합병과정의 논리적 완결은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루어 졌다. 이때에는 전국이 국가 자본주의 관리체제 하의 거대한 통합된 공장들로 만들어졌다. 생산은 각각의 공장들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영세 기업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때부터 산업은 국가적 노력에 의해 대규모로 조직되었다. 개별 자본가들은 국가의 경제개입에 분개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은 이 기회를 통해 국가로 하여금 국내 노동자들을 단속하고 국외 경쟁기업들을 이기는데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은 엥겔스가 수년 전에 예견했던, 뚜렷한 모순을 함축하고 있었다. 수백만 노동자의 집합적 협업으로 얻은 부의 생산과 한줌의 자본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 부의 사적 전유 사이에는 대립적 모순이 존재했다. 이러한 대립적 모순은 스스로를 ‘개별 공장들에서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적 수준에서 생산의 무정부성 사이의 적대’로 재생산되었다.4) 


전시 경제는 한 나라를 거대한 개별 공장들인 것처럼 만들었고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은 전쟁을 통해 야만적으로 표현되었다. 사회적 생산과 전쟁이라는 두 개의 모순적인 힘들은 군수산업에서 마주쳤다. 위기가 특수한 힘으로 표현되었던 곳, 그래서 노동자 평의회 운동이 시작되었던 곳은 바로 여기였다. 


지배계급은 국가와 자본의 강제적인 상호침투 즉 정치와 경제의 상호침투를 통해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노동운동은 그 동일한 장소에서 자본에 대한 대응세력으로서 싸워야 했고 자본의 무기에 대적해야 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그 자체가 정치와 경제의 상호침투의 결과로서, 경제투쟁이자 정치투쟁의 결합체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빗발치는 탄압에도 ‘빗발치는’노동운동


그때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대체로 국내 노동 계급의 협조여부에 달려 있었다. 처음에 지배계급들은 아무런 문제들도 없었다. 전쟁 초기 몇 주 동안 대중들의 열광적인 애국주의는 지배계급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줬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현대전의 잔인한 실상들을 알게 되자 언론의 과장된 애국주의적 호들갑은 명백히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전쟁반대 여론을 분쇄하기 위해서 설득과 강제를 결합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러한 설득과 강제의 첫 번째 조치는 기존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길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쉽사리 진행되지 못했다. 유럽 노동운동세력은 1907년 슈트가르트(Stutgart)에서 열린 제2 인터내셔널 회의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할 것을 안건으로 상정했다. 그때 모든 주요 노동계급 정당들은“전쟁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행동을 다 할 것”을 다짐했다. 그렇지만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선언하고, 나아가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서둘러 봉기하여 전쟁 때문에 일어난 경제적 및 정치적 위기를 자본주의적 계급 지배를 전복하는데 이용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의무”라고 맹세했다.5)


하지만 1914년 8월 4일에 이러한 모든 미사여구는 깡그리 잊혀졌다.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동참하고자 꼴사납게 서둘러댔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쇼비니즘에 더욱 저항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지원도 사보타지도 없다’라는 슬로건은 국가의 전쟁 시도를 방지하는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파트너(사민주의 정당)들 만큼이나 열광적으로 제국주의의 전쟁의도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8월 4일 이전에 독일의 자유노조는‘국가의 이익을 위해’파업 및 임금 인상을 중지하기로 약속했다. 몇 달 후 전쟁에 대한 영국 노동조합의 협조행위는 재정 협정(Treasury Agreement) 속에 구체화되었는데, 이 협정은 군수 생산을 방해하는 모든 파업들을 불법화하되,  노동권을 제한받는 대가로 이익을 공유한다는 허구적 내용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금속산업 노조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통해 그때 일반화된 입장을 표현했다. “우리는 전쟁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전쟁의 결과들에 저항하려는 생각는 어리석고 우스운 짓이다.”6) 이러한 단순한 논리는 전쟁을 공식적으로 비난하지만 그와 함께 전쟁을 지지하려고 드러내놓고 노동자들을 동원시킬 수 있도록 해줬다.


