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정세분석] 1968: 프랑스의 5월~6월 봉기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5월호

[정세분석] 1968: 프랑스의 5월~6월 봉기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5

[정세분석1968: 프랑스의 5~6월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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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5~6월에 일어났던 사건은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발휘했을 때 어떻게 사태가 신속히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전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며칠 사이에 1,000만이 넘는 사람이 참여한 봉기로 발전했다.

그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파리 낭테르 대학은 엥라제라고 했던 아나키스트와 상황주의자(자유의지주의 맑스주의자) 집단이 혁명적 문학작품을 인쇄하기 위해 학생조합기금을 이용하는 것을 막았다. 아나키스트가 항의 시위를 벌였을 때, 학생들은 경찰 80명이 시위를 진압하려고 도착한 것에 분노했고 자신들의 대학에서 경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많은 지지를 얻은 것에 고무된 아나키스트는 대학행정 건물을 점령했고 대중 토론을 열었다. 경찰은 낭테르 대학의 통행을 막으면서 대학을 포위했다. 다음날 낭테르 대학 학생들은 파리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500명 넘게 체포된 뒤에 곤봉과 체루가스로 모든 사람을 공격했던 경찰과 5시간 동안 싸웠다. 시위를 완전히 금지하고 파리 중심가의 대부분을 폐쇄하자, 수 천 명의 성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갔다. 경찰이 빈번히 폭력을 쓰자,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경찰에 맞서기 위해 보도블록이 파헤쳐졌다. 리포터 장 자크 르벨(Jean Jacques Lebel)너도 나도 한 힘을 보태려 한 수천 명 …… 여성, 노동자, 파자마 입은 사람들이 바위와 나무와 철을 나르기 위해 인간 띠를 이루고 있었다.” 밤이 끝나갈 때, 350명이 싸움 중에 다쳤다.

57일에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기 위한 50,000명의 행진은 파리의 라틴 구역의 좁은 거리와 골목길에서 하루 동안 전투로 바뀌었다. 경찰이 체루 가스를 쏴댔을 때, 시위자들은 화염병으로 응수했다. 경찰이 해산하라고 말했을 때, 항의자들은 파리 코뮌이여, 영원하라!”를 외쳤다. 510일에 대대적인 시위가 있고 나서, 교육부 장관은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거리에 60개의 바리케이드가 세워졌고 노동자는 학생들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대중시위는 마침내 513일에 백만이 넘는 시위로 되었다.

대대적인 시위 뒤에, 경찰은 라탱 지역에서 쫓겨났다. 학생은 경찰이 포위했던 파리의 한 부분을 점령했고 투쟁을 확산시키기 위한 집회를 열었다. 곧 점거는 프랑스 전체에 있는 대학으로 퍼졌다. 소르본 대학에서부터 리플릿, 성명서, 전보와 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현실적으로 되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보도 블럭 아래를 보라해변이 있다!” “모든 권력을 상상력으로!”와 같은 낙서가 벽을 도배했다. 어느 벽에는 아름다운 조각은 경찰의 머리에 던져진 짱돌이야!(The most beautiful sculpture is a paving stone thrown at a cop's head!)”라는 문구가 있었다.

모든 혁명 투쟁에서처럼, 노동자 평의회는 가장 앞선 방식으로 여겨졌다. ‘흑과 적(Noire et Rouge)’, ‘사회주의냐 야만주의냐(Socialisme ou Barbarie)’와 같은 아나키스트와 상황주의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주 관리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자 평의회에 지지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고무했던 사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514일에, 남부 항공기 공장 노동자는 경영자를 그들의 사무실에 가두었고 공장을 점거했다. 끌레옹-르노(Cleon-Renault)와 록히드-보베(Lockhead-Beauvais), 머슬오를레앙( Mucel-Orleans) 공장도 다음날 똑같이 했다. 그리고 나서 그날 밤에, 파리의 국립극장이 점거되었고 대중 논쟁을 위한 임시 집회장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커다란 공장인 르노 빌랑꾸르(Renault-Billancourt)도 점거되었다. 흔히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관리와 협의 없이 스스로 그런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520일까지 총파업이 있었고 파업과 공장점거에 개입되었던 사람들의 수는 9백만에 이르렀다! 인쇄 노동자는 그들이 객관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 …… 그들이 신문에 실으려고 했고 바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TV와 라디오와 같은 자본주의적 대중매체를 떠나길 바라지 않았다. 몇몇 경우에 인쇄 노동자는 그들이 신문을 인쇄하는 데 동의하기 전에 신문의 내용을 바꾸기도 했다.소르본 대학을 점거한 4,000명의 학생들은 아나키스트 깃발과 붉은 깃발과 검은 깃발을 앞세우고 르노 공장 파업자를 지지하기 위해 떠났다. 국가, 사장들, 노동조합과 공산당은 이제 그들의 가장 커다란 악몽, 즉 노동자/학생 동맹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10,000명의 경찰관은 지원을 위해 소집되었고, 노동조합 관료들은 공장 문을 폐쇄했으며 공산당은 그들의 당원을 부추켜 반란을 막으라고 몰아댔다. 그들 모두는 일련의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 정부와 사장들과 단결했지만, 공산주의자와 노동조합 관료들이 공장에 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거리에 나선 노동자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투쟁은 자율적인 대중 회의에 의해 조직되었고 행동위원회에 의해 합병되었다. “희망은 생활의 모든 분야로 …… 자주관리를 확대하는 데 놓여있다.”

