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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A Man!” : 인종, 남성성과 1968년 멤피스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5월호

“I Am A Man!” : 인종, 남성성과 1968년 멤피스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4

“I Am A Man!” : 인종, 남성성과 1968년 멤피스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

 

스티브 에스테스(Steve Estes)

 



1968328, 테네시 주 멤피스 시의 번화한 도로인 빌 스트리트를 따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수 천 명의 미국 흑인들을 이끌고 시위를 지휘하고 있었다. 킹이 탄 비행기는 그날 늦은 아침에 도착했는데, 킹과 함께 온 남부지역 기독교 지도자협회(SCLC) 회원들이 시위대의 맨 앞에 자리를 잡을 때쯤에는 이미 군중들이 경찰과 충돌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행진대열은 당시 파업 중이던 1,300여명의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시위대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I Am A Man!”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현수막을 두르고 있었다. 시위대가 빌 스트리트 아래로 진입하고 있을 때, 파업 지지자들 가운데 젊은이들 몇몇이 그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 붙은 게시물을 분리시켜 나무 막대기를 떼어냈다. 이들 젊은이들은 파업 노동자가 아니라 파업을 지지하는 이들이었는데, 떼어낸 나무 막대기로 도로 양옆의 가게 앞 유리들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 주 경찰은 최루탄을 시위대 속으로 던져댔고, 미처 피하지 못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시위대에게 최루가스를 살포했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시청 꼭대기의 집무실에 앉아있던 헨리 로엡 시장은, 이 파업이 불법임을 굳게 믿었으며 멤피스에는 법과 질서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 행진은 과거 노예시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자유와 시민권 보장을 놓고 벌어진 소요사태) 이래로 최근 멤피스에서 최고조에 달한 시위사태였다. 어떤 의미에서 파업노동자가 두르고 있던 “I Am A Man”이라는 슬로건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요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슬로건은 당시 멤피스 백인 시민들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멤피스 백인들은 적어도 인종 문제에서만큼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쯤이면 멤피스에서도 노골적인 인종차별정책이 서서히 사라지고 어쨌건 명목상의 통합정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7년 실시된 시장 선거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인 헨리 로엡이 백인 반동주의 물결에 힘입어 인종적 조화에 맞서 시장에 당선되었다. 언론을 대할 때조차 그는 여전히 멤피스 흑인들을 내 깜둥이들이라고 불렀는데, 몇몇 평자들은 그의 인종관에 대해 “(과거) 플랜테이션 시절 사고방식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파업 지도자들은 로엡의 가부장적 시각, 파업 노동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태도를 집중적으로 비난했다. 이런 측면에서 “I Am A Man”이라는 슬로건은 남자냐 여자냐를 떠나 모든 멤피스 흑인들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존중하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I Am A Man”이라는 슬로건은 의심할 나위 없이 남자란 무엇을 뜻하는가를 놓고 발생하는 성적인 논쟁을 나타내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인간답게 대접하라는 이 투쟁 요구는 간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존중하고 존엄성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답게 대접하라는 의미는 인간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만큼이나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행진 도중에 게시물을 떼어 나무막대기를 든 젊은이들의 경우, 백인이 말하는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에 맞서 싸우는 것뿐 아니라 나이든 흑인 지도자들이 신봉해온 인간다움이라는 개념과도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멤피스의 경우 흑인이나 백인의 남성다움이라는 개념은 인종, 연령, 계급 뿐 아니라 여성다움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더욱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멤피스에서 남성다움을 위한 투쟁은 단순한 흑인 및 백인의 성적 자기정체성 개념에 저항하는 것이다.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투쟁은 흑인과 백인 공동체 내에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갖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미국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맞서 싸울 때, 때로는 그것을 강화할 때 성적인 언어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 노동역사가들은 거의 배타적으로 남성 노동자들에게만 집중해왔다. 암묵적으로 이러한 전제 위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중성적인 의미의 노동자” “조직가라는 단어를 쓸 때에도 사실은 오직 남성만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해왔다. 여성노동자 투쟁이 노동 역사에서 성적 분석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분석은 최근에야 노동 역사가들이 남성 노동자들과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을 뿐이다. 앨리스 케슬러-해리스(Alice Kessler-Harris)와 엘리자베스 포(Elizabeth Faue)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노동역사가들에게, 사람들이 노동과 노동자 권리를 이해하는 방식은 그들이 여성성과 남성성 두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보기를 들어 케슬러-해리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노동계급 남성들은 남성다움의 형태에 대해 끊임없이 재협상을 한다. …… 가족 내에서의 권력을 보완하고 사용자와의 투쟁에서 이를 계속 활용한다.” 