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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6월호

2프랑스소요의기원[1]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40

2. 프랑스 소요의 기원

 

물론, 공상가들 역시 그들이 통과해야 할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공상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해결과 해결에 이르는 길은 문제 그 자체에서 틀림없이 발견될 것이라고 깨닫지 못한 채, 상황을 단지 사실로서 혹은 기껏해야 해결될 문제로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프랑스에서는 선진적인 과격파 소집단들만이 다른 나라에서는 광범위한 학생 부문이 이미 긍정했던 거부(refusal)에 착수했다. 경제적 혹은 심지어 정치적 위기를 향한 어떤 경향도 관찰할 수 없었다. 나중에 성난자들(Enragés)을 이루게 될 네다섯 명의 혁명가들이 낭떼르에서 시작한 소요(騷擾)는 다섯 달 만에 거의 국가 폐지에 이를 정도였다. 이것은 확실히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프랑스에 잠재적인 심각한 위기는 여타 모든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도 실재한다. 부족한 것은 진정한(real) 혁명적 관점과 그것의 실천적 조직화에 대한 자각이었다. 몇몇 개인들의 소요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결코 그런 결과에 이르지 못했다.

 

드골 체제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위기의 기원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갖지 않았다. 드골주의(Gaullism)는 윌슨(Wilson)의 노동당이 자본주의의 근대화를 목표로 일하는 부르주아 체제이고 거의 같은 뜻에서 자본주의의 근대화를 목표로 일하는 부르주아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반대파가 정확히 똑같은 목적을 담은 강령(program)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다른 곳에서보다도 훨씬 더 불리하다는 사실은 드골주의의 원칙적 특성과 성공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두 가지 특색에 주목해야 한다. (1)드골이 음모와 군사 반란으로 권력에 접근한 것, 그것은 합법성을 일정하게 경멸하는 체제라는 뜻이다. (2) 드골 개인이 고루한 명성(archaic prestige)에 탐닉한 것. 100년 동안 프랑스에 결코 없었던 이런 종류의 명성이 오직 최근의 운동과 함께 그리고 확실히 드골주의의 완벽한 명성을 박살냄으로써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반어적(ironic)이다.

 

극적이지 않지만 프랑스 경제의 근대화와 프랑스 경제가 유럽 공동 시장(Common Market)에 적응한 것은 실업 특히 청년 노동자들의 실업의 증가와 함께 사회보장에 관한 편의주의적인 정부 법령을 통해 일정한 경기 후퇴와 실질 임금의 하락 없이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은 1월에 깡(Caen)에서 일어난 모범적인 노동 계급 폭동의 구실이었다. 깡에서 노동자들은 조합의 요구를 넘어섰고 몇몇 상점을 약탈했다. 3월에 레동(Redon)의 가르니에 공장의 철강 노동자들은 레동의 모든 공장들을 자신들의 승리적인 파업으로 끌어들여 조합과는 무관하게 그들 자신의 연계를 창조했으며 그들 자신의 자기방어를 조직화해 폭동진압경찰(CRS)의 철수를 강제했다.

 

스트라스부르 사건의 직접적인 반향은 리옹 근처 쥬시(Jussieu)의 대학 기숙사에서 처음으로 감지됐다. 그곳에서는 1967년 봄 수 주 동안 기숙사생들이 모든 규칙을 무시했고, 결국 반-성적 성문률(anti-sexual statutes)의 개정에 관한 학문적 논쟁으로 넘어갔다. 196712월 초부터 낭트의 학생들은 더 나아갔다. 그들은 전국프랑스학생연합의 지역사무국을 접수한 뒤, 대학 심리 상담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그들은 몇 차례 기숙사의 침입을 조직했다. 남성들이 여성 기숙사에 침입한 뒤 여성들이 남성 기숙사에 침입했다. 마침내 2월에 그들은 낭트 대학 학장실을 장악하고 경찰들과 격렬하게 싸웠다. 리바롤(Rivarol)53일 다음과 같이 썼다. “일찍이 2월의 낭트 폭동은 적기와 흑기 아래의 150명의 학생들인 상황주의자들의 진면목(정의관의 점거)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거의 잊혀졌다.……

 

