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오직 하나의 길 - 서문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8월호

오직 하나의 길 - 서문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13

* 트로츠키는 1930년대 초반 독일에서 히틀러의 권력 장악 전야에 주요한 정세 및 전술 관련 글들을 계속 써냈다. 이 글들은 나중에 오직 하나의 길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팸플릿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문

1. 보나파르트 체제와 파시즘

2. 자본가계급, 소부르주아 계급, 노동자계급

3.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의 동맹인가, 양자의 투쟁인가?

4. 텔만의 21가지 오류

5. 스탈린-텔만 정책을 이들 자신의 경험에 대조하다

6. 공동전선에 대해서 프라하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7. 경제순환으로 본 계급투쟁

8. 사회주의로 가는 길

9. 오직 하나의 길

후기

 

오직 하나의 길

 

Leon Trotsky

 

팸플릿 편집자 해설19326월에 구성된 파펜 정부는 9명의 장관 가운데 7명이 남작으로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었다. 이 내각에서는 국방장관인 슐라이허 장군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사실상 이 내각은 파시스트 독재로 가는 다리를 놓았다. 파펜 정부는 나치의 돌격대(SA)를 합법화하고, 720일에는 사민당의 아성인 프로이센 정부를 쿠데타적으로 해산시켰다.

각지에서 반()군사조직이 대량의 사상자를 내는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 실시된 730일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대약진했다. 공산당의 득표는 약간 늘어났지만, 사민당은 줄어들었다. 각 당의 득표 변화는 아래와 같다.

독일 주요 정당

19309월 선거

19327월 선거

 

득표수

득표율

의석

득표수

득표율

의석

사민당

8577700

24.5%

143

7959700

21.6%

133

공산당

4592100

13.1%

77

5284800

14.6%

89

가톨릭중앙당

4127900

11.8%

68

4589300

12.5%

75

국가인민당

2458300

7.0%

41

2177400

5.9%

37

나치당

6409600

18.3%

107

13745800

37.4%

230

 

이 선거 결과는 나치 독재의 위험성을 한층 더 높이는 것이었다. 많은 공산당원과 사민당원이 동요하면서 반()파시즘 공동전선의 기운이 차츰 하부로부터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스탈린 지도부와 독일의 텔만 지도부는 사회파시즘론을 고집하며 사민당과의 어떠한 협정이나 공동행동을 계속 거부했다. 사민당 지도부도 파펜 정부에 구원을 청하며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성실하게 조직하려고 하지 않았다.

트로츠키의 이 팸플릿은 몇 번으로 나뉘어 작성된 글을 모은 것이고, 19329월에 독일어로 발행되었다. 1932년 초에 나온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이어 파시즘론, 보나파르트 체제론, 공동전선론, 사회파시즘론에 대한 비판 등을 전면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 팸플릿에서 전개된 독일 정세의 향후 움직임에 대한 예상은 놀라울 정도의 정확함으로 확인되었다. 보기를 들어, 1장에서 트로츠키는 파펜 정부의 실권을 쥐고 있던 슐라이허 장군이 파펜 정부 다음에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사회주의자가 곧바로 파펜과 동맹하지 않고, 동시에 당장 공격에 나서지 않는다면, 정부의 보나파르트주의적 성격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 슐라이허는 나폴레옹 시대보다 우월한 것도 없이 …… 자신의 백일천하’(hundred days)를 누릴 것이다.

100아니다, 이것은 너무 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제국군대는 사태를 결정하지 못한다. 슐라이허로는 충분하지 않다. 융커와 대금융자본가의 국회 밖 독재는 진력나고 냉혹한 내전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

 

 

실제로 슐라이허 정부는 193212월에 성립했다. 그러나 이 정권은 트로츠키가 말한 것처럼, 100일도 안된 1933131일에 히틀러 정권으로 대체되었다. 히틀러 정권은 국회 방화 사건을 이용해 반()쿠데타, ()내전을 일으켜 독재 권력을 확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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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자본주의의 쇠퇴는 그 상승보다 한층 더 격렬하고, 극적이며, 참혹한 것이 될 것이다. 독일 자본주의도 틀림없이 예외가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 그 단말마적 고통이 너무 오래 끌게 되면, 그 책임은 우리는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계급 정당에 있다.

독일 자본주의는 뒤늦게 무대에 등장했기 때문에 맏이의 특권을 빼앗겼다. 러시아의 발전은 러시아를 영국과 인도 사이의 어디엔가 위치 지웠다. 이러한 배열 속에서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는 대영제국의 거대한 해외 식민지나, 제정러시아의 국내 식민지가 없었다. 유럽의 중심부로 비집고 들어간 독일은 전 세계가 이미 분할되어 있었던 시대에 외국시장을 정복하고, 이미 분할되어 있는 식민지를 재분할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독일 자본주의는 시류를 따를 운명도,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운명도 아니었다. 오직 대영제국만이 이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최근에 우리 눈앞에서 정말을 고한 한정된 역사적 한 시기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자본주의는 프랑스 자본주의의 중용의 감각조차 몸에 익힐 수가 없었다. 프랑스 자본주의는 그 한계 내에서 자기 입장을 굳혔으며, 게다가 풍부한 식민지를 여력으로 갖추고 있었다.

국내정치 분야에서 철저히 기회주의적인 독일 자본가계급은 경제와 세계정치 분야에서 더 없이 대담하고 신속하게 대처해야 했다. 선행한 나라들에 따라 잡기 위해서 끝없이 생산을 확대하고, 총검을 덜걱거리며 전쟁에 돌입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전후 독일 산업의 극단적인 합리화도 역사적 지연, 지리적 위치, 군사적 패배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할 필요성에서 기인했다.

