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아르헨티나에서 대중투쟁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8월호

아르헨티나에서 대중투쟁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11

아르헨티나에서 대중투쟁1

 

James Petras



나는 20035월을 아르헨티나에서 공장, 노동계급 거주지, 빈민촌(villas de miseria), 도시의 하층 중산층 모임, 실업자의 사회 센터, 대학들을 방문하면서 보냈다. 나는 노동조합주의자, 실업노동자, 학생 활동가, 인권활동가, 영화와 비디오 제작자, 5월 광장 어머니회(the Madres de Plaza de Mayo), 작가, 의사, 저널리스트, 그리고 맑스주의자와 중도 좌파 정치지도자를 인터뷰했다. 이 해는 내가 아르헨티나에 방문해서 연구하고 대담을 갖은 지 38년째 되었다.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노이켄 주(Neuquen)에서 보냈다. 노이켄 주는 아르헨티나의 가장 커다란 세라믹 공장이 있는 곳으로 노동자가 그 공장을 접수했으며, 지금은 민주주의적 자주관리의 체제를 실험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셋째로 규모가 큰 경제를 가지고 있고 지난 세기 말까지 그 지역에서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다. 그때부터 아르헨티나는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 연안 지역을 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빈곤과 극빈으로 시달리고 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복잡하고 변화하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사회 정치운동을 위한 가능성을 형성했던 기본적인 정치경제적 사건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일곱 테제

 

* 지난 10년 반에 걸쳐,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중반에 투기 붐, 1998~2003년에 경기불황, 대중운동의 확산을 가져온 2001년에 대중봉기, 그리고 최근에 우익 정당과 개인들의 복귀를 겪었다.

 

* 2001년과 2003년 사이에 대대적인 직접 행동에 참여했던 노동계급과 빈민은 방향을 바꾸어 높은 수준의 선거참여를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2003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측이 벌인 기권주의(abstentionist) 캠페인은 유권자의 79%가 선거에 참여함으로서 완전히 실패했다.

 

* 공장을 점거하고 자주 관리하기 위한 실업자 운동은 부분적으로 실패했다. 국가는 강제적이고 성공적으로 몇몇 공장에서 노동자를 쫓아냈고 남아 있는 공장도 주로 수세적이 되었다.

 

* 대중 회의와 실업자 운동은 통일되지 않았고 오히려 파편화되었다. 심지어 몇몇 구역에서는 대중 집회와 실업자 운동의 보호 아래 페론주의자인 지역 사장들이 복귀하기도 했다.

 

* 사회경제 위기가 더욱 심화되었다. 2003년에 위기가 약간 진정되는 듯했지만, 빈곤과 극빈율은 심지어 실업률이 약간 떨어졌을 때에도 계속 올라갔다.

 

* 경제의 원리는 일관된 경기회복과 계속해서 모순되었다. 신자유주의 계획이 지속되고 있지만, 새로운 투자는 없었고 사유화된 외국소유 기업과 그들의 지역 협회는 계속해서 경제에 투자된 자본을 회수하고 있다(2002년에는 18억 달러가 유출되었다). 거대 자본의 힘은 사회적 불평등을 끊임없이 확대시키고 있다.

 

* 대중운동이 사그라졌고 구태의연한 정치가가 선거에서 계속 뽑혔다. 그런데도 대중 조직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비록 경기가 또 다른 불경기로 치닫고 있지만, 대중조직은 결정적인 패배를 겪지 않았고 높은 기반을 다시 확보할 수 있다. 운동은 국가권력으로 나아가는 통일된 사회정치적 구조를 세울 수 있다.

 

이러한 테제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20011219~20일에 대중봉기로 이끈 아르헨티나에서 정치경제적 사건을 간단히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치적 사건을 경기 붐과 추락에 가장 책임 있는 두 대통령의 임기에 따라 두 시기로 나눌 것이다.

 

 

메넴과 드 라 루아 대통령의 재임 시기

 

