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헝가리 혁명: 1956년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8월호

헝가리 혁명: 1956년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13

헝가리 혁명: 19561

 

작자미상 


* 이것은 1956년에 일어난 거의 혁명에 가까웠던 사건에 대한 익명의 보고서다.

 

10월 이전……

 

그건 몽땅 한 짐의 똥이다. 정말 그렇다!”

 

1950년대 초반 헝가리 사회주의에 대한 이 정확한 묘사는 감옥에 있는 한 노동자의 것으로, 숙청 기간 갇혀 있던 어느 지식인 공산주의자가 엿들은 것이다. 한 노동자와 가진 흔치 않은 접촉 때문에, 나아가 노동자가 노동자 국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흔치 않게 접한 까닭에, 이 지식인은 맑스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었다. 헝가리에는 감옥에 관한 이런 속담이 있다. “우리 사회는 세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옥에 갔던 이들, 감옥에 있는 이들, 감옥으로 향하고 있는 이들이 그들이다.” 정치적인 이유로든 절도 때문이든 감옥에 갇힌 많은 노동자는 체제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1953년 헝가리를 자유화하려고 (즉 노동자를 억압적으로 묶어두려고) 모스크바가 권력을 위임한 힘없는 스탈린주의자 임레 나지조차 195512가장 걱정스러운 사실은 죄수들의 대다수가 산업 노동자라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사회주의 생활수준을 보상하려면 노동자에게 절도는 꼭 필요했다.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1949~53년 사이에 17~20%까지 떨어졌다. 철강원석이나 석탄연료를 전혀 갖지 못한 압도적인 농업국가에서 중공업과 제강산업에 몰두했던 바보 같은 ‘5개년 계획이 낳은 결과였다.

또한 뜻이 없는 농민들에게 협동을 강요하면서 그들의 보잘 것 없는 소득마저 뚝 떨어졌다. 1952년엔 헝가리 농업에서 최악의 산출량을 기록했다. 공식 통계들은 주민의 15%최저생활수준 위에 있는 반면, 30%는 그에 걸쳐져 있고, 55%는 그 이하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국영농장 노동자의 하루 급여로 빵 1kg을 살 수 없었다. 노동계급 가정 가운데 15%에서 담요를 갖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노동자 다섯 명 당 한 명이 겨울코트가 없었다.

이런 조건 아래서, 국가로부터 도둑질을 하고 체제를 타격하는 일은 생존을 위하여 하는 일이었다. 어떤 도덕적인 불명예도 그들에게 전혀 달라붙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빈곤을 줄이는 데 열중하였다. 좀도둑질과 자연발생적인 사보타지가 (때때로 기층 경영자들이 말썽꾼들을 제거하는 데 따른) 높은 이직률, 공장에서의 낭비, 비효과적인 계획, 터무니없는 생산 목표에 맞추려는 생산량 수치 조작과 함께 이루어졌다. 노동자는 헝가리노동자당(MDP)이 위대한 날들로 선정한 기념일들을 축하하기 위해 급여 지불 없는 연장노동을 해야만 했다. 직장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홈 비즈니스가 번창했다. 조선소에서는 구리를 훔쳤다. 부다페스트 병원의 한 구매담당자는 요즘엔 도둑을 잡아도 절도를 막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고 불평했다. 국영상점 직원은 친지들과 친구들을 제외한 고객들을 속이고 무게를 줄여 팔았다. 버터는 상점에서 거의 볼 수가 없었는데, 미리 포장되어 무게가 달리는 까닭에 속임수를 쓸 여지가 없으므로 상점들이 별로 주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절도를 넘어 무단결근 등으로 나아갔는데, 이를 헝가리노동자당 지도부는 게으름임금사취로 부르곤 했다.

1953년 메이데이 공식 행진에서 세 번째 깃발은 우리를 자유, 사회주의, 평화로 인도하는 별, 불멸의 스탈린에게 영광을이라고 찬양했다. 7주 후에 동베를린 노동자가 그들의 자유를 꿈꾸며 항쟁에 나섰으나, 러시아 탱크가 신속하게 진압했다. 부다페스트 세펠(Csepel) 지구에 있는 라코시 철강공장 노동자 2만 명이 낮은 임금, 과도한 생산량, 식량 부족에 항의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디오스기오르에서 비공인 파업이 터졌고, 나라 전체에서 거대한 농민 시위가 벌어졌다. 사태가 더 진전되는 것을 막으려고 러시아는 지도부 교체와 정책 변화를 명령했다.

스스로 자신을 스탈린의 헝가리인 제자라고 불렀지만 헝가리 노동자한테는 똥구멍으로 더 널리 불린 마챠스 라코시는 임레 나지를 위해 길을 열어주도록 요구받았다. 임레 나지는 일련의 숙청과 1940년대 후반에 널리 행해진 테러에 관여하지 않았다. 19536월 하순에 윤곽이 잡힌 그의 새로운 길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부과된 짐을 줄이고, 수용소를 폐지하며, 경제를 중공업 분야로부터 생활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설계되었다. 라코시와 에르노 게로 주변의 강경 스탈린주의자들이 그를 반대했었기 때문에, 나지는 대중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물로 일부에게 비쳐졌다. 사실 그는 다른 이들과 매우 비슷했다. 스탈린이 죽은 이후 나지는 스탈린이 모든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지배한 시기 전체는 시행착오의 시대였는데도 말이다. 1954년 후반, 나지는 우리는 새로운 나라, 그리고 인민을 위한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느꼈다. 반면 라코시와 게로는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너무 높다고 주장했다.

나지는 최악의 스탈린주의 인물들 일부를 제거하면 자유로운 삶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자유주의앞에서 노동자의 무단결근, 무질서, 태만은 훨씬 더 심각해졌다. 그 시절 나지의 전형적인 연설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3분기 생산 실적은,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에 경의를 표하며 일어났던 혁명적 전환처럼 노동자의 추진력이 그런 열정과 활력을 갖고 발휘된다면, 그리고 경영자들과 노동자가 (여전히 파멸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동규율과 생산에서 그런 정도의 개선을 얻을 수 있다면, MAVAG는 최상급 공장들 가운데서도 빛나는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아무리 많은 말을 늘어놓아도 이런 연설에 담긴 솔직한 자본주의적 내용은 덮을 수 없다.

노동자의 냉소주의는 작업장 밖으로 확산되었다. 195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절대강자헝가리가 서독에게 패한 다음 사흘 동안 폭동이 일어났다. 경화(硬貨)를 위해 경기를 내던져버렸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맞선 어떤 종류의 경기도 문제가 없는 경우가 드물었다. 헝가리노동자당은 나지의 새로운 길을 설명하기 위해 1953년 내내 나라 전역으로 지식인들과 작가들을 보냈다. 그들 대부분은 농민과 노동자가 처한 끔찍한 조건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고되게 일하는 대중<Literary Gazette>(문학신문)를 읽거나 사회주의 건설에 나설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1953년에 노동자는 체제를 분쇄하고 그것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체제를 증오했다.”

노동자는 이것을 그들 스스로 표현했다. “노동자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에게 약속한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너무 자주 그들의 약속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붉은 별 트랙터> 공장의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 아래서, 우리는 헝가리를 지배하는 한 주체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저 공장의 밥으로 여겨졌다.” 다른 노동자가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장은 당신들의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모든 공장들과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정확히 그 반대가 진실이다.”

