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문화혁명인가 문화충격인가? 독일에서 학생 급진주의와 1968년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5월호

문화혁명인가 문화충격인가? 독일에서 학생 급진주의와 1968년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4

문화혁명인가 문화충격인가? 독일에서 학생 급진주의와 1968

 

Michael A. Schmidtke

 



요즘 60년대 세대는 독일에서 권력을 잡았다. 그 세대의 상징 인물은 녹색당의 요슈카 피셔(Joschka Fischer). 그는 1968년에 급진적 학생이었고 30년 뒤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서독에서 60년 세대의 역사적 영향을 사라지게 한 1989년 독일이 통일되고 나서 대내외 정책이 확 바뀌었지만, 독일인들은 오늘날 여전히 1968년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하고 있다. 옛 행동가는 민주주의적인 연방 공화국의 실질적인 탄생을 특징 지웠던 그들의 저항 운동이 문화혁명과 정치적 계몽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수적인 비평가는 동의하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1968년은 사회적 해체로 이끌었던 문화 충격이었을 따름이다. 많은 서구 국가에서처럼, 1968년의 독일의 유산은 논쟁에 휩싸여 있다.

독일에서 누가 60년대 세대에 속했고 그것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가? 독일에서 저항과 다른 곳에서 저항 사이의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어느 정도까지 다른 나라에서, 특히 미국에서 일어난 시위가 독일의 저항에 영향을 주었는가? 독일의 저항은 어느 정도까지 독일이라는 지역의 조건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가?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다룰 것이다. 나는 독일에서 학생 급진주의의 등장에 이바지한 요소를 토론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저항의 주도 조직인 독일사회주의학생동맹(the Sozialistischer Deutsche Studentenbund/SDS)을 분석할 것이다. 나는 그 조직을 신좌파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던 미국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the American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과 견주어 볼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저항의 동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SDS는 독일의 1968년에서 유일한 대의가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1968년에 절정에 달했던 그 10년 동안 다른 발전도 설명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요슈카 피셔가 마술의 해”(magic year)라고 이름 붙였던 것에 대해 논쟁할 것이다.

 

 

산란장(Spawning Grounds)

 

미국에서 60년대 세대의 젊은이들을 쏟아져 나오게 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베이비붐이었다. 만일 60년대 세대가 1960~1972년의 시기 동안 틴에이저였던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그땐 이 세대는 미국인 4,000~5,000만에 이른다. 그와 반대로 독일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저항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출생률은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떨어졌다. 왜냐하면 많은 젊은이들은 전쟁 동안 죽었고 전후 혼란과 파괴가 있었기 때문이다. 출생률은 50년대 말에 경제 붐이 일어나기 전까지 늘어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1958년과 1968년 사이에 독일의 베이비붐은 60년대 말에 학생 저항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에 서독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이는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 동독에서 온 350만 명의 이주자 때문이었다. 루디 두취케(Rudi Dutschke)나 베른트 라벨(Bernd Rabehl)과 같은 학생지도자는 동독에서 태어나 망명했으며 서 베를린에서 공부했다. 게다가 경제 번영 때문에 중간층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대학에 들어갔던 학생들의 수는 1960년과 1966년 사이에 195,000명에서 281,000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각 분과에 학생이 넘쳐났고 학생과 교수 사이의 개인적 접촉을 떨어트리게 했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캠퍼스는 독일의 학생 봉기에서 한 요소였지만 미국에서처럼 그렇게 커다란 이유가 되진 못했다. 학생 저항의 중요한 대의는 정치 체제 안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독일 연방공화국을 세웠던 1949년 헌법은 의회와 정당의 힘과 대통령의 권위를 크게 늘려놓았다. 그 까닭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와 나치즘의 경험 때문이었다. 게다가 헌법은 5%의 지배를 지시했다. 즉 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당은 투표율을 필요로 했다. 이는 몇몇 정당이 60년대까지 정당을 지배했다는 것을 뜻했다. 두 개의 지배적인 정당 가운데 하나는 50년대 동안 이루어진 선거에서 패배하고 나서 계급 지향적인 정당(Weltanschauungspartei)에서 대중정당(Volkspartei)으로 구조를 바꾸었던 사회민주당(SPD)이었다. 바트 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에서 1959년 열린 당 대회에서 사민당은 사회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를 위해 맑스주의 전통을 포기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화는 두 개의 주요 정당, 즉 사민당과 기독민주연합(기독민주당과 바이에른기독사회당; CDU/CSU) 사이의 차이를 줄여놓았고, 궁극적으로 60년대에 저항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로 되었다. -이데올로기화는 1966년에도 이어졌다. 그때 사민당과 기독민주연합이 급격한 경제성장 뒤에 처음 찾아온 경기 후퇴를 잘 처리하기 위해 대연정(Große Koalition)을 이루었다. 경기 후퇴는 경제 위기라기보다는 오히려 몇 년 동안 기술과 경제 진보를 믿고 난 뒤에 찾아온 심리적 충격이었다. 그 해에 독일에서 의회 밖의 반대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몇몇 학생이 대연정을 믿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민당은 기민당의 쿠르트 게오르그 키징거(Kurt Georg Kiesinger)가 수상이 되는 것에 동의했다. 키징거는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외무장관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새로운 정부는 또한 바이에른 기독사회당(CSU)의 프란츠 요셉 스트라우쓰(Franz Josef Strauß)를 재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1962년에 스트라우쓰는 슈피겔 사건 뒤에 국방장관을 직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슈피겔 사건이란 연방검사(Bundesanwaltschaft)슈피겔지를 반역죄로 고소했고 그 잡지가 나토의 작전 행동(a NATO maneuver)을 낱낱이 밝히고 비판하는 글을 실었기 때문에 법적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여론은 경찰과 군이 잡지의 편집국을 수색했고 발행인 루돌프 아우구스타인(Rudolf Augstein)과 편집자 콘라트 알러스(Conrad Ahlers)를 체포하고 난 뒤 국방장관에 맞섰다. 따라서 사민당과 키징거의 연립내각이 독일의 정치 문화에서 비민주주의(obrigkeitsstaatliche) 전통의 지속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연정은 정당, 특히 사민당 안에서 민주적 과정의 중단을 뜻했고 나치 과거로 되돌아가는 발걸음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대연정은 히틀러 시대에 살았던 부모와 그들의 젊은 아이들 사이에 세대 갈등을 부추겼다. 이는 1968년에 독일의 세대충돌을 다른 나라의 세대충돌과 구분지어 주는 중요한 측면이었다.