카를로스 메넴(1989~2000)이 대통령이었을 때, 정부는 막대한 양의 외국 차관을 섰고 모든 중요 공업, 서비스업, 은행, 공공시설을 민영화했다. 대부분의 대부와 차관은 수입 소비재를 구매하는 데 썼다. 엄청난 부패기획과 메넴의 페론주의자들이 정의당(Partido Justicialista)을 재정 지원하기 위해 국고에서 많은 돈을 빼돌렸다. 주식 시장은 상승했고, 정부가 페소화의 태환성률을 위해 달러 정책을 시작하자 외국은행은 달러 계좌를 제공했다. 1998년 무렵에 투기 빚으로 찌든 외국 소유의 비생산적인 경제는 해마다 심해졌던 경기후퇴로 가라앉고 있었다. 자유시장의 신자유주의 정권 하에서 아시아와 미국의 수출업자와 경쟁할 수 없는 공장이 파산했을 때 실업은 크게 늘었다. 부유한 내국인은 몇 억 달러를 회수해서 해외시장에 투자했다. 부자들의 세금 포탈은 규범이었다. 2000년 메넴 대통령의 2기 집권 말기에, 경제는 통제할 수 없었고, 불황이 임박했다. 아르헨티나의 빚은 두 배가 되었고 빚을 갚고 경기회복을 재정 지원할 수단은 고갈되었다.

2000년에, 전통적인 급진당 출신의 페르난도 드 라 루아(Fernando de la Rua)는 자칭 중도 좌파 동맹의 일부로 캠페인을 벌여 선거에서 이겼다. 긴축통화공급, 금융시장의 규제완화,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 지불 승낙 등 드 라 루아의 개혁 하에서 실업은 20%를 넘어섰고 수입은 30%로 줄어들었다. 그가 강제 사임하기 직전에, 외국소유은행은 40억 달러를 인출해 그들의 고국으로 이전했다. 드 라 루아는 중산층이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지 못하게 모든 저축과 당좌예금계좌를 동결했고 은행은 지불불능을 선언했다. 그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연금생활자와 5백만 중산층의 저축은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경제는 2001~2002년에 기록적인 마이너스 15% 성장으로 곤두박질 쳤다. 실업은 25%로 올랐고 봉급은 65%가량 줄어들었다.

곧 대규모 거리 시위가 고가도로를 봉쇄했다. 20011219일에, 최근에 빈곤으로 내몰린 중산층과 연금생활자, 실업노동자, 노동조합 활동가 등 수십만 명은 드 라 루아의 추방을 요구하면서 5월 광장에 있는 대통령 관저로 몰려갔다.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총을 쏘았다. 30명의 시위대가 죽었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드 라 루아는 사퇴했고 헬리콥터를 타고 달아났다. 국회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국회 광장에 모였을 때 공격당했다.

그 사이에 경제는 거의 2주 동안 완전히 마비되었다. 아르헨티나 국회는 1주일 사이에 시위자의 사퇴 압력을 받은 3명의 대통령을 뽑았다. 마침내 주정부, 국회의원, 정의당의 당수는 에두아르도 두할데(Eduardo Duhalde)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대중운동의 상승과 두할데 대통령 재임 시기


 

 200112월의 대중봉기는 제한된 아젠다를 지닌 자발적인 대중 반란이었다. 그 반란은 가난한 사람들에서부터 이전에는 잘 살았던 소규모와 중간 수준 기업계층까지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봉기에 이어 파산당하고 불황이 강타한 지방에서 비슷한 폭발이 일어났다.

좀 더 중요하게, 인근 지역의 대중 집회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으로 퍼졌다. 수십만 명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상실감과 그들의 궁핍함을 토론하기 위해 모였다. 이전에는 묵묵히 고통을 참아냈던 사람들은 이제는 그들의 분노를 토로하고 몇 시간에 걸쳐 집회에서 논쟁했다. 몇 백 개의 제안과 급진적 요구가 투표에 붙여져 승인되었다. 비록 그 가운데 몇 개만 실행되었지만. 기존의 소규모 맑스주의 정당과 아나키스트들은 집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지를 개념화하면서 그들 자신의 아젠다를 가지고 개입했다. 그들 사이에서 나온 주장은 공원과 광장과 거리 모퉁이에서 거의 밤마다 열린 집회로 확대되었다. 아나키스트는 수평주의자’(horizontalists)로서 아젠다도 지도자도 없이, 대변인도 없는 제한 없는 집회를 주장했다. 맑스주의 그룹은 확정된 아젠다, 지도력 수립과 다수에 의한 의사결정을 요구했다. 각 그룹은 집회를 곧 나타날 코뮌이나 소비에트의 원형으로 여겼다