학생들 가운데 농민과 노동자의 자식들은 그들의 마음을 말할 각오가 가장 되어 있었다. 그들은 중간계급 자식들보다 더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 토론에는 별로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식량부족 같은 구체적인 문제들에 몰두했다. 환멸과 반()공산주의가 헝가리 청년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우리는 정치적인 주제들에 대해서는 덜 말한다. 하지만 만일 말을 한다면, 러시아인들에 대해서 저주를 퍼붓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 “우리는 겁에 질리지 않은 첫 번째 세대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또한 우리는 평생 동안 이것을 참아낼 수는 없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불만과 노동자의 저항은 1956년이 되기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195312월 미 대사관 육군 무관이 내린 판단은 이런 것이었다. “헝가리에는 어떤 조직된 저항 그룹도 없다. 주민들은 이제 현 정권에 활기차게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슷한 태도를 갖고서 러시아 지도자 흐루시초프는 만일 그가 지금 당장 헝가리 작가 10명을 총으로 쏴 죽인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봉기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Literary Gazette>에 도착한 한 독자의 편지는 지식인들의 토론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불평했다. “노동계급은 지금도 앞으로도 정치적으로는 늘 수동적일 것이며 그렇게 머리 터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좀 더 날카롭게 내다본 유고슬라비아의 한 정치 분석가가 있었다. 그는 봉기 9일 전에 이렇게 말했다. “민중은 기존의 방식으로 살기를 거부한다. 지도자들 또한 기존의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다. 봉기를 위한 조건들이 창출되었다.” 국가보위부(AVH)는 분란의 징조를 느끼고 헝가리 주둔 러시아 군대와 함께 1023일보다 5일 전에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공산주의 작가들과 지식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혁명에서 그들의 지도적인 역할이 예상되었다. 지식인들의 강령은 단지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들의 토론 클럽인 페테피 서클은 질서정연한 개혁과 지도부 교체를 원했다. (스탈린주의자 라코시와 게로가 나지를 대체하여 권력으로 되돌아오면서 공적 생활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기 때문에). 페토피 서클은 봉기를 고무하지 않았다. 성급한 행동은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노동자가 보기에 그들은 공산주의자이며 체제의 지지자였다. 이러한 종류의 반대는 헝가리노동자당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지길 선호하며 시위에 확실히 반대하는 것으로 나지가 그 초점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봉기에 반대하고 나섰다. 두 저널리스트는 1023일 군중이 백치처럼처신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귈라 헤이라는 한 작가는 누가 선동에 나서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볼 수 있었다. “청년들 사이에 자유의 정신을 깨우친 이는 내가 아님을 나는 전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반대로 청년들은 자유를 향해 나를 밀어붙였다.” 노동자는 19569월 중순 작가연합 회의가 스탈린주의자를 낙선시켰을 때, 작가들이 밀어붙이고 있던 것에 대해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 회의를 다룬 <Literary Gazette>1시간 반 만에 7만부가 팔렸다. 당국을 그렇게 격퇴한 것은 이제 흥미로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숙청에서 희생되었다가 복권된 공산주의자 라즐로 라직을 무덤에서 다시 파내 매장한 행사는 노동자가 한 무더기로 시위에 나서는 기회로 이용되었다. 106일 비가 오는 가운데 대략 20만 명이 참여했다. 한 관찰자는 아마 만일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날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으로 라직과 라코시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다만 개인적인 경쟁 때문에 라직이 티토주의 파시스트로 재판 받고 처형되었을 뿐이었다. 라직의 복권에 대한 노동자의 지지는 순전히 상징적인 것이었다. 동전의 다른 한 면에서, 한 고위급 공산주의자는 만일 라직이 이 군중을 볼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 기관총을 겨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2~300명의 학생들이 우리는 중도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분쇄되어야 한다.”고 매장에 이어 외쳤다. 학생들이 이렇게 외치는데도 경찰들은 제지하지 않았다. 모든 종류의 시위는 공식 행사의 일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23

 

필연적인 운명을 점화시킨 사건은 학생들이 만들어 냈다. 1016, 세게드 학생들이 공식 조직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조직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나라 전체로 대표자들을 보내 비슷한 행동에 나서라고 용기를 북돋웠다. 22일까지 대다수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비슷한 그룹들이 만들어졌다. 폴란드에서 일어난 사건 소식이 부다페스트까지 전해졌다. 폴란드 공산당이 아래로부터 압력을 받아 지도자를 교체하자 소련 군대가 바르샤바를 포위했다. 부다페스트 전문대학 앞에서 회합이 열려 16개 항의 요구를 내걸고 23일 행진을 하기로 결의했다. 여기에는 자유를 향한 폴란드 투쟁에 대한 지지, 소비에트 군대의 철수, 헝가리노동자당 간부들에 대한 선거 실시, 임레 나지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 총선거,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방향에 따라 헝가리 경제생활의 완전한 재조직화”, 파업의 권리, “산업생산 목표를 실질적인 수준으로 전면 수정하고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정당한 필요에 맞추어 급여를 즉각 대폭 조정할 것”, 자유로운 신문과 라디오 등이 포함되었다.

이 뒤섞인 요구 묶음은 기존 체제에서 제기된 바가 없었고, 그래서 그 폭발적인 잠재력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요구들 아래 놓인 것은 나쁜지도자들이 잘못해 온 것을 대신 선출된 좋은지도자들이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너무 흔한 환상이었다. 학생들이 노동자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도중에는 순진함이라는 요소까지 혼합되었다. 노동자에게 파업은 하지 말아달라고 한 것이다. 그들은 그저 조용한 행진을 원했다. 내무부 장관은 행진을 금지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행진을 하기로 결심했다. 행진이 아랑곳 않고 강행되자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행진은 학생들이 원했던 대로 조용하게 시작되었지만, 4시 이후 아침 조 노동자가 결합하자 보다 전투적으로 되었다. 처음에 폴란드에 대한 지지로 시작했던 구호는 자유를 향한 외침과 러시아인들은 물러가라는 외침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국기에서 공산주의 상징을 오려내면서 혁명의 깃발이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빨강·하양·초록의 세 줄 깃발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터를 떠나 시위에 가세했다. 그들의 참여를 막는 이는 없었다. 병사들도 동조적이었고 그래서 그들도 가세했다.

해가 저물 무렵, 의사당 광장에는 (부다페스트 전체 인구의 1/6쯤 되는) 20만 명이 모였다. 정부당국이 등을 끄자 신문과 정부 인쇄물을 불태워 어둠을 밝혔다. 군중은 임레 나지가 그들에게 연설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나지가 모습을 나타낼 무렵, 분위기는 조용히 연설 들을 수준을 넘어가 버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과 구멍 뚫린 깃발을 보고 소름이 끼친 나지는 동지들!’이라는 단어로 말을 시작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는 더 이상 동지가 아니다!”는 야유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민중은 이미 스탈린주의자들만이 아니라 헝가리노동자당(MDP) 전체를 거부했다. 그리고 반대파인사들은 너무 온순했다. 나지에 대한 실망은 파업에 대한 긍정적인 대화로 넘어갔고, 한 무리의 청년들은 라디오 방송국 건물을 향해 행진했다.

8시 에르노 게로가 공식 방송에 나와 말했다. “우리 청년들에게 국수주의라는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과 우리 국가가 노동자에게 민족적 시위를 조직하도록 보장한 민주적 자유를 이용하려는 자들을 우리는 비난한다.”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라디오 방송국 바깥에 있던 군중은 진입을 요구했다. 거리에서 마이크를 가지면 민중은 자신의 주장을 표현할 수 있다.” 국가보위부(AVH)는 대표자들을 라디오 방송국 사장 벵케 여사에게 안내했다. ID 카드를 확인한 그녀는 그들이 먼 곳에 있는 기계공장과 군수공장에서 온 노동자들임을 알았다. 부다페스트 경찰총수 코팍시는 시위중인 몇몇 청년들을 집어 물어보았고 그래서 그들이 공장 노동자가며 일부는 당원임을 알았다.

대표자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자, 라디오 방송국 건물을 둘러싸고 공방이 시작되었다. 9시 무렵 첫 번째 사격이 있자, 많은 이가 죽거나 다쳤다. 군중은 국가보위부(AVH)의 첫 사격이 있기 전에 이미 동조하는 경찰과 군대로부터 확보한 무기들을 갖고 있었다. 소식이 퍼져 나가면서, 노동자는 무기고에서 더 많은 무기를 가져 왔다. 이제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 관찰자에 따르면, “부다페스트 노동자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스탈린 동상 앞에서였다.” 군중이 동상을 무너뜨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두 노동자가 산소아세틸렌 절단기를 가지고 와서 동상을 잘라냈다. 신발은 받침대에 그대로 남았다. 헝가리 병사들은 친구이자 동맹자로 군중에게 환영받았다. 노동자가 세펠에서 탄약을 화물차에 싣고 도착하고 있었다. 무기 공장들이 급습당하고 전화교환소가 접수되었다.

당국은 부근 병영에 있는 공병들에게 연락을 취해, 파시스트들이 정부에 맞서 봉기했다고 말했다. 일부 공병들은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노동자들을 만났다. 더 많은 공병들은 헝가리노동자당 중앙위원회 본부 건물을 지키기 위해 도착했다가 처음으로 호화스런 시설물을 보게 되었고 군중이 평범한 헝가리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병영으로 되돌아가 군복을 벗어던지고 혁명 평의회를 선출했다. 밤이 깊어지자 구경꾼들은 무대를 떠났지만, 세펠과 우지페스트에서 온 무장한 노동자는 자리를 지켰다. 라디오 방송국을 둘러싼 전투는 밤새 계속되었고, 마침내 아침 9시에 접수되었다.

