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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6월호

1돌아온사회혁명[1]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39

1. 돌아온 사회혁명

 

물론 상황주의는 산업 문명을 배회하는 유령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도 1848년 유럽을 배회한 유령이 아니었다.

- 프란시스 샤틀레,누벨 옵세르바뙤르, 196813

 

 

역사는 1968년 봄 프랑스에서 폭발한 투쟁과 같은 그런 정도의 격렬한 투쟁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실례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역사는 많은 논평가들(commentators)이 말했던 어떤 것도 예상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번 폭발은 최고로 예상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였다. 한 사회에 대한 지식과 역사의식은 결코 그렇게 신비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상품 사회의 스펙타클 단계가 지닌 외양(appearances)의 조직화를 비난하며 그에 맞서 싸운 상황주의자들은 몇 해 동안 이번 폭발과 그 결과들을 아주 분명하게 예견해 왔다. 국제상황주의자(S.I.)가 정교하게 다듬어서 선전한 비판적 이론은 모든 혁명 강령의 전제 조건으로서 다음을 즉각 긍정했다. (1) 프롤레타리아트는 폐기되지 않았다. (2)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소외를 진전시켰다. (3) 이러한 적대는 한 세기에 걸쳐 제기된 사회 문제와 함께 지구 표면 전체 위에 실재했다. 국제상황주의자는 소외의 심화와 집중을 혁명이 지연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한 [혁명의] 지연은 러시아의 반혁명 이래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세계적 패배에서 그리고 보충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의 확대에서 흘러 나왔다. 국제상황주의자는 노동자의 해방 운동이 그들의 자동적인 대표들(autonomized representations)인 관료제 조직들과 곳곳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관료제는 전체주의 국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러시아에서 그리고 뒤이어 다른 나라들에서 하나의 계급을 구성했다. 다른 곳에서는 근대 부르주아지에 봉사하는 특권 경영층, 조합주의자들, 또는 당 지도자들이 모든 노동 세력을 합리적인 경제 관리 속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관료제 기계들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영구적인 사기(falsification), 즉 모든 혁명적 행동과 이론에 가장 먼저 반대하는 사기는 근대 사회를 전반적으로 속이는 만능 열쇠였다고 상황주의자들은 단호하게 말했다. 상황주의자들은 또한 새로운 전복(subversion)의 형식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통일하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전복의 형식들의 최초 신호들은 눈에 띄게 되었고 새로운 전복의 형식들은 통합된 억압 조건으로부터 총체적인 비판의 관점을 혼란스럽게 도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황주의자들은 새로운 혁명의 출발의 다급함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관점은 역설적이게, 심지어는 미친 듯이 보였다. 이제 사태는 분명해졌다!

오늘날 돌아온 혁명 속에서, 역사 자체는 국가 철학자들에게는 그리고 의사-비판(pseudo-critique)의 무리들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요소이다. 분명코 분석은 현존 조건을 억압하는 현실 운동에 참여함으로써만 현실에 도달한다. 이런 설명에 근거해 만들어진 진공(vacuum)은 모든 사람의 삶의 방식을 모든 사람이 해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소외된 삶 속에서 그리고 소외된 삶에 대한 거부 속에서 친숙한 (the familiar)을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혁명적 비판을 대신해 점거 운동(occupation movement)이 새로운 계급투쟁의 시대의 도착을 알렸다는 것은 분명하게 예견되었다. 혁명적 비판은 자기 자신의 이론을 실천 운동으로 가져오고, 실천 운동은 혁명적 비판에서 추론되고 혁명적 비판이 추구하는 통일에 이르게 된다.

스탈린주의자들, 즉 관료제적인 전체주의적 착취 형태의 이데올로그들은 다른 곳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순전히 보수적인 역할로 전락했다. 오랫동안 스탈린주의자들은 권력을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자들의 필수적인 준거틀인 관료제적인 일괴암적 권력의 국제적 균열로 인해 [그들이] 권력에 이르는 길은 영원히 막혀버렸다. 동시에 그 준거틀과 그것이 수반하는 실천으로 인해 스탈린주의자들은 순전히 부르주아적인 개량주의적 장치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 모택동주의 변종은 완벽한 진공 속에서 자신들의 번역서를 앵무새처럼 앵앵거렸다. 세 네 개의 트로츠키주의 분파들은 적합한 당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하자마자, 1917년 혁명에 다시 착수할 영광을 위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부활한 볼셰비키들은 혁명의 과거와 그 최악의 오류들에 대해 너무나도 맹신적이어서 근대의 조건들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러한 역사적 이국취향을 다소 게바라주의적인 저발전의 혁명(Guevarist revolution of underdevelopment)이라는 지리적 이국취향과 혼합했다. 만일 그들 중 누군가가 종종 투사를 손에 넣는다면, 이것은 그들의 분석이나 행동이 진리여서가 아니라, 이른바 공산주의적 관료제가 해체되어서이다.