또한 대연정의 개혁 제안, 특히 고등교육과 비상사태 법(Notstandsgesetze)에 대한 계획이 비판받았다. 60년대에 독일 대학체계는 19세기에 발전했던 계서제적 제도를 유지했다. 많은 학생들은 그 체제를 민주주의화할 것을 시끄럽게 요구했지만, 정부는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대연정은 독일 대학을 외국 제도와 경쟁력 있게 만들려는 시도에서 분과를 늘리는데 집중했다. 이는 이러한 학생 세대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들은 국가의 민주주의화를 목적으로 했던 전후 재교육 계획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이 196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학생들은 자신들이 지닌 민주주의 이상과 그들이 다닌 대학의 비민주적인 문화 사이에 있는 간격을 몸으로 느꼈다.

많은 학생들은 또한 대연정의 또 다른 개혁 계획, 비상사태 법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법률은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위기 때에 권력의 이용을 조정하는 것이다. 대통령 파울 힌덴부르크는 민주적인 정당이 다수표를 잃고 나서 1930년과 1933년에 의회로부터 독립적인 정부를 만들기 위해 이 법을 썼다. 이것은 결국 1933년에 히틀러가 쉽게 독재 권력을 휘두르게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뒤에 독일은 독일과 서구 동맹국에 의해 비준을 받았던 1954년의 독일 조약(Deutschlandvertag)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60년대까지 많은 독일인들은 그들 자신의 비상사태 법 형식을 창조함으로써 주권을 과시하길 바랐고 대연정은 그들의 개혁 계획의 일부로서 새로운 법령을 도입했다. 행정부에 지나친 권력을 주는 이러한 법의 입법 과정이 1930년대와 비슷했다는 것에 비판이 쏟아졌고 이는 1968년에 저항운동의 형성에 이바지했던 법에 맞선 격렬한 반발을 부추겼던 것이다.

이러한 요소 모두는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독일에서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서 찾아질 수 있는 또 다른 요소, 즉 반공산주의가 있었다. 매카시 시기 동안 미국처럼, 반공산주의는 시민을 공개적 적으로 낙인찍는 데 썼던 강력한 무기였고, 정부가 핵군축을 선호하는 저항을 포함한 많은 형식의 급진적 반대파에 맞서서 그런 주장을 썼다. 결과적으로, 1960년대 중반까지 민주주의를 선언했던 독일 헌법이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탄압했던 정치문화가 독일에 있었다. 그런 정치 문화는 두 개의 지배적인 정당을 빼고 반대파의 견해를 또렷이 밝힐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1966년에 두 정당은 정치적, 사회적 반대를 증대시킨 대연정을 짰고 사회와 캠퍼스에서 점점 더 영향을 갖게 된 급진적 조직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급진주의는 경제와 기술에 의해 도움을 받게 되었다. 경제성장 붐과 함께, 전후 소비사회는 서독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잡지와 라디오, 특히 텔레비전과 같은 새로운 대량 소비재는 생활조건에서 중대한 변화를 낳았고 보수 정치가의 옛 세대와 맞닥뜨렸던 깨어나고 있는 젊은 층의 메시지를 강화시켰던 대중매체를 육성했다.