헝가리 봉기의 대중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은 몇 시간 안에 수립되었다. “헝가리 봉기는 몇 백만 남성과 여성의 직접적인 경험이었으며, 그러므로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파리코뮌이나 다른 대중봉기와 아주 닮은 것이었다.” 병원에서 집계한 사상자 명단은 대부분의 전투를 치른 이들이 특별히 젊은 노동자가었음을 보여준다. 한 의사의 말이다. “전사들 가운데에는 페토피 서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거나 그런 문제들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며 고물카의 이름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에게 왜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서는 모험을 했냐고 물어보면 글쎄요, 한 달에 600포린트를 벌려고 사는 게 정말 가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고 대답했다.” 한 학생도 같은 점을 주목했다. “혁명 기간 무로부터 도덕을 창조한 이들은 축구팀 페렝크바로스의 열성 팬들이었다는 점이 가슴에 남는다.”

시위대들은 그들이 왜 싸우는지를 알았다. “우리는 안락한 생활이 아니라 자유를 원했다. 비록 빵과 다른 생활필수품들이 부족할지라도 우리는 자유를 원했다. 우리 젊은이들은 특히 거짓말에 둘러싸여 커야 했기 때문에 특히 고통스러웠다. 우리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야 했다.” 봉기의 성격은 지도부없이 명확한 방향을 가졌다는 점에서 뚜렷했다. 봉기를 조사한 UN 위원회는 헝가리 철학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들었다. “헝가리 혁명에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독특하다. 봉기는 조직된 것이 아니었다. 봉기는 집중된 방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자유를 위한 의지는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었다.” 같은 점을 두 전사가 잘 말한다. “어떤 형태의 조직도 없었다. 그러므로 규율도 따로 없었다. 그러나 놀랄 만큼 훌륭하게 협력이 이루어졌다.” “일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싸우다가 집으로 가고 나면, 다른 이들이 와서 전투를 계속했다.”

반란자들이 처음으로 한 일은 다른 무엇보다 전화교환소 장악, 화물차 징발, 주유소·병영·무기고 습격, 무기·탄약 확보 등이었다. 이어서 24일 오전 4시를 갓 넘어 부다페스트에 진입한 소련 탱크에 맞서기 위해 바리케이드와 화염병을 만들었다. 러시아 군대는 밤새 비상회의를 가진 헝가리 정부당국이 형제적인지원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행동에 돌입했다. 일부 바리케이드들은 도로 포장한 돌들을 여성과 어린이들이 손으로 깨부숴 만들었다. 반란자들은 좁은 거리와 통로에 자리를 잡았다. 코빈 통로에 있던 이들은 가까이 있는 석유펌프로 자기 자리를 잡았다. 날이 새자, 캘빈 광장에 있던 노동자는 다섯 대의 탱크와 맞닥뜨렸으나 도망가지 않았다. 대중들의 지원은 즉각적이었다. 무기를 든 반란자들은 음식을 구하거나 숨을 곳을 찾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병사들은 그들 스스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동안 반란자들에게 무기를 넘겨주었다.

 

 

부다페스트의 13

 

사건들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봉기를 파시스트의 반혁명 행동이라고 불렀다. ‘온건한공산주의자들은 나지를 원했지만, 동시에 질서회복을 원했다. 필요하다면 러시아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작가들의 역할은 그들의 요구를 능가해버렸기 때문에 이미 끝났다. 학생들 또한 그들이 촉발한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24일 일하러 갔다. 오전 430, 모든 시위를 금지하는 공식 성명이 나왔는데 파시스트와 반혁명 요소를 언급했다. 8시 직후 나지가 총리로 선언되었다. 15시간만 빨랐어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겠지만, 지금부터는 당국의 행동들이 발전하는 사건들의 뒤에 있었다. 30분 뒤에 나지는 온건한공산주의자가 어떤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총을 들고 다니면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소련 부대 안에서 정부를 소집했다. 이후 그의 프로그램은 반란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

소련 군대가 개입하면서 봉기는 전국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헝가리 군대가 처음 몇 시간 동안 취했던 것과 같은 동정적인 중립의 태도는 이제 대체로 반란에 대한 활기찬 지지로 대체되었다. 소련 탱크들은 청소년 전사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2차 대전 때 독일군을 상대로 싸웠던 소련 레지스탕스를 칭송하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바로 그 유격전 기술을 사용했다. 헝가리 사람들이 러시아의 사례를 그렇게 열심히 배운 것은 드문 경우였다. 탱크에 맞선 전술에는 도로에 깔린 조약돌을 걷어 낸 다음 도로를 비누로 덮거나, 도로 위에 기름을 끼얹는 것도 포함되었다. 물비누는 모리츠 지그라운드 광장에서 사용되었다. 체타 광장에서는 당 가게에서 가져온 비단 뭉치들에 기름을 덮어 펼쳐 놓았다. 소련 탱크들은 그 위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고, 꼼짝없이 화염병의 목표물이 되었다. 어린이들은 탱크로 달려 올라가 운전석 앞 창문을 잼으로 덮어버렸다. 일부 반란자들은 탱크를 부수기에 충분할 만큼 가까이 다가가려고 일부러 뛰어들기도 했다.

열세 살 먹은 소녀가 화염병 세 개로 75톤짜리 탱크를 때려잡는 모습도 있었다. 킬리안 막사에서 빈의 한 기자는 사흘 낮밤으로 기관총을 들고 홀로 교차로를 막아낸 또 다른 열세 살짜리를 만났다. “러시아인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젊은 군중에 맞닥뜨리고 있음을 느꼈다. 학생들, 견습공들,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 죽을지 살지 관여치 않았다.” 어린이들이 싸우다 죽는 장면을 목격한 스위스 기자는 이렇게 썼다. “만일 언젠가 헝가리의 영웅들을 기념할 때가 온다면, 이름 없는 헝가리 어린이들에 대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한 화학 엔지니어는 빈 병을 들고 있는 몇몇 어린이들을 보았다. 그는 그들에게 석유보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들 모두가 학교 실험실로 몰려갔고, 거기서 그는 그들에게 병 폭탄 백 개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니트로글리세린을 합성해 주고 집으로 갔다. 열두 살 어린이는 총 쏘는 법을 배웠고, 나이든 남성들은 수류탄 쓰는 법과 탱크 공격하는 법을 반란자들에게 교육했다.

한 공군장교는 게릴라 전술 사본을 여러 부 타이프로 쳐 냈다. 주의 깊게 선발되고 아마도 정치적으로 세뇌 받았을 장교들 다수가 반란자들 편으로 넘어갔다. 장래의 엘리트, 페토피와 즈리니 사관학교 생도들도 러시아에 맞서 싸웠다. 반란이 끝난 후에 군대는 다수의 장교들과 사관생도들을 제거하면서 재조직되었다. 경찰도 일반적으로 동조적이었다. 오직 국가보위부(AVH)만이 러시아 편에 서서 싸웠다. 국가보위부는 (노동자는 1949년 이전 이름인 AVO로 부른다) 35천 명의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자는 최악의 고문기술자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들보다 세 배가 넘는 기본 급여를 받았으며, 추가로 보너스까지 받았다. 그들만의 전용 상점, 발라톤 호수 근처 휴양촌을 갖고 있었다. 많은 헝가리인들은 국가보위부로부터 심야에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 열병’(bell-fever)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쫓기는 것은 국가보위부였다. “보안요원들은 평화의 시기에 폭압을 펼치고 비무장 군중에게 총을 쏘기도 했지만, 민중의 봉기에 직면하자 무력해졌다.”

국가보위부는 1029일 오후에 폐지되었다가 러시아의 침략 이후에 부활했다. 봉기 이틀 전인 21일부터 국가보위부는 갖고 있던 파일들을 파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보위부 요원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한 살해는 보통 단호하고 엄숙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틀림없이 국가보위부는 군중이 그들을 죽인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수년 동안 살해했다. 이러한 사실과 혁명 동안 지속된 국가보위부의 잔인함이 있었지만, 대다수 반란자들은 린치를 비난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작업 속에서, 그처럼 과거 방식을 모방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죽은 국가보위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지는 않았다. 한 헝가리인은 폴란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믿어라. 우리는 잔인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사람들까지 가엾게 여길 수는 없다.” 거리에는 국가보위부 사람들의 시체가 놓여 있거나 매달려 있었는데, 입 속에 쑤셔 박히거나 가슴에 꽂힌 지갑 속에는 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비록 가난하지만 자존심 있는 헝가리인들은 아무도 그것을 만지려 하지 않았다. 반란이 분쇄된 후에, 헝가리 당국은 희생된 보안요원 수가 234명이라고 밝혔는데, 그 상황 속에서는 매우 낮은 수치였다.

