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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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6월호

소개_[SOT]SocialistOrganizationToday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45

[연대](Solidarity)는 어떤 조직인가.

 

[연대](Solidarity)는 미국 사회주의 정치조직 가운데 하나이다. 1986년에 세 개의 사회주의 조직이 통합되면서 [연대]가 출범했다. 이 조직은 노동자 계급과 억압받는 민중의 자기조직화에 입각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연대]는 종파주의와 개량주의를 모두 거부하면서 개방성과 협력의 자세를 가진 창조적인 사회주의 정치를 주창한다. 실제로 [연대]는 트로츠키주의자, 좌파 샤흐트만주의자, 룩셈부르크주의자, 사회주의-여성주의자, 베테랑 신좌파 활동가 등 다양한 정치적 경향을 포괄하고 있다.

[연대]는 자기 조직의 강화보다 전투적인 현장 노동자 운동과 다양한 사회 운동을 종파적이지 않게 건설하는 데 더 우선순위를 두어 온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스스로 말한다. [연대]가 발행하는 격월간 잡지인 시대비평(Against the Current)의 편집위원회에는 [연대]의 성원이 아닌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연대]는 미국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광범한 재결집을 주창한다. 하지만 그동안 재결집이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지난 20여 년 사이에 세 개의 작은 그룹이 [연대]에 추가로 결합했다고 한다. [연대]가 이른바 전위주의자들을 종파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면, 역으로 그들로부터는 불철저한 기회주의라고 비판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대]는 오늘날 체계적인 강령을 제출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고 여긴다. 그들이 볼 때 중요한 것은 풍부한 전통이요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창의성이다. 그들이 명시적인 강령을 따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정치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오늘날 사회주의 조직(Socialist Organization Today)이라고 하는 문서를 선택했다.

 

 

 

 

 

 

 

 

 

 

 

오늘날 사회주의 조직

 

 

[연대](Solidarity)의 공식 소책자

찰리 포스트, 키트 웨이너

20068

 

 

2판에 부치는 서문

 

이 소책자의 제1판은 1990년대 중반에 쓰여 1997년에 발행되었다. 당시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의 투쟁들, 즉 흑인들의 해방 투쟁,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출신들의 해방 투쟁, 여성들과 동성애자들의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미국의 산업을 뒤흔들었던 비공인 파업 물결 등을 거치며 등장했던 좌파가 위기에 처해 있던 시점이었다.

거의 20년 동안 사회적 투쟁들이 가라앉고 자본가가 노동자 계급의 조직된 부분과 미조직된 부분을 가리지 않고 공세를 퍼부었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사회 복지와 친()노동자적인 정부 규제에 공격하자, 미국 좌파의 대부분은 자신감을 잃어 갔다. 동유럽과 소련에서 관료주의 정권들이 무너지고 중국 관료체제가 자본주의 시장 개혁을 채택하면서, 좌파 가운데 이 사회들이 사회주의라고 믿고 있던 이들은 방향을 잃어버렸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이 사회자유주의긴축과 규제완화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아래서 개혁추구를 포기하면서, 좌파 가운데 노동조합, 여성운동, 시민운동의 지도자들이 민주당을 변화시켜 정권을 잡고 의미 있는 개혁을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사회주의 좌파들은 대체로 두 가지 아주 다른 방향으로 대응했다. 한편으로 1990년대에 정치활동을 하고 있던 좌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범 우파에 맞서는 진보적인반대세력을 조직해야 한다면서 사회주의 조직 건설을 포기했다. 이 동지들 가운데 일부는 노동자들, 유색인들, 여성들, 동성애자들을 조직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진보적인노동관료들, 시민운동과 여성운동 그리고 성적 소수자 운동의 주류 지도자들, 나아가 민주당에 믿음을 보내면서 개량주의 정치를 채택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소수는 이른바 전위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대부분 소수 혁명가 조직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노동자 계급의 전위라는 (나아가 그 중핵이라는) 주장을 단지 되풀이하고 자신들의 지도자로서 자격을 부정하는 자들을 비난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낙담케 하고 심지어 이 전위들의 대열조차 해체시킨 좌파의 위기를 분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쪼그라든 규모를 놓고 그들 자신의 인내력을 찬양할 뿐이었다.

 

오늘날 사회주의 조직을 출판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또 많은 것이 그대로 있다. 자본가들은 여전히 린 생산신자유주의정부 정책으로 무장하여 끊임없는 공세를 펴고 있다. 노동조합들 내 현장의 모임과 네트워크들 그리고 공동체에 기반을 둔 노동자 조직들이 계속해서 투쟁하고 있지만, 노동자 운동, 여성 운동, 성적 소수자 운동, 유색인 운동은 여전히 허약하고 공격받고 있다. 몇 년 동안 노동착취공장 반대 운동, “공정한 무역을 위한 운동, 노동조합 혁신 운동 등이 벌어졌다. 그 결과 1999년에 시애틀에서 반-WTO 시위가 일어났다. 그 뒤 지구 정의를 위한 직접 행동이 폭발했지만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에는 다시 가라앉았다.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희망적인 발전은 완강하게일어난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점령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2003년 겨울부터 봄까지 거대한 결집이 있고 난 뒤 전국적인 시위 규모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군인 가족과 현역 병사들 속에서 전쟁에 대한 저항이 나타났고, 조직된 노동자 대중 속에서 전쟁에 대한 반대가 점점 늘어났으며, 징병제에 대한 (그리고 법안의 재상정에 대한) 반대가 조직되었다. 이 모든 것은 전쟁에 반대하는 정서와 조직화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운전면허증을 교부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에서부터 흑인과 소수민족 선거권 보장을 위해 1965년 제정된 <투표권법>을 방어하는 것까지, 유색인들 사이에서 저항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분명히 고무적인 현상이고 새로운 조짐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미국에서 한 줌에 지나지 않는 극좌파는 우리가 거의 10년 전에 오늘날 사회주의 조직에서 초점을 맞추었던 문제들을 여전히 풀지 못했다. 미국의 좌파는 한편으로 민주당 추종이라는 덫에서 다른 한편으로 전위주의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가끔 좌파 조직들은 두 가지 모두를 함께 채택하기도 한다! 혁명적 좌파는 여전히 허약하며, 2003년 겨울부터 봄에 일어난 거대한 반전운동처럼 잠깐씩 끼어드는 대중적 분출의 시기를 빼고 나면 정치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는 억압받는 민중과 일반 노동자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사회주의 조직을 통해 우리는 사회주의 조직을 포기하는 것과 많은 혁명적 좌파들이 보인 전위적허세에 맞서 그 대안을 주장했다. 그 대안이란 명확한 사회주의 정치를 갖고 노동자 계급과 민중의 저항 조직들을 다시 세우는 데 온 몸을 불태우는 조직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거의 20년 동안 [연대]는 그러한 조직을 만들려고 애써왔으며, 한계가 있지만 몇몇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 조직원들은 노동자 운동 속에 잘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 속에서 연대와 전투성 그리고 민주주의에 헌신하는 현장 경향이 건설되도록 애쓰고 있다. 우리는 지구 정의를 위한 행동, 반전 운동,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에 참여해 왔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연대]는 적은 수이지만 젊은 활동가들을 충원하고 교육해 왔다. 그러나 훨씬 많은 것들을 성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연대]는 여전히 인종차별주의에 맞선 유색인들의 투쟁에 결합하는 길을 찾아야 하며, 진정으로 다국적이고 다인종인 조직을 건설하는 길고 어려운 과정에 들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소책자에 있는 분석과 주장에 흥미를 느낀다면, 우리와 만나서 사회적 저항운동을 어떻게 가장 잘 만들 것인가 그리고 효율적이며 비종파적인 사회주의 좌파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대해 정치적 대화를 나누도록 하자. 확신이 선다면, [연대]에 결합해서 미국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의 부활을 위한 겸허하지만 실질적인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 이라크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 위협 등 전 세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미국인들에게 그리고 물론 좌파에게 중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와 미국에서 경찰국가의 성장을 막으려는 강력한 운동을 세우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과 인류의 앞날에 꼭 필요한 일이다.

