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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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6월호

생비노동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43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명료화와 분류

 

 

선구르 샤브란(Sungur Savran), 아메트 토낙(E. Ahmet Tonak)

 

 

이 논문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분하는 것이 왜 자본주의 일반의 궤적을 분석하고 20세기 말 자본주의가 지닌 특수한 양상을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가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다음으로 생산적 노동 일반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뚜렷이 구분하고, 이 구분에 따라 자본주의 노동의 주요 유형들을 분류할 것이다. 또한 이 논문에서는 서비스 부문의 노동과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 부문의 노동이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맑스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분한 것에 대한 몇 가지 공통적인 비판들을 검토한다.

 

1970년대 초 이래 정치경제학에 대한 맑스주의 비판의 기초가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와 함께 맑스가 말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아래에서는 생비노동이라고 줄여 씀)을 구분하는 문제가 자세히 검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면밀한 검토는 정의(definition)의 문제, 사용되는 구분 기준, 그리고 이 구분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논쟁을 불러왔다. 그런데 1970년대 전체의 이론적 분위기는 스라파가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비판한 것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논쟁이 지배했다. ‘생비노동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은 엄밀한 의미에서 1970년대에 벌어진 논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본 사항들을 엄격하게 조사하는 것은 그 당시에 대세를 이루었다. 우리는 생비노동에 대한 논쟁이 논쟁점을 풀지 못한 채 끝났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 대립한다는 모든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일련의 구분들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 사이에서 많은 혼동과 오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명확히 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었다. 더욱이 생비노동구분이 자본주의 축적을 분석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적어도 자본주의 노동의 모든 주요 유형들을 포괄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특히 맑스주의 범주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의 각종 측면을 실증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이 요즈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노동의 모든 유형을 분류하는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료화분류라는 두 가지 과제에 부딪치고 있다.

우리의 목적이 지닌 이러한 두 가지 성격 때문에 우리는 생비노동구분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논쟁자들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관점을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우리가 짊어진 두 가지 과제를 이루는 데 결코 쓸모 있는 방법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쟁점들 그리고/또는 논쟁들을 개괄하는(survey) 것도 우리의 과제를 푸는 데 가장 생산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생비노동의 구분을 체계적이고 정확하며 논리적으로 건실하고 이론적으로 엄격하게 재구성했다고 믿는 우리의 이론을 먼저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이론을 바탕으로 삼아 자본주의의 주요 유형의 노동들을 분류할 것이다. 더욱이 이 재구성된 이론은 맑스 저작에 있는 생비노동구분의 개념 전체에 대해 제기된 주요한 비판들에 효과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구성된 이론을 완전히 제시하고 나서, 주요 비판이라고 생각되는 주장들에 분명히 대응할 것이며, 우리의 개념 체계이것은 맑스의 개념 체계를 조심스럽게 다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가 논쟁 대상이 되지 않을 만큼 완전하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생비노동에 관한 맑스의 사고는 완전히 일관적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물론 여기저기의 부주의한 실수 또는 이따금 보이는 서투른 공식을 나무랄 수는 있지만, 이런 부분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맑스가 많은 자신의 원고를 스스로 최종 출판을 위해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비노동에 대한 맑스의 서술에 있는 불일치들에 대한 비판들너무나 많다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다루면 우리는 우리의 중심 목적에서 다시 멀어질 뿐 아니라,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맑스 자신이 일관적인가 아닌가에 상관없이생비노동의 논리적 이론적으로 일관된 구분이 맑스주의 가치론에 의거해 가능한가를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비노동구분이 자본주의 일반의 궤적을 분석하는 데, 그리고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몇몇 특수한 양상이 축적과정에 미치는 충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가오히려 핵심적인가를 먼저 지적하려고 한다. 그런 다음 생산적 노동 일반이라는 개념과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 사이의 구분과 관계를 해명할 것이다. 이것은 생비노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꼭 필요한 방법론이다. 이어지는 절()들에서는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이라는 범주의 내용을 구체화하려고 자본주의 사회경제구성체의 모든 주요 유형의 노동자급자족적인 소농 가구, 집안일, 소상품생산에서 시작해 고용된 가사노동, 생산노동과 유통노동에 이르기까지을 다룰 것이다. 그 다음의 다른 절들에서 두 가지 어려운 문제, 즉 서비스 부문의 노동의 위상과 사회적 서비스의 국가 공급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위상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 절에서는 맑스의 생비노동구분에 대한 몇 가지 공통된 비판을 다룰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이 마지막 절은 기존 문헌을 비판적으로 개괄하거나 논쟁을 제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1970년대 이래 생비노동논쟁에서 제기되었던 쟁점을 좀 더 분명히 설명할 것이다.

생비노동의 구분이 왜 중요한 지를 논의하는 것에서 시작하자. 왜냐하면 이전 논쟁의 한 측면은 이렇게 구분함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정확히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구분이 결코 신비스럽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축적 궤적을 적절히 분석하는 데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믿는다.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생비노동’)의 구분의 중요성

 

자본주의 경제는 잉여가치의 끊임없는 생산과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재전환을 통해 자본이 자기 확대하는 축적과정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축적과정의 목적은 이전에 생산된 기존가치의 유지뿐 아니라 잉여가치의 창조와 생산적 재투자다. 그러나 이 자기 확대 과정을 수행하려면, 자본은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노동과 계속 교환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비노동구분이 축적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산적 노동과의 교환만이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다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 가운데 하나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Marx 1976a: 1048).

생산적 노동이 잉여가치의 생산과 재투자에 꼭 필요한데, 비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축적의 원천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비생산적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적 노동자가 창조한 잉여가치에서 지급되어야 하기 때문에, 고용된 비생산적 노동자는 사실상 자본주의 경제에서 자본축적에 대해 적극적인 장애물이다. 따라서 생비노동은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 과정인 자본축적에 정반대의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이런 일반론 수준에서는 생비노동을 구분하는 것은 맑스주의적 자본주의 분석의 기본적인 이론적 요소이다.

더 구체적인 수준에서는 사회적 총 노동을 생산적 사용과 비생산적 사용으로 나누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다양한 핵심적 변수들(보기를 들면 가변자본, 총 잉여가치, 그리고 잉여가치율) 각각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가변자본은 자기 자신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하는 자본 요소이다. 그래서 사회적 수준에서 가변자본의 크기는 경제 전체에서 지불되는 총임금이 아니라 오직 생산적 노동자의 임금이 결정한다. 반면 잉여가치는 유산계급의 상이한 분파들이 착복하는 다양한 구성부분들(보기: 이윤 이자 지대 등)로 이루어질 뿐 아니라, 비생산적 노동자의 임금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와 가변자본의 비율인 잉여가치율은 이윤과 임금과 같은 국민소득 범주들에 기대어 직접적으로 계산할 수가 없다. 맑스주의 범주에 따라 잉여가치율을 계산하려면 생비노동구분을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한다. 만델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에서 생산적 노동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사회적 부기(social booking. 국민소득을 가치 단위로 계산하는 것)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Mandel 1981: 46).

사회적 총 노동을 생산적 사용과 비생산적 사용으로 나누는 것이 잉여가치율에 영향을 준다면, 이것은 또한 이윤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왜냐하면 잉여가치율은 이윤율의 기본적인 결정요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잉여가치가 전적으로 생산적 노동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생산적 노동에 대한 비생산적 노동의 비율이 증가하면 잉여가치 생산량이 감소하고, 다른 사정이 변하지 않을 때 이윤율이 하락한다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적어도 이윤율 저하 경향의 이론 틀 안에서는 생비노동구분이 자본주의 위기를 아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생비노동구분은 국가 개입과 이것에 따른 소득 재분배를 분석하는 데에도 쓸모 있다. 왜냐하면 국가 세입의 원천을 분명히 밝혀야만 소득분배의 영역에서 국가 개입이 미치는 순 효과(net impact)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가변자본에서 나오는 국가 세입의 몫과, 다른 한편으로는 잉여가치에서 나오는 국가 세입의 몫을 각각 계산해야만 국가 개입이 일으키는 소득분배의 방향과 크기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지적했듯이, 사회적 총 노동을 생비노동으로 나누는 것은 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크기를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국가의 지출 측면에서도 생비노동구분은 꼭 필요하다.

