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편집자의 말] 자본주의, 그 야만의 끝은 어디인가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4월호

[편집자의 말] 자본주의, 그 야만의 끝은 어디인가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6:10

자본주의. 그 체제 속에서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가. 


한ㆍ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협상이 며칠 전에 마무리되었다. 그 날 이후, 방송과 신문 권력은 마치 우리가 ‘소비의 천국’에서 살게 되었다는 듯 입방아를 찍어댄다. 어떤 사람은 진정한 ‘경제공동체’가 실현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한다. 분명 ‘소비의 천국,’ ‘돈의 천국’은 가능할 것이다. 미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값싸고 질 좋은 농산물, 축산물, 수산물, 공산품을 맘껏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당신도 외제차를 탈 수 있습니다. 당신의 품위를 업그레이드 해 보세요!’ 그렇게 ‘홀려’ 있을 때, 우리의 영세한 농민, 어민, 축산업자, 중소기업가 등이 넋을 잃다 시들시들 죽어간다. 그건 알 바 아니다. 어서 빨리, 협정에 ‘싸인’해라. 빨리 ‘나도 꿈꿔 보지 못한 그 물건들을 가지고 싶다.’ 그 협정이 체결된다면, ‘돈’만이 그 사람을 잴 수 있는 단 하나의, 확고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바로 그 점에서 한ㆍ미 자유무역협정은 진정한 ‘경제공동체’가 아닌, ‘자본의 공동체’를 뜻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여기서 FTA 반대 투쟁이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나아가야 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그건 한국과 미국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 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임을 ……


자본주의는 모순 덩어리다. 자본주의는 발전하면 할수록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을 더욱 또렷하게 나누어놓는다. 말할 것도 없이 절대적 다수가 가난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자본주의에 맞서는 움직임은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걸까. 아니 자본주의는 왜 무너지지 않는가. 


자본주의가 가져온 불평등에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은, 아니 야만과 다름없는 자본주의에서 삶을 지탱해주는 건, 바로 자본주의가 생산해내는 엄청난 ‘물질, 상품’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고 있는 물질공세와 ‘이미지’ 공세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 가장 ‘생생한’ 보기는 미국이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미국, 그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가장 심하게 착취당하지만, 착취에 맞서지 못하고 여전히 지상의 낙원인 ‘소비의 천국’에서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 그들에게, 그런 미국은 진정 ‘역사의 끝’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의 현실은 이렇다. “1인당 국민 소득이 4만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전체 가구의 20~30%가 빈곤선 아래에서 허덕이고 있다. 대도시에 있는 슬럼가(빈민굴) 때문에, 사람들은 낮에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없다. 마약과 살인과 매춘이 판을 친다. 약값과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도 받을 수 없다. 그냥 앉아서 ‘자연치료’되거나 ‘죽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이 그런 환경을 언제까지 참아낼 것인가.    


오래 전에 나왔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그 영화에서 그려진 풍경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소리치며 죽어갔다. 비좁은 공간, 환기가 되지 않는 작업장, 졸음을 쫓으려 ‘타이밍’을 먹으면서 일하는 ‘손’들. 물론 지금 그 풍경을 찾아보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환경은 좋아졌지만, 노동 강도는 더욱 높아진 게 지금의 작업장이 아닐까.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곧 그 벨트 라인에서 이탈된다. 거기서 이탈되지 않으려고 모두 발버둥 친다. 마치 그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과 같으리라. 컨베이어 벨트는 결코 멈추지 않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빨리 돌아간다. 어쩌다 한번이라도 동작을 놓치면, 영원히 벨트에서 추방된다. 오로지 모든 권력을 쥔 공장 주인만이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그것을 멈출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서지 못한다. 채플린이 만든 영화 [모던 타임즈]는 그 풍경을 ‘살 떨리게’ 보여 주었다. 오죽하면, 그는 먹을 것과 잠자리를 주는 감옥이 세상보다 훨씬 좋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너무 좋은데 더 있으면 안 될 까요?”


채플린이 살던 자본주의 사회, 전태일이 살던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지금 신자유주의가 몰아치는 사회. 그 셋은 모두 같다. 겉모습만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컨베이어 벨트는 채플린 시대의 그것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하고 견고하다. ‘무한경쟁’의 싸움터에서 살아남으려고 남들보다 더 성능이 좋은 ‘기계’가 되고 있다. 이처럼 진실은 한 줌에 지나지 않는 자본가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고, 많은 노동자에게는 몸뿐이어서 그걸 팔아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지금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냉철한’ 눈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가 어떤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지를. 


우리에게는 동화 작가로 알려진 에리히 케스트너(Erich Kestner). 그는 이런 시(벽 앞의 장님 Der Blinde an der Mauer)를 남겼다.


