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1968년 5월 - 하나의 파열?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5월호

1968년 5월 - 하나의 파열?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3

19685- 하나의 파열?12

 

M. Seidman


 

1968년에 일어난 전세계적인 혁명적 소요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지금까지 그 어떤 시기에 일어났던 소요보다 더욱 컸다. 파리에서 베이징까지, 정부들은 여러 가지 불안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1968년의 전지구적 폭동들(revolts)18세기 말에 일어났던 대서양 혁명들 또는 1848년의 유럽 혁명들에 견줄만한 국제적인 혁명의 물결을 만들어 낸 듯 보였다. 파리는 1789년과 1848년처럼 다시 한 번 반란의 중심이었다. 비록 이번에는 파리가 운동을 주도하지 못했지만(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의 대격변들이 파리의 운동에 선행했다), 프랑스의 수도는 학생과 노동자의 불안이 한꺼번에 터진 최초의 주요 무대가 됐다. 세계 곳곳의 혁명가들과 급진적 개혁가들은 프랑스의 학생과 노동자의 결합된 항의들(protests)이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데 거의 성공하리라고 믿었다. 어떤 사람들은 파리가 다른 반란들(rebellions)뛰어넘었다고 주장했다. 폭동이 일어나는 동안에 그리고 그 뒤에도, 반란자들은 낙관적이었다. 그들은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아하고 외쳤다.

프랑스 5(19685~6월의 사건들에 대한 속기(速記)로서 가끔 사용되는 말)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 사건들은 과거와의 단절이자 프롤레타리아 혁명(많은 급진주의자들이 그 당시 생각했던)의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좀 더 해방된 사회에 이르는 문화적 반란의 시작으로 보였다. 거의 대부분은 1968년 봄의 위기가 프랑스를 뿌리째 변화시켰다는 데 동의한다. 그것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5월 당시의 여파 속에서 그리고 그 뒤의 해들에서 그 사건들은 책과 음악의 발행자들에 의해 과도하게 남용되었다는 경찰의 주장은 놀랍지 않았다. 출판업의 폭발적 증가는 그때 수상인 퐁피두(Georges Pompidou)의 판단을 뒷받침했는데, 그는 위기의 한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5월 사건들의] 유일한 역사적 선례는 15세기다. 그때 중세의 구조들이 무너지고 있었고 학생들이 소르본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정부도, 제도들도 심지어는 프랑스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문명이다.”

퐁피두 내각의 문화부장관인 말로(Andre Malraux)는 자신의 상관에 동조해 그 사건들을 획기적인 문명의 위기 …… 우리는 연극의 시작에 있다.”고 말했다. 말로는 멕시코에서 일본에 이르는 전 세계 청년들의 전례가 없는 포기우리의 문명이 알고 있는 가장 극도의 위기들 가운데 하나라고 털어놨다. 파리의 백작이자 파리시 경찰국장인 그뤼모(Maurice Grimaud)는 그 운동이 지닌 깊은 뜻을 청년들의 부패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 거부라고 믿었다. 5월 운동에 대한 그러한 적대자들에게 조차도, 그 사건들은 극적이었고 아주 중요하고 컸다.

역사가들, 사회학자들, 그리고 물론 언론인들은 이러한 개념화를 따라갔다. 그 사건이 터지고 난 뒤 두 명의 보고자는 “5월의 폭발을 프랑스를 뿌리째 개조하는 것으로 여기는 상세한 역사를 제공했다. “몇 주 동안 모든 것, 즉 낡은 방식들, 습관들, 관습들, 그리고 이념들은 붕괴됐다. …… 이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 역사는 1968년 전후로 나누어 질 것이다.” 당쎄트(Adrien Dansette)가 쓴 ?19685?은 그 사건들 이후 3년을 보여주었고 위기의 정치사를 제공했다. 당쎄트의 접근법은 프랑스 역사의 위대한 사건들을 정당하게 연대순으로 기록했던 전통적인 정치사가의 접근법을 따랐다. 이러한 사건들의 압도적인 중요성을 확신한 영미 언론인들은 자신들이 당쎄트보다 급진적 행위자들의 행동들과 시각에 더 동조적이었을지라도 이와 비슷한 접근법을 채택했다. 그들의 이야기들은 1968년을 혁명적인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위기와 같은 것으로 위지 지었다.