생비노동구분이 중요한 또 다른 까닭이 있다. 이 논문의 전개를 통해 더욱 명확해지겠지만, 서비스 부문에 고용된 노동의 위상은 생비노동구분과 관련해 매우 큰 논쟁의 대상이다. 반면 선진국은 물론이고 후진국에서도 이른바 3산업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출되는 사회적 총 노동 가운데 점점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서비스 부문의 성장이 자본주의 경제의 전반적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를테면 이윤율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각종 서비스를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으로 정확하게 분류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런 것들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을 일반적 수준에서 이해하는 데 생비노동구분이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이 구분은 또한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에 특수한 최근의 경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최근의 특수한 경향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금융 서비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약간 잘못 알려진 카지노 경제(casino economy)’를 낳았다. 금융수단의 확산에 따른 중개업무(brokerage)와 은행업무의 확장, 연금기금 뮤추얼펀드 헤지펀드의 보기 드문 성장과 금융시장의 국제적 통합에 추가하여, 이른바 복지국가의 점진적 해체는 보험활동의 거대한 성장을 일으켰다. 이런 최근 경향 때문에 금융부문의 폭발적 확대가 자본축적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려면 금융부문(유통활동의 부분집합이다)에 고용된 노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괄목할 만한 팽창을 볼 수 있는 두 번째 영역은 이른바 세계화 기술진보와 생활양식(lifestyle)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더욱 성장하게 된 소비자 서비스(consumer services). 국내국제 방송의 급증, 관광과 요식업(catering business)의 거대한 성장, 스포츠와 체력운동의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된 새로운 대중소비 형태는 이러한 팽창의 가장 두드러진 보기다. 소비자 서비스의 팽창이 자본축적에 미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이해하려면 생비노동구분에서 서비스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아는 것이 핵심이다.

요즘 소비자 서비스 부분이 팽창하는 것은 사실상 적어도 몇 십 년 동안 확립된 경향의 연속이다. 반면에 사업서비스(business services)의 영역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 자본의 국제화, 사회적 총자본 안에서 분업의 더 큰 진전 등이 결합되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원거리통신 서비스와 전자 통신수단의 급증과 더불어, 상표 만들기(branding) 특허 마케팅 광고 정보관련 서비스 홍보관련 서비스 인적자본 직업교육 컨설팅 법률서비스와 같은 활동은 급속도로 성장하는 특수한 활동부문을 만들어 내었다. 상이한 성격을 가진 이런 활동은 축적과정에 상이한 영향을 미친다. 각각의 특수한 효과를 평가하려면 생비노동의 구분에서 서비스의 위상과, 생산과 유통 사이의 구분 모두를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한다.

또 다른 중요한 최근 경향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서비스로 여기는 것, 즉 의료 교육 주택 등의 제공에서 발생한 구조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사회적 서비스 영역에서,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정부는, 이전에는 주로 공공부문에 속했던 활동을 점차로 민영화하며, 이것과 나란히 최근까지 국가에 의해 공짜로 제공되었던 사회적 서비스를 상품화하는 것을 계속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국가 공무원의 비생산적 노동을 민영화된 사기업 노동자와 공공기관(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상품화됨으로써 사실상 영리단체가 되었다) 종업원의 생산적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 논문의 추상수준에서 볼 때 다른 사정이 달라지지 않을 때, 이런 현상은 잉여가치량을 증가시키고, 이리하여 지금 자본주의에서 관찰할 수 있는 비생산적 활동의 일반적 증가와 이에 따라 생산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잉여가치량의 감소를 상쇄하는 경향으로 작용한다. 민영화 현상은 노동자의 일반적 복지수준 실업 노조해체 민영화된 공공기관 종업원의 위상 등등과 관련된 많은 중요한 문제들, 즉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투쟁의 많은 측면을 야기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이 논문의 범위 밖에 있음을 밝힌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가 지닌 다른 기형적 양상들(이 가운데 일부는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보기를 들면 하청계약의 거대한 증가, 제국주의국가 안에서조차 선대제(先貸制 putting-out system)의 부활, 적기생산(just-in-time) 시스템에 의한 필요 재고량의 획기적인 감소와 이에 따른 보관량의 감소, 고용된 가사노동[가내 하인 등]의 재증가 등등은 모두 생비노동을 구분하는 문제를 명료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요약하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범주는 쓸데없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움직임을 명확하게 아는 데 꼭 필요하다. 다음 절에서는 두 범주를 개념적으로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런 구분은 자본주의 경제에 있는 여러 가지 노동유형을 포괄적으로 분류하는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적 노동 일반

 

생비노동의 구분을 논의하는 것은 모든 생산양식에 적용될 수 있는 생산적 노동을 정의하는데서 출발한다. 이것은 생산적 노동 일반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생산적 노동과 같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힌다. 이와는 반대로, 다음 절에서 보겠지만, 생산적 노동 일반과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 사이의 구분은 자본주의 경제의 움직임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얄궂게도 생산적 노동 일반의 개념을 무시했기 때문에, ‘생비노동에 대한 수많은 논평자가 오류에 빠졌다. 모든 사회경제구성체의 생산적 노동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 관심을 불충분하게 쏟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자체의 모든 경제적 활동이 직감적으로 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되어 버린 것이다.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이 생산적 노동 일반의 부분집합(subset)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해야만, 자본주의에서 생비노동구분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위와 같은 이론적 난국을 피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이 논문의 마지막 절에서 맑스의 접근에 대한 비판들을 다룰 때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다음 인용문을 보면 생산적 노동 일반과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을 구분하는 것이 맑스에게 중요했다는 점이 틀림없다.

자본주의 생산형태를 절대적인 형태, 따라서 영원하고 자연적인 생산형태로 여기는 부르주아적 편협함만이 자본의 관점에서 생산적 노동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어떤 노동이 일반적으로 생산적인가, 또는 무엇이 생산적 노동 일반인가 하는 문제를 혼동할 수 있다. 이리하여 무엇이든 생산하고, 어떤 종류의 결과물이든 가져오는 노동은 바로 그런 이유로 생산적 노동이라고 답하면서 스스로 무척이나 현명하다고 상상한다(Marx 1963: 393).

 

그러나 두 개념을 혼동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생산적 노동 일반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지금 우리가 생산적 노동 일반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고 한다.

사회조직의 역사적 형태가 어떠하든, 사회 구성원과 사회경제적 구성체 그 자체의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재생산을 확보하려면 해내야 할 일정한 활동이 있다. 생산적 노동 일반의 정의는 이런 활동의 서로 다른 유형을 신중하게 구분하는 것을 전제한다. 모든(또는 몇몇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사회가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활동 집합(set)은 다음과 같다. 생산물의 생산 유통 분배(이른바 소득 분배’), 개인적 사회적 소비, 그리고 사회질서의 재생산.

지금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런 활동들은 그것들이 진정으로 노동의 지출을 필요로 하는지 여부에 따라 먼저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두 가지, 즉 생산물의 소비와 분배는 노동의 지출을 필요로 하는 활동이 아니다. 소비는, 그것이 생물학적 욕구에 의한 것이든 역사적으로 발전된 욕구에 의한 것이든, 살아있는 모든 종(species)에 공통되는 하나의 활동이며, 인류의 종차(種差 differentia specifica)인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산물의 분배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사회경제적 구성체에 적합한 생산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직접적 생산자 측의 노동 지출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그 자체가 노동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아니다. 이것의 논리적 증명은, 유산계급자신들의 생존수단을 전적으로 재산수입에서 얻는 한 그들은 생산자가 아니다은 또한 생산물의 분배에서 한 몫을 챙긴다는 점이다. 생산물의 분배는 노동활동의 생산물에 따라 매개되는 사회적 관계와 관련된다.

나머지 두 활동, 즉 유통과 사회질서의 재생산은 더 복잡하다. 엄밀한 뜻에서 유통은 상품형태와 화폐형태 사이에서 다양한 변태(變態 metamorphosis)의 영역까지 포괄한다. 유통은 모든 계급사회를 관통하는 경제생활의 한 측면이었던 활동이다. 그러나 사적 교환과 상품화폐의 유통은 자본주의 생산의 조건 하에서만 완전히 작동한다. 전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는 생산의 압도적인 부분이 상품이 아니라 사용가치의 생산이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중요했던 교환은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적 노동을 사회화하는데 꼭 필요하다. 사회질서의 재생산에 전념하는 활동을 보면, 이것들 또한 원시공산사회와는 대조적으로 계급사회에서 특수한 중요성을 획득한다. 국가는 행정적 군사적 금융적 기구를 통해 그리고 종교단체와 함께 계급지배를 재생산하는 공적 영역으로서, 이런 유형의 활동[사회질서를 재생산하는 활동]이 조직되고 수행되는 장소다.