희망도 없이, 비애도 없이

그는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

지쳐 쪼그려 벽에

지쳐 앉아 생각한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옛날 그대로이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는다.


발자국이 왔다, 발자국이 간다.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왜 아무도 일어서지 않는가?

나는 장님, 그대들도 장님.


그대들 가슴은 영혼으로부터

얼굴로 인사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들의 발자국을 듣지 못해,

그대들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 가까이 걸어라! 장님임을

깨달을 때까지 다시 걸어라.

머리를 숙이고, 눈꺼풀을 숙이고,

그대에게 낯선 것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그리고 지금 가라! 그래, 서둘러야 한다!

행하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그대 이 구절은 깨달아야 한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연결>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전혀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은 몇몇뿐이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이상주의자다. 케스트너는 <이상주의자를 위한 조사>를 쓴다.


죽기 전까지는 살아가게 마련이다.

여기 묻힌 어떤 남자는

가장 숭고하고 특별한 삶을 살았다.


그는 괴로움을 기꺼이 견디며

가슴 아픈 연민을 참아내며

숨 막히는 위험과 충돌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인간답지 않은 비참한 무리들은

거침없이 적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한 인간들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 많던 ‘이상주의자들은’ 어딜 갔는가. 그들이 뿜어냈던 열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가 점점 더 야만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에……


자본주의, 잉여가치를 쥐어짜고 더 늘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된 체제다. 대다수가 이 착취 체제의 피지배자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요즘 어떤 사람은 이렇게 ‘과감하게’ 말한다. 


착취체제인 자본주의가 지금까지도 ‘당당하게’ 이어지고 있는 까닭은, 화폐 증식의 욕망, 곧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망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본가의 욕망을 노동자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벌이는 투쟁은 체제를 더 강화할 뿐 그 체제를 해체하지 못한다.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는 오직 하나의 계급, 부르주아 계급만이 있을 뿐이다. 노동자도 부르주아의 일부일 뿐이다. 부르주아는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는 한에서 노예계급이며, 모든 계층이 다 부르주아 계급이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하나의 노예계급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려면 노동자들의 경제투쟁만으로는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투쟁 자체가 무망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대안은 없는가. 아니 대안도 또렷이 내놓았다. 그 대안이란 “자본주의 체제가 산출한 부르주아 계급 질서 바깥으로 탈주하는 ‘비계급 되기’이다. 부르주아이기를 거부하고 화폐증식의 욕망 회로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출구다. 그 출구는 자본주의 바깥으로 통해 있지만, 그 바깥은 사실은 내부에 있다. 부르주아 체제 안에서 비부르주아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자본주의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그 구멍이 무한히 많아지면 자본주의는 구멍만 남게 될 것이고, 그때는 이미 자본주의가 아닐 것이다.” 그는 이렇게 앞날을 내다보았다.


그럴듯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포스트’는 이렇게 쓰이는가 보다. 오로지 ‘탈주’만을. 그런데 그 탈주란 무엇인가. ‘이탈, 도망’이 아닌가. ‘도망’에 성공한다 해도, 거기에도 ‘자본주의’는 여지없이 있다. 


여기서 왜 맑스가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우리에게 남겨준 ‘사실’ 하나가 또렷이 떠오르는 것일까. 맑스는 자본주의가 이론적으로는 무한한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대신 이윤 극대화에 쫓긴 자본가들이 생산을 제한하려고 한다는 데 가장 심각한 모순이 있다고 했다. 그 ‘모순’이 보완될 점이 있긴 하지만, 지금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 신자유주의가 몰아치는 지구별에서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 점을 애써 못 본 체 하려 한다. 눈을 가린다고 해서 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 자명한 사실을,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임금 노예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투쟁이 다시 싹트고 있는 것을. 


이번 호에는 이런 글이 있다.



[특집] ‘자본주의, 야만의 시대’에는 두 편의 글을 담았다.

「신자유주의의 본질과 모순」(제라드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Gérard Duménil and Dominique Lévy)과 「착취, 소비, 미국 자본주의의 특이성」(Stephen Resnick & Richard Wolff) 

첫 번째 글에서는, 영국에서는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미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당선되면서 신자유주의는 또렷해졌다. 지금 신자유주의가 본궤도에 오른 지 20년쯤 되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이러한 의문을 갖고 신자유주의, 즉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 있는 신자유주의를 다룬다. 자본주의 전체 역사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에 부과한 새로운 법칙들은 어떤 사회적 함의를 지니는가, 신자유주의는 어떤 사회적 비용과 위험을 낳았는가, 신자유주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저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풀려고 두 가지 형태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자본주의의 동학과 시대구분,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해석 문제를 다룬다. 이때 역사 유물론이라고 하는 맑스주의 역사 분석의 관점과 ?자본론?에서 나타나는 맑스의 경제 분석이 이용된다. 두 번째 신자유주의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 지 점검해본다. 결론에서는 앞으로 신자유주의가 어떤 모습을 가질 수 있는 지 간단히 설명한다.


