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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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6월호

레닌의국가와혁명다시읽기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41

레닌의 국가와 혁명 다시 읽기

 

알프레드 B. 에반스

 

국가와 혁명은 오랫동안 레닌의 저작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서구 학자들의 전통적인 견해는 국가와 혁명을 전적으로 레닌 사상의 잔여물이라는 성격에서 나오는 공상적 환상이라고 여겼다. 그런 관점의 가장 뛰어난 전문가는 로버트 V. 다니엘스(Robert V. Daniels)이다. 그는 1953년 출판된 영향력 있는 논문에서 국가와 혁명에 표현된 생각들은 이상주의적인, 거의 공상적인 정신으로 채워1)졌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이 쓴 책에서 국가와 혁명공상적 아나키즘을 위한 주장이자 혁명적 공상주의2)라고 평가했다. 많은 다른 저자도 비슷하게 평가했다. 알프레드 메이어(Alfred Meyer), 레닌의 사상에 대한 자신의 뛰어난 평론에서 국가와 혁명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그 소론을 1917년 초에서 1918년 초 몇 달 동안 레닌의 진술에서 나온 코뮨 국가라는 꿈을 담은 것으로 여긴다.3) 아담 울람(Adam Ulam)국가와 혁명아나키즘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라고 언급한다.4) 그런 모든 권위자는 국가와 혁명에서 발견되는 주제들이 엘리트주의와 사실주의 그리고 국가와 혁명의 출간 전후 레닌이 쓴 다른 글에 스며들어 그를 볼셰비키 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지도자로 실질적으로 이끈 권위주의와 확실히 일치하지 않는다는데 동의한다.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이전 사상에도 그리고 그의 연속된 실천에도 맞지 않는 저작이다. 국가와 혁명1917년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그 저자의 지적 일탈에 대한 기념비이다.”5)라고 다니엘스는 강력히 주장한다. 루이스 피셔(Louis Fischer)국가와 혁명일탈적인 지적 진취성, 국가와 혁명을 쓰는 동안 숨어 있던 중에 그가 쓴 가면과 가명만큼이나 비-레닌주의자적인 단단한 바위 같은 한 인간의 기발한 실행6)이라고 부른다. 울람에 따르면, “레닌의 이 저작이 저자의 정치 철학과 일반적인 정신 틀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었다.”7) 그런 식에서 봤을 때, 국가와 혁명은 하나의 별종, -레닌주의적 레닌주의의 생생한 보기이다. 그러면 레닌은 자신의 사상 전반적인 분위기와 방향과는 아주 다르다고 말해지는 소론을 왜 썼느냐 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앞에서 언급한 저자들마다 아주 다르다. 그러나 국가와 혁명에 나타난 유토피아주의(utopianism)에 대한 가장 공통된 설명은 1917년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있고, 러시아에서 대규모 교전이 벌어지고 있고 급진주의가 고조되며,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급속히 늘어나자,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레닌의 낙관주의가 자극되었고 그로 하여금 좌파 볼셰비키들의 열망에 동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레닌은 그런 전망 속에서 1917년 혁명적 분위기에 사로잡혀 사실상 낙관주의에 중독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상 유파의 대다수 옹호자는 레닌이 집행 권력의 책임성을 떠맡자 정신을 차렸고 1918년 봄부터 계속해서 점차 자신의 권위[주의]가 회복되자 국가와 혁명의 꿈들을 버린 것으로 이해한다.

최근 몇 해 동안 더 자주 듣게 된 또 다른 사상 유파는 국가와 혁명이 레닌 사상의 일반 노선에서 근본적인 일탈이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레닌의 저작들에서 국가와 혁명의 위치에 대한 그런 수정주의 해석은 1971Slavic Review에 실린 로드니 바필드(Rodney Barfield)의 논문에서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었다. 바필드는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의 접근은 자발적이고 아나키즘적인 경향에 굴복한 것이다. 이 소론은 아나키즘적 사무 국가를 약속하고 공상적 통념들아나키스트적인 제안들8)로 채워져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바필드는 레닌의 국가에 대한 주요 논문을 미래를 들여다보는 이론적 저작”, 추상적 이론 수준에서 레닌의 일반적인 예측과 일치하지 않는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모델로서 이해한다. “국가와 혁명은 그의 근본적인 인간 철학, 그의 인간 본성에 대한 내적 확신, 더욱 인간적인 세계를 위한 그의 이상들을 나타낸다.”9) 바필드는 불굴의 현실주의[사실주의]와 공상적 이상주의 양자 모두는 레닌의 정치 경력을 통틀어 그가 지닌 가치와 기대의 고유한 요소였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롤프 쎈(Rolf Theen)국가와 혁명을 일탈이나 백일몽으로 해석하는 것은 혁명가로서 레닌의 실용주의 아래에는 강력한 공상적 시각이 늘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비록 이 소론은, 국가와 혁명의 아나키스트적 경향과 더불어, 규율과 조직화에 대한 무시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서 대중의 자발적 능력과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 이 책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중심 주제를 이룬 엘리트주의적이고 관리[지배]적인 혁명 접근법에 대한 완벽한 반 테제인 듯 보인다. 쎈은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주장한다. “불일치(disparity)는 피상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레닌의 국가에 대한 소론은 사회주의 아래에서 미래 사회에 대한 이론적 설명과 관련되는 것보다 즉각적인 현재의 실천 정치와 덜 관련되었고”, “궁극적인 합리성과 인간의 완전무결성10)에 대한 레닌의 신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닐 하딩(Neil Harding)은 아주 다른 태도를 보인다.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1917년 레닌의 글들은 먼 미래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투사(projection)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는 실천적 임무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이끌 일관된 지침11)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하딩은 말한다. 다른 저자처럼 하딩도 국가와 혁명을 억누를 수 없는 자발적인 대중 주도(mass initiative)의 우위성을 주창한 것이라고 기술한다. 그 소론은 국가를 해체하고 대중의 자주-관리를 시작하려는 기획”, “진정한 직접민주주의와 진정한 자유의 시각”, 그리고 급진적인 직접민주주의의 모델이었다. 급진적인 직접민주주의는 인민 대중의 다양한 자활 조직들에, 동지애와 자발적인 자기-조직화라는 그들이 지닌 생기를 제공하는 원리들에 권위와 권력을 가장 폭넓게 확산시키는 일을 반드시 수반했다.”12) 그럼에도 하딩은 국가와 혁명1917년 이전에 레닌이 쓴 글들과 모순되는 하나의 몽상이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하딩은 레닌을 실용주의적인 정치 지도자보다는 오히려 주로 어느 정도 이상주의적인 이론가로, 적어도 그의 삶에서 더 늦게까지 자코뱅주의라는 비난에서부터 결백한 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13)

국가와 혁명에 대한 논평자 사이의 불일치점은 국가와 혁명과 그 밖의 레닌의 사고와 글들 사이의 관계였다. 하지만 국가와 혁명의 내용은 엘리트들, 중앙집중화, 그리고 레닌의 여타 저작들 대부분의 두드러진 점인 위계제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자율적인 인민 대중에 의한 사실상 무구조적이고 준-아나키스트적인 지배 체계를 찬성한다는 의미에서 공상적이라는 일반적인 동의가 있었다. 만일 그것이 실제로 국가와 혁명에 나타난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시각의 알맹이라면, 국가와 혁명은 하나의 별종과 같은 어떤 것이고, 그런 시각과 레닌이 정치와 사회에 대해 쓴 다른 글을 일치시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레닌의 사상을 다룬 여러 학술 문헌에서 국가와 혁명을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 이 논문의 주장이다. 국가와 혁명은 단순히 권위에 대한 공상적이고 의사-아나키스트적인 적대감의 표현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늘 이해해 온 대중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도 아니다. 국가와 혁명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서 대중 주도의 장점에 대한 레닌의 낙관주의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주의, 위계제, 그리고 중앙집중화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레닌의 그림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1917년 레닌은 이론이나 실천에서 조심스러워 했고 모든 것을 오염되지 않은 대중의 지혜에 내맡기지도 않았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레닌이 위로부터 권위를 허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중앙집중화된 계획과 지도가 밑으로부터 열광적인 주도와 쉽게 양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레닌은 그 당시 그 쟁점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듯 보이려는 충분한 실천 상의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이 논문에서 국가와 혁명을 재검토하는 것은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될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국가와 혁명그 자체 속의 진술뿐만 아니라 맥락적 증거에 의해 보이듯이,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이루고자 한 목적을 기술한다. 두 번째 단계는 국가와 혁명의 주의 깊은 재해석과 1917년의 그의 여타 관련 저작들에 대한 준거를 통해 구별되듯이, 미래 사회주의 사회가 갖출 제도들의 구조와 작동에 대한 레닌의 세세한 언급에 대한 분석이다.

