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억압적인 유혹 사회에서 노동자들: 1968년 5~6월에 파리의 금속공들(Metallurgists)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5월호

억압적인 유혹 사회에서 노동자들: 1968년 5~6월에 파리의 금속공들(Metallurgists)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3

억압적인 유혹 사회에서 노동자들: 19685~6월에 파리의 금속공들(Metallurgists)

 

M. Seidman

 

19685-6월에 대한 대부분의 역사 서술은 학생 운동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이해할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대했든 아니면 걱정했든, 프랑스를 혁명으로 이끈 사건들의 연쇄를 시작한 것은 어쨌든 학생 활동가들이었다. 더욱이 학생들의 행동과 사상이 지닌 신선함과 에너지는 1968년을 이전의 저항이나 혁명들과 구별되게 했다. 학생 활동가들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요구에 대한 도취를 고려하면, 1968년에 관한 저술이 정치적이고 지적인 방향을 취한 것은 논리적이다. 우리는 소집단들과 혁명적 이데올로기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와는 대조되게 노동자들에 대한 지식은 제한적인데, 사건의 결과를 결정하는 데에 임금 생활자들이 적어도 학생들만큼 중요함에도 그러하다. 파업 운동이 특히 강력하고 영향력 있었던 금속 산업(metallurgy)의 임금 생활자들을 조사하면 역사 서술의 틈을 메우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 부문의 블루칼라 파업 노동자들은 학생과 다른 혁명 세력들이 제안한 전지구적 사회·정치적 프로젝트에 무관심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부터 물려받은 혁명적 비전을 지지하는 대신에, 노동자들은 생계 수단에 대한 요구를 위해 싸웠다. 그들의 행동은 억압적인 유혹 사회라고 불릴지 모르는 것에 그들이 얼마나 순응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임금 생활자들은 5월 중순 국가 권력의 순간적 취약함을 이용하여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의 물결을 시작했다. 그 달 말에 국가는 권위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6월에는 국가의 억압과 소비 사회의 유혹이 금속 제조 노동자들에게 일터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강압과 소비의 매력을 결합한 것이 임금 생활자들로 하여금 공장으로 돌아가도록 강제하고 설득했다. 5공화국 시기 동안에 소비의 새로운 가능성이 확산되면서, 프랑스 노동자들은, 상품에 대한 수요가 질질 끌어온 혁명적 열망을 대체로 대체하고 노동자 통제나 자주관리(autogestion)보다 훨씬 더 대중적이라는 것이 드러나기조차 한 시대로 들어갔다. 유혹 사회에서 소비는 사회적 결속을 위한 강력한 힘이 되었다. 소비의 유혹은 상품들을 박탈당했던 사람들에 의한 상품 구매를 촉진시켰다.



1968년 파업 운동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전지구적 사회 또는 정치 프로젝트에 연루되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보여준 2차 대전 이후의 패턴을 확증하고 강화했다. 수많은 임금 노동자들에게서 개인과 가족의 눈앞의 관심사가 더 넓은 정치·사회의 논점들보다 우선했다. 1947년과 1948년의 파업들은 대다수 노동자들이 국가의 억압 기제를 대규모로 사용하기를 개의치 않는 정부에 맞서, 정치화되고 때로는 폭력적인 투사들을 따르기를 꺼렸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1949-50년 미국에 반대하는 평화캠페인도 페스트 리즈웨이(Ridgway la Peste, 한국전쟁에서 생물학 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리지웨이가 나토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에 반대하는 슬로건옮긴이)”라는 1952년의 슬로건도 대중을 효과적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19538월 동안에 공공 부문과 국유화된 부문에서 이룬 파업의 성공은 그 이전의 패배와 아주 대조적이었다. 기층의 호전성은 조합 지도자들을 놀라게 하였고 생계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일반 조합원들이 마땅히 저항해야 할 시기에 대해 조합 지도자들과는 다른 식견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1953년에, 주요 노동조합, 즉 노동총연맹(CGT), 프랑스 기독교노동자연맹(CFTC), 노동자의 힘(FO)의 지원을 받은 수백만 파업자들은 승진과 퇴직 급여를 방어할 수 있었다. 1953년 작업 중지는 주요 연맹들의 지원을 받는 일반 조합원에 의한 대중 행동이 효과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들 사이의 정치적·종교적 분할을 고려할 때, 그들 사이의 단결은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로 형성될 수 있었다. , 종종 정치에 무관심하고 개인주의적인 인반 노조원이 바라는 구체적인 작업장의 요구에 기초하여 연맹들이 행동을 같이 할 수 있거나, 아니면 연맹들이 가장 낮은 수준의 정치적 공통분모, 다시 말해 군대 또는 반공화주의적 쿠데타에 맞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데에 의존할 수 있을 때. 1958년에서 1962년까지 알제리 전쟁 말기에, 후자에 근거하여 연맹들은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단결했다. 19633-4월 광산 노동자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에 연맹 관계가 재건되었는데, 이번에는 1953년처럼 구체적인 임금과 근무시간이라는 목표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단결은, 1947-48년 시기의 정부와 마찬가지로 무력 사용을 꺼리지 않았던, 비타협적인 드골주의 체제에 맞서 중요한 승리를 얻는 데에 기여했다. 몇 년 후 1966년에 두 주요 연맹, CGT와 이름을 바꾼 CFDT(프랑스 노동민주연맹)은 공동 강령에 서명함으로써 동맹 관계를 확고하게 했다. 이 강령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1968년 파업 물결로 가는 길을 마련한 요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양쪽 조합 모두 체제의 임금 정책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으며, 여성이나 외국인이나 젊은이들 같은 최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급여를 증가시킨다는 그들의 결정을 강조했다.

1968년 노동자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 노동계급 운동의 역사에 대한 배경뿐 아니라 학생 운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1968년에 불안을 경험한 다른 나라의 상황과 프랑스의 상황을 구별 짓는 것은 프랑스에서만 유일하게 학생과 노동자의 행동이 접합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결국에는 5월 하반기 동안의 거대한 작업 중지를 유발한 것은 학생 반란이었다. 학생 운동의 기원에 대한 식견 있는 논의들은 1968년에 관한 다른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로서는 1967-68년 겨울에 낭테르(Nanterre) 캠퍼스에서 시작한 선동이, 프랑스의 반란과 혁명들이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계절인 봄 내내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5월 초에 운동은 낭테르에서 파리로, 즉 수도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56일 월요일에 있은 학생과 결찰의 대립은 8백 명 가까운 부상자를 낳고 80명이 넘게 체포되었다. 다음 날 학생 지도자들은 세 가지 주요 요구사항을 정식화했다.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줄 것, 대학에서 경찰병력을 철수할 것, 그리고 모든 캠퍼스를 다시 개방할 것. 이 요구사항들은 대학의 위기가 순식간에 국가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프랑스 교육 체계의 집중화를 고려할 때 자연스런 관계였다. 대학에 대한 항의는 국가에 대한 항의로, 특히 학생 시위대를 향한 국가의 억압적 정책과 진압 행위라고 생각된 것에 대한 항의로 신속하게 변형되었다.