두 번째 글에서는 미국 자본주의가 지닌 여러 모순이 어떠한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 지를 다룬다. 한편으로 미국 자본주의는 지난 150년 동안 미국 노동자들에게 놀랄만한 물질적 혜택을 선사했다. 그 덕분에 오늘날 미국 노동자들은 예외적 수준의 개인적 소비와 부와 형식적인 정치적 여러 자유들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측면들은 미국 자본주의의 성공을 대표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미국 생산직 노동자는 어떤 나라에서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착취당한다. 이러한 착취는 미국 노동자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 든 예외적 수준의 고갈, 스트레스, 약물 중독, 고독감, 공공 생활에 대한 대중적인 무관심, 결손 가정, 폭력의 만연 등이 나타나는 것에 한 몫을 하였다. 이러한 착취 때문에 ‘건실한’ 미국 자본주의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깊은 곤경에 처한 노동 계급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며 또 결국 그들의 움직임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들이 내놓은 분석이 딱 들어맞는 것인지, 이번 호 [정세분석] 코너에 실린 미국에서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는 부자와 권력을 가진 소수와 대중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낳았다. 그 간격은 갈수록 더욱 넓어지고 있다. 그게 현실인 것이다. 그런 현실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한 게 아닐까. 


[기획 1] 요동치는 지구별

「룰라와 브라질에서 신자유주의의 연속 : 전략적 선택, 경제적 열정, 또는 정치적 분열증인가.」(Lecio Morais & Alfredo Saad-Filho)

2002년 브라질에서 룰라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그것은 전 세계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왔다. 좌파 성향인데다, 친 노동계급 정책과 브라질을 도탄에 빠뜨린 신자유주의에 맞서 투쟁할 것으로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룰라는 왜 그 모든 기대와 ‘바람’과 달리 또 하나의 신자유주의 집행자가 되고 말았는가. 저자들은 이 글에서 브라질에서 룰라의 당선을 정치, 경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를 위해 룰라를 당선시킨 지지층을 분석하고, 룰라가 신자유주의에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브라질 경제가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FTA 협정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기획 2] 욕망과 혁명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빌헬름 라이히)


계급의식 개념은 사회주의 운동과 그 정치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의식’을 끌어낸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이 지닌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계급의식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계급의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일까. 계급의식은 계급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계급의식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해방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다. 

빌헬름 라이히는 역사에서 ‘주체적 요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내어 대중의 삶에서 주체적 요소가 나타나는 것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삼아 계급의식을 지도부의 계급의식과 대중의 계급의식으로 나누어 검토하고 있다. 보기를 들면, 프롤레타리아 초심자가 지닌 계급의식과 프롤레타리아 청년 지도자의 계급의식은 서로 같은가. 아울러 라이히는 계급의식을 이루는 구체적인 요소가 무엇이고, 계급의식을 막는 요소가 무엇인지 밝히려 했다.


[기획 3] 잊혀 진 글 다시 읽기

『레닌』(게오르그 루카치)


이 책은 1924년에 루카치가 썼다. 그 가운데 1장에서 4장까지 먼저 실었다. 루카치가 본 레닌은 이론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에서 프롤레타리아 해방 투쟁의 역사에서 맑스에 뒤를 이은 단 하나의 이론가였다. 루카치는 이러한 레닌을 구체적인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가 분석한 레닌이 그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꼼꼼하게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획 4] 소비에트 다시 보기

「위기에 휩싸인 서구 제국주의」(굴룩슈타인)


1920년대 혁명의 분위기가 유럽을 휩쓸었다.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위기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부딪힌 위기를 이해하려면, 1914년 8월, 즉 제1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쟁이 터지자, 서유럽 지배계급은 권력구조를 다시 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이기려면 전쟁의 무기인 군수품을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국을 선두로 하여 전쟁에 들어선 모든 나라들이 경제를 전시경제체제로 바꾸었다. 그러한 국가의 조치는 으레 장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자본의 집중화 과정을 짧은 시일 안에 완성시켜주었다. 그때부터 산업은 국가적 노력에 의해 대규모로 조직되었다. 그러한 재편성 과정에서 수백만 노동자의 집합적 협업으로 얻은 부의 생산과 한줌의 자본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 부의 사적 전유 사이에는 대립적 모순은 더욱 뚜렷했다. 이러한 대립적 모순은 스스로를 ‘개별 공장들에서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적 수준에서 생산의 무정부성 사이의 적대’로 재생산되었다

전시 경제는 한 나라를 거대한 개별 공장들인 것처럼 만들었고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은 전쟁을 통해 야만적으로 표현되었다. 사회적 생산과 전쟁이라는 두 개의 모순적인 힘들은 군수산업에서 마주쳤다. 위기가 특수한 힘으로 표현되었던 곳, 그래서 노동자 평의회 운동이 시작되었던 곳은 바로 여기였다. 