요컨대, 현대의 경제적 질병이 인류사회의 생산력이 국가적 경계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도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독일 자본주의가 가장 격렬한 경련을 겪고 있는 것은 바로 독일이 유럽 대륙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선진적이며, 가장 약동적인 자본주의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자본주의의 병을 고치려는 의사들은 자유주의, 계획경제, 자급자족 경제라는 3개의 유파로 나뉘었다.

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연법칙을 부활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비참한 정치적 운명은 독일 자본주의가 절대로 맨체스터주의에 입각할 수 없지만 트러스트와 독점체의 보호무역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 경제는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는 건전한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국가사회주의’(나치즘)는 나름의 방식으로 베르사유체제의 임무를 수정하는 것 즉, 호엔촐레른 제국주의의 공세를 한층 더 추진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을 자급자족 경제, 즉 지역주의와 자율규제의 길로 이끌고 싶어 한다. 이 경우에는 사자의 포효가 기가 꺾인 개의 심리를 가리고 있다. 독일 자본주의를 그 국가적 경계에 적응시키려는 것은 오른 팔과 왼쪽 다리와 두개골의 일부를 절단한 채, 환자를 치료하자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계획경제를 통해 자본주의를 치료하는 것은 경쟁을 없애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경우에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료적독단적 개혁론자들은 감히 이것을 상상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독일 경제는 무엇보다도 순전히 독일의 것만이 아니며, 세계경제에 통합된 구성부분이다. 독일의 계획은 국제적 경제계획의 전망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폐쇄적인 국가적 경계 안에 갇힌 계획경제 체제는 세계경제에 대한 거부, 즉 자급자족 경제로 후퇴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서로 반목하는 이 3개 유파는 실제로 반동적 유토피아주의라는 마법의 동그라미(magic circle)에 가둔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독일 자본주의가 아니라 독일을 그 자본주의에서 구해야 한다.

위기의 시기에 독일 자본가계급, 적어도 그 이론가들은 회개하는 발언을 했다. - 그렇다, 너무 위험한 정책을 실행하고, 너무 경솔하게 대외채권에 의지했으며, 너무 빠르게 공장 설비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실제로 파펜의 강령과 이에 대한 금융자본의 태도가 보여준 것처럼, 독일 자본가계급의 지도자들은 오늘날, 점점 더 경제적 모험주의로 기울고 있다.

산업 회생의 첫 징후가 보이자마자, 독일 자본주의는 자신의 역사적 과거가 만들어낸 것, 따라서 자유주의적 도덕가들이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 아닌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윤에 굶주린 기업가들은 압력계를 검사하지도 않은 채, 다시 기압을 올릴 것이다. 대외채권의 연속적 발행은 다시 열병 같은 성격을 띨 것이다. 확장의 가능성이 적다면? 그만큼 더 그 가능성을 독점할 필요가 있다. 불안에 떠는 세계는 다시 이전 시기에 본 광경을, 그것도 한층 더 격렬한 형태의 경련을 보게 될 것이다. 동시에 마치 1914~18년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독일 군국주의가 부활하기 시작할 것이다. 독일 자본가계급은 다시 엘베 강 동쪽의 남작들을 국가의 선두에 배치할 것이다. 보나파르트주의자의 보호 아래, 이 남작들은 정통성 있는 왕정의 보호 아래에서보다 훨씬 더 국가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독일사민당의 지도자들은 제 정신일 때에 자신들이 끼친 피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기적적으로 자신의 당이 아직도 수백만 노동자를 지도할 수 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분명히 모든 대중조직에 고유의 보수주의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몇 세대에 걸쳐 노동자계급은 정치학교로서 사회민주주의를 경험했다. 이것은 위대한 전통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개량주의가 존속할 주된 이유가 없었다. 노동자는 사민당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이 당을 버릴 수가 없다. 노동자는 사민당을 다른 당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노동자의 지도자라는 독일공산당은 지난 9년 동안 대중을 억누르거나, 적어도 대중이 공산당 주위로 결집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일을 다 했다.

1923년에 스탈린-브란틀러의 조건부 항복 정책, 1924~25년에 마슬로프-루트 피셔-텔만의 초좌익적 지그재그, 1926~28년에 사민당에 대한 기회주의적 아첨, 1928~30년에 3의 모험주의, 1930~32년에 사회파시즘민족해방이라는 이론과 실천, 이것들이 계산서에 적힌 항목이다. 그리고 그 총계는 힌덴부르크-파펜-슐라이허 일당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길에는 독일 인민을 위한 출구가 없다. 여기에 공산당에게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이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사례는 사회주의의 길이야말로 출구가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공산당에게 중요한 제2의 힘의 원천이 있다.

그러나 이 최초의 노동자국가가 고립된 상황 아래에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세계혁명을 믿지 않고, 세계혁명에 대해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는 동시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배를 유지하는 민족적인 기회주의적 관료집단이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독일과 국제 노동자계급의 최대의 불행이다.

독일의 정세는 마치 공산당이 단시간 내에 대다수의 노동자를 획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조성된 것과 같은 상황이다. 공산당은 현재, 아직 소수의 노동자계급을 대표하고 있을 뿐임을 이해하고, 따라서 확고하게 공동전선 전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이렇게 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전술을 채택했다. 즉 전체 노동자계급이 미리 공산당의 지도력을 인정하기 전에는 독일 노동자에게 경제투쟁을 수행하거나, 파시즘에 저항하거나, 총파업이라는 무기를 이용하거나, 소비에트를 창설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전술이다. 따라서 정치적 임무는 최후통첩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파괴적인 방법이 나올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스탈린주의 분파가 채택한 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는 기구가 정치적 지도를 행정적 명령으로 바꿔버렸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노동자가 토론하거나, 비판하거나, 선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채, 최후통첩의 말밖에 하지 않는다. 텔만의 정책은 스탈린주의를 조악한 독일어로 번역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차이는 소련의 관료집단이 10월 혁명으로부터 받은 국가권력을 자신의 명령 정책을 위해서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반면에, 자신의 최후통첩을 강화하기 위해서 텔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소비에트 연방의 형식적 권위뿐이다. 이것은 도덕적 원조의 큰 원천이지만, 일정한 조건에서는 공산당 노동자의 입을 막는 데는 충분할지 몰라도 사민당 노동자를 설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독일혁명의 문제는 지금, 이 후자를 임무로 삼게 한다.