5월에 대한 주요 프랑스 사회학자들의 저작들 또한 5월은 맹아적 위기였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었다.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학생들, 특히 낭떼르의 사회과학부 학생들을 관료제적 소비사회 문명에 도전했던 그리고 거의 혁명에 성공했던 주요 행위자들로 단정했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학생들은 위기 동안에 거리를 정치화했고 사회적 공간을 전유했다. “도시 공간의 재정복을 향하여나아감으로써, 항의자들은 1871년의 파리 코뮨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모랭(Edgar Morin), 르포르(Claude Lefort), 그리고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는 자신들의 널리 유포된 책에서 그 사건을 순응주의적 소비사회와의 환영할 만한 단절로 보았다. 이 프랑스 사회학자들/철학자들 삼인방은 그 반란을 새로운 사회질서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동료 사회학자 투렌느(Alain Touraine)는 그 운동을 이와 유사한 용어들로 이해했다. 5월은 구체제의 위기를 나타냈는데, 대부분의 그의 동료들처럼 그도 구체제를 경직되고 억압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5월의 장엄함이 체제에 남긴 유일한 반응은 치안이었다.” 5월 운동은 거대한 전환점을 만들어 냈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산적활동들의 영역 밖에 있다고 간주됐던 도시 생활, 욕구와 자원의 관리, 교육의 영역들에서 출현하고 있고 조직되고 있다.” 5월은 부르주아와 노동자들 간의 낡은 계급투쟁을 대체할 새로운 사회운동의 탄생을 촉진했다.

투렌느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19세기 후반의 농민들처럼 20세기 후반에는 쇠퇴하는 계급이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더는 부르주아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제5공화국의 기술관료지배(technocracy)와 싸움으로써 계급투쟁을 재발명했다.” 청년들은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참여를 요구함으로써 기술관료지배에 도전했다. 대중 대학(mass university)의 학생들은 그들이 근대 산업사회의 생산적 장치의 일부였던 이래로 혁명적 행위자들로 발전해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자 또는 심지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반()기술관료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폭동을 일으켰다. 19685월은 산업사회들의 사회사에서 새로운 시기의 탄생을 특징지었다.” 5월 운동은 권위주의적 합리주의근대 경제를 동반한 낡은 사회에 맞서는 건강한 반응이었다. 5월과 6월의 사건들은 대단히 비상하고 중요해서 투렌느는 그 사건들이 노동자운동이 자본주의적 산업화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근본적이고 지속적일 새로운 갈등들을 일으키리라고 예언했다. 1960년대의 많은 영미 역사가들은 10년간의 정치적/사회적 변형 기획들에 계속해서 초점을 맞춰왔다. 밀러(James Miller)10년 동안의 미국 신좌파를 참여 민주주의와 동일시했다. 긴스보그(Paul Ginsborg)는 이탈리아의 1968년에서 1973년에 이르는 기간을 집합 행동의 시대라고 한다.