 

 

들어가며

 

우리는 스티브 젤룩(1922~1985)과 에르네스트 만델(1923~1995)을 기리며 이 소책자를 그들에게 바친다. 그들이 쓴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에 대한 책은 이 소책자의 이론적 기초를 이룬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지형 위에서 그들의 길을 정하려고 애쓰고 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오늘날 20세기의 그 어느 시기보다 허약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노동자 계급과 민중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바탕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바랐던 노동조합들과 대다수 운동 조직들 또한 쇠퇴하였다.

좌파의 다수가 모범사례로 바라보았던 사회들 또한 더 이상 별로 쓸모가 없다. 대부분의 공산주의나라들이 사라졌고, “사회주의정부들은 그들의 보수적인 상대들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좌파의 일부가 사회주의의 모델로 여겼던 체제들은 특권적이고 전제적인 관료들이 지배하는 생존가능한 자본주의 이후 경제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주면서 붕괴하였다. 비슷하게 서유럽의 사회주의정당들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권위주의적인 사회주의양자의 대안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 그 대신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은 대처 정권이나 레이건 정권과 다를 바 없이 잔인하게 경제적 규제를 없애고 복지국가를 해체하였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을 가질 근거가 있다. 작지만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사회주의 정치와 조직에 헌신하고 있다. 좌파 내부에서는 큰 관심을 갖고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다. 여전히 활동하는 자들은 과거의 오류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급진적인 운동의 역사를 가슴을 열고 기꺼이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 계급 운동과 사회 운동의 건설을 통해 급진적인 사회변혁에 여전히 헌신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현존하는 노동조합들 내부의 반대파 모임 또는 혁신 모임들에서 활동하는 이들, 그리고 미조직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자 센터들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지난 30년 동안 사회운동들 대다수가 가파르게 쇠퇴하였지만, 성적 소수자 해방 활동가들이 1980년대 중반 이후 그들의 운동을 투쟁의 중요한 초점으로 만들어 왔다.

[연대]에 속한 우리는 이러한 운동들을 건설하고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양 측면 모두에서) 좌파의 역사에 대한 진행 중인 토론에 참여하는 데, 나아가 미국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을 유지하는 데 헌신한다.

문제는 오늘날 정치적 환경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이다.

 

 

1. 1990년대에 사회주의 좌파

 

오늘날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행동이 퇴조하는 시기에는 혁명적 좌파의 사상이 점점 더 공허해 보인다.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 조직 건설과 정치활동을 완전히 포기했다.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는 다른 많은 이들도 사회주의 조직이 과연 쓸모 있는가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해 왔다.

좌파의 허약함을 인식하는 이 활동가들은 언젠가 세력균형이 바뀔 때까지 사회주의 조직이라는 기획을 연기하고 심지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삼갈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이 경향은 사회주의 기획을 적어도 오늘날에는 적합하지 않거나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바라본다. 반면 오늘날 과제는 기업들금융자본가들에 맞서 그 경계가 좀 더 모호하게 진보적인 반대파들을 결집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불행하게도 혁명적 좌파는 이 비판자들에게 진지한 답변을 거의 내놓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소수 혁명가 조직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노동자 계급의 전위라는 (나아가 그 중핵이라는) 주장을 단지 되풀이하고 자신들의 지도자로서 자격을 부정하는 자들을 비난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낙담케 하고 심지어 이 전위들의 대열조차 해체시킨 좌파의 위기를 분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쪼그라든 규모를 놓고 그들 자신의 인내력을 찬양할 뿐이었다.

이 경향에게 있어서 혁명가들의 중심적인 과제는 자본주의 작동과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꽤 추상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충원하고 단련시키는 것이다. 이 조직들은 장기간에 걸친 활동가 운동의 재건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며, 잘 조율된 강령들을 갖고 있지만 자기 조직원 이외의 활동가들에게는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그 비판자들이 사회주의 정치 일반과 관련해서 생각해 온 바로 그 무엇에 관해 결함을 가져 왔다.

문제는 사회주의는 적합하지 않다는 경향이 부분적으로 옳다는 데 있다. 오늘날 사회주의 기획은 20세기 그 어느 시점보다도 훨씬 덜 실행 가능한 상태에 있다. 이것은 좌파의 다수가 거짓되게 사회주의라고 생각했던 체제들이 무너진 것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전위라는 용어로 부르는 운동의 지도부들은 작고 포위된 상태에 있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자가 아니며, 이 전투적 소수의 대부분에게 사회주의 기획이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 일정한 수준의 대중투쟁이 있을 때까지 사회주의 조직에 결합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적 맑스주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충성을 선언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다른 이들이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연대]에 속한 우리는 제3의 항로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사회적 저항 조직들을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것에 헌신하면서 동시에 효율적인 사회주의 조직의 건설에 헌신한다. 그것은 시대가 어떻게 그리고 왜 변화해 왔는지를 기꺼이 이해하려는 자세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 소책자에서 진정한 전위 조직이 이전 시대에 어떻게 떠올랐다가 어떻게 사라져 갔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운동들과 혁명적 좌파의 재건을 함께 촉진시킬 수 있는 길을 제안할 것이다.

 

2. 핵심적인 질문들

 

사람들은 어떻게 급진적으로 되는가?

 

이것은 하나의 딜레마이다. 운동은 급진적으로 되고 있는 사람들이 건설하지만, 활동가들은 운동 속에서 자기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때 급진적으로 된다. 투쟁 속에서 행동은 사상 자체보다 더 강력하게 자기행동과 자기조직화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노동자들, 여성들, 인종적 소수자들, 성적 소수자들이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자본가들과 그 국가를 굴복시켜 양보를 얻어내야 한다. 지난날 민중의 성과물들을 지켜내고 새로운 성과물들을 쟁취해 낼 만큼 강력한 운동을 건설하려면,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민중은 가장 폭넓은 연대를 발전시켜야 하고, 민주적 형태의 조직을 건설해야 하며, 공장이나 거리에서 전투적인 대중행동에 뒤따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사상들, 즉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사상들을 발전시킨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파업, 시위, 연좌농성, 그리고 비슷한 것들을 실천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과 민중 속에서 급진주의가 자라나는 데 꼭 필요하다.

서로 다른 세대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배워 왔다. 1960년대 반전 활동가들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거대한 항의와 교육 캠페인을 만들어 냈다. 한 세대가 베트남 전쟁의 끔찍함에 전율하면서, 활동가들은 전쟁에 맞선 대중의 외침을 결집시켰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전국적인 거리시위를 벌였다. 또 그들은 지방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웃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녔으며, 대학들을 점거하고, 변전소의 가동을 강제로 멈추게 했다. 나아가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치고, 풀뿌리 후원단을 세웠다. 그들의 행동은 크고 작은 성공을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노동조합이나 공동체 조직의 집회 지지라든지 또는 전쟁에 반대하는 새로운 정치인의 선언 같은 것들이 있었다. 대중이 결집하자,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렵게 되었고, 마침내 1973년 백악관이 전쟁을 포기하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몇 년 뒤에 헨리 키신저가 폭로한 다음 내용을 알고 있는 활동가들은 별로 없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에 핵무기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반전 운동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정을 계속해서 연기했다.” 미국의 베트남 간섭이 끝난 것은 반전 행동주의가 거둔 거대한 승리였다.