물론 그녀는 이러한 시도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포와 케슬러-해리스가 노동역사에 성적 분석을 제공하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했고, 조 윌리엄 트로터의 경우 미국 흑인의 노동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남성이라는 정체성 개념과 미국의 흑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 개념이 어떻게 변화했는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역사가들은 명백히 계급과 인종 문제에만 관련되어 있다고 보이는 노동운동을 성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따금 역사 속에 숨어 있는 문제들을 분석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남성성이 갖고 있는 규범적인 본성으로 인해 역사 속의 행위자들에게는 남성성 문제가 보이지 않게 되는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멤피스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파업에서만큼은 남성성, 인종적 정체성, 노사관계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노동자들, 노조 조직가들, 시민운동 지도자들과 시청 관료들 모두가 임금과 노동조합의 권리, 그리고 백인과 흑인 사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력관계를 협상할 때마다 성적인 수사들을 의식적으로 사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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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서 20세기로) 세기가 바뀌면서 멤피스 노동자의 인종적 구성은 꽤 많이 달라졌다. 이는 농업생산의 기계화가 증대되고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미시시피 삼각주 농업지대에서 일하던 흑인들이 대거 멤피스 같은 도시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흑인들의 이동은 도시에서 흑인과 백인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주기적으로 폭력과 충돌 사태가 일어나면서 인종, 성 등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해왔다. 전에 농장에서 소작인으로 일하던 흑인들이 이제는 멤피스 제조업 일자리를 놓고 백인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노동계급을 인종에 따라 분할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미국 남부에서 인종을 넘어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노력의 대다수는 실패로 돌아갔고, 멤피스에서 살아남은 노동조합의 대다수는 여전히 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백인 노동자들이 임금투쟁을 할 때, 보통 그들은 백인들만의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듀보이스(W. E. B. DuBois)가 말하듯이, 현장에서의 백인 우월주의는 몇몇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에게 더 높은 심리적 임금을 제공했다. 공공기관 노조처럼 (인종을 넘어) 통합된 노동조합들이 일반화되었더라면, 빈곤한 백인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위태롭게 했을지도 모른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멤피스 공공기관 건물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현장에서 벌어진 인종적 분할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백인 관리자들은 업무 할당, 임금 규모와 승진 문제에서 흑인 노동자들을 대놓고 차별했다. 이 시절 흑인 노동자들의 임금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가 하면, 적지 않은 이들이 두 개의 일자리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40%에 달하는 흑인들이 생활보호 대상자의 조건에 처해있었다. 극도의 저임금을 받는 것 외에도, 시에서는 더 많은 돈을 아끼기 위해 흑인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낡디낡은 설비들을 현대화하는 것을 거부했다. 공공사업 위원회가 마지못해 기계포장기가 달린 트럭과 손수레를 구입하기 전까지, 노동자들은 질질 새는 쓰레기통을 손으로 날라야 했다.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중노동에서 발생하는 등허리 통증을 감내해야만 했다. 비용을 더욱 절감하기 위해 관리자들은 비오는 날에 필수적이지 않은공공사업 노동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L. C. 리드 씨는 다른 흑인 노동자들처럼 비오는 날이면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 중 한명이었는데, “백인 노동자들은 해가 쨍쨍 내리쬘 때나 비올 때, 진눈깨비나 눈이 올 때에도 일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후 관리자들은 한 번도 빠짐없이 오후 4시까지만 자리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갔다. 이건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다라며 씁쓸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흑인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백인 동료들이 거의 지지해주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음에도, 저임금과 노동조건 개선과 공공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인종적 차별에 맞서기 위해 1960년대에 노동조합 결성을 꾸준히 시도했다. 그들은 1963년 처음 파업을 시도했으나 조직화가 잘 이뤄지지 못해 패배로 돌아갔다. 1964년에는 전에 환경미화 노동자로 일했던 T. O. 존스가 불만에 찬 동료들을 도와 전미국연방·주정부·자치단체 노동조합연맹(AFSCME)1773 지부를 결성했으나, 시청 관료들은 노동조합 승인을 거부했다. 1966년 또다시 파업을 벌였으나 여전히 노조 승인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파업에서는 많은 신규 조합원들을 충원할 수 있었다. “나는 1966년에 T. O. 존스가 있는 노동조합에 가입했어요. 우리는 정당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있었거든요에드 질리스의 말이다. 이러한 몇 차례의 실패 경험은 오히려 1968년에 정열적으로 시작된 공공기관 노동자들의 장기 파업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당시 파업의 발단은 낡은 쓰레기차의 오작동으로 인해 두 명의 흑인 노동자가 사망에 이른 사건이었다. 멤피스에서 발간되는 두 개의 백인신문 중 하나인 커머셜 어필는 당시에 노동자들이 쓰레기처럼 바수어졌다고 보도했다. 환경미화청에서는 죽은 노동자들의 가족들에게 1개월간의 급여와 장례비용으로 500달러를 추가로 지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시 관료들 누구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유족들에게는 추가적으로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1968212, 환경미화 노동조합은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 논의하고, 비오는 날 지급되는 불완전 임금에 대해 따지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그 사건들(동료들의 죽음과 불완전 임금)은 노동자들이 한계점 이상으로 밀고 나가게 한 동력이었다. 환경미화 업무의 특성상 파업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시점은 여름인데, 거리거리마다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들이 넘쳐나서 굉장히 비위생적인 환경을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곧바로 (2월에) 파업에 돌입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그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임금인상 노동조합비 공제 시간외근로에 대한 1.5배의 수당 작업장 안존조치 비오는 날 귀가조치 되었을 때 보상 급료 지급. 환경미화 노동자들 모두가 남자였는데, 최소한 한 명의 여성이 그날 열린 중요한 회의에 참석했으며, 그녀가 멤피스 시의 인종적 차별에 대해 행한 연설은 남자들로 하여금 행동으로 나서고 이 파업의 시민권적 요구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자극제 역할이 되어주었다.