이 팸플릿은 독일 노동자계급의 정책을 다룬 필자의 이전 저작의 연속이고, 새로운 단계에 적용할 독일의 혁명정책 문제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프린키포

1932914

 

 

 

1. 보나파르트 체제와 파시즘

 

무엇이 일어났고,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를 간략하게 분석해보자.

사민당 덕분에 의회의 지지를 확보한 브뤼닝 정부는 긴급법령에 의지하여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민당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 “이런 식으로 우리는 파시즘이 권력으로 가는 길을 막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파시즘은 이미 승리했다. 브뤼닝 체제야말로 파시즘이다.” 모두 다 틀렸다. 사회민주주의자는 파시즘에 밀린 수동적 퇴각을 파시즘에 대한 투쟁이라고 속였다. 스탈린주의자는 마치 파시즘의 승리가 이미 기정사실인 양 사태를 제시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은 이렇게 양쪽으로부터 파괴되어 적의 승리가 용이해졌으며, 더 가까워졌다.

그때 우리는 브뤼닝 정부를 보나파르트 체제(‘보나파르트 체제의 희화화’)로 즉, 군사경찰(military police) 독재체제라고 지칭했다. 두 사회계층, 즉 유산자와 무산자, 착취자와 피착취자 의 투쟁이 최고의 긴장상태에 이르자마자, 관료, 경찰, 군대의 지배를 위한 조건이 마련된다. 정부는 사회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다시 한 번 이 점을 상기하자. 2개의 포크가 좌우 대칭적으로 코르크를 찌르면, 코르크는 핀의 꼭대기에서도 세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보나파르트 체제의 도식이다. 물론 이런 정부는 유산계급의 점원 노릇을 그만두지 않는다. 게다가 이 점원은 주인의 등에 걸터앉아 그의 목을 버릇없이 문지르고, 가끔 발로 주인의 얼굴을 찌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브뤼닝이 최종적 해결(final solution)까지 지탱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또 하나의 고리가 그 자체에 꽂혀있다. 파펜 정부가 바로 그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이전의 지칭을 수정해야 한다. , 브뤼닝 정부는 전()보나파르트주의 정부였다. 브뤼닝은 예고에 지나지 않았다. 보나파르트 체제는 파펜-슐라이허 정부에서 완성된 형태로 모습을 나타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 브뤼닝은 힌덴부르크와 제481섬기는것 이상의 더 큰 행복을 모른다고 단언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철권으로 브뤼닝의 우측을 떠받쳤다.’ 그러나 브뤼닝은 왼쪽 팔꿈치로 벨스의 어깨에 기댔다. 브뤼닝은 제국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한 덕분에 제국의회와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의회로부터 브뤼닝의 독립성이 커질수록 관료 수뇌부는 브뤼닝과 그를 지지하는 정치집단으로부터 더욱 더 독립하는 것처럼 느꼈다. 제국의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만 남아있었다. 파펜 정부는 완벽한 관료주의적 구상에서 나왔다. 파펜 정부는 오른 팔꿈치로 히틀러의 어깨에 기대고, 경찰의 주먹으로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자신의 좌측을 막고 있다. 여기에 파펜 정부의 안정의 비밀, 즉 성립과 동시에 맥없이 쓰러지지 않았던 비밀이 있다.

브뤼닝 정부는 성직권적관료적경찰적 성격을 띠었다. 제국군대는 여전히 따로 떼어져 있었다. ‘철의 전선이 질서의 직접적 버팀목 역할을 했다. 힌덴부르크-파펜 쿠데타의 본질은 바로 이 철의 전선에 대한 의존을 제거하는 데 있다. 장군들이 자동적으로 전면에 나섰다.

사민당 지도자들은 완전히 속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회적 위기의 시기에는 이것만이 이들에게 어울린다. 이 소부르주아 음모자들은 영리함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만 영리해 보인다. 지금, 이들은 밤에 담요를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땀을 흘리면서 기적을 바란다. 아마 결국에는 우리가 우리의 목뿐만 아니라 가재도구나 결백한 저금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적은 없을 것이다. ……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공산당도 사태에 완전히 허를 찔렸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사태를 예견할 수 없었다. 현재 텔만, 레멜레 등은 모든 경우에 ‘720일의 쿠데타에 대해 말한다. 왜 그런가? 처음에 이들은 파시즘이 이미 도래했으며, 이를 장래의 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혁명적 트로츠키주의자들뿐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브뤼닝으로부터 파펜으로 넘어가는 것 당장은 히틀러가 아니라 파펜에게로만 쿠데타가 필요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게다가 이 현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제버링, 브뤼닝, 히틀러의 계급적 내용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쿠데타는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필요했던 것인가? 