58일과 9일 학생 지도자들과 정부 관리들 사이의 토론은 충돌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510-11일 밤 동안에, 경찰은 학생들이 라틴 구역(Latin Quarter: 라탱 구역, 파리의 주요 대학들이 있는 지역으로, 이 명칭은 중세 때 교수와 학생들이 라틴어를 사용한 것에서 비롯했다옮긴이)에 세운 바리케이드를 공격했다. 뒤이어 일어난 거리 투쟁에서 274명의 경찰과 116명의 시위자가 부상당하고, 128대의 자동차가 파손되고, 60대가 불탔다. 주요 노동조합들, 이를테면 CGT, CFDT, FO, 여러 교사 노조들, 그리고 평소 보수적인 CGC(관리직총동맹)은 정부의 진압에 항의하고 학생들과 연대를 보여줄 24시간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하여 오래된 차이를 잠시 극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511일 밤에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 총리는 학생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동요를 가라앉히고 학생-국가의 충돌을 해결하려고 했다. 퐁피두는 소르본 대학을 다시 열고 체포된 학생들을 사면할 것을 명했다. 이와 같이 국가는 탄압과 양보 사이를 오가는 야누스 같은 행동을 보였다.



퐁피두의 양보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완화 국면이 513일 월요일 총파업에 참여하는 것을 얼마나 고무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공화국 대통령 드골 장군은 무질서한 학생들에 총리가 항복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현명한 일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옳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우파 그리고 특히 파리의 주요 고용주 조직인 GIM(Groupement des Industries Métallurgigues: 금속산업단체)513일 총파업의 성공을 정부의 나약함’(faiblesse) 탓으로 돌렸다. 학생들에 대한 정부의 양보가 미친 영향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든, 513일 총파업은 노동조합의 힘과 경찰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예증해주었다. 그 날, 파리 금속공의 대다수가 일을 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들의 노동은 파업으로 중단되었다. 고용주들은 작업장의 19퍼센트가 파업에 참여했다고 평가했지만 수송 중단과 회사 폐쇄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수치는 훨씬 더 높았다. 대규모 회사의 노동자들은 중소규모 회사의 노동자들보다 파업에 참여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노동자 수가 50명 이하인) 대부분의 소규모 사업체상업과 산업 분야 임금 생활자의 3분의 1 이상이 이런 사업체에 고용되어 있었다는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대규모 회사 임금 생활자의 거의 25퍼센트가 참여했으며 대규모 사업체의 78퍼센트가 파업에 영향을 받았다. 이 수치는 정부와 고용주들에게는 나쁜 징조였는데, 이 대규모 회사들이 산업 발전의 전위였으며 1960년대 말 프랑스 경제의 새롭고 더욱 집중화되었으며 경쟁적인 부문을 대표한 항공기산업체와 자동차산업체들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몇 주는 이 주요 부문의 수많은 임금 생활자들이 작업 중지에 공명했음을 보여준다. 월요일 총파업 직후에, 5번의 파업이 파리 지역의 금속공장들에서 계속되었으며, 중요한 작업 중지는 지방의 항공기산업체와 자동차산업체들에서 발발했다. 낭테르 근처의 수드-아비아시옹(Sud-Aviation)사가 514일 화요일에 점거를 통해 첫 번째 주요 파업에 착수함으로써 선두에 섰다. 그 본보기를 15일에는 끌레옹(Cléon)에 있는 르노(Renault) 공장이 따랐고, 16일 목요일에는 블로뉴-비앙쿠르(Boulogne-Billancourt)를 포함하여 다른 르노 공장들이 뒤따랐다. CGT 사무국장 조르주 세귀(Georges Séguy)노동자들은 정부가 [학생들과] 대립에서 시험받고 약화되었으며 그래서 앙갚음을 할 순간이 왔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CGC 의장 앙드레 말테르(André Malterre)는 학생 파업이 정부의 나약함을 드러냄으로써공장 점거의 길을 터주었다고 믿었다. 임금 생활자들은, 예컨대 인민전선처럼 프랑스 역사의 다른 기간에 그들이 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방임적 태도라고 인식된 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했다. 파업 참가자들은 정부가 무력을 사용하여 공장을 비우기를 꺼린다고 계산했기 때문에 연좌시위 전술을 선택했다.