코넬리아 크렌쇼는 당시 일부 노조 지도자들이 이번 파업은 단순한 노동쟁의일 뿐이라고 얘기했지만, “진짜쟁점은 인종 문제였다고 얘기한다. 노조 지도자들이 파업 초기부터 인종 문제를 무시하려 애쓴 반면, 크렌쇼와 에제키앨 벨 목사는 임금실태와 인상률에서 인종적 차별의 문제가 노동자들 요구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벨 목사는 크렌쇼에 대해 시민운동과 정치운동의 잘 알려진 여성 지도자라고 평가했지만, 다른 대중적 인물들은 파업에서 그녀의 역할을 비난하는 편이었다. 당시 시의회의 유일한 (백인) 여성의원이었던 그웬 오섬은, 크렌쇼가 멤피스 주택부서에서 해고된 후 매우 호전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여성으로서 크렌쇼가 파업 초기에 보여준 뛰어난 지도력은 매우 비범한 것이었다. 언론사 카메라와 지역 시민들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에서 전통적인 남성 지도자들의 역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자, 흑인 목사들과 백인 노조 지도자들은 파업에서 그녀가 가진 대중적 역할을 발 빠르게 지우려 했다.

TV 기자단은 헨리 로엡 시장의 강요로 처음부터 파업 협상을 영상으로 담았다. 로엡은 지역 언론을 조작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처음 교섭에 나올 때부터 침착하고 정중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당시 전국 노조를 대표하여 나온 P. J. 시암파의 시건방진 태도와 대조를 이루었다. 시암파의 무뚝뚝한 교섭 태도는 당시 중립적이던 많은 멤피스 시민들을 로엡의 편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TV로 교섭상황이 중계되기 시작하자, 일부 멤피스 백인들은 시암파에 대한 경멸의 표시로 시암파는 꺼져라는 차량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 이러한 사태전개를 지켜보던 AFSCME 위원장 제리 워프는, 본인이 직접 사태에 개입하여 로엡과 교섭을 진행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220일까지 시암파와 워프는 노조 지부의 지도자들과 함께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 목록을 수정하는데 힘을 쏟았다. 수정된 목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체협약 체결을 통한 노조 인정 분쟁처리절차 확립 10%의 임금인상 공정한 승진제도 정립 병가제도 연금제도 의료보험 임금에서 조합비 공제. 로엡 시장은 자신의도시에서 자치단체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관련된 나쁜 선례를 만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종일관 노조 인정과 조합비 공제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그는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AFSCME 관료들(“외부세력”)에 의해 속아 넘어가고 있으며, 외부세력은 단지 멤피스 시민들이 힘들게 벌어들인 돈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울 욕심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로엡은 스스로가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수호자인양 얘기했다. 그는 파업 기간 내내 파업 노동자들을 노조 관료들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굳게 선언했다. 파업 노동자와 흑인 지역지도자들 입장에서 시장의 말은 노예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가부장제 냄새가 났다. 노동자들은 전국 노조의 계획에 대해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체임을 어느 때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해, 파업노동자들은 애가 아니라 남자들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업 지도자들은 남성다움을 주장하는 성적인 단어로 자신들의 요구를 분명히 밝히기 시작했다. AFSCME 전국 조직의 최고위층 지도부로 있던 빌 루씨는, 노동자들의 자긍심과 저항심이 “I Am A Man”이라는 짧은 슬로건 속에 잘 담겨있다고 말했다. 파업의 첫째 주에 열린 노조 회의에서 루씨는 다음과 같이 연설하며 로엡의 가부장적 태도를 냉소적으로 비판했다. “자애로운 시장님은 …… 여러분을 보호하려 한다. 그는 여러분을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갔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다 자란 남자이며, 남자답게 우리의 요구를 걸고 당당하게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파업 노동자들을 어리고 순종하는 노예들 취급하고, 백인 지도자들이 그들을 대신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관계처럼 보았다면, 루씨는 남자다움이란 것은 부당한 권력구조에 맞서 분연히 일어서는 것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시장의 시각과 자신의 견해를 대비시켰다.

“I Am A Man”이라는 슬로건은 파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거대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이 슬로건이 2차 대전 이래로 빌 스트리트의 클럽과 주크박스가 있는 주점에 울려 퍼지던 델타 블루스(Delta blues, 미국 미시시피 강의 델타(삼각주) 지대에서 일어난, 거칠고 토착적인 블루스: 옮긴이 주)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블루스 음악은, 미시시피 삼각주의 농촌과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던 흑인들이 멤피스나 시카고 같은 도시의 제조업과 서비스업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주하면서 함께 도시로 유입되었다. B. B. 킹이나 무디 워터스같은 블루스 기타 연주자들은 1950년대 도시에 살던 미국 흑인들의 감수성을 전율케 했는데, 어릴 적부터 델타 지대에서 들어온 블루스 음악을 기타 선율로 새롭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킹의 음악은 빌 스트리트의 장단에 템포를 맞춘 것인 반면, 워터스의 시카고 블루스 음반은 이 장르를 전국적 인기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최초로 미국 흑인들의 남성성을 다룬 음악이었다.

1955년에 처음 녹음된 워터스 음반의 타이틀곡 사내다운 아이, 1950년대 미국의 흑인들이 갖고 있던 모호한 지위를 포착한 것이었다. 느린 발라드풍의 블루스 곡인 이 노래는, 흑인 엄마가 5 살배기 아들에게 너는 언젠가 최고로 위대한 인물이 될 거라고 말해주는 대목에서 출발하여, 그 아이가 21살 되던 해에 스스로 남자가 되었다고 느꼈음에도 사람들은 계속 자기를 아이처럼 취급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가사로 이어진다. 그 시절 많은 블루스 곡이 거의 그랬지만, “사내다운 아이가 내세운 남자다움(성인임)을 입증하는 방법은 노래 도중 해설자의 말로 나오듯이 성적인 용기를 내라는 것이다. 백 코러스와 함께 워터스는 흑인의 남성다움을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I Am A Man. M, A, N! 남자란 말이다!” 그리고서 잠깐잠깐 연주를 멈추고서 가사 한줄 한줄을 강조하면 여성 보컬들이 따라 부르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워터스가 외치는 남성다움은 성적인 용기에 기초해서 기존 권력구조 내에서 남성다움이라는 말이 가진 인종적 배타성에 저항하고 있기는 하지만, 백인 남성 우월주의의 사회경제적 기초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워터스를 비롯한 몇몇 블루스 연주자들은, 1960년대 정치 활동가들이 만든 미국 흑인들의 인간적 존엄에 대한 요구의 기초를 놓아주었다고 할 수 있다. 워터스가 겪었던 성적, 인종적 딜레마에 함께 빠져있기는 하지만, AFSCME 조직가인 빌 루씨의 “I Am A Man”이라는 슬로건은, 그때 멤피스를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하던 백인들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던 파업 노동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222700명의 노동자들이 시의회 회의실에서 농성을 시작했을 때, 파업노동자들은 이미 루씨의 슬로건을 지지하고 있었다. 시의회 의원 가운데 흑인은 3명뿐이었는데 그 가운데 1명인 프레드 데이비스가 공공사업위원회 회의의 의장을 맡아서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시작되었으나, 결국 노동조합의 분노한 시위로 회의가 끝나게 되었다. 이 시위에서 지역 흑인 목사들이 연설을 하고 자유의 노래를 지휘할 때 노동자들은 듣고 있어야 했다. 에제키앨 벨 목사는 회의실 벽에 붙어있는 시의 휘장을 누가 훼손하더라도 자신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농성대오는 격하게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 열렬한 연설을 듣고 난 뒤, 파업 노동자들은 회의실 퇴장을 거부하고 위원회가 시의회 전원 회의를 열어 파업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겠다고 결의하기 전에는 절대로 나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위원회는 결국 시의회가 노조 인정과 조합비 공제를 지지하도록 권고하겠다고 얘기했으나, 다음날 시의회가 통과시킨 결정에서는 이러한 제안에 대한 문구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에 시의회는 시장을 시의 유일한 대변자로 인정하고 말았다.