그러나 혼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나파르트 체제와 파시즘의 차이가 이제 똑똑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텔만, 레멜레 등은 720일의 파시스트 쿠데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다가오고 있는 히틀러주의자(Hitlerite)의 위험, 즉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쿠데타인 위험에 대해서 노동자에게 경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예전 그대로 사회파시스트로 불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사태는 여러 종류의 파시즘이 각각 파시스트쿠데타에 의지해서 서로 권력을 빼앗는 것이 되었다. 스탈린주의의 모든 이론이 인간의 뇌를 둔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을 뿐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일수록 파펜 정부의 등장에 더 강렬한 인상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즉 정당의 완전한 무시, 새로운 긴급법령, 제국의회의 해산, 무력행사, 수도의 계엄령, 프로이센의 민주주의폐지. 얼마나 쉬워졌는가! 사자(용맹한 사람)는 총으로 죽인다. 벼룩(성가신 사람)은 손톱으로 짓이긴다. 사민당 장관들은 손가락으로 튀겨 해치운다.

그렇지만 응축된 힘이 눈에 띔에도 불구하고 파펜 정부 그 자체로는 이전 정부보다 한층 더 취약하다. 보나파르트 체제는 혁명적 시기가 끝날 경우에만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견고한 성격을 얻게 될 것이다. , 세력관계가 이미 투쟁을 통해 검증된 경우, 그리고 혁명적 계급이 이미 지쳤지만 유산계급이 내일 새로운 경련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인가?’ 라는 두려움을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경우이다. 이런 기본적 조건 없이 즉, 투쟁에서 대중의 에너지가 이미 소진됨 없이 보나파르트 체제는 발전할 수 없다.

파펜 정부를 통해서 백작, 대자본가, 은행가는 경찰과 정규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키려고 했다. 소부르주아 계급의 탐욕과 구속을 받지 않는 무리에 의지하고 있는 히틀러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준다는 생각은 이들에게 달가운 것이 아니다. 물론 이들은 결국 히틀러가 자신의 지배의 온순한 도구가 될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혼란, 장기간에 걸치는 지루한 내전의 위험성, 많은 비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탈리아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틀림없이 파시즘은 결국 보나파르트주의 유형의 군사적관료적 독재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완전하게 승리했을 경우에도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이탈리아에서보다 더 긴 기간이 걸릴 것이다. 유산계급이 더 경제적인 길, 즉 히틀러가 아니라 슐라이허의 길을 좋아할 것은 분명하다. 슐라이허 자신도 이 길을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파펜 정부의 존재 근거가 비타협적인 진영의 중립화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은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힘과 반동적 소부르주아 계급의 힘이 역사의 저울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문제 전체가 정치로 영역이 바뀌기 때문이다. ‘철의 전선이라는 기구를 통해서 사민당은 노동자계급을 마비시킨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어리석은 최후통첩주의 정책을 통해 노동자의 혁명적 활로를 차단한다. 올바른 노동자계급의 지도부가 있으면 파시즘은 어려움 없이, 그리고 보나파르트 체제에서 생길 수 있는 틈이 아니더라도 근절되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의 마비된 힘은 보나파르트주의 도당의 이라는 기만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 오늘날의 정치적 공식이 있다.

파펜 정부는 거대한 역사적 힘이 교차하는 특색 없는 국면이다. 그 자체의 중량은 거의 전무하다. 따라서 파펜 정부는 자신의 몸짓에 기겁할 수밖에 없으며,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는 공백에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리고 이런 식으로만 이제까지 정부의 행동에 한편의 대담함에 비해 다른 한편의 비겁함이 있었음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센에 대해서, 즉 사민당에 대해서 정부는 확실한 게임을 했다 : 정부는 이 신사양반들이 저항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회를 해산시킨 뒤, 정부는 새로운 선거 실시를 알리고, 감히 이를 연기시키지 못했다. 계엄령을 선포한 뒤, 정부는 서둘러 이렇게 해명했다 : 이것은 사민당 지도자들이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제국군대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를 잊을 생각이 없다. 엥겔스는 국가를 감옥 등의 물질적 부속물을 동반한 무장한 인간의 집단이라고 규정했다. 현 정부의 권력에 대해서 말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제국군대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제국군대는 파펜을 정점으로 하는 인간집단의 수중에 있는 온순하고 믿을만한 도구가 결코 아니다. 실제로는 정부가 오히려 제국군대에 부속된 정치위원회의 일종인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제국군대의 모든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제국군대 역시 독자적인 정치적 역할을 주장할 수 없다. 아무리 응집력 있고 강철처럼 단단하다손 치더라도(아직 검증되지 않은) 10만의 병사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적대감에 의해 찢어져 있는 6,500만 국민을 지배할 수 없다. 제국군대는 단지 힘의 상호작용에서 하나의 요소, 그것도 결정적이지 않은 요소를 나타낼 뿐이다.

그 방식에서 새로운 제국군대는 보나파르트 체제의 실험을 부른 이 나라의 정치정세를 그 나름대로 반영한다. 다수파 정당 없이 비타협적인 분파들을 가진 의회는 독재에 대한 명확하고 반론의 여지가 없는 찬성론을 제시한다.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한계가 극명해지고 있다. 사회 자체의 토대가 문제가 되는 경우에 사태를 결정하는 것은 의회주의적 산술이 아니다. 사태를 결정하는 것은 투쟁이다.