아롱(Raymond Aron)5월 운동에 대한 적대감과 독립적인 지식인이라고 세간에 알려지긴 했지만 자신의 동료 사회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대부분의 분석에 동의했다. 아롱은 자신의 동료들처럼 자주관리(또는 노동자 통제)를 폭동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로 이해했다. 그러나 아롱은 투렌느, 모랭, 르포르, 르페브르, 카스토리아디스 등등과는 달리 자주관리는 불가능하고 심지어 어리석은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는 선진 산업사회의 대학들과 작업장들은 민주적으로 관리될 수 없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아롱은 모랭-르포르-카스토리아디스 삼인방에 찬성해 말의 해방(unfettering of speech)은 존재할 수 없는 혁명이라고 자신이 말했던 그 사건들을 정의(定義)한다고 믿었다. 아롱은 삼인방과 다른 관찰자들(세르토)이 그랬듯이 이러한 말의 해방에 환호하기는커녕 그것을 혹평했다. 그는 학생 반란자들을 플로베르가 ?감정교육?에서 익살스럽게 조롱한 유토피아적 발언들과 장황한 무의미를 지닌 1848년의 지식인 집단의 구성원들에 비유했다. 결국 학생들은 아롱이 현실의 혁명이 아닌 사이코드라마또는 상징적 폭동이라고 부른 것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아롱도 5월은 문명의 위기이고 과거와의 단절이었다는 자신의 동료 사회학자들의 견해를 공유했다. “그들[혁명적 학생들]은 진지하게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들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구질서를 파괴했다.” 비록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었지만, “부르주아 학생들은 …… 서양 문명 전체의 불안을 표현한다.” 그들은 근대 질서의 취약성“20세기 자유주의적 프랑스의 취약성을 보여주었다.

신문, 잡지, 대중서와 학술서는 5월의 10주년, 15주년, 20주년, 25주년, 30주년 기념일마다 분석, 논평, 그리고 재발간물들을 반복해서 제공했다. 최초의 10주년 의식 때, 프랑스 학자들과 대중 매체들은 5월을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자신들의 견해를 고집했다. 1978, 모랭 등은 문명의 위기라는 진단을 다시 긍정했다. 관료제와 기술관료지배에 대한 비판자로서 삼인방은 5월을 불모의 사회질서와의 단절이자 자주관리를 향한 건강한 일보(一步)라며 환영했다. 댈아래(Alain Delale)와 라가쉬(Gilles Ragache), 자신들의 ?68년 프랑스?(1978)에서, 이른바 혁명적 위기를 다시 강조함으로써 그리고 대부분의 이전의 연구들이 지닌 파리 중심적 접근법을 포기함으로써 이러한 관점을 지지했다.

마찬가지로 1978년 드브레(Régis Debray)는 그 사건들을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의 요람이라고 썼을 때 현재의 지배적인 해석을 예상했던 것이다. 달리 말해, 위기는 여전히 혁명적이었지만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적이 아니라 부르주아적이었다. 드브레에게 있어서, 19685월은 새롭게 산업화된 프랑스를 굳건히 지배하던 농민 정신을 변화시킨 신자본주의의 뉴-에이지 문화를 이끌었다. “자본주의적 발전 전략은 5월의 문화혁명을 요구했다.” 1978년 제3세계주의자 드브레는 5월이 서구 근대성의 책략임을 확인했다.

언론인 조프랭(Laurent Joffrin)?685: 대사건의 역사?20주년 기념일에 나왔고 유사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혁명을 너무도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그 사건들은 과거와의 확연한 단절이었다고 단정했다. 5월은 모든 것이 실현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다른 세 명의 사회학자들은 5월 운동이 새로운 가치들새로운 형태의 사회성둘 다를 생산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정치학자(그리고 전()트로츠키주의자) 웨버(Henri Weber)“685월의 지진과 그것의 여진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여전히 폐쇄된 사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에 동의했다. 20주년 기념일에 책과 시청각 자료 모두 성공을 거둔 아몽(Hamon)과 로트망(Rotman)?세대?는 수많은 출구를 가진 분주한 주요 주간(州間) 고속도로가 된 다가(多價)적인 5월을 가정했다. 이 저자들에게 있어서, 5월은 페미니즘, 테러리즘의 절정, 그리고 마침내 관용적이고 다원적이며 해방된 민주주의적 의식에 이르렀다. 역사가 프로스트(Antoine Prost)?세대?5월에 관한 문학에 독창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에 의문을 표했고 두 권의 책의 초점이었던 급진주의자 집단의 대표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세대?는 무명의 학생들 또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비교적 잘 알려진 투사들의 역사를 묘사했다. ?세대?는 여전히 전통적인 정치사의 경계 내에 있었고, 그것은 이 책이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유들 가운데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뒤퇴이유(Jean-Pierre Duteuil)?낭떼르 1965-66-67-68?도 투사들의 모험을 열거했지만, 이 책이 투사들의 문화적 활동들과 일상적 실존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작업은 낭떼르 대학의 극좌파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됐다.

