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사회투쟁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8월호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사회투쟁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10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사회투쟁1

 

Nicolás Iñigo Carrera and María Celia Cotarelo



20011219일에서 20일에 아르헨티나에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비록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절정에 이르렀지만, 아르헨티나 곳곳에서 일어났다. 사건은 여러 항의 시위(특히 냄비 두드리기: cacerolazos)와 작은 기업가 협회와 노동조합이 소집했던 회의들(1212), 1213일 목요일에 세 개의 주요 노동조직(CGT Daer, CGT Moyano, CTA)이 선언했던 총파업으로 시작되었다. 1213~20일까지 많은 시위와 함께 슈퍼마켓과 다른 상점을 약탈한 800건이 넘는 대중행동이 터졌다. 경찰에 맞서 싸운 거리 투쟁과 바리카다(bariccada: roadblocks)도 일어났다. 1219일 저녁에, 정부가 포위 상태를 선언하고 난 뒤, 몇 천 명의 사람들은 정부의 사퇴를 요구하고 모든 정치인에 대한 거부를 표현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5월 어머니 광장’(the Plaza de Mayo)과 나라의 주요 도시에 있는 정치 중심으로 이동했다. 대중의 분노는 은행과 1990년대에 사유화된 공공회사의 공공건물, 관료와 정치가의 집으로 쏠렸고 많은 경우에 그것은 경찰과 거리 투쟁으로 끝났다.

정부가 공권력(경찰)을 쓰기로 한 결정은 시위대를 무력화시키기는커녕 적대감을 늘렸고 대중운동을 불러일으켰다. 대중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에서 20일 목요일 정오가 지난 뒤에 주요 전투를 벌였다. 그들은 정부의 공권력뿐만 아니라 1970년대 중반 이래 들어선 정부가 이행했던 경제적·사회적 국가정책과 그 정책의 수혜자, 그리고 모든 정치 제도 체계에 맞섰다.

 

그와 동시에, 은행도 공격당했다. 시위와 행진, 바리게이트와 나란히 나라의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자발적인 까쎌로라쪼가 일어났다. 세 개의 주요 노동조직이 선언했던 새로운 총파업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는 이러한 투쟁 형식이 좀 더 높은 투쟁으로 포섭 당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1220일의 사건은 자발적인 봉기이다. 그 봉기에서 모든 투쟁은 199312월에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반란에서부터 참여했던 여러 계급과 계급 분파에 의해 수행되었다. 1220일의 사건은 틀림없이 민중 투쟁의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이다. 그러나 그것이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던 반혁명 시기의 종식과 새로운 역사의 시기의 시작인지 아닌지를 말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역사적 계기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역사적 계기는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던 반혁명시기에 있다. 1975년에 실패한 시도(Rodrigazo) 뒤에, 금융과두제가 이끈 사회세력은 19763월에 군사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정책을 적용시키려고 정부를 통제했다.

노동계급에게는, 인간적 생활조건의 박탈과 함께 더 긴 노동시간과 더 낮은 임금을 포함한 그때부터 강요된 조건은 역사적으로 차지했던 사회적 공간에서 축출의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Iñigo Carrera and Podestá 1997) 1980년대 중반 이래, 그리고 심지어 1990년대부터 줄곧, 이러한 과정의 또 다른 조짐은 비참한 조건에서 살고 있는 남아도는 주민의 무리에서 늘어났다.(Iñigo Carrera and Podestá 1997) 오늘날 이러한 잉여 대중 가운데 완전 실업자는 경제활동인구의 약 23 퍼센트에 이르렀고 자본주의가 주민의 가장 부유한 10 퍼센트가 국가수입의 거의 40 퍼센트를 얻었고, 반면에 가장 가난한 10 퍼센트가 국가 수입의 1 퍼센트에도 못 미쳤던 새로운 조건을 지탱하게 허용했다. 가장 가난한 사람 10 퍼센트와 가장 잘 사는 사람 10 퍼센트 사이의 수입 격차는 1990년과 1999년 사이에 57퍼센트로 증가했다. 이것은 소규모 소유주, 노동계급, 빈민의 반란이 발전한 전체 사회적 맥락이다.