앙라제 집단은 낭떼르에 경찰이 들어와 있는 것에 반대한 투쟁 중에 형성됐다. 사복경찰 몇 명의 사진이 226일 크게 확대되어 포스터에 담긴 채 대학 구내에 전시됐다. 이러한 행동은 그라핀(Grappin) 학장의 요청으로 60명의 정복 경찰의 개입을 불러왔고, 그들은 짧은 대치 후에 쫓겨났다. 수 백 명의 좌파 투사들이 최초의 선동가들과 결합했다. 이들은 12명 남짓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앙라제 자체를 포함했다. 앙라제는 그 당시 대학 체계에 가장 순응하지 않은 분자들 중 하나였다. 더욱이 이 캠퍼스 건달들”(campus bums)은 자신들의 방식이 국제상황주의자의 강령과 이론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대학을 시작으로, 참을 수 없는 사물의 질서를 체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학] 환경이 특히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낭떼르는 건축물에서 근대적인 것처럼 대학 시설에서도 근대적이었다. 순종적인 사상을 지닌 정신박약자가 거드름을 피우던 곳이 여기였다. 다시 빼앗아가는 악당들, 근대주의적 사회 통합에서 무가치한 자들, 르페브르와 투렌느. 무대는 완벽했다. 즉 고립(isolation)이라는 도시주의는 대학의 중심을 고위의 평지와 평지를 보충하는 빈민가에 옮겨놓았다. 그것은 일반적인 억압 조건들, 즉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을 지닌 하나의 소우주였다. 따라서 환영의 전문가들이 명령조로 말하지 못하게 한 강령과 비판적 반달리즘(vandalism)을 위해 벽들을 이용한 것은 커다란 효과를 보았다. 이것은 쩨쩨한 기숙사 사감이나 전국프랑스학생연합과 지도력을 갈망했던 모든 자들이 주문해서 만든 푸쉐(Fouchet) 개혁안에 대항한 수 해 동안의 역겨운 헛된 항의[시위]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열었다.

 

앙라제가 사회학자들과 몇몇 다른 자들의 강의를 방해하기 시작했을 때, 전국프랑스학생연합과 그 좌파 잠입자들(infiltrators)은 분개하여 반응했다. 몇몇의 경우에 그들 스스로 교수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전국프랑스학생연합 지역위원회에 관한 그들 자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켰다. 그때에는 혁명적학생연락위원회(CLER)로 알려졌으나 나중에는 혁명적학생연맹이 되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들 가운데 다니엘 콘-벤디트(장관에 대한 모욕을 사과함으로써 얼마간의 평판을 이미 혼자 힘으로 만들어냈던)를 전국프랑스학생연합에서 제명하도록 표결에 붙이겠다고 위협했다. 독일 국적의 콘-벤디트는 제명에 관한 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시청에 출두하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혁명적학생연락위원회는 그들의 행동[표결 요구]를 철회했다. 앙라제의 파문은 이미 일정한 정치적 소요 속에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앙라제의 그라핀에 대한 노래, 악랄한 그라핑놀”(Grappignole), 그리고 그들의 첫 연재만화 포스터가 214일 대학 건물 점거 건국일”(National Day) 행사에 등장했다. 사방에서 소리가 높아져 갔다.

 

214누벨 옵세르바뙤르는 다음과 같이 낭떼르를 애도했다. “좌파는 세 네 명의 국제상황주의자 대표만을 포함한 앙라제만 남겨 둔 채 해산했다.”

 

같은 날 앙라제는 다음을 분명히 하는 소책자(tract)를 발간했다.

 

그들[앙라제]는 결코 국제상황주의자에 속하지 않았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국제상황주의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만일 일말의 급진주의를 보여준 모든 항의[시위]가 상황주의자의 구상(plot)의 결과였다면, 진압(repression)은 애들 장난이었을 것이다! …… 그럼에도 우리는 상황주의적 비판에 대해 동조했던 것을 다시 긍정한다. 우리의 행동들이 우리가 급진적 이론과 일치한다는 것을 판가름할 수 있다.

 

322일 좌파 집단은 [대학] 행정동에 쳐들어가 대학 평의회실에서 집회를 열었다. 르네 리젤(René Riesel)은 앙라제의 이름으로 참관 중인 2명의 행정 직원과 참석 중인 몇몇의 스탈린주의자를 쫓아내자고 즉각 요구했다. 아나키스트 대변인들 뒤에 있던 콘-벤디트의 정식적인 협력자 중 한명은 오늘 밤 이곳에 있는 스탈린주의자들은 더 이상 스탈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했고, 앙라제는 이 비겁한 환영에 항의해 즉각 집회 장소를 떠났다. 더욱이 앙라제는 조합 사무실을 파괴하고자 했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앙라제는 벽들에 자신들의 슬로건을 쓰기 시작했다. “당신의 욕망을 현실이라고 생각하라”, “권태는 반혁명이다”, “노동조합은 매음굴이다”, “일하지 말라등등. 이것은 하나의 소요 형태를 예고했고, 그것은 원대한 성공을 즐기는 것과 점거 기간에 나타난 독창적 특성들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다음 주에 “142명의 운동그리고 “322운동이라고 불리게 될 다양한 좌파 분자들의 모임은 앙라제 없이 그리고 앙라제에 맞서 그날 밤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322운동은 순수한 개인적 후원 아래 그에 결합한 개인들의 폭넓은 복합 집단이었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어떤 하나의 이론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했고 이러한 차이를 극복할 공동 행동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주제에 관한 합의는 있었다. 하나는 엉뚱한 진부함(ridiculous banality)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요구였다. 진부함은 종말을 맞이하고 있던 좌파 집단들이 고민하던 시기의 유산인 반제국주의 투쟁이었다. 즉 반란이 일어난 볼리비아에 자신의 결연한 지지를 보낸 저 변두리의 베트남인 낭떼르. 신선함은 조직 속의 직접민주주의였다. 이러한 의도가 322운동 속에서 부분적으로만 실현됐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대다수 322운동의 구성원들은 이중으로 충성(allegiance)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무시되거나 결코 고려되지 않았다. 모택동주의자들, 혁명적 공산주의 청년단, 그리고 몰락한 아나키스트 연맹에서 이베리안 자유주의 청년 연맹의 활동가들까지 그리고 우스운 혹은 수상쩍은 제도적 연구 집단들”(FGERI)의 신봉자들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다.