1980년대 프롤레타리아 혁명/사회 혁명에 대한 희망의 소멸과 개인주의의 부활은 철학자들인 페리(Luc Ferry), 르노(Alain Renaut), 그리고 리포베츠키(Gilles Lipovetsky)의 해석들을 자극했다. 페리와 르노는 1968년의 혁명을 그들이 프랑스 혁명 가운데 처음 나타났고 그 뒤 진전된 혁명적 개인주의라고 부른 것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혁명적 개인주의는 두 가지 본질적인 측면을 포함했다. 첫째, 개인들은 평등의 이름으로 위계제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다. 둘째, 자유는 전통에 도전했다. 혁명적 개인주의의 궁극적 표현은, 페리와 르노에 따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위계제들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던 1968년에 나타났다. 이 철학자들은 5월의 본질은 그것의 반위계제적 본성이지 그것의 유토피아적 정치 형식들은 아니라고 단정했다. 5월은 계층화된 사회의 전통들과 관습들을 극적으로 변화시켰고 1980년대의 자기도취적 개인주의의 부흥을 예견했다. 따라서 1968년은 실패한 혁명이 아니었다. 그 대신, 1968년은 1789년의 혁명적 개인주의를 계승했고 그것을 좀 더 이기주의적인 방향으로 변형시켰다.

리포베츠키는 이러한 해석의 변종을 내놓았다. 비록 리포베츠키는 5월 운동에 훨씬 더 동조적이었지만, 그의 분석은 그 사건들에 적대적인 정신분석학적 해석들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너무 자생적이고 너무 자유의지론[자유지상주의]적이며 너무 자기중심적이었다는 일부 공산주의 지식인들의 가혹한 비난들을 얄궂게도 승인했다. 5월의 개인주의를 민주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이라고 여긴 페리와 르노와는 달리, 리포베츠키는 그것을 전복적이고 심지어는 아나키스트적이라고 분류했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일부 5월의 낙서들의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신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다.” “신은 나다.” 5월은 모든 집합적 강제들 또는 리포베츠키가 유토피아적 개인주의라고 했던 것에서 벗어나는 개인의 욕망을 표현했다. 급진주의자들은 대학의 위계제, 억압적인 국가, 그리고 전통적인 정치에 도전했다. 그들의 유토피아적 정신은 푸리에주의적이거나 오웬주의적인 시각들, 이를테면 이상 도시의 행정과 규제를 상세하게 기술한 고도로 연역적이고 초논리적인 유토피아적 철학들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5월은 자생적인 익살과 훨씬 더 쾌락에 가까웠다. 폭동은 1960년대 소비사회의 쾌락주의를 다시 강화했을 뿐이었다.

중요한 면에서, 리포베츠키의 견해는 5월을 자기중심적 세대의 개인적 문제들의 표현이라고 이해한 스떼환느(André Stéphane)의 그 사건들에 대한 적대적인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생각나게 했다. 마찬가지로 아롱의 사이코드라마5월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암시했다. 오이디푸스적 긴장들(oedipal tensions)의 표현들이 일부 문학 작품에 불가피하게 등장했다. 파세리니(Luisa Passerini)에 따르면, 유럽과 미국에서 68세대는 고아들이길 선택했다.” 그럼에도 정신분석학적 접근은 그것의 무()역사적 분석틀이 항의 운동들의 시의성과 내용을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개인주의적 해석들은 자연히 강력한 반대, 특히 사회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카스토리아디스의 반대를 일으켰다. “당대의 개인주의에 대한 예비(또는 가속화)라는 점에서 685월에 대한 해석은 모든 진실에 맞서서 우리 대부분이 살아왔던 역사를 다시 쓰고 그 사건들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더라도 사건들의 의미를 바꿔버린 내가 아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들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 카스토리아디스에 따르면, 5월은 개인주의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정반대, 재사회화”(re-socialization)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진실, 정의, 자유, 그리고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었다.” 보기를 들어 모택동주의자들과 같은 소집단들의 구성원들은 중국이 나치 사회나 레닌주의 사회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고 대중이 관료제를 제거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자기 분수를 알게 되길 꿈꾸었기 때문에 중국에 감탄했다. 이러한 시각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는 환상들을 양산할 수 있었다는 것은 또 다른 토론거리다.” 카스토리아디스에게 있어서, 5월의 본질은 관료제적이고 기술관료지배적인 엘리트들에 대한 이와 같은 강력한 도전이었다.