유럽의 여러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전쟁 지속을 위해 무파업이라는 사회적 협약을 선언했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의 손과 발을 묶어서 전쟁광들에게 바쳤던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조직들은 단순히 중립화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 기구들에 편입되어버렸다. 영국 노동당 지도자인 아더 핸더슨(Arthur Henderson)은 토리당/자유당 연립정부의 산업관계 고문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노동조합 관료들은 군사징집기구에서 군사관료들과 자본가들 다음에 앉았고 노동자 계급을 참호 속에서 죽도록 내몰았다.


자신들의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자 노동자 계급은 기초적인 시민적 권리들에 대한 엄청난 공격에 대항할 방어막이 없음을 깨달았다. 영국의 왕국보호조치(Defence of the Realm Act)와 독일의 비상계엄법(Law of Seiege) 같은 비상 법령(Emergency legislation)은 경찰과 군대에 전례가 없던 권력을 부여해줬다. 각국의 의회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 비틀거리며 의회의 영향력이 무시할 정도로 축소되었다. 검열과 탄압은 이제 유럽 국가 기구들의 총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이 되었다. 


군수산업들은 그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영국에서 1915년 7월의 군수 물자 법령은 군수산업에서의 파업들을 금지시켰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들이 금지되는‘통제된’ 공장들의 설립을 허용했다. 군수산업 노동자들이 더 좋은 보수와 근로조건을 위해 다른 직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법령은 사용자들의 허가 없이 직장을 바꾸는 사람들을 6주 동안 재고용될 수 없도록 강제하였다.7) 앞으로 징병은 노동자를 길들이기 위한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갔다. 


독일은 영국으로부터 한 수 배워 1916년 12월에 더욱 가혹한 법률을 도입했다. ‘지원 서비스법(Auxiliary Service Law)’은 독일경제가 일체화된 전쟁 체제로 재편되는 과정을 완결시켰다. 군대의 규율 하에서 일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도(1917년까지 백만 명에 이르는 군인들이 산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정부가 통제하는‘애국적 지원서비스(patriotic Auxiliary Service)’에 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업권이나 직장을 바꾸는 전직의 권리는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겉으로 나타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양보조치는 노동자 위원회를 결성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 사이의 그리고 노동자들과 고용주들 사이에 대한 상호협력을 촉진시키려고 기획되었다8). 그때 정부는 작업현장의 노동자 대표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속사정을 보면 이전에 정부가 베를린 금속 노동자들과의 공격적인 투쟁성에 밀려 특별 중재기구, 곧‘대 베를린 금속 산업 전쟁위원회(the War Board of the Metal Industry of Greater Berlin)’를 설립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구에는 세 명의 대표들이 있었는데  각각 경영계, 노동조합, 정부들을 대표했으며 국방부 관료가 그 의장을 맡았다. 


이탈리아의‘산업 동원’체제는 베를린 전쟁위원회(Berlin War Board)와 비슷한 일련의 위원회들로 이루어 졌다. 다시 한 번 애국적 의무에 대한 호소가 강제력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군수 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의 1/3은 위반을 한 뒤 헌병들에 발각되어 징병되었다. 징병 위협은 작업장에 남아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데 이용되었으며, 지각하거나 십장에게 대드는 것 같은‘반사회적인’행위는 범죄 행위로 취급되었다. 