 

 

급진주의의 등장

 

저항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의 하나는 사회주의 독일학생동맹(SDS)이었다. SDS는 독일사민당의 청년 집단으로 시작했지만, 1955년 초에 그들은 동독에 있는 공산주의 청년 그룹과 접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사민당과 충돌했다. 사민당 관료들도 SDS에게 서독에 있는 공산주의 그룹에 동정적이었던 당원을 추방하라고 했을 때, SDS는 분노하면서 이런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1958년에 SDS는 동독과 서독 사이에 있는 국경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사민당 관료를 화가 나게 만들었다. 나중에 미국의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SDS)처럼, 독일 그룹은 냉전에 대한 정서적 반공산주의를 비난했지만 미국인들과 달리, 독일의 SDS는 독일에서 반공산주의와 반유대주의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 1959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그들의 맑스주의 전통을 포기했다. 이로써 SDS가 지닌 강령은 유일하게 급진적 좌파를 위한 강령이 되게 했다. 2년 뒤에 SPDSDS가 쪼개졌다. 60년대 초 동안에, SDS는 학생과 반체제 지식인의 스터디 그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중요했다. 왜냐하면 구성원이 그런 과정을 통해 나중에 저항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론의 깊이를 다졌기 때문이다.

 

 

반체제 지식인

 

다른 서유럽 국가에서처럼, 독일에서 이론적으로 정교해진 급진 좌파의 형성은 신좌파의 영향을 받았다. 50년대 말 이래, 여러 반체제 지식인은 구좌파를 이루었던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또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이상에 동의하지 않았던 좌파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다. 신좌파가 형성된 이유는 냉전, 1956년 헝가리 저항의 탄압, 스탈린 시기 동안에 테러가 자행되었다는 것을 확증했던 소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다.

신좌파에서 중심인물이 되었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은 콜럼비아 대학 사회학자 밀즈( C. Wright Mills)였다. 영국에서 나온 책 무관심에서 벗어나기(Out of Apathy)에 답하여, 그는 1960년 가을에 신좌파에 보내는 편지”(Letter to the New Left)를 썼다. 그 편지는 노동계급을 더는 유일한 혁명적 주체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썼다. 그 대신에 학생과 일부 젊은 인텔리겐차가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고 그들은 새로운 사회적 변화 이론을 발전시킬 것이고 제도에 맞설 것이다. 밀즈는 구좌파와 고전적 맑스주의를 비판했던 유일한 지식인이 아니었지만, 그가 쓴 편지는 곧 독일에 SDS 또는 미국의 SDS와 같은 학생 조직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대서양 양 편에서 그들은 구좌파에 대항하고 조직하며, 그리고 집단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 독일과 미국 SDS는 처음으로 만났다.

 

 

사회를 분석하기

 

독일 SDS에게는 그들이 사회를 분석하는 데서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매우 중요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학자 그룹(Max Horkheimer, Theodor W. Adorno, and Jiirgen Habermas)은 사회학에서 맑스주의 전통의 담지자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쫓겨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나중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 학파에 따르면,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은 경찰과 법정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제도에 들어 있었다. 학교, 조합, 문화에서, 그리고 언어 그 자체에서 사회는 자신의 구성원을 제한했고 그들이 대안적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막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몇몇 학자는 193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한 동안 문화산업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켰다. 미국에서 그들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끔찍한 실재라고 여겼던 것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아도르노에게, 미국 방송과 영화는 체제의 통일성을 한층 더 긴밀하게통합시켰던 조작의 주요한 도구였다. 반유대주의와 권위주의 성격의 관계에 관련된 연구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자율성이 없고 따라서 많은 소비자를 얻은 권력에 권위주의적 투항을 할 수 있는 잠재적으로 통일된대중사회의 인간(mass-man)으로 인식했다. 이들 소비자는 겉보기에는 자유로이 선택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자신들을 노예화했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켰다.