몇몇 파업은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 같다. 가장 중요한 파업은 플랭(Flins)에 있는 르노 공장에서 일어났는데, 그곳 노동자들은 요구를 정식화하지 않고노동을 중지했다. 이것은 몇몇 노동자들이 일상의 일과에 저항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대중적 표현에서는, “지하철, , …… 지긋지긋하다(métro, boulot, dodo ... ras le bol: ‘지하철, , 은 도시 노동자의 단조로운 생활을 나타낸다옮긴이)”로 나타났다. 그러나 보통은, 파업 중인 거의 모든 금속 회사에서 노동조합 투사들은 노동자들의 욕구를 해석하여 단체 교섭 시의 입장을 정식화했다. 파리의 금속산업 고용주들은 그들의 회사에서 513일 직후에 일어난 파업이, 여러 설명들과는 반대로, “자발적이지 않고, CGT 투사들이 야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투사들의 요구사항에는 보통 봉급 증가, 주간 노동 시간 축소, 고용 보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업 운동은, 보통 CGT 활동가들이 지도했는데, 520일 월요일에 세력이 크게 증가되었다. 성 월요일의 전통(Saint Lundi, 초기 산업화 시기에 노동자들이 일요일에 술 마시고 월요일도 쉬거나 게으름을 피우던 전통옮긴이)을 부활시킴으로써, 월요일들은 5월의 중추였다. 1960년대 10년을 통하여, 월요일은 계획적인 결근이 가장 높았던 날이었다. 월요일에 파업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결합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수 있는데, 여성은 주 첫 날 특히 높은 결근율을 보였기 때문이다. 월요일은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여한 날이며(513), 다수가 노동을 멈춘 날이며(520),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정부, 조합, 고용주 사이의 협정을 거부한 날이다(527). 전국적으로, 520일 월요일까지는 운송, 에너지, 통신과 금융 서비스, 교육, 금속산업에서 5백만이 넘는 노동자가 노동을 멈추었다. 파리 근교 산업 지역, 아르장퇴유(Argenteuil)와 베종(Bezons)에서는, 파업 운동이 그 월요일 이후로 대규모로 발전했다.” 고용주들은 520일 월요일에 파업자들이 더욱 파괴적으로 되었다고 말했다. 소수의 노동자들은 불법 추방에 대한 CGT의 비난을 무시하고 공장에서 관리자들을 쫓아냈다. 파업 참가자들이 파업 불참자들의 노동할 권리를 빈번하게 침해하는 일은 더욱 일반적으로 일어났다. 이렇게 점거는 관리자의 특권, 산업 계서제, 그리고 재산권에 이의를 제기했다. 많은 것이 불법이었는데, (1963731일 법으로 제정된) 5일 앞서 나온 고시문은 존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용주들은 국가 권력의 붕괴를 그리고 특히 경찰이 자신들을 도우러 오지 않은 것을 불평했다. 5월 이전에 그들 중 다수는 파업을 퇴치하는 데 경찰에 체계적으로 의존해왔기 때문은 특히 취약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서쪽 근교 지역 산업가들은 아비옹 마르셀 다쏘(Avions Marcel Dassault)와 다른 대기업 출신 CGT 투사들이 작업 중지를 고무했으며 좌파가 지배하는 지방자치체들이 파업자들을 부양했다고 비난했다. 고용주들은 계속해서 대부분의 파업에 대한 책임을 노조 투사들, 특히 CGT에 돌렸다. 열거된 77건의 파업 가운데 CGT 투사들은 68, CFDT6, FO3건에 책임이 있었다. 덧 붙여서, 산업가들은 더 나이 들고 더 경험 있는 노동자들이 작업 중지를 선동한다고 이야기했다. 88건의 파업 가운데 51(58퍼센트)30세에서 40세 사이의 임금 생활자들이 시작했다. 24(27퍼센트)20세에서 30세 사이의 임금 생활자가 시작했다. 7(8퍼센트)만이 20세 이하의 임금 생활자들이 시작했다. 회사에서 1년 이상 노동한 노동자들이 파업 중 67퍼센트의 지도자들이었다. 고용주들 사이에서 선동꾼들(meneurs)로 불린 사람들은 대체로 프랑스 인이었다. 9퍼센트만이 외국인이었는데, 3명의 에스파냐 무정부주의자”, 2명의 무례한알제리 인, 그리고 폴란드 사람, 이탈리아 사람, 포르투갈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 정보는 19685월이 청년 반란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해석을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 대신에 고용주들의 앙케트는 비교적 성숙하고, 안정적이며, 노동조합에 가입한 프랑스 노동자들이 파리 지역 금속산업 파업을 시작하는 데 대체로 책임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숙하다는 것이 대담함을 차단하지는 않았다. 산업가들은 41건의 보고된 파업 가운데 35건에서 노동자들이 동료들의 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해 위협을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60건의 파업 가운데 16건에서 투사들은 폭력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사장을 욕보이거나 관리자를 추방하거나 하지 않았다. 두 번의 사례에서만 재산이 손실되었지만, 사보타주의 위협은 분명 존재했다. 보기를 들면, 몇 사람이 밤에 공장에 들어가 트럭에 불을 질렀다. 경찰 조사는 사건이 파업의 긴장으로 야기되었는지 아니면 5월 이전에 해고된 노동자가 앙갚음하려는 욕구에서 일어났는지 결론내릴 수 없었다.

고용주들에 따르면, 투사들은 거의 혁명적이지 않았다. 파업을 조장한 사람들 가운데 두 명만이 좌파(gauchistes), 즉 마오주의, 카스트로주의, 트로츠키주의 따위의 조직에 속했다. 혁명적이거나 급진적인 학생들의 직접적인 영향도 크지 않았다. 낭테르와 접하는 서부 교외 지역(아르장퇴유-베종) 파업자들 가운데에서, 학생 급진주의자들은 88건의 파업 중 9건에서만 노동자들과 접촉했는데, 이들은 어쩌면 더 규모가 큰 공장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512일 이후 학생과 노동자 운동의 짧은 제휴는 십중팔구 사라질 운명이었다. 파리의 금속공들(métallos)올바른당도 진정한혁명적 이데올로기도 추구하지 않았다. 이민자들(immigrés)은 투쟁에서 어느 정도 주변적이었다. 그들은 종종 파업을, 자신들은 수동적인 역할만 하는 프랑스 인의 작업 중지로 보았다. 그들의 상대적 수동성은 중요한데, 그들은 파리 금속산업에서 노동 인구의 거의 15퍼센트를 구성하며 가장 낮은 임금과 가장 낮은 숙련 직종에 압도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립 라인에서 그들은 노동 인구의 절반 이상을 구성했을 것이다.

많은 노동계급 조직들이 파업 참가자들에게 자주 관리나 공동 관리를 요구할 것을 촉구했다. 노동자 통제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는 CFDT였는데, 이 조직의 사무국장, 유젠느 데캉(Eugène Descamps)은 노동자와 학생 운동이 동일한 민주주의적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행정과 산업의 군주제가 민주적인 노동자 통제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CFDT는 자주 관리를 자신의 주요 경쟁 세력으로부터 자기 조직을 두드러지게 하며 작업 현장에서 조직의 투쟁성을 지탱해주는 방식으로 여겼다. 다수의 CFDT 투사들을 육성한, 노동자들의 가톨릭 운동(Action catholique ouvrière)그들의 회사와 사회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완벽하게) 연대하고있었다. 앙드레 베르제롱(André Bergeron), 주요 노동조합들 가운데 가장 온건한 노동자의 힘 지도부조차, 공동 관리를 옹호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관리에 대한 일반적인 요구에서 5월의 새로움과 독특성을 보았지만, 작업장 민주주의는 금속산업 노조 투사들이 정식화한 요구사항 목록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자주 관리에 대한 요구가 노동자의 정서를 반영할지라도, 그것은 특별하게는 산업 규율과 일반적으로는 임금 노동에 대한 노동자의 불만이라는 어렵고도 진정한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으로 이바지했을지 모른다.

자주 관리 대신에, 금속산업의 주요 노조들인, CGTCFDT조차 더 적은 노동 시간과 더 많은 임금을 요구했는데, (외국인이나 여성이나 젊은이가 일반적인) 특히 최저 임금 노동자들을 위해 이것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는 다른 사회 집단과 접촉하려는 노조 활동가들(일반적으로 남성이며 프랑스 인)의 결의를 나타냈다. 5월 이전에도 CGT는 노동 계급의 상이한 영역에 호소하려고 노력했다. 1965년에 CGT는 여성의 노동 시간 감축을 요구했다. CGT1967년 노동하는 여성에게 동일 임금과 동일한 기회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CGT임금 생활자이면서 어머니로서 여성 노동자의 이중적이고 매우 사회적인 역할을 알고 있었다. CGT 투사들은 금속산업 노동 인구의 거의 20퍼센트를 구성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끝낼 것을 요구했다. CFDT도 성에 관계없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요구했다. CGT는 여성 잡지의 특별판에서 여성은 더 조금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활동가들은 시간 측정과 성과급노동이 여성을 벼랑으로 몰고 갔기때문에 여성들에게는 노동 없는 토요일과 감소된 노동 시간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여성이 노동조합이 주목한 유일한 대상은 아니었다. 동맹은 또한 젊은 노동자와 외국인이 노동과 여가의 세계에 동등한 사람으로 참여하길 원했다. “노동자의 넷 중 하나가 외국인임을 인지함으로써, CGT는 조직의 오랜 국제주의의 전통을 찬양하고 이민자들의 요구를 지지했다. 노동조합은 외국인과 젊은이에 대한 차별을 끝낼 것을 주장했고 젊은 임금 생활자에게 더 적은 임금을 지불하는 관행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1967년에 조르주 세귀는 CGT의 사무국장으로 지명되어 조직에 활기를 되찾고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5월 이전에, CGT는 공장 규율과 인사 감독부의 권위에 저항하고 상황이 달라지면 좌익주의(gauchisme)로 이끌릴 수 있는 젊은 반란세력을 모집하려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젊은 활동가들은 고용주들이 노동 시간 동안에 착수한 교육 과정과 스포츠 활동에 금액 지원하고, 결혼한 젊은 부부를 위한 주택 마련, 유급 휴가 5주를 주장했다. 소비 사회의 기본 상품들에 대한 자신들의 욕구를 드러내면서, 씨트로엥의 젊은 자동차 노동자들은 휴가 기간에 자동차 대여료를 할인받을 권리를 요구했다.