반전 활동가들이 이러한 전술을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10년 전에 먼저 만개했던 시민권 운동으로부터 그 전술들을 배웠다. 급진적인 평등을 요구한 이 활동가들은 행진, 보이콧, 연좌농성, 자유여행을 조직했으며, 이를 통해 남부의 권력 구조와 직접적으로 대결할 수 있었다. 차츰 그들은 미국 남부에서 인종 차별의 중요한 요소들을 뒤흔들며 해체해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승리들은 한 세대의 활동가들에게 정부와 법원에 의지하는 대신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활동에 의지하도록 가르쳤다.

1970년대 초반 여성들의 운동 또한 사회적 남녀 관계와 사회 변혁에 대한 의식을 투쟁 속에서 발전시킨 일련의 활동가들을 만들어 냈다. “두 번째 물결여성주의자들의 다수는 이전 시기의 반전운동과 학생운동 속에서 단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결집시켰고, 여성들의 조직을 창설했으며, 그리하여 엄청나게 많은 여성들의 의식을 고양시켰다.

요즘 새롭게 급진화한 활동가들은 사회운동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대해 어느 정도 배워 왔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행동주의가 낮게 가라앉은 시대에 변화를 강제하려는 시도가 갖는 약점 또한 보아야 했다. 1980년대에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간섭에 반대하는 운동은 전국에 걸쳐 몇 만 명의 학생들과 주민들을 급진화 시켰다.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던 때 반전 활동가들의 경험에서 배우면서, <엘살바도르 민중과 연대하는 위원회> 같은 조직들은 집회, 탄원 캠페인, 교육 프로그램,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조직했다. 이 활동가들의 다수는 주로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혁명 조직들과 접촉하면서 자기행동의 가치를 배웠으며,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간섭반대 운동은 운동이 쇠퇴하는 경향 그리고 다치거나 죽을 위험에 놓인 미국 병사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힘겹게 부딪치고 있었다. 그 운동은 이전의 반전 운동만큼 강력한 대중운동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데서도 그때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동성애 권리 활동가들이 최전선에서 가장 견고한 사회운동을 벌였다. <힘을 보여주는 에이즈 연합>은 에이즈와 싸우는 정부의 행동을 요구하기 위해 행진과 시민불복종을 조직했다. 정부의 무관심에 마주친 이 활동가들은 연좌농성과 거리봉쇄로 정부에 도전해 왔다. 그들 자신의 활동이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끌어냈다는 점을 몇 천 명의 활동가들은 배우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 또한 모든 운동이 퇴조하는 경향에 힘겹게 부딪치고 있으며, 정부 예산이 크게 삭감됨에 따라 정부 기구로부터 개혁을 쟁취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결과 많은 동성애 활동가들이 구체적인 성과물을 쟁취하지 못함에 따라 급격하게 소진되고있으며, 여전히 일관되게 활동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다수는 그들의 투쟁이 노동자들, 인종적 소수자들, 여성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다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지난해에는 캘리포니아의 반()이민자법인 <제안 187>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그리고 <소수자 차별철폐를 위한 적극적 우대조치>를 비롯한 1960년대의 사회적 성과물들을 방어하는 투쟁 속에서 새로운 활동가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이 운동들이 새로운 활동가들의 급진주의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전략과 조직들을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란다.

 

왜 모든 사람이 급진적이지 않나?

 

사회운동은 여성주의자들, 인종차별철폐 운동가들, 간섭반대 운동가들, 동성애 권리 활동가들을 만들어 냈다.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처럼, 노동자 행동주의 또한 여러 세대의 노동자 투사들을 만들어 냈다. 그 모든 경우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고,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 조직에 결합했다. 그러나 활동가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많은 민중이 활동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식은 활동가 안에서 불균등하게 발전하며, 시간을 놓고도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급진주의 운동의 물결은 정점에 올라 있는 동안 자기행동이라는 점에서 여러 세대를 단련시켰다. 그러나 운동이 사그라지면서 활동가의 다수는 운동을 그만 두었고, 사람들은 사생활의 요구들로 되돌아갔다. 운동들이 정점에 있을 때 성취했던 성공은 때때로 의식 속에 오래도록 흔적을 남겨 놓는다. 보기를 들어 베트남 증후군은 걸프전이 시작되던 때에도 민중의 언어 속에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취했던 개량은 운동이 위축되면 위험에 처한다.

운동이 쇠퇴하면 활동가 대오는 쪼그라들고 오로지 가장 헌신적인 이들만이 남는다. 잔인한 역설은 운동이 소규모일 때는 새로운 성원을 보충하는 것도 새로운 활동가를 급진화하는 것도 더욱 힘들다는 점이다. 운동 조직들이 당장의 성과를 쟁취할 힘을 갖지 못한 때는 사회변혁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가진 이들만이 떠나지 않고 투쟁에 함께 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많은 헌신적인 활동가들은 그들의 조직과 과거에 그들이 만들었던 성과를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생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시야를 협소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급진파들은 어떻게 조직되는가?

 

운동의 활력이 아주 작은 시기에도, 몇몇 활동가는 여전히 급진적이고 몇몇 급진주의자는 여전히 활동적이다. 그들은 노동조합들 속에서 현장의 조직들이 살아있게 하며,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이끈다. 그들은 간섭반대 운동과 인종차별철폐 운동의 중추들이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 조직들과 동성애 권리 운동을 건설한다. 그들은 자신의 활동에서 교훈을 배우며, 젊은 사람들이 처음 뛰어들 때 이 교훈을 배우도록 돕는다.

이 활동가들은 맑스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전위라고 여겨왔던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행동하도록 조직하면서, 미국 자본주의가 실현가능한 선이라고 설정해 놓은 한계들과 날마다 대결한다. 그들은 재정 긴축의 시대에 에이즈 연구에 자금을 주려 하지 않는 정부 관리들의 비타협적 태도와 마주친다. 그들은 억압적인 ()가족의제가 주류 정치를 지배하도록 만든 신 우파의 저항과 마주친다.

왜 저들의 반대가 그렇게 거대한지 그리고 왜 자신들의 성과는 그렇게 빈약한지를 이해하려면, 그들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자본주의가 미국 정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좀 더 정교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활동가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위한 청중이다. 오랫동안 사회변혁에 헌신하면서 그들은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급진성이나 활동성만으로는 사회주의 시각이나 전략을 발전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 1960년대 거대한 운동들 속에서 단련된 이들 가운데 단지 소수만이 오늘날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활동하는 이들 가운데 꽤 많은 부분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회주의 조직에 결합했던 이들이다.

이 전위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의 폭넓은 이해와 훌륭하게 결합시켰다.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 <청년 사회주의자 연합>, <국제 사회주의자> 같은 조직들 또는 마오주의 좌파에서 나타난 수많은 조직들 가운데 하나에 참여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통찰력을 다른 영역에서 온 활동가들의 통찰력과 결합시켰고 일반적인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 냈다.