1월과 2월 내내, 실업노동자운동(the Movimiento Trabajadores Desocupados ([MTD] unemployed workers' movement)과 이웃 연대는 대규모 거리시위로 수렴되었다. 중산층이 그들의 저축예금의 동결을 해제하라고 요구한 집회는 MTD의 지지를 받았다. 거꾸로 중산층 집회는 일자리와 식량 원조를 위한 피케테로스의 요구를 지지하면서 도심 거리의 봉쇄에 참여했다. 인권단체와 대학 운동과 진보적 지식인과 함께 한 운동과, 노동조합활동가의 운동을 모두 하나로 묶기 위한 대회가 열렸다. 기껏해야, 임시 협정은 여러 그룹의 지도자 사이에 체결되었지만, 각 단체는 그들 나름의 지역 아젠다에 따라 나아갔다. 동원된 실업자와 빈민 집회에서 모두 바꿔야 해(Que se vayan todos)”라는 슬로건에 표현된 전통적 정치지도자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가 있었다. 그 슬로건은 아나키스트와 많은 사회운동지도자에게 모든 형태의 정치조직화와 선거행위의 거부를 뜻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지배적인 정치계급에 대한 건강한 자연발생적인 거부가 새로운 정치 지도력과 제도 정치권력을 얻을 수 있는 유연한 전술의 발전을 가로막은 하나의 도그마로 전환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2002년에 대중 동원이 최고에 달했을 때, 분석가들은 2~3백만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공개적인 저항에 참여했다고 평가했다. 실업자 조직은 많은 도로봉쇄와 관공서의 평화적 점거에 참여했던 약 만여 명의 적극적인 지도자를 포함한 것이었다. 2001년 말에서 2002년 초까지, 많은 공장은 대량해고와 공장폐쇄로 위협당한 노동자에 의해 점거되었다.