요구사항이 단계적으로 확대되고 파업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525일에는 정부, 고용주, 노동자 조직 사이에 전국적인 협상이 열렸다. 세 당사자 간의 협상은 그르넬 협약(Grenelle Agreement)이라고 불리는 것을 낳았다. CNPF(프랑스 전국 사용자 회의)로 대표되는 고용주들은 최저 임금 35퍼센트 인상을 인정했다. 여성, 젊은이, 외국인들은 이 극적인 증가로부터 다른 임금 생활자들보다 일반적으로 이득을 볼 것이었다. CGT의 저명한 임원, 메들린 콜랭(Madeleine Colin)여성과 젊은이들이 최저 임금을 받는 대다수 노동자를 구성하기때문에 그들이 인상의 주요 수혜자들이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주장하기를, 몇몇 젊은 여성들은 봉급이 두 배가 되었다.” 비교를 해보면, 더 높은 임금을 받던 노동자들은 10퍼센트의 증가만을 얻었다. 이렇게 CGTCFDT는 최저 임금 상승을 얻어내기 위해 싸우겠다는 1966년의 약속을 이행했다. 정부는 이 증가를 재빨리 승인했는데, 어쩌면 이것은 이러한 증가로 인해 체제가 계속해서 호의를 보여 왔던 활동적인 대규모 기업은 타격을 덜 받고 중소규모의 회사가 더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르넬 협약은 주당 노동시간의 축소48시간 이상 노동하는 임금 생활자에게 2시간, 45에서 48시간 노동하는 사람들에게는 1시간도 보증했다. 협약은 고용주들에게 파업 때문에서 잃은 시간을 회복할 권위를 부여했다. 협약은 조합원을 조직하고, 회비를 거두고, 문건을 배포할 노동조합의 권리를 인정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일반 조합원들에게 이 협약을 선전하려 시도했을 때, 어떤 대규모 회사의 파업 참가자들은 아주 적대적으로 반응했다. 많은 금속공은(métallos)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큰 파업 물결이 더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고 또 낳아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5월 이전의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파업은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대중 운동으로 창출된 기회를 이용하길 갈망했던 수많은 금속 노동자들은 좌절한 바 있었다. 파업 물결이 탄력을 받으면서 더욱 야심찬 요구들이 나왔다. 그르넬 협정서를 거부한 가장 유명한 사건은 527일 르노에서 발생했는데, 그곳에서는 조르주 세귀, CGT의 노련한 지도자 버느와 프라숑(Benoît Frachon), CFDT의 앙드레 장송(André Jeanson)5,6천의 노동자 대중에게 협정에 찬성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킬 수 없었다. 일반 노조원들은 파업 때문에 잃은 시간을 회복할 권리를 고용주들에게 부여한 조항에 특히 반대했다. 그르넬 협정에 대한 비슷한 불승인은 씨트로엥과 수드-아비아시옹을 포함한 다른 주요 금속 회사들에서 일어났다. 몇몇 분석가들은 협정서에 대한 노동자들의 거부를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정서가 상승한 징표이거나 노동자 통제에 대한 바람으로 해석했다. 임금 생활자들은 관리 감독직의 자의적인권위를 제한하고 생산 리듬을 늦추기를 바랐을지 모르지만, 대규모 금속산업체의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길 원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보았듯이, 혁명가들좌파든 자주관리론자들이든의 영향력은 파리 지역 금속산업에서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금속공들은 더 높은 임금(특히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에게), 노동 시간 감소, 파업으로 잃은 날에 대한 임금 지불, 파업 시간의 최소 회복, 그리고 활동가들을 위해서는 공장에 노조의 존재를 요구했다. 이와 같이 전국적 엘리트들 사이의 타협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잡았다고 느낀 수많은 임금 생활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노동조합 지도부가 몇몇 대규모 금속산업 공장에서 일반 조합원들로부터 최초 패키지의 승인을 얻는 데 실패하자 몇몇 관찰자들은 프랑스 노동조합주의의 취약함이나 노동조합의 비 대표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문 ?라크르와(십자가)?(La Croix)는 다음과 같이 안타까와했다. “협정을 맺을 때조차, 노동조합들은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협정을 비준하게 할 만큼 강력하지 못하다. 프랑스 경제와 고용주들은 20년 동안 노동조합을 경멸해 온 대가를 치루었다.” 여러 부류의 좌파들은 노동조합, 특히 CGT가 일반 조합원들의 혁명적 바람을 배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동조합들은 대규모 회사들에서 의정서의 인기 없음에 맞추어 재빨리 그리고 많은 어려움 없이 정책을 조절했다. 527일 르노 노동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CFDT의 의장 장송은 일터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 파업자들에 축하의 말을 전하고 다른 공장들도 르노의 모범을 따르기를 희망했다. 같은 집회에서 세귀는 CGT가 파업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일터로 돌아가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르노 집회가 끝난 후 몇 시간 후에, CGT 집행위원회는 조직의 그르넬 대표단이 고용주들의 불충분한 양보때문에 협정에 조인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재가해주었다. 노동조합은, 협상이 산업 부문과 직업별로 처리되지만, 금속산업 고용주 조직들과 노동조합들이 전국적 또는 지역적 단체 교섭에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없을 때는 개별 회사 수준으로 재빨리 돌아가서 논의를 진행할 것을 추천했다. 특히 파리의 고용주들은 그르넬보다 더욱 후한 지역적 합의를 거부하고 각 회사별로 협상하는 것을 선호했다. GIM은 구성원, 특히 더 이상 양보하기를 매우 꺼리는 중소규모 회사 소유주들의 자율권을 보호하길 원했다.