비록 여러 나라들이 유사한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에 가해졌던 충격의 정도는 나라마다 상당히 달랐다. 보기를 들면 영국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시기 동안 4백만에서 5백만 명의 사람들을 소집시켰고, 그 보다 적은 인구를 가졌던 이탈리아는 5백 75만 여명의 사람들을 동원시켰으며, 독일은 1천 3백만 여명을 참여시켰다.9) 영국은 유럽 대륙 전체가 초토화되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영토에서 삶과 재산이 파괴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전쟁 때문에 경제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이는 인플레이션 현상을 통해 나타났다. 1918년에 영국의 생계비는 전쟁 이전보다 250%까지 올랐고, 독일에서는 300%, 경제가 취약했던 이탈리아는 400%까지 올랐다. 인플레이션에 임금수준을 맞추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모든 나라들에서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임금 수준은 그 가치를 유지했던 반면, 독일에서는 비록 더 좋은 보수를 주던 군수 산업에서 조차 노동자들의 소득은 전시동안 23%가 떨어졌고, 이에 비해 이탈리아는 34%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임금수준의 하락은 공중위생에도 영향을 주었다. 영국은 공중위생의 하락을 겪지 않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의 경우 빈약한 영양 공급 상태와 가혹한 생존조건들은 공중위생의 심각한 악화를 가져왔다.10) 보기를 들어 1918년까지 튜린에서 사망률은 전쟁 이전 수준보다 49%가 상승했고 출생률은 29%가 떨어졌다.11)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주목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영국의 노동조합은 전시 동안 성장했던 반면, 독일에서는 대규모 징병이 노동조합의 조직률에 파괴적인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다가 노동운동 지도자의 제국주의로의 갑작스런 항복(capitulation)은 그 무엇보다도 노동대중들에게 정신적 충격과 큰 상처를 주었다. 전쟁 중반까지 사회적 일탈과 대중 징집은 삼백만 명의 강력한 조직수준이었던 자유노조(Free Trade Unions)의 조합원수를 반감시켰다.12) 이탈리아에서도 역시 사회주의자들과 동맹관계에 있던 일반노동연맹(General Confederation of Labour)의 성원 수는 전쟁 이전의 335,000명의 수준에서 230,000명 수준으로 급감했다.13)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은‘왕과 조국’에 대한 노동자들의 애국심을 누그러뜨렸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다음과 같이 썼다시피,


사라진 것은 무엇보다도 광기이다. 사라진 것들은 애국주의적인 거리 시위들, 의심스러워 보이는 자발적인 동원에 대한 추구였다. …… 엷은 대낮의 일광과 같은 탈 환각적인 분위기 속에 다른 합창이 울려 펴졌다. 전쟁터에 있는 매들과 하이에나들의 탁한 울음소리가 그것이다.14)


전쟁은 모든 면에서 심각한 장애에 부딪혔고 사회생활의 모든 지평들에서 정의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이 강력히 솟아올랐다. 이러한 자각된 소망은 아래와 같이 전후 파업활동들의 폭발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앞에 나선 금속노동자들


실제로 예외 없이 각국 금속산업 노동자들은 전투성의 부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일정 정도 특권을 지닌 숙련공들이 노동자 평의회를 조직적 수단으로 하여, 현장 노동자들의 기초적인 불만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전화시켰다는 점이다. 전쟁 이전에 금속산업 숙련공은 일반적으로 낮은 파업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고 종종 사용자들에게 최고의 임금 대우를 받았으며 다른 노동자 집단들보다 좋은 근로조건들을 향유하고 있었다.16) 


우리는 자본주의가 지닌 사회적 생산과 무정부성 사이에 빚어진 모순들이 어떻게 군수산업에서 마주쳤는지를 살펴봤다. 그렇다면 현실적 수준에서 그것은 어떻게 작용했을까? 무기에 대한 그 억제할 수 없는 갈망 때문에, 전쟁은 군수산업을 팽창시키도록 만들었고, 금속 노동자들, 특히 숙련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했다. 베를린의 선반공 지도자가 썼듯이, 숙련 노동자들은 “생산과정에서 조직적으로 견고하고 중요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어떤 뜻에서 그들은 거대기업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었다.”17) 그리고 무기를 만드는 숙련공들은 자신들의 기술들이 대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본은 숙련공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보다 군수산업에 배치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러한 그때 상황은 숙련공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줬다. 