당연히 파업 노동자들은 시의회에 배신감을 느꼈다. 목사들과 노조 지도자들은 비폭력적 방식을 통해 노동자들이 이러한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스스로의 좌절감을 분출시킬 통로가 필요하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다. 제리 워프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 그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지만, 죽기 전에 남자답게 한번 일어서 싸우겠다며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폭탄 테러범들이 아니었다. …… 하지만 그들은 정말로 격앙되기 시작했다. 이런 이들이 격앙되게 되자 그 또한 격앙되었다. 나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만약에 파업노동자 시위대가 도로의 한편에만 있었다면 그들은 무사히 메이슨 템플 교회까지 행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경찰도 인정하고 있다. 노조 지도자와 목사들의 지휘 아래 파업 노동자와 지지자들은 메이슨 템플 교회를 향해 행진하던 중, 알려진 바와 같이 경찰차가 중앙차선을 넘어 여성 시위대의 다리를 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부 남성 시위대들이 여성 시위자를 보호하기 위해 경찰차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은 목사와 노조 지도자, 그리고 연방의 인권 관련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는 전체 대열에 최루가스를 난사하며 복수했다. 성직자용 칼라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최루가스 세례를 받은 사실에 너무 놀라고 당황한 목사들은,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체 흑인 사회에서 엄청난 상징으로 떠올랐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노조 지도자들과 똑같이 목사들은 백인 가부장제를 공격하며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시위 직후 열린 회의에서 한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다. “난 이제 위대하신 백인 신부 앞에 껌둥이들이 무릎을 꿇고 그의 식탁에서 빵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간청해야 하는 현실에 진저리가 납니다.”

시위가 벌어진 바로 다음날인 224, 150명의 흑인 목사들이 파업 노동자를 지지하는 조직 결성을 위해 회의를 열었다. 이 그룹은 마침내 평등을 위한 행동 공동체(COME)”라는 이름을 정하고, 도시 산업에 대한 경제적 보이콧,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분명히 파업에 대해 편파적인 보도를 일삼는 두 개의 백인 신문(커머셜 어필, 프레스 시미타)에 대한 불매운동을 호소했다. 이들 목사 그룹의 역동적인 활동은 환경미화 노동자의 뒤에 있던 흑인 공동체를 조직하는 효과를 낳았다. 1300명의 흑인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사건은, 이제 멤피스 시 전체의 시민운동 지도자들에게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1968314,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의장인 로이 윌킨스는 9100명이 넘는 민중들 앞에서 연설하기 위해 전국 노조 지도자인 바야드 러스틴과 함께 멤피스로 왔다. 윌킨스는 시의 지도자들이 환경미화 노동자들에게 그들 가족을 충분히 먹여 살릴 만큼의 임금을 주지 않는 점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러한 의미의 최저 수준 임금은 흔히 가족 임금또는 생활 임금이라고 한다. “만약에 내가 시장이라면, 나는 엄청나게 부끄러울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보잘 것 없는 임금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상황을 결코 만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충분한 임금이 주어진다면, 이들은 자기 가족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남자로서의 전통적인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윌킨스는 주장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4일 후에 멤피스에서 연설하기 위해 왔을 때에도, 생활임금 보장을 통해 파업노동자들이 남자답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를 거듭 설명했다.

지역 지도자들은 킹 목사를 데려올 수 있다면 이 파업에 전국 언론을 집중시킴으로써 로엡 시장이 자기 입장을 재고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킹 목사를 초청했다. 예상대로 킹 목사는 멤피스로 언론의 주목을 끄는데 성공했으며, 여기에 더해 킹 목사 스스로 분석한 이 파업의 성적 의미를 설명했다. 1만 명 넘게 운집한 상태에서 킹 목사는 우리의 남성들이 거세당해(무능력하게 되어) 결국 아내와 딸들이 백인 마님들 주방으로 일을 나가게 되는 현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보살필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는 현실이 너무나 밉습니다.”라고 설교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연설하며 로엡의 가부장주의적 시각을 비판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어떤 이도 여러분들에게 일자리로 돌아가라며 가부장적으로 이렇게 얘기하도록 절대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 너는 내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 올바른 일을 할 것이다.’” 킹 목사는 환경미화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대중적이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이끌기 위해 멤피스에 다시 방문하겠노라고 약속하며 연설을 끝마쳤다.



킹 목사의 연설을 보면, 그가 저임금과 인종주의적 차별 문제를 과거 노예시대 백인들이 흑인 노동자들을 거세하던 전통과 일치시켜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킹 목사가 흑인 남성에 대한 거세를 언급한 주목적은 가부장적 인종주의와 저임금이 가져온 비인간적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킹 목사는 또한 흑인 남자를 거세하는 가부장적 시도가 어떻게 흑인 여성들의 역할과 지위에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남성에 대한 거세가 결국 아내와 딸들이 백인 마님들 주방으로 일을 나가게 되는 현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보살필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는 현실을 낳게 된다고 하면서, 흑인 남성성이 부정되면 결국 킹 목사가 엄마로서 진정한역할이라고 보았던 것을 충족시키는 흑인 여성의 능력에도 영향이 미친다는 점을 얘기하고 있다. 그는 더 높은 임금과 흑인 남성의 지위 향상을 요구하면서도, 흑인 가족 내에서 가장의 지위를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흑인 여성다움에 대해 얘기할 때, 백인들의 집에서 어쩔 수 없이 집안일을 하는 노예노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 자신의 가정에서 흑인 여성들이 집안일을 도맡는 현실은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어찌되었건 최소한 킹 목사는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가족들은 충분한 수입을 획득함으로써 여성들이 집안에서 일할지 아니면 나가서 일할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1960년대 미국 사회의 가장 지위와 킹이 속해있던 SCLC의 남성 지배적 조직체계가, 흑인 가족에 대한 그의 가장 모델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조직적 성 편향(불균형) 때문에 킹을 비롯한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의 지도자들은 인간의 권리를 남성의 권리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I Am A Man”이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성 편향 문제가 언어에서, 그리고 더 큰 사회에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슬로건은 단순히 인간 존엄에 대한 비()성적 요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청중이 누구인가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지도자들은 이 슬로건을 때로는 남성의 요구로 내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성 중립적인인간의 권리에 대한 요구로 설명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의미로 얘기해왔기 때문이다.

 

남자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 사이의 차이가 모호하다는 점은 파업에서 나온 많은 연설에서 발견된다. 로슨 목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장이 노동자들을 남자가 아닌 것처럼 대하고 있으며 이것은 매우 인종주의적 태도입니다. …… 인종주의의 심장부에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며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이 경우에 로슨 목사는 인종주의가 흑인 남자를 여자로 만든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종주의가 미국 흑인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인정하는데 방해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도 1960년대 성적인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멤피스 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에, 파업 지도자들은 “I Am A Man”이라는 슬로건을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권리를 뜻한다기보다 남자들의 권리라는 엄격한 의미로 정의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킹 목사가 멤피스에서 흑인 남성들의 거세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는 대다수 집회 참가자들과 구경꾼들이 믿고 있던, “I Am A Man”이라는 슬로건이 갖는 핵심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암시적으로 얘기했던 것이다. 백인 남성과 여성들은 노예시대 이래로 멤피스 뿐 아니라 남부 전 지역의 흑인 남성들을 애들이라고 불러왔다. 이렇게 언어로 거세시키는 행위가 노예 구타, 이주시절 폭행, 20세기 시민운동 활동가에 대한 KKK단의 복수 등으로 점철된 흑인 남성에 대한 물리적 거세행위와 나란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슬로건은 흑인 남성들에 대한 언어적·물리적 거세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에 다름 아니다. 파업노동자와 지도자 일부는 시의 아버지들의 가부장제에 맞서 비폭력 투쟁이야말로 언어적·물리적 거세행위에 맞서 싸우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1968년에는 비폭력이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방식이라고 생각한 강력하고 뛰어난 흑인들의 부대가 존재했다.