그르넬의 실패와 파업의 지속은 이미 흔들린 국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 좌파 의원들은 드골주의적 통치에 진지한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528일에 프랑스와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는 대통령 입후보를 선언하고 피에르 망데스-프랑스(Pierre Mendès-France)를 총리로 제시했다. 동시에 공산당은 공산당원들이 강력한 목소리를 낼 민중 정부(popular government)”를 요구했다. 드골은 529일에 수도를 포기했고, 그래서 좌파 정치가들과 정당들이 그 자리를 채우려고 시도하고 있던 권력 공백이 커졌다. 그는 군 지휘관들과 상의한 후에, 상황을 다시 통제하기로 마음먹고 다음 날 돌아왔다. 530일에 장군의 대국민 담화는 작업 중지의 역사에서 새로운 기간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담화는 강력한 국가의 재건에 극적인 진전이었고 파리의 금속공들에게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르노에서 CGT 활동가들은 장군이 독재정치를 기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파리로 호출되고 있는 군대의 움직임, 특히 장갑차와 낙하산부대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그에 더하여, 수많은 OAS[극우] 장교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4,3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공장인 이스파노(Hispano)에서, 파업 위원회는 그 담화를 “[노동자들에게] 내전으로 협박하려는시도로 해석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드골파 용병의 협박 전술, 즉 장군이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전복에 맞서 싸울 것을 고무한 시민 행동 위원회의 협박 전술에 저항했다. 노동계급 투사들은 파업 참여자를에 대해 군사 개입을 이용하겠다는 협박과 전체 우익을 결집시키는 데 드골의 성공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CGT는 나중에 조직의 온건화가 프랑스에서 그리스나 인도네시아 식의 쿠데타를 막았다고 주장하게 된다.

드골의 연설에 이어, 일터로 복귀하라는 압력이 증가했다. 복귀한 첫 번째 파업 참여자들은 대체로 노동조합 대표들이 그르넬 화해와 아주 유사한 합의에 조인한 소규모 회사(20에서 300명 사이의 임금 생활자를 고용하고 있는)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러한 합의는 6월 첫 주 동안에, 보통 4일 화요일과 7일 금요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소규모 공장의 비교적 신속한 복귀는 그들의 파업 참여가 대규모 공장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78퍼센트는 (노동자가 2,000명 이상인) 대규모 회사의 파업에 영향을 받았고, 76퍼센트는 (노동자가 200명 이하인) 중간 규모 회사의 파업에, 그리고 33퍼센트만이 (노동자가 200명 이하인) 소규모 사업체의 파업에 영향을 받았다. 동쪽 교외 지역(banlieue)에 있는 고용주들의 조직은, 그 구성원이 주로 중소규모 회사의 사장들인데, 자신들의 사업체의 17퍼센트만이 파업에 들어갔다고 보고했다. 좌익 가톨릭 활동가들은 “[파업에 대한] 두려움이 특히 소규모 회사들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런 회사들은 조직되지 않았고, 낮은 임금을 지불하고, 많은 수의 여성을 고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어떤 작은 금속산업 공장(50명의 노동자)의 급진주의자는 다수가 35살 이하인데도 동료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직장 동료들은 조합비를 내길 꺼렸고 노동조합의 효과에 회의적이었다. 더욱이 파업의 강도는 회사의 크기가 작을수록 약했다. 큰 회사에서 각 파업 참가자들은 평균 175 노동 시간(거의 4주의 노동시간)을 빠졌는데, 중간 규모의 회사에서 각 파업 참가자는 평균 117시간(2.5주 이상), 소규모 회사에서는 단지 27시간이었다.

610일 월요일에는 중간 정도 규모의 회사들에서 논쟁점 해결의 패턴이 지속되었지만 또한 1천명 이상의 임금 생활자를 고용한 12개 이상의 파리 금속산업 회사들에서 파업 참여자들이 일터로 복귀하는 일주일 노동(610일 월요일에서 615일 금요일까지)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해결이, 남아 있는 파업 참여자들에게, 특히 점거에 실제로 참여한 활동가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투사들이 많은 공장보기를 들면, 이씨--물리노(Issy-les-Moulineaux)의 파업 중인 39개의 회사 가운데 31개 그리고 블로뉴-비앙쿠르(Boulogne-Billancourt)40개 가운데 20을 점거했지만, 점거는 일반 조합원들이 연좌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욕구가 거의 없음을 드러냈다. 어쩌면 투사들은 점거가 적대감, 더욱 일반적으로는 기층부의 무관심을 제거해주기 때문에 점거 전술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실제 점거에 참여한 노동자의 수는 총 노동인구 가운데 작은 비중을 차지했다. 5천의 노동 인구 가운데 몇 백 명만이 끌레옹에 있는 르노 공장을 점거했다. 블로뉴-비앙쿠르의 3만 노동자 가운데 수 백 명만이 중요 제품 공장 내부에 남아 있었다. 점거의 물결은 1936년 이래로 가장 거대했지만, 소수의 점거자들은 참여한 투사의 수가 비율상 적다는 것을 암시했다. 보통 점거를 행한 집단은 파업을 시작한 집단CGT와 가까운 프랑스 인 성인 남성 노동자과 동일했다. 때때로 젊은 좌파들이 그들과 결합했다. 외국인들은 보통 최소한의 역할만 했는데, 아마 프랑스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을 파업 파괴자나 노동조합에 무관심한 사람들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국적 사람들은 누구보다 더 기꺼이 참여했다. 이를 테면, 씨트로엥-르발루아(Citroën-Levallois)에서 에스파냐 노동자들은 작업 중지 기간 동안에 적극적이었지만, 북 아프리카 노동자들은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처음에, 여성들은 도덕적 이유에서 특정 점거에서 제외되었지만, 어떤 점거에서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여성이든 남성이든, 외국인이건 프랑스 인이건는 공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피하는 쪽을 선호했다. 씨트로엥에서는, 점거뿐 아니라 파업 집회도 일반 노조원의 소극성을 드러냈다. 15번째 구에 있는 씨트로엥 지부에서 2만 이상의 전체 노동인구 가운데 겨우 100명의 점거자들만이 참석했다. 씨트로엥 파업 위원회는 노동자에게 정치 교육을 시키기보다는 탁구나 카드 게임을 마련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휘발유를 쉽게 구할 수 있던, 성신 강림절(Pentecôte) (61-3) 기간에는, 12명의 노동자만이 공장에 남아 있었다.

임금 생활자들의 대부분은 작업장의 선거 과정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파업 투표에 참여하는 비율은 40에서 75퍼센트로 아주 다양했다. 6월 초에 작성된 팸플릿에서 이 수동성을 고려하면서, 가장 중요한 파리의 회사들 가운데 몇몇오티스 엘리베이터(Otis Elevators), 수드-아비아시옹, 노르 아비아시옹(Nord Aviation), 톰슨-휴스턴(Thomson-Houston), -풀랑(Rhône-Poulenc)의 조합과 비조합 파업 참여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참여해야 한다. 파업은 모든 사람에게 물리적인 희생을 강요하지만, 많은 동료가 소수에 의존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정부는 어떤 이들의 피곤함과 어떤 이들의 빈약한 정보를 이용하여 노동자들 분열시킬 수 있다. 정부는 각 지부와 각 공장에서 파업을 조금씩 파괴하려 한다. …… 이런 분열 전술에는 단 한 가지 대응책이 있다. 점거한 공장에 나오지 않는 모든 노동자들의 대규모 참여가 그것이다.