정치학자 라크루아(Bernard Lacroix)는 개인주의자들에게 또 다른 날카로운 비판을 가함으로써 카스토리아디스에게 동조했다. 라크루아는 페리, 르노, 그리고 리포베츠키가 1969년에 일어난 것에 실은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들이 지식인들이 그 사건들에 대해 말했던 것에 찬성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역사를 부정했다고 정확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 또는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다시 밝혀내길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위자들이 그들 자신의 행동들에 부여했던 의미를 철저히 무시했다.”이 모든 것 속에는, 어떠한 경험적 조사에도 견줄만한 철학자의 능력의 가장(假裝)된 우월성과 철학자의 방법들에 대한 재긍정이 있다.” 라크루아는 순수한 지성사의 방법들은 5월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주체들이 주장한 혁명적 행동들과 의도들을 인정함으로써만 그 사건들은 이해될 수 있었다.

카스토리아디스와 라크루아는 1968년에 실제 일어났던 것의 대부분을 무시한 리포베츠키, 페리, 그리고 르노의 해석들이 지닌 환원론적 본성을 폭로했다. 개인주의 학파는 노동자계급의 믿음이 1968년의 개인주의를 제약했던 정도를 망각했다. 그 시대의 급진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개인의 해방[자유화]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의와 결합됐다. 개인의 해방은 계급 집합성과 분리될 수 없었다. 더욱이 르노와 그 밖의 자들은 다소 유행에 뒤진 관념론의 전통에서 작업했고 오로지 사상(思想)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정치, 계급,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분석하지 않았다. 역사가 리우(Jean-Pierre Rioux)는 그들의 19685월은 정치적 목표와 노동자 파업 없이 신선하고 쾌락주의적이었다고 현명하게 언급했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해석들은 많은 명백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주요 난제를 시험했다. 비록 카스토리아디스와 라크루아가 그 학파의 소홀함과 단순한 방법론을 비판했지만, 개인주의자들은 5월은 카스토리아디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저 자주관리 사회로 나아가는 정향된 집합적인 정치적 기획만은 아니었다고 신랄하게 강조했다. 리포베츠키는 1968년의 진정으로 급진적인 개인주의의 본성을 적합하게 강조했다. 어떤 사회가 엥라제나 322운동과 같은 급진적인 학생들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었겠는가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반노동적, 반위계적, 그리고 일반적으로 반억압적 욕망들은 결국에는 어떠한 사회 질서도 전복했을 것이다. 5월은 자율적인 개인이 자주관리 사회와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냈다는 카스토리아디스의 자주관리적 관점은 어느 정도 순진하고 희망에 찬 말이다. 1960년대의 급진적이고 쾌락주의적인 개인주의는 학생의 자주관리나 노동자 통제와 양립할 수 없었다. 비록 리포베츠키가 가끔 아주 낙천적으로 전복적 개인주의의 억압을 무시하고 야만적 폭력의 쇠퇴와 참여의 자동적 증가를 단정하긴 했지만, 전복적 개인주의의 억압은 학생들과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데 꼭 필요했음을 입증했다. 개인주의적 해석과 반개인주의적 해석 양자 모두는 여전히 5월을 프랑스 사회의 심원한 파열로 이해했다. 각각은 그 사건들을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보수주의의 구체제에 대한 강렬한 도전으로 보았다. 페리, 르노, 그리고 리포베츠키는 드골 사회가 문화적으로 억압적이라고 가정했다. 카스토리아디스와 그의 동료 사회학자들인 투렌느, 모랭, 르포르, 르페브르, 그리고 심지어는 보수적인 아롱과 같은 진보주의자들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관료제적이고 기술관료지배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제5공화국을 정복하려 했다고 이해했다. 5월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5월은 항의자들에게 전통적이고 강제적인 드골체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기 시작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30주년 기념일은 출판물의 또 다른 물결을 일으켰다. 1998년 르페브르의 ?