적어도 지금 유통활동과 사회질서의 재생산 활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일정한 부분은 특수한 종류의 노동을 수행한다는 것이 이제 명백하다. 가장 분명한 보기로, 국세청 또는 지방정부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국가금융기관의 은행원 보험회사 종업원은 그들의 노동일을 산업노동자나 농업노동자 못지않게 고되게 보낸다. 그러나 전자가 지출하는 노동은 후자가 지출하는 노동과 견주어 볼 때 다른 성격을 갖는다. 산업노동자와 농업노동자는 사용가치(즉 개인적 소비를 위한 물품으로서 소비영역에서 일정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 또는 생산적 소비를 위한 투입물로서 생산영역에서 일정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대상을 가리킨다)의 창조에 참여하며, 그들은 자연을 변형시킴으로써 이것을 수행한다. 사실 이것이 생산 활동을 나머지 기타의 사회적 활동들과 구분하는 기준이다. 생산은 특정의 사회형태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개인이 자연을 전유(專有)하는 것이다”(Marx 1973: 87). 다시 말해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연에 대한 사회의 관계를 이어준다. 반면에 주어진 사회적 분업의 맥락에서 유통활동과 사회질서의 재생산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은 특정 사회 안에서 인간들 사이의 역사적으로 정해진 사회경제적 관계들의 집합에서 나오는 업무를 집행할 뿐이다. 생산은 자연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사회에서 인간이 재생산하는 데 꼭 필요한 물질적 요소를 제공하는 단 하나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다른 유형의 활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떤 사회라도 자연으로부터 생계수단을 끌어내지 않고 왕의 칙령(勅令 edict)이나 생명보험계약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생산을 통해서만 이런 생계수단이 확보되기 때문에, 이처럼 특히 유물론적인 의미에서 생산에 참가하는 노동만이 생산적 노동 일반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렇게 인간 활동들이 분류되면(<그림 1>을 보라), 어떤 유형의 활동은 어떤 유형의 사회조직에서든 생산적 노동으로 여길 수 없음이 곧바로 명확해진다. 오로지 사회질서의 재생산 또는 상품과 화폐의 유통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사회적 행위자들은 정의상 비생산적이다. 이런 행위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보기를 들면 성직자와 기타의 종교적 관료, , 대통령과 정치인, 국가의 행정기관과 금융기관의 공무원, 판사, 변호사와 모든 법률 전문가, 장군과 군인, 경찰관과 교도관 등등은, 그들이 노동에 종사하는 한, 모든 유형의 사회조직에서 비생산적 노동자다.

 

 

<그림 1>

인류의 활동들

↙ ↘

노동(Labour)


비노동(Non-Labour)

↙ ↘ ↓

생산 유통 그리고 생산물(소득)의 분배와

사회질서의 재생산 개인적 사회적 소비

생산적 노동 일반 비생산적 노동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

 

생산적 노동 일반의 정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관계들 하에서 생비노동구분을 고찰하는 데 출발점을 제공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정해진 생산양식으로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상품생산과 잉여가치 생산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이 특수한 구성체 안에서 생산은 오직 자본의 자기증식, 말하자면 직접적 생산자인 임금노동자가 창조하는 잉여가치의 생산과 전유를 통한 자본의 확장을 위해 수행될 뿐이다.

따라서 생산과정에서 소모되는 노동의 구체적 성격에 의거해 생산적 노동을 정의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맥락 안에서는 분명히 불충분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결과는 단순히 사용가치가 아니라 특별히 교환가치와 잉여가치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은 단순한 노동과정이 아니라 훨씬 더 결정적으로 가치증식 과정, 자기 확장 과정이며, 후자는 전자를 자신의 필요조건으로 포섭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직접적인 목적과 진정한 생산물은 잉여가치이다. 그래서 노동 또는 노동력의 소유자가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창조할 때에만, 노동은 생산적이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생산적 노동자다. 즉 단 하나의 생산적 노동은 자본의 자기증식을 위해 생산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소비되는 노동이다(Marx 1976a: 1038).

 

따라서 자본관계의 특수한 성격은 자본의 관점에서 생비노동을 구분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다. 다시 말해 일정한 생산양식의 맥락 안에서 생산적 노동은 오로지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 따라 정의될 수 없다. 이 일반적인 정의와 더불어, 그 생산양식에서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에 고유한 성격을 고려해야만 생산적 노동의 정의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단순한 정의는 오직 출발점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 구분이 더 구체적인 현상에 적용되자마자 많은 문제와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정의는 생비노동의 구분을 적절히 논의하는 데 꼭 필요한 토대다. 이 정의는 또한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왜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이 생산적 노동 일반의 부분집합인지를 곧 보여준다. 잉여가치가 직접적 생산과정에서만 생산될 수 있고 다른 출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자마자, 오직 생산적 노동 일반, 즉 자연의 합목적적 변형과 전유를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달리 말해, 생산적 노동 일반이라는 자격은 노동이 자본을 위해 생산적인 것의 필요조건이다(그러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충분조건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잉여가치의 생산이라는 기준은 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생비노동구분을 모색하는 우리에게 일정한 지침을 제공해준다. 몇몇 유형의 노동은 이런 구분 자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첫째로 오직 사용가치를 생산하는데 쓰인 노동, 즉 상품의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노동은 자본의 관점에서 생산적 노동이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잉여가치의 생산은 상품의 생산과 교환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자급자족 농가의 노동이나 가사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다.

둘째로 잉여가치의 생산이라는 기준은 또한 소상품 생산자의 노동을 배제한다. 소상품 생산은 정의상 생산수단을 소유한 직접생산자가 그들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 생산물을 교환하는 것에 근거를 둔다. 잉여가치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되고 이 특수한 상품의 구매자가 그것의 독특한 사용가치(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능력)를 소비할 때에만 생산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판매에 의거한 노동만이 생산적 노동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공예인(手工藝人)과 소농(小農)의 노동은 자본주의의 생비노동을 구분하는 범주에 들어오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점점 더 오늘날 자본주의의 하나의 특징으로 되고 있는 아웃소싱( outsourcing)의 다양한 방법 중에서, 자본주의 태동기의 선대제(先貸制 putting-out system)’처럼 집에서 일하는 생산자(주로 여성과 아동)의 노동조직에 의거하는 생산방법은 자본주의 형태 그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 노동수단과 원료가 자본가에 의해 제공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렇게 지출된 노동은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생산적이지 않다. 반면 아웃소싱의 또 다른 형태인 하청(subcontracting)은 보통 자본주의 기업(비록 작은 기업이라 하더라도)의 활동에 의거하며, 여기에 참여하는 노동은 수행하는 활동의 구체적 유형에 따라 생산적일 수도 있고 비생산적일 수도 있다(아래를 참조하라).

그러나 노동력의 판매도 생산적 노동을 가늠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비노동을 구분하는 문제에 부딪친다. 이것을 위해서는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과, 소득(revenue)과 교환되는 노동을 구분해야 한다. 사실 생산적 노동에 대한 최초 논쟁은 이 구분을 둘러싸고 18세기 말과 19세기 내내 행해졌다. 이 구분은 그 복잡한 논쟁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도 자본 소득 순환의 일반 공식을 사용함으로써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자본순환 공식(M - C ... P ... C' ... M')은 자본의 자기 확장 과정(가치증식과정)의 가장 일반적 표현이다. 이 일반적 표현 틀 안에서, 상품(C)으로서 노동력이 M(자본으로 기능하는 화폐)의 일부와 교환된다는 것, 즉 노동력이 자본과 교환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다음 (P로 표현되는) 생산과정에서 노동력은 자기의 본래 가치의 등가(equivalent)를 재생산할 뿐 아니라 자본에 의해 잉여가치로서 전유되는 새로운 가치량을 생산한다.