524일에, 아나키스트는 시위를 조직했다. 30,000명이 바스티유 궁전으로 행진했다. 경찰은 늘 하던대로 체루가스와 곤봉 등을 이용해서 공관을 보호했지만, 주식 거래소를 방어하지 못했다. 시위자는 주식거래소에 불을 질렀다.

이때 몇몇 좌파는 용기를 잃었다. 트로츠키주의 그룹인 JCR은 라틴 지역으로 퇴각하라고 말했다. 프랑스전국학생연합(UNEF)와 통합사회당(Parti Socialiste Unife) 과 같은 다른 좌파 조직은 재무국과 법무국을 점거하려는 사람들을 막았다. 다니엘 콘 벤디트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그것이 이 모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휩쓸리게 했는지를 깨닫는 데 실패했다. …… 525일에 파리가 가장 중요한 정부관청을 점령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드골주의는 즉시 굴복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다.” 그 날 밤이 지나고 나서 콘-벤디트는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거리 시위가 늘어났고 점거가 계속되자, 국가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폭력을 쓸 준비를 했다. 고위 장군들은 파리를 군사력으로 지키기 위해 20,000명의 병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찰은 방송국과 우체국과 같은 통신 중심을 점거했다. 공산당 관리들은 파업자들을 속여 일터로 돌아가게 했다. 지하철의 경우, 그들은 어느 한 역을 방문해서 노동자에게 다른 역이 이미 다시 개통되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모든 역을 돌아다녔다.

527일에, 정부는 최저임금을 35%, 전체 임금을 10% 높이기로 약속했다. 65일까지, 대부분의 파업은 끝났고 파리는 정상적인 자본주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 날 뒤에 파업이 일어난다면, 그 파업은 장갑차와 총으로 무자비하게 진압될 것이었다. 67일에, 4일 동안 파업을 벌이고 있던 플랭(Flins) 철강소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그러한 공격으로 한 노동자가 죽었다. 610일에 경찰은 르노 자동차공장 노동자를 총으로 쏴 두 명을 죽였다. 612일에 시위가 금지되었고 급진 그룹은 불법으로 규정되었고 그들의 구성원은 체포되었다. 공산주의자, 국가, 노동조합 관료와 사장들로부터의 공격으로, 총파업과 점거는 차츰 분쇄되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전위당이 없었기 때문인가? 제기랄! 공산주의자가 충분히 영향력을 누렸던 하나 뿐인 당은 봉기를 막으려고 열심히 애쓰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 투쟁을 통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공장점거가 서로서로 고립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분열되자, 그들은 졌다. 잘 알려진 아나키스트 Murray Bookchin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장이 그저 점거되거나 파업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동되어야 한다는 노동자 사이의 자각은 빠졌다. 이러한 자각은 봉기 전에 강력한 아나키스트 운동이 있었더라면 존재했었을 것이다. 아나키스트 운동은 노동자 사이에서 아주 약했고 그 결과 노동자 자주관리의 이상은 그들 사이에 퍼지지 못했다.

그러나 5~6월 봉기는 우리의 지배자들이 아주 빨리 [협상] 테이블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경기 붐 동안 일어났다는 사실! 총파업은 노동계급이 커다란 잠재적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보여주었다. 대중 집회와 점거는 행동에서 아나키와 어떻게 아나키스트 사상이 대중 사이에서 적응되고 퍼질 수 있는지에 대한 뛰어난 사례를 제공해주었다. 5~6월 봉기는 미리 준비한다면 아나키스트의 미래가 헛된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현실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프랑스 1968: 그 해를 기억하라1

 

SocialistWorker, 2006.04.01.


이안 버첼은 왜 프랑스 대학생이 거리를 점거하고 그들의 캠퍼스를 점거하게 되었는지를 눈여겨보았다. ‘1968년이 되풀이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1968년에 일어났던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식한 저널리스트조차도 프랑스에서 1968년이 학생 봉기의 해였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것은 진실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물론 프랑스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와 점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영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났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이 독특한 것은 총파업이 함께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총파업은 3주 동안 지속되었고 1,000만이 넘는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이는 그때까지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총파업이었다.

