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미로 속에 빠진 룰라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8월호

미로 속에 빠진 룰라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12

미로 속에 빠진 룰라

 

 

FRANCISCO DE OLIVEIRA

 

200610월 루이스 이그나시오 룰라 다 실바는 브라질 대통령에 다시 뽑혔다. 우리는 룰라의 재선을 통해서 노동자당(PT) 집권 시기에 브라질의 정치적 지형이 다시 구성되었던 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1990년대 헤르난데스 엔리케 카르도주 정권 하에서 규제완화, 사유화, 구조조정의 폭풍 그리고 이 때문에 발전주의 시기 동안에 형성되었던 산업노동자계급의 해체는 경제와 정치 그리고 계급과 대의제 사이에 세워진 모든 관계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이러한 찢어짐은 불확정의 시대로 귀결되었으며, 마침내 룰라가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배경이 되었다. 룰라가 당선되고 나서 한편으로는 사회­자유주의적인 동냥품에 의해 지탱되는 정당의 국가화와 네오­포퓰리즘과의 새로운 결합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수뢰사건이 반전된 헤게모니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브라질 계급통치의 새로운 형태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앞으로 나는 브라질에 미친 전지구적인 자본의 강한 영향력[브라질 경제의 외부적 취약성옮긴이 첨가]불확정의 시대의 결과들을 중층결정했던 방식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2006년 대선 자체에 관한 짧은 논평이다. 브라질에서는 투표가 의무적이지만, 유권자의 23%가 아예 투표하러 오지 않았으며 유권자의 8%는 빈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던져 넣었다. 이것은 유권자들이 대선에 관심이 없었거나 투표할 후보자가 없었음을 뜻한다.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31%라는 수치는 브라질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가장 높은 수치이다. 시들한 선거의 현실은 거리에서 더욱더 뚜렷이 드러났다. 거리에는 선거의 열기도 전혀 없었고, 노동자당의 현수막도 또는 다른 정당의 현수막도 걸려있지 않았으며, 어떠한 대중동원도 없었다. 유권자들의 대다수는 선거가 있던 일요일에 서둘러 자신들의 시민의 의무를 이행했고, 많은 사람들은 곧바로 해변으로 떠났다.

1011차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룰라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2년 동안 룰라 정부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부패스캔들에도, 룰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예상에 따라 룰라의 선거 캠페인은 자족적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그가 다른 후보자들과의 토론을 거부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고의적으로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면 말이다. 룰라는 그의 경쟁자인 브라질사회민주당(PSDB)의 제랄도 알키민이 41.6%를 득표하는 바람에 48.6%뿐이 득표하지 못했다. 반면 노동당 좌파 탈당파인 사회주의자유당(PSOL)과 통합노동자사회주의당(PSTU), 브라질공산당(PCB), 콘슈타 뽀퓰라(Consulta Popular)의 연합인 좌파전선(Left Front)7%를 밑도는 득표율을, 65십만 표 가량을 얻었다. 1차 투표에서 대통령은 의도적으로 노동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난 재선이 위협받는 것을 보면서 당황한 룰라와 그의 참모들은 노동당과 노동당 외부의 좌파 진영에게 호소하였다. 룰라의 선거진영은 전 브라질사회민주당 대통령인 헤르난데스 엔리케 카르도주가 그토록 가혹하게 추진했던 사유화 프로그램을 알키민이 착실하게 실행해 나갈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브라질 사람들은 알키민을 룰라의 완벽한 정치적 반대파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상파울로 밖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비열하고 성미 까다로운 독재자의 외모를 하고 있으며, 브라질에서는 심각한 약점인 파울리스타(paulista: 상파울로 토박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다. 그는 어떤 쟁점에 관해서든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텔레비전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알카민이 1차 투표에서 그토록 많은 득표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와 그의 득표율이 10292차 결선투표에서 39%로 떨어진 이유이다. 2차 결선투표에서 룰라가 거둔 61% 득표율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은 카르도주 정부가 시작했지만 노동당이 확대했던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최저생계비지원정책), 자산조사에 근거한 복지지출(means-tested welfare payment)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장 많은 볼사 파밀리아를 지원받는 빈곤한 북동부에서 룰라는 70%를 득표하였다. 재선된 대통령은 최종결과가 발표되고 난 뒤 첫 번째 인터뷰에서 은행가들은 자신의 집권 시기만큼 돈을 많이 벌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선거를 가난한 자들과 하층민들의 승리로 평가하면서 부자들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불평하였다. 일반적으로 외국 언론들은 브라질 대선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즉 국가는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로 분열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승리하였다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1차 투표에서 알카민이 거둔 득표율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일 유권자의 40% 이상이 정말로 부자로 분류될 수 있다면 실제로 기분 좋은 일이며, 브라질은 이미 제1세계 국가로의 전환을 마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101일의 주지사 선거는 마라냐웅주와 바이아주에서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그곳에서 무소불위의 카키케들이(caciques: 지방정계의 보스들) 자신들의 후보자들이 쓰러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바이아주는 그저 정치적으로만 중요한 주이지만, 노동자당은 근래 네 명의 주지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통념상 서로 상반된다고 생각된 이데올로기적 경향들이 연합하였기 때문에, 지방선거는 연합과 제휴의 난잡한 범벅과 정당의 이니셜, 즉 정당의 일반적인 규준에 대한 공공연한 배신으로 특징 지워졌다. 브라질공산당의 계승자인 인민사회당원이자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콩(soya) 경작지를 갖게 된 마뚜 그로수주의 주지사는 공개적으로 룰라를 지지했다. 그러나 득표율 5%의 장벽을 넘지 못해 근래 악전고투하고 있는 인민사회당(PPS)은 알키민을 지지했다. 주로 정치적인 소수파에서 벌어졌던 이러한 일들은 마치 선거구민들을 거의 대표하지 못하고 권력이 정치적 명사들에게 집중된 브라질 정치의 전통적인 양태로 회귀한 것처럼 보인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동안에, 즉 브라질 정치의 창안의 시기에 노동자당의 창당은 브라질 권력의 장 내에 대중정당의 가치와 유효성을 확립했었다. 그런데 그 시대는 이제 끝나가는 것 같다.