거대한 변화들은 공장에서의 생활을 뒤흔들었다. 군수물자 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참을 수 없는 노동시간을 강요받았다. 튜린 피아트(Fiat)사에서 노동자들은 주당 75시간을 일했다. 베를린의 선반공들의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 30분에서 11시간으로 상승했다. 그때 그들은 주당 6일의 노동에다가 5시간에서 12시간 정도의 강제적 일요일 노동도 하게 되었다.18) 영국 글래스고우(Glasgow)의 숙련공들도 독일 노동자들에 맞서 군수물자들을 생산하려고 비슷하게 오랜 시간 노예처럼 일했다.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작업장 관행은 비상 법령(emergency legislation) 하에서 금지되었다. 숙련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일정정도 작업과정을 통제할 수 있었던 관례는 쉴 새 없이 무기를 생산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순간에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노동자의 경우에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썼듯이 자본가들은 여성 노동자 같은 값싼 인력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전쟁이 분명하게 보여줬던 것은 여성은 너무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점이 아니라 남성들이 너무 많은 임금을 받아왔다는 점이었다.”19) 전쟁 이전까지 금속 제조업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배제했던 일반적 관례는 그것이 보여주는 편견이 무엇이던지 간에, 금속 남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 안정 및 임금에 대해 통제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1914년이 지난 뒤 여성 노동력의 유입은 숙련 노동자들의 전통적 방어기제가 파괴된 정도를 설명해준다. 영국에서 정부관리 하에 있던 군수 공장들의 경우, 여성 노동자들의 수는 단 2년 동안에 390%로 상승했다(그에 비해 남성 노동자 수의 증가율은 22%로 완만한 상승을 보여줬다).20) 한 조사에 따르면, 1917년에 여성들은 이탈리아의 군수산업 노동자들의 70%를 차지하고 있었다.21) 독일에서는 남성 노동자들의 수는 23%가 하락했던데 비해 전체 여성 산업노동자들의 수는 46%가 상승했다.22)


반숙련 및 탈숙련 노동자들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신기계의 도입은 숙련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의 공격을 더욱 완성시켰다. 더욱 많은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고 노동 분업을 확대시킴으로써 전시 자본주의는 급속하게 생산을 사회화시켜 나갔다. 이는 1914년 이전부터 시작된 두 가지 원천들로부터 발생했다. 하나의 원천으로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고용하는 공장들은 대량 생산체계로 건설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공장들 안에서 업무들은, 장기간의 도제숙련기간이 필요 없는 단순한 조작들로 쪼개졌었다. 또 다른 원천으로서, 자본가들은‘과학적 관리’와 같은 새로운 경영기법들을 도입했다.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Taylor)가 미국에서 새로운 관리체제로 전환시키려고 처음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과거 숙련노동자들은 업무를 처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했던 반면, 이제 십장들은 시간과 동작분석 전문가(time and motion expert)의 도움을 얻어 탈 숙련공들에게 업무수행방법을 지시하게 되었다. 


새로운 기계들은 작업현장 업무처리방식을 변화시켰고 자본가들이 과거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금속 노동과정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생산자들의 모든 기술과 주도권은 제거되었다. 더 이상 어떤 숙련공들도 처음부터 끝까지, 즉 금속 원료부터 완성품까지 노동과정을 19세기에 그래왔던 것처럼 주체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자긍심은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소외감이 가득 채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현상이 수동적인 체념으로까지 가지는 않았다. 개인들이 상실했던 것을 집단이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산물은 거대 공장들에서의 수많은 노동자들 사이의 협업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자신감과 계급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금속산업은 고도의 사회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곳이었던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 평의회 운동의 최초 지도자들을 배출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 산업 부문만이 (전쟁 물자에 대한 요구로 표현되었던) 자본주의적 경쟁의 무정부성과 노동과정의 갑작스러운 사회화를 경험했었기 때문이었다. 