그러나 국가와 혁명의 목적과 내용을 다루기 전에, 국가와 혁명을 쓰고 출판한 배경을 간략하게 재검토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최근의 학문적 성과는 국가와 혁명에 대한 대부분 레닌의 예비적 작업이 2월 혁명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확증해 왔다.14) 레닌은 1915년과 1916년에 국가의 역할과 중요성과 관련한 문제들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15) 여타 문제들은 분명히 1916년 후반에 이르러서야 그의 마음을 더 많이 사로잡았다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레닌이 편집하던 연속간행물에 실으려고 제국주의 국가론을 향하여라는 한편의 소론을 19167월에 제출한 니콜라이 부하린에 의해 레닌은 국가에 대한 맑스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재검토하도록 자극받았다. 레닌은 이 소론을 거절했다. 레닌은 이 소론이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데서 형식이 잘 갖춰지지 않았고 오류투성이라며 부하린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부하린은 191610청년 인터내셔널(Jugend-Interantionale)제국주의 약탈 국가라는 제목으로 이 소론의 또 다른 판본을 출판했다. 레닌은 같은 달에 출판된 사회민주주의평론에 한 편의 글로 대응했다. 이 글에서 레닌은 부하린의 입장을 다시 한 번 거부하고 자신은 국가에 관한 자기 자신의 논문을 작성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레닌은 그 당시,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얘기했듯이, 취리히 도서관에서 작업을 시작해” “맑스와 엥겔스가 국가에 관해 써왔던 것 모두를 다시 읽고서 그들의 작업에 관해 기록했다.”16) 레닌은 19171월과 2월에 그런 이론적 노력에 열중하고 있었고,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의 태도에 관한 논문을 쓸려는 의도를 여전히 갖고 있었다.17) 레닌은 1917년 초 연구 과정에서 부하린과의 실질적인 화해를 뜻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19171월과 2월의 레닌의 노트는 국가에 관한 맑스주의라는 제목을 단 청색 표지의 공책에 작성되었다. 자신의 논평과 함께 맑스, 엥겔스, 그리고 그 뒤 사회주의자들이 쓴 책에서 따온 글로 이루어진 그 노트는 나중에 국가와 혁명에서 정교화한 주장의 핵심을 보여준다. 국가에 관한 레닌의 주요 소론의 원칙적 주제는 19172월의 러시아 혁명 이전에 쓴 이론적 글들에 대한 재검토에서 도출되었다.18)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고 나서, 레닌은 러시아로 돌아와 혁명적 활동에 참여했다. 그것은 레닌으로 하여금 이론적 노력을 제쳐놓을 수밖에 없게 하였다. 19177, 레닌이 체포를 피해 페트로그라드로 도피했을 때, 그는 레프 카마네프에게 만일 자신이 죽게되면 맑스주의와 국가에 관한 자신의 초고를 출판해 달라고 부탁했다.19) 살아남아 라즈리프(Razliv) 근처에 숨어있던 레닌은 스톡홀름에서 배달된 자신의 청색 노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책은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오는 동안 스톡홀름에 남겨 있었다. 자신의 노트를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려는 레닌의 노고는 8월과 9월에 핀란드에서 계속되었다. 1917년 가을, 레닌은 주정부에 의한 그 책의 압수를 피하고자 익명으로 국가와 혁명을 출판할 계획을 세웠다. 그 저작이 19181월까지 출판되지 않자, 그런 구실은 불필요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국가와 혁명2판은 레닌에 의해 오직 절(section) 하나만을 추가하여 그리고 그가 추가하고자 계획한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 관한 장(chapter)은 빠진 채 1919년 출판되었다. 국가와 혁명의 준비와 인쇄를 둘러싼 환경은 이 소론의 주요 생각들이 19172월 이전에 형성되었지만 레닌은 혁명적인 정치 활동의 열기 속에서 맑스주의자들의 국가와의 관련성에 관한 자기의 이론적 주장을 완성하고 퍼트리는 것에 예민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의 선차적인 목적은, 비록 그가 쓴 소론의 많은 구절에서 그 주제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를 기술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닌의 선차적인 목적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레닌은 맑스가 죽은 이래로 노동 운동 내의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자들이 맑스의 가르침을 왜곡했다는 불만으로 이 소론을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보기 드물게 널리 퍼진 맑스주의의 왜곡을 생각하면,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국가라는 주제에 대해 맑스가 진정으로 가르쳤던 것을 재건하는 것이다.”20) 레닌은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적합한 관계와 관련하여 맑스주의의 교의적인 정통성을 정의하고자 했다. 맑스와 엥겔스의 긴 인용구가 뒷받침하는 국가와 혁명의 원칙적인 주제는 노동계급은 자기 자신이 사용하려고 현존 부르주아 국가를 접수할 수 없지만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razbit') 부르주아 국가를 새로운 국가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의 생각은 노동계급은 기성 국가 기계해체하고 분쇄해야지, 단지 그것을 붙잡는데 자신을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21) 레닌은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라는 긴급한 과제가 맑스주의를 위한 중심적인 의의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것, 즉 엄밀히 말해 이러한 폭력혁명적 견해로 대중을 체계적으로 감화시킬 필요성은 맑스와 엥겔스 이론 전체(entire)의 뿌리에 놓여 있다.”22) 그러나 레닌은 왜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라는 원칙을 맑스주의 정통의 핵심 실험(key test)의 지위로 까지 끌어올렸을까?

국가와 혁명은 맑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데서 국제적 지도력의 권위를 요구한 레닌의 시도를 나타냈다. 국가와 혁명, 레닌이 쓴 많은 다른 것들처럼, 논쟁적 성격을 지녔다. 국가와 혁명의 주요 공격 목표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인 칼 카우츠키였다. 1895년 엥겔스가 죽은 이래로 카우츠키는 전세계 맑스주의 이론을 이끈 대표적 인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었다. 레닌은 1917년 카우츠키는 가장 탁월한 권위자이고 2차 인터내셔널의 가장 잘 알려진 지도자23)였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나서 카우츠키가 독일의 군사 행동에 타협의 태도를 보인 것은 레닌을 분노하게 했고 그로 하여금 즉시 전세계 맑스주의자들의 눈에 카우츠키를 믿지 못할 자로 보이게 하였다. 1차 세계 대전 동안, 레닌은 새롭고 진정으로 발본적인 맑스주의 정당들의 국제 조직의 형성 계획을 채택했다.24) 레닌은 우리의 당은 기다려서는 안 된다. 우리의 당은 제3차 인터내셔널을 즉각 건설해야 한다25)라고 애타게 촉구했다. 레닌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지도자에 속하기를 기대했다. 그는 낡은 인터내셔널의 가장 존경받는 이론가인 카우츠키가 맑스주의 해석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했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의 논박(polemic)의 주요 공격 목표가 카우츠키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국가에 대한 소론을 쓰고 있다고 언급한 1917년 초 레닌이 쓴 편지들은 그가 카우츠키를 선택해 비판하고 있다고 적었다. 레닌은 19172월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맑스주의자가 국가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를 다루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자료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는 부하린에게 반대하기보다는 카우츠키에게 확실하게 반대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하린은 카우츠키보다 훨씬 더 뛰어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부하린은 카우츠키주의와 투쟁에서 이러한 대의명분을 폐기한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릅니다.26)

 

같은 달 하순에, 이네사 아르망(Inessa Armand)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적 견해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보고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부하린(하지만 카우츠키보다 진리에 접근했지만 여전히 올바르지 않는)에게 반대하기보다는 카우츠키에게 훨씬 더 반대하는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결론들에 도달한 듯 보입니다. 나는 그것에 관해 정말 쓰고 싶습니다. 부하린의 논문과 그의 작은 실수 및 카우츠키의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맑스주의의 통속화에 대한 나의 분석을 담은 사회민주주의자 모음집4호를 출판하고 싶습니다.27)

 