침입?, 투렌느의 ?운동?, 아몽과 로트망의 ?세대?, 그리고 조프랭의 ?685?은 몇몇 저렴한 5월의 역사서들과 함께 전부 재발간됐다. 아나키스트, 트로츠키주의자, 그리고 여타의 좌파 소집단들은 5월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영광의 순간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1차 자료들을 다시 찍어냈다. 특화된 연구들, 이를테면 유대인들, 콩방디, 카톨릭교도, 드골,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들도 나왔다. 르몽드, 파리 마치, 그리고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와 같은 주요 정기 간행물들은 특별 부록을 간행하거나 5월과 6월의 사건들을 자세히 열거하고 분석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동시에, 30주년 기념일은 또한 가장 방대하고 가장 진지한 5월에 대한 책들 가운데 하나인 르 고프(Jean-Pierre Le Goff)?685, 불가능한 유산?의 출간을 고무했다. 사회학자 르 고프는 ?세대?의 다가적인 5월의 주제들을 심화시켰다. 실로 5월의 분기적인 경향들은 불가능한 유산을 만들어냈다. 5월은 두 가지의 강력하지만 모순적인 흐름을 낳았다. 첫째, 자유주의적인 흐름/반문화적인 흐름(1960년대 미국인들이 변종들이라고 불렀던 것), 그리고 둘째, 레닌주의적 흐름/신맑스주의적 흐름(또는 미국의 속어로 과격파들”). 첫 번째 경향은 개인적이고 성적인 자유를 요구했고, 자유의지론[자유지상주의]는 수많은 유명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된 5월의 낙서들을 연결하는 주제가 됐다. “죽은 시간 없이 살자.” “장애물 없이 즐겨라.” “당신의 욕망을 현실이라고 생각하라.” “권태는 반혁명적이다.” “나는 자갈 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혁명을 할수록 더욱 더 나는 성교를 원한다.” 1968년의 두 번째 흐름은 학자들과 매체들로부터 비교적 관심을 덜 받았다. 프랑스에서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1968년의 항의들을 일으킨 소집단들, 즉 아나키스트든, 트로츠키파든, ()상황주의자든, 또는 모택동주의자들이든 간에 이들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할 것이고 혁명을 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압도적으로 노동자주의적이었다. 노동자 통제의 이데올로기는 노동자주의와 자유의지론[자유지상주의]를 종합하려고 했다.

노동자주의적관점을 부활시킨 아나키스트들, 트로츠키주의자들, 그리고 여타의 살아남은 소집단들의 시도에도, 1990년대까지 노동자주의적 관점은 개인주의적 논의에 의해 빛을 잃어갔다. 만일 어떤 사람이 5월은 사회를 정치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실패했다고 인정한다면, 5월은 문화적으로 성공했었다는 대중적 합의가 형성됐다. 노동자계급 혁명 또는 인민전선 대신에, 그 사건들은 쾌락주의, 자유의지론[자유지상주의], 개인주의의 분출을 풀어놓았다. () 관습[도덕]은 완화됐고 사회관계들은 덜 권위적이게 됐으며 사회는 좀 더 관용적이게 됐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30주년 기념 특별판에 따르면, 그 사건들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 잘못된 혁명을 만들어 냈다. 이 잡지는 5월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 문화혁명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 리포베츠키20년 전의 드브레와 같은와의 인터뷰에 몇 페이지를 할애했다. “5월은 더 이상 신자유주의와 협조 관계에 있지 않지만 여전히 존속되는 인습들의 매트릭스로부터 사회를 해방시켰다. 혁명적 폭력은 소비사회로부터 낡아빠진 관습들을 제거했다. 혁명적 폭력은 문화적 자유주의를 낳는데 도움을 주었다.” 파리 마치30주년 기념판에서 전() 수상 로카르(Michel Rocard)와 전() 학생 지도자 콩방디(Daniel Cohn-Bendit) 사이의 논쟁은 비슷한 논점을 강조했다. 콩방디는 “5월 운동은 정부를 바꾸기 보다는 삶의 양식을 바꾸길 바랐다고 말했다. 로카르는 학생 항의는 권위주의와 과도한 위계제에 도전했다고 맞장구를 쳤다. 콩방디는 당신은 두 번 재혼했는데 만일 5월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결코 수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5월은 도덕적 위선을 파괴했다고 말했다.