이것이 노동력과 자본 사이의 관계(노동을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으로 변형시킨다)의 유형이다. 맑스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은 자본으로서 화폐즉 본질적으로 자본인 화폐이며, 자본으로 기능하게끔 예정된 화폐이다와 직접적으로 교환된다. 그러므로 생산적 노동은 노동자를 위해서는 미리 결정된 노동력의 가치를 재생산할 뿐이지만, 생산적 노동은 가치창조 활동으로서 자본의 가치를 증식시키고 이렇게 창조되어 자본으로 변형된 가치에 노동자를 대면시킨다. 대상화된 노동과 살아있는 노동 사이의 특수한 관계이것이 대상화된 노동을 자본으로 전환시킨다살아있는 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변화시킨다(Marx 1976: 1043).

 

그러나 이것이 노동력과 화폐 사이의 유일하게 가능한 교환의 유형은 아니다(바꾸어 말해 이것이 노동력 판매의 유일하게 가능한 유형은 아니다). 생산의 다음 기(period)를 고찰하면, 자본이 전유한 잉여가치(M' 빼기 M)는 이제 자본으로 다시 전환된다. 그러나 생산된 잉여가치 전체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잉여가치의 일정한 몫을 이자 상업이윤 지대 등의 형태로 다른 자본가와 지주가 가져가는 것을 빼고도, 잉여가치의 일부는 산업자본가의 소비를 위한 소득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이제 이 소득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될 수 있다. 온갖 소비재에 지출할 수도 있고, 그리고/또는 자본가와 자기 가족이 더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노동자(가내 하인 요리사 운전기사 정원사 등)를 고용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자본가의 소득이 상품과 교환되며, 후자의 경우에는 노동력과 교환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화폐와 (상품인) 노동력 사이의 두 번째 유형의 교환을 보게 된다(Marx 1976a: 1041). 그러나 이런 유형의 교환은, 자본과 노동력의 교환과는 대조적으로,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개인적인 서비스의 형태로 자본가와 가족에 의해 소비된다. 노동의 생산물은 화폐로 전환될 수 있는 (잉여가치를 지닌) 상품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력과는 달리, 소득과 교환되는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비생산적이다. 이리하여 셋째로 자본주의 하에서 오직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력만이 생산적 노동의 원천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특수한 구분이 고전파 정치경제학에서는 왜 그리 중요했는가(애덤 스미스에게는 특히 그랬고 리카도와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다)는 곧 알 수 있다. 가내 하인의 사용은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에는 매우 광범했다. 더욱이 그것은 초기 자본주의의 검소한 공장주보다 지주와 귀족 사이에 훨씬 더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이 구분이 산업 부르주아지를 대신해 지주를 공격하는 도구로서 특히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때 이후 상황은 다소 복잡해졌다. 가내 하인의 사용은 아직도 후진국의 구조적인 사회현상이지만 제국주의 모국에서는 최근까지 크게 감소했다. 물론 최근에는 실업과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가내 서비스에 고용된 노동인력의 현재 규모가 어느 정도이든,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과, 소득과 교환되는 노동의 이런 구분은 지금부터 논의할 다른 문제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대단한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과, 소득과 교환되는 노동의 구분이 생비노동의 차이를 전부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도달한 지금 단계에서 생산적 노동의 기준은, (1) 상품생산, (2) 노동력의 판매, (3) 소득에 대해 노동력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대해 노동력을 교환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조건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해, 이 세 조건을 함께 만족시키지만 노동력의 판매가 잉여가치의 생산을 야기하지 않아 노동이 생산적 노동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일련의 중요한 사례들이 있을 수 있다. 이 역설의 비밀은 물론 생산과 유통의 구분에 있다.

자본의 순환(M - C ... P ... C' - M')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순환을 완수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자본은 몇 개의 변태 또는 형태변화를 겪어야 한다. 가장 먼저 자본은 노동력과 불변자본 요소를 구매할 준비를 갖춘 화폐자본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자본 요소를 구매한 다음, 자본은 생산자본으로 전환되어 노동과정과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의 기초로 즉각 역할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자로부터 잉여노동을 착취함으로써 더 큰 가치를 지닌 상품이 생산된다. 그 뒤 이 상품은 시장에 내던져 진다. 시장에서 자본은 상품자본으로 나타난다. 이 상품이 시장에서 팔리자마자, 전체 과정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며, 자본은 다시 한 번 화폐자본물론 착취한 잉여가치량 만큼 확대된 규모이고 이 과정을 새로 시작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으로 전환된다. 증식하기 위해 자본은 이런 전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맑스는 하나이자 같은 자본의 이런 현상을 자본의 기능형태들(functional forms)’이라고 한다.

이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요점은, 이런 과정의 한 국면(局面 phase), 즉 생산자본의 국면에서만 잉여가치가 생산된다는 점이다. 자본의 이런 끊임없는 변태의 다른 국면들에서는 오로지 상품과 화폐 사이의 형태 변화만 있을 뿐이므로, 가치나 잉여가치의 창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체 과정의 이런 특수한 국면들에서 수행되는 업무들은 생산 그 자체에 속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의상 비생산적인 유통 업무다. 현실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노동자가 생산적 업무와 비생산적 업무를 모두 수행할 수도 있으며, 이리하여 실증단계에서 측정의 어려움이 생긴다. 그러나 개념적인 수준에서는 두 활동 유형의 구분은 분명하다. 더욱이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자본들 사이에 일정한 유형의 분업이 생겨 실증적 측정 그 자체가 단순화되고 있다[예컨대 유통전문 기업이 생긴다].

역사적인 발전과정에서, 동일한 자본이 처음에는 다양한 기능적 형태로 수행한 상이한 기능들에 상이한 자본단위들이 점점 더 대규모로 전문화하고 있다. 이리하여 화폐자본 기능의 일정한 부분은 이자 낳는 자본(상업은행 투자은행 중개회사 모기지회사 보험회사 재보험회사 등), 그리고 상품자본 기능의 일정한 부분은 상업자본(도매상 백화점 기타 대형 아울렛 소매상 등)이 떠맡고 있다. 이런 업무들이것들은 자본 재생산의 전체과정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부분이다을 수행하기 위해 이 자본분파들은 임금 노동자를 고용해야 한다. 여기에 즉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이런 노동자는 생산적 노동자인가? 그들의 노동은 생산적인가? 이 논문에서 제시되는 분석 전체는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이런 노동자가 해내는 활동은 순전히 유통활동이다. 따라서 바로 그런 활동이 지닌 특성 탓에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로 불생산적(nonproductive)이다. 더욱이 자본순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이미 이런 노동자가 유통 업무에 종사하기 때문에더 정확히는 그들이 유통 업무에 종사하는 정도까지는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은 당연하다. 즉 자본이 유통 영역을 위해 고용한 노동자와 그들의 노동은 비생산적이다. 맑스에 따르면:

 

그 자체로서는 비생산적이지만 그럼에도 재생산의 하나의 필수적인 계기인 어떤 기능이, 분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의 부업에서부터 소수의 사람들의 전업[또는 특수산업]으로 전환되더라도, 기능의 성격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자본론? II: 151).

 

유통업무가 재생산의 전체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 업무를 생산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어떤 유형의 사회조직에서 어떤 업무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것들이 생산적이라는 것의 완전한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잊는 것 같다. 경찰관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고 자본주의 국가에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유통활동이 생산적이라고 여기는 논평자들도 포함하여) 아무도 그들을 생산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엄격한 의미에서 유통활동은 생산 일반에서 분리할 수 없는 구성요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주어진 조건들과 자본주의의 단짝인 일반화된 상품생산 하에서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유통이 자본주의에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교환의 물신화된 형태들, 이를 테면 화폐 신용 등이 자본주의 경제에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잉여가치의 생산에 근거를 둘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은 어떤 기간에 생산된 사회의 물질적 부()의 일정 몫만을 잉여가치로 전유할 수 있다. 어떤 사회라도 부의 형태를 화폐로 그리고 다시 상품으로 바꾸는 것을 통해, 그 사회의 부를 증가시키고 그럼으로써 분배될 생산물의 양을 증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관계가 물신화되었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에 지출되는 노동은 사실상 자본주의에 고유한 낭비성에서 비롯된 생산의 추가적인 사회적 비용이다. 이것은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생산된 사회적 잉여가 유출되는 것과 다름없다. 맑스는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매매담당자는 C - MM - C라는 활동에 자기의 노동력과 노동시간을 지출한다. 그가 이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방적이나 환약 제조로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왜냐하면 재생산과정 그 자체가 비생산적 기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노동하지만 그의 노동의 내용은 가치도 생산물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생산상의 공비(空費 faux frais)에 속한다. 그의 유용성은 비생산적 기능을 생산적 기능으로, 또는 비생산적 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으로 이전시킴으로써 그런 전환이 달성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적일 것이다(?자본론? II: 152).