군수물자에 대한 필요는 숙련 노동자들이 일시적으로 협상 권력을 가질 수 있게 했지만 그러한 사실 자체가 노동자 평의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숙련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계의 모순들 속에서 획득한 특수한 통찰이었다. 그 모순들은 이중의 관점을 제공해주었다. 거시적인 (국가 사이의 전쟁)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생산 부문에 대한 자본가들의 공격과 그에 따라 더욱 사회화된 노동과정)이 그것이다. 노동자 평의회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 것은 이 위기의 일반적 특징을 막연하게나마 알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위기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총체적 통찰은 병사에게까지 확산되지는 않았다. 병사들은 목전에서 제국주의의 끔찍한 현실을 봤고, 시인들과 작가들은 전쟁이 어떻게 소외를 불러왔는지를 낱낱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는 비-계급적인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단절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병들과 장교들의 계급적 출신은 서로 달랐고 그들이 처한 조건도 달랐다. 하지만 집합의식을 형성시키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이해대립은 대체로 없었다. 


어째서 수병들(sailors)이 보병들(soldiers)보다 더욱 투쟁적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독일 해군은 카이저 정권(Kaiser)의 몰락과정에서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러시아 발틱 함대는 10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해병들은 (보병에 비해) 덜 파편화된 경험을 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체로 집합적으로 작업이 이루어지는 전함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금속노동자들로써, 갑판 아래에서 복잡한 기계류를 다루었다. 산업부문에서 일하는 다른 동료들처럼 해병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거대한 전쟁 기계의 톱니들로 이해할 수 있었다. 


눈여겨 볼 점은 전시 자본주의 체제에서 특수한 위치가 금속산업 노동자들로 하여금 혁명적인 의식과 전망을 지니게 했다는 점이다. 이는 서유럽에서 어째서 반숙련이나 탈숙련 노동자들보다도 숙련노동자들이 투쟁을 이끌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숙련 노동자들은 몇 년 동안의 투쟁과 조직화, 그리고 노동운동 참여 같은 복합적인 활동들을 통해 독특한 노동운동 경험을 겪었다. 이는 숙련공들에게 어떻게 그들이 생산과정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강렬한 정서를 제공했다. 이러한 정서는 처음으로 산업부문에 들어왔던 여성과 젊은이들에게는 공유되지 않았다. 사실상 여성과 젊은 층인 신규노동자들의 경우, 전쟁은 분명히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줄만한 것이었다. 


흔히 금속 숙련공들이 투쟁적으로 변하고 노동자 평의회 조직에 주목하게 되었던 점은 그들이 자신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한 보수적인 이유들 때문이라고, 보기를 들어 자신들의 엘리트적 지위와 숙련공들의 전통적인 권리들을 보호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되어 왔다.23)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장 강력한 노동자 평의회의 토대는 기술적으로 앞서있고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공장들이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숙련공의 노동관행들이 가장 잘 보호되고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숙련 노동자들의 혁명적 추동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경우 숙련공들의 작업장투쟁과 관행들이 결코 깊은 뿌리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 존재한 더욱 강력한 급진적 경향성이 그때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독일과 이태리에서 가장 강력한 평의회 운동을 전개했던 곳은 가장 사회적으로 조직되었던 작업장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자평의회에 주목했던 것은 합리적 진보에 대한 러다이트식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 사이에 벌어진 경쟁의 무정부성과 국내의 사회화된 생산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의 모순들의 비합리성에 대해 대응했던 것이다. 


따라서 평의회 운동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에 적합한 것이었다. 평의회는 유럽의 산업들 중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앞섰고 가장 역동적이었던 금속 산업 분야에서 성장했다. 36,000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페테로그라드의 푸틸로프, 10,000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베를린의 DWM, 15,000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피아트 센터 같은 공장들은 노동자 평의회의 발생지들이었다. 그들의 경험들 속에서 얻은 혁명의 교훈들은 오늘날의 조건들에서는 결국 이른바 (소규모 작업장들에 기반하고 있었던) 파리코뮌이나 (장인들을 그 기반으로 했던) 차티즘보다 더욱 적합한 것이었다. 