레닌은 며칠 뒤 아르망에게 다시 편지를 쓰면서 국가와 혁명에서 재검토할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과 카우츠키 사이의 논쟁을 언급했다. 나는 신시대’(1912)에 실린 판네쿡의 카우츠키와의 대담을 읽었습니다. 카우츠키는 교활한 악인이고 판네쿡은 거의 옳습니다. 판네쿡은 부정확하거나 아주 작은 실수를 저질렀을 뿐입니다. 카우츠키는 기회주의의 전형을 보여 주었습니다.”28) 레닌의 서한은 국가에 대한 맑스의 글들에 대한 자신의 분석이 카우츠키에 대한 공격에 밀접하게 결합하여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덧붙여 카우츠키는 19171월과 2월의 레닌이 쓴 노트의 주요 부분들(국가에 관한 맑스주의”)에 나온 맑스와 엥겔스 이외의 유일한 저자였다.29)

국가와 혁명이라는 텍스트는 레닌이 그 소론에서 전세계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카우츠키의 태도를 분쇄하려고 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저작의 서문에서, “부르주아지의 영향에서 노동 인민을 해방하려는 투쟁은. 국가에 대한 기회주의자들의 선입견에 맞서는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하고서, 레닌은 우리는 특히 이러한 왜곡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자인 칼 카우츠키를 다룬다.”30)고 덧붙인다. 서문에 이은 이 소론의 첫 번째 절에서, 맑스주의를 손질하는 것”(doctoring)을 불평하고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맑스가 국가라는 주제에 대해 진정으로 가르치고자 했던 것을 재확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 레닌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길게 발췌한 부분을 집어넣은 것은 과학적 사회주의 창설자들의 견해를 보여주려고 그리고 현재 널리 퍼져있는 카우츠키주의에 의한 맑스와 엥겔스의 왜곡을 문서로 증명하고 명확하게 논증하는 데31)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가와 혁명이라는 텍스트는 6부로 구성되어 있다. 6부 가운데 처음 5부는 레닌의 논평과 함께 맑스와 엥겔스에서 따온 글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반면 6부는 기회주의자들이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 견해를 표현하면서 저지른 오류를 다룬다. 러시아 혁명의 가장 격동적인 몇 달 동안 비록 레닌은 러시아와 핀란드에 있으면서 국가에 대한 자신의 주요 저작을 끝냈지만 그가 소론을 쓰는 동안 러시아의 정치적 인물들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그는 여타 러시아 정당들과 당파들의 대다수 대변자를 단지 간단히 그리고 지나치면서 겸손하게 공격한다. 그는 독립적이지만 오히려 짧은 국가와 혁명가운데 6부의 일부분을 플레하노프의 팜플릿 가운데 하나를 비판하는데 할애한다. 그 당시 플레하노프는 어떠한 조직화된 러시아 사회주의자 집단의 지도자로서보다는 세계 맑스주의의 이론가로서 훨씬 더 중요했다. 레닌은 국제 맑스주의 내의 중심 세력의 지적 지도자들의 특권을 손상하려고 국가와 혁명의 마지막 부에서 플레하노프를 공격하고 카우츠키에 반대하는 훨씬 긴 논쟁에 참여했다.

맑스주의 중앙의 이론가들은 1900년대 초에 수정주의자들과의 논쟁 동안 정통 맑스주의의 방어자로서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레닌은 취리히에서 맑스와 엥겔스 저작들의 국가에 대한 구절들을 다시 검토함으로써 부르주아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자기 자신의 사고를 명확히 했고 또한 중앙파(가장 독보적인 자가 카우츠키였다)의 입장에서 전략적 취약점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글들 속에서 맑스의 가르침(precepts)을 주요하게 벗어난 것을 지금 문서로 증명할 수 있다고 느꼈다. 공격 지점은 잘 선택됐다. 왜냐하면 현실 속에서 카우츠키는 레닌보다 맑스 교의의 자구(字句)에 일반적으로 훨씬 많이 일치했지만, 중앙파는 정통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트라우마적이고 파괴적인 시련에 대한 그들의 열의가 부족했다는 것에 근거한 비판에 대체로 공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미래 혁명의 특정 형태에 대한 고려를 조심스럽게 연기하였지만, 카우츠키는 의회 내 다수의 사회주의 대표들에 의한 국가 내에서 평화로운 권력의 인수를 예견하는 것에 조금씩 아주 가까워졌다. 레닌은 합헌적인 수단들에 의한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통제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했고 맑스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항한 폭력 혁명을 사회주의를 제도화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으로 고집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1916년 말에서 1917년 초 사이에 국가와 혁명에 대한 자신의 작업 시작 단계에서, 레닌은 자신이 국가에 관한 맑스의 가르침의 혁명적 본질을 재확립한 것은 맑스주의 중앙의 비혁명적 성격을 논증하고 카우츠키를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맑스의 제자의 지위에서 쫓아내며 국제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권위자로서 자기 자신의 명성을 크게 강화하기 위한 기초로서 봉사하리라고 분명하게 희망했다.

국가와 혁명의 국제적인 정향이 뜻하고 카우츠키의 일탈에 관한 그 소론의 초점이 논증하듯이, 레닌은 19174월 러시아로 돌아오던 중에도 카우츠키를 불신하고 전세계 맑스주의에서 좌파적 경향의 지도적인 대표자로서 인정받으려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국가와 혁명은 러시아에만이 아니라 어떤 나라(또는 적어도 유럽이나 북미의 어떠한 주요 권력)에도 적용할 수 있는 교훈과 함께 일반적인 용어들로 쓰였다. 국가에 대한 하나의 이론적 소론의 완성은 러시아의 사건들과 조건들에 관련된 부가적인 가치를 얻었다. 19178월과 9월에 숨어 있는 동안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들과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자신의 당에 지침을 제공하면서도, 레닌은 장문의 이론 논문을 쓰는데 엄청난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2월 혁명 직후부터 레닌의 연설과 글의 일관된 주제는 지방 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철회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인수하도록 부추길 필요성이었다.32) 맑스가 궁극적인 사회주의 실현의 수단으로서 의회주의를 거부했고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를 고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지방 정부의 강제적인 제거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를 제공하고, 많은 레닌의 동료 볼셰비키들의 의심과 망설임을 끝장내도록 도와 줄 것이며, 아마도 혁명을 성공하게 시킬 수 있는 그들의 능력에 대한 보다 큰 확신을 대중에게 심어 넣을 것이다.

만일 수정주의자들이 조심스럽다는 비난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레닌은 비현실적이라고 비난(charge)받기 쉬웠을 것이다. 현존 국가의 전체 조직을 사실상 단번에 훈련받지 못하고 시험 되지 않은 노동자들에 의한 새로운 정부로 대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를 설득력 있게 주장하려고, 레닌은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고 자신의 청중을 설득해야 했다.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보이자 그리고 잘 알려진 정치적 인물들이 그 당시 러시아가 직면한 표면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을 다룰 볼셰비키와 그들의 추종자들 또는 어떤 다른 정치 세력의 능력을 회의하자, 설득이라는 자신의 임무의 시급함은 19172월 이후 증가했다. 다니엘 타쉬스(Daniel Tarschys)성공적인 정치 강령은 한 당이 자신의 희망과 힘을 적당히 과장적이게, 즉 기대를 높일 만큼 충분히 제안적이고 불확실성의 등장이 기대를 저버리게 하지 못하도록 할 만큼 충분히 냉정하게 선전하는 당파의 메시지를 제외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결코 조심스럽게 진단하지 않는다.”33)고 기민하게 말했다. 만일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거나 좌파 맑스주의자들이 어떤 다른 유럽 국가에서 우위를 얻는다면, 그들은 의회 경험이나 행정 기술이 아닌 자신들의 노동계급 지지자들의 에너지와 열의의 힘에 의존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와 혁명은 노동 계급이 지닌 미덕의 우월성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국가 형태는 그 수행의 특질에서 있어서 부르주아지의 지배 규칙(rule)과 같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능가할 것이다. 여기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능력(proletarian competence) 테제를 역설한다. 즉 타쉬스가 지적하듯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통치할 수 있음을 논증하려고 했었다.”34) 그 테제는 레닌의 주장에 아주 중요했지만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할 필요성이라는 그의 주된 주제에는 보완적이었다.