 

유통의 어떤 측면(이를테면 자본을 더 빨리 회전시키는 것)이 생산의 전반적인 증가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생산 증가의 특수한 자본주의적 표현은 생산에 고용된 노동자가 더 빠른 자본회전 덕택에 생산하게 된 추가적인 잉여가치량이다. 따라서 이 추가적인 잉여가치량은 생산노동자의 노동의 산물이다. 이 추가적인 잉여가치량을 생산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유통영역 노동자의 생산성의 결과간접적으로나마라고 말한다면, 잉여가치의 하나의 동일한 증가가 두 개의 다른 노동자 집단의 이바지로 돌려질 것이므로, 우리는 중복계산이라는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것이다. 실제로 벌어진 상황은 다음과 같다: 유통 노동자는 그들의 특수한 활동을 통해 비생산적인 유통업무로부터 일정한 자본액을 유리시켜 이 추가적인 자본액을 가치증식에 이용할 수 있게 했을 뿐이다(이것 자체가 유통 업무는 비생산적이라는 증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특수한 이바지는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총화폐액을 증가시킨 것이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유통 노동자의 활동을 생산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생산성이라는 신비한 힘을 대상화된 노동과 자본의 물신화된 범주에 귀착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자본의 더욱 빠른 회전은 주어진 기간에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데 사용될 자본이 더 많아진 것을 가리킨다. 추가적으로 창조되는 잉여가치는 전적으로 이 생산 노동자의 노동의 산물이다. 이것은 자본의 회전이 더욱 빨라지지 않았을 경우에 창조된 잉여가치가 생산 노동자의 노동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다.

생산영역과 유통영역 사이의 위와 구분에 대한 결론을 말하기 전에, 짤막하게 두 마디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첫째로 운수와 보관(transportation and storage) 활동은 결코 유통영역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활동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생산의 어떤 형태 하에서도, 진일보한 사회적 지리적 분업에 의거하고 있는 사회경제 구성체에서는 더 더욱 생산과정 자체에 꼭 필요한 요소다. 지구의 다른 곳에서 생산된 상품이 사용될 곳으로 운송되지 않는다면, 어떤 소비자도 그 상품을 소비할 수 없으며, 어떤 생산자도 그것을 투입물로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운송은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마지막 단계인 , 운송부문에 고용된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다(이 노동이 자본에 의해 고용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순전히 유통적인 동기(보기를 들면 투기나 정부 규제의 차이를 이용한 재수출)에 의한 운송과 보관 활동은 생산과정과 관련이 없으며, 거기에 고용된 노동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둘째로 자본이 유통영역에 고용한 노동자는 이 자본분파로 하여금 이윤을 챙기게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사실 이런 측면은 유통 노동자가 그들 각자의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실제로는 이 자본가가 얻는 이윤(상업이윤과 이자)은 생산영역에서 생산된 총 잉여가치의 일부일 뿐이다. 더욱이 유통 자본이 고용한 노동자의 임금조차 직접적 생산과정 안의 잉여가치로부터 지불된다.

생산자본과 유통자본의 구분은 마지막으로 생산적 노동의 정의를 위한 충분조건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생산영역에 투하된 자본과 교환되는 모든 노동은 자본을 위해 생산적이다. 이제 우리는 일련의 구체적인 구분들, 이를 테면 사용가치 생산 대 상품 생산, 상품 교환 대 노동력 교환, 소득과의 교환 대 자본과의 교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통자본과의 교환 대 생산자본과의 교환을 거쳐,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적 노동에 대한 우리의 원래의 정의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에 이르렀다.

비생산적 노동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생산적 노동을 정의하는 이런 식의 절차는 다른 차원의 기준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혼동을 피한다는 장점이 있다. 잉여가치 생산이라는 기준은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적 노동을 논의할 때 절대적인 지침이다. 그 밖의 기준들, 보기를 들면 소득과의 교환 대 자본과의 교환, 또는 유통 대 생산은 상이한 차원의 것이다. 그 기준들 각각은 어떤 것도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포괄적인 정의를 위한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불완전할 따름이다.

앞의 논의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구체적인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기술적 관계들 아래에서 수행되는 노동을 분류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까지의 주장을 요약하는 <그림 2>는 사회의 총노동의 대부분이, 총체적인 시스템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을 위해 생산적 노동을 수행하지 않으며 따라서 축적과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림 2>생비노동구분 문제에서 개념적인 명료성을 얻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준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안에는 우리가 논의하지 않은 다른 범주의 노동자가 아직도 존재한다. 이런 범주들 가운데 두 가지가 그들의 규모가 크다는 점에서, 그리고 생비노동구분에서 그들이 어디에 속하는가에 관해 이론적으로 매우 혼란스럽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하나는 서비스 부문의 노동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고용된 임노동자다. 우리는 이제 이 두 범주들을 차례로 살펴보겠다.

 

 

서비스의 문제

 

생비노동의 구분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가 서비스를 다루는 문제였다. ‘생비노동구분 문제의 기타의 측면들에서 완벽하게 합의한 논평자들도 바로 이 서비스측면에서는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2>

노동

↓ ↘

사용가치생산 상품생산

(자족적 농업 가사 등)

↙ ↘

소상품생산 임노동에 의거한 생산

(수공예인 소농 등)

↙ ↘

소득으로부터 지불받는 임노동 자본에 의해 고용된 임노동

(가내 하인 요리사 정원사 운전기사 경호원 등)

↙ ↘

유통영역의 노동자 생산영역과 운수영역의 노동자

(은행 보험회사 모기지회사의

종업원들 상업노동자)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

 

 

 

서비스의 위상에 관한 혼돈과 오해의 대부분이 서비스개념 자체의 모호함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곧 살펴보겠지만, 이 개념은 매우 다른 두 가지 유형을 통칭한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오류와 혼란이 생긴다. 사실 이 문제는 애덤 스미스로까지 소급하며, 문제를 해명하려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스미스의 저작에는 생산적 노동에 대한 쉽사리 구분할 수 있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래에 인용되어 있는 첫 번째 정의는 전형적인 스미스적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강조한다:

 

제조공의 노동은 일반적으로 그의 작업 대상인 원료의 가치에다 자기 자신의 유지비의 가치와 고용주의 이윤의 가치를 부가한다. 반대로 하인의 노동은 아무런 가치도 부가하지 않는다. 비록 제조공의 임금은 고용주로부터 선대(先貸)되지만, 임금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그의 노동이 가해진 대상의 증대된 가치의 형태로 이윤과 함께 회수되기 때문에, 사실 고용주는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인의 유지비는 결코 회수되지 않는다. 다수의 제조공을 고용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지만, 다수의 하인을 유지하는 사람은 가난해진다(?국부론?(): 364).

 

 

그러나 스미스의 두 번째 정의는 생산적 노동의 내재적 성질을 강조한다:

 

제조공의 노동은 어떤 특정 대상이나 판매 가능한 상품에 고정되어 체현되고, 그 상품은 노동이 끝난 뒤 적어도 얼마 동안은 존속한다. 그 상품은 말하자면 필요한 어떤 다른 경우에 사용되기 위해 저장되고 비축되어 있는 일정량의 노동이다. 그 노동의 대상, 또는 마찬가지지만 그것의 가치는, 나중에 필요하다면 최초에 그것을 생산했던 것과 같은 양의 노동을 부릴 수 있다. 반대로 하인의 노동은 어떤 특정 대상이나 판매 가능한 상품에 고정되어 체현되지 않는다. 그의 서비스는 일반적으로 수행되는 바로 그 순간 사라지며, 나중에 동일한 양의 서비스를 획득할 수 있는 어떤 흔적이나 가치를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국부론?(): 364-365).