멤피스 시민운동과 투쟁에서 다른 형태를 고민하고 대표해온 조직이 있다. 이 그룹은 침략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젊은 투사들의 조직이었다. 10대 후반이나 20대 흑인 남성들이 주로 활동했다. 이들은 멤피스 시민운동에서 스스로를 가장 급진적인 전투부대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찰스 캐비지와 코비 스미스가 1967년에 침략자들이라는 조직을 설립하였는데, 처음에는 흑인 조직 기획(BOP)’이라는 조직의 사수부대로 출발한 것이었다. COME 의 멤버들이 이 젊은 투사그룹을 자신들의 조직화 계획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몇 번 벌였지만, 두 그룹 사이의 관계는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침략자들은 흑인 권력을 옹호하고 있었고, 그들의 선동은 주로 도시의 백인 권력구조를 폭력적인 저항으로 깨부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COME 의 전략과 잘 맞지 않았다.

1968년에 캘빈 테일러는 멤피스 주립대학 졸업반으로서 커머셜 어필지의 수습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침략자들의 일원이기도 했다. 신문사의 관리자들은 그가 침략자들과 연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며, 그는 많은 파업시위에 참가자로서 그리고 취재기자로서 참여할 수 있었다. ‘침략자들에 대한 언론 보도는 테일러를 매우 화나게 했는데, 그는 비꼬는 말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그들은 우리를 두고 마치 장난감처럼 흑인 권력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백인들에게는 아이들이라는 단어가 머리속에서 떠나지를 않는 것 같다.”

성년에 거의 도달한 다른 젊은이들처럼, ‘침략자들은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식에 몰두해 있었다. ‘침략자들이 새로운 회원을 받아들일 때 치르는 통과의식에 사용되는 문구에 대해 테일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우리는 결의한다. 흑인이 14살에 이르게 되면 흑인 소년이 14살에 이르면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 남자가 된다. 왜냐하면 이 나이에 이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을 결의한다. 우리는 고등학교에서 사람들을 조직할 것이다. …… 그리고 대학의 신입생과 2학년생들을 조직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침략자들을 구성한다.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흑인 남성에 대해 그들이 60~70세가 되도록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방식의 정반대 입장에 서있는 테일러는, 흑인 남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14살부터 시작된다고 정의한다. 왜냐하면 백인 인종주의가 흑인들로 하여금 훨씬 어린 나이에 세상을 알고 성숙하도록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침략자들이 갖고 있는 흑인 남성에 대한 정의는 백인들의 그것과 충돌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이 많은 보수적인 흑인 지도자들이 믿고 있는 정의와도 부딪힌다. 자신을 급진주의자라고 소개한 침략자들의 한 회원은 어느 대중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얘기했다: 

 

설교도 좋고 모금도 좋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저 밖에 남자들이 있다. 우리는 지금 전투를 벌여야 할 때이다. 행진이 아니라 전투 말이다! 만약 여러분이 시가 보유한 경찰들 전체와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면, 총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조는 원문 그대로의 것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제임스 로슨의 경우 비폭력이라는 철학의 굳건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침략자들처럼 남자를 정의할 때 시의 권력구조에 맞서 폭력적인 투쟁을 할 의지가 있는가 여부로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이다. 스스로가 비폭력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어떻게 폭력 위주의 전략(혹은 최소한 폭력투쟁을 위협하는 수사학)으로 옮겨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테일러는 이렇게 설명한다. “보통 이렇게 된다. ‘여러분 …… 괜찮습니다. …… 우리는 어제 밤 당했습니다. 저는 5차례나 머리를 두들겨 맞았습니다. 아름다운 일 아닙니까?’ 그러고 나서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형제들, 동지들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 번 더 두들겨 맞고 나면 …… 당연히 지치게 된다.” 바로 좌절감이 테일러와 다른 침략자들멤버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형제애를 찾아 나서도록 만들었고, 폭력적인 시위에의 참여를 수용하는(어쩔 때는 필요로 하는) 남성다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328일에 테일러와 침략자들의 많은 멤버들은 폭력적인 시위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날은 킹 목사가 멤피스로 돌아와 빌 스트리트로 나아가는 시위를 이끌다가 경찰의 폭력으로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한 시위였다. 비록 대다수 침략자들지도자들은 이날 실제로 약탈과 폭력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선동은 젊은 시위대를 분기시켰고, 이날 단순한 비폭력 시위 이상의 것을 기대하고 시위에 찾아온 이들에 대한 엄호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젊은 시위자들은 손으로 칠한 피켓을 들어보였는데, 주로 이러한 문구들이었다. “로엡 최후의 날” “로엡은 똥이나 쳐먹어라이중에서도 가장 미묘한 문구는 이것이었다. “로엡 시장, 엿이나 먹어라!(Fuck You Mayor Loeb!)” 이들 시위대는 비폭력을 주장하는 나이든 흑인들 못지않게 로엡 시장의 가부장제를 똑같이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저항의 무기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시위대에서 누가 먼저 약탈을 시작했는지를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로슨 목사의 기억에 따르면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30세가 못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이들 젊은이들의 행동은 킹 목사의 비폭력에 호소하자는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의 성격을 바꾸어놓았다. 전투적 대오가 시위에 폭력적 방식을 도입한 뒤에, 킹은 비폭력 저항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멤피스 투쟁에 계속 개입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느끼게 되었다.