일반적인 수사학 속에서, 레닌은 새로운 사회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직접적인 지배를 찬성하는 듯 보인다. 그 점에 관한 레닌의 가장 강력한 언어는 혁명에 의해 파괴된 부르주아 국가를 대체할 배치[장치](arrangements)에 관한 국가와 혁명의 첫 논의에서 나온다. 레닌에 따르면, “특권을 가진 소수(특권 관리, 상비군의 위 대가리들)의 특별한 제도들을 대신하여, 다수 자체는 이러한 기능 모두를 직접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를 억압하고 그들의 저항을 분쇄할 기능을 수행할 자들은 다수 주민일 것이므로, 국가에 의한 압제의 실행을 위한 요구는 즉시 감소할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사멸하기 시작한다.”35)고 레닌은 또한 주장한다. 레닌은 다수는 심지어 아주 단순한 기계를 가지고, 거의 기계 없이도, 특별한 장치 없이도, 단순한 무장 인민의 조직에 의해36) 착취 계급들의 찌꺼기들을 억압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예견한다. 레닌은 국가의 사멸은 국가 없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그 결과를 발견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수많은 공포와 만행과 모순과 비리로부터 자본주의적 노예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된 인민이 수백 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수천 번 동안 반복되어 이제는 고루한 격언처럼 되어버린 사회적 교류의 기본적인 규칙들을 준수하는 데 점차 익숙해져 갈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때에 이르면 인민들은 무력 없이도 그리고 강압이나 복종이나 국가라고 불리는 강압을 위한 특수 기구 없이도, 그러한 규칙들을 준수하는 데에 익숙해져 갈 것이다.37)

레닌 소론의 언어 속의 많은 것은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의 열망에 동조한다는 피상적인 인상을 준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관한 레닌 논의의 실체는 아나키즘의 요소들에 진정으로 의존한다.

국가와 혁명에서,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는 정치적 권위를 파괴하려고 대중에 의한 폭력의 폭발을 찬성하다는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기에 적합하고 부르주아 국가의 분쇄에 적합하다. 그런 종류의 아나키즘은 다음 단계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지배 아래에서 권위의 재구성을 기대했다. 1917년 말에 레닌은 권위의 파괴 단계와 권위의 재건설 단계를 구별하였다.

국가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해 부르주아지가 실행하는 폭력의 도구인 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하나의 구호만을 가질 수 있다. 즉 국가의 파괴. 그러나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국가일 때, 국가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해 프롤레타리아가 실행하는 폭력의 도구일 때, 우리는 강력한 국가 권력과 중앙집중주의를 완전히 그리고 전면적으로 찬성할 것이다.38)

레닌은 자본주의에서 성숙한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그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첫 번째 국면이라고 언급한 이행기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고 그 시기에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부르주아의 저항을 억압하고 새로운 경제 조직 체계의 구축, 경제 운용의 감독을 위한 목적으로 권위를 실행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원했다는 것에 대해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다.39) 결정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레닌은 사회주의 사회의 정치 체계 속에서 권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구상했을까?

레닌은국가와 혁명의 어디에서도 또는 자신의 여타 글들의 어디에서도 개별 생산 기업의 통제에서 국가에 대해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노동조합이나 공장 위원회를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실행하는 개별 생산 기업 내의 노동자들로 이동한다는 의미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직접적인 권위의 행사를 주창하지 않았다. 레닌의 희망은 자주관리 신디케이트 체계나 코뮨 체계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이상은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코뮨의 정치적 배치에 대한 맑스의 기술에서 나왔다는 의미에서만 코뮨-국가의 그림을 보여준다. 레닌은 권력을 자율적인 코뮨들이나 지역 조직들에 분산시킨다는 통념에 호소하지 않았다. 레닌은 코뮨의 경험에 관한 맑스의. 관찰에서 연방주의의 흔적은 없다.”라고 주장했고 맑스는 중앙집중주의자였다40)고 단언했다. 레닌은 사적 소유를 국가 소유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코뮨들을 하나의 이행 형태로서만 애초에 찬성했다.

지금 만약에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들이 국가권력을 손에 거머쥐고 아주 자유스럽게 코뮨을 조직하며, 자본을 파괴하고, 자본가들의 저항을 분쇄하며, 사적 소유인 철도와 공장과 토지 등을 국가 전체에 이전시키는 데 모든 코뮨의 활동들을 통일시킨다면, 그것이 곧 중앙집중화가 아닌가? 그것이 곧 가장 지속적이고 민주적인 중앙집중화,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적인 중앙집중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41)

프롤레타리아 코뮨들의 자발적 연합42)이라는 레닌의 언급은 노동자들의 지역 자치정부 미래에 대한 레닌의 희망을 요약했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부르주아 공화국에 대한 그리고 사회주의 직후의 일시적인 조치에 대한 논의에서만 연방주의 또는 지역 자치라는 주제를 다뤘다는 것이 레닌의 입장이다. “중앙집중주의는 낡은 국가 기계와 새로운 국가 기계 양자 모두와 더불어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레닌의 진술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세력의 중앙집중화된 조직화43)를 필요로 한다는 레닌의 관찰이 지적했듯이, 권위의 탈집중화는 중앙집중주의는 충분히 발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레닌의 시각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만일 레닌이 노동자와 농민의 지배를 통해 아나코-생디칼리슴 또는 아나키적인 공동체주의에 가까운 하나의 체계를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었을까? 국가와 혁명은 인민의 지배는 두 가지 방식으로 실현되리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첫째,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대표를 선출해서 평의회, 또는 정부 행정이 책임져야 할 소비에트에 보낼 것이다. 1916년 말에서 1917년 초, 국가에 관한 맑스의 글들에 대한 레닌의 연구는 그로 하여금 1905년에 러시아에 등장했던 소비에트의 가치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하였고, 그러한 조직체를 맑스가 파리코뮨의 경험을 검토하여 제안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형태와 동일시하도록 이끌었다.44) 따라서 레닌은 러시아의 19172월 혁명에 대한 소식을 듣자 권력은 소비에트에 넘겨야 한다는 요구로 대응하도록 이론적으로 잘 준비하고 있었다. 레닌은 자신이 러시아로 돌아오기 전에도 그리고 돌아온 후에도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현저하게 우월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구현체일 수 있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45) 국가와 혁명은 권력을 소비에트에 집중시키자는 레닌의 1917년 여타 저작들의 요청과 완전히 일치한다. 레닌이 무장한 인민의 조직화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은 레닌의 도식에서 그러한 조직체의 결정적인 위치를 가리 킨다.46) 그는 모든 경제적 조직뿐만 아니라 정부 실행 부서가 소비에트에 종속되리라는 것을 예견한다.47) 레닌은 우리는 대의 제도 없이는 민주주의,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조차도 상상할 수 없다.”라고 인정한다. 비록 그가 우리는 의회주의 없이도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해야 한다.”라고 덧붙였지만 말이다.48) 레닌의 혐오를 불러일으킨 의회주의는 부르주아 의회의 의회주의였다. 레닌은 부르주아 의회는 무능력과 부패로 얼룩지고 노동 계급의 이해관계를 허위로 대변한다고 평가했다. 레닌에 따르면, 의회주의의 그러한 이()문화를 파괴하는 수단은 자본가 계급의 실존 기반을 제거할 소유권의 몰수에 더하여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분업을 폐지하는 것이리라. 맑스의 프랑스 내전에서 직접 도출한 그러한 제안은 소비에트의 모든 구성원들은 입법적 의무뿐만 아니라 행정적 의무도 져야 함을 요구했을 것이다. 레닌은 그 결과는 대의 제도를 잡담 장소에서 일하는조직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49) 비록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의회주의 양식을 거부하고 선출된 대표들의 책임성이 의미 있게 확대되리라고 예상했지만, 그의 사회주의 국가 모델은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의회민주주의 모델이었다.