 

 

태도를 보류하거 있거나 냉담한 노동자들에게 운동에 가담할 것을 독려하기 위하여, 팸플릿 작성자들은 롱-풀랑(비트리(Vitry))의 파업 조직을 모델로 채택할 것을 추천했는데, 그곳에서는 일반 조합원 파업 참여자들이 쉽게 소환할 수 있는 파업 위원회를 선출했다. 투사들은 이 회사의 점거를 특히 인상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3,500명의 노동 인구 가운데 1,500(43퍼센트)가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참여를 보인 이 사례에서도, 인원의 57퍼센트는 행동을 회피했다. 그러므로 임금 생활자들이 혁신적이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파업 형태를 제안한 노동조합 간(interunion) 위원회의 안에 흥미를 보이지 않은 것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위원회는 여론을 수렴하고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대중의 분노를 결집하게 위하여 노동자들이 경품 파업(freebie strikes)”에 참여하는 것을 추천했다. 운송 노동자들은 무임승차를 허가하고, 우편업 종사자들은 무료 우편과 전화를 허가하고, 청소부는 쌓인 쓰레기를 주워야 했다. 그러나 헌신적이지 않은 파업자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중에게 도움을 주는 대신에 그들은 파업에서 비롯한 자유 시간을 개인이나 가족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사용했다. 어떤 이들은 부업을 했다. 대부분의 점거 공장에서 낮은 참여율은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가 국가나 고용주에 반대하는 집단행동보다는 소비 사회에서 생존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이는 파업 후의 분위기를 앞서 보여주었다.

때때로 적극적으로 참여한 소수 임금 생활자는 노동조합이나 정치적 관심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다소 직접적이고 실용적이 이유에서 그렇게 했다. 많은 공장에서 파업 위원회는 금료 배분을 책임졌다. 어떤 공장에서는, 5월 하반기 동안에서 투사들이 휘발유, 부족한 상품들을 배급했다. 불충분한 가스 공급이 많은 회사에서 대수요를 불러 일으켰다. 어떤 활동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결코 공장을 점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했다. …… 어떤 것이 필요할 때 우리는 관리자의 동의를 받거나 또는 동의 없이 그것을 취했다. …… 가스는 부족했다. …… 연료를 얻기 위해서는 CGT와 접촉해야만 했다. 가스는 부러움을 낳았고 규율을 요구했다.” CGT 멤버는 그에게 연료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합을 떠났다.

소비하려는 바람과 욕구를 고려하면, 일터로 복귀하라는 압력은 상승했다. 많은 임금 생활자들이 5월 이전에 빚을 많이 지고 있었는데, 대다수 노동자가 1960년대에 발생한 4배의 신용구매에 집단적으로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8년 이르면 거의 모든 항구성 재화가 할부로 구매할 수 있었다. 르노에서, 보기를 들면, 젊은 노동자들은 종종 체납 상태에 있었고 더 나이든 노동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저당이나 지불해야 할 자동차 대금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대규모 자동차 제조사들은 직원들에게 상당한 액수를 할인해줌으로써 할부로 자동차를 구매하도록 부추겼다. 다른 임금 생활자들은 15퍼센트 할인된 금액으로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유효했다. 1959년에는 숙련 노동자 가계의 23퍼센트만이 자동차를 소유했지만, 1963년에는 40퍼센트, 1972년에는 75퍼센트가 자동차를 소유했다. 미숙련 노동자들도 자동차 소유에서, 조금 작지만 비슷한 증가를 보였다. 사적인 자동차의 가능성(과 그에 따른 비용)5공화국 이전 개인의 주요 교통수단이 자전거였던 계급에 주요한 변화였다.

자동차, 주택, 아파트의 구매에 더하여, 다양한 다른 상품들이 1968년에 노동계급의 가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 1959년에는 숙련 노동자의 22퍼센트만이 냉장고를 가지고 있었지만, 1963년에는 50퍼센트가 소유했고, 1972년에 이르면 91퍼센트 소유했다. 미숙련 노동자 가계의 냉장고 소유는 195911퍼센트에서 197283퍼센트로 뛰었다. 세탁기 소유의 확대도 비슷하다. 숙련 노동자 가정의 74퍼센트와 미숙련 노동자 가정의 66퍼센트가 1972년에 이르면 세탁기를 지녔는데, 이것은 1959년 이래로 3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단연 가장 빠르게 증가한 5공화국의 상품이었다. 1959년에는 숙련 노동자 가계의 12퍼센트가 그것을 지녔고, 1963년에는 35퍼센트, 1972년에는 85퍼센트. 미숙련 노동자의 텔레비전(télés) 소유는 19597퍼센트에서 197277퍼센트로 훨씬 더 극적으로 증가했다. 1968년에 25백만 명의 정기 텔레비전 시청자는 22백만 정기 구독자를 수적으로 넘어섰다. 소득이 낮을수록 텔레비전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수치는 1955년 이래로 일어난 중요한 변화를 나타낸다. 그 해에 미숙련 노동자의 40퍼센트와 숙련 노동자의 28퍼센트가 세탁기를 구매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미숙련 노동자의 45퍼센트와 숙련 노동자의 35퍼센트가 냉장고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미숙련 노동자의 34퍼센트와 숙련 노동자의 24퍼센트가 자동차를 바라지 않았으며, 미숙련 노동자의 44퍼센트와 숙련 노동자의 37퍼센트가 텔레비전 구매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소비가 가르쳐져야 했고, 노동자들은 새로운 상품의 매력을 평가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1968년에 이르면 광고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잘 알게 되었다.

파업이 계속되면서, 빚은 증가하고, 소비자(consumerist)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가족의 긴장은 날카로워졌다.

 

 

5주간의 파업으로 부부, 피에르와 니콜 사이의 감정적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그는 노동조합 대표로 작업장에서 언제나 적극적인 헌신적인 투사이다. 그녀는 공영 주택단지에 매여서 개인적인 문제, 연체된 집세, 육아 문제를 처리하고 지낸다. 그녀는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갑자기 그들의 관계는 싸늘해졌다.