 

-벤디트 자신은 잡지 흑과 적(Noir et Rouge) 주위에 모인 독립적이고 준-이론적인 아나키스트 집단에 속했다. 이것과 그의 개인적 자질 때문에 콘-벤디트는 자신이 322운동의 가장 급진적 경향 속에 있고 이 운동 전체보다 훨씬 더 진정으로 혁명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운동의 대변인이 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이 운동을 견뎌내야 했다. 학생 청중을 즐겁게 하는데 충분히 능숙하고 좌파적 묘책의 장(arena)에서 일하는데 충분히 솔직하며 그들의 대변인들과 함께 일하는데 충분히 유연했지만, 그 시기의 이론적 문제들에 관해 다양한 개인들로부터 혼란스럽게 보고 받은 별로 영리하지 못한 콘-벤디트는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평범한 혁명가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았어야 했던 것에 비해 훨씬 적게 알았고 자신이 아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무비판적으로 스타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스펙타클한 매체의 리포터 무리들에게 드러냄으로써, -벤디트는 당연히 자신의 말에 주의해야 했고, 자신의 말은 항상 명석함과 무의미를 결합했다. 그런 류의 소통(communication)에 본래적인 왜곡은 무의미를 악화시켰다. 4월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은 온건한 사람이고 결코 앙라제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밝히고 있었다. 언론이 한 장관(a Minister)을 따라 모든 낭떼르 반란자들을 앙라제라고 말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때였다.

 

며칠 뒤 322운동은 전체적으로 더 큰 운동과 관련하여 사실상 자신의 주요한 성공을 거뒀고, 이미 그 어리석음을 드러냈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사례들에서 표절한 비판 대학에 대해 지껄이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문화와 창조성에 관한 위원회의 모든 노력은 심지어 약간의 불충분한 상황주의의 영향도 흥미를 일으킬 수 없었던 혁명적 심미주의를 결코 넘어갈 수 없었다. 반면 329일 낭떼르에서 집회를 개최한 단세포적인 반제국주의적기획은 그라핀 학장을 밀어 붙여 소요를 급속히 확산시킨 일련의 행정적 실책이라는 시급하고 중요한 결과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라핀은 캠퍼스를 이틀 동안 폐쇄했다. “한줌의 앙라제라는 위협적인 유령이 민족의식(national consciousness)에 달라붙어 따라다니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요 당사자 가운데 뤼마니떼(L'Humanité)329일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상황주의자들의 집단이 맡은 특공대식 행동들, 누군가의 구호들 가운데 하나인 거대한 글자의 일하지 말라!”가 캠퍼스 입구를 장식했다. 그러한 40여명의 학생들에게 활동이란 수 주 동안 강의실과 토론 그룹에 개입하고…… 건물들을 점거하며 마침내 거대한 구호들로 벽들을 뒤덮는 것이었다. 한줌의 무책임한 분자들이 어떻게 그런 중대한 결정을 이끌어 냈고 12,000명의 인문학부 학생들과 4,000명의 법학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그 순간에 시작된 탄압은 너무 늦었다. 물론 앙라제 가운데 한 명인 제라드 비고르그(Gérard Bigorgue)322운동, 그 기자들, 또는 어떤 다른 좌파 집단으로부터 한마디 말도 없이 프랑스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에서 5년 동안 실제로 쫓겨났다 (그는 대학의 규칙들을 공개적으로 경멸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고, 대학 평의회 앞에서의 그의 태도는 사실상 파문이었다). 그러나 콘-벤디트(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상당히 잘 알려져서 확실히 더욱 잘 방어할 수 있는)를 추방하겠다는 새로운 위협, 낭떼르 출신의 리젤, -벤디트 그리고 6명의 여타 선동가들이 56일 파리 대학 제도 위원회에 출두할 예정이라는 발표, 마지막으로 52일 추후 공고가 있기 전까지 낭떼르를 폐쇄하겠다는 것은 파리 학생들 사이에 소요의 확산을 불러일으켰다. 322운동과 전국프랑스학생연합은 53일 금요일 소르본의 안마당에서 집회를 개최하자고 요청했다. 그 집회를 무산시킴으로써 당국은 응축된 운동의 힘을 폭발시켰고 운동이 결정적 문턱을 넘어가도록 자극했다. 54일 르몽드에 쓴 어리석은 에스카르피트(Escarpit)의 기막힌 예언은 그런 전개가 전문적인 관찰자들에게는 얼마나 불가능한 일로 보였는지를 완벽하게 입증됐다. “비록 그가 자신의 반관료주의(anti-mandarinism)를 맑스주의 언어나 상황주의 언어로 치장하더라도, 한명의 창문을 깨는 자의 의사-분노보다 덜 혁명적인 것도 없고, 더욱 순응주의적인 것도 없다.”

 

 

옮긴이: 다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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