보통 시민운동에서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대립이 벌어지면 으레 세대 간의 갈등으로 설명하기 마련이다. 물론 침략자들의 사례에서도 분명히 세대차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들어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멤피스에서 폭력투쟁의 문제는 단순히 10대의 치기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경찰의 잔인한 진압, 시민운동의 느릿느릿한 변화에 분노하여 폭력투쟁으로 이끌린 사람은 단지 침략자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연구한 적이 있는 제임스 로슨 목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당시 운동에서) 모든 이들이 비폭력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 보기를 들어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비폭력적이었다는 말은 옳지 않다. 물론 몇몇은 비폭력운동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려 하긴 했지만 말이다.” 파업이 진행되던 중 몇몇 시점에는 파업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까지도 너무 화가 나서 폭력을 사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시청 점거농성 후 파업노동자와 지지자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 과정에서, 어느 경관이 헨리 스타크 목사에게 서둘러, 얘야. 앞으로 가, 얘야. 움직이라구!”라고 말하자 스타크 목사는 나는 애가 아니다. 나는 헨리 스타크 목사란 말이다. 한번만 더 라고 나를 부르면 (주먹을 날려 버릴테니) 그때엔 나를 폭력 혐의로 체포해야 할 것이다.”라며 대꾸하는 일도 있었다. 흑인 사회에서 부유한 계급에 속한 다른 이들도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파업기간 가운데 인종주의적 경찰에 격렬하게 맞서 싸우곤 했다. 시위와 행진이 있던 날, 지역 보험회사 사장인 해롤드 웨일럼 씨는 NAACP 사무실 밖에서 사무국장 맥신 스미스를 비롯한 몇몇 여성들과 함께 서있었다. 그때 한 경관이 걸어오더니 안으로 들어가, 이 깜둥이 쌍놈아!”라고 욕을 해댔다. 웨일럼은 곧바로 아니 도대체 숙녀들 앞에서 꼭 그렇게 얘기해야 되겠소?”라고 대꾸하자, 그 경관은 웨일럼에게 이 깜둥이 개새끼라고 내뱉은 후 때려눕혀버렸다. 노동계급 파업참여자들처럼 중상류계급 사업가인 해롤드 웨일럼 또한 파업기간 중에 자신의 사내다움을 지키기 위해 당당히 맞서 싸워야만했던 것이다. 이 사례에서 웨일럼은 경찰의 잔인한 인종주의가 나타나는 현장에서 NAACP의 동료 여성들을 방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내다움을 입증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파업대오의 폭력시위와 경찰의 잔인한 진압을 보도한 흑인과 백인 신문의 주요기사들이야말로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에서 사내다움을 위한 투쟁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멤피스에서 발간되는 가장 큰 흑인 주간신문인 삼주 수호자(Tri-State Defender)’는 파업 기간에 법과 질서를 수호할 임무를 지닌 주 경찰들이 과연 정당하게 진압활동을 했는지, 기사도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었는지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이 신문은 창문 밖으로 권총을 흔들며 흑인 여성들이 서있는 길거리에 무례하게 담배를 퉤퉤 뱉어대고 있었다.”, 경찰들을 마치 총을 못 쏴서 안달이 난 카우보이처럼 묘사했다. 주요 백인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커머셜 어필지는 공격을 킹 목사에게 집중시켰다.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하기 직전에 킹 목사가 자신의 측근들의 강요로 빌 스트리트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대다수 시위자들은 그처럼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지역의 백인 취재기자들은 킹이 이런 난투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일찍 빠져나간 사실에 대해 강한 비난을 퍼부었다. 커머셜 어필지는 혼잡 속에 킹이 빠져나간 사건을 두고 겁쟁이(chicken)같은 킹이라고 꼬집었다. 만일 킹 목사가 이 신문이 묘사한 것처럼 진짜 겁쟁이였다면, 그는 결코 진실한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백인 신문들만 킹의 사내답지 못함을 비난한 것은 아니다. ‘침략자들의 멤버들 또한 그의 비폭력이라는 철학을 사내답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비록 킹이 멤피스에 왔을 때 그들 또한 열렬히 환영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날 시위가 폭력진압을 당한 후에 킹 목사는 침략자들의 지도부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캘빈 테일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남자치고 그는 굉장히 부드러운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 하지만 이 양반은 비폭력을 신봉하며 살아온 것 같다. 이러한 면 때문에 그가 더 순하게 보였던 것 같다.” 테일러는 킹의 존재감에 압도되기는 했지만, 시민운동 지도자들의 전술과 사내다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킹은 비폭력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제기들을 잠재워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첫 번째 행진에서 폭력적 사태가 우발적으로 터져 나온 뒤, 그는 빈민들의 캠페인을 위해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멤피스로 돌아와 성공적인 비폭력 시위를 이끌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는 두 번째 시위가 예정되어 있던 이틀 전인 43일에 멤피스로 돌아왔다. 그날 밤 랠프 애버너티는 킹 목사를 설득하여 메이슨 템플 교회로 와서 연설하도록 요청했다. 그날은 악천후를 뚫고 3~4천명의 멤피스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킹은 애버너티의 초청을 받아들여, 지금은 산상설교로 잘 알려져 있는 그의 생애 마지막 연설을 하게 된다. 이 연설에서 킹은 자신이 이끌어 성공했던 버밍햄 경험을 소개했다. 멤피스의 첫 번째 연설에서 흑인 남성에 대한 거세 문제를 거론했던 그가 두 번째 연설에서 선택한 비유법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당시 (버밍햄에서) 황소 코너(Bull Connor)조차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권력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황소를 거세시킬 수 있었고 끝내 투쟁에서 승리했다. …… 킹은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파업이 제기한 사내다움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시작해서, 이 파업의 최종 목표와 조만간 시작될 빈민 캠페인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남자임을, 인간임을 단호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하지만 킹은 빈민들의 캠페인을 이끌기 위해 워싱턴으로 가지는 못할 운명이었다. “산상연설이 있은 다음날은 196844, 얼 레이라는 자가 그를 총으로 쏴죽였기 때문이다. 킹의 암살 소식은 전 국민의 눈과 귀를 멤피스와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집중시켜 놓았다. 전국에서 시민운동 지도자들이 이번 암살로 인종 사이에 평화적인 화해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잃게 된 것이라며 미국의 백인들에게 경고했다. 한때 SNCC 지도자였던 스토클리 카마이클은 만약에 우리의 인간다움을 쟁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흑인으로서 우리의 발로 당당하게 떨쳐 일어나 폭력적인 투쟁을 전개하며 싸우다 남자답게 죽는 것밖에 없다면, 그래 좋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마!”라고 예언처럼 말했다. 카마이클의 이런 급진적인 예언은 곧이어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실제로 격렬한 사회적 투쟁이 벌어짐으로써 실제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다만 멤피스만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킹의 죽음으로 깨어난 멤피스의 흑인과 백인들이 이 비극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함께 모이기 시작했다. 두 개의 인종, 다양한 종파에 속해있는 성직자들은 본래 45일에 로엡 시장과 이번 파업사태의 해결을 위한 면담을 예정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면담은 암살 사건과 이번 파업이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미리 준비된 성명을 통해 성직자들은 킹 목사를 두고 뛰어난 평화의 전도사이자 비폭력의 힘을 믿고 옹호했으며 진정한 인간성을 증진하고 실천한 이라고 칭송했다. 목사들은 이 자리를 킹의 인간성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지지하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멤피스 백인들은 킹을 반대했고 그가 옹호하려 했던 것도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보수적인 시의회 백인 의원들은 파업기간 내내 이러한 백인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3월 한 달 동안 시의회는 매주 회의를 가졌는데, 그때마다 로엡 시장에 대한 지지를 계속 확인할 뿐이었다. 물론 3명의 흑인 시의원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파업을 후원하고 있었지만, 번번이 시장의 입장을 대변하는 압도적 다수의 백인 시의원들에 맞서 힘겹게 싸워야 했다. 백인 시의원 다수파의 지도급 인사인 톰 토드는 노조 지도자들이 시의회에서 농성을 벌이며 압력을 가한 행위 자체에 대해 매우 분개했다. 토드는 이렇게 파업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을 밝혔다. “저 작자들(노조 지도자들)이 이곳으로 내려와서 깡패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 남자답게 행동했다면, 일을 푸는 게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또 다른 시의회 의원은 이렇게 얘기했다. “차라리 악마와 협상하는 것이 더 낫지, 저들하고는 더 협상하기 어려워.”