 

맑스는 물론 두 번째 정의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즉 노동 생산물의 물질적 측면 또는 노동 그 자체의 구체적 내용은 생산적 노동의 정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물론 그 노동이 자연을 전유함으로써 사용가치를 생산하기만 한다면):

 

 

노동을 생산적 노동이라 부르는 것은 그 노동의 결정적 내용, 그 노동의 특별한 효용이나 특수한 사용가치와 전혀 관계가 없다. 같은 종류의 노동이 생산적일 수도 있고 비생산적일 수도 있다(Marx 1963: 401).

 

 

문제되고 있는 노동이 욕구를 충족하려고 자연의 특수한 측면을 변형시키는 한, 즉 이런 행위가 생산일반의 한 측면인 한, 이런 과정에 종사하는 노동은, 만약 자본에 의해 고용된다면, 생산적 노동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통 서비스로 간주되는 행위들, 보기를 들면 교육 의료 요리 예술활동 이발 등도 잉여가치 착취의 기반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생산적 노동의 존재 기반이 될 수 있다. 맑스는 말한다: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 또는 자본의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이다. 물질적 생산 분야 밖의 예를 든다면, 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두뇌를 훈련시킬 뿐 아니라 학교 소유자의 치부를 위해 헌신하는 경우에만 생산적 노동자다. 학교 소유자가 자기의 자본을 소시지 공장에 투자하지 않고 교육 공장(teaching factory)에 투자했다는 사실은 여기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자본론? I(): 684).

 

 

스미스의 두 번째 정의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유효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스미스가 두 번째 정의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서비스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런 혼동을 지니고 있는 핵심적인 문장을 되짚어 보자.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대로 하인의 노동은 어떤 특정 대상이나 판매 가능한 상품에 고정되어 체현되지 않는다.” 스미스는 여기서 두 개의 다른 사항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특정한 사회관계에 대해 말한다. ‘하인이라는 개념은 문제의 노동자가 특정한 관계 안에서 주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주인의 소득에 대해 자기의 노동력을 교환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스미스는 문제의 노동자의 생산물의 성격, 즉 하나의 서비스가 하나의 대상으로 체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말한다. 그의 정식화는 이와 같은 매우 상이한 두 개의 사항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치 하인만이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그리고 마치 하인은 서비스만을제공하는 것처럼. 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인도 물질적 생산물을 만들 수 있다. 예컨대 부자는 전속 재봉사를 고용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재봉사는 잉여가치를 생산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의 노동의 생산물이 무형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생산물이 상품으로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런 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서비스가 하인뿐 아니라 자본가에 의해 고용된 임노동자에 의해서도 제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점점 더 확대하는 ‘3차산업화(tertiarization)’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점을 확실히 더 잘 알고 있다.

불행히도 오류는 바로잡기 어렵다. 그 뒤에도 많은 맑스주의자들은 서비스라는 용어가 지닌 이런 두 가지 뜻을 자주 혼동했다. 그런 혼동 탓에 그들은 서비스에 고용된 노동을 생산적인 노동으로 여길 수 없었다.(맑스가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하나의 두드러진 보기를 풀란차스의 생비노동논의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비생산적 노동으로 여길 것은 서비스 형태를 취하는 노동이다. 이 노동의 생산물과 활동은 사용가치로서 직접적으로 소비된다. 노동은 자본과 교환되지 않고 수입 또는 소득과 교환된다(Poulantzas 1975: 213).

 

 

풀란차스가 스미스와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은 명백하다. 즉 그는 노동생산물의 비물질적 성격과, 임금이 소득에서 지불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특수한 사회관계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사회관계는 지출되는 노동이 비생산적임을 곧 암시하며, 이 그릇된 필연적 연관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노동이, 심지어 이런 노동이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지출되는 경우에도, 비생산적이라고 추론하게 한다.

혼동의 근원을 밝혔으므로 이제 서비스의 개념을 엄격하게 정의해보자. 첫 번째 지적할 점은 가내 하인 등의 경우 화폐(임금)와 교환되는 것은 노동력 그 자체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서비스(사립학교 호텔 등)의 경우 화폐와 교환되는 것은 노동의 산물인 서비스이지 노동력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서비스는 어떤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이다.

첫 번째 지적을 보강하는 두 번째 관점은, 노동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투입물(inputs)이 서비스 생산에 참가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발 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이발사의 노동시간뿐 아니라 가위의 시간’, ‘의자의 시간’, ‘거울의 시간등등을 구매한다. 즉 수많은 물질적 투입물 없이는 서비스가 생산될 수 없다. 셋째로 투입물 측면에서뿐 아니라 산출물 측면에서도, 서비스가 오직 노동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서비스라고 불리는 것들은 종종 유형적 품질의 우수성에 체현되어 있다. 예컨대 요리방식인 쇠고기 스트로가노프(beef Stroganov), 호텔의 청결한 침대, 더러운 양복 대신 세탁된 양복 등등.

따라서 서비스를 정의하는 것은 노동력이나 노동자의 노동을 구매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상품, 즉 노동 생산물의 물질적 형태 또는 비물질적 형태와 상관없이 생산과 소비의 동시성(simultaneity)이다.

팔리는 것은 상품이기 때문에, 소비의 관점은 생비노동구분 논의에 부적절하다. 올바른 관점인 생산의 관점을 택하면, 서비스 노동자의 노동력은 고객(소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비스의 생산을 조직하는 자본가에 의해 구매된다는 것(따라서 노동자의 임금도 자본가에 의해 지불된다는 것)과 이 노동자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다. 이렇게 지출되는 노동은 명백히 생산적 노동이다.

이 모든 논의는 소비자 서비스(물론 신용카드와 같은 금융 서비스들은 제외하고)의 최근 성장이 결코 사회적 총노동에서 비생산적 노동 몫이 증가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업 서비스의 경우에는 더 복잡하다. 이들 각각의 위상은 해당 서비스가 생산적 기능과 관련된 것인지 유통활동과 관련된 것인지에 달려 있다. 전자의 분명한 예로는 인적자본과 훈련 서비스(그러나 임시직이나 전문 인력 소개업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일부 정보 서비스를 들 수 있다. 후자의 가장 명쾌한 보기로는 물론 마케팅 광고 금융 컨설턴트 서비스들을 들 수 있다.

 

 

국가 공무원

 

자본주의 세계의 제국주의 지역과 종속된 저개발 지역 모두에서 발생한 국가부문의 장기에 걸친 확장은 국가 공무원의 노동의 성격에 대한 평가를 긴급한 과제로 요구한다. 다행하게도 우리가 생비노동구분을 위해 지금까지 제시한 기준들은 이 문제를 확실하게 평가하기 위한 충분한 기초를 제공한다.

국가 공무원의 노동의 성격에 관한 어떤 논의도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 활동의 다양성을 짚어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의 당면 목적을 위해서는, 국가의 다양한 활동들은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 전적으로 사회 질서의 재생산에 관련된 활동들이 있다. 예컨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행정 관료들, 군인 법원 경찰 교도소의 활동 등이다. 둘째의 활동유형으로 국가(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소유한 법인과 회사의 틀 안에서 생산 활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가 활동의 점점 더 큰 부분이 사회적 서비스, 즉 교육 보건 주택 등 이른바 복지국가와 관련된 서비스의 제공을 담당하고 있다.

생산적 노동의 정의를 위한 우리의 위의 기준들에 따르면, 이런 세 영역(물론 더 구체적 수준으로 들어가면, 이 세 영역 가운데 어느 하나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 경계선 상의 복잡한 경우들에 부닥칠 것이지만)의 국가 공무원의 노동의 성격을 밝히기란 매우 쉬운 일이다. 사회 질서의 재생산에 직접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은 정의상 비생산적 노동자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들의 노동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생산적이 아니다. 그들의 노동은 인간의 욕구를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의 어떤 측면을 사용가치로 변형시키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수행하는 업무는 계급착취와 성 인종 억압에 의거한 대립적인 사회를 유지 재생산하는 데 봉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경우 이렇게 고용된 사람들의 임금과 봉급은 따라서 계급사회의 공비(空費)로 단순히 여겨야 한다.