1914~1918년의 전시 위기는 많은 힘들이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위기는 노동계급의 전통적인 방어수단을 제거해버렸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조직화하도록 만들었다. 전시 위기는 특정 산업에서 사회적 관계의 약한 고리가 만들어지도록 했는데 예컨대 군수산업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다. 심지어 그것은 투쟁 방법 또한 규정했다. 정치와 경제가 융합되어 있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두 가지 전선들, 즉 1. 작업장에 대한 경제적 공세와 2. 전쟁이라는 정치적 쟁점에 대항하고 있는 전선들에서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의해서만 대응될 수 있었다. 20세기의 자본주의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대량 생산 단위들로부터 자라난 혁명적 민주주의 속에서 적수를 만났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단지 군수산업 노동자들에게만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니다. 위기는 몇 백 만 노동자의 의식에 충격을 주었고“좋든 싫든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라는 지배계급의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손상시켰다. 총동원 전쟁(total war)은 일상생활에 대대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허구적인‘국가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자기를 희생시켰던 몇 년 동안, 과거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계는 그러한 고통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는 정서가 자라났다. 


말할 것도 없이 이렇게 널리 퍼져 있는 정서의 힘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다음의 대화, 즉「적진으로 향하는 밤기차」라는 표제로 출간되었던 우익 잡지는 이러한 정서를 적절히 표현하고 있었다. 


프랑스 병사 : 우리는 자본주의를 …… 이른바 사회주의, 공산주의 또는 소위 새로운 질서로 바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제주의, ‘민주주의’ 또는 개인주의는 확실히 아닐 것입니다. ……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전체가 전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당신은 독일의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이와 동일한 것을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봤습니다. …… 확실히 참호들 속에 있는 젊은 남자들과  군수공장들에 있는 젊은 여성들은 오늘날 공산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 그들은 일당 6수스(sous)를 받았습니다. …… 그들은 똑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그들은 동일한 명령들에 복종하며 동일한 오두막집들(hovels)과 개천들(ditches)에서 살아갑니다. 


하사관 :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경험한 일들을 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피를 흘려 바쳤던 그 나라를 여러분 정치가들, 자본가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대로를 달리는 민주주의의 귀족들에게 되돌려 줄 것 인가요? …… 프랑스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은 싸웠던 우리의 것이고, 군수공장들에서 노동했던 여성들의 것이며, 죽은 동지들의 고아들을 지원했던 농민들의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프랑스는 우리의 것입니다. 


만약 노동자 평의회가 단지 군수산업들에서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군수산업 노동자들이 대다수 민중과의 동맹을 쟁취해내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위기가 군수산업에서 처음으로 평의회를 발전할 수 있게 했을지라도, 더욱 광범위한 계급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속산업은 계급투쟁 전체의 전위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노동자 평의회는 그것이 전체 노동계급의 대중조직이 되고 결국에는 노동자 국가가 될 수 있을 때까지 확장될 수 있을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거대한 가능성들을 열어줬다. 하지만 그 가능성들은 단지 가능성들일 뿐이었다. 객관적인 환경들은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 조직화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참호 속에서의 죽을 수 있다는 압력, 공장에서의 장시간 노동 그리고 식량 부족은 가장 덜 조직화되었던 노동계급 부위들에서 조차 여러 폭발적인 돌발사태들(upsurges)을 야기하였다. 자생적 행동들의 가능성이 조직화되어 승리로 이어질지 여부는 이제는 혁명적 지도력에 달려 있었다. 노동자 평의회는 올바른 지도력을 제공해 줄 수 있고, 모든 인간성을 말소시켜버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주의를 막을 수 있는 힘이었다.