레닌은 선출된 대표들에 의한 행정 기관의 통제에 더하여 다수 인민에 의한 지배를 실현할 두 번째 수단을 주장했다. 즉 정치에 대한 고도의 직접적인 인민의 참여.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대표를 선출해 소비에트에 보낼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모든 그런 관리들은 자신들 선거인들의 소환 요구에 따를 것이라는 조건으로 노동자들이 주요한 행정 관리들을 선택할 것이라는 점을 또한 말하는 것이다. 덧붙여, 노동하는 모든 다수 구성원은 빈번히 교대로 행정 사무를 수행할 것이다. 레닌은 사회주의에서는 주민 대중이 투표와 선거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의 일상 행정에서도 독립적인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50)임을 약속한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레닌이 낡은 질서 속의 관료들이라고 부른 자들을 단번에 대체할 것이다. 그의 견해로는, 자본주의는 더욱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들에서 보편적인 읽고 쓰는 능력의 달성을 통해 그리고 노동자들을 크고 복잡한 관료제적 조직의 기능에 익숙해지게 함으로써 대중의 관료제적 사무에 대한 폭넓은 참여를 위한 전제 조건을 창조해 왔다.51) 레닌은 선진 자본주의 체계에서 관료들의 임무는 점진적으로 단순해졌고 그리고 등록, 서류 정리, 그리고 모든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이 기능들을 쉽게 수행할 수 있도록 점검하는 일과 같은 아주 단순한 기능들로 축소될 수 있다.”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관료들의 능력은 감독과 기록, 사칙연산 지식, 그리고 적합한 영수증의 발행52)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레닌은 파리코뮨이 취한 조치들에 대한 맑스의 요약에서 도출한 또 다른 제안을 제시하면서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최고위 국가 관리의 임금은 보통 노동자의 임금을 초과하지 않을 것임을 상세하게 쓰고 있다.53) 행정직의 안팎에서 노동하는 계급들의 모든 구성원들의 정기적인 순환 교대는 모두에게 감독 역할에서 시행된 원칙들을 숙지시킴으로써 그리고 결과적으로 시민들로 하여금 압제 정치에 종속되지 않은 채 사회를 관리[경영]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국가를 사멸시키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사회주의 아래에서 만인은 교대로 통치하게 될 것이고 누구도 통치하지 않는 것에 곧 익숙해질 것이다.”54) 참여적 관료제는 사회적 자기-관리를 위한 훈련을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레닌의 견해에서 관료제는 비록 그것이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보다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도록 변형되겠지만 사회주의에서도 여전히 실존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는 모든 곳에서 그리고 완벽하게 단번에 관료제를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낡은 관료제를 새로운 관료제로 대체할 것을 채택한다. 위계제적 조직의 양식은 사회주의 내에서 지속할 것이다. “우리는 공상가들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행정[관리], 모든 종속이 단번에 없어지리라는 몽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55) 낡은 관료제 장치를 파괴하고자 한 근본적 이유는 관료제 조직 그 자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특권 관리들을 대중과 분리시키는 것이 불만이었고, 낡은 관료들을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와 결합시키며, 기성 행정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지를 실행하기에는 결과적으로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기에 대체될 것은 관료제적 조직 모델이 아니라 부르주아 관료들의 직원이었다.

레닌은 자본주의 국가의 피고용인들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누고 각각의 집단에 다른 운명이 있음을 예견한다. 첫 번째 범주에는 레닌이 관료들”, 즉 감독, 계산, 보고의 업무를 수행하고 프롤레타리아로 대체될 감독자들와 회계원들56)이라고 여긴 자들이 있다. “자본가들과 관료들을 타도한 후 곧바로 하룻밤 사이에 무장한 노동자들이, 무장한 주민 전체가 생산과 분배의 통제에서 그리고 노동과 생산물의 회계 작업에서 그들을 대체할 수 있다.”57) 부르주아 국가의 피고용인들의 두 번째 범주는 모든 종류, 형태, 지위의 기술자들58)로 구성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들을 존속시킬 것이다.

통제와 회계의 문제가 과학적으로 훈련된 기술자나 농경학자 등과 같은 참모의 문제와 혼동되어선 안 된다. 이들은 오늘은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라서 일하고 있지만, 내일은 무장한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훨씬 더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다.59)

레닌은 노동자들이 많은 전문화된 일을 수행하려고 반드시 필요한 기술적 전문가들을 미리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그는 더욱이 기술적 지식은 하나 또는 또 다른 일련의 계급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데 사용될지도 모른 유연한 도구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심지어 19179월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의한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고용을 허용하도록 준비했다. 레닌은 191710월 초에 작성한 볼셰비키는 국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서 심지어 혁명 후 잠깐 기술 전문가들은 평균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십중팔구 우리는 완전한 임금 평등을 점진적으로만 도입할 것이고 이행기에는 이러한 전문가들에게 더욱 높은 봉급을 줄 것이다.”60) 그런 식으로 레닌은 전문 기술의 가치와 인민 통제를 화해시키고자 했다.

레닌은 관료들과 기술자들을 차별화하자마자, 마찬가지로 국가의 구조와 생산의 조직화를 구별했다. 레닌에 따르면, 국가는 계급투쟁에서 생겨나고 한 계급을 대신해 또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레닌은 국가를 근본적으로 압제의 실행과 관련하여 정의하고 국가를 주로 압제 기관들과 동일시한다. 국가 권력은 교도소 등등을 자기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무장한 자들의 특수한 조직체들로 구성된다.”61) 또는 19174우리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서 레닌이 말했듯이, “본래 국가는 무장한 자들을 인민과 분리시킴으로써 대중들에게 명령하는 것이다.”62) 본래 국가는 또는 압제 장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파괴될 것이고 무장한 노동자들의 독재에 의해 대치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창조한 경제 조직들은 노동자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채로 접수될 것이다. “우리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이미 창조한 것을 기반으로 하여 대규모 생산을 조직할 것이다.”63) 레닌은 볼셰비키는 국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서 그 주제를 확장시켰다.

 

주요한 억압적장치, 즉 상비군, 경찰, 관료제에 더하여, 근대 국가는 은행 및 신디케이트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하나의 장치를 소유한다. …… 이 장치를 분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자본가의 통제로부터 떼어내야 한다. ……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소비에트에 종속시켜야 한다. 그것을 보다 포괄적이고 전국적인 것으로 확장해야 하고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대규모 자본주의가 이미 이룩한 것을 활용함으로써 이것을 수행할 수 있다.64)

 

레닌은 19179월과 10월의 그와 같은 소론에서 은행과 신디케이트를 소비에트의 통제에 종속시키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기업들의 피고용인들은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였다. “우리는 단 하나의 포고에 의해 한방에 이 국가 장치손에 넣움직이게 할수 있다. 왜냐하면 피고용인들, 즉 프롤레타리아적인 또는 준 프롤레타리아적인 실존에 이르는 그들 대다수가 부기, 통제, 등록, 회계, 집계라는 실질적인 일을 수행하기 때문이다.”65) 국가 자본주의의 성장, 거대한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에 의한 생산의 공고화, 그리고 경제 조직들의 점차적인 관료제화는 사회주의를 위한 길을 준비하는 데서 긍정적인 첫 걸음이었다. 노동자들의 국가는 생산과 분배의 통제를 더욱 집중시킬 것이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우편 서비스는 사회주의적 경제 체계를 위한 실례를 제공한다고 말한 것에 동의한다. “우편 서비스에 따라서 전체 경제를 조직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즉각적인 목표이다.” 레닌은 모든 시민들을 하나의 거대한 신디케이트, 즉 전 국가적 규모에 근거한 단일한 통합 경제 기계의 노동자들과 여타 피고용인들로 전환할 것을 지시했다.66)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는 자본주의 독점기업들을 소규모의 자율적 단위들로 쪼개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출된 소비에트의 통제 아래에서 전체 기업들을 단일한 신디케이트로 연합시키는 것을 통해서 실현될 것이다.67) 사회주의에서 경제 조직화의 양식은 대규모적인 국가 자본주의 경제 조직화 양식일 것이므로 생산의 조직화는 중앙집중화되고 위계제적일 것 같다. 실제 레닌은 엥겔스가 권위의 실행 없이는 많은 다수 인민의 협동적 노력을 결합시킬 조직들을 작동시킬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찬성하여 언급할 때 그런 결론에 대하여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공장, 철도, 공해상의 선박을 접수하라고 엥겔스는 말했다. 결코, 기계장치의 이용과 많은 인민의 체계적인 협조에 기반을 둔 이런 복잡한 기술적 성취의 어떤 것도 어느 정도의 종속 없이는 그리고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의 권위나 권력 없이는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68) 레닌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료제적 조직이 아마 필요할 것이라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면, 그러한 논의 속에서는 철도 운용과 대규모 기계공업이나 공장, 대규모 시장, 대규모 자본제적 농업기업 등의 사이의 그 어떠한 차별성도 찾아낼 수 없다. 이러한 모든 기업들의 경영기술은 가장 엄격한 훈련을, 또 자기에게 할당된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서 모든 사람이 아주 정밀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강제성을 부여하게 된다.69)