토드를 비롯한 몇몇 시의원들이 파업기간 내내 그들의 반노조적 입장을 굳게 지킨 반면, 다른 백인 시의원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제럿 블란차드는 백인 시의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노조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태도를 바꿔 투표했던 인물이다. 몇몇 흥분한 백인 시의원들 앞에서 그는 나는 의회에서 4번째 깜둥이의원이 되겠다.”고 말했다. 블란차드는 바로 그날 밤부터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파업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는 이유로 성난 멤피스 백인들로부터 항의전화를 받은 것은 블란차드 뿐이 아니었다. 언젠가 신문이 여성 시의원인 그웬 오섬이 시장에게 이제 타협할 때라고 제안했다는 오보를 내보낸 적이 있는데, 그녀는 선거 때 자신을 찍었다고 말하는 많은 백인 시민들에게 항의전화를 받아야 했다. 어떤 여성은 나는 당신에게 투표했는데, 이제 당신은 저 깜둥이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은 이제 거리에서 담배나 빨아대는 년이나 다름없다고 전화기에 대고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오섬 의원은 단지 시장이 이제 파업에 대한 입장을 재고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얘기한 것일 뿐인데, 아마도 백인 사회의 특정 부분은 이번 파업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깨는 어떠한 행동도 배신적인 협잡이라고 싸잡아 비판했을 것이다. 만약 멤피스의 어떤 백인들이 미국 흑인들의 인간 존엄과 평등을 인정한다면, 도대체 백인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이지? 이러한 성적·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멤피스 백인들로 하여금 파업을 지지하는 백인들을 공격하는 인종적 태도를 유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파업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백인 여성들, 또는 그런 남편을 둔 여성들은 이러한 류의 공격의 최정점에 서 있었다. 리차드 문 목사는 킹의 암살 직후 로엡 시장 집무실 밖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했던 백인이었는데, 그의 부인이 엄청나게 많은 항의전화들을 받았다고 얘기한다. “남자들이건 여자들이건 간에 …… 내 부인이 흑인들과 어떻게 성관계를 가져왔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식으로 자기 입장을 강변했고 …… 내 부인을 해부해보면 필시 어떤 부분은 흑인의 종자를 물려받았을 것이라는 얘기까지 했다 이러한 공격이 성적인 언어로 표출되는 것은, 백인 남성 우월주의가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것에 매우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과 오섬에 대한 비난은, 성적 개념이 수사적으로 난무하던 사회적 격변의 이 시기에, 남부 백인 여성들에게 있어 성적인 공격이 인종적인 공격과 매우 유사한 수준으로 극대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흑인 여성들의 경우 필사적으로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투쟁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백인 여성들이 직면해야 했던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멤피스 사회가 안고 있는 성적·인종적 계층제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파업 전과 파업기간 동안,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부인들과 여성 지지자들 다수가 절실한 필요 때문에 2교대 일을 하고 있었다. 낮 시간 동안 백인 가정에서 요리와 청소를 하고 나면, 저녁에는 자기 가족을 위해 이러한 허드렛일을 더해야 했던 것이다. 이 여성들에게 있어서 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그들이 일하는 곳의 백인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위로 발돋움하는 투쟁을 의미하고 있었다. 백인 여성들이 베티 프리단에서부터 여성 신비주의와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숨막 힐 듯한 격리를 배우고 있었던 반면, 흑인 여성들은 백인 사회의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집안을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백인 자매들과 전혀 다른 신비주의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1968년 학기 중에 멤피스의 성 마리아 감리교 여학교의 백인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각자 집에 있는 흑인 하녀들에 대한 글을 써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여학생들의 글들을 보면 미국 남부의 백인 사회가 흑인 여성들의 적절한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어떤 학생이 자기 집에서 일하는 캐더린이라는 흑인 여성에 대해 이렇게 썼다. “(구식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아주 세련되었어요. …… 하지만 농장에서 일하던 (늙은) 유모처럼 아직 너무 공손하고 친절을 떨어요.” 더 나아가 그녀는 이렇게 좋은 상품을 미국으로 가져온 네덜란드 (노예) 상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 여학생은 적어도 흑인 여성들의 세련됨구식태도를 구별할 줄은 알았지만, 여전히 미국의 흑인들을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라 부르고 있다. 다른 학생들 또한 이러한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충성스런 하녀들을 칭송하고 건방진하녀들을 비판한다. 어떤 학생은 흑인 하녀들이 존재함으로 해서 백인 여성들이 전업주부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얘기를 했다. “아무리 아이들을 위해 좋다고 하더라도, 엄마가 꼭 집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점점 더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하녀들이 그 짐을 덜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 학생은 백인 여성의 전통적인성적 분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흑인 하녀들의 전통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어 보인다. 그녀는 아무 거리낌조차 느끼지 않고 흑인 여성의 노동이야말로 백인 여성의 해방을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남부 사회가 지위와 인종을 하나로 묶어놓았기 때문에 흑인 여성들은 시민권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들이 공공연하게 인종적 평등을 옹호한 것은 기존의 성에 대한 권력구조에도 맞서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멤피스의 흑인 여성들은 1968년에 여성으로서의 자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조직화와 시위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이 제기하는 남자다움에 대한 요구가 더 넓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흑인 남성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이 지급된다면, 흑인 여성들은 태생부터 짊어진 이중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멤피스의 흑인 여성들은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파업 요구인 남자다움과 더 많은 임금을 열렬히 지지했다. 미국 흑인들의 남자답게 살 권리를 인정하게 된다면 이는 결국 미국의 흑인 전체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파업노동자의 아내인 L. C. 리드 여사는 로엡의 입장을 냉소적으로 비꼬면서 파업에 대한 그녀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들을 다루듯이 이렇게 말했어요. “일자리로 돌아가거라. 그러면 사탕 몇 개 줄께…… 어떻게 그들을 애들 다루듯이 할 수 있어요? 잘 알잖아요! 요즘 시대에 피부 색깔이 어떻든 간에 남자는 다 같은 남자 아닌가요?