가까운 장래에 실시될 정부 구성이 어떤 식으로 이뤄질 것인지 멀리 있는 우리가 조언할 수는 없다. 우리의 추측은 어쨌든 더디고, 따라서 사태에 뒤처질 것이며, 과도적 형태나 조합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가톨릭)중앙당과 우익의 블록은 국가사회주의자의 권력 장악의 합법화, 파시스트 쿠데타를 위한 더할 나위없는 구실을 의미할 것이다. 초기에 히틀러, 슐라이허, 중앙당 지도자들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수립 발전될 것인가는 독일 인민에게 보다 이들 자신에게 중요하다. 정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히틀러와의 모든 연합은 관료집단, 법원, 경찰, 군대가 파시즘에 용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당이 히틀러와의 연립정부에 동의할 것이라고 가정하면, 이는 히틀러의 기관차에 대해 브레이크 역할을 할 자기 당 노동자와의 결렬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오직 공개적인 국회 밖의 길이 남아있을 뿐이다. 중앙당이 합류하지 않은 연립정부는 국가사회주의자의 우위를 더욱 쉽게, 더욱 신속하게 보증할 것이다. 국가사회주의자가 곧바로 파펜과 동맹하지 않고, 동시에 당장 공격에 나서지 않는다면, 정부의 보나파르트주의적 성격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 슐라이허는 나폴레옹 시대보다 우월한 것도 없이 …… 자신의 백일천하’(hundred days)를 누릴 것이다.

100아니다, 이것은 너무 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제국군대는 사태를 결정하지 못한다. 슐라이허로는 충분하지 않다. 융커와 대금융자본가의 국회 밖 독재는 진력나고 냉혹한 내전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 히틀러가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파시즘의 사악한 의지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의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2. 자본가계급, 소부르주아 계급, 노동자계급

 

정치정세에 대한 진지한 분석은 반드시 세 계급, 즉 자본가계급, 소부르주아 계급(농민을 포함하여), 노동자계급 사이의 상호관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경제적으로 강력한 대자본가계급은 그 자체로서는 국민 가운데 극소수일 뿐이다.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대자본가계급은 소부르주아 계급과의 일정한 상호관계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소부르주아 계급을 통해서 노동자계급과의 일정한 상호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 상호관계의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역사적 단계를 구별해야 한다. , 자본가계급이 그 임무를 타개하기 위해서 혁명적 방법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여명기, 자본가계급이 그 지배에 잘 정돈된 평화적보수적민주적 형태를 부여한 자본주의 제도의 개화와 성숙기, 마지막으로,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내전이라는 방식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자본주의의 쇠퇴기가 그것이다.

이 세 단계의 전형적인 정치 강령은 자코뱅주의, 개량주의적 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다), 파시즘이다.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적 경향의 강령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 사실만으로도 국민 가운데 소부르주아 대중의 자기 결정이 부르주아사회 전체의 운명에 대해 얼마나 거대한 -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결정적인 -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자본가계급과 그 기본적인 사회적 지주인 소부르주아 계급의 관계는 결코 상호 신뢰와 평화적 협력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그 주요 부분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은 피착취, 피억압 계급이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자본가계급을 부러워하나, 대개는 증오한다. 그 반면에, 자본가계급은 소부르주아 계급의 지지를 이용하면서도 소부르주아 계급을 신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은 위에서 설정한 경계를 제거하려는 소부르주아 계급의 경향을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적 발전의 길을 준비하고 정돈하면서도 자코뱅파는 사사건건 자본가계급과 날카롭게 충돌했다. 이들은 자본가계급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면서 자본가계급에게 봉사했다. 자신의 제한된 역사적 역할을 다한 뒤, 자코뱅파는 몰락했다. 자본의 지배가 미리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련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 자본가계급은 의회민주주의라는 형태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평화적이거나, 자발적이지 않았다. 자본가계급은 보통 선거권을 죽도록 두려워했다. 그러나 결국 자본가계급은 탄압과 양보, 개량적 조치가 연동된 아사 협박에 의지하여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구 소부르주아 계급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부르주아 계급 - 노동관료 - 을 통해서 상당한 정도로 노동자계급도 종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19148, 제국주의적 자본가계급은 의회민주주의를 통해서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을 대살육에 끌어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전쟁으로 자본주의와 무엇보다도 그 민주주의적 지배 형태의 뚜렷한 쇠퇴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개혁이나 적선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개혁이나 적선을 삭감하고 폐지하는 것이 문제다. 이와 함께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지배는 노동자민주주의 기구(노동조합과 정당)뿐만 아니라 노동자 조직의 관점에서 나타난 의회민주주의와도 충돌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한편으로는 맑스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적 의회제도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자신의 시대에 자유주의 자본가계급의 수뇌부가 자신의 힘만으로는 봉건제, 왕정, 교회를 제거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금융자본의 거물들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노동자계급에 대처할 수 없다. 이들은 소부르주아 계급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소부르주아 계급을 스스로 결집하도록 자극하고 무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방식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자본가계급은 파시즘을 이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한다. 피우스트스키19265, 폴란드 자본가계급의 전통적 정당들에 반대한 쿠데타로 부르주아 사회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는 로자 룩셈부르크로부터 레닌이 아니라 스탈린 편이 된 폴란드공산당의 공식 지도자 바르스키가 피우스트스키의 쿠데타를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가는 길로 받아들이고, 노동자에게 피우스트스키 지지를 요청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필자는 192672일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폴란드위원회 회의에서 폴란드 사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피우스트스키)의 쿠데타는 쇠퇴와 파멸 과정에 있는 부르주아사회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부르주아적, ‘평민적방법이다. 이 점에서 이탈리아 파시즘과 직접적인 유사점이 있다. …… 이 두 조류는 의심할 여지없이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이들의 돌격대는 …… 소부르주아 계급 사이에서 징집된다. 피우스트스키와 무솔리니 모두 국회 밖의 적나라하게 폭력적인 수단 즉, 내전이라는 방식을 통해 작동된다. 이들 모두 부르주아사회의 타도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사회를 구제하려고 했다. 이들 모두 소부르주아 대중을 일어서게 하고나서 권력에 오른 뒤 대자본가계급과 공공연하게 충돌했다. 이 점에서 역사적 일반화가 무의식적으로 떠오른다. , 자코뱅주의를 자본가계급의 봉건적 적()을 처리하기 위한 평민적 수단으로 간주한 마르크스의 정의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는 자본가계급이 상승기에 있었다. 부르주아사회가 쇠퇴기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재, 자본가계급은 다시 한 번 부르주아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평민적수단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반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자코뱅주의의 반동적 희화화인 것이다. …… 쇠퇴기의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창조물인 의회제 국가의 방법과 수단으로는 이미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 자본가계급은 적어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방어의 무기로서 파시즘을 필요로 한다. 자본가계급은 문제 해결의 평민적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본가계급은 부르주아사회의 발전을 위해 유혈의 길을 연 자코뱅주의에 극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코뱅이 상승기의 자본가계급과 가까웠던 것보다 파시스트는 쇠퇴기의 자본가계급과 그지없이 더 가깝다. 그러나 지위가 확고한 자본가계급도 문제 해결의 파시스트적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사회를 위해서지만 거기에 따르는 충격과 혼란은 자본가계급에게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파시즘과 전통적 부르주아 정당들이 반목하는 원천이다. …… 턱이 부은 사람이 이를 뽑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같이 대자본가계급은 이 방법을 싫어한다. 부르주아사회의 덕망 있는 집단은 치과의사 피우스트스키의 진료를 증오심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 저항할 듯한 모습을 보이고, 가격을 흥정하고 말다툼을 벌이면서도 결국 이 피하기 어려운 사태에 굴복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어제의 소부르주아 계급의 우상은 자본의 헌병으로 둔갑했다!”