그때 가장 중요한 쟁점들은 전쟁과 작업장 투쟁이었다. 대개 개량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그것들을 하나로 연계시키려고 의식적 노력이 이루어지곤 했다. 순전히 국가수준의 정치적 쟁점에만 기반하고 있는 어떠한 정치 운동도 노동자들의 물질적 관심사들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지 않는 이상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투쟁도 그것이 부분적인 경제적 목적으로 제한된 채 남아있는 한 그것은 계급을 분할통치 상태로 남겨두게 될 것이고, 엄청나게 강력한 국가기구들의 손에 의해 패배하게 될 것이며, 그 국가기구들은 노동조합들의 공식적 지도부들을 포섭하게 될 것이었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 개량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현상은 많은 노동자들의 실제적인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착취의 대상이 되고 이로 인해 자본가들에 맞서 싸울 노동조합과 같은 집합적 경제 조직 필요성을 쉽사리 취득하게 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작업현장 상황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쟁점들을 마주하게 되면 이에 대한 계급 조직 및 분명한 계급 정치의 필요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사고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들에 대한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만약 단순한 의식적 반영이라면 정치와 경제의 분리현상은 자본주의 위기로 인해 노동자들의 문제의식이 개별 공장들을 넘어서 더욱 넓어지거나 또는 경제 투쟁에 대한 국가개입이 국가와 경제적 쟁점들 간의 밀접한 연관을 보여주게 된다면 쉽사리 그리고 저절로 극복될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분파적 노동조합들과 의회 정당들 같은 조직들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바탕으로 삼아 건설되고 성장해왔다. 대의제와 더불어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파업에 찬성했을 때 지역기반의 표를 잃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산업에 주요한 초점을 두고 있는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쟁의가 벌어지는 동안 국가에 정치적으로 도전하게 되면 국가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비록 노동자들의 (정치-경제 융합의) 요구들에 거스르는 것이었을지라도, 서유럽의 많은 당 지도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분리를 유지하려는 엄청난 노력은 개량주의적 조직들을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결국 노동자 혁명에서부터 자본을 보호하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만약 노동이 자본의 지배에서부터 해방되려면 가장 선진적인 집단인 노동계급이 생산에서 착취경험을 더욱 더 일반화시켜 자본가와 국가를 전복할 수 있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행동이 필요하다는 이해로까지 확장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융합만이 성공적인 혁명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노동자평의회는 이러한 융합을 성취시킬 수 있는 조직형식이었다. 이를 건설하려고,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라는 외부의 적과 개량주의라는 내부의 적에 맞서 그 대의를 옹호하려면 새로운 지도력이 개발되어야 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당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그에 상응할만한 힘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수는 적지만 놀라운 영향력을 지닌 정치적 혁명집단들과 작업현장의 전투적 노동자 집단들이 있었다. 서유럽에서 그들은 아직까지는 당을 구성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현장투쟁도 만들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가장 앞선 정치적 사상들(사회주의자 전위들)을 공장들에서 현장 활동가들(투사 전위들)에 결합시킴으로서 지도력의 전망을 보여줬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이러한 두 가지 요소인 정치적 사상과 현장 투쟁 활동은 가장 조직화된 노동자들, 즉 군수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군수산업 노동자들은 이제는 노동계급의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볼셰비키 당은 정치적 수준의 사회주의자들과 경제적 수준의 전투적 전위들 사이의 융합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통해 노동자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것이다. 


서유럽의 혁명운동들은 효과적인 지도력을 구축하려 애썼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리고 계급투쟁이 세차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서로 다른 전위를 하나의 응집성을 가진 힘으로 통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도력이 성취되는 정도에 따라 노동자 평의회 운동들의 힘이 결정되었다. 노동자평의회는 고정된 회원증을 가지고 움직이는 수동적인 제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응집된 힘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들의 능력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의 성장에 결정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옮긴이 심용보


1) D. Mitchell, 1919 : Red Mirage (London 1970) 16쪽. 

 

2) D. Lloyd George, War Memoirs (London 1938) Volume 1, 147쪽. 