그러한 매체에서 5월의 유산이 과장되긴 했지만, 회의주의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1968년 봄의 사건들과 몇 년 뒤에나 분명해진 사회적/문화적 변동 사이의 연결 관계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영국과 독일과 같은 다른 사회들은 프랑스가 1968년에 경험한 막강한 노동자운동과 학생운동의 결합을 경험하지 못한 채 자유방임을 향한 비슷한 변형들과 경향들을 경험했다. 1968년 전의 구체제는 프랑스 5월의 분석가들이 구체제를 묘사한 것만큼 억압적이고 획일적이지 않았다. 사실상, 유럽과 미국에서는 5월 전후 시기 사이에 사회문화적 연속성이 있었다. 비슷하게, 노동자계급의 요구들과 욕망들에도 연속성이 존재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그들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요구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높은 임금과 적은 노동을 요구했다.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노동자 접합은 이례적이었다. 확실히,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이 5월에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것들은 주요 서구 국가에서 전혀 교차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선례를 반복하는데 가장 가까웠다. 그러나 프랑스의 중앙집중화는 자국의 학생과 노동자의 항의의 자발성을 고무했다. 좀 더 탈집중화된 이탈리아 반도는 학생 소요에 대한 노동자의 지체되고 지역화된 반응을 경험했다. 이탈리아 노동자운동은 프랑스가 최고조에 달한 1년 뒤에 “1969년의 뜨거운 가을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사건들을 5월의 연장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프랑스 5월 모델에 호소하면서 1969년과 심지어는 그 이후까지도 또한 포함했다.

그럼에도 결국 프랑스는 규칙을 입증한 예외가 됐다. 프랑스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경로는 1960년대의 미국과 독일의 경험들을 반복했다. 학생과 노동자의 궤적은 간단히 융합됐다. 다른 나라들에서와 같이, 급진주의자들은 혁명적 이상들을 지지했고 노동자들은 실질적인 이익을 지지했다. 젊은 프랑스 급진주의자들은 노동조합운동의 양적인 요구들을 넘어서 사회적 위계제와 사적 소유에 도전했다. 그들은 성적, 교육적, 그리고 정치적 강제에 반항했다. 학생운동은 개인의 자유를 위한 운동들과 사회 정의를 종합하길 원했다. 이러한 조우(encounter)5월 운동에 자신의 힘을 부여했고 이러한 조우는 1960년대가 여전히 매혹적인 주요한 이유이다.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열은 좌파의 위기, 특히 맑스주의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르페브르, 마르쿠제(Herbert Marcuse), 그리고 드보르(Guy Debord)와 바네겜(Raul Vaneigem)과 같은 탁월한 상황주의자의 저작들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화해라는 안타까운 기대를 내놓음으로써 이러한 위기에 대응했다.