 

 

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집에 있는 여자들이 파업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일을 했다. 많은 아내들이 가족 예산의 불균형을 초래한다거나, 더 소득이 높은 가계에서는 휴가 계획을 파괴한다는 이유에서 작업 중지에 반대했다. 급진적인 경향의 플랭의 한 노동자는 파업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내는 자신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내들이 작업 중지에 적대하는 데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학교 폐쇄는 육아의 의무가 더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업이 지속되면서, 여성들은 어쩌면 남성들보다 훨씬 더 정치화’, 즉 운동의 물질적 요구사항을 좌파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정치적 목표에 종속시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파업 시기 동안에 그들은 좌파가 통제하는 지방자치체가 제공한 식사를 받아들였다. 작업 중지가 지속되면서, 장년 가장들은 젊은 임금 생활자들보다 파업을 계속하는 것에 단호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르넬 협정을 거부한 회사들에서, 각 회사의 노동조합 대표단은 경영진과 직접 교섭했고 그르넬의 이득을 확대하기 위해 싸움으로써 채무자와 가장들에게 호소했다. 가장 큰 재벌들에서 파업이 지속된 것은 몇몇 노동자들의 필요와 바람에 호소할 뿐 아니라 피킷 라인을 형성하고 파업 파괴자들이 일터로 복귀하는 것을 막은 노동조합(특히 CGT)의 힘 탓일지 모른다. 많은 경우에, 이런 투사들은 파업 파괴자들이 일터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할 권리를 침해했다. 고용주들은 6월 초에 4번의 침해 사례를 인용했고, 보수적인 신문은 1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던 플랭 르노 공장의 사건들 포함하여 또 다른 사례를 보도했다. CGT와 다른 노동조합들은 일반적으로 파업 행위를 결정하는 데 공개 투표(거수)를 선호했다. 고용주들은 공개적으로 손을 드는 행위는 투표자들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믿고 비밀 투표가 일터로 복귀를 수월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이 문제에서 산업가들 편을 들었는데, 그래서 정부 대변인은 이렇게 선언했다. “비밀 투표를 치룰 때마다 노동자들은 거의 항상 일터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확실한 것은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일할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플랭에 극적으로유혈 사태를 빚으며개입했다. 이 지면은 파업 물결의 가장 유명한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다. 19세의 고등학교(lycée) 학생, 토탱(Gilles Tautin)의 사망을 둘러싼 상황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19685-6월에 관한 다른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로서는, 노동자들에게 일터로 복귀하도록 고무하는 데에서 국가 억압의 역할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일터로 복귀를 완수하는 데에는 소비 사회의 유혹만큼이나 국가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64일 수요일에, 플랭의 르노 공장의 경영진은 일터로 복귀하는 것에 대해 투표를 조직하려 시도했다. 파업 전초대는 선거를 사보타주했다.” 경영진은 항의하고 인원의 80퍼센트가 투표하기 위해 참석했다고 지적했다. 66일 아침 일찍, 1천 명의 보안 경찰(CRS)일할 권리를 보호하고 무력으로 점거를 끝내기 위해 도착했다. 파업 참여자들은 노동자들이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피킷 라인을 설치함으로써 보복했다. 67일 금요일에, 수백 명의 젊은 파업 참여자들이 (지방자치체의 지원을 받아) 경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시가전이 벌어졌고, 경찰은 3백 명이 넘는 시위자와 구경꾼을 검거했다. 대립은 주말 내내 계속되었고, 일요일 저녁 기자 회견에서 퐁피두는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플랭 작전으로 알려진 것을 정당화했다. 총리는 모토, ‘일하기가 이 순간 프랑스의 슬로건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610일 월요일에, 플랭의 가두에서 경찰이 노동자와 학생들과 싸우면서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충돌은 토탱의 익사로 결정에 달했는데, 그는 마오주의 조직에 속해 있었다. 같은 날, 소쇼(Sochaux)에 있는 거대한 푸조 공장에서, 보안 경찰대는 24세의 파업 참여자에게 총을 발사했다. 사망 사고와 억압은 노동자-학생의 분노와 폭력을 불러일으켰다. 611-12일 밤 파리에서는 경찰이 젊은 시위대와 충돌했는데 그들은 이제 학생들이 아니라 주로 노동자들이었던 것 같다.장례식 노, 혁명 예스같은 슬로건을 외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투쟁적인 젊은이들은 75대의 자동차를 손상시키고, 10대의 경찰차를 빼앗았으며, 5군데의 경찰서를 공격했다. 경찰은 72명의 경찰관이 다쳤다고 발표했고 1,500명의 시위대를 연행했다.

경찰의 작전은 시위대에 대해 새롭고 공격적인 전술을 채택했는데,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국가의 결정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었다. 새로운 내무장관, 마르슬랭(Raymond Marcellin)5월 초의 머뭇거림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612일에 정부는 엄격한 법적 조치를 채택했다. 몇 주 동안 모든 시위를 금지하고, (인민전선 정부가 극우 조직을 불법화하기 위해 도입했던 1936년 법령을 이용하여) 좌파 그룹들(토탱이 속했던 마오주의 그룹을 포함하여) 해산시켰다. 체제는 과거 OAS 장교들을 풀어주고 극우 과격파(groupuscules)의 활동을 묵인했다. 정부는 시위 도중에 경찰에 연행된 모든 외국인을 추방했다.

중앙 정부의 진압 행위는 파리에서 다시 반향을 일으켰다. 611-12일 이후 금속 산업가들은 일할 권리의 침해일할 권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경찰력의 총체적 부재에 대해서 불평하기를 멈추었다. 그들은 분쟁 야기자들자동차와 무선 통신을 갖춘 의용대를 형성하여 공장들을 차례로 위협하고 다닌다고 비난하기를 그쳤다. CGTCFDTCRS의 진압과 정부의 군사 독재 시도에 항의하기 위해, 612일 수요일에 1시간의 작업 중지를 요청했지만, 파업 요청이 널리 수용된 것 같지는 않다. 반편 파업 반대 시위가 힘을 얻었다. 611일에, “씨트로엥의 수천 명의 노동자와 직원들일할 권리,” “공장을 내놓아라,” 그리고 점거자들에 관해서는 쓰레기를 내다버려라같은 슬로건을 외치며 파리 시내를 행진했다. 35백 명의 르노 노동자들과 직원들은 일터로 복귀하고픈 바람을 보여주기 위해 파리에서 플랭까지 행진했다. 그 자신을 일할 권리라고 부른 씨트로엥 그룹은 612일에 17천 명이 무질서와 혼란에 반대하며 시위했다고 주장했다. () 노동조합주의로 유명한 한 회사에서, 그 그룹은 우익과 어용 노조에 가입한 상당수의 프랑스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

이러한 압력들 하에서, 610일에서 615일까지 1주의 노동 시간에는 파리 지역의 나머지 대규모 금속 회사 대부분에서 작업 중지가 끝났다. 파업을 끝내는 것에 관한 투표는 점거 자체보다 훨씬 더 많은 참석자를 모았다. 618일에 르노는 작업에 복귀했고, GIM 의장은 거의 모든파업이 끝나고, 750,000명의 노동자들 가운데 최대 75,000명이 아직 작업 중지에 참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파업의 대부분은 624일 월요일에 해결되었다. 거의 모든 자료가 작업 복귀에 저항한 사람들이 젊은이들이었음을 보이는데, 지체된 생산 재개는 이들의 투쟁성 때문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더 큰 장년 노동자들만큼 임노동 생활과 산업 규율에 복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대된 파업에 기꺼이 참여하려는 젊은이들의 기질은 1968년에 유일한 것이 아니었고 다른 파업 물결이 일었을 때도 나타났다. 그렇지만 노동인구에서 젊은이들이 차지하는 높은 비중은 1968년에 파업 물결을 연장시키는 효과를 지녔음을 예상할 수 있다.