SDS와 같은 독일 학생 그룹은 60년대 동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을 대중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숨겨진 권위주의를 지닌 문화산업에 의한 조작은 비극적인 바이마르공화국의 경험과 같았다. 2차 대전 뒤 독일 정치를 분석한 위르겐 하버마스는 다음의 결론에 다다랐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도 시민사회와 같은 그 자신의 의도를 완수할 것이거나 또는 그것은 성격을 바꾸어 놓을 것이고 권위주의 형식을 조금은 공개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또한 SDS와 뉴레프트의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쿠바 혁명이었다. 예전에 학생과 젊은 인텔리겐차의 대표자였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같은 혁명적 지도자는 구좌파와 다른 분석을 제공했다. 쿠바 모델은 미국과 서구의 대부분 국가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자였다는 것을 밝혔다. 그 생각은 1965년에 베트남 전쟁이 차츰 확대되자 더 힘을 얻게 되었다. 1967년 여름 동안 아바나에서 열린 OLAS 대회의 결의안을 통해 체는 , , 많은 베트남인들!”(Two, Three, Many Vietnams!)이라는 슬로건으로써 전지구적 해방 투쟁을 주장하면서 제국주의를 공격했다. 독일의 많은 급진주의자들, 특히 SDS 회원들은 그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세력

 

신좌파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내면화된 탄압을 부수고 사회변화를 고무할 수 있다는 구좌파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마르쿠제에서 밀즈에 이르는 이들 학자는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말없는 다수의 요구를 강화하고 그들의 잠재의식의 사슬에서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다고 느꼈다. 이것에는 탈정치화라는 딱지가 붙게 되었고 또한 주도적인 좌파 정당인 SPD에게는 사실이다. 그들의 당 관료주의, 형식적 절차, 의견 조작 등 이 모든 것은 독일 신좌파에게 SPD가 지닌 은폐된 권위주의를 입증한 것이었다. 신좌파의 비판은 SPD가 정치 영역에서 나온 중요한 쟁점을 피했고, 합의를 조작했으며 결정과정에 대한 대안과 도전을 막았다고 불평한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영향력 있는 정치적 힘을 이용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당과 여론의 자율성을 문제 삼았다. 1962년에 그가 쓴 책 공적영역의 구조전환(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에서, 그는 독일의 현실에서 조작된 대중을 민주주의 이론이 요구했던 공적 영역과 견주었다.



하버마스와 다른 신좌파의 비판은 많은 대학의 학생들과 SDS 성원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에게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큰 간격이 있었다. 대학은 체제의 일부로 되었다. 그것은 더는 자율적이지 못했고 이제 스스로를 경제 정치적 힘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었다. 연구와 자유의 현장인 고전적 대학은 독일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직접 행동과 의식의 전환

 

1960년대 중반까지, SDS는 노동계급, SPD도 또한 사회에서 탈정치화의 경향에 저항할 수 있는 여론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학생 신좌파 안에서 행동 전략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 학생들은 미국 남부에 있는 학생 비폭력 조정위원회(the 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백인학생들은 간이식당과 공공 시설물에서 평화적인 연좌농성에 착수함으로써 신좌파 이상을 실행에 옮겼다. 1964년 가을 학기에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 학생들은 검열을 폐지하기 위한 대대적인 저항, 즉 자유언론운동(the Free Speech Movement)을 시작했고 그런 행동은 독일 대학에서 토론되었고 분석되었다.

독일의 SDS는 이러한 직접 행동 형식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1966622일에, SDS는 베를린 자유대학의 헨리 포드 홀에서 처음으로 독일의 연좌농성을 이끌었다. 3,000명의 학생들은 학생들의 재직기간을 8학기로 제한하고 행정요원에게 쫓아낼 수 있는 힘을 주는 자유대학개혁제안을 저지하려고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 첫 번째 연좌농성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자유대학 행정국이 이러한 규제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수입된 직접 행동은 독일의 현실에 맞는 형태로 바뀌었고 이것은 신좌파 학생들 내부의 전위 그룹이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하나는 전복 행동”(Subversive Aktion)이었다. 그 그룹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로 불렸던 유럽 예술가의 운동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루디 두취케는 전복 행동SDS의 구성원이었다. 그는 행동이 시위자에게 자의식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급진적 반대를 퍼트리고 의식을 전환할 수 있을 것으로 설명했다.

상황주의자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영향을 받았던 두취케와 베른트 라벨(Bernd Rabehl)과 같은 전복행동의 구성원들은 권력구조를 들춰낼 수 있고 참여자들이 권위와 별개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상황을 창출할 목적을 지닌 전략을 발전시켰다. ‘전복행동은 대중매체에 의한 의식의 조작, 청교도적인 성적 억압, 성취 지향적인 사회에 맞섰다.