분명히 자본주의 체제는 깊은 위기에 빠졌다. 전통적인 정치 지도자와 정당은 불신을 받거나 퇴출당했다. 새로운 사회운동은 정치적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활동가들은 세 가지 중요한 도전에 부닥쳤다. 즉 어떻게 그들이 운동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그들이 일자리, 주택, 의료체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거나 통제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어떻게 그들이 조직적 응집력, 정치 지도자, 그리고 국가권력을 얻기 위한 공동의 강령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MTD가 처음에 일자리와 지역 프로젝트를 위한 기금을 요구했을 때 전망은 밝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처음에 운동은 400만 노동자 가운데 10%도 못되는 실업자의 분파에만 호소했다. 둘째, MTD가 아주 전투적이었지만, 그들의 요구는 계속해서 공공 노동자의 계약 조건을 한 달에 150페소로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지도자와 그들의 추종자들을 빼면 정치적 깊이나 계급의식이 거의 없었다. 많은 아나키스트와 맑스주의자는 위기가 노동자를 급진화할 것이고 또는 거리 봉쇄의 급진적 전술이 자동적으로 급진적 전망을 창조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 점과 관련해서 특히 해로운 것은 소규모 대학생 그룹이었다. 그들은 정치권력이나 국가권력 없이 수행될 것이지만 소규모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지역 동맹에 의해 건설될 자발적인 전환 이론을 선전했다. 실제로 깊은 구조적 문제가 지속되었고, 두할데의 새로운 정부가 지역에 있는 자신의 충직한 남성과 여성에게 250만개가 넘는 6개월 고용계약을 제공함으로써 곧 반란을 일으킨 실업자의 지구를 평화롭게 만들려는 중요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 때문에 MTD의 급진 지도자가 조직을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두할데 정부의 단기 고용계약 제공은 빈민과 실업자가 정의당에 조직적으로 결합하게 만들었다. 정의당과 빈민 및 실업자 사이의 이러한 연결은 선거정치에 대한 대중운동의 거부와 이러저러한 정치 교육에 대한 그들의 무시를 통해 강화되었다. 얼마간 아나키스트, 자발주의자(spontaneist), 비정치 그룹을 처음에 지지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페론주의자가 통제했던 실업위원회를 위해 자신들의 지지를 거둬들였다. 2003년 초에, 전통적인 우파 인민주의적 페론주의자들은 실업자들의 구역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좌파 MTD를 계속 지원하고 거리봉쇄에 참여했던 활동가들과 후원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든 맑스주의 소그룹이 모든 집회와 MTD, 공장점거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의 초기 조직적 공헌은 신입 전투가가 한밤이 되기 전에 자리를 떴던 지루하게 오래 지속된 회의를 통해 토론을 지배하고 지도부 지위를 얻은 그들의 종파적 전술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좌파 분파는 운동을 분할했지만 그들은 고립되지 않았다. 모호한 자치라는 용어를 보편적 원리로 제기했던 전투적인 MTD 지도자 그룹은 통일된 사회-정치적 운동의 발전에 대해 또 다른 심한 일격을 가했다. 처음에 자치는 선거 정당(좌익과 우익)과 타락한 관료주의적 노동조합에 의한 지배로부터 독립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자치는 노동조합과 모든 정치적 연합, 동맹, 그리고 전술적 토대를 제외한 다른 사회운동과의 모든 단결 형식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뜻하게 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해석에서 자치는 모든 전략적 동맹을 막게 되었다. MTD는 오늘날 빈민 구역에서 결정적인 세력이 되었지만, 동원할 수 있는 그들의 힘이 사라졌다. 1월과 5월 사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역에 생겼던 이웃 연대는 또한 비슷한 변형을 겪게 되었다. 처음에 이웃과 친구와 함께 실업과 저축 및 주택에 대한 권리 상실과 같은 공동의 곤란을 토론하려는 자발적 열망은 몇 만 명을 지역 마을 회의 장소로 몰려들게 했다. 처음에 몇몇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몇몇 혁명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사상의 폭로를 허용했던 끝없는 토론이 있었다. 회의는 며칠에 한 번 계속 열리는 것을 빼고 명확한 행동 계획에 이르지 않고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회의를 소집하고 의제를 짜기 위한 지도자 또는 조정자를 뽑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자발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권위주의적이거나 조작적인 것으로서 모든 실천적 조치나 구조를 비난했다. 의제를 가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뒤이은 논쟁에서, 맑스주의 소그룹은 합리적 주장을 지녔지만 종파적 목적을 위해 끼어들었다. 아나키스트와 맑스주의자 사이의 끝없이 이어진 절차상 토론과 논쟁은 많은 사람을 떠나도록 했다. 논쟁과 의제를 지배하려는 맑스주의자의 점증하는 영향은 많은 다른 사람들을 축구경기를 보도록 지역 카페로 몰아넣었다. 1월에 몇 백 명은 센테나리오 공원(Centenario Park)에서 열린 회의에 참여했지만, 내가 20024월 초에 참여했을 때 회의에는 30명이 안 되는 사람이 참여했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당 조직의 전투원이었다. 이웃 연대는 사라졌거나 몇몇 경우에 지역문제를 풀기 위한 위원회를 형성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그 사이에, 두할데 정권은 국가의 탄압 기구를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전환점은 20026월에 있었다. 그때 경찰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교외지역을 연결하는 푸에리레돈 다리(the Pueyrredon Bridge)를 봉쇄하는 시위에 가담한 세 명의 실업노동자를 암살했다. 비디오에는 경찰 경위가 부상당한 시위자의 머리에 총질을 하는 것이 찍혔다. 다음날 몇 천 명이 동원되었다. 시위가 사라지고 난 뒤 정권은 그들을 거리로 몰아넣은 폐기된 건물을 점령한 집 없는 불법 점거자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시작했다. 2002년 후반부 내내 살타와 후후이, 투쿠만 등 북서부에 있는 주에서 노동자와 임금을 받지 못한 고용인 시위는 폭력적으로 탄압 당했다. 2002년 말에, 두할레 정권은 20035월에 새로운 선거를 공표했다. 두할데는 18개월 집권 동안 50%에서 60%로 뛰어오른 천문학적인 빈곤 수치 때문에 불신을 받았고 후보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지명되었고 선거에서 이긴 그의 후계자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Nestor Kirchner)를 지지했다. 2003년에 두할데의 동의를 얻어 법정은 좌파 지배의 중요한 상징 가운데 두 곳(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브루크만 섬유공장과 네귀엔 주에 있는 자논 세라믹 공장)을 포함하여 점거된 노동자가 관리하는 공장을 그들의 소유자에게 반환하라고 지시했다.

정권은 브루크만 공장에 있는 노동자를 해산시킬 수 있었지만 자논 공장에서는 실패했다. 자논에서 부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논 세라믹 공장에서 자주관리

 

파타고니아 지역의 네퀴엔 주에 위치한 자논 세라믹 공장은 아르헨티나에서 대표적인 바닥용과 벽용 타일 제조업 가운데 하나이다. 공장은 무상 토지 사용, 국가차관, 세금면제, 낮은 가스 및 전기료 덕분에 1979년에 4개의 생산라인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 공장이 접수되었을 때, 공채와 사치를 포함하여 7,500만 달러의 빚이 있었다. 이윤을 유용하고 당국에서 빌린 쓸데없는 차관 때문에 빚이 늘어났다.