둘째 종류의 국가 공무원의 노동의 성격을 평가할 수 있으려면, 사적 자본에 의해 조직되는 생산과 국가부문 안에서 조직되는 생산 사이에 잉여가치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다른 측면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라도)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기업은 잉여가치를 착취할 목적으로 노동과정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이다. 국가기업의 행태를 사적 자본주의적 기업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현상들, 보기를 들면 생산물의 가격에 대한 정치적 개입, 정치적 목적을 위한 과다고용, 만성적 손실 등등은 국가기업들이 임노동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이라는 사실(이렇게 생산된 잉여가치가 국가기업에 의해 착복되든 다른 자본가들에 의해 착복되든)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이렇기 때문에, 생산영역에서 국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는 사적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생산적 노동자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세 번째 범주의 경우 다루기가 가장 어렵다. 한편으로, 사회적 서비스들은 (보통) 시장에서 상품으로 팔리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나라의 국가교육제도나 국가의료서비스는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여길 수 없다. 따라서 거기에 고용된 노동자는 생산적 노동자로 분류할 수 없다. 다른 한편, 교사 의사 간호사와 기타 보건노동자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가치(서비스)를 생산하며, 이런 의미에서 기존 사회질서의 재생산이 유일한 업무인 임노동자(교도소 간수나 징세관 등)과 다른 위치에 있다. 따라서 후자의 노동은 (생산적 노동 일반의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정의상 비생산적이지만, 전자(예컨대 보건노동자 등)의 노동은, 그들의 노동이 조직되는 사회적 관계의 성격에 따라, 조건부로 비생산적이다. 즉 징세관의 노동은 어떤 유형의 사회조직 하에서든 생산적으로 간주될 수 없으나, 보건노동자의 노동은 그것이 지출되는 상황에 따라 생산적일 수도 있고 비생산적일 수도 있다. 생산적인 경우는 의료 서비스가 시장에서 팔리도록 조직되어 상품으로 전환하고, 이에 따라 병원의 소유자가 이윤을 얻는 경우다. 이런 상황에서는 병원 진료소 등은 자본주의적 기업이 되며 보건노동자의 노동은 생산적으로 된다. 이 문제는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서비스 부문의 노동자가 행하는 노동의 성격을 정의하는 것과 동일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고용자의 상이한 성격(국가 대 사적 기업)이라는 유일한 차이는 지금의 문제에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최근 경향에 관해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이른바 복지국가에 대한 광범한 공격으로 사회적 서비스가 민영화되는 경우, 수혜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를 생산하는 국가 공무원의 비생산적 노동이 개인병원 사립학교 등에 고용된 노동자의 생산적 노동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적 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요금 수업료 등을 기초로 제공되는 전환에 대해 말하자면, 해당 요금이 해당 서비스의 시장가격, 그림자 가격(shadow price)에 근접할수록, 문제의 병원 학교 대학 등은 자본주의적 기업에 더욱 가까워지고, 그 시설의 종업원들은 더욱 더 생산적 노동자로 된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그 다음에는 실증적 방법론에서 어떤 기준을 적용할까 하는 문제가 남지만, 이 논문의 맥락에서는 이 기준들 사이의 선택을 다룰 필요는 없다.

요컨대 사회적 서비스 공급을 담당하는 임노동자의 노동의 위상은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나라마다 그리고 시기마다 다를 수 있다) 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에 관한 몇 가지 오해

 

논문의 처음에서 밝혔듯이 생비노동에 관한 문헌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우리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우리의 목적에서는 맑스의 생비노동개념에 대한 주요한 유형의 비판들을 살펴봄이 더욱 적절한데, 왜냐하면 맑스의 개념이 바로 우리의 분류 시도의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맑스의 개념을 겨냥한 다양한 유형의 비판들을 모두 다루려면 하나하나 자세하게 대응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서는 다른 하나의 논문이 필요할 것이다. 대신 이 절에서 하려는 것은 논쟁이 집중되었던 가장 중요한 두 주제, 즉 유통활동의 성격 규정과, 자신들의 활동이 잉여가치량과 잉여가치율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노동자의 위상 문제를 다룰 것이다. 비판자들이 제기한 논점의 대부분(모두는 아니지만)은 직간접적으로 이 두 주제와 관련되기 때문에, 이 두 주제를 검토하는 것은 우리에게 복잡난해한 논쟁의 가장 민감한 측면을 논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 주제들에 대해 비판자의 다수가 공통된 입장을 취하고 있으므로(물론 자세한 부분에서 논거는 다를 수 있겠지만), 특정 저자들을 언급하지는 않겠다.

유통활동의 문제부터 보자면, 이 문제에 관해 많은 비판자들은 유통활동으로 보통 간주되는 것이 성격상 생산 활동과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비생산적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를 입증하려고 제시한 주장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주장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첫 번째 주장은 유통 노동자가 사용가치 생산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 드는 것은 판매원이다. 그들은 상품을 분류 진열하고 소비자에게 상품에 대한 지식과 안내서를 제공하는 등의 업무를 한다. 이 주장은 생산과 유통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어떤 활동을 유통활동으로 넣어야 할 것인지를 오해한 데에서 비롯된다. 소비자가 소비대상을 얻게끔 하는 과정에 꼭 필요한 어떤 활동도 생산적 활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이것은 맑스 자신도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러나 이 활동은 생산의 지점과 소비자 사이의 사슬에 꼭 필요한 연결 고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활동은 예컨대 운송과 마찬가지로 생산과정의 일부. 유통영역은 전적으로 상품과 화폐 사이의 형태변환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로 제한된다. 개념적 수준에서, 판매활동 중 생산자에서 소비자까지의 사슬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측면들은 순수유통활동과 매우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다. 가장 적절한 예로 아마 출납원(cashier)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활동은 판매와 구매와 관련되며, 생산과 소비 사이의 사슬에서 필수적인 연결고리는 결코 아니다. (사회적 부기bookkeeping에 필요한 기록은 다른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 예컨대 소비자들이 스스로 사용하는 컴퓨터를 통해). 출납원은 물론 빙산의 일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상사(商社)의 직원들의 기능 중 상당한 부분이 순수유통활동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실증적 수준에서 상사의 생산 활동과 유통활동 사이의 비율을 구할 때 약간의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나, 개념적 수준에서는 그 구분은 명쾌하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현재 목적에서 필요한 전부다. (신중한 독자라면, 유통 자본에 의해 고용된 노동자의 위상에 대해 위에서 논의할 때 우리는 이런 노동자가 유통 업무에 참여하는 정도까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 것에 이미 주목했을 것이다.)

유통활동을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두 번째 주장은, 유통활동이 모든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므로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뜻한다는 것이다. 전제와 결론 사이의 약한 관계는 접어두면(우리는 아래에서 이 문제를 다른 맥락에서 다룰 것이다), 이런 보편성 주장은 사실 생산과 유통 사이의 구분에 관한 오해(첫 번째 주장을 다룰 때 우리가 지적했다)를 더 일반적이고 이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통이 모든 유형의 사회에서 필수적이라는 생각(엄밀히 말해 이런 진술은 분업이 발달한 사회로 제한되어야 한다)은 이런 사회에서는 다양한 생산 분야들 사이에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필연적으로 사용가치가 이동할 필요성이 생긴다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와 분배형태에 불변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지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사용가치의 흐름이 모든 사회에서 반드시 상품의 구매와 판매의 형태를 취한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중앙계획의 효율성과 바람직함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든, 중앙계획이 경제활동의 다양한 분야들 사이의 상호관계의 실현가능한 대안 형태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오류는 자명하다. 즉 이런 유형의 비판은 사용가치의 유통과 상품 화폐 자본의 유통을 정당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혼동하고 혼용한다. 전자는 확실히 모든 발달한 사회경제구조에서 생산에 필수적인 측면이지만, 후자는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것이며 더 중요하게는 다양한 분야들과 소비자들에게 물자(supply)를 제공해주는 것 이상을 담당한다. 사실 후자의 유통활동을 순수한 형태에서 고찰하면, 그 유통활동은 오직 형태변환(화폐를 상품으로 그리고 상품을 화폐로)을 전담하는 전혀 다른 유형의 활동이다.