 

3) G. Feldman, Army, Industry and Labor in Germany 1914-18 (Princeton 1966) 49쪽에 인용된 W. Rathenau의 말을 보라. 

 

4) F. Engels, Anti-Düring (Peking 1976), 352쪽. 

 

5) P. Frölich, Rosa Luxemburg (London 1972), 168-9. 

 

6) M. Abrate, La Lotta Sindicale nella Industrializzazione (Milan 1967) 168쪽에서 B. Buozzi의 말 재인용. 

 

7) J. Hinton, The First Shop Stewards' Movement (London 1973) 34쪽. 

 

8) 보조서비스법(Auciliary Service Law) 전문을 보려면 Feldman, 535~541쪽을 보라. 

 

9) Lloyd George, volume 2, 2041쪽; G. A. Williams, Proletarian Order, 55쪽; J. B. Drabkin, Die Novemberrevolution 1918 in Deutschland(Berlin 1968) 71쪽. 

 

10) J. M. Winter, “The Impact of the First World War on Civilian Health in Britain,” Economic History Review (1977) 502~505쪽. 

 

11) Avanti!(Turin, 1918년 1월 3일자) 

 

12) E. C. Schöck, Arbeitslosigkeit und Rationalisierung(Regensburg 1977) 237쪽. 

 

13) D. Horowitz, The Italian Labour Movement(Cambridge, Massachusetts 1963) 75쪽. 

 

14) Luxemburg Speaks, 261쪽. 

 

15) 노동통계에서 발췌(HMSO London 1926) 144쪽; J. Kuczynski, Die Geschichte der Lage der Arbeiter unter dem Kapitalismus(Berlin 1966) volume 4, 249쪽; Annuario Statistico Italiano, volume 4(1925) 512쪽. 

 

16) 영국과 독일에서 전쟁 이전의 금속노동자들의 파업 유형에 대한 통계적 분석을 보려면 P. Stearns, Lives of Labour (London 1975) 374~383쪽을 보라. 전시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1918년 독일에서 선별된 각각의 산업들에서의 파업자들의 수는 다음과 같았다. 



이탈리아에서도 금속 부문은 비록 일시적으로는 섬유 부문에 추월당하기도 했었지만 역시나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17) R. Müller, Vom Kaiserreich zur Republik, vol. 1(vienna 1924) 56쪽. 

 

18) Müller, 40쪽. 

 

19) M. Cole, The Story of Kabian Socialism (London 1961) 163쪽 각주에서 재인용. 

 

20) Beveridge Collection of Munitions, in the British Library of Economic and Political Science, Section 5, Item 2. 

 

21) A. De Grand, “Women under Italian Fascism,” Historical Journal (1976) 948쪽. 

 

22) J. Kocka, Klassengesellschaft im Krieg 1914-18 (Göttingen 1973) 12쪽. 

 

23) 이러한 주장은 S Bologna, “Class Composition and the Theory of the Party at the Origin of the Workers' Council Movement”, in Telos(1972년 가을)에서 명확히 언급된다. 이는 K. H. Roth in L'altro movimento operaio (Milan 1976)에 기반하고 있으며 Hinton의 저작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보기를 들어 북부의 기술센터들에서 노동귀족들과 현대 수녀원(Conventry)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투쟁성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그의 논의(220쪽~221쪽)를 보라. 

국가 사이의 비교를 통해 산출된 아래와 같은 증거는 이러한 생각을 결정적으로 기각시킨다. 금속 노동은 전쟁 이전에 급속한 성장과 변환을 경험했다. 영국에서 그 변화율은 가장 완만했고 노동귀족은 가장 굳건했으며, 혁명적 사상과 노동자평의회는 기술 노동자 대중에게 가장 영향력이 약했다. 


(출처 : Stearns, 26쪽과  I Barbadoro, Storia del Sindicalismo Italiano, volume 1(Florence 1973), 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