1998년에, 자논의 사장은 길들인 노동조합 관료의 동의를 받아 백 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그에 대응한 운동은 관료와 고용주에 묶여 있는 지역 노동조합 대표를 대체하기 위해 작업장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이러한 내부 노동조합(internal union)”은 노동조합 관료로 동일시되고 고용주에 의해 해고되었던 사람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작동했다. 조직가는 작업 보호, 공장에서 노동자 권력, 좀 더 나은 노동조건, 가장 중요하게 공개 토론과 공장 집회에서 선거를 위한 요구를 제시했다. 노동조합 관리는 대중 집회를 위한 요구와 다른 요구를 크게 반대했다. 풀뿌리 운동에 가까웠던 공장 회계원이 반대의 증거를 제시했지만, 관리들은 고용주와 함께 회사가 위기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자논 고용주는 낡은 생산 라인을 폐쇄하고 새로운 생산라인을 유지함으로써 세대별로 노동자를 분할하려고 애썼다. 사장들은 유연노동을 도입했다. 그것은 자논 공장을 자동화하면서 고용 조건에 노동자가 중장비를 다룰 수 있는 조건을 덧붙임으로써 모든 여성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게 된 것을 뜻했다. 그러나 1999년 말에 일반 노동자의 운동은 결정적으로 공장 전체 노동조합 선거에서 이겼고 2000년에 그들은 주 전체 노동조합 선거에서 31로 이겼다.

200110월에 공장 점거 때까지, 고용주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고 진료소와 간이식당을 폐쇄했다. 20011128일에 그들은 노동자 대부분을 대량 해고했고 공장을 폐쇄했다. 1130일에, 자논 노동자는 정부에 중재를 청원하기 위해 평화적으로 행진했지만 그들은 잔인하게 탄압 당했다. 노동자는 이웃들, 비고용노동자 센터, 교사와 건강 보험에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와 같은 공공부문 고용인에게 광고전단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슬로건,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노동자 관리 공장은 가톨릭교회와 시민 그룹의 부문을 포함한 사회의 폭넓은 부문에 호소했다. 20023월에, 여러 부문에서 모인 3천명은 감옥에 갇힌 세라믹 노동자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면서 행진했다. 200232일에,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는 공장을 가동하는 문제를 투표에 부쳤다. 여기서 선택은 실업상태로 남아 있느냐, 아니면 달마다 150 페소의 생계수당을 받느냐, 또는 공장을 점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투표는 만장일치로 노동자가 경영하는 공장을 선호했다. 공장 회의는 여성 요리사, 회계원, 숙련노동자, 반숙련노동자 모두에게 똑같이 최고 800 페소의 임금을 지불하기로 확정하는 투표를 했다. 노동자는 행정, 판매, 안전, 생산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공장은 1500명의 가족 구성원을 책임지는 310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노동자의 정책은 원료, 기계부속품, 식량, 작업복을 포함하여 할 수 있는 한 많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사는것이다. 노동자의 소비는 지역의 작은 소매상점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자논 노동자는 노동자 관리 공장과 주택, 공공 작업, 일자리를 위한 실업 노동자의 요구를 모두 방어하는 대중 시위에 함께 결합한 네퀴엔의 MTD와 긴밀하게 작업했다. 지난 15개월 동안, 자논 공장은 노동자 자주관리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다른 노동자 관리 공장은 국가에 의해 점령되었고 노동자를 몰아냈으며, 공장이 사장에게 반환되었다.

여러 요소는 통제를 유지하고 생산을 계속하고 있는 자논 노동자의 성공을 설명해준다. 첫째, 그들은 여러 노동조합(교사, 공공 고용인, 대학교수), 학생, (주교를 포함한) 교회 집단, 그리고 MTD를 포함하는 폭넓은 동맹을 세웠다. 이들 세력은 경찰의 침범을 막고 자논 노동자를 탄압하기 보다는 그들과 협상을 하도록 도시의 시장과 주지사를 억압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둘째, 공장 안에서, 그들의 집회에서 노동자는 공장을 접수하기 전에 높은 수준의 계급 연대와 계급의식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생생하고 공개적인 토론과 다양한 노동자의 이익을 반영했던 합동 위원회의 선거를 조장했다. 몇몇 지도자는 소규모 맑스주의 당의 당원이지만 소수이다.

셋째, 공장을 관리하면서 자논 노동자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단기과정을 포함한 엔지니어와 경영 학교 및 새로운 정권에서 계속 일을 했던 몇몇 행정가로부터 기술적이고 행정적인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지식의 부족을 메웠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일을 하면서 배웠다는 것이다.