 

 

사회주의에서 경제 활동의 조직화는 위계제와 전문화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관료제적일 것이지만, 그것이 소비에트를 통해 노동자들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므로 특권 관리층을 낳지 않을 것이다. 레닌은 관료제 조직의 필요성은 복잡한 상호관련된 기계들의 사용에서 인민들을 조정할 기술적인 불가피함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축적한 생산 기계들을 작동시킬 노동 계급을 위해서, 생산에 관여하는 인민에 대한 위계제적인 명령은 사회주의 혁명 후에도 살아남아서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이용되어야 한다.70)

 

레닌이 관료제적이고 경제적인 조직화의 부르주아 모델들을 수용함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주요 주제, 즉 부르주아 국가를 긴급히 파괴할 필요성을 놀랍게도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는 공산주의의 첫 번째 국면은 맑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개시한 이행기의 분배 원리로 기술한 노동에 따른 보상 형식으로 생산물의 분배에서 부르주아의 권리를 보존할 것이라고 말한다. 레닌은 부르주아의 권리는 노동에 근거한 보상을 준수하도록 할 장치로서의 부르주아 국가의 실존을 가정한다고 추론한다. 그는 공산주의에서는 부르주아의 권리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르주아 국가마저도 부르주아지 없이도 마저도 일정 시간 동안 남아있다.”71)라고 결론을 내린다. 레닌은 이 점에 관해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고 그는 사회주의 속에서 지속하는 부르주아 국가에 의해 오직 부르주아의 가치들을 반영하는 원리들을 강화할 국가를 말하고자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국가와 혁명후반부에서 이미 현존하는 정부 부서의 문자 상의 보존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듯 보인다. 부르주아 국가의 어떤 부()도 없앨 수 없다(모든 것은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 이라고 카우츠키는 말하고자 한다)라는 카우츠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레닌은 카우츠키의 말에 반대한다. 레닌은 카우츠키가 소비에트의 감독 아래에서 전문가들의 위원회가 대체할지도 모를 부()에 대해 미신적인 경의를 표한다고 비난한다. 그때 레닌은 생각해야 할 점은 부()가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전문가들의 위원회가 남을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몇몇 다른 조직체를 세울 것인가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72)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레닌은 즉각 낡은 국가 기계를 파괴하자는 자신의 요구를 거듭 주장한다. 그러나 그 구호는 정부 부서가 노동자들의 혁명 후에도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레닌의 별 상관이 없는 듯한 표현에 의해 그 힘 대부분을 잃게 된다. 부르주아 국가 기계파괴타격에 대한 레닌의 요청은 국가와 혁명에서 종종 발견되는 특징을 드러낸다. 즉 뚜렷한 인상을 창조하지만 내용에서는 은유적이고 결국 애매함에 빠질 수밖에 없는 화려한 언어의 사용. 현존 정부의 부()를 가능한 지속시킨다는 이와 같은 견해 속에서, 레닌의 말에 대한 한 가지 그럴듯한 해석은 레닌이 낡은 국가 장치를 새로운 국가 장치로 대규모로 대체하는 것에 의해 노동자 대표와 농민 대표의 소비에트에 의한 권력을 상정한다는 것을 단순히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런 목표는 확실히 그의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국가와 혁명이 권력을 소비에트로 양도하라고 되풀이하여 요청하는 반면, 국가와 혁명은 레닌주의 당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속에서 수행할 기능들을 오직 한 문장에서만 언급한다. 하지만 그 단 하나의 문장은 대단히 풍부한 정치적 뜻을 갖는다.

 

 

노동자당을 교육함으로써 맑스주의는, 권력을 쥘 수 있고 전 인민을 사회주의로 이끌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전위대를, 그리고 새로운 체계를 지도하고 조직할 수 있으며, 부르주아지 없이 그리고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모든 노동 대중과 피착취대중이 자신의 사회적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스승과 안내자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전위대를 교육하게 된다.73)

 

 

레닌은 당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라고 언급하고 사회주의에서 노동하는 인민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안내하고, 명령하고, 조직하는 기능을 당에 돌린다. 비록 레닌은 지배하는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여타 행위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그 이상의 논의를 제공하지 않지만, 그는 소비에트 사회에서 공산당의 인도적이고 지도적인 역할의 원칙으로서 지금 인정되는 것을 요약 형태로 분명하게 확인해 준다. 그 원칙 속에서 분명한 것은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강조하지 않기로 한 구별이다. 그것은 전위의 계급의식 수준과 덜 정교한 다수 노동자의 계급의식 수준 사이의 구별이다.74)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레닌의 기술은 사회주의와 또는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국면과 관계가 있다. 그는 국가는 사회가 더 높은 국면으로 나아감에 따라 사멸될 것이고 그 국면에서 공산주의 잠재성은 충분히 실현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완전한 공산주의에 대한 레닌의 묘사는 아나키즘과 함께 널리 확장되는 것으로 적절하게 기술될지 모른다. 하지만 레닌은 국가는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 폐지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맑스의 잘 알려진 생각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맑스주의자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와 관련해서는 아나키스트들이다. 그러나 레닌은 완전한 공산주의의 시급한 도달에 대한 약속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정치적으로, 첫 번째 혹은 낮은 국면의 공산주의와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 사이의 구별은 조만간 엄청날 것이다.”라고 인정하면서 그리고 어떤 단계에 의해, 어떤 실천적 조치 수단에 의해, 인본주의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이러한 최상의 목표에 이를 것이다.”75)고 인정하면서, 그는 그 목표에 도달하려고 이동해야 하는 거리를 깨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완전한 공산주의로의 이행 단계를 언급함으로써, 레닌은 간접적인 수단을 통한 지연된 변화의 가망성을 넌지시 말한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의 국가 사멸에 대한 예견은 조심스럽게 방해받는다. 다수파는 무엇보다도 상대적으로 작은 소수파에 대한 압제를 실행할 것이므로 압제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보호할 필요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국가는 사회주의 시작과 함께 즉시 사멸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레닌은 주장한다. 하지만 레닌은 국가 사멸의 속도 혹은 그 과정의 최정점과 관련하여 너무 낙관적이거나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는 분명히 국가가 언제 사멸할 것인지를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명백하게 기나긴 과정일 것이므로 더욱 그렇다.” 그는 개개인의 행동의 월권(excesses)이 감소함에 따라 국가의 필요성은 감소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는 우리는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어떤 순서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사멸할 것이라고 알고 있다.”76) 국가의 완전한 제거는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에 있는 구별의 극복을 가정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레닌은 이러한 발전이 얼마나 신속하게 진행될 것인가. …… 우리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다음은 레닌이 국가 폐지에 대한 기대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분명하게 촉구한 주의(caution)이다.

 

그것이, 이러한 사멸과정이 지닌 지리멸렬한 본성과 더 높은 국면의 공상주의로의 발전의 신속성에 대한 그것의 의존성을 강조하는 것과, 국가의 완전한 사멸에 걸리는 시간과 그 구체적 형태의 문제를 떠나서, 왜 우리가 단지 국가의 불가피한 사멸만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의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들에 답을 할 만한 그 어떠한 자료도 현재는 없기 때문이다.77)

 

레닌은 국가 제거를 막연한 미래로 연기하는데 만족했다.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서, 그는 압제 폐지가 얼마나 어려운지 훨씬 더 잘 깨닫게 되었다. 그가 국가와 혁명에 나중에 추가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자본주의를 무계급 사회와 분리할 전체 역사 시기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하나의 부(section)로 이루어진다.78) 혁명 전에도 국가에 관한 자신의 가장 광범위한 저작에서 레닌이 강력하고 훈련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건설하자고 고집한 것은 그를 아나키스트들과 뚜렷이 구별 지었다.