 

 

파시즘의 역사적 위치를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대체물로 규정하려는 이 시도를 위해 공식 지도부는 사회파시즘 이론을 대치시켰다. 처음에 이 이론은 젠체하고 으스대지만 무해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다. 그 후의 사태는 스탈린주의 이론이 실제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전체의 발전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었다.

자코뱅주의, 민주주의, 파시즘의 역사적 역할로부터 소부르주아 계급은 끝까지 자본에게 맡겨진 도구에 머물러야 할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의 독재는 소부르주아 계급이 국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일련의 나라들에서 불가능하게 될 것이고, 소부르주아 계급이 유력한 소수를 대표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매우 곤란해질 것이다. 다행히 현실은 그렇지 않다. 파리코뮌의 경험은 처음으로 적어도 한 도시의 한계 내에서, 그 뒤 10월 혁명의 경험이 훨씬 더 큰 규모로, 그리고 비교도 안될 만큼 더 긴 기간에 걸쳐서 보여준 것처럼, 대자본가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과의 동맹이 확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독자적인 정책이 없기 때문에(이는 또한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 독재가 실현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중에서 선택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자본주의의 발생성장개화의 시기에 소부르주아 계급은 때때로 불만을 격렬하게 폭발시키면서도, 대체로 양순하게 자본주의의 마구(馬具)를 끌었다. 달리 어쩔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붕괴와 경제적 난국 상황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의 이전 주인과 지배자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시도하고, 분발하고, 노력한다.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노동자계급의 운명에 완전히 결부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 소부르주아 계급은 새로운 길로 사회를 이끌려는 노동자계급의 능력에 대해 신뢰를 길러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힘,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 적에 대한 능숙한 공격, 그 혁명적 정책의 성공에 의해서만 이 신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정당이 정세에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재앙이다! 노동자계급의 일상투쟁은 부르주아사회의 불안정성을 격화시킨다. 파업이나 정치적 소요는 나라의 경제 상태를 악화시킨다. 소부르주아 계급이 경험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이 소부르주아 계급을 새로운 길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를 경우에는, 더욱 더 심해지는 궁핍도 일시적으로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정당이 계급투쟁이 쉴 새 없이 더욱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에 뒤처져 몇 번이나 노동자계급을 결집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경우, 따라서 동요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가당착에 빠질 경우, 소부르주아 계급은 인내력을 잃고, 혁명적 노동자가 자신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민당을 포함하여 모든 부르주아 정당은 소부르주아 계급의 생각을 바로 이런 쪽으로 몬다. 사회적 위기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격화되면, 소부르주아 계급을 격앙시켜 그 증오와 절망을 노동자계급에게 향하도록 부추기는 것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는 특별한 정당이 무대에 등장한다. 독일에서 이 역사적 기능은 국가사회주의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국가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썩고 있는 부르주아사회의 모든 사악한 망상으로 구성된 광범위한 조류이다.

파시즘의 성장에 대해서 주요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사민당이다. 제국주의 전쟁 이래로 이 정당의 일은 오로지 독자적인 정책이라는 사상을 노동자계급의 의식에서 뿌리째 뽑아내는 것이었으며, 이들에게 자본주의의 불멸 신앙을 주입하고, 쇠퇴하는 자본가계급에게 몇 번이고 무릎 꿇을 것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를 새로운 지배자로 간주할 경우에만 노동자를 따를 것이다. 사민당은 노동자에게 하인이 되라고 가르친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하인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개량주의의 정책은 노동자계급에게서 소부르주아 계급의 평민적 대중을 지도할 가능성을 빼앗고, 따라서 소부르주아 계급을 파시즘의 대포 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정치적 문제는 사민당이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는 이 정당을 노동자계급 대오 내의 제국주의적 자본가계급의 앞잡이로 규탄해왔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의 이 새로운 방향 설정으로부터 제3 인터내셔널이 비롯되었다. 그 임무는 노동자계급을 혁명의 기치 아래 결집하는 것에 있었으며, 따라서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 피억압 대중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지도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전후, 다른 어느 나라보다 독일에서는 경제적 절망과 내전의 시대였다. 국내 상황뿐만 아니라 국제 상황도 이 나라를 가차 없이 사회주의의 길로 밀어냈다. 사민당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의 쇠퇴와 무기력, 정책의 반동적 취지, 지도자의 금전상의 무절제를 드러냈다. 공산당의 발전을 위해서 더 이상 어떠한 조건이 필요했는가? 게다가 처음 몇 년간 상당한 성공을 거둔 뒤, 독일 공산주의는 동요, 지그재그, 기회주의와 모험주의가 교대로 바뀌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중도주의 관료집단은 노동자전위를 체계적으로 약화시켰으며, 노동자전위의 지도력 아래 계급을 이끌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노동자전위가 소부르주아 계급의 피억압 대중을 지도할 가능성을 노동자계급 전체에게서 박탈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파시즘의 성장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책임을 노동자전위에게 지우고 있다.