그래서 사회주의 조직은 과거의 교훈을 살아있게 유지하고 그것을 일반화시킬 수 있다. 그것은 1930년대와 1940년대 노동자 투쟁이 분출했던 시기의 활동가들이 1960년대의 투사들, 심지어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투사들을 만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든다. 덧붙여 그들은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고 급진적인 운동이 어떻게 건설되는지에 대한 좀 더 정교한 그림을 함께 짜 맞출 수 있다. 사회주의 조직의 구성원은 그들의 활동을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한 그들의 좀 더 폭넓은 시야와 좀 더 쉽게 결합시킬 수 있다. 사회주의 조직은 잠재적인 사회주의자를 교육하며 대중운동의 역사적 기억으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전위 조직 또는 사회주의 조직을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운동은 역사적 형성물이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아니야라고 외치고 무언가를 하려 할 때 솟아오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전위조직으로서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은 거대한 운동 조직들 속에서 많은 수의 투사들이 단일문제 집단으로서 잠재적인 편협함을 초월하고 반()자본주의 투쟁을 위한 좀 더 포괄적인 전략을 발전시키려고 함께 노력할 때 솟아오른다.

과거에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었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이것이 다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전위조직에 대한 역사적 통찰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3. 노동자 전위의 역사

 

[연대]에 속한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즉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묶어낼 수 있고, 그 성원들을 혁명가이자 맑스주의자로 길러낼 수 있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혁명적 사회주의로 끌어들일 수 있는 조직이 세워지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혁명적 좌파의 대다수와는 다른 성격의 조직을 창설했다.

[연대]의 성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통해 새로운 성원이 우리 조직에 곧바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동조합 안에 현장의 모임들, 노동자 센터들, 여성과 동성애자와 유색인의 독자적인 조직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는 민주당이나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개혁될 수 있다는 사고를 거부한다. 또한 노동자 계급과 민중의 권력이 민주적인 형태로 전면적으로 발전하지 않고서도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사고를 거부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 동구 관료주의 사회들에 대한 이론적 분석에서부터 노동자 운동 속에서 추구해야 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혁명가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고 믿는다.

[연대]는 스스로 전위 정당 또는 그 중핵이라고 자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혁명 조직을 건설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공동의 실천에 동의하는 다양한 혁명적 경향들이 함께 하는 혁명적 재결집이야말로 미국에서 진정한 혁명 정당을 위한 기초를 놓는 최선의 길이라고 주창한다.

혁명적이면서도 비종파적이며 또한 하나의 당이라거나 예비 당이라고 뻐기지 않는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려는 [연대]의 시도는 20세기 미국과 유럽에서 노동자 민중 전위들의 실제적인 역사적 발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만델의 표현을 빌리자면 투쟁이 잠잠해진 동안에도 계급투쟁의 전선에 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며 다른 수단을 갖고전쟁을 계속하는노동자층이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전위로 존재했다. 이 노동자 활동가들은 대부분 조직된 사업장 또는 미조직된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직장대표거나 현장 투사들이었다. 이들은 사장들에 맞서 전투성과 연대를 주장하고, 자리 잡은 노동조합들 안에서 등장한 관료들에 맞서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압도적 다수는 사회주의자였고 혁명가였다. 간단히 말해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전투적인 노동자의 대다수는 스스로를 이러저러한 경향의 적색분자라고 설명하고 싶어 했다.

유럽에서 이러한 노동자층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크게 늘어났다. 실제로 유럽 전체에서 몇 십만 명의 노동자 활동가들이 자본과 국가에 맞서 그들의 직장과 공동체에서 조직되었다. 많은 이들이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에 결합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대공장의 숙련 기계공들이 현장 투사 네트워크의 중추였다. 그들은 때때로 사회민주주의자가 주도하는 노동조합 관료의 뜻을 거스르면서 파업과 태업을 이끌었다. 숙련 기계공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안토니오 그람시 그리고 다른 좌파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했다.

혁명적인 대중 행동을 주장하면서 좌파는 유럽 사회민주주의 지도부가 지닌 좀 더 보수적인 정책들과 자주 충돌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노동조합 지도부가 거의 배타적으로 주관하는 관례화된 집단교섭의 옹호자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내부에서는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지닌 혁명적인 시각을 사회민주주의 의원들과 당 관료들이 기획하는 의회 개량주의 전략으로 변질시켰다. 이러한 좀 더 보수적인 개량주의전략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관료들과 선출된 공직자들 그리고 노동조합 지도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개량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자본과 국가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국가권력과 평화적인 관계를 향한 노동관료들의 열망은 그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민족국가의 이해관계와 동일시하게 이끌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의 정부를 지지했다. 그래서 그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사이의 야만적인 전쟁에서 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에 맞서 싸우게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유럽 사회민주주의 공식 지도부들이 각기 자기 나라 부르주아 정부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자, 좌파 노동자들은 공장들과 노동자 거주 지역들에서 반전운동의 중핵을 이루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자 초기에는 대중적 민족주의, 전쟁에 찬성하는 광란, 가혹한 정치적 억압이 물결쳤지만, 이 노동자들은 전쟁에 반대하여 주장하고 조직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그들은 반전 태도를 취한 사회주의 정당들과 결합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우에는 산업이 덜 발전해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 전위들이 맑스주의 정치 대신 혁명적 생디칼리슴으로 쏠렸다. 작업장에서 직접 행동만으로도 자본의 권력을 파괴할 수 있으며 새로운 평등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사회 질서를 열어낼 수 있다는 사상은 소규모 공장과 직장에 다니는 고숙련 노동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그들은 생산과정에 대한 고용주들의 통제를 제한하기 위해 앞장에 서서 투쟁했으며, 그 결과 상당한 작업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아나코-생디칼리슴적인 노동자 전위들 가운데 도시 노동자들과 농촌 노동자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농업 임금 노동자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소수가 아나코-생디칼리슴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스페인 중남부의 자본주의적 거대농장에서 반쯤 폭동이라고 할 만한 파업을 수없이 이끌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스페인의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은 프랑스의 생디칼리스트가 그들의 정부를 지지하자 관계를 끊으면서 전쟁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유럽 노동자 전위들의 정치조직과 정치의식은 혁명 이전의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 가운데 특히 볼셰비키 분파에 속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1890년대 이후 노동자 계급과 학생들의 투쟁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1912년에서 1914년까지 거대한 파업 물결이 몰아치는 동안 볼셰비키는 대다수의 전투적인 노동자들로부터, 특히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대공장 숙련 금속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했다. 노동자 계급 반전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이 노동자 볼셰비키19172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자연발생적인 흐름에 일시적으로 추월당했다. 그러나 공장과 노동자 거주 지역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그들은 차르 전제정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모두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에 헌신하면서 9월에 대중운동 지도력을 획득하여 191710월에 최초의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 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1차 세계대전을 지지한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주의 기풍을 파멸시켰다. 유럽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배신에 분노한 반면 러시아 볼셰비키의 승리에 고무된 유럽 노동자 전위의 다수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새로 등장한 확고하게 혁명적인 공산당에게로 자신들의 충성을 바꾸어 보내게 되었다.

1918년부터 1923년까지 전쟁 직후의 혁명적 고조기에는 대다수 노동자가 사회민주당에 보내던 충성을 끊어낼 수 없었지만, 공산당은 대규모로 성장해 갔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에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스칸디나비아에서 공산당은 몇 만 명의 당원을 갖고 있었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몇 십만 명의 당원을 갖고 있었다.

이 거대한 혁명적 노동자 정당은 1930년대 중반 이전까지 유럽 전역에서 전투적인 산업투쟁과 정치투쟁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가 이끄는 노동조합에서 중요한 계급투쟁반대파를 조직했고, 자본가의 공격과 국가의 긴축 정책에 맞서 비공인 파업과 시위를 이끌었다.