다양한 정파의 젊은 프랑스 혁명가들은 노동자계급 혁명을 열렬히 믿었다. 반위계적인 학생들은 노동자계급의 권위를 역설적이게도 받아들였다. 5월의 참여자들은 부분적으로 알제리 전쟁에 대한 반대와 제3세계주의의 결과였던 급진적이지만 진부한 좌파주의를 이따금 신봉했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대실패는 알제리에서 프랑스의 실패를 뒤이었고 항의를 추진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반제국주의를 부활시켰다. 반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 전쟁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는 동안 제3세계주의자들은 미발전 나라들, 즉 알제리, 쿠바, 중국에서 사회주의 정부를 미래의 모델로 여겼다. 그들은 학생들의 낭만적 사고의 투사물(projections)이자 혁명적 이론과 혁명적 행위자에 대한 학생들의 갈망을 반영했다. 하지만 알제리 전쟁기의 상황과는 달리, 반제국주의는 결코 운동의 존재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 대신 반제국주의는 다양한 소집단들을 협력하게 만드는 작용을 했다. 1960년대에, 반제국주의는 20세기 좌파에 깊은 뿌리를 둔 반파시즘과 연합했다. 인종주의적이고 외국인 혐오증적이며 반유대주의적인 우파의 소집단들은 교육 제도들 속에서 그리고 수도의 거리 위에서 좌파 학생들과 싸웠다. 반파시스트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유산들은 임노동에 대한 증오와 정치적 쾌락주의를 급속히 조화시켜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학생운동을 창조했다. 전통적인 좌파주의와 민주화된 자유사상(libertinism)은 수많은 청년들을 자극했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계몽사상이 1789년 이전에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학식이 있는 계급들에게도 스며들었다고 주장했다.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 이전과 프랑스 혁명기에 급진적인 정치와 인습적인 정치 간의 지속성을 또한 강조했다. 사회문화사가인 마윅(Arthur Marwick)1968년에 대해 비슷한 입장을 채택했고 68년 전후 시기 사이의 단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세대 사이의 그리고 급진적인 정치와 주류적인 정치 사이의 갈등을 경시했다. 프랑스 학자들은 “68년의 해들1968년 전후의 항의의 해들에 대한 속기라고 명명한 시대구분을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접근법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확실히 역사가들로 하여금 장기간의 문화변동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한 개념적 진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프랑스 학문이 놀라운 해라고 가정한 것 또는 독일 역사가들이 마법의 시기라고 비판적으로 부른 것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레퓌스-아르망(Genevieve Dreyfus-Armand) 등의 수집물의 제목인 ?68년의 해들?1968, 이념, , 신체를 해방시킨 해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5~6월은 중단 없는, 다양한, 그리고 이따금 급진적인 소요를 개시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의 북미 학자들은 5월의 사건들과 그것들의 전투적 유산이 지닌 정치적 중요성을 최근에 강조했다. 로스(Kristin Ross)에 따르면, 5월은 학생들과 노동자들 양자 모두의 인습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산산이 부쉈고 결국 정치가 발생되도록했다. 5월은 계기를 세우지는 못했을지라도 중추적인 계기를 구성했다. 5월은 지적인 출발점은 물론이고 정치적 출발점이었다. “새로운 반역적인 역사적 실천[노동의 역사]는 계속해서 68년의 욕망이 목소리 없는자들에게 목소리를 주도록 할 수 있었다.” 비슷하게, 핀버그(Andrew Feenberg)와 프리드만(Jim Freedman)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5월의 사건들은 거리에서 자신을 패배시켰던 사회의 정치문화 속에서 승리를 거뒀다. …… 5월의 사건들은 낡은 사회주의적 전통의 마지막 순간이자 새로운 종류의 반항의 첫 신호이기도 했다.”

 

 

다혁(多赫)

  1. 이 글은 Seidman, M. 2004. The Imaginary Revolution: Parisian Students and Workers in 1968. (Berghahn Books)에 있는 서문(“Introduction: May 1968 ― a Rupture?,”)을 완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2. Ingrid Gilcher-Holtey, “May 1968 in France: The Rise and Fall of a New Social Movement,” in Carole Fink, Philipp Gassert, and Detlef Junker, 1968: The World Transformed (Cambrige, 1998), 26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