국가와 혁명은 레닌이 의사-아나키스트적 유토피아주의에 빠졌던 소론이라고 흔히 기술된다. 비록 그 저작의 본래 목적이 칼 카우츠키와 국제 맑스주의의 여타 중도파 지도자들을 불신하는 것이었지만, 그 저작은 프롤레타리아의 지배가 갖는 예상 이익에 대한 1917년 레닌의 열의를 반영한다. 하지만 레닌이 대중의 직접 지배를 말할 때, 그는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적인 노동자의 산업 통제 형태가 아니라 부르주아 의회를 노동자가 선출한 소비에트로 대체하는 것과 노동하는 인민이 공공 행정에 폭넓게 참여하는 제도를 염두 해 두고 있다. 그는 그러한 변화들 가운데 어느 것도 정부와 경제에서 위계제적인 권위 양식의 보존과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레닌의 사회주의 국가 모델에서, 권위는 중앙집중화될 것이고, 권위주의는 정책 결정을 수행할 것이며, 전문가들은 여전히 행정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경제에서는 모든 기업들이 국가 권력의 최상의 기관들에 종속되는 하나의 거대하고 전국적인 신디케이트로 합병될 것이므로, 자본주의에서 유래한 조직 단위들은 더욱 증대될 것이고 그것들에 대한 통제는 더욱 중앙집중화될 것이다.79) 정부가 지닌 압제적 측면들이 사라지는 것은 무한하고 확실히 먼 미래로 연기될 것이다. 반면 경제 제도의 위계제적 구조화의 필요성은 결코 초월 되지 않을지 모른다.80) 새로운 사회에서 노동자와 기술자가 만든 모든 조직은 사회주의 목표에 대한 좀 더 높은 지식과 그것을 획득할 수단을 가진 전위당이 지도할 것이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 자신의 말들을 조심스럽게 검토함으로써 밝혀낸 사회주의 정치 체계는 아나키즘의 희망과 이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레닌은 권위를 파괴하는 쪽으로 나간 아나키스트적인 충동을 권위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립을 위한 방식을 밝히는 수단으로서 부르주아 국가를 타격할 단계에서만 긍정적인 요소라고 여겼다. 비록 레닌이 국가에 대해 쓴 주요 저작이 정치 이론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그것은 애매함, 다의성,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공헌으로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어렵다는 모순으로 상당히 채워져 있다.81) 그것이 지닌 너무 많은 모순은 논쟁, 강령, 프로그램의 혼합체로서 그것의 본성을 반영하지만 또한 더욱 근본적으로는 레닌이 동시에 진행한 모순적인 주제 사이의 긴장을 무심결에 드러낸다. 그 긴장의 원천은 흔히 생각하듯이 권위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거부와 권위에 대한 레닌주의적 수용 사이에 있는 모순이 아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권위 일반에 대항한 반란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에 대항한 반란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레닌은 부르주아적 관료제 모델을 자신의 계획 속에 가져오는 반면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의 지배성(dominance)을 거부한다. 국가와 혁명의 근원적인 모순은 민주주의라는 주제와 위계제라는 주제 사이에 있는 모순이다. 레닌은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서 의지적이고 힘이 넘치는 대중 주도의 미덕을 따뜻하게 보증하면서 모든 복합 조직들 속에 있는 위계제적 구조가 지닌 기술적 필요성과 관련하여 엥겔스의 테제에 기꺼이 동의한다. 위계제적 제도들은 혁명적인 대중의 참여를 인도할 것이고, 위계제적 제도들은 미래에 대한 특별한 시각을 공유하는 구성원을 가진 당이 조정할 것이다. 레닌을 단순히 한 명의 냉소적인 권위주의자나 혁명적 이상가로 기술하는 것은 그의 사상이 지닌 복잡성과 애매함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82) 인민 주도와 엘리트 지도라는 주제는 국가와 혁명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레닌의 전 저작들에 나타난다.83) 각각에 대한 상대적인 강조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랐다. 1917년 레닌은 대중이 선거와 행정에 참여하는 것이 지닌 이점을 먼저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 중앙집중화, 국가 관료제, 정치 체계에 대한 당 지도를 바람직하게 여긴 자신의 확신을 포기하지 도 않았다. 국가와 혁명에 드러난 명백한 모순을 푸는 해법은 혁명적 상황에 접근하는 가운데 대중의 바람과 엘리트의 결정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는 레닌의 가정이었다. 즉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자생성과 의식의 일치가 있을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그 가정이 비현실적임을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 1917년 레닌의 사상에 드러난 가치의 양극성[대립] 사이의 긴장은 소비에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적 유산의 영구적인 일부가 되었다.84)

 

옮긴이 : 다혁(多赫)

 

사각형입니다.

1) Robert V. Daniels, “The State and Revolution: A Case Study in the Genesis and Transformation of Communist Ideology,” The American Slavic and East European Review 12 (February 1953): 22.

2) Robert V. Daniels, The Conscience of the Revolution: Communist Opposition in Soviet Russi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0), p.51

3) Alfred G. Meyer, Leninis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 pp.195-196.

4) Adam B. Ulam, The Bolsheviks (New York: Macmillan,1965), p. 353.

5) Daniels, “The State and Revolution,” p. 2.

6) Louis Fischer, The Life of Lenin (New York: Harper and Row, 1964), p. 122.

7) Ulam, The Bolsheviks, p. 353.

8) Rodney Barfield, “Lenin's Utopianism: State and Revolution,” Slavic Review 30 (March 1971): 46, 47, 52

9) Ibid., pp. 56, 45-46, 53.

10) Rolf H. W. Theen, Lenin: Genesis and Development of a Revolutionary (Philadelphia: J. B. Lippincott, 1973), pp. 117, 118-119.

11) Neil Harding, Lenin's Political Thought, Vol. 2: Theory and Practice in the Socialist Revolution (New York: St. Martin's Press, 1981), p. 140. See also p. 134.

12) Neil Harding, “Authority, Power, and the State, 1916-1920,” in Authority, Power, and Policy in the USSR, ed. T. H. Rigby, Archie Brown, and Peter Reddaway (New York: St. Martin's Press, 1980), pp. 41, 42, 53.

13) Harding, Theory and Practice, p. 323.

14) Barfield, “Lenin's Utopianism,” pp. 49-50; V. V. Gorbunov, “K istorii napisaniia V. I. Leninym knigi Gosudarstvo i revoliutsiia,” Voprosy istorii KPSS, 1973, no. 2, pp. 77-78; Marian Sawer, “The Genesis of State and Revolution,” The Socialist Register 1977, ed. Ralph Miliband and john Saville (London: Merlin, 1977), pp. 216-219.

15) Nadezhda K. Krupskaia, Reminiscences of Lenin (New York: International, 1970), p. 328.

16) Sawer, “The Genesis of State and Revolution,” p. 215, 216; Krupskaia, Reminiscences of Lenin, p. 331.

17) See Lenin's letter to Aleksandra Kollontai, 17 February 1917, V. I. Lenin, Polnoe sobranie sochinenii, 5th ed. (Moscow: Politizdat, 1958-), 9: 388, and his letter to Inessa Armand, 19 February 1917.9: 390.

18) 몇 가지 주제는 국가에 관한 맑스주의에서 보다 국가와 혁명에서 더 강조되었다. 특히, 레닌의 초기 노트들에서 보다 국가와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소비에트 지배 형태의 이점에 보다 큰 관심이 집중됐다.

19) Ulam, The Bolsheviks, p. 348.

20) Lenin, Gosudarstvo i revoliutsiia, Polnoe sobranie sochinenii 33: 5-6.

21) Ibid., p. 37.

22) Ibid., pp. 22.

23) Lenin, “Zadachi proletariata v nashei revoliutsii,”" April 1917, Polnoe sobranie sochinenii, 31: 171; Gosudarstvo i revoliutsiia, p. 4.

24) Ulam, The Bolsheviks, p. 307. Lenin's aspiration to lead a new 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socialists is emphasized by Stanley W. Page, Lenin and World Revolution (New York: McGraw-Hill, 1972), p. 22.

25) “Zadachi proletariata v nashei revoliutsii,” p. 178.

26) Letter of 17 February 1917, Polnoe sobranie sochinenii, 49: 388.

27) Letter of 19 February 1917, ibid., p. 390.

28) Letter of 27 February 1917, ibid., p. 393.

29) Lenin, Marksizm o gosudarstve, ibid., 33: 272-305.

30) Lenin, Gosudarstvo i revoliutsiia, p. 4.

31) Ibid., p. 6.

32) 물론, 19177월에서 9월까지 레닌은 반혁명 분자들이 러시아의 현존 소비에트를 지배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원칙적으로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가 취하게 될 형태였다고 국가와 혁명에서 끊임없이 강조했다.