전복 행동이 기획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19661210일에 베를린의 쿠르퓌르스텐담(kurfürstendamm)에서 벌인 도보 시위”(Spaziergangsdemstration)였다. 2,000명이 참가한 이러한 베트남 반전시위 동안, 200명의 SDS 회원과 대항문화 그룹인 코뮌 1’(Kommune 1)은 경찰이 텅 빈 도시외곽의 거리만을 통과하도록 했던 행진을 그만두고 시위가 금지되었던 도시로 걸어갔다. 시위자들은 명령을 어겼지만 아이들의 나팔소리를 신호로 해서 해산과 재그룹화할 때 경찰과 충돌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경찰은 탄압으로 대응했고 74명을 체포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SDS 스터디 그룹은 1967년과 1968년에 행동으로 전환하고 있었고, 정부와 많은 제도에 맞선 투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19672월에 SDS는 교육체계 안에서 급진적 반대를 퍼트리기 위해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집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1968년까지 이러한 행동주의는 사회체제에 맞서 항의하기 위해 수천 명을 동원했던 대중운동을 이루었다. 그들은 독일 고등교육에서 세 가지 악()으로 인식했던 것과 비상사태 법, 스프링거(Springer)의 언론 독점에 맞서고 지구적 해방을 지지하기 위해 행진했다.

 

 

학생 급진주의와 고등 교육

 

독일 SDS는 늘 대학을 사회변화를 위해 중요한 지점으로 여겼다. 이미 1961년에 나온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학>(The University in a Democratic Society)에 관한 그들의 성명에서 SDS는 대학과 사회에서 좀 더 많은 민주주의로 귀결될 수 있는 비판적으로 행동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훈련할 수 있게 한 대학을 옹호했다. 1964년에 나온 게오르그 피히트(Georg Picht)의 책 독일 고등교육의 재앙(The Catastrophe of German Higher Education)은 또한 대학의 개혁을 둘러싼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정부는 행동하는 데 실패했다.



1967년까지 학생운동에는 오직 몇 백 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그리고 그 운동은 베를린에서만 일어났다. 그러나 벤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의 살해는 학생운동을 서독으로 확산시켰다. 196762일에 베를린에 있는 SDS는 이란의 샤()의 방문을 항의하는 행진을 조직했다. 학생들은 이란 왕을 서구 나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잔인한 독재자였다고 믿고 있었다. 4일 전 샤는 뮌헨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약 6,000명의 학생들이 시위했고 샤가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날 밤에 자유대학의 학생 3,000명이 이란의 망명자인 Bahmam Nirumand의 강연을 들었다. 경찰은 베를린 거리에서 대결을 피하려 애썼고 SDS의 행진을 금지했지만, 수 천 명의 학생들은 그날 밤에 오페라 극장 앞에 모였다. 샤와 독일 정치가들이 모자르트 음악회를 감상하고 있는 동안, 경찰은 시위자를 공격했고 구타했으며 많은 사람을 체포했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어느 경찰 관리가 26살을 벤노 오네조르크의 머리에 총을 쏴서 그를 죽였다.

벤노 오네조르크의 죽음은 대학에서 소동을 일으켰다. 다음 주 동안 독일 전체에서 학생 100,000명은 장례 행렬에 참가했고 경찰의 폭력에 침묵의 철야농성을 했다. 학생 500명이 샤의 방문을 반대하여 행진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68일에 10,000명이 넘는 사람은 침묵의 장례행진에 참여했다. 본이나 튀빙겐과 같은 훨씬 더 보수적인 대학에서조차 살해는 커다란 학생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로 되었다. 많은 도시들은 괴팅겐처럼 했다. 그곳에서 6,000명의 학생으로 이루어진 행진은 대학이 세워진 이래 가장 커다란 시위로 기록되었다. 오네조르크가 다닌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진행된 장례의식에서 비숍 샤르프(Bishop Scharf)는 오네조르크가 정치적 극단주의자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학생 동맹((Evangelische Studenten Gemeinde, ESG))의 성원이었다고 진술했다. 몇 천 명이 베를린에서 오네조르크의 고향인 하노버까지 장례 행진에 참여했다. 하노버에서 학생 그룹은 저항의 조건과 조직화라는 슬로건으로 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본에서 역사가 칼 디트리히 브라허(Karl Dietrich Bracher)는 침묵시위 뒤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누구든지 그 살해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반대파에 대한 의식적 테러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우리의 두 번째 독일 민주주의의 성공이나 실패에 중요한 것은 비판적 반대와 자유 연설의 권리와 관계가 있다.”

베를린에서 학생과 지식인들은 613일에 행진을 조직함으로써 경찰의 폭력성에 항의했다. 5,000명이 1966년에 있은 도보시위와 닮았던 행동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자 한 사람이 육군 원수로 가장했던 50명의 학생의 뒤를 따랐다. 즉 이는 시위자 50명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 한 사람을 배치하기로 한 경찰의 결정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이때 경찰은 대응하지 못했다. 학생들은 지식인, 교수, 성직자뿐만 아니라, 많은 잘 알려진 문화지도자들로부터 너무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정치적 압력이 시작되었고 8월에 베를린 시장과 경찰 간부 둘 다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학생들은 이것을 그들의 운동의 첫 승리로 여겼다.