자논 노동자는 생산 활동을 마푸체족과 같은 다른 억압받는 집단, 실업 노동자 등등과 연대한 정치적 동원과 결합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 시위에 참여하고 특별한 사건을 위한 집회를 소집하기 위해 작업 교대조를 바꾸었다. 위원회는 거의 날마다 생산과 관계된 결정을 내렸다. 그 위원회는 한 주 단위로 열린 회의에 도로 보고한다. 회의는 회의를 통해 소환되는 집행 책임자로서 최고 행정가를 뽑았다. 두 명의 회계원과 정보 전문가가 공장 장부를 기입했다. 대학의 의료진, 즉 간호사, 의사, 심리학자는 자원해서 날마다 공장에 있는 응급치료 전문가와 함께 작업한다. 공장 심리학자에 따르면, 새로운 책임을 떠맡은 것, 정부의 공장 점거에 대한 공포 등이 일으키는 스트레스는 중요한 건강 문제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몇몇 노동자는 새로운 책임감으로 그러한 두려움을 떨쳐냈고 어려운 직위를 떠맡았다. 공장 규율은 셌다. 규율에는 낮은 수준의 결근과 지각도 있다. 노동자는 그들의 실업자 동맹에서 고용을 늘리기 위해 생산능력을 증가하는 데 열심이다.

자논 노동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에 부닥쳤다. 첫째, 강제로 노동자를 몰아내려는 사법제도의 위협이 있다. 그에 대해 자논 노동자는 노동자 통제 하에 공장을 몰수하기 위해 주 입법부에 호소하는 청원서를 위해 4만 명의 서명을 확보했다.

둘째, 공장은 신용, 자본, 대부의 부족 때문에 약 20%정도만 가동되고 있다. 국가는 수십억을 은행과 민간 독점업체에 쏟아 붓고 있지만 기금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다.

셋째, 노동자는 그들의 마케팅을 개선시킬 필요가 있다. 자주 관리 공장의 평판을 떨어트리기 위한 단결된 작전의 일부로서, 국가와 네퀴엔의 거대 자본가는 자논의 상품을 구매하지 말라고 기업들에 압력을 넣었다. 주지사는 네퀴엔을 사시오라는 슬로건을 떠들어대고 있지만, 정작 세라믹을 자논에서 사기보다는 오히려 브라질에서 수입하고 있다.

넷째, 노동자는 감가삼각 기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수입의 70 퍼센트는 원료 구매에 쓰고, 15 퍼센트는 봉급에 쓰며, 남아 있는 15 퍼센트는 세금, 전기료, 물 값에 쓰고 있다. 새로운 투자나 자본 대체 비용을 위한 기금이 거의 남지 않는다. 노동자는 이러한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어느 지도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있다, 우리는 아무런 경험 없이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18개월 동안 공장을 돌아가게 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 성장하고, 확장하며, 공동체에 알맞고 공동체를 구할 수 있는 한 많은 실업자를 고용할 것이다.”

노동자는 물질적 공격과 체포에 저항하며, 노동조합 관료에 적대하고 패배시키며, 친사장계의 사법 체계, 경찰에 의한 폭력적 공격, 그리고 주지사와 시장의 합동에 의한 보이코트에 공공연하게 저항하는 투쟁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영웅심은 공장을 떠받쳤다. 노동자가 그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충고할 수 있는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고 끝내 지지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좌파뿐만 아니라, 교회와 노동조합, 그리고 실업자를 포함한 폭넓은 동맹을 세우기 위해 공장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폭넓은 동맹과 전문가의 적극적 지지 없이 노동자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파정치의 실질적인 부재와 폭넓은 공동체의 지지는 아마도 자논의 지리적 위치와 훨씬 더 관계가 있다. 그 주에서, 누구든지 다른 모든 사람을 알고 있고 마주보고 함께 작업을 했기 때문에, 분파 투쟁은 훨씬 덜 격렬했다. 작업장에서 동지애는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극복할 만큼 강했다. 마찬가지로 지방 도시에서 공동체의 개념은 더 강하고, 사회적 네트워크는 투쟁에서 사회적 연대의 더 긴밀한 유대를 만들기 위해 가족과 이웃, 사회조직을 연결시키고 있다.