 

 

3.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의 동맹인가, 양자의 투쟁인가?

 

도식의 형태로, 딱 부러지게 확립된 계급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계급 사이의 구체적 관계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현재, 독일의 대자본가계급은 동요하고 있다. 대체로 대자본가계급이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분명히 파시스트의 길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하기에 이른 대자본가계급의 일부는 이 움직임을 가속화시키고 싶어 한다. 다른 일부는 보나파르트주의적 군사경찰 독재에 의지하여 사태에 잘 대처해 나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 진영에는 바이마르 민주주의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분열하고 있다. 자신의 기치 아래 중간계급의 압도적 다수를 결집시킨 국가사회주의는 전체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 한다. 아직도 수백만 노동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소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 분파는 에베르트 모델을 따라 민주주의로의 복귀를 바란다. 그 사이에 이들은 보나파르트주의 독재를 적어도 수동적으로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민당은 다음과 같이 상상한다 . 즉 나치의 압력 때문에 파펜-슐라이허 정부는 자신의 좌익을 강화시킴으로써 균형을 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에 위기는 아마도 진정될 것이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아마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아마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광적인 압력을 늦출 것이다 - 따라서 신의 가호로 모든 것이 다시 제 자리를 잡을 것이다.

보나파르트주의 도당은 실제로 파시즘의 완전한 승리를 바라지 않는다. 이들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사민당의 지지를 이용하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노동자 조직을 관대하게 다루지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는 적어도 어느 정도 공산당의 합법적 존재가 허용될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사민당의 군사독재 지지는 불가피하게 노동자를 공산주의 대오로 밀어낼 것이다. 갈색 악마에 대항하는 지지 수단을 찾기 때문에 정부는 이내 적색 마왕의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공식 공산당의 신문은 사민당의 브뤼닝 묵인이 파펜을 위한 길을 닦았으며, 파펜에 대한 어중간한 묵인은 히틀러의 등장을 촉진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완전히 올바르다. 이런 범위 내에서 우리와 스탈린주의자 사이에 견해 차이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회적 위기의 시대에 개량주의의 정책은 대중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제는 개량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적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순간이 바로 지금 도래한 것이다.

히틀러는 슐라이허를 용인한다. 사민당은 파펜에 반대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장기간에 걸쳐서 유지된다면, 사민당은 보나파르트 체제의 좌익으로 둔갑하고, 우익의 역할을 파시즘에 맡기게 될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독일 자본주의의 전례 없는 현 위기가 결정적인 해결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즉, 노동자계급의 승리나, 파시스트 반()혁명의 승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배제되지 않는다. 만약 공산당이 어리석은 최후통첩 주의 정책을 계속하고, 이 때문에 사민당을 불가피한 붕괴로부터 구한다면, 만약 히틀러가 가까운 장래에 쿠데타를 결정하지 않고, 이 때문에 자기 대오 내에서 불가피한 붕괴를 일으킨다면, 만약 슐라이허의 몰락 이전에 경제적 위기가 상승세로 돌아서면, - 바이마르 헌법 48, 제국군대, 약간 저항하는 사민당, 약간 저항하는 파시즘의 보나파르트주의적 결합은 아마도 자활할 수 있을 것이다(어쨌든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분출 때까지).

그러나 당장은 사민당의 몽상적 대상(주제)과 이러한 조건의 적절한 충족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러한 일은 결코 보증되어 있지 않다. 스탈린주의자는 정말로 파펜-슐라이허 정부의 저항능력이나 지속성을 믿지 않았다. 모든 징후가 벨스-슐라이허-히틀러 3자 연합이 구체화되기도 전에 분열할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혹시 히틀러-벨스 연합으로 대체될 수도 있는가? 스탈린에 따르면, 양자는 쌍둥이지, 대립물이 아니다.’ 자신의 노동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민당이 자신의 관용을 히틀러에게 팔아넘기고 싶어 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히틀러는 이 상품이 필요하지 않다 : 그가 필요한 것은 관용이 아니라 사민당을 타파하는 것이다. 히틀러 정부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분쇄하고, 가능한 모든 노동자계급의 저항 기관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 파시즘의 역사적 역할이 존재한다.