오네조르크의 살해 뒤에 시위자는 고등교육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서 학생들을 동원하도록 고무했다. 정부의 지원없이, 1967년 가을과 1968년 내내 학생들은 비판 대학”(Critical University)을 세웠다. 그들은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처음으로 33개의 대안 세미나를 열었다. 이는 주로 SDS가 조직한 것이었다. 비판 대학은 미국의 자유 대학처럼 기존의 대학 밖에 있는 제도가 아니었다. 그 대신 그것은 대학 안에서 고등교육을 비판하고 개혁하는 것을 조직했다. 이러한 모델은 함부르크, 뮌헨, 하이델베르크로 퍼졌다. 그곳에서 대학생 그룹이 대학의 강의실을 점거했고 신좌파 사상, 고등교육개혁, 급진적 반대와 같은 다른 쟁점에 대한 세미나를 조직했다.

비판 대학은 순조롭게 만들어지지 못했다. 19686월에 학생들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요한 볼프강 괴테 대학을 칼 마르크스의 이름을 딴 비판 대학으로 전환시키려고 애썼다. 대학의 점거를 막기 위해 행정부서는 경찰을 불렀고 그 결과 거센 충돌이 있었다. 이는 앞으로 다른 독일 대학에서 폭력 대결의 시작과 궁극적으로 대안 세미나의 쇠퇴로 특징짓는 것이었다.

 

 

비상사태 법에 대한 반대

 

1968년에 저항의 다른 초점이 있었다. 하나는 비상사태 법이었다. 1966년에 활동가들은 비상사태 반대 위원회”(Kuratorium Notstand der Demokratie)라고 했던 비상사태 법에 대한 반대 위원회를 만들었다.쿠라토리움은 몇 년 동안 독일에 미국의 전략 핵무기의 도입에 맞서 저항했던 평화 그룹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졌다. 60년대 동안 이러한 그룹은 약 300,000명을 끌어들였던 부활절에 시위를 조직했다. 노동조합도 쿠라토리움을 지지했다. 전투부가 파업을 금지하고 시위에 대해 군대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비상사태 법에 반대했다. 마지막으로 SDS는 쿠라토리움의 일부였고 예전 SDS 의장 가운데 한 사람인 헬무트 샤우어가 쿠라토리움의 서기가 되었다. 두취케가 속한 SDS반권위주의분파와 달리, 샤우어와 다른 사람은 조직된 노동과 관계를 끊지 않았다. 그들은 조직된 노동을 여전히 사회변화의 잠재적 행위자로 여겼다. 196610월에 SDS24,000명이 참여한 행진으로 끝난 프랑크푸르트에서 민주주의의 위기상황이라는 대회를 조직했다. 이것은 비상사태 법에 대한 폭넓은 초의회주의 반대의 시작이었고 19672월에 쿠라토리움은 80개가 넘는 도시에서 지역집회를 조직했다.

쿠라토리움에게, 벤노 오네조르크의 죽음은 한 경찰의 행동으로 보지 않았지만, 통제되지 않는 행정력이 앞으로 비상상황에서 시위에 대한 폭력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여겼다. 19676월 동안 활동가들은 이러한 견해를 표명한 2백만 장의 리플릿을 만들어 350개 도시에 배포했다. 이때부터 많은 대학 학생들은 비상사태 법을 반대하는 운동에 결합했다.

그 운동은 1968511일에 본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의회에서 두 번째 법안 심사가 있기 전에, 50,000명의 활동가는 항의 행진을 했다. 그때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 학생들이 건물을 점거하고 있었고 파리의 급진주의자들도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있었다. 본의 시위는 국제 언론에서 논의되었다. 뉴욕 타임즈는 이렇게 썼다.

 

 

군중은 틴에이저, 임산부, 농민과 노동자를 포함하고 있었다. 몇몇은 무릎까지 오는 가죽바지를 입었고 다른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 서독 학생들이 좋아했던 복장, 즉 마오의 모자와 올리브 색의 낙하산병이 입는 자켓을 걸쳤다. 많은 사람들은 폭력을 대비해 플라스틱으로 만든 헬멧을 썼다. 슬로건은 저항 목표의 다양성을 드러내주었다. 다수는 나치와 같은 비상 입법을 비난했다.”