 

 

통신 노동자: 임시직 노동자에서 종신 노동자로

 

200112월 이래 작업장 승리의 또 다른 보기는 통신 회사에 맞선 젊은 임시직 노동자 그룹의 투쟁에서 찾아진다. 그들의 성공은 주로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와 협력 그리고 기업의 사유화에 맞서 성공하진 못했지만 투쟁했던 경험을 지닌 노련한 전투적 노동자의 지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임시직 노동자는 미래의 직업을 위한 실습훈련을 받기 위해 4년 계약을 한 대학실습생이었다. 사실, 그들은 다른 수 백 만의 젊은 노동자처럼 모든 사회적 이득에서 제외된 계약 노동자였다. 임시직의 한 달 봉급은 그 지방에서 115 달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00 달러까지 여러 가지다. 대학은 고용 대리인으로 행동한 것 때문에 그들의 봉급 가운데 10 퍼센트를 받았다. 그러나 종신 노동자는 연금, 건강보험, 휴가와 더불어 한 달에 350 달러를 받고, 연말이 되면 보너스로 두 달 임금을 받는다. 처음 6개월이 지나고 나서 임시직 노동자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첫째, 일자리는 그들이 대학에서 받았던 훈련과 전혀 관계가 없다. 둘째, 노동시장에는 다른 일자리가 없다. 임시직 노동자는 그들이 좀 더 나은 자리로 옮겨 갈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1년 넘는 동안 임시직 노동자는 비밀 조직을 유지했고 보고서를 펴냈다. 200112, 대중봉기가 터지기 직전에, 통신 회사는 임시직 노동자의 지도자를 해고했다. 종신 노동자와 함께 일했던 임시직 노동자는 대부분 가장 잘 조직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활동했던 노동조합대표가 지원과 연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임시직 노동자만이 작업하는 다른 작업장으로 확산시킬 파업을 조직했다. 노동조합관료는 파업을 깨트리려고 시도했지만 20011219~20일의 대중 봉기에 앞서 거리에서 일어난 대중시위 때문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임시직 노동자는 파업에서 이겼다. 그들은 종신노동자가 되었고 새로이 고용된 임시직 노동자를 위해 좀 더 좋은 보호와 좀 더 짧은 훈련기간을 확보했다. 분명히 임시직노동자는 세대 간 연대와 임시직 노동자를 종신 노동자에서 분리시킨 경계와 두려움을 깨트렸기 때문에 이겼다. 나이 많은 노동자는 임시직 노동자가 자신을 대체할 것을 두려워했고 임시직 노동자는 종신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여 자신들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투적이고 계급의식적인 노동조합 대표자가 그 둘을 연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 대표는 노동조합 관료에 맞설 수 있는 경험과 능력을 지녔고 승리를 위한 조직적 수단을 제공했다.

 

 

리오 투르비오 광산노동자가 사유화에 맞서다

 

리오 투르비오는 아르헨티나의 황폐한 남부 끝에 있는 광산 도시이다. 그곳에는 전투적인 광부노동조합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들은 광산을 다시 국유화하는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핵심 노동조합 지도자는 맑스주의 당의 당원이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노동조합 지도자이고 두 번째로 충성스런 당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이 제시한 해결책과 분파적 실천을 빈번히 따르지 않았다.

공장은 1994년에 사유화되었고 부분적으로 2002년 초에 다시 국유화되었다. [the Light and Power Company]의 노동조합 관료들이 다른 개인 주주들이 했던 것처럼 25 퍼센트의 주식을 갖고 있다. 부분적인 재국유화는 지역 광부노동조합, 다른 공공부문 노동조합, 그리고 3000(리오 투르비오 주민 14,000명 가운데 21 퍼센트)의 주민 공동체 사이의 공동 행동의 결과였다. 대중의 공동체 참여와 연대의 실천은 200112월 사건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있었다. 노동자의 부분적인 성공 뒤에 공동체 회의는 사라졌다. 공동체 회의는 마을이나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쟁점이 있을 때 다시 나타날 것이지만. 공동체 집회의 핵심은 국가가 사유화된 기업이 부실경영과 반투자(disinvestment)때문에 파산하는 것을 막을 책임을 진다는 광산 기업의 계약조건이었다.

2003년에, 국가의 노동자 다수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에 투표했다. 좌파 노동조합주의자는 그들의 노동조합 지지자의 투표행위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기권 캠페인은 실패했고 맑스주의 당의 후보는 거의 등록하지 않았다. 맑스주의 노동조합주의자들은 자신들만 만족시키는 슬로건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당을 포함한 좌파 정당을 비판했다. 그리고 좌파 정당은 그들 자신의 목소리의 메아리를 많은 노동자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혼동했다. 리오 투르비오의 좌파 노동조합 지도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맑스주의 노동조합지도자들과 달리 200112월의 대중봉기를 혁명 이전 상황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거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혁명적 구조가 없다.”는 것이었다. 광부노동조합지도자에 따르면, 20027월에 국가는 광산에 개입했고 기업을 위해 결정을 내리는 관료를 임명했다. 이런 행위는 이전에 결정을 내렸던 대중회의의 신뢰를 훼손한 것이었다. 공장 회의의 쇠퇴는 대중 동원의 쇠퇴로 끝났다.