지배계급은 국가와 자본의 강제적인 상호침투, 즉 정치와 경제의 상호침투를 통해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노동운동은 그 동일한 장소에서 자본에 대한 대응세력으로서 싸워야 했고 자본의 무기에 대적해야 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그 자체가 정치와 경제의 상호침투의 결과로서, 경제투쟁이자 정치투쟁의 결합체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정세분석]

「요즈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급투쟁」(로렌 골드너(Loren Goldner))

「뉴욕에서 운송 노동자 파업이 노동자 계급의 힘을 보여주다!」(혁명정당추진동맹 : LRP)

「뉴욕 운송 노동자들이 부당한 협약을 받아들이다.」(혁명정당추진동맹 : LRP)

「몇 백만이 이주노동자의 권리 확보를 위해 행진하다 ― 모든 반이민법을 반대하라!」(혁명정당추진동맹 : LRP)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주노동자들의 적이다!」(혁명정당추진동맹 : LRP)


이 글들은 요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 투쟁을 다루고 있다. 노동자 투쟁이 지지부진했던 미국, 사회주의가 뿌리 내리지 못한 미국,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면서 전 세계 노동자들의 노동을 헐값으로 착취하고 있는 미국. 그런 미국에서 운송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의 파업이 왜 일어났고,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그리고 어떤 역사적 뜻을 지니는지를 짧지만 두 편의 글에서 분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또는 지구화 시대에 이주 노동자 문제는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의 아킬레스건이다. 신자유주의 또는 지구화는 국경의 개념을 약화시키면서 노동력 이동의 ‘완전한’ 자유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와 달리, 현실에선 노동력 이동이 아주 제한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반이민주의, 인종차별주의 세력의 강화, 이전보다 훨씬 더 엄격한 이민 규제 제도 따위가 세계화 시대에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자본의 세계화가 노동의 국제적인 분할과 경쟁을 구조화시키는 것이라고 했을 때, (자본의 자유로운 국제적 이동과 달리) 노동의 국제적 이동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세계화 시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이주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력의 20%를 넘어섰다. 그 가운데 미등록 이주노동자만 해도 전체 노동력의 10%를 넘었다. 그런 이주노동자들이 미국에서 부딪힌 현실은 인종차별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센센브레너 법안(하원 4437)이었다. 이 법안은 1천 2백만 명에 달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중죄인으로 낙인찍고 그들을 돕는 모든 이들을 범죄자로 취급하려 했다. 또한 멕시코 국경을 따라 700마일에 이르는 장벽도 세울 예정이었다. 행진은 의회가 그 악몽 같은 입법을 철회하도록 결정적으로 강제하였다. 미국이 내린 이러한 조치에 수백만 이주노동자들은 분개했고 끝내 자신들의 노동권을 쟁취하려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이 벌인 대규모 시위가 구체적으로 어떠했고, 그 성과는 무엇이며, 그것이 미국 사회 또는 미국 대중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분석하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차츰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역사 속의 반란자들]

- 스텐카 라진(Стенка Разин), “주인에게 버림받은 자들이여, 예속을 강요받은 자들이여, 봉기하라!”

- 이루지 못한 영웅 이밀(李密), 그가 바라던 것은……


다음호 미리보기


[특집]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이란 무엇인가」(에르네스트 만델)

-「존 홀로웨이의 맑시즘」(레이 빈포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행동주의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혁명이나 개혁을 넘어서는 다른 길을 상상하며」(신시어 코프먼)


[기획1] 요동치는 지구별

- 멕시코에서 국가, 위기, 그리고 자본축적(수잔느 소더버그)

[기획 2] 욕망과 혁명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빌헬름 라이히)

- 1968년 5월 파리와 상황주의자들

- 존경하는 맑스에게 : 어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보낸 편지(쉘라 로보탐)

[기획3] 잊혀 진 글 다시 읽기

-레닌(루카치)

[기획 4] 지금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정세분석]

전략전술론


[역사 속의 반란자들]

17~18세기 ‘선원’ : 해적인가 노동자인가?


[서평]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주의, 반-레닌주의적 맑스주의와 오늘날 혁명의 문제」(크리스 라이트)


2007년 4월 10일 정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