미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노동자 전위가 유럽에 비해 소규모이고 정치적으로도 덜 단일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많은 전투적이고 활동적인 노동자는 몇몇 다양한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정치에 공감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대부분의 노동자 활동가들은 사회당 당원이거나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 조합원이었다.

사회당은 그 정점에 있을 때 약 10만 명의 당원들, 20개의 지역 신문 또는 잡지, 그리고 미국 전역에 걸쳐 몇 백 명의 선출된 공직자를 갖고 있었다. 많은 사회당 당원은 대체로 도시 전문직과 농민이었지만, 사회당은 노동자 계급 투사 가운데서도 꽤 많은 사람을 조직했다.

사회당의 노동자 평당원들은 주로 유태인과 이탈리아 이민자 그리고 여성 의류 노동자 사이에서 노동조합을 세웠던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위대한 반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때때로 그들은 노동조합 내부에서 관료가 된 (대부분 남자들인) 동료 사회당원들과도 충돌했다.

미국의 사회당은 또한 뉴욕 주 스케넥터디의 제너럴 일렉트릭 공장 같은 대공장에서 몇 백 명의 숙련 금속 노동자들을 당원으로 조직했다. 이 기계공들은 <세계기계공노동조합>을 민주화하여, 협소한 직업별 노조에서 금속가공·기계조립 산업의 숙련·미숙련 노동자를 모두 받아들이는 폭넓은 산업별 노조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들을 이끌었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1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국에서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노동자들이 만든 가장 중요한 조직이었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대중파업의 물결이 가장 높이 솟았을 때, <세계산업노동자동맹>8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조직했고, 계급투쟁 정치 속에서 섬유 노동자들, 광부들, 벌목꾼들, 농장 노동자들, 철강 노동자들, 고무 노동자들, 자동차 노동자들 가운데 전투적인 소수를 육성했다. 그들은 작업장과 지역에서 직접 행동과 민주적인 자기조직화야말로 자본주의 아래서 성과를 획득하고 구체제의 잿더미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핵심 수단이라고 인식했다.

사회당 안의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에 맞선 투쟁에서 맨 앞에 서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리고 전쟁 직후에 정부와 사설 폭력단이 거대하고 잔인한 탄압을 하였지만, 사회당 좌파 당원들과 <세계산업노동자동맹> 조합원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미국의 러시아 혁명 간섭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를 조직했다. 1919년의 거대한 시애틀 총파업은 이러한 투쟁이 낳은 결과물 가운데 하나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노동자 전위들 가운데 대부분은 러시아 혁명 이후에 새로 형성된 공산당으로 쏠렸다. 하지만 그 활동가들 가운데 눈에 띄는 소수는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또는 좌파 사회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1914년 이전의 극좌 세력보다 훨씬 작긴 했지만, 미국 공산당은 1920년대에 대략 1만 명의 노동자 투사들을 조직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노동총동맹>(AFL) 내 현장 투사들의 네트워크인 <노동조합 교육동맹>을 조직하는 데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의류노조와 광산노조에서 관료들에 대한 조직화된 도전을 이끌었으며, 철강·자동차·고무 산업의 미조직 노동자 사이에서 산업별 조직화를 위한 교두보를 구축해 냈다.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자, 공산주의자들은 퇴거를 막아내고 지역 수준의 긴급구호를 쟁취하는 실업 노동자들의 거대하고 전투적인 운동을 이끄는 데 힘썼다. 많은 학자들은 그러한 노력이 루즈벨트 정부로 하여금 공공노동 프로그램과 연방재정 실업보험을 수립하도록 강제하였다고 믿고 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에 일어난 전투적인 산업 투쟁의 물결을 바탕으로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CIO)가 설립되었다. 공산당은 이 투쟁에서 다시 한 번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당에 가입한 노동자 수가 3만에서 4만 명 사이로 늘어났다. 1934년의 서부 해안 파업, 1936년의 아크론 고무 파업, 1936~37년의 플린트 점거 파업 같은 핵심적인 사건들을 거치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이 현장 전투성, 자기조직화, 민주당과 루즈벨트 정부로부터 독자성을 주창한 것은 승리를 쟁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민전선과 노동자 전위의 변질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는 유럽과 미국 노동자 전위들의 역사에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스탈린과 그의 관료집단은 이제 코민테른을 지배하고 있었고, 코민테른의 전략을 모스크바 정권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도록 뜯어 고치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노동자 운동을 분쇄했다. 이러한 패배들, 특히 독일에서 패배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정책 때문에 촉진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자본가들이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막아낼 것으로 기대하면서 그들에게 저항하지 말고 의지하라고 권고했다. 코민테른과 소련 지도부의 정치적 지도를 받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나치가 제기하는 위협을 과소평가한 채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사회 파시스트로 비난하는 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레온 트로츠키 같은 혁명가들은 노동자 운동과 그 전위들을 말살할 파시즘의 승리를 막으려고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공동전선에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여전히 분열된 채 소극적이었다. 그 결과 히틀러가 1933년에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조직된 노동자 운동은 어떤 저항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코민테른은 7차 대회에서 과거 자신의 초-좌익적인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때늦은 시도를 하면서 인민전선 전략을 채택했다. 인민전선은 본질적으로 1930년대 초반에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했던 것과 같은 전략이었다. 그것은 자유주의 자본가 정당과 선거연합에 나서고, 연립정부에 참여하며, 진보적인 자본가들과 연합을 위협하는 모든 형태의 노동자 전투성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인민전선 전략의 귀결점은 파시즘에 대한 차악으로서 자본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적 또는 준-혁명적 고조를 무산시키는 것이었다. 1940년까지 인민전선 전략은 노동자 운동을 우익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로 방치함으로써 약화시켰다.

프랑스에서 노동자는 1936년 인민전선의 선거 승리를 그들의 정부가 권력에 들어선 것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일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주요 자동차 공장과 철강 공장에서 점거 파업을 비롯한 거대한 파업 물결을 이끌었다. 하지만 공산당 지도부는 자신의 당원들과 그들을 따르는 노동자들에게 부르주아 급진당과 관계를 긴장시킬 수도 있는 파업을 언제 끝내야 하는지알 필요가 있다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 뒤 몇 년 동안 노동자가 흩어지고 사기가 꺾이면서 1940년 나치가 침공하고 비시 협력정권이 나타난 기간에 프랑스가 무너졌다.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의 결과가 훨씬 더 파멸적이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스페인 군부는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연합한 인민전선의 승리에 19366월 쿠데타로 응답했다. 초기의 군사적 공격을 저지했던 것은 오로지 중요한 산업부문과 농업부문에서 무장한 노동자 민병대를 대중적으로 조직해 낸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많은 생디칼리스트들과 다른 혁명적 노동자들은 1937년 봄 카탈로니아에서 혁명적 과정을 심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때 공화파 군대를 통제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프랑코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던 노동자 민병대를 무장해제 시켰다. 노동자가 무장해제된 것을 알게 된 프랑코 군대는 장기간의 공격을 시작하여 결국 스페인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인민전선 전략은 1930년대에 많은 혁명적 기회를 날려 버렸고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반동의 승리로 이어졌다.

나아가 인민전선 전략 때문에 유럽 공산주의 지도부의 정치와 사회적 구성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정치와 사회적 구성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한 뒤에도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로 평화적으로 이행해 가는 단계로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창조하려고 계속해서 진보적인 자본가들과 연합을 추구했다.

공산주의 정책이 우경화하는 것은 모스크바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러한 변화를 열심히 그리고 빠르게 받아들였다. 공산당의 보수화는 공산당 당원들과 지도부들의 성격이 차츰 변화하도록 영향을 미쳤고 가속시켰다.