지엽적인 것을 비판한 근대주의적 의사-사상가들, 즉 이른바 인문학부에 자리를 잡고 모든 주간지에 골몰하던 이 투쟁의 찌꺼기들(leftovers)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구세계의 거의 모든 기만(camouflages)의 양상들과 함께 있을 때 폭넓게 압박해 들어오는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스스로가 부르주아 국가에, 피폐한 스탈린주의에, 부활한 카스트로-볼셰비즘에, 심리-사회학에, 심지어 자기 자신의 비참한 삶에 너무나 매달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든 것에 관여했다.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오늘날 여전히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5월의 혁명적 위기가 동원한 대다수 대중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도 살아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가장 분명한 의식을 전개할 수 있는 자들은 총체적인 혁명 이론이 자기 자신들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다른 한편, 모든 이데올로기 전문가들과 이른바 선동적이고 전복적인 행동주의 전문가들 전체는 어떤 것도 예상하지 못했고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그들이 동정(pity)말고 무엇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스스로를 혁명의 미래 엘리트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그 죽음과 같은 파멸의 시간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평소 음악을 차분히 다시 연주했다. 정말 오랫동안 자신들의 세례곡이라고 생각했던 선율은 자신들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일 뿐이었다.

비판적 이론과 비판적 행동이 다시 등장한 것은 사실상 하나의 객관적 통일성을 역사적으로 구성했다. 그 시대의 새로운 욕구들은 그 자신의 이론과 이론가를 창조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작된 대화는, 분리(separation)라는 조건들에 의해 제한되고 소외되었지만, 자신의 의식적인 주체적 조직화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바로 그 움직임에 따라 각각의 비판은 자신의 모든 임무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비판적 이론과 비판적 행동은 처음에는 계급 사회의 새로운 착취 양상들에 대항한 투쟁으로서 폭발해 나왔다. 한편으로 서구의 비공식 파업들(wildcat strikes)과 동구의 노동 계급 반란은 실제로 다양한 관료제에 대항한 투쟁을 개시했다.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혁명적 이론은 과잉발전한 자본주의에 본래적인 실존 조건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상품의 의사-풍요성(pseudo-abundance)과 삶을 하나의 스펙타클, 즉 억압적인 도시 생활과 이데올로기로 환원하는 것은 지배의 전문가들에게 항상 봉사하기 때문이다. 국제상황주의자가 이런 현실에 적합한 이론을 정식화했을 때, 국제상황주의자는 또한 일상생활의 해방 속에서 예술과 철학을 결합한 실현 속에서 이러한 현실을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 이론은 근본적으로 새롭기도 했고 일시적으로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낡은 진리 전체를 채택하기도 했다. 새로운 계획은 자신의 수단으로서 노동자 평의회라는 형식을 재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높은 수준에서는 계급 사회의 폐지라는 기획, 마침내 의식적 역사와 삶의 자유로운 구축에 접근한다는 기획을 재발견했다.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새로운 혁명의 전개는 근대 역사 전체의 중심에 있는데, 그것은 권력을 쥔 관료제적 사기(詐欺)에 반대하면서 철강 노동자의 정부를 요구한 1953년 동베를린의 노동자 봉기에서 시작할 수 있다. 1956년의 헝가리 혁명은 평의회 권력의 실현에 착수했다. 비록 헝가리가 충분히 산업화가 되지 않았고 빈곤, 외세, 그리고 테러의 만연에 대항한 일국적 봉기라는 특수한 조건이 있었지만 말이다.

1964년 가을 버클리 학생 소요의 시작은 교육의 본성 문제로 시작하여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의 삶의 조직화에 의문을 제기했고 그 후 거의 모든 유럽의 나라들로 퍼져나갔던 반란의 신호였다. 그럼에도 이 반란은 자신의 주요 주제들 가운데 몇 개는 진전시켰지만 학생의 무대”(근대적 자본의 욕구들에 관련된 급속한 변형의 대상 자체)에 국한되었다는 점에서 국부적인 것으로 남았다. 왜냐하면 최근 학생의 정치의식은 매우 파편화되었고 다양한 신-레닌주의적 환상들로 압박을 당했으며 종종 문화 혁명이라는 모택동주의적 소극(farce)에 어리석은 존경을 보냈기 때문이다. 흑인 문제, 베트남전 문제, 쿠바 문제는 미국 학생들의 투쟁에서 과도하고 헷갈리게 하는 지위를 차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 모든 것과 관련하여 사실이었다. 단지 관조적인 박수갈채로 끝나버린 이러한 반제국주의는 거의 항상 유럽 학생 운동을 지배했다. 1967년 여름 이래 서베를린 학생 운동은 폭력적으로 변했다. 시위는 두츠케를 죽이려 한 것에 반응하여 독일 전역으로 퍼졌다. 이탈리아인들은 196710월 이후 특히 튜린에서 더 나아갔는데, 그들은 공장을 점거했고 1968년 초에는 이탈리아 주요 대학들의 폐쇄를 강제했다.