101일의 의회선거 결과는 또한 대통령 결선투표의 압도적인 승리와 모순된다. 상원에서는 바이아주와 마라냐웅주에서 패배했던 우익 정당인 자유전선당(PFL)이 여전히 최대분파로 남아있게 되었다. 하원에서는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이 최대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과거 브라질민주운동당은 1964년부터 1984년까지 집권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포괄적인 정당(umbrella party)이었지만, 지금의 브라질민주운동당은 최소한의 강령 통일도 없는 고전적인 카키케들의 당이 되었다. 게다가 이 정당은 상징적이게도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노동자당 또는 브라질사회민주당과 연합하지도 못했다. 노동자당은 여전히 의회에서 제2당이지만, 처음으로 하원의원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룰라는 브라질민주운동당과 협정을 맺었다. 이 때문에 룰라는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 재임 시절보다 더 약해지고 [다른 정당이나 다른 정파의옮긴이] 지지의 대가를 더 비싸게 치룰 룰라 정부의 모습은 각료가 임명되는 과정과 주요 연방행정체가 구성되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정부가 지금은 좀 더 조심하고 있지만 부패사건에 대한 공적인 논의가 종결된 것도 아니다.

10월의 몇 주 동안은 룰라의 좌파적인 정책 때문에 좌파의 공간이 넓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필자도 희망을 갖고 결선투표에서 룰라에게 투표했다. 이 환상은 곧 무너졌다. 당 이데올로그이자 주정부 담당 장관인 타루소 젠로와 룰라의 강력한 참모장인 지우마 호세피를 포함해서 경제정책의 변화에 대한 희망을 표명했던 몇몇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재선된 대통령에게 질타를 받았다. 룰라의 첫 번째 성명은 그의 경제 아젠다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룰라는 중앙은행장으로 엔리케 메이렐레스를 유임시켰고, 실각했다가 이제 다시 복귀한 전 재무부 장관인 안또니오 빨로씨를 옹호하였다. 룰라가 각료로 지명할 가능성이 있는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은 주제 게르다우 요한피터이다. 그는 브라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강복합체의 소유주이며 사업계 안에서 가장 반동적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는 룰라의 두 번째 재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회의가 있다. 그리고 누구도 정부 정책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바라지도 않는다. 룰라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아마도 볼사 파밀리아 프로그램이 확대될 수도 있고, 사웅 페르난도 강의 흐름을 바꾸어 가뭄이 심한 북동부주에 도움을 줄 수도 있으며, 몇몇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는 일에 착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불확정의 시기