 

 

본 시위는 전후 독일에서 가장 커다란 시위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것은 또한 비상사태 법을 반대한 운동의 하락을 특징지었다. 활동가들은 의회가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운동은 여러 가지가 뒤섞인 성공을 거두었다. SPD는 비상사태의 경우에 행정부의 권력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을 채택했다. 이것은 노동조합을 만족시켰고 그들은 쿠라토리움에 참여하는 것을 줄였다. 530일에 의회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것은 노동자와 학생 사이의 영원한 동맹에 대한 SDS의 희망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스프링거 캠페인

 

저항 운동의 또 다른 목표는 언론, 특히 베를린과 서독의 1/3 지역에서 일간신문과 잡지 유통의 78%를 통제했던 악셀 스프링거 출판사였다. 의회는 몇 년 동안 언론독점을 연구했지만, 입법자는 1968년에 아무 결과 없이 그들의 작업을 끝내버렸다. 그동안 내내 스프링거 출판사 신문은 공산주의 동독에 에워 쌓인 도시인 베를린에서 큰 영향을 지녔던 공산주의라는 딱지를 부치면서 학생 행동주의와 독점에 대해 투덜거리는 것에 비난을 퍼부었다. 스프링거 언론은 오네조르크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전혀 폭로하지 않았고 그 대신 경찰 편에 섰다. 그에 따라 학생들은 시위와 리플릿으로 대항 여론(Gegen Öffentlichkeit)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루돌프 아우구슈타인과 같은 몇몇 잘 알려진 자유주의자들은 스프링거에 도전하기 위해 새로운 베를린 신문을 펴낼 계획을 짰다. 비판대학에서 학생들은 상황을 토론했고 19681월에 스프링거 공청회”(Springer Hearing)를 열었다. 그 공청회에서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스프링거 언론을 몰수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을 요구했다.

학생운동과 SDS의 반권위주의 분파를 위해, 스프링거의 보도는 문화산업에 은폐되어 있는 권위주의를 폭로했다. 그들은 되받아쳤다. 1967105일에 SDS는 가장 잘 알려진 시인과 출판업자들이 만나는 그룹 47”(Gruppe 47)의 연례 회의에서 연좌 농성을 했고, -스프링거 결의안을 토의했다. 또한 급진주의자들은 시위자들에 동정적이었던 볼프 보스텔(Wolf Vostell), 요세프 보이스(Joseph Beuys)와 같은 예술가들과 토론했다. 1014일에 SDS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서 전시회를 공격했고 악셀 스프링거 출판사의 출판물에 친화적이었던 사업을 보이콧했다.

1968년에 학생과 스프링거 사이의 적대가 더욱 커졌다. 스프링거는 언론에 빨갱이 두디로 딱지를 부치면서 SDS 지도자 루디 두취케에 대한 복수를 주도했고 베를린에서 학생들을 향한 대중적 적대감이 커졌다. 학생들이 2월에 베트남 반전 시위를 했을 때, 50,000명의 베를린 시민들은 미국의 전쟁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시위 동안, 경찰은 군중에 의해 폭행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두취케같이 보인 학생을 구해야만 했다. 4월에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고 난 지 며칠 뒤에 요셉 바흐만(Josef Bachmann)이라는 뮌헨에서 온 신나치는 베를린 거리에서 두취케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다행히 두취케는 목숨을 잃지 않았다.

폭력적 공격은 독일 전역에서 수만 명의 학생을 자극하여 스프링거 출판사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스프링거 항쟁과 암살 시도 사이의 관계는 틀림없었다. 411일과 12일에 약 3,000명의 학생들이 1,500명이 방어했던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스프링거 출판사를 공격했다. 남쪽에서 폭동은 에쓰링엔과 뮌헨에서 터졌다. 시위자는 스프링거 출판물의 배분을 막기 위해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에센과 쾰른에서 학생들은 배달 트럭을 전복시켰다. 부활절 일요일인 414일에 베를린에 약 12,000명의 항의 행진은 경찰과의 길거리 전투로 바뀌었다. 다음날 20개 도시에서 약 45,000명의 학생들은 스프링거 언론에 맞서 폭력 시위에 가담했다. 같은 때에 학생들은 스프링거 건물이나 암스테르담, 로마, 파리, 프라하, 런던, 밀라노, 텔아비브, 토론토, 뉴욕에 있는 독일대사관 앞에서 저항했다. 그러한 시위는 분명히 지역 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뉴욕 시에 있는 록펠러 센터 앞에서 스프링거 시위가 있고 난 한 주 뒤에, SDS는 콜럼비아 대학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1968년의 부활절 폭동은 독일에서 학생운동을 위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러한 충돌 동안 50명이 넘는 사람들은 크게 다쳤고 학생과 저널리스트가 죽었다. 몇몇 급진주의자들에게 이러한 경험은 70년대에 폭력투쟁을 이끌게 될 출발점이었다.