군중은 계속해서 구체제의 상징들을 제거해 나갔다. 붉은 별들이 파괴되었다. 헝가리노동자당(MDP) 신문인 스자바드 네프 건물 앞에서 기자들은 봉기를 지지하는 리플렛을 창밖으로 뿌렸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읽지 않고 찢고 불태워버렸다. 그들이 거짓말로 살아온 세월 때문에 아무도 지금 그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 서점과 소비에트 서점이 약탈당해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저작들이 쌓인 채 불붙여졌다. 총파업이 나라 전체로 번져 나가면서 헝가리노동자당을 당황하게 했다. 당은 매우 자주 서구 노동자의 파업들을 칭송했다. 이제 헝가리 노동자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에 반대하면서. 국가보위부대가 대부분 비무장인 군중에게 발포한 뒤 의사당 광장과 당 본부 앞에서 전투가 격렬해졌다. 쓰러진 반란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검은 깃발이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아직 당국의 수중에 있던 라디오 부다페스트는 이렇게 위협했다. “만일 파괴와 암살이 계속된다면, 일요일에 예정된 헝가리와 스웨덴의 축구 경기는 취소되어야만 할 것이다.” 눈앞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기에 라디오 방송국의 성명은 이제 일부러 웃기려고 하는 것처럼 들릴 뿐이었다. 투쟁조직들이 도시 전체에서 계속 만들어졌다. 스제나 광장을 장악한 무장 세력은 전략과 전술을 토론하기 위한 열린 민주적 회합들을 개최했다.

25일 정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터로 복귀하라고 요구했다. 이 호소는 무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폭넓게 무시되긴 했지만) 통행금지가 끝났음을 뜻했기 때문에 추가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사태전개를 이해하고 사건들을 토론하려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하러 갈 생각이 없었다. 나지의 내각 개편, ‘양보’, 성명들은 점점 더 부적절했고, 늘 너무 천천히 너무 느리게 되어서 반란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거리의 민중은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좌파 학자 게오르기 루카치가 내각에 들어갔다. 26일 루카치는 라디오 방송에서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헝가리 민중의 위대하고 오랜 성취에 걸맞는 사회주의 문화다.” 그러나 곳곳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사회주의 문화를 해체하고 있었다.

작가들은 빠르게 포기하고 있었다. 가버 타네소스는 총들이 불을 뿜는 동안에는” (그가 마음속에 둔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어떤 진보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일찍이 25일 귈라 헤이는 선언했다. “우리는 평화적인 수단으로 즉각 되돌아가야 한다. 전투는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 평화 시위라 할지라도 이제는 하지 말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비타협성이 부족한 지식인들은 노동자들 뒤에 있었지만, 모든 지식인들이 그렇게 비겁한 것은 아니었다. 29일 몇몇이 나지에게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라고 말했다. 나지는 그러한 제안을 받고 지금 그것은 정말 불가능하다. 다수 노동자는 믿을 수 없다고 답하면서 몸을 사렸다. 나지는 공산당 통치 12년의 역사적이고 영원하며 지울 수 없는결과들을 언급하며 연설했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마주치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헝가리노동자당(MDP)의 약속은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반란자들은 이미 그것을 거부했다. 그들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에 기초해서, 헝가리인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이라는 속임수를 폭로하고 있었다.

소련 군대에게 떠나라는 요구는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란자들과 소련 군대 사이의 전투는 국가보위부와 충돌할 때처럼 격렬하지 않았다. 죽음을 당하거나 신체가 잘린 소련 병사는 없었다. 반대로 소련 병사들도 반란자들에게 복수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련 병사들은 평화적인 주둔지 주변의 주민들에게서 총격을 당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총격을 가하려 하지도 않았다. 탈영이 얼마간 있었는데, 특히 소련 소수민족 출신의 병사들 사이에서 있었다. 한 아르메니아인 소령은 24일 반란자들 편으로 넘어온 후 사격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전단을 소련 병사들에게 뿌리기도 했다. 일부 반란자들은 소련 군대와 싸우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전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서 있는 우크라이나 소년 농민에게 총을 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또한 우리 못지않게 우리가 맞서 싸우는 것을 증오해야 할 많은 이유를 갖고 있을 텐데 말이다. 혁명을 하고 있는데 진정한 적과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쓰라린 충격이었다.”

반란자들이 진정한 적과 대결하여 패퇴시키려고 싸우는 동안, 구 체제의 희생자들이 자유를 되찾았다. 26일 세펠에 있는 경찰 건물이 습격당했고, 그곳에 있던 수감자들이 석방되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수천 명이 석방되었고, 나라 전체 감옥에서 약 17,000명이 석방되었다. 가장 흔한 죄목은 단순 절도였다. 경찰 수장 코팍시는 모든 정치범들과 첫날부터 잡혀 온 투사들이 싸울 수 있도록 부다페스트 시 경찰본부에서 석방해 주었다. 이것 때문에 그는 1958년 무기징역을 받았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부다페스트 인근의 노동계급 주거지와 산업지구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농부들은 반란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빵, 밀가루, 채소를 실은 화물트럭이 도시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려고 일했다. 빵 굽는 이들은 반란과 파업 기간 내내 반란자들과 파업 노동자가 먹을 수 있도록 하려고 일했다.

배고픔과 결핍이 있었으나, 도시에는 약탈이 전혀 없었다. 유리창이 깨진 상점들에는 상품들이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라디오와 소련 언론이 약탈에 관해 이야기한 후, 그런 상점들에는 이런 표지판이 나붙었다. “우리는 이렇게 약탈한다.” 다른 대중적 슬로건, 고철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노동청년연맹이 북한의 전쟁노력을 지원하려고 금속을 수집하던 한국 전쟁 시절에 등장한 것인데, 이제 불타버린 소련 탱크 위에서 더 적절하게 다시 등장했다. 몇몇 북한 학생들은 (그리고 몇몇 폴란드 학생들은) 반란자들에 결합함으로써 우애를 되돌려 주었다.

헝가리노동자당(MDP)이 붕괴하고, 산업 노동자들, 농민들, 화이트칼라들이 단결하면서, 정부는 27일에 이르러 힘을 잃게 되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혁명적 노동자평의회로 이동하고 있었다. 파업을 호소한 것은 바로 이 평의회들이었으며, 노동자는 실질적으로 자신들로부터 나온 것이었기에 이 호소에 복종했다. 마찬가지로, 일터로 복귀하라는 호소를 평의회가 내렸을 때도 받아들여졌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가 지배계급이라고 말해 왔지만, 평의회들을 통해서 이제 노동자가 그것을 현실로 만들고 있었다. 노동자평의회가 공장에서 공장으로 구역에서 구역으로 확산되어 나가자,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음을 깨달은 전국노동조합평의회는 자신의 강령에 있는 평의회 흔적을 갖고 노동자평의회를 선전함으로써 사태전개를 선점하려고 시도했다. 노동자는 아직 그런 모임에 모습을 나타냈으나, 노동조합 관료들을 거부하고 자신들 가운데서 대표자를 선출했다. 그래서 헝가리노동자당(MDP) 당원들은 진짜 평의회에 침투하라고 재촉당했다. ‘진실이라는 이름의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해서, 평의회들과 계속 접촉했다. 평의회들에서 온 대표자들은 끝없는 요구들을 갖고 나지 정부를 괴롭혔다. 가장 흔한 두 가지 요구는 헝가리의 중립과 바르샤바 조약 탈퇴였다.

바르샤바 조약 동맹들 가운데 체코, 동독, 루마니아 공산당들은 특히 맹렬하게 반혁명을 비난했다. 자기 나라의 노동자 계급 또한 자신들과 결판을 보려고 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을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려고 헝가리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있던 러시아는 자기 혼자서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공식 선언을 했다. 그 요란한 문구들은 물론 의미 없는 것들이었지만, 다가오는 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태 분석을 포함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렇게 바라보았다. “헝가리 노동자는 인민민주주의 질서의 기초 위에서 위대한 전진을 성취한 다음, 경제 체제에서 심각하게 부적합한 부분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점, 민중의 물질적 복지를 더욱 더 개선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 국가기구 안에서 관료적 월권에 맞선 전투를 심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정당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반동 세력과 반혁명 세력이 노동자의 불만을 헝가리 인민민주주의 체제의 기초를 허물어뜨리고 지주들과 자본가들을 권력으로 복귀시키는 데 활용하려는 목표를 갖고 재빠르게 바로 이 노동자의 진보적인 운동에 결합하였다.” 완전히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경제체제 자체를 제거하고 국가기구를 분쇄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유일하게 반혁명적인 세력은 소련 자신과 헝가리노동자당 안에 있는 그 지지자들이었다.