 

 

폭동에서부터 자발적 봉기로(1993~2001)

 

19895~7월과 19902~3월에 있었던 상점 약탈, 알러스 포퓰라레스(ollas populares), 시위는 저항도 국가 또는 정부에 맞섰던 것도 아닌, 그저 식량폭동일 뿐이었다(Iñigo Carrera, Cotarelo, Gómez and Kindgard, 1995; Iñigo Carrera and Cotarelo 2001 b). 그 뒤에, 1989년과 1990년에 초 인플레이션의 반복 위협은 금융 과두제가 촉진했던 정책의 불가항력적인 실행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놓았다. 따라서 초 인플레이션이 사람들에게 미친 효과는 1970년의 이른바 파괴반대 전쟁’(antisubversive war), 그리고 말비나스 전쟁과 1980년대 초에 군사정부의 종식을 협상했던 방법에 가담한 사람들을 결합시켰다(Iñigo Carrera and Posestá, 1997; Iñigo Carrera, Cotarelo, Gómez and Kindgard, 1995).

1989~1990년의 식량폭동 뒤에, 많은 공기업은 사유화되었고, 많은 노동자가 해고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이러한 정책의 효과는 노동자에게 뚜렷하지 않았다. 즉 새로운 상황은 사유화된 기업의 많은 노동자의 합의를 포함한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이었다. 누구든 저항을 시도하면, 그는 사회적으로 고립될 것이다.

199312월 중순에 일어난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이른바 산티아가조’)의 폭동은 투쟁의 과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사람들은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에 있는 국가의 세 기관(정부 청사, 의회, 사법부)이 모여 있는 건물과 여러 지역 정치지도자의 집에 불을 질렀다. 폭동의 요소를 포함했던 다른 사건은 많은 다른 주에서 1993년 말에서 1995년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1993년 말부터 줄곧, 반혁명 시기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노동계급의 사회적 고립은 깨지기 시작했고, 투쟁은 좀 더 체계적으로 되었고 좀 더 높은 수준의 명료화와 조직화를 달성했다. 이것은 국가의 정부로부터 금융 과두제에 의해 조성되었던 정책에 맞서 사회적 저항운동의 형성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총파업은 이러한 명료화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아울러 폭동에서, 그리고 좀 더 분명하게 1996년과 1997년에 네귀엔 주에 있는 Cutral-Có 도시와 1997년 후후이 주에 있는 Libertador General San Martin에서와 같은 도로봉쇄에서, 우리는 정부와 그 정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정권 자체에 대한 반대의 싹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목격자에게 정당과 다른 정치적 매개체에 대한 거부, 그리고 선거와 대표자 소환을 포함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까빌도스 아비에르토스’(cabildos abiertos)아우토콘보카도스’(autoconvocados) 회의와 같은 새로운 정치조직 형식의 탄생을 고려했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떠오르는 계기는 1996(9월의 총파업)1997년 초반에 일어난 후후이(Gómez and Kindgard 1998), Cutral-Có (Klachko 1999; Klachko 2002), 코르도바 주에 있는 크루즈 델 에헤와 살타 주에 있는 타르타갈의 폭넓은 바리게이트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이러한 사건들 이래, 노동자는 금융과두제의 노동과 사회정책에 해당했던 합법적 개혁을 중단하지 않았지만 속도를 늦추었다. 이것들은 금융과두제의 후보가 지난 2년의 메넴 행정부에서 요구했고 1999년 선거에서 당선된 새로운 정부에 의해서만 실행될 수 있을 것인 잘 알려진 tareas pendientes’(미결정 과제)였다. 1996년 말쯤에, 노동조합 후보 사이의 분할과 총파업의 고립(Iñigo Carrera 1999), 그리고 19975월의 도로봉쇄 뒤에, 199312월에 시작되었던 대중투쟁에서 떠오르는 순간은 끝났다. 도로봉쇄가 나라 전체에서 늘어났지만, 그들의 지도자는 주로 작은 소유주와 다른 쁘띠 부르주아 분파였다. 그러나 임금노동자의 투쟁에서 단결은 사라졌다. 노동계급의 요구와 고립의 경제적 본질은 강화되었고 UCR(Union Civica Radical )-Frepaso(the Front for a Country in Solidarity) 동맹의 형성과 함께, 모든 것은 제도적 체계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졌고 선거 논쟁으로 나아갔던 것으로 여겨졌다.(Iñigo Carrera and Cotarelo 2000)

그러나 1999년 말과 2000년에, 코리엔테스와 제네랄 모스코니(General Mosconi)에서 일어났던 사회적 대결은 2000년에 발전했던 총파업에 표현되었던 것처럼 조직된 노동운동에서 단결의 높은 수준과 함께 200112월에 절정에 다다랐던 새로운 떠오르는 계기를 가리킨 것이다.