모든 곳에서 노동자는 맑스주의의 기본 진리, 즉 노동자의 노동이 사회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상품과 재화를 생산하고 그들의 노동이 없으면 사회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모든 생산이 마비되었다. 노동조합위원회가 공장을 점거했다. 몇몇 곳에서 경영자들은 그들의 사무실에 감금되었고 파업자의 허락 없이 화장실에 갈 수조차 없었다. 노동자는 사장들에게 인터내셔널 가를 가르치기 위해 레코드플레이어를 가져왔다.

프랑스 서부에 있는 낭트에서 전체 도시는 노동조합위원회의 관리를 받았다. 노동조합 위원회는 부당이득행위를 막기 위해 가격을 통제했고 지역 농부와 식료품 공급을 위한 협상을 했다. 노동조합은 석유 공급을 통제했고 도시 주위에 길을 막는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힘을 멋지게 보여준 시위였고 1945년 이후에 성장했던 세대에게 뜻밖의 새로운 사실이었다.

순종적인 지식인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던 통념은 자본주의가 그것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풀었고 계급전쟁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많은 좌파도 그러한 주장을 꿀꺽 삼켰다. 노동자가 몇 주 동안 벌인 행동은 이것이 거짓임을 들춰냈다. 1968년에 대한 기억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모든 시도에도, 경험은 여전히 우리의 통치자를 소름끼치게 했다.

1968년 사건이 충격을 안겨 준 것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지닌 예측불가능이었다. 노동자가 완전고용과 소비주의 때문에 그들의 혁명 잠재력을 잃었다는 생각은 널리 퍼졌다. 우리는 무관심이 모든 대중 투쟁을 차단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했던 경제학자들은 19685월에 프랑스 사회를 개관한 책을 펴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 생활수준이 영국의 생활수준을 따라잡았고 프랑스의 노동조합이 마음에 아플 만큼 약했다.”는 것이다.

19684월에 파리를 방문한 한 영국 사회주의자는 프랑스 학생들이 영국에서 일어났던 커다란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부러워했다는 프랑스 학생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3월에 30,000명이 런던에 있는 미국 대사관 밖에서 시위를 했다. 그 주 안에 파리의 거리에서 백 만이 넘는 사람이 행진하게 될 것이다.

 

 

확장

 

학생운동 때문에 1968년 사건이 터졌다. 불만이 몇 달 동안 프랑스의 대학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미국 전쟁에 대한 반대도 늘어나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들의 불만을 점점 더 국내 문제로 좁혔다. 프랑스 대통령 드골 장군 정권은 고등교육의 빠른 확장을 통해 프랑스를 근대화하길 바랐지만, 돈을 덜 들여 싼 값에 그것을 하길 바랐다.

대학, 도서관, 강의실은 사람들로 꽉 찼다. 학생들은 시대에 뒤진 규정에 종속되었다. 즉 남학생과 여학생은 기숙사에서 각기 다른 방을 방문하지 못했다. “자유로운 왕래가 슬로건이 되었다. 당국은 파리의 소르본 대학을 폐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경찰이 경찰봉과 체루가스를 써서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려고 애썼을 때, 학생들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건설 노동자는 학생들에게 자갈로 포장된 거리를 파헤치기 위해 공기 천공기를 작동하는 방법과 바리케이드를 쌓는 법을 보여주었다. 밤을 지새우며 학생들은 저항했다.

이 저항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학생들의 요구는 소부르주아적인 사소한 것이었다. 아마 몇몇 프랑스 공장 노동자는 학생들에게는 더 많은 섹스가 사회정의의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학생들의 용기와 단호함 때문에 정부가 물러설 수밖에 없다는 것, 즉 대학을 다시 개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저항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학생들이 프랑스 노동자에게 보냈던 메시지였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하루 파업을 호소함으로써 상황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썼고 그들의 통제를 다시 얻으려 했다. 그러나 다음 월요일에 파리에서 일어난 엄청난 시위는 정확히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즉 수백만 노동자의 자기 확신을 고양시킨 것이었다.

다음날 낭트의 항공기 공장에서 노동조합 회의가 있었다. 그 지부에는 3명의 혁명가가 있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전투적 행동을 요구했지만 빈번히 무시당했다. 그런데 지금 노동자는 그들 혁명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공장에 대한 무기한 점거가 시작되었다. 언론보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고무적이었다. 한 주 안에 프랑스 전역에 있는 공장과 작업장이 점거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물론 정치에서 단기적인 예보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많은 점에서 일반화된 사회투쟁을 위한 잠재력이 1968년에 있었던 것보다 오늘날 훨씬 더 크다.