반란자들은 매우 분명하게 자본주의 복구를 원하지 않았으며, 다시 출현하고 있던 정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농당 지도자 벨라 코박스는 이렇게 말했다. “귀족들, 은행가들, 그리고 자본가들의 세계를 다시 세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세계는 확실히 가버렸다.” 마찬가지로 민족농민당 지도자 페렌크 파르카스는 말했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성과물과 획득물을 간직해야 한다.” 심지어 가톨릭당 지도자 엔드레 바르가 또한 시계를 뒤로 돌리는 데 아무런 뜻이 없었다. “우리는 1945년 이래 실현되어 온 사회적 승리의 유지를 요구한다.” 민중은 이런 옛 정당들의 재출현이 혁명의 단결을 침해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일당체제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들에게 관용적이었다. 그런 당들을 허용한다는 것이 그들에 대한 어떤 큰 환호를 표현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헝가리노동자당이 권력을 잡고 한 일이 있었지만, 어떤 노동자도 사적 자본가가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뿐인 집단 소유가 실제로 그들의 것이 되기를 원했다. 어떤 농민도 지주가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제적인 협동이 아니라 자발적인 협동을 원했다. 당이 붕괴하면서, 당원들은 당원증을 불태웠다. 한 당원은 그의 당원증을 다음 문구와 함께 벽에 붙여 놓았다.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증거. 이것이 당신에게 교훈이 되게 하라.” 헝가리노동자당(MDP)은 자신을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MSzMP)으로 다시 조직했다.

봉기 기간 동안에 출현했던 20여 개의 새 신문 가운데 우파는 하나도 없었다. 발간하려고 해도 식자공들이 그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신문들은 보통 인쇄된 4쪽 또는 스텐실 1장이었다. ‘진실은 가장 대중적이었는데, 노동자평의회들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벽들은 신문들과 다른 알림들로 뒤덮였다. 헝가리노동자당 지도자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기사가 널리 읽혔다. 민족주의는 거의 없었으며, 반유대주의는 전혀 없었다. 소련 장갑차가 당 신문을 배포했지만, 민중은 내용을 전혀 보지도 않고 덩어리째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소련 군대가 부다페스트 주위로 배치되자, 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한 모금통이 거리에 남겨졌다. 아무도 돈으로 가득 찬 이 통들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이런 알림이 나붙었다. “우리 혁명의 순수함은 우리에게 이런 모금방식을 쓸 수 있게 해 준다.” 수도의 시장 호제프 코바고는 도시 전체에 도둑들조차 그들의 직업을 포기하게 할 만큼 숭고한 감정이 넘쳐흘렀다고 말했다. 소련탱크의 잔해 위에 누군가 소비에트 문화라는 단어를 휘갈겨 놓았다. 코빈 도로에서 한 소녀 전사는 수천 명에게 말했다. “지금 나는 역사를 배우는 대신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헝가리 전역으로

 

헝가리인들은 단지 부다페스트에서만 역사를 만들고 있지는 않았다. 공단과 농촌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은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빠르게 따라잡았다. 1023일 바로 그날, 데브레센에서는 붉은 별들이 이미 건물과 지방전차에서 제거되었다. 체게드에서 군중은 소련 상징물들을 파괴했다. 미스콜크에서는 몇몇 러시아인들이 공격받았고, 군 참모차량이 강 속으로 처박혔다. 세글레드에서는 5천여 명이 봉기에 결합하면서 경찰이 무장해제 당했다. 헝가리 땅에서 소련 군대가 철수하라는 요구를 로바스의 석유 노동자들, 바링카의 광부들, 촘바델리의 자동차정비 노동자가 내걸었다. 모든 곳에서 노동자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있었고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24일 기오르에서 작은 시위를 벌인 공장 노동자는 공장에서 붉은 별을 떼어내고 소련 전쟁 기념물을 파괴했다. 그들은 감옥 문을 부수고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그들은 수감자의 직업 리스트를 발견했는데, 운전사, 노동자, 웨이터, 기술자들이었다. 국가보위부가 나타나서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네 명이 죽고 그 이상이 부상당했다. 다음날 지방 경찰과 군대가 혁명에 가담해 국가보위부를 항복시켰다. 지방 소련군 사령관은 압제적인 지도자들에 맞선 봉기는 정당하다고 말하면서 부대를 철수시켰다. 26일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노동자평의회와 전국 혁명적 평의회가 수립되었는데, 주로 노동자들로 구성되었고 일부 헝가리노동자당 당원들도 있었다. (‘전국은 헝가리 전역이 아니라 지방 촌락을 가리킴) 이 평의회들은 항상 개회되어 있었다. 그들은 반란자들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통치하고 있었다. 지방 라디오는 반란자들의 수중에 있었는데, 28일 바르샤바 조약의 폐지를 요구하고, 임레 나지가 부다페스트 노동자와 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3만 명의 광부들이 이 요구들을 갖고 파업을 벌였다. 지방 노동자평의회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발전해 나갔다. 타타바냐의 철도 노동자와 바링카의 광부들이 서로 연결되었다. 일인 경영자들이 해고되고 새로운 공장 경영진이 노동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전국 혁명적 평의회는 상황을 이용하려는 한 줌 반동들의 시도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마갸로바 부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부다페스트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전해 오면서 정치를 토론하고 있었다. 평화적인 비무장 시위에 지방 국가보위부가 총격을 가해 60명에서 90명 사이로 총을 맞고 학살당했다. 이것을 놓고 지방 경찰이 반란자들에 결합했고 기오르에 있는 혁명적 평의회가 군 분견대를 보냈다. 국가보위부는 항복했고 그 장교들은 다수 군중에게 복수로 죽음을 당했다.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필수적인 서비스들이 유지되고 있었다. 광부들은 전력이 유지되는 데 충분한 석탄을 생산했다. 농민들은 헝가리노동자당이 무너지고 국가보위부가 대중적인 반발에 직면하여 후퇴하자 반란에 결합했다. 농부들은 반란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일했다. 도시마다 라디오 방송국이 점거 당했고, 당 건물이 불탔다. 국가보위부 요원들은 눈에 띄는 대로 죽음을 당했고 정보원들은 공격당했다.

보르소드 지구는 헝가리에서 가장 큰 산업지대였으며, 그 주요도시 미스콜크는 부다페스트 밖에서 가장 큰 산업도시였다. 1024일 한 노동자평의회가 디마바그 주철공장에서 열렸다. 다음날 주물 노동자는 일련의 요구들을 내걸고 도시로 행진해 들어가서, 붉은 별들과 그 비슷한 것들을 눈에 띄는 대로 제거했다. 다른 노동자가 합류해서 열린 대중 집회는 광역 미스콜크의 모든 공장들을 대표하는 노동자평의회를 수립했다. 총파업이 선언되었다. 26일 군중이 하이 지방 경찰을 포위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하려고 시도했다. 국가보위부가 군중에게 발포했다. 몇몇 경찰들이 노동자에게 자신들의 무기를 건넸으며, 광부들이 복수를 하겠다며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나타났다. 6~7명의 국가보위부 요원들이 이어지는 전투에서 죽음을 당했다. 노동자평의회는 스탈린주의 선동꾼들이 민중으로부터 응당한 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음날 저녁 평의회는 보르소드 지구 전체의 권력을 장악했다고 조용히 선언했다.

노그라드 살고타리안에서는 1025일 모든 일이 멈춰졌다. 27일 철강 노동자가 도시로 행진하면서 붉은 별들을 제거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하며 소련 전쟁 기념물들을 파괴했다. ‘전국 평의회가 여기서도 세워졌다. 펙스에서는 우라늄 광산에 있는 국가보위부조차 혁명의 편에 섰다. 그곳의 노동자평의회는 군사 평의회를 육성해서 소련의 또 다른 침공에 맞서기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은 오래지 않아 다가올 일이었다.

 

 

노동자평의회들

 

부다페스트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유나이티드 램프 공장에서 처음 설립되었다. 1만 명의 노동자들을 대표한 이 평의회는 혁명이 시작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1024일부터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 평의회는 노동자에게 눈멀고 거만한 이전 경영진들보다 우리가 더 잘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자고 호소했다. 하루 사이에 미스콜크, 기오르, 데트레센, 쯔탈린바로스 등의 도시에서 노동자평의회들이 설립되었다. 놀랍게도 앞에서 언급한 디마바그 노동자평의회는 부다페스트에서 22일 설립되었다. 벨로이아니스 전기장치 공장, 감마 광학회사, 칸츠 전기·화차·기계회사, ·다누비아 기계공구 공장, 마티아스 라코시 철강회사 등등에서 평의회들이 나타났다. 26일 헝가리노동자당은 친절하게 새로 설립된 노동자평의회들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헝가리노동자당은 평의회들이 분리된 공장 평의회들로 고립된 채 남아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의회들은 이미 연합하여 정치적·경제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총파업은 무장봉기를 지지하기 위한 정치행동이었다. 평의회들은 지방수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서 정부에 집단적인 압력을 가했다. 이어지는 며칠 동안 평의회들에서 정부 각료들에게로 대표자들이 늘 파견되어 있었다.