6월 하반기에는, 파업을 처음 시작한 가장 선진적인 부문들항공, 전기 설비, 자동차의 노동자들이 얻은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파업 초기에 표명된 바람과 일치하여, 경영진은 그르넬 협정이 요구한 것 훨씬 이상으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의 봉급을 인상해야만 했다. 젊은이, 여성, 외국인이 이 조치로 특히 도움을 받았다. 몇몇 회사에서는, 이러한 범주의 사람들이 특별한 대우를 얻어냈다. 많은 회사에서 임신한 여성은 하루에 한 시간의 유급 휴식과 더 긴 출산 휴가를 얻었다. 또한 어머니들에게는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한 유급 휴가가 인정되었다. 또 어떤 회사에서는 18세 이하의 젊은이들이 추가로 이틀의 유급 휴가를 얻었다. 파업 시간을 만회하지 않으려는 임금 생활자들의 선호도에 맞추어, 노동조합은 또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부분 보상을 얻어냈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들은 작업 중지가 마치 유급 휴가 기간이었던 것처럼 취급되기를 원했다. 이것은 파업이 이미 상당한 개인적 부채를 가중시켰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덧붙여서, 대규모 금속산업 공장의 대부분의 임금 생활자들은 임금의 감소 없이 그르넬이 제공했던 것보다 더 짧은 주간 노동시간을 획득했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 투사들은 일정 시간을 노동조합의 일에 헌신하는 것에 대해서 보상받을 것이었다.

노동조합들은 고용주들과 정부에 맞선 싸움에서 결국 강화되었다. 파리의 금속산업에서 CGT는 역사상 가장 큰 파업 물결을 이끌었다. 조합 활동가들은 젊은이, 여성, 그리고 외국인들과 접촉하려고 했다. 파업이 끝난 후에, CGT는 전국적으로 40만 명의 새로운 회원을 입회시킬 수 있었는데, 그들 중 다수는 더 큰 회사의 더 조금 보상받은 범주들 출신이었을지 모른다. 연맹들은 그르넬 협정의 이익을 확대할 수 있던 대규모 금속 회사들에서 특히 효력이 있었다. 보기를 들면, 플랭에서 노동조합(CGTCFDT)의 회원수는 7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껑충 뛰었다. 씨트로엥에서 CGT4천 명의 새로운 회원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힘은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5월에 정점에 달했는데, 그때는 국가가 학생들과 대립으로 인해 약화된 때였다. 6월에는 권위를 복구하려는 국가의 노력으로 투사들은 수세적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동시에 활동가들과 그들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일터로 복귀하라는 사회·가족의 압력 증가를 경험하고 있던, 대체로 중립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인 일반 노조원들과 대립해야 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소비 사회의 유혹은 많은 노동자들에게 직장에 다시 나가도록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임금 생활자들을 공장에 다시 들어가게 만들겠다고 결정한 억압적인 국가 또한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몇몇에서 파업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요소였다. 파업 물결에 이어, 억압적인 정부 행동이 공장에서 질서와 규율을 되찾는 것을 촉진했다. 고용주들은 국가의 강압적인 본보기에 고무되어 사적인 보안부대를 고용함으로써 그리고 활동가와 일반 노조원에 대해 관리감독직의 권위를 복원함으로써 투사들의 영향력을 재빨리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거리와 작업장에서 강요된 규율은 유혹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노동자들은 혁명적 또는 개량주의적 자주관리보다는 상품 획득에 계속해서 더욱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받으려는 자신들의 바람을 좌파 정당이나 노동조합들의 정치적 요구보다 앞세웠다.

그래서 1968년 이후 노동계급 조직의 더 광범위한 목표에 많은 조합원 그리고 (물론) 비조합원의 참여가 의문시될지 모른다. CGT의 원기 회복은 프랑스 중공업(금속을 포함하여)의 장기적인 쇠퇴 또는 PCF 자체의 쇠퇴를 역전시키는 데에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CFDT는 여전히 자주관리에 명확하고 헌신적인 입장을 지녔지만 1968년 금속 기술자들 사이에서 노동자 통제에 대한 무관심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점진적인 쇠퇴를 미리 보여주었다. 자주관리의 이데올로기는 임금 생활자들그들 가운데 다수는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 순전히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이 정말로 작업장을 떠맡기를 원한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좌파들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카스트로주의, 등등의 전지구적 프로젝트는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정치적 스펙트럼의 다른 편에서는, 드골주의적 노동자 참여의 사상이 임금 생활자들로부터 똑같은 냉담함에 부딪혔다.

19세기 마르크스주의, 아나키스트, 그리고 가톨릭 사회 운동(social Catholic)의 전통에 뿌리를 둔, 사회적·정치적 변형이라는 야심찬 프로젝트의 실패는 5월의 주요 수혜자들 가운데 일부에게 독립적인 노선을 추구하도록 고무했을지 모른다. 다수의 여성과 젊은이들이 계급에 기초한 전지구적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페미니즘, 생태주의, 또는 지역주의적 행동주의를 지지했다. 더욱이 1970년대에 실업률 증가는 세 집단에게 불균형하게 영향을 미쳤고 그들을 상대적으로 비주류화하는 데 기여했다. 외국인 노동자들그들의 고립은 실직뿐 아니라 불관용의 부활에 의해서도 강화되었다은 노동조합의 행동주의로부터 거리를 유지했는데, 그래서 프랑스의 주류로 동화되는 현대적 방식 중의 하나를 취하기를 포기했다.

노동자 운동은 파편화되고 약화되었지만, 프랑스 국가는 억압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당국은 특정 이주민 거주 지역에 대규모의 위협적인 경찰력을 배치했다. 질서 유지 세력은 노동자 조직을 억제하는 전통적인 임무에 생태주의자들과 지역주의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더했다. 사적인 보안부대가 공적 보안부대를 보완했고 대규모 공장에서 하던 관습적이 기능을 확장하여 슈퍼마켓, 쇼핑센터, 쇼핑몰 같은 대량 소비의 새로운 공간에서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경찰은 도시의 소비와 생산 영역에서 그들의 활동을 확장하면서, 해안가나 산의 여가생활 영역에서도 부가적인 임무를 떠맡았다. 그래서 계급에 기초한 혁명적 프로젝트의 쇠퇴와 소비와 여가의 확장은 억압적인 군사력을 결코 남아돌게 만들지 않았다. 5월 이후에, 유혹 사회로 적응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옮긴이: 김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