스탈린주의가 정복한 유일한 선진 산업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 관료제 권력의 현재적 위기는 본질적으로 심각한 경제 기능의 실패를 자신이 주도해서 바로 잡으려는 지배 계급의 위험한 시도(attempt)가 문제였다. 관료제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1967년 말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소요가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노동자의 파업과 우레 같은 직접적인 공장 통제 요구는 자유화하는 척이라도 할 수밖에 없는 관료제 권력을 주요한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사회에 대한 관료제적 전유(appropriation)는 국가에 대한 관료제적 소유 및 그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지배와 분리할 수 없다. 검열의 부재, 자유로운 표현의 보장, 결사의 권리는 아주 가까운 장래에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다음을 양자택일하도록 할 것이다. , 이러한 양보들이 순전히 사기(sham)라는 것을 폭로하는 억압이냐, 아니면 국가와 경제의 관료제적 소유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공격이냐.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이 항상 지닌 경찰을 빼앗기자마자 어떤 것인가는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갈등의 결과는 러시아 관료제의 가장 큰 관심에 속할 것이고, 러시아 관료제의 생존은 체코 노동자의 승리로 인해 위험에 빠질 것이다.

19683, 마찬가지로 폴란드 학생들의 주목할 만한 운동이 1956년의 위기와 헝가리 노동자를 진압한 후 성공적인 관료제적 개혁의 결과인 고물카(Gomulka) 체제를 뒤흔들었다. 그 시기에 얻은 집행 유예(reprieve)는 종말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노동자는 학생들과 결합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고립된 채 진압됐다. 의사-노동자(pseudo-workers), 당 활동가들, 민병대 출신의 경찰들만이 위기의 순간에 개입했다.

프랑스에서는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갔고 그 문턱에서 운동은 자신의 가장 심오한 목표를 재발견했다. 근대 자본주의 나라의 노동자는 한꺼번에 근본적인(radical) 투쟁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다시 문제에 놓이게 되었다. 한 시대의 거짓말은 산산 조각났다. 어떤 것도 예전처럼 남아있을 수 없다. 유럽은 기뻐 날뛰면서 절규할 수 있을 뿐이다. “잘 파헤쳤구나, 늙은 두더지여!”

196612, 스트라스부르의 상황주의자 파문은 프랑스 학생 조합주의에 조종(弔鐘)을 울렸다. 전국프랑스학생연합 지역사무국은 느닷없이 무스타파 카야티(Mustapha Khayati)학생의 빈곤에 관하여……」를 출간했던 국제상황주의자의 다음과 같은 것들을 찬성한다고 밝혔다. 사용된 방법, 연이은 시도들, 가차 없는 분석의 일관성은 이러한 풍자문(lampoon)의 커다란 성공에 공헌했다. 우리는 여기서 혁명적 이론을 그것을 정당화하는 흐름에 전달한 최초의 성공적인 시도에 관해 말할 수 있다. 대략 10종의 번역본이 특히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독자들에게 퍼져나갔다. 만일 프랑스에서 그 글의 즉각적인 실천상의 충격이 덜 느껴졌다면, 이것은 프랑스가 다른 곳에서 이미 진행 중인 투쟁에 아직은 말려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의 주장들은 프랑스 학생들중 한 분파가 나중에 학생 환경 및 그 규칙과 구호에 대해 다른 어떤 나라에서 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표했던 경멸(contempt)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서구에서 늘 지지를 받은 스탈린주의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프랑스의 풍부한 혁명적 상황은 자기 자신들의 권리 속에서 위계제, 상품, 이데올로기, 생존, 스펙타클을 노골적으로 비판한 운동의 큰 부분을 차지한 노동자의 자발적인 지배권 탈취(takeover)로 나타났다. 5월 봉기의 가장 선진적인 분자들이 1967년의 마지막 주에 등장한 상황주의 이론서 두 권의 입장이나 구절들을 파리와 몇몇 지방 도시의 벽들에 썼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이 책들의 대부분이 이 도시 벽들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예상했듯이 상황주의 이론은 대중(masses)을 붙잡은 실질적인[실천적인]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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