 

 

전 지구적 해방 투쟁

 

오네조르크가 죽고 난 뒤, 베를린 SDS는 마르쿠제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날 급진적 반대는 전 세계적 규모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는 미국과 독일 학생 신좌파와 제3세계의 해방운동사이에 연결을 고무했다. 그는 베트남이 서구 사회의 특성, 그 사회가 갖고 있는 팽창주의와 공격의 내적 필요성과 모든 종류의 해방운동을 억압하는 잔인성을벗겨냈다고 말했다. SDS19679월에 대회에서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였고 해방을 위한 전지구적 투쟁, “미국 SDS와 연대 및 미국에서 저항운동과 연대를 선언한 결의안을 썼다.

19682월에 전 세계적 해방운동은 서 베를린에서 SDS의 국제 베트남 대회에 의해 제출되었다. 국제청년그룹, 예술가, 작가, 지식인등 6,000명의 대표들이 그 운동에 참석했다. 이것은 그 해에 열린 미국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혁명적 공산주의 청년(the Jeunesse Communiste Revolutionaire), 프롤레타리아 통일사회당(the Partito Socialists d'Unitil Proletaria)과 같은 주도적인 국제학생조직의 유일한 집회였다. 독일 SDS는 기술대학의 강연장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깃발,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에른스트 텔만과 같은 독일 혁명가의 초상으로 물들였다. 그와 함께 마오, 호치민, 체가 제출한 슬로건이 내걸렸다. “혁명가의 임무는 혁명을 만드는 것이다.” 대회 동안 급진주의자들은 많은 항의 편지를 읽었고 수많은 연대의 전보를 받았다. 대회는 15,000명의 학생들의 행진으로 마무리되었고, 집으로 돌아가고 1968년에 혁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결의안에서 독일 SDS는 몇몇 급진주의자들이 이른바 테겔러 벡(Tegeler Weg)을 둘러싼 투쟁에서 다가올 부활절 봉기 동안 그리고 11월에 실천에 옮길 전략인 서구의 거대 도시에서 제2의 혁명전선을 설치할 것을 요청했다. 변호사 호르스트 말러(Horst Mahler)의 재판 사례 때문에 이러한 대결이 일어났다. 그는 60년대 동안 SDS를 방어했고 따라서 베를린 관료들은 그의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려고 시도했다. 뒤이은 재판 때문에 약 1,000명의 학생은 법원 건물에서 100명의 경찰관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 충돌로 약 130명의 사람이 크게 다쳤다.

이러한 폭력적 저항은 독일에서 1968년에 마지막이었고 몇몇 급진주의자들이 폭력적 미래로 나아갔다고 알렸다. 전지구적 해방 투쟁의 일부임을 느꼈던 몇몇 활동가들은 지하로 숨었고 게릴라 작전을 시작했다. 독일에서 그들은 적군파(Red Army Faction)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론

 

1968년의 저항운동은 시대에 뒤쳐진 대학체계, 비상사태 법의 재도입, 스프링거 출판사에 의해 언론 독점 등 다양한 독일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결국 독일은 미국보다 좀 더 폭력적인 형식을 경험했다. 왜냐하면 적군파가 70년대 동안 대규모 테러주의 활동을 벌였다. 60년 세대와 나치 시대를 겪은 그들의 부모 사이의 갈등은 확실히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커졌다.

정치와 문화에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독일과 미국 운동 사이에 몇몇 공동의 지점이 있다. 사회주의 독일 학생동맹과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사이의 개인적 접촉, 밀즈와 마르쿠제와 같은 신좌파 사상가들의 영향은 비슷한 활동과 전략으로 이끌었다. 두 가지 모두는 형식에서 직접행동의 전술이나 연좌농성과 행진을 이용했고 두 그룹 모두 참여 민주주의하나의 목적적인 운동에 대해 토론했고 썼다. 자유대학(비판대학), 대안학교, 지하신문은 두 운동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두 그룹 모두 대서양 양편에서 환경주의와 여성해방과 같은 또 다른 중요한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던 새로운 쟁점을 토론했다. 다른 말로, 1968년은 독일에서 예전에 놓쳐버린 민주적 문화의 탄생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서독이 수립된 지 50년이 되는 때, 60년대의 결과에는 학생 시위자들이 계획하지 않았던 무엇, 즉 문화논쟁이 포함되어 있다. 사회 문화 규범, 습속, 제도에 맞선 60년대 세대의 반란은 로날드 잉레하르트(Ronald Inglehard)가 주장한 포스트-물질주의(post-materialist)를 낳게 했는가? 반란은 위르겐 하버마스가 주장했듯이 근본적인 해방으로 귀결되었는가 또는 발터 그라스캄프(Walter Grasskamp)가 헤도니즘적 소비문화로 이름붙인 것으로 귀결되었는가?

 

 

옮긴이: 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