미스콜크 노동자평의회는 나지에게 이렇게 글을 보냈다. “경애하는 의장, 노동자평의회는 어제 모든 보르소그 지구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지방에서 평의회들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권력을 장악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무장한 반란자들로서 권력을 획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스콜크, 기오르, 펙스, 스콜노크에서 평의회들은 라디오 방송국들을 장악하였는데, 덕분에 그들은 서로간에 그리고 부다페스트와 상호 협력할 수 있었다. 전투가 잠잠해지면서, 노동자평의회들은 스스로 지구 노동자평의회들로 묶이기 시작했다. 29일 우즈페스트 평의회들에서 온 대표자들이 유나이티드 램프 공장에서 모였다. 비슷한 모임이 부다페스트 9번가와 안기알폴드에서 열렸다. 1030일 세펠에 있는 19개 공장들은 세펠 중앙 노동자평의회를 수립했다. 다음날, 운동을 집중화하고 강화해 나간 이 흐름들은 전체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노동자평의회 대표자회의>(Parliament of Workers' Councils)로 결집되었다.

이 역사적 모임은 노동자평의회의 임무와 권리에 대해 9개 항에 걸쳐 성명서를 작성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1. 공장은 노동자의 것이다. 노동자는 생산량에 기초하여 계산된 세금과 일부 이윤을 국가에 지불하여야 한다.

2. 공장의 최고 관리 기관은 노동자가 민주적으로 선출한 노동자평의회다.

3. 노동자평의회는 3~9인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를 선출한다. 집행위원회는 노동자평의회가 내린 결정과 과제들을 수행하면서 그 집행 기관으로 활동한다.

4. 경영자는 공장이 고용한다. 경영자와 최고 피고용자들은 노동자평의회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 이 선거는 집행위원회가 소집하는 공식 총회 후에 치러질 것이다.

5. 경영자는 공장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노동자평의회에 책임을 진다.

6. 노동자평의회는 스스로 다음 권리를 모두 갖는다.

a. 기업에 관한 모든 프로젝트를 승인하거나 비준할 권리

b. 기본 임금수준과 그것이 산정되는 방법을 정할 권리

c. 해외 계약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결정할 권리

d. 신용을 포함한 모든 경영행위에 대한 결정

7.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평의회는 기업에 고용된 모든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에 관한 어떤 갈등도 해결한다.

8. 노동자평의회는 대차대조표를 검열할 권리와 이윤이 어디에 쓰여야 할지를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

9. 노동자평의회는 기업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회 문제들을 다룬다.

 

 

이 성명서는 봉기가 있고 며칠 만에, 즉 혁명의 성공이 어떤 식으로든 확실해지기 전에, 관료들로부터 권력을 획득하려는 노동자 운동의 시도였다. 그것은 작업장에서 노동자 통제를,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노동자 관리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에는 관련이 없으되, 일상적인 현실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노동자평의회를 위한 출발점을 표현했다. 대다수 노동자가 이미 그들의 공장과 작업장들을 정부했기에, 공장 등은 노동자에게 속한다고 한 모임의 결의는 기정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모든 평의회들은 반자본주의면서 반스탈린주의였다. 보르소드 지구 노동자평의회는 정당 조직을 단호히 비난한다고 말했다. 일체화의 경향은 11월 초까지 이어졌다. 미스콜크에 있는 노동자평의회들은 도시를 대표하는 지방 평의회를 수립하고 나서 전체 지구에 지구별 평의회를 수립했다. 112, 미스콜크 평의회들은 의장 조제프 키스는 노동자평의회들에 기반한 전국 혁명적 평의회수립을 호소했다. 사태 전개에 담겨 있는 경향은 모든 권력을 평의회들로사상과 그 현실화를 향한 것이었으나, 이것이 명확하게 진술되지는 않았다. 소련 군대의 2차 침공은 사태 전개를 단절시켰다. 임레 나지와 그의 각료들은 평의회들 속에서 중요성을 전혀 보지 못했다. 비슷하게, 솟구쳐 올라온 다양한 정당들은 헝가리 문제의 해결책으로 자신들만의 활동에 의지했다. 노동자 자주관리는 그들을 넘어서 있는 개념이었다.

113일 세펠과 우즈페스트 지구 평의회들은 파업을 끝내고 5일 질서정연하게 일터로 복귀하자고 호소했다. 이것은 소련과 협상하는 나지의 입장을 강화해 주려는 의도였다. 111일 헝가리의 중립과 바르샤바 조약 탈퇴 선언이 있었다. 혁명의 주된 요구 가운데 하나를 승낙하면서 나지는 일시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 탈퇴는 소련으로부터 허용될 수 없었다. 113일 모스크바의 프라우다지는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들이 학살당하고 살해당했다고 보도했다. 침공한 날 프라우다는 반란자들이 저지른 야만적인 잔혹성에 관해 언급했다. 중국 공산당 신문은 헝가리에서 반동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말은 이것이 중국 노동자에게 선례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혁명의 군사적 패배

 

15만 병력과 2천 대 이상의 탱크를 앞세운 소련의 공격이 114일 시작되었다. 정당들과 온갖 지도자들은 소련 군대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노동자 계급은 굳건히 서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즉시 자발적인 총파업이 시작되었으며, 노동자 구역에서 가장 격렬한 저항이 이루어졌다. 야노스 카다르가 헝가리의 새로운 소련 꼭두각시였다. 그가 이끈 혁명적 노동자·농민 정부는 단지 소련의 무장력에 기대는 한 줌의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소련 군대는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산업단지와 노동자 구역으로 곧바로 밀고 들어갔다. 헝가리 전체에서 농민들과 노동자는 침략자들에게 진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펙스 라디오 방송은 (그 대다수가 그들이 서 있는 곳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소련 병사들에게 헝가리 민중은 단지 그들의 손으로 권력을 잡았을 뿐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심지어 공산주의자 라디오인 라직조차도 오늘 모든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바리케이드 위다라고 선언했다. 카다르가 처음으로 한 일은 새로운 비밀경찰 조직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노동자평의회들은 카다르와 그의 날조된 정부를 망설임 없이 거부했다. 7일 두나펜텔레가 소련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그곳의 노동자평의회는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다음과 같은 성명으로 맞받아쳤다. “두나펜텔레는 헝가리에서 첫 째 가는 사회주의 도시다. 그 거주자는 노동자이며 권력은 노동자의 손에 있다. 모든 집들은 노동자가 직접 지었다. 노동자는 파시스트 폭도들로부터 도시를 지켜낼 것이지만, 소비에트 군대로부터도 그렇게 할 것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소련 기갑부대가 가장 집중된 곳은 세펠과 코바냐였다. 도시 중심에서 전투는 반란자들의 탄약이 다 떨어지는 6일까지 계속되었다. 몇몇 교외는 8일까지, 우즈페스트와 코바냐는 9일과 10일까지 버텼다. 붉은 세펠은 소련 군대가 모든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11일에야 함락되었다. 이 마지막 지구들은 그 때까지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헝가리 부상자들의 8~90%는 젊은 노동자였다. 카다르가 낸 보고서도 가장 많은 피해가 노동자 구역에서 발생했다고 확인했다. 7일 반란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붉은 기를 치켜 올렸으나, 그 상속자들은 헝가리 노동자들을 살육했다. 국가보위부 요원들이 다시 나타나서 최근에 겪은 치욕을 복수하려고 혈안이 되어 다녔다. 정부 포고령이 벽에 붙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이들은 그것을 더럽히거나 무언가로 덮어씌우고 또는 그냥 찢어 던져 버렸다. 세펠에서 노동자는 단호하게 조롱하며 말했다. “세펠의 4만 귀족들과 파시스트들이 파업 중이다.” 노동자의 아파트 정면에 참호가 파졌다. 7일 동안 세펠 노동자는 8시간 자고, 8시간 싸우고, 그리고 나머지 8시간은 공장에서 무기와 탄약을 만들었다. 세펠 장갑차가 등장했는데, 세바퀴로 굴러가는 손수레 위에 양동이를 모래주머니로 고정시켜 그 속에 기관총을 탑재한 것이었다. 반면 소련의 붉은 군대는 중무장 대포와 폭격기를 사용했다.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가 이제 부다페스트를 장악했다. 부다페스트는 노동자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수도 바깥에서는, 두나펜텔레가 노동자평의회 주도 아래 9일까지 저항했다. 펙스에서는 노동자평의회가 도시를 방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근처 야산에서 게릴라 전투를 벌인다는 계획이 실행되었다. 게릴라 전투는 10일 동안 큰 규모로 계속되었으며, 몇몇 광부들과 병사들은 여러 주 동안 소련 군대에 맞서 게릴라 전투를 수행했다. 미스콜크에서는 소련 군대의 공격에 잠시 저항하다가 모든 노동자의 총파업이 선언되었다. 보르소드 노동자평의회는 2만 명의 무장한 노동자를 부다페스트로 보내겠다고 제안했는데, 그래서 (이제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 피신하고 있던) 나지는 소련을 상대로 자본주의 반혁명의 공포가 근거 없는 것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나중에 미스콜크 구역 출신인 부다페스트 경찰총수 코팍시가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자 보르소드 노동자평의회는 이 제안을 카다르에게 반복했고, 카다르는 즉시 코팍시에 대한 집행을 유예했다. 노그라드 살고타리얀 읍에서, 노동자는 소비에트 침공 이후 합리적인 노동자평의회를 지지했다. 16일까지 노동자는 읍사무소, 지역신문과 라디오를 장악했으며, 지방 군부대는 혁명 편에 서 있었다. 바로 그 날, 소련 군대가 장악하면서, 노동자평의회에 맞서 혁명적 노동자 농민 위원회를 설립했다. 121, 소련은 노동자평의회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노동자의 수중에 있었다. 노동자는 경찰본부까지 행진했고 동료 노동자의 석방을 쟁취했다. 이어서 이틀 동안 강력한 총파업이 그 지역에서 벌어졌다. 며칠 후 더 많은 노동자평의회 성원들이 체포를 당하자 몇 천 명의 시위대가 탱크에 맞서 싸웠는데, 국가보위부가 비무장 군중에게 발포했다.