2001년 초에, 저항은 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라 만탄자(La Mantanza), 플로렌시오 바렐라(Flerencio Varela), 킬메스(Quilmes)에서는 가장 중요한 도로봉쇄가 일어났다.(Iñigo Carrera and Cotarelo 2001a) ‘불평등에 맞서고 사회적 죄수의 자유를 위한 시위는 사회적 지지를 받았던 세 번에 걸쳐 일어난 전국적인 도로봉쇄에서(731, 87~8, 814~16) 가난한 사람과 다른 노동자를, 특히 공무원을 다시 한 번 끌어드렸다.

 

 

주체와 투쟁의 수단

 

식량폭동, 소요, 파업, 바리게이트, 행진과 집회는 지난 몇 년에 걸쳐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을 이루었던 투쟁의 형식이자 수단이었다(Iñigo Carrera, Cotarelo, Gómez and Kindgard, 1995; Iñigo Carrera and Cotarelo, 1997, 1998, 2000, 2001 a and b; Iñigo Carrera, 1999, 2001; Klachko 1999, 2002).

첫눈에, 도로를 봉쇄하는 것은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사회 투쟁에서 새로운 그리고 가장 유용한 도구이다. 1997년 이래, 바리게이트는 퍼지기 시작했고 정규노동자와 실업노동자, 소자산가, 학생,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여러 사회분파에 의해 이용되었다.



몇몇 경우에(Cutral-Có, Jujuy, Tartagal-Mosconi, Corrientes) 바리게이트는 경찰의 행동이나 다른 정부의 공권력에서부터 방어 지점을 점령하고 점거하는 것을 나타냈던 도로 봉쇄하기와 더불어 주된 투쟁 수단이다. 이러한 경우에, 그것은 고전적인 바리게이트와 비슷하다. 비록 얼핏 보기에는 바리게이트가 ‘multisectoriales’나 다른 비슷한 형태로 조직되었지만, 탈제도화를 뜻한 연대와 우리가 본능적으로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던 형식에 바탕을 둔 조직이 생겨났다. 이런 바리게이트의 형태는 여러 날 동안 지속될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할 수도 있다.

2000년과 2001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처럼, 바리게이트는 대중 참여에 의해 특징 지워졌고 여러 날 지속되었다. 그리고 참여자는 그들의 대표가 참여했던 협상의 결과를 승인하거나 거절했던 집회에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바리게이트는 각각을 다르게 만들었던 몇 가지 특징을 지녔다. 바리게이트는 실업노동자에 의해서만 수행되었고 그것의 요구는 ‘Planes Trabajar’의 일과 실업자의 자녀를 위한 식량과 학용품의 무상 분배와 주로 관계가 있었다. 바리게이트는 저항을 이끌었고 도로봉쇄를 풀고 나서 해산되지 않는 실업자의 조직에 의해 특징 지워졌다. 이것은 지속적인 방식으로 임금관계에 연루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 측에서 조직의 불가능성에 대한 담론을 반박한 것이다. 짧은 시기에 그들의 물질적 생존조건만이 아니라 임금을 가지고 생계수단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긴 프롤레타리아의 바리게이트는 체계적인 투쟁 방식과 조직에서 중요하게 발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실업노동자의 동질성과 의식을 고려한다면(Gramsci 1986), 그들의 조직은 정치적쟁점보다는 오히려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에 관계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실업노동자의 바리게이트를 노동조합 조직의 싹과 비슷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한 전체 역사적 과정의 발전은 이러한 경향이 지배적으로 될 것인지 아닌지 또는 그와 반대로 그것이 전체로서 계급이익을 표현할 다른 조직 형식의 싹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실업자의 이런 조직들은 2001년에 앞서 말한 Jornadas Piqueteras를 이끌 수 있었다. 그때 실업자와 고용 노동자 몇 천 명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요 거리를 따라 행진했고 플라자 드 마요에 도착했다.