프랑스에서는 1930년대에 시작되고 이탈리아에서는 194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공산주의자들은 주요 노동조합 연맹의 공식 지도부를 맡게 되었다. 1960년대 말까지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반()합법 노동조합의 지도자가 되어 갔다. 인민전선의 이해관계 속에서 노동자 행동주의가 체계적으로 해체되자, 노동자 당원들은 현장 지도자에서 노동관료로 탈바꿈했다.

당 기구의 성장 그리고 공직자로 선출된 당원들의 확대가 결합되면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 영국,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성격을 닮아 갔다.

공산주의 노동관료들과 선출된 공직자들은 세계대공황이 끝나면서 시작된 장기 경제호황 시기에 좀 더 높은 임금과 늘어난 국가복지 지출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 전위들이 노동관료체제에 통합되면서 유럽의 노동자 운동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오랜 침체를 대처할 수 없었다. 지구적인 수익성 위기의 시기에 전후의 노사 평화를 지속하려는 유럽 공산주의자들의 시도는 자본가들의 공격과 긴축 드라이브를 막아낼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전선 전략을 채택하자, 미국은 그 영향 때문에 훨씬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이 민주당과 자본가 국가로부터 정치적 독자성을 가져야 하며 노동자 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곧바로 공산주의자들은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 지도부가 1936년 루즈벨트의 재선을 위해 벌이던 캠페인의 보병으로 전환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존 루이스나 필립 머리 같은 노조 지도자들 그리고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 관료체제와 장기간 연합하는 중도좌파전략을 펼쳤다. 공산당은 이 노조 지도자들이 루즈벨트를 지지하고 소련과의 집단안보 협정을 지지했기 때문에 진보적이라고 판단했다.

공산주의자 노동조합 간부들은 이러한 연합을 유지하고 당원들을 위한 사무국 일자리를 얻으려고 새로 형성된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 안에서 자신들이 지닌 영향력을 이용해서 1937년 봄 점거 파업이 크라이슬러와 다른 무노조 기업들로 퍼지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았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1936~37<산업별 노동조합 회의>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이었던 전투적인 전술들과 조직형태들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중도좌파전략의 첫 번째 열매는 1937년 봄 리틀 철강회사를 조직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것이었다. 몇 백 명의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철강노동자 조직화위원회>의 조직가로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필립 머리의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인 조직화 전략에 결코 도전하지 않았다. <철강노동자 조직화위원회>가 리틀 철강에 맞선 파업을 이끌었을 때, 시카고 경찰은 무장하지 않은 조합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총을 쏘았다. 그 사건은 추도 기념일의 학살로 영원히 남아 있다. 머리와 공산주의자들은 루즈벨트에게 철강회사 사장들과 시카고 시장 그리고 펜실베이니아와 오하이오 주지사를 단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둘 다 그만해라고 말할 뿐 뉴딜 민주당 시장과 주지사들에 대한 질책을 거부했다. 리틀 철강 파업은 패배했고, 기간산업에서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가 벌여온 공세는 끝났다.

공산주의자들이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 관료체제의 중하층으로 통합되고 그에 따라 현장으로부터 고립되는 양상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더욱 깊어졌다. 나치의 침공으로 소련이 미국, 프랑스, 영국과 군사 동맹을 맺게 되자 미국 공산당은 열광적으로 미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노동총동맹><산업별 노동조합 회의> 지도부가 공히 무파업 서약에 서명하면서 전쟁 기간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키기 위한 어떤 작업장 행동도 포기하였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그 서약의 가장 열성적인 집행자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1943<연합광산노조>의 파업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그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것은 전쟁 기간 동안 자동차·철강·고무 산업의 노동조합에서 공산주의자 직장대표들, 지부 간부들, 권역 사무국원들이 한 역할이었다. 공산주의자 노조 간부들은 때때로 처음 선출될 때에는 투사였지만, 임금과 노동조건을 둘러싼 승인되지 않은 비공인파업들에 참여한 노동자를 징계하고 해고하는 데서 경영진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노동 규율의 집행자로서 한 역할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 현장 노동자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게 되었다.

냉전이 시작되자, 노동자 전위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에서 떨어져 나갔다. 1945년 이후 자본주의 세계의 지도권을 장악한 미국의 지배계급은 전쟁 기간 동안 소련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공산주의에 맞선 냉전을 선언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미국 내 모든 형태의 급진주의를 겨냥한 마녀사냥을 시작하면서 반()공산주의를 활용했다.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 지도자들은 노조 관료들에게 정치적 충성을 요구했던 트루먼 대통령 정부와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급진파들을 숙청했다.

전후 미국에서 사회주의 정치와 노동자 계급의 삶이 이렇듯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노동 관료들은 이렇다 할 반대에 부딪치지 않고 <미국노동총동맹-산업별노동조합회의>(AFL-CIO)로 통합되게 된다.

유럽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노동조합 지도부 또한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된 자본가들의 공세에 대응할 어떤 전략도 제시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혁명적 좌파의 위기

 

유럽과 미국에서 노동자 전위가 다시 구성되자,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혁명적 사회주의 좌파의 정치적 지형은 급격히 바뀌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위한 노동자 계급 청중은 대중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제법 있었지만 사라져 버렸다. 오랫동안 이어진 자본주의 성장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계급의 많은 부분에게 번영을 가져다주었고, 20세기 초반에 급진적인 노동자 활동가들의 새로운 층을 만들어내고 키워냈던 거친 투쟁의 필요성을 차츰 줄여 나갔다. 유럽과 미국에서 혁명적 좌파는 1950년대 내내 정치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비난받았고 고립되었다.

1960년대에 학생운동, ()제국주의운동, 여성운동, 인종차별철폐운동이 급진화 되자, 이러한 작은 혁명적 집단의 고립은 새로운 활동가들이 충원됨에 따라 끝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자본주의 위기가 시작되자 이 집단들의 다수가 노동자 계급 속에 뿌리내리려고 했을 때, 그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혁명가들과 급진파들이 마주쳤던 것과 아주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1960년대에 미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있던 것과 같은 전투적인 노동조합주의와 계급연대의 전통 속에서 육성된 거대한 노동자 계급 대오들이 전혀 없었다. 흑인 지도자들과 <흑표범당> 같은 흑인 조직들을 정부가 체계적으로 살해하고 탄압한 것은 1960년대에 급진화된 작고 포위된 활동가 층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대다수가 흑인운동과 반전운동의 급진화에 영향을 받은 젊은 노동자는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대단히 많은 비공인파업을 이끌었지만, 1974~75년 세계 공황 동안과 그 이후에 계급투쟁의 정치적경제적 지형이 변화해 나가는 것을 타개할 전략적 시야를 갖지 못했다. 민주당에 의존하고 관례화된 집단교섭에 의존하는 노동관료의 전략에 일관된 대안을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전위들의 대다수는 1980년대의 공장폐쇄와 정리해고를 겪으며 사라져 버렸다.