 

 

노동자평의회들이 저항을 이끌다

 

헝가리 노동자와 농민이 군사적으로 패배하기까지는 그러고도 1주일 이상이 더 걸렸다. 투쟁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노동자는 외부로부터 온 압도적인 군사력에 두들겨 맞긴 했지만, 생산을 유지하고 있는 한 여전히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었기에 노동자의 권력은 현실이었고 카다르 정부는 오로지 탄압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노동자평의회들이 침공의 결과로 다시 조직되면서, 주로 정치적 역할을 하는 지구 노동자평의회들이 수립되었다. 세펠 노동자평의회는 카다르와 소련군 사령관에게 대표자를 보냈다. 평의회들의 공통된 요구는 노동자는 권력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공장을 돌리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1112일 광역 부다페스트 전체를 대표하는 <중앙노동자평의회>가 수립되어, 14일 유나이티드 램프 공장에서 설립 회의가 열렸다. 젊은 헝가리 지식인 미클로스 에라소는 <중앙노동자평의회>라는 사상은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는 그 모임에서 어떻게 취급당했는지를 스스로 말했다. “나이든 사회민주주의 의장이 당신은 어느 공장에서 왔는가?’ 하고 물었다. ‘없다고 나는 답했다. ‘당신은 어떤 권리로 여기에 있는가?’ 나는 내가 실제로 모임을 조직했다고 말했다. 의장은 답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모임은 역사적 필연이다!’” 실제로 <중앙노동자평의회>는 단결을 향한 평의회들의 시도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크라소의 사상은 노동자의 운동과 우연히 방향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결집한 대표자들은 주로 공구제조공, 선반공, 철강노동자, 기술자였다. 다음날 더 넓은 기반을 가진 모임이 열렸다. 일부 대표자들은 전체 헝가리를 대표하는 <전국노동자평의회>를 즉시 창립하고 싶어 했다. 많은 이들이 동의했지만, 자신들은 단지 광역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중앙노동자평의회>를 형성하는 것만 위임받았을 뿐이라는 점이 제기되었다. 노동자평의회들은 정말 민주적으로 결정되었다. “헝가리 노동자와 그 대표자들에게 평의회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평의회의 민주적 본질이었다. 대표자들과 전체 노동계급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대표자들은 노동자가 바라는 것을 수행한다는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선출되었다. 위임사항을 벗어난 대표자들을 노동자가 자주 소환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는 너무 독립적인대표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산도르 락츠는 우리에게는 정부가 필요 없다! 우리는 여기 헝가리에서 지도자이며 그렇게 남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불행하게도 다수는 무장력에 직면하여 타협하고 카다르 괴뢰 정부와 협상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작업 복귀는 세펠 노동자평의회에게도 지지받았는데, 파업이 의식적이고 조직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계획되었다. 많은 노동자는 여기에 매우 화가 났다. 배신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실질적인 권력이 평의회들에게 있기 때문에, 카다르 정부는 평의회들을 분쇄하고 공장들에 관료적인 관계들을 다시 세워야 했다. 두 달 동안 투쟁은 계속되었다. 카다르의 노동자 농민 혁명 강령’ 9번과 11번은 공장에 대한 노동자 관리노동자평의회의 민주적 선출을 위한 것이었다. 카다르의 반혁명은 좋은 문구들 뒤로 숨겨야 했다. 그러나 카다르가 노동자의 요구에 동의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공장에 대한 집단 소유, 공장은 노동자평의회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 노동자평의회는 기업의 유일한 관리기구로 행동해야 한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분야들로 평의회 권력의 확산, 민병대 유형이며 평의회에 복종하는 경찰력 조직화,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사회주의 다당제 <중앙노동자평의회>는 소련군 사령관 그레베닉과 직접 협상했다. 매일 그에게 실종된 노동자평의회 성원들의 명단을 주면, 소련군은 그들을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소련은 권력이 카다르가 아니라 평의회들에 있음을 알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처음에 그레베닉은 노동자평의회 대표자들을 파시스트와 제국주의 첩자들로 취급했으나, 머지않아 소련군 대령과 통역자가 중앙노동자평의회에 상설적인 상대자로 만들어졌다. 모든 식량과 의료공급을 해결한 것은 카다르 정부가 아니라 평의회들이었다.

1118, 진정한 전국적 평의회, <노동자평의회 대표자회의>를 위한 계획이 제출되었다. 이것은 부다페스트의 각 지구 노동자평의회, 지방 노동자평의회, 대공장 노동자평의회에서 온 156명의 대표자를 성원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기구는 30명의 최고위원회를 선출하는데, 최고위원회에는 군대, 지식인, 정당, 경찰 등 다른 집단의 대표자를 20명까지 추가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을 토론하기 위한 21일 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호소가 대표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 전국대회의 주된 목표는 정부에 반대하여 노동자가 감독하는 권력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19<중앙노동자평의회>에 대한 노동자의 지지와 규율의 표시로서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부다페스트, 기요르, 펙스, 타타바냐, 오즈드로부터 온 대표자들이 대회에 참석했으며, 농민 조직들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중앙노동자평의회>와 지방 평의회들 사이에는 힘찬 연결이 수립되어 있었다. 여러 광부 대표자들은 작업에 되돌아가는 데 매우 강하게 반대했다. “당신들이 원한다면 일을 해라. 그러나 우리는 석탄도 전기도 전혀 공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광산에 물을 가득 채워버릴 것이다!” 그러나 작업 복귀에 찬성한 이들은 파업이 모든 사람들을 무차별로 괴롭히고 있으며 작업 복귀를 하더라도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단결을 유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앙노동자평의회>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부다페스트에 퍼졌다. 노동자는 즉각 다시 파업에 나섰다. 세펠 노동자가 파업에 결합하였는데도, 세펠 노동자평의회는 새 파업을 비난했다. <중앙노동자평의회>에서 온 위원이 이 차이를 조사하기도 전에, 세펠 노동자는 즉각 그들의 바람과 행동에 순응하며 파업과 <중앙노동자평의회>를 지지하는 새로운 평의회를 선출했다. 노동자는 이제 적극적인 저항이냐, 아니면 소극적인 저항이냐, 또는 도피냐 하는 그들 앞에 닥친 서로 다른 선택지를 놓고 논쟁하고 있었다. 항복한 헝가리인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적극적인 저항은 지속할 수 없었다. 25만의 헝가리인들이 도피를 택해 서구를 향해 헝가리를 빠져나갔다. 수천 명이 러시아로 추방되었는데, 특히 젊은 노동자가 많았다. 철도 노동자는 이것을 막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이를테면 철로를 제거했고, 기차를 상대로 몇 차례 매복 기습을 해서 추방자를 구출했다. 대부분의 추방자는 1957년 동안에 귀환이 허용되었다.