바로 앞의 주장이 유통은 모든 종류의 발달한 사회구성체에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생산과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함을 역설하는데, 다른 주장은 맑스적 의미의 순수유통(즉 상품 화폐 자본의 유통)은 자본주의 경제에 고유한 것이라는 사고는 받아들이지만, 유통을 생산 활동의 범위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규범적이고 평가적이며, 도덕적이기 때문에(어떤 사람은 더욱 합리적인 질서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유통활동은 비생산적이다고 말할 수도 있다), ‘생비노동을 과학적 구분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사회과학과 이른바 가치판단 사이의 관계에 관한 복잡한 논쟁은 피하자. 맑스가 유통비용(유통영역에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을 분명히 포함한다)을 자본주의의 쓸데없는 비용으로, 자본주의의 불합리한 성격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해악들가운데 하나 등등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과다한 상업 은행 중개업 등등의 활동을 가진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사회보다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이런 유통활동이 비생산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반대로, 이런 활동들이 비생산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활동을 비생산적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다시 반복함으로써, 사회는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만 그 부를 증가시킬 수 있고, 그렇게 생산된 바로 그 양 만큼만 개별 구성원들이나 사회의 계급들에게 분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미 생산된 사회적 생산물의 부분들을 아무리 교환하더라도 생산물 그 자체는 증가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엄격한 의미의 유통활동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성격은 이런 유형의 노동을 필요하게 하지만, 이런 활동이 총생산을 증가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어도 바꾸지는 못한다. 유통영역에 지출된 노동이 비생산적이라는 것은 생산영역과 유통영역 사이의 맑스주의적 구분의 논리적 연장일 뿐이다. 후자의 구분을 받아들인다면 전자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유통에서 잉여가치의 생산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동시에 유통에 고용된 노동이 생산적(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의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놀라울 뿐이다. 이런 입장은 모든 논리를 무시한다. 여기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끝을 볼 수 있다. ‘생비노동구분이 생비노동에 대한 규범적 평가적 도적적인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생산과 유통 사이의 구분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비노동구분의 측면에서 유통활동이 생산 활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널리 사용하는 마지막 논리는 맑스의 사고에 있다고 추정되는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비판자들은 맑스가 생비노동구분이 생산되는 사용가치의 종류와 무관함을 끊임없이 강조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런 다음 그들은 유통활동이 물론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특수한 사용가치를 만들어내지만, 맑스도 인정했듯이 이 같은 성질의 상이함은 유통활동을 생산적 노동의 총집합에서 배제시키는 것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앞에서 생산적 노동 일반개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것이 여기서 위력을 발휘한다. 다시 반복하자면, 생산적 노동 일반의 자격은 노동이 자본을 위해 생산적인 것의 필요조건(비록 충분조건은 아니지만)이다. 이것은 인간의 욕구에 따라 자연을 변형시키려고 인간이 자연과 교류하는 데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어떤 활동도 생산적 노동 일반으로,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될 수 없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생산적 노동 개념의 이와 같은 이중의 결정은 자본주의의 생산적 노동이 생산적 노동 일반의 부분집합임을 가리킨다. 이런 이해에 의거하면, 비판자들이 맑스가 자기 자신의 정의를 부정(否定)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일은 간단하다.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은 생산적 노동 일반의 부분집합이므로, 후자의 밖에 있는 어떤 활동도 생산적으로 간주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그런 활동은 정의상 모든 유형의 사회경제조직에서 비생산적이다. 따라서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에 관해 맑스가 제시한 명제들 각각은 생산적 노동 일반의 노동유형 집합 안에 있는 활동만을 다룰 뿐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생산적인 노동만이 부수적인 조건(contingent conditions)에 따라 자본을 위해 생산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맑스가 생비노동구분이 생산되는 사용가치의 유형에 의존하지 않고 관계없다고 강조할 때, 그의 진술은 그의 전체적인 논리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 일반의 집합에 상응하는 사용가치 집합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유통활동에 의해 생산되는’(‘생산이라는 단어는 이 맥락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사용가치를 포함하지 않는다. 요컨대 어떤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사용가치의 유형은, 그 활동이 생산의 일부일 때만, ‘생비노동구분과 상관없는 것이다.

두 번째 주요 쟁점은, 잉여가치량과 잉여가치율의 증가에 상이한 방식으로 기여하는 노동 범주들과 관련된다.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는 데 기여하는 모든 부류의 노동자(몇 가지 예만 들면, 보건노동자 교사 과학자 연구노동자 등)도 예컨대 산업노동자와 동일한 근거에서 생산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여기에는 일정한 속임수를 지닌 일관성이 물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논리는 우리를 심각한 오류에 빠뜨릴 것이다.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필요노동, 즉 자기의 임금과 동등한 것을 재생산하기 위해 행하는 노동을 넘어 지출한 잉여노동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생산적이라고 여겨지는 노동자는 자본을 위해 잉여노동을 지출하지 않는다(만일 그들 스스로가 어떤 자본가를 위한 임노동자이 경우 그들은 이미 생산적 노동자다가 아니라면). 따라서 그들이 자본을 위해 추가적인 잉여가치의 생산에 기여한다고 말하는 것은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 된다. 즉 자본이 그들 노동의 일부를 잉여노동으로 전유하지 않는데, 추가적인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문제의 노동자가 사회적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기여함으로써 잉여가치의 증가에 기여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이 이율배반은 바로 사라진다. 이런 생산성 향상은 생산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의 감소와, 이에 따라 자본이 전유하는 잉여노동과 잉여가치의 증가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추가적인 잉여가치는 생산 노동자로부터 착취한 추가적 잉여노동의 가치형태이다. 이처럼 추가적인 잉여가치가 생산 노동자의 이바지로 이미 계산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과학자 교육자 등의 특수한 기여로서 다시 계산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중복계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생비노동구분은 규범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축적의 궤적을 분석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중복계산은 허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모든 논쟁은 맑스가 앞에서 인용한 문장여기서 노동자가 생산과정에 직접 참가하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명시했다에서 예견한 것이다:

 

노동이나 노동력의 소유자가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경우에만, 노동은 생산적이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생산적 노동자다. 즉 유일한 생산적 노동은 자본의 자기증식을 위해 생산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소비되는 노동이다(Marx 1976a: 1038. 강조는 인용자).

 

 

결론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수행한 생비노동구분의 체계적이고 엄격한 이론적 재구성이 지난 20년의 논쟁과정에서 제기된 주요 비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 생각에 이 논문의 주된 이바지는 이런 유형의 체계적인 재구성을 시도한 것이며, 논쟁 참가자 대부분이 지금까지 무시했던 생산적 노동 일반범주의 핵심적 중요성을 특히 강조함으로써, 그 토대 위에서 더 특수하고 협소한 개념인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이상의 논의는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주요 노동자 집단들이 생산적인지 비생산적인지 분류하는 데 필요한 기준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 분류는 <그림 3>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림 3>은 임금계약에 의해 고용되는 노동자(또는 생산자)만을 분류하는 것이고, 화폐-상품 유통의 순환 밖에서 확장되는 노동(주부 자급자족 농가)과 소상품 생산자의 노동을 제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노동자가 임금 노동자일 경우에만 생산적/비생산적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구분의 목적이, 고용된 사회적 총노동 가운데 어느 정도의 비율이 잉여가치를 창조하며(또는 생산하며), 그리고 어느 정도의 비율이 잉여가치로부터 지급받는 활동들에 단순히 종사하는가를 알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잉여가치의 생산은 임노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용가치 생산과 소상품 생산이라는 두 가지 범주는 우리가 검토하는 구분에 적합하지 않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두 가지 범주는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 배제되었다(<그림 2>를 보라).

<그림 3>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계급 중 큰 부분이 비생산적 노동자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들이 사회의 안녕 또는 계급투쟁과 혁명전략에 덜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생비노동구분은 자본주의 경제의 여러 가지 중요한 변수들, 보기를 들면 노동력의 가치,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따라서 자본 축적률을 분석하는데 중요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 구분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의 충분한 근거다. 왜냐하면 이런 변수들의 검토를 통해서만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궤적과 순환적 파동을 적절하게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3>

임노동

↙ ↘

 

소득으로부터 지불받는 임노동 자본에 의해 고용된 임노동

(가내 하인요리사 정원사 ↙ ↘

운전기사 경호원 등)

비생산적 유통영역의 노동자 생산영역과 운수영역의 노동자 (은행 보험회사 모기지회사도소매 등)

비생산적 생산적

 

국가 공무원

↙ ↓ ↘

사회질서의 재생산 사회적 서비스 생산과 운수를 담당하는 국영기업

비생산적 비생산적 생산적

(상품생산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생산적일 수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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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 오 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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