1968년에 표면에 드러났던 깊은 불만은 퍼져있었지만 억눌려 있었다. 지난 해(2004)에 우리는 처음으로 유럽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았고, 고용법에 대한 새로운 제안에 반대했다. 1968년에는 완전 고용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몇 년 동안 실업률이 10%를 유지하고 있다. 노동자와 학생은 프랑스 사회의 실질적인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사르코지와 빌레핀과 같은 우익 정치가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주 노동자는 1968년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은 심한 탄압과 추방 위험에 맞닥뜨렸다.

오늘날 북아프리카 출신의 젊은이들 사이에 커다란 분노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실업과 경찰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젊은이들은 또한 그들을 경멸하고, 그들 공동체의 종교적 실천을 존중하는 것, 특히 학생들이 히잡을 착용할 수 있는 권리를 거부하고 있는 이른바 좌파의 커다란 부분을 알고 있었다.

1968년에 대부분의 프랑스 좌파는 러시아를 그들이 사회주의로 이해했던 모델로 여전히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거부했던 소수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단순히 러시아를 마오의 중국으로 대체했다. 이제 많은 젊은이들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사상에 의해 고무되었다.

 

 

계급권력

 

다음 몇 주 안에 일어난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분노는 줄어들지 않았다. 반란은 계속될 것이고 새로운 형식을 찾게 될 것이다.

1968년 말에 운동은 패배했지만 지배계급이 아주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5월 말에 드골은 독일에서 군사령관들과 협의하기 위해 파리를 빠져나갔다. 그가 국민투표에 호소하려고 애썼을 때, 그는 계급권력의 냉정한 현실에 맞닥뜨렸다. 즉 프랑스에서 그 어떤 인쇄소도 투표용지를 인쇄하지 않을 것이다.

낡은 질서를 구했던 것은 프랑스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은 서류상으로만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뒤엎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공산당은 5백만 명의 유권자를 지녔고 가장 커다란 노동조합 연합, CGT를 통제했다. CGT에는 수 천 명의 노동계급 활동가가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러시아에 몸을 바쳐 충성했고 의회주의적 성공의 가능성에 몰두했다. 프랑스공산당은 학생 혁명가들이 그 자신을 따르는 노동계급에 그 어떤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몇 년 동안 공장 밖에서 좌익 비공산주의 신문을 팔았던 사람들은 프랑스공산당이 휘두른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학생 운동이 폭발했을 때, 프랑스 공산당 신문은 그 운동을 반대하는 악의적인 보도를 했다. 학생 혁명가들은 시험 제도를 고쳐 노동계급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잘 사는 사람들의 아이들로 비난당했다. 흔히 그들은 우익의 대리인으로 중상 당했다.

공장 점거의 물결이 퍼졌을 때, CGT는 노동자를 막을 수 없었다. 그 대신에 CGT는 운동을 통제했고 내부에서 그 운동을 해산시켰다. 대부분의 경우에 노동조합 활동가는 공장을 점거했다. 투쟁을 위해 동원되어야 했던 다른 노동자, 그리고 조합에 가입하지 않았던 1,000만 파업자 가운데 700만 명은 친 정부 성향을 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집으로 보내졌다.

드골이 총선거를 호소했을 때, 프랑스공산당은 그를 지지했고 노동자를 일터로 돌아가게 부추겼다. 선거에서 우익이 이겼다. 의회주의 게임의 규칙에 기꺼이 매달리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프랑스공산당은 사회당을 위한 믿음직한 선거동맹세력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오늘날 프랑스공산당은 의지도 학생, 노동자, 외곽 출신의 젊은이들을 구별할 수 있는 의지도 활동가도 없었다.

개량주의는 여전히 살아 있고 꽤 많다. 사회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는 노동자와 억압당한 사람들의 활동에 바탕을 둔 대중운동이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단기적으로 그들은 성공할지도 모른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역사는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지만, 역사에서 얻은 영감은 미래의 승리를 준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문제가 된 것은 프랑스의 미래가 아니다. 대중매체가 퍼트렸던 가장 집요한 거짓 가운데 하나는 1968년의 사건이 독특하게 프랑스적인 것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파업이 끝나고 난 뒤 르몽드Robert Escarpit가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는 프랑스 사람은 자신이 치명적인 열병에서 회복되고 있는 사람처럼 조금씩 치유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바리케이드가 어떻게 세워졌는가? 529일 저녁 5시에 열기는 무엇이었는가? …… 그러나 그들이 대답을 듣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전혀 묻지 못했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모든 사람은 희망에서든 두려움에서든 병이 전염되었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어 한다.”

 

옮긴이: 정인

 

  1. http://www.socialistworker.co.uk/art.php?id=858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