수동적인 저항은 대부분의 헝가리인들이 따르는 길이 되었다. 소련인들과 헝가리 괴뢰 정부를 향한 음울한 증오가 펼쳐졌다. 나중에 소련 지도자 크루시초프가 헝가리에 왔을 때, 라디오에서 예정된 지지 대중 집회는 녹음된 환호 소리를 끌어다 써야 했다. 빈정대는 포스터들이 벽에 연재되어 붙었다. “조심하라! 천만 명의 반혁명 분자들이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다. 수십 만 지주들, 자본가들, 장성들, 신부들이 세펠과 키스페스트의 상류층 지구에서부터 공장 지대까지 활보하고 다닌다. 이 무리들의 흉악한 활동 때문에 온 나라에 단지 여섯 명의 노동자들만이 남았다. 이 노동자는 스콜노크에서 정부를 수립했다.” “분실: 민중의 신뢰. 이것을 찾으면 헝가리 총리 야노스 카다르에게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주소: 소련 탱크 거리 10000번지” “구함! 헝가리 총리. 자격조건 - 진실 된 신념이 없을 것, 척추가 없을 것, 읽고 쓰는 능력은 꼭 필요하지 않으나 다른 사람이 작성한 문서에는 서명할 수 있어야 함”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그러나 세 사람 이상으로 모이지는 말라가장 인기 있는 농담은 이런 것이었다. “10월에 우리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아는가? 우리 자신의 내부 문제에 간섭했다는 점이다.”

수동적인 저항의 일부로서, 침묵시위가 1123일 오후 2시부터 벌어졌다. 부다페스트 거리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들은 헝가리인들이 카다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었으며, 그가 새로 만든 보안군으로는 진압할 수 없었다. 그는 질서수립과 생산 재개를 노동자 평의회들에 호소했다. 마치 회답하는 것처럼, <중앙노동자평의회>1127일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노동계급에게서 우리의 사명을 받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노동자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 일할 것이다.” 평의회들이 갖고 있던 유일한 언론은 복사판 <소식지>였는데,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거나 집회에서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 평의회들은 공장에서 비당 조직들은 허용했지만,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MSzMP)과 친정부 노조관료들은 금지했으며 출입 자체를 물리적으로 막았다.

12월 카다르 정부는 공장을 둘러싼 전투에서 노동자평의회들로부터 천천히 권력을 빼앗아 갔다. 반카다르 행동을 향한 강한 압박이 아래로부터 왔다. 124어머니들의 행진이 있었다. 3만 여성이 국기와 검은 기를 들고 침묵 행진에 나섰다. 이것을 지지하며, 모든 집들이 한밤중에 창문에 촛불을 밝혔다. 정부가 모든 상점에서 촛불을 거둬들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음날 <혁명위원회>를 해산시키는 포고령이 나왔다. <혁명위원회>는 기요르 같은 지구들에서 노동자평의회들과 나란히 솟구쳐 올라왔었는데, 200명의 노동자평의회 성원들이 체포되었다. 계속해서 6일에도 간츠와 마바그 공장들에서 노동자평의회들이 체포되었다. 같은 시각 <중앙노동자평의회>는 모든 노동자평의회들로부터 온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전국노동자평의회>와 지방 노동자대표자회의에 관한 계획을 토론하고 있었다. 8, 살고타리안에서 80명의 광부가 소련군에게 죽었다. 다음날 카다르는 <중앙노동자평의회>를 해산시키고, 그 성원 대다수를 체포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해산조치와 광부들에 대한 발포에 맞서 48시간 파업을 선언하고 실행했다. 한 대표자는 선언했다. “전등이 나가게 해라! 가스를 전혀 쓸 수 없게 해라! 아무 것도 없게 해라!”

이틀 동안 100% 강력한 파업이 벌어졌다. 체포를 피한 두 명의 <중앙노동자평의회> 지도자, 산도르 락츠와 샌더 발리는 이틀 동안 벨로이아니스 공장에서 노동자에게 보호받았다. 노동자는 소련군이 공장 앞에서 위협을 가했지만, 그들을 넘겨주는 걸 거부했다. 11, 카다르는 협상하자며 그들을 초청했다. 공장을 나서자마자 그들은 체포되었다. 파업은 계속되었다. 당 신문 <넵스자바드자그>조차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 되었다. “이번 같은 일은 헝가리 노동자 운동의 역사 속에서 이전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13일 파업이 끝나면서, 세펠 철강 노동자는 락츠와 발리의 석방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다른 공장에서도 따라 했다. 그러자 소련군이 공장으로 쳐들어가서 총을 겨누며 노동자에게 일하도록 강요했다.

 

 

혁명은 패배했다

 

파업은 노동자의 마지막 카드였다. 카다르의 <혁명적 노동자 농민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패퇴시켰다. 강제수용이 도입되었고, 파업을 하거나 선동하면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것이 선포되고 며칠 뒤에, <세펠철강 노동자평의회>우리는 노동자의 수중에 우리가 위임받은 것을 다시 돌려주려 한다.”는 말을 남기며 사임했다. 다른 평의회들도 같은 일을 하자, 카다르는 도발적인 자진해산이라고 불평했다! <중앙노동자평의회>의 마지막 메시지는 사보타지와 수동적인 저항은 그날의 질서다였다. 카다르는 새로운 보안부대와 소련군의 지원을 업고 노동자에게서 생산수단을 다시 장악했고 모든 노동자의 조직을 공격했다. 원래부터 그는 이것에 대한 이론적인 정당성을 갖고 있었다. 19575월 그는 <전국의회>에 말했다. “최근에 우리는 어떤 부류의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여 행동하는 현상을 맞닥뜨렸다. 이런 경우에 지도자들의 임무는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것이다. 만일 대중의 바람이 진보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다른 방향으로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

2천 명의 헝가리인들이 어느 곳에서나 지배계급들이 늘 잘못된 사상이라고 부를 것들 때문에 처형당했다. 카다르 정부에 대한 저항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억압의 규모로부터 추정할 수 있다. 야간통행금지가 19575월까지 계속되었다. 약식재판은 195711월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1957년과 1958년 실제로 날마다 처형이 있었다. 혁명으로부터 2년 뒤, 4만여 명의 정치범이 갇혀 있었다. 1959<우즈페스트 노동자평의회>의 성원 아홉 명이 처형되었다. 19601월까지도 혁명 기간의 범죄에 대한 사형이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반란자 라스즐로 히켈버그는 1961년에 처형되었다.) 마지막 강제수용소는 19606월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수백 명의 반란자들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까지 감옥에서 석방되지 않았다.

헝가리 노동자는 다시 한 번 자유는 남들을 대표해 행동하는 (혁명적이든 아니든) 지도부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온다는 점을 입증했다. 공산주의 관료제를 타도하기 위하여 그들은 민주적이고 반관료적이며 노동계급 전체를 포괄하는 조직 유형을 채택했다. 이 평의회들은 또한 건설적이었다. 노동자는 구 체제를 분쇄하고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기 시작하는 것을 몇 시간 만에는 아닐지라도 며칠 만에는 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공식적인 개념들을 거부하고 노동자의 자주관리와 직접 민주주의라는 그들만의 것을 창조했다. 이것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이전 노동자의 투쟁으로부터 필연적인 발전이었다.

노동자평의회들은 어떤 식으로도 노동계급에게서 분리되지 않았다. 노동자평의회들은 노동계급을 결코 배신하지 않았으며, 권력에 의해 변질되기보다 스스로 해산해 버렸다. 노동자평의회들은 그들이 처음 왔던 곳인 계급으로 돌아갔다. 헝가리 노동계급과 그 평의회들은 사회를 재조직하고, 생산을 운영하고, 그들의 질서를 유지하고, 그들 뒤에 있는 나머지 주민들을 단결시켰다. 그들은 오로지 거대한 군사력 때문에 그리고 국제 노동계급의 수동성 때문에 패배했을 뿐이다. 그들이 시작했던 길을 따라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면, 평의회들의 잠재력은 마침내 자유로운 인간 사회를 창조해 냈을 것이다. 헝가리 혁명의 강령은 노동계급이 수행해야 할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참고 문헌

 

Bill Lomax: Hungary 1956, Allison & Busby 1976.

Tibor Meray: Thirteen Days that shook the Kremlin, Thames &, Hudson 1958.

Miklos Molnar: Budapest 1956, George Allen & Unwin 1971.

Bill Lomax (ed)i Eyewitness in Hungary, Spokesman 1980.

Andy Anderson: Hungary '56, Solidarity (London) 1964.

헝가리 1956에 관한 책들은 공공도서관에서 943.905 코드로 찾을 수 있다.

 

 

 

옮긴이: 양준석

  1. http://libcom.org/library/hungarian-revolution-195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