마오주의자든, 트로츠키주의자든, 생디칼리스트이든, 좌파 사회주의자든 1970년대의 혁명적 좌파들은 이 변화된 정치 현실을 깨닫지 못했다. 많은 극좌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첫째 광범한 노동자층이 이미 작업장에서 행동에 나서고 있으며 빠르게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것이다. 둘째 깊어가는 자본주의 경제 위기가 1970년대 초반의 미숙한 현장 운동을 1930년대와 비슷한 대중파업의 물결로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이 시대에 노동자 계급에게 눈을 돌린혁명가들은 주된 과제가 그들의 당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목표는 빠르게 급진적으로 되고 있는 노동자층을 그들의 올바른 노선으로 획득하는 것이었다. 경쟁 상대인 당은 분쇄되어야 할 약탈자로 여겨졌다. 불행하게도 모든 당 건설 시도들은 별로 없었고 사회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1970년대 혁명적 좌파의 예상은 현실에서 빗나갔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미숙한 현장 운동은 1974~75년의 세계 공황과 뒤이은 자본주의 구조조정에 의해 다른 것들과 함께 파괴되었다. 대다수 혁명적 좌파는 또한 노동관료들이 자신의 생존기반인 노동자 계급의 수동적인 부분들에게 갖고 있는 장악력을 과소평가했다. 거의 20년이라는 무기력의 세월이 있고서야 노동자 계급의 여러 부문들이 변화된 환경 아래서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1970년대 혁명적 좌파가 겪었던 비극의 많은 부분은 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노동자 전위들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에서 야기되었다. 작업장과 지역에서 노동자 계급 자기행동과 자기조직화의 살아있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노동자층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은 모든 당 건설기획들이 부딪쳤던 암초였다.

[연대]에 속한 우리가 전위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당 건설 그룹들이 위기에 빠져들자, 그 성원들의 대다수는 노동자 계급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급진파들과 혁명가들의 대다수는 오른쪽으로 이동하거나 활동을 그만 두었다.

노동자 계급과 혁명적 정치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1970년대를 살아남은 소수의 조직들과 개인들은, 노동조합이나 다른 대중운동에 몰두하며 사회주의 조직은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하다면서 단념하든지, 아니면 그들의 본래 전위주의적인 기획들을 다시 강조하면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우선 과제는 그들의 혁명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연대]는 미국의 혁명적 좌파가 처한 위기를 그에 걸맞게 타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날 미국에서 급진파들과 혁명가들이 마주한 실제 상황에 정면으로 대처함으로써 개량주의와 전위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4.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 좌파를 건설하기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활동가로서 우리는 60년 전에 또는 심지어 30년 전에 우리의 정치적 선배들이 다루었던 문제들과 엄청나게 다른 일련의 문제들과 대결하고 있다. 미국의 노동자 민중 운동은 1970년대 이래 일련의 깊은 패배들로 고통 받았다. 자본가들의 공세는 성공했다. 오늘날 노동조합은 1930년대 초반 세계대공황 이후 어느 때보다 약하다. 살아남은 노동조합은 임금과 수당 그리고 노동조건을 헐값에 팔아넘겼다.

한편 민주당과 공화당은 1930년대에 노동자 운동이 쟁취했던 실업보험이나 사회보장 등을 해체하는 데서 상대를 능가함으로써 기업의 기부와 상층 중간계급의 표를 더 많이 따내려고 경쟁하고 있다. 또한 1960년대 사회 운동의 성과물로서 크게 확대되었던 부양 아동을 가진 가족에 대한 원조, 식량배급, 직업훈련 프로그램, 학자금 융자 등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

자본가의 공세와 국가의 긴축 드라이브에 맞선 저항이 없지는 않았다. 노동조합에 조직된 노동자는 양보에 도전해 왔다. 미네소타 주 오스틴의 호멜 식품공장 <식품상업연합노조> P-9지부, 왓슨빌 통조림 노동자, 일리노이 주 데카투르에서 파업에 나선 스탤리 노동자, 그리고 최근에는 미시건 주 플린트와 오하이오 주 데이튼 GM 공장의 <미국자동차노조> 조합원들이 반격을 시도해 왔다.

몇몇 승리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 파업의 대부분은 <미국노동총동맹-산업별노동조합회의> 공식 지도부의 전략과 전술 때문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결과 이러한 노력들은 광범한 노동자 운동 속에 별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헌신적인 활동가들의 네트워크가 동성애 권리 운동과 여성해방 운동 내부에 남아 있다. 그들은 에이즈에 맞서는 정부 행동과 생식에 관련된 의료를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정부 기금을 요구하면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재정긴축 논리에 도전한다. 유색인 활동가들 또한 경찰의 잔인함, ()이민자 정책, 그리고 <소수자 차별철폐를 위한 적극적 우대조치>에 대한 공격에 계속해서 맞서 싸우고 있다. 새로운 환경운동 조직들, 특히 노동자와 유색인 주민들을 묶어내고 있는 조직들 또한 저항의 중요한 중심이다. 하지만 폭넓은 기반을 갖춘 반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이 투쟁들은 고립되고 허약한 채로 남아 있다.

최근 20년 동안 투쟁은 새롭지만 수적으로 작고 정치적으로 다양한 노동자 민중 전위들을 만들어 냈다. 현존하는 노동조합 안에는 소규모이고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자가 아닌 노동자 투사 층이 있다. 그들은 양보에 맞선 투쟁과 노동조합의 새로운 활성화를 위한 투쟁 속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민주노조를 위한 팀스터즈><미국자동차노조> <새 방향 운동> 같은 현장의 개혁 모임들에서 활동하면서, 또는 1980년대의 <식품상업연합노조> P-9지부나 오늘날 스탤리 노동자와 같은 전투적인 지부의 투쟁을 이끌면서, 이 노동자는 연대 의식을 발전시켜 왔다. 이 새로운 노동자 전위들은 양보와 다양한 형태의 노사협조주의를 반대하면서 전투성을 추구하고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노동자 투쟁과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의 정치적 지향은 아주 다양하다. 아주 얇은 노동자층 속에서 훨씬 적은 소수만이 노동관료의 실리적 조합주의모델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며 이윤논리와 경쟁논리에 이의를 제기한다. 노동자 운동 속에 있는 아마도 몇 백 명의 의식적인 사회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오늘날 노동자 전위들의 대다수는 모순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다.

개별적인 투사들은 양보와 총체적 품질관리그리고 다른 형태의 노사협조주의를 거부할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회사가 이윤을 내고 경쟁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다른 노동자 활동가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같은 반()노동자적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고 민주당과 단절할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로스 페로 같은 우익 선동가들의 호소에 쉽게 흔들린다.

아마 지난 10년 동안 가장 뜻 깊은 발전은 의류, 전자, 식품가공, 레스토랑과 기타 서비스 등 미국 경제에서 점점 늘어나는 저임금 부문에서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려는 노력 속에서 공동체 노동자 행동주의가 떠오른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오클랜드, 텍사스 주의 엘 파소,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로키 마운트, 그리고 뉴욕 시와 같은 다양한 지역에서, 노동자 계급 활동가들은 이주 노동자와 흑인 노동자를 조직하려는 노력을 펼치면서 노동자 정치와 인종차별철폐 정치를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노동자 센터들은 대부분 1960년대와 1970년대 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가들이 시작했다. 노동자 투사들이 그들의 산업과 공동체 그리고 투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자본주의 구조조정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교육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연대]는 오늘날 혁명가들이 이 전위들을 재건하는 데 힘을 쏟고 이러한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 활동가들 속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의 발전을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거대한 투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조합과 노동자 센터들 그리고 사회 운동 조직들 속에 있는 가장 활동적인 투사들 속에서조차 당장에 큰 규모의 반향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민중은 조직화되고 고용주나 정부에 집단적으로 대항할 때 사회적 힘과 급진적인 의식을 발전시킨다. 대중의 성공적인 자기조직화와 자기행동에 관한 살아있는 경험이 없다면, 급진적인 사회변혁이라는 사상은 대다수 활동가들에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양보나 총체적 품질관리에 대한 저항을 건설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현장의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의류 산업의 이주 노동자를 조직하는 어려운 투쟁 속에 뛰어들어 있는 노동자 센터 활동가들에게, 합법적으로 낙태할 권리에 대한 최근의 공격에 맞서 생식에 관한 권리를 내걸고 조직하고 있는 활동가들에게, 혁명이라는 개념은 때론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아마도 혁명적 사회주의는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 투사들에게 단지 개별적으로만 파고들 수 있다. 반면 혁명가들은 오늘날 미국의 작고 포위된 노동자 전위들 전체를 통틀어 계급의식과 행동주의를 촉진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오늘날 혁명가들의 주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광범한 노동자 활동가 층을 전투성, 연대, 민주주의, 독자적 정치행동이라는 정치적 방향을 갖고 조직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노동조합들, 노동자 센터들, <레이버 노트>처럼 산업을 가로지르는 네트워크들, 동성애자·여성·흑인 조직들, 그리고 독자적 정치행동에 관련된 노력들을 통해서 (반드시 사회주의적이지는 않더라도) “계급투쟁정치를 촉진하는 것은 가능하고 필요한 일이다.