스탈린주의자는 사민당을 지도하는 겁 많고 욕심 많은 소부르주아에 대한 단지 심리적인, 더 정확하게는, 도덕적인 평가를 말하는 선에서 그친다. 이 상습적인 배신자들이 파시스트 자본가계급과 관계를 끊고, 이들에 반대할 것이라고 정말로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관념적 방식은 맑스주의와 거의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맑스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이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처해 있는 조건과 이 조건이 겪을 변화에서 생기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석탄왕, 철강왕 등 대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적으로 많고 강력한 기구 형태의 당이 직접 획득할 수 있는 이득을 위해서 부르주아체제를 지지한다. 물론 파시즘은 부르주아체제를 조금도 위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존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체제를 방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시즘은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체제에서 수행하고 있는 이 역할과 이 역할 수행에서 얻는 소득을 위협한다. 스탈린주의자가 문제의 이런 측면을 잊고 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파시즘의 승리가 자신 , 즉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사민당 에게 미칠 치명적인 위험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3년 전에 우리는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에 따라 아마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임박한 정치적 위기의 출발점이 결정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가오고 있는 충돌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해버리는 사회파시즘 이론을 거부했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와 함께 그 기구의 주요 부분이 사태의 진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반()파시즘 투쟁에 나서게 될 것이고, 이것이 공산당의 향후 공격을 위한 유리한 출발점이 될 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때 대다수의 공산주의자, 이를테면 고용된 관료만이 아니라 매우 정직한 혁명가조차 도 사회민주주의를 이상화하는 것이라고 …… 우리를 비난했다. 우리는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맑스주의자에게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사고가 멈춰버린 사람들과 논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 중에 나는 종종 다음과 같은 사례를 인용했다 : 제정러시아의 유태인 자본가계급은 전체 러시아 자본가계급 중에서도 몹시 놀라 사기가 꺾인 부위를 대표했다. 그러나 자본가계급도 공격하지만 대부분 유태인 빈농을 향한 흑백인조의 유태인 대학살(pogrom) 때문에 유태인 자본가계급은 스스로 방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싸움에서도 유태인 자본가계급은 두드러진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유태인 자본가계급은 예를 들면, 혁명적 노동자와 학생의 무장을 위해서 상당한 금액을 모았다. 이런 식으로 무기를 갖추면 기꺼이 싸울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노동자와 궁지에 빠진 가장 겁먹은 부르주아 그룹 사이에 일시적인 실무협정이 성립되었다.

작년에 나는 반()파시즘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는 악당이나 그의 할미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레진스키와도 실무협정을 맺을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이 의견은 세계의 모든 스탈린주의 신문에 실렸다. 좌익반대파의 사회파시즘을 증명하는데 이보다 더 나은 증거가 필요한가? 많은 동지가 사전에 내게 이렇게 경고했다 : ‘그들은 이 문구를 붙잡고 늘어질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그들이 붙잡고 늘어지라고 쓴 것이다. 이 뜨거운 다리미를 붙들도록 내버려둬야 손을 델 것이다. 이 멍청이들은 교훈을 배워야 한다.’

투쟁의 추이는 폰 파펜이 그레진스키를 수감해야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 에피소드는 사회파시즘 이론이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예측에 따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완전한 모순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우리의 정세 판단은 이러한 만일의 사태를 염두에 두었으며, 일정한 상황을 추정했다.

그러나 일부 스탈린주의자는 이때 역시 사민당은 투쟁을 회피했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렇다, 사민당은 투쟁을 회피했다. 사회민주주의가 그 지도자의 주장을 뛰어넘어 독자적으로 투쟁을 시작할 것을 게다가 공산당 자신도 투쟁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 상황 아래에서 기대한 사람은 모두 당연히 환멸을 맛보아야 했다.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어떠한 환멸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진스키는 혁명의 호랑이로 둔갑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를 즉시 인정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레진스키가 자신의 요새에 앉아서 혁명적 노동자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경찰 파견대를 보내는 상황과 자본주의의 보나파르트주의적 구세주 그레진스키가 스스로를 수감하는 현 상황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이 차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여 이용하면 안 되는가? 

앞에서 인용한 예로 돌아가자. 자기 공장의 파업노동자를 때려눕히려고 차르의 경관에게 팁을 주는 유태인 공장주와 유태인 학살자들(pogromist)에 대항하는 무기를 입수하기 위해서 어제의 파업노동자에게 자금을 넘겨주는 같은 공장주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부르주아는 여전히 부르주아이다. 그러나 상황의 변화로부터 이해관계의 변화가 생긴다. 볼셰비키는 공장주에 대항하는 파업을 지휘했다. 나중에 이들은 같은 공장주로부터 유태인 대학살 반대투쟁을 위한 자금을 받았다. 물론 이들은 노동자들의 시대가 왔을 때, 그 무기를 자본가계급에게로 돌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은 사회민주주의 전체가 파시즘에 맞서 싸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일부 사민당 관료는 틀림없이 파시스트로 전향할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부위가 위기의 순간에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갈 것이다. 또한 사민당 소속 노동자 대중도 전부가 투쟁하지 않을 것이다. 사민당 노동자의 어느 부위가 언제 투쟁으로 견인될 것인지, 또 이들과 함께 당기구의 어느 부분이 투쟁에 참여할 것인지를 미리 추측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이는 공산당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포함하여 많은 사정에 좌우된다. 공동전선 정책은 싸우고자 하는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과 분리시키고, 망설이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고, 결정적으로 투항적인 지도자들의 권위를 노동자의 면전에서 실추시키고, 노동자의 투쟁역량을 높이는 것을 그 임무로 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목적 없이, 무의미하게, 추잡하게 낭비되었는가! 2년 사이에만도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는가! 독점자본과 그 파시스트 군대가 주먹과 곤봉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저항과 자위의 길로 내몰 것은 사전에 분명하지 않았는가? 이 예측을 노동자계급 전체 앞에 내놓고, 공동전선의 주도권을 잡고, 어느 새로운 단계에서도 이 주도권을 굳게 틀어쥐어야 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비명을 지를 필요가 없었다. 확실한 권력을 평화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과장해서 말하거나 옥신각신할 것 없이, 또한 약점을 드러내거나 양보하는 것 없이, 적의 다음 조치의 불가피성을 명확한 방식으로 정식화하고, 공동전선의 실천적 강령을 제기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만약 독일공산당이 레닌주의 정책의 기초를 흡수하고, 꼭 필요한 불굴의 노력으로 이를 적용했다면, 오늘 당이 얼마나 우뚝 서 있을 것인가!

 

 

 

옮긴이: 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