 

 

결론

 

아르헨티나 정치는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의 사임을 강요했던 대중봉기에서 임시로 뽑힌 대통령의 취임과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안정의 창조까지 완전히 한 바퀴 돌았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거리 투쟁에서부터 투표소까지, 혐오한 전통 정치인에서부터 새로이 뽑힌 대통령이 생활수준의 하락을 뒤집고 경제를 다시 활성화할 것이라는 기대까지 경험했다. 이런 원상복귀는 맑스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수평주의자 등등 좌파가 6개월 넘게 나라 전체를 휩쓸었던 분노와 불만을 조직하고 전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의 결과였다. 만일 객관적 환경이 급진적 전환에 유리했다면, 200112~20027월은 거리의 대중운동, 겉보기에는 아니지만 생활수준에서 프롤레타리아로 떨어진 중산층, 2,500개의 방치된 공장 가운데 160개 공장을 접수하기 위한 일자리를 잃은 공장 노동자의 운동, 그리고 격퇴당하거나 결정적으로 패배 당함으로써 신뢰를 잃은 지배계급이 함께 나타난 시기였다. 전술적 과오의 범위를 넘어서, 여러 이론적 쟁점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첫째, 대규모 대중반란은 혁명이 아니다. 많은 좌파와 아나키스트가 그랬듯이, 그들이 혁명 이전 상황에 있다고 결론내린 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불만에 찬 실업자와 중간층의 다수와 접촉을 잃게 하면서 운동에서 빠르게 이탈하게 만들었다. 둘째 이론적 주장은 어떤 조직도 지도부 역할을 맡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고 국가권력 접수로 나아가는 정치적 기획을 밝히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통일된 응집력 있는 지도력의 부재에서, 지적 아마추어 평론가와 지역 지도자는 자치론 숭배나 허영심에 찬 전위주의(vanguardism)라는 이름으로 운동을 분할했다. 그들 모두는 고개를 뻣뻣이쳐들고 대중과 공명하지 못했던 그들만의 슬로건을 믿고 있었다.

셋째 주장은 사회 운동, 심지어는 권력에 대한 정치적 소명을 결여하고 정치 투쟁을 거부했던 사회운동이 마침내는 전통적인 정치인과 정당에 의해 지배되었던 정치체제 안에서 압력 집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두 바꿔야 해!”는 전도유망한 좌파 후보들을 겁주었고 끝내는 전통적 우파 정당에 의한 선거정치의 완전한 지배로 끝났다.

마지막 그리고 결정적 주장은 주민 대중이 전통적인 정당에 반기를 들고 거부했을 때, 그들은 이미 봉기를 준비하지도 못했고 새로운 정치 투쟁 형태를 조직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유권자에게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는 통일되고 확실한 대중적인 정치 구조를 모색했다. 활동가의 소수만이 권력을 위한 파업을 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분열되었고 권력을 얻으려는 진지한 시도를 조직할 수 있는 숙련된 지도부를 지니지 못했다. 분명히, 봉기의 환상은 200112월과 20021월초의 한창 때가 지난 뒤 시들어졌다. 중요한 도전이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3~4백만 실업자는 조직되지 않았고 노동조합 사장들은 개인 회사의 고용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유지했다. 수십만 명의 급진화된 활동가는 더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5개의 경쟁 분파로 분열되었을 때 변화의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단결된 대중적 선거 대안을 조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또한 선거를 거부했던 아나키스트, 본성상 정치를 타락한 것으로 보고 거부했던 운동 지도자들, 그리고 2퍼센트 유권자를 굳히려고 유일한 지도자를 내세웠던 맑스주의의 한 종파가 결국에는 이런 기회를 놓쳐버렸다.



전환을 위한 잃어버린 기회는 그 이야기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사례연구는 중요한 승리가 얻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논 공장의 노동자는 노동자 자주관리 공장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젊은 통신 노동자는 임시직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계약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리오 투르비오 광산 노동자는 대중 회의가 노동조합주의자와 실업자 집단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2월 봉기는 아르헨티나에서 수백만 사람들을 위한 판단의 기준으로 남아있다. 대중 연대와 정권에서 변화라는 영웅적인 나날은 대중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했는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1. Monthly Review, Sept, 2003, vol. 55, no. 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