노동조합들, 노동자 센터들 또는 운동 집단들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활동가들의 다수는 사회주의 혁명이 오늘날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 행동, 다른 노동자들이나 억압받는 집단들과 연합, 민주적인 조직, 민주당으로부터의 자주성이야말로 자본가들과 국가에 맞서 지난날 거둔 성과물을 지켜내려는 효과적인 전략의 기초가 된다는 사상에는 열려 있다.

계급투쟁 정치에 헌신하는 활동가 층의 발전은 노동자 계급과 민중 투쟁의 다음 물결이 현실로 나타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대안 지도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관료들과 흑인·여성·동성애자 조직들의 중간계급 지도자들은 투쟁이 제 길에서 벗어나 관례화된 집단교섭이나 로비, 민주당 선거운동, 기타 정치적 파탄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고 있다.

계급투쟁의 시야를 가진 급진적인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는 노동관료들 그리고 민주당과 연합하는 운동 지도자들에 맞서 대안 지도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래의 투쟁들이 지난 20년보다 더 성공적이고 자립적인 것이 될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이 활동가들 속에 의식적인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 이르면 노동조합들을 투쟁하는 조직으로 완전히 바꾸어 내고 자본과 국가에 맞서 성공적인 투쟁을 만들어 낼 능력을 투사들이 갖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이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새롭게 고조되는 것은 또한 노동자 전위들의 규모와 정치적 급진성을 증대시킬 것이며, 미국에서 혁명 정당을 건설할 기반을 만들어 낼 것이다. 구체적인 투쟁 속에서 혁명적 전략이 실천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활동가들을 사회주의 정치로 획득하고 혁명 조직들로 끌어들이는 데서 중심적인 문제다.

오늘날 미국에는 노동자들이나 활동가들 사이에서조차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위한 큰 규모의 청중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연대]는 여전히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 운동의 위기에 대한 그리고 생식에 대한 권리 운동의 재건 전략에 대한 소책자들을 발행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조합 혁신운동, 노동자 센터들, 인종차별철폐 운동, 생식에 관한 권리 운동, 동성애자 운동 속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 있는 개별 활동가들을 끌어당기고자 한다.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이야말로 활동가들을 사회주의자이자 맑스주의자로 충원하고 육성하는 데, 운동의 행동주의를 조직하고 안내하는 데, 오늘날 혁명가들이 마주한 구체적인 현실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분석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지금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면서 우리는 장차 혁명적 위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될 새로운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제들을 이루는데 맑스주의의 고전적인 전통이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고 믿는다. 맑스, 엥겔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의 저작들은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갖가지 상황들을 해결해 주는 선험적 도식이 아니다.

그것들은 시민권을 갖지 못한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 계급적 착취와 성적·인종적·민족적 억압의 관계라는 어려운 문제들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고전적인 맑스주의 전통은 선진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당면 경제위기의 명확한 형태와 한계들에 대해, “생산과 유연생산이라는 노선에 입각한 노동과정의 세계적 구조조정에 대해, 미국에서 노동자 민중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연대]는 이 질문들에 대한 모든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집단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미국에서 노동자 전위들의 작은 규모, 조직적 허약함, 정치적 다양성은 어떤 혁명가 집단의 발전에도 심각한 한계를 안겨주고 있다. 우리는 현존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들 모두를 합친다 해도,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 활동가들의 경험을 종합하고 오늘날 미국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좌파들이 강령이라 부르는) 일관된 전략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전위 정당이나 그 중핵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연대]에 속한 우리는 공동의 실천과 전망이라는 기초 위에서 다양한 혁명적 경향들이 함께 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재결집을 주창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가 가르칠 것도 많겠지만 다른 사회주의 투사들로부터 배울 것도 많으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노동조합 혁신 그룹들, 노동자 센터들, 그 밖의 여러 운동 조직들 속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사회주의 전통을 가진 많은 동지들을 만나고 있다. 그들의 다수는 중국, 쿠바, 이전의 소련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현존하는 노동조합들 속에서 현장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고 우리가 강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수는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을 건설하는 데 민주당을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기여할 수 있는 많은 쓸모 있는 생각들을 우리가 갖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는 또한 배워야 할 게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 동지들의 다수는 미국 노동자 계급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부문들, 즉 미국의 저임금 산업에서 일하는 주로 이주 노동자이고, 주로 미등록이며, 종종 여성들인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서 폭넓은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그들에게 주고 있다. 그들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조직하면서 작업장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대처해야 했다. 그들은 공장에서 현장 노동자 위원회들을 세우고 공동체 속에 노동자 센터들을 세우면서 현존하는 관료적 노동조합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전략을 다듬어 왔다. 인종차별철폐 활동가들과 함께, 이 동지들은 유색인 공동체들 속에서 사회적 힘을 어떻게 재건할지에 대한 전략을 다듬어 왔다.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문제들에 대하여, [연대]에 속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정치적 방향에 대한 우리의 열려 있고 실험적이며 겸허한 접근은 오늘날과 미래에 혁명적 재결집을 촉진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미국에서 노동자 계급과 민중의 투쟁이 다시 고조된다면, 새로운 급진적 노동자층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망으로 우리와 다른 혁명가들이 새롭게 나타난 중요한 급진적 노동자층과 건강하게 소통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고조를 준비하면서, 혁명적 좌파는 새롭게 급진화된 노동자들에게 전해 줄 노동자 계급 투쟁을 위한 전략과 전술의 체계, 그리고 이 새로운 전위의 경험과 이론화를 우리가 배울 수 있게 해 줄 활동과 토론의 방법 양자를 필요로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꽤 많은 규모로 급진적으로 된 노동자층이 이러한 방식으로 종합되는 것을 통해서만, 혁명 정당의 진짜 핵심은 미국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연대]와 결합하라

 

우리는 주장한다. 당신이 활동가이고 이 소책자의 분석이 설득력 있다고 여긴다면, 우리와 결합하라. 우리는 전투적 노동자와 활동가 층을 다시 세우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를 운동으로 조직하기 위해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바란다. [연대]에 결합함으로써 당신은 그 다수가 당신과 똑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활동가들의 거대한 네트워크와 당신을 연결시키게 될 것이다. 당신은 또한 사회주의 이론을 소중히 여기며 그 성원들의 교육에 힘쓰는 사회주의 조직에 결합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의 조직이나 집단이 이 생각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우리는 다양한 좌파 전통을 가진 사회주의자들과 활동가들이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에서 사회주의 좌파를 다시 세우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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