 

 

여성이자 NAACP의 멤피스 지부 사무국장이던 맥신 스미스 역시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에서 성적 역할의 특징·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녀는 활동가로 일하면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얘기했다. 스미스에게 만약 아이를 시위장으로 데리고 다니느라 아이가 낙제생이 되고 말수도 있는데, 그리고 경찰들을 존경하라고 가르치지 못할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 애가 경찰과 처음 조우한 경험 자체가 워낙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경찰을 존경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다른 엄마들처럼, 스미스 또한 시위에 참여하기 전에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이 주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로서의 책임에 대해 전혀 다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사랑으로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위의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시민운동 지도자들은 흑인 여성들의 원조와 참여가 없으면 이 운동이 급정거를 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거의 비슷한 빈도로 행진에도 참여하고 대중 집회에도 나갔다. 그녀들의 행동은 남자들이 내뱉는 말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신문에 보도되었다. 언제인가 시청까지 가는 행진에서, 남성 지도자들은 의식적으로 여성들을 행진의 맨 앞 열에 마치 방패막처럼 세운 적도 있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어떤 남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몇몇 남자들이 모여 결정했다. ‘, 저놈들이 여자들을 때리지는 않을 꺼야. 그러니 여자들을 맨 앞에 세웁시다.’” 이 지도자들은 이 전략을 킹의 버밍햄 투쟁에서 빌려왔다. 버밍햄에서는 황소 코너 경찰청장이 소방호스를 여성과 아이들에게 들이밀자 여론이 급반전되면서 코너에게서 등을 돌린 경험이 있었다. 무장한 경찰병력과 비무장 여성 시위대 사이의 충돌은 버밍햄에서, 멤피스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찰스턴에서까지 각종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운동에서 조용한지위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킹의 암살 직후 열린 대중 집회를 기억하는 한 참가자는 이렇게 말했다. “메이슨 템플 교회 같은 넓은 장소에서는, 여성들이 그곳의 핵심부를 차지하게 되고 대형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설교 속에서도 그녀들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화시켜서 노래하곤 했다.”

4월의 앞 절반 동안 메이슨 템플 교회에서의 투쟁이 지속되자, 지역 상인들과 연방 관료들까지 로엡에게 압력을 가하고, 킹 목사 암살사건의 망령이 무겁게 로엡 시장과 다른 시청 관료들을 짓누르게 되었다. 결국 416, 시와 노조 관료들이 만나 파업에 종지부를 찍는 타결에 이르게 되었다. 최종 합의는 15센트의 시급 인상과 함께, 노조인정·조합비공제·성과에 기초한 승진제·현장에서 흑인차별 금지 등과 관련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대표하는 유일대표교섭기관으로서 인정받지는 못했다. 다만 양해각서를 통해 노사 양쪽이 서로 승리를 주장하는 논쟁의 길을 열어준 꼴이 되었다. 로엡은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파업과 관련해 멤피스에서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고, 반면 파업 노동자와 지지자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노조 지부 관료인 로버트 비즐리는 20년 후에 이렇게 단언했다. “I Am A Man: 이 슬로건이야말로 뭔가 중요한 것을 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SCLC 간부인 호세 윌리엄스는 비즐리의 말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백인들, 특히 남부 지역의 백인들은 흑인들을 아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아이라 하면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고, (장성한) 인간이라는 것은 그 또는 그녀 스스로 처한 조건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 당국에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 인간이다.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이란 말이다

 

 

남성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재와 노동조합을 인정받기 위해 가열차게 투쟁을 전개했지만, 결국 두 가지 모두 결론을 보지 못하고 끝이 났다. 인간 존엄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위한 투쟁은, 시민운동이나 노동자투쟁 연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듯이 손에 잡히는 승리 또는 패배로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성적·인종적 정체성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경쟁하기 마련이다.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쟁취했고 시장의 가부장적 시각에 맞서 싸웠다. 어느 시기 동안, 그들이 만든 AFSCME 1773 지부는 약 6천명의 조합원을 가졌고 압도적 다수가 흑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도시에서 단일대오로는 가장 큰 노동조합이 되었다. 또한 노조 관료인 빌 루씨에 따르면, 이 파업은 멤피스 도시 경계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환경미화 노동자들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존중과 인정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파업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위해,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멤피스를 비롯해 다른 도시에서 노동계급 흑인 남성과 여성을 위해 자긍심과 존엄성을 쟁취한 것이다. 운동은 계속 진행되었다. 환경미화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고 난 뒤 1년쯤 지난 뒤에, 멤피스에서 다른 공공기관 건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나섰던 노동자들 또한 “I Am A Man”이라는 문구가 적힌 옷을 입었다. 1968년에 미시건 주에서 자동차산업 흑인 노동자들이 결성한 닷지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DRUM)’이란 조직은 이렇게 노래했다: 

 

몇 시간이고 몇 년이고 땀과 눈물로 지새며,

우리는 사슬을 끊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

등골이 부러지고 떼죽음을 당하면서도,

살해당한 우리의 인간적 존엄을 찾기 위해 싸운다 ……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 곁에서

자유를 향한 투쟁을 이끄는 DRUM과 함께 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인간답게 단결하여 싸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권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들 노동자는 인간의 존엄을 향한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수백만의 남성과 여성들이 나서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투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옮긴이: 오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