33) Daniel Tarschys, Beyond the State: The Future polity in Classical and Soviet Marxism (Stock-holm: Scandinavian University Book, 1971), p. 112.

34) Ibid., p. 113.

35) Gosudarstvo i revoliutsiia, p. 42.

36) Ibid., p. 91.

37) Ibid., p. 89.

38) Lenin, “Uderzhat li Bol'sheviki gosudarstvennuiu vlast'?,” Polnoe sobranie sochinenii, 34: 318.

39) Gosudarstvo i revoliutsiia, pp. 86-87, 26, 97.

40) Ibid., p.53. 게하르트 피셔(Gerhard Fischer), “‘...국가는 사멸되기 시작한다.’: 바쿠닌,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파리 코뮨 해석에 관한 노트들,” The Australian Journal of Politics and History, 25 (April 1979); 29-38 에서, 맑스의 글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공장 평의회를 통한 산업 생산의 통제에서 노동자의 직접 참여로 향했던 코뮨의 실제 경험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피셔는 레닌이 코뮨의 실천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위해 맑스의 보고에 원칙적으로 의존한다고 적고 있다. 로날드 그리고르 서니(Ronald Grigor Suny), in The Baku Commune, 1917-1918: Class and Nationality in the Russian Revoluti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2), p.359 에서, 레닌은 1917년 맑스보다 파리 코뮨의 경험에 대한 더욱 국가주의적 해석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41) Gosudarstvo i revoliutsiia, p. 53.

42) Ibid.

43) Ibid., pp. 113, 26.

44) 레닌은 코뮨을 향한 맑스의 양가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 소비에트를 향한 레닌의 태도에 관해서는 Oskar Anweiler, The Soviets: The Russian Workers, Peasants, and Soldiers Councils, 1905-1921, Trans. Ruth Hein (New York: Random House. 1974), pp. 80-86, 149-152. 보라.

45) Lenin, “Pis'ma iz daleka,” March 1917, Polnoe sobranie sochinenii 31: 19; “O zadachakh proletariata v dannoi revoliutsiia,” April 1917, ibid., p. 115; “Pis'ma o taktike,” April 1917, ibid., p. 143; “Zadachi proletariata v nashei revoliutsii,” pp. 162-163.

46) Gosudarstvo i revoliutsiia, p. 91.

47) Ibid., pp. 91, 97, 114.

48) Ibid., p. 48.

49) Ibid., p. 46.

50) Ibid., p. 116.

51) Ibid., p. 100.

52) Ibid., pp. 44, 101.

53) Ibid., pp. 44, 109.

54) Ibid., p. 116.

55) Ibid., pp. 48, 49.

56) Ibid., p. 49.

57) Ibid., p. 101.

58) Ibid., p. 49.

59) Ibid., p. 101.

60) “Uderzhat li Bol'sheviki gosudarstvennuiu vlast'?” p. 312. See also p. 320.

61) Gosudarstvo i revoliutsiia, pp. 7, 9.

62) “Zadachi proletariata v nashei revoliutsii,” p. 180.

63) Gosudarstvo i revoliutsiia, p. 50.

64) “Uderzhat li Bol'sheviki gosudarstvennuiu vlast'?,” p. 307.

65) Ibid., p. 308.

66) Gosudarstvo i revoliutsiia, pp. 50, 97. See also ibid., p. 101: “모든 시민은 단일한 전국적인 국가 신디케이트의 피고용인이나 노동자가 된다……. 사회 전체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과 함께 단일한 사무실과 단일한 공장이 될 것이다.”

67) Ibid., p. 97.

68) Ibid., p. 61.

69) Ibid., pp. 108-109.

70) 다니엘스(Daniels), the state and revolution, p.34에서, 레닌은 경제적 사무의 영역에서 강력한 제도적 권위의 보전을 허용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인정한다.

71) Gosudarstvo i revoliutsiia, p. 99.

72) Ibid., p. 114.

73) Ibid., p. 26.

74) 레닌은 권력을 잡기 전에도 그런 구별에 대해 훨씬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Uderzhat li Bol'sheviki gosudarstvennuiu vlast'?,” p.315에서 우리는 공상가가 아니다. 우리는 비숙련 노동자나 요리사가 곧 바로 국가 행정 일을 잘 진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 우리는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들과 군인들이 국가 행정 노동에서의 훈련을 지도하고 이러한 훈련이 즉각 시작되길 요구한다. ……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들은 지도해야 한다. 행정 노동이 아니라면 그들은 광범위한 다수의 노동하는 피억압 인민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

75) Gosudarstvo i revoliutsiia, pp. 98-99.

76) Ibid., pp. 84, 91.

77) Ibid., p. 96.

78) Ibid., p. 35. That section was added by Lenin in December 1918.

79) 레닌은 국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경제적 활동에 대한 통제의 중앙집중화를 향한 경향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강화되었다고 깨달았다. 그의 의도는 전시경제의 조직화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경제의 조직화를 사회주의 속으로 흡수하는 것이었다. 국가에 관한 맑스주의적 텍스트들을 스스로 재검토하던 시기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특히 선진국들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충분히 성숙해졌다는 것을 전쟁은 확실히 충분하게 그리고 매우 실천적인 방식으로 재긍정했다. 보기를 들어 독일이 단일하고 중앙집중적인 제도로부터 66백만 명의 경제적 삶을 이끌어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같은 일이, 인구의 90%의 이해관계 속에서,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들이 그들의 투쟁을 지도한다는 가정 아래에 무소유 대중이 이루어낼 수 있다. …… 사회주의를 위한 모든 선전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이고 즉시 실천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은행을 몰수하라! 그리고 대중에게 의지해 그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무기탄약공급부(W.U.M.B.A.)가 독일에서 수행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수행하라. “chernovoi proekt tezisov obrashcheniia k internatsional'noi sotsialisticheskoi komissii i ko vsem sotsialisticheskim partiiam,” December 1916, polnoe sobranie sochinenii 30 : 278-279. W.U.M.B.A.는 무기탄약공급부(Weapons and Ammunition Supply Department)였다.

80) 상기의 노트 6869에 기록된 경제적 기업과 여타의 복합 기술 시설에서의 위계제적 조직화에 대한 레닌의 약속은 명백하게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었다.

81) 레닌이 주창한 지배 체계를 비판하는 것은 이 논문의 목적이 아니다. 국가와 혁명의 정치이론은 Lenin and the End of Politic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에서 폴란(A. J. Polan)에 의해 철저하고 신랄하게 비판받는다.

82) 레닌의 저작 속의 권위와 민주주의를 다루는 법을 재검토할 필요성은 최근의 역사적인 학문적 성과에 의해 제안되는데, 최근의 역사적인 학문적 성과는 1917년 볼셰비키와 러시아 노동자들 간의 관계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를 수정하는 경향이 있다. 서니는 “Toward a Social History of the October Revolution,”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88 (February 1983):31-52 에서 그런 학문적 성과의 결과들을 검토한다. 좀 더 최근에 이루어진 비슷한 작업의 사례는 David Mandel, The Retrograd Workers and the Soviet Seizure of Power: From the July Days 1917 to July 1918 (New York: St. Martin's Press, 1984); 그리고 Donald J, Raleigh, Revolution on the Volga: 1917 in Saratov (Ithaca, N.Y. : Cornell University Rress, 1986)을 포함한다. 비록 그런 역사적 분석들은 주로 1917년의 대중 활동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것들은 레닌을 단순히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으로 대중을 속이는 자로 묘사하지 않는 것과 그를 이상주의적인 혁명적 이론가로 기술하지 않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을 뜻한다.

83) Esther Kingston-Mann, Lenin and the Problem of Marxist Peasant Revolu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pp. 173-174. 는 레닌이 조직적 훈육과 인민 주도 양자 모두를 동시에 약속했다고 주장한다.

84) 고르바초프(M.S.Gorbachev), “Politicheskii Doklad Tsentral’nogo Komiteta KPSS XXVII s’ezdu Kommunisticheskoi Partii Sovetskogo Soiuza,” in Materialy XXVII s’ezda Kommunisticheskoi Partii Sovetskogo Soiuza(Moscow: Politizdat, 1986), p.33 에서, 경제 개혁은 소비에트 경제의 중앙집중화된 방향을 강화해야 하고 기업과 협회의 독립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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