가장 중요한 투쟁 형식 가운데 하나는 대중 동원을 포함했던 총파업이었다. 총파업은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총파업이 일어날 때 거기에는 거리 시위, 바리게이트, 무료급식소 등도 포함되었다. 그런 각각의 투쟁에 연루되었던 여러 사회 분파의 투쟁을 총파업이 명료하게 만들려고 했듯이. 1990년대에는 9건의 총파업이 있었고 2000년과 2001년에는 총파업이 8 차례 일어났다. 18차례의 총파업 가운데 8건은 모든 노동조직이 궐기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여러 노동계급 분파 사이의 높은 수준의 단결을 달성한 것이고 비프롤레타리아 사회 분파와 동맹을 세운 것이기도 했다.

 

주체 행동

임금노동자(고용, 실업 또는 최근에 해고된 노동자) 49.2%

학생, 선생, 학생 부모(‘학교공동체’) 15.6%

이웃 9.1%

전투적 활동가 7.2%

소규모 생산자와 상점 주인 6.9%

기타 12%

100%(595)

 

따라서 새로운 투쟁 수단이 분명히 사용되었지만, 이것은 동원을 통한 총파업과 같은 오랜 역사를 지닌 형식이 그들의 중요성을 잃었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의 사회적 무게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행진과 바리게이트, 점거와 같은 저항에서 사용된 다른 수단에 초점을 맞출 때 명확한 것이다.

임금노동자의 범주 안에, ‘고용노동자는 훨씬 더 적극적인 부분이었다(그들은 행동의 46.1 퍼센트를 수행했다.). 그러나 Planes Trabajar 등과 같은 혜택을 보는 수익자를 포함한 해고노동자와 실업노동자38.9퍼센트를 수행했다(Iñigo Carrera and Cotarelo 2001a).

비록 우리가 정치적 흐름의 중요성이 특히 실업자가 수행했던 행동 조직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행동은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되었다.



 

199312

~19978

19979

~199910

20011

~ 4

20017

고용 임금노동자

35.3

22.8

19.1

19

비고용

임금노동자

15.4

4

28.4

32.6

고용과 비고용

임금노동자

3.2

4.9

11.3

34.8

임금노동자와 쁘띠 부르주아지

6.4

3

쁘띠 부르주아지(소규모 기업가, 학생 등)

16.7

56.7

33.3

2.7

기타

23

8.5

7.8

10.9

전체

100(156)

100(529)

100(204)

100(184)

또한 임금노동자(고용, 비고용 또는 해고)의 중요성은 바리게이트에 초점을 맞출 때에도 관찰될 수 있다. 우리의 연구에서 우리는 바리게이트의 주체를 고려하면서 4개의 시기(1. 199312~19978; 2. 19979~199910; 20011~4; 4. 20017)로 나누었다. 

 

바리게이트의 주체에서 보면, 노동과 정치적 흐름과 기업가 조직은 관련되었다. 기업가(31.7 페센트)와 노동(24.8 퍼센트) 조직이 1999년까지 지배적이었다면, 20011월과 4월 사이에 자발적인 바리게이트(23.6 퍼센트)1위를 차지했다. 그 뒤에 정치적 흐름’(21.6 퍼센트)과 노동조직(21.1 퍼센트)가 차지했다. 2001년 중순쯤에 노동조합(34.8 퍼센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를 정치적 흐름과 비고용 노동자 조직(26.1 퍼센트)이 이었다.

 

투쟁의 형식과 수단의 통합

 



적어도 1990년대 중순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사회적 저항이 총파업을 통해 통합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통합하는 역할은 총파업이 나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러스 표퓰라레스, 집회, 에스크라체스(escraches), 대학 점거, ‘열린 방송’(open radios), 소등, 약탈 시도나 위협 등과 함께 행진과 바리게이트를 통합했을 때인 2000년과 2001년에 훨씬 더 뚜렷했다.

여러 사회 분파는 여러 투쟁 수단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파업자가 든 피켓은 버스와 트럭과 기차의 순환을 막고 상점과 은행을 폐쇄하려고 꾀한 것이었다. 행진은 도시의 중심 거리를 따랐고 흔히 공공건물과 외국은행, 사유화 기업과 상점을 빙빙도는 것을 포함한 것이었으며, 대부분 임금노동자에 의해 수행되었다. 행진 가운데 일부에는 학생과 비고용 노동자도 참여했지만 많지는 않았다. 노동조합이 조직했던 알러스 포퓰라레스는 또한 고용 임금노동자에 의해 조직되기도 했다. 바리게이트의 지도자는 고용 임금노동자와 비고용 임금노동자, 학생과 연금생활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20017월의 총파업에서 사라졌다. 그때 바리게이트는 주로 실업자에 의해 수행되었다. 20005월과 11월의 총파업동안 마르 델 프랄타와 로사리오에서 슈퍼마켓이나 다른 상점에 대한 약탈 시도나 위협은 지역 주민이나 이웃, 특히 가난한 이웃이나 슬럼가의 젊은이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에스크라체스와 집회는 좌파 정당의 전투가들의 독점물이었다. 게다가 바리게이트와 행진에 참여한 학생은 대학을 점거했고 열린 방송을 조직했다. 몇몇 도시에서 상점주인과 소 기업가와 이웃은 소등을 조직했다.

총파업의 통합 능력은 3개의 주요 노동조직과 소기업가 협회가 요청했던 시위와 파업으로 시작되었던 200112월의 사건에서 관찰될 수 있다. 그러나 20011219일과 20일의 자발적 봉기에서 총파업은 거리투쟁과 그 결과의 맥락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노동계급: 활동 분파와 예비 분파


 

체계적인 투쟁 형식(총파업, 시위, 바리게이트)은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발전하고 있는 운동에서 노동계급의 중심적 역할을 보여준 것이다.

사기업과 공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는 그 때 총파업과 주요 시위의 핵심이다. 그들은 또한 바리게이트에서도 주역을 맡았다. 그들은 1993년과 1999년 사이에 임금노동자 가운데 이러한 수단을 주로 썼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1997년 이래, 바리게이트는 실업자가 쓴 주된 수단이 되었다. 2001년에 노동계급의 실업자 부분은 대부분 이러한 수단을 썼던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조직은 항구적으로 되었다.

시위와 함께 진행된 총파업에서 관찰될 수 있는 수단의 통합은 노동계급의 활동적인 분파와 예비군분파 사이의 단결의 수준을, 즉 비록 충분하지 않지만 노동계급 단결을 이룰 수 있는 필요한 조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단결은 20011219~20일에 일어난 자발적 봉기에서만 다다를 수 있었다.

 

 

12월 후

 

12월의 사건 뒤 몇 달에 전체 사회는 거리에서 특히 임금노동자와 함께 가난한 사람과 쁘띠 부르주아지를 동원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노동조합을 통해 조직되었던 노동계급의 분파는 새로운 정부가 포고했던 해고의 중지를 바탕으로 삼아 일종의 휴전에 들어갔다. 이러한 휴전의 취약성은 기초 상품 가격이 오르고 해고 수가 늘어났을 때 분명해진 것 같다. 그러나 휴전은 조직된 노동자의 소폭의 임금 상승과 실업자의 보조금 확대를 바탕으로 삼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이러한 휴전이 지속된 주된 이유는 훨씬 더 복잡하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와 관련된 문제와 관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사이에, 금융과두제와 그것의 정치이데올로기 후보는 경제정치 위기가 2001년에 절정에 다다른 이래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격의 조건을 만든 것으로서, 우리는 1976년 군사쿠데타에 대한 향수와 나란히 정부가 피켓터와 다른 시위자로부터 거리에 대한 통제를 되찾으려고 공권력을 사용하기 위한 호소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결과가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분석을 근거로 하여 노동계급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노동계급이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그것이 투쟁이 아니다또는 그러한 투쟁이 쓸모없다.’는 개념에 바탕을 둔 이데올로기적 견해를 버릴 수 있다. 노동조합은 저항을 조직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고용 노동자와 비고용 노동자는 투쟁의 중요한 지도자였다. 따라서, 200112월에 일어난 자발적 봉기가 총파업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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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은 Bulletin of Latin American Research, Vol. 22, No. 2(2003), pp. 201~213에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