 

자본의 전지구화, 사유화, 그리고 (분자적이고 디지털화된) 3차 산업혁명의 압력 아래에서 반­주변적이고 산업화된 경제는 변화를 겪었다. 이전 글에서 나는 이러한 변화를 반은 포유류이고 반은 조류인 오리너구리로 특징지은 적이 있다. 이러한 변화는 외적종속과 임시고용직 노동력을 결합하였으며 불완전한 축적(truncated accumulation)과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결합하였다. 30년에 걸쳐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의식의 민주화 수준은 여전히 못 미더운 상태로 남아있다. 공적자금에 접근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계급은 이러한 못 미더운 상태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여러 현상(features)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계급의 한 분파는 1970년대와 80년대의 자생적인 노동운동을 통해서 성장한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운동은 90년대 구조조정에 의해서 거의 모두 축출되었지만, 연기금 위원회의 노동자 대표로 임명된 이 운동의 지도층은 그들의 지위에서 발휘되는 힘 때문에 브라질 금융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제 이들이 하게 될 일은 높은 투자 수익률을 추구하면서 감원, 매각(sell­off), 공장폐쇄를 강요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요 기관투자자들은 Previ, Eletros, Petros, Funcef Fund 등이다. 이러한 기관투자자들의 이름을 통해서 그들이 어떤 회사 또는 어떤 분파 출신인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은 주식거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며, 국가의 사유화 정도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002년 훨씬 전에도 이러한 연기금 경영진층은 노동자당의 핵심 지도부 내에서 형성되어왔다.

노동운동 지도부들이 연기금 경영진으로 선출되었던 것은 노동운동의 기반이 심각하게 침식되었던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 1989년과 1999년 사이에 유급직(salaried posts)[시간급이 아닌 월급직옮긴이] 감소는 32십만 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2백만명의 유급직은 산업분야에서 감소되었다. 실업자의 수는 18십만 명에서 76십만 명으로 크게 늘었고, 경제활동인구의 실업률은 3%에서 9.6%로 뛰었다. 그러는 사이에 1990년대에 생겨난 5개의 일자리 가운데 4개의 일자리는 시대착오적으로 비공식 부문(informal sector)’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자리들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보수도 매우 적었다. 구조조정이 이루어진 생산과정은 불안정한 주변부 포디즘 때문에 형성되었던 계급적 단결이라는 전망과 자발적인 집합적 정체성을 침식했고 대신에 개인들 사이의 경쟁이라는 가치를 심어주었기 때문에 주체성의 새로운 형식을 낳았다. 이렇게 원자화된 노동과정은 노동조합이 아직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게다가, 노동자의 40%가 최소한의 법적보장도 없는 비공식 고용상태에 있으며, 최소한 10%가 공공연한 실업상태에 있다. 어떤 사회계급이 이와 같은 폭풍을 견딜 수 있을까?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일어난 역설적인 현상은 그의 당선이 자신을 지지했던 계급의 광범위한 해체의 전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2002년 선거 캠페인은 변덕스럽게 심지어는 도박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정치적 국면의 불확실한 성격이 명백해졌다. 즉 유권자들의 지지가 거의 무작위적으로 갑자기 상승하거나 심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기성의 정치인 가운데 그 누구도 이 상황을 판독해 줄 수 있으며 이미 알려진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로 번역해 줄 수 있는 문법이나 담론 코드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 룰라의 선거 마케팅 참모인 두다 멘도샤는 다른 후보의 참모들이 하듯이 룰라의 구체적인 자질을 찾기 보다는 룰라의 비­구체적인 면을 강조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전략이었다. 슬로건 룰린야, 평화 그리고 사랑은 처음에는 국가­생산력우선주의적인(national­productivist) 목소리처럼 들렸지만 숙고된 반­담론이었고 그저 룰라의 노동운동 경력의 옛 자취일 뿐이었다. 룰라의 런닝메이트인 주제 알렌카르도 성공한 사업가이며 룰라와 같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노동당화된 캠페인은 숭고한 박애의 아우라를 통해서 북동부의 이동노동자들과 미나스제라이주의 시골뜨기들을 한데 묶을 수 있었다. 가란훈스의 길’, 희망 없는 지방을 구하라는 경이로운 임무.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불확정의 시대의 중요한 행위자인 미디어 기업조차도 선거운동 초반부에는 지난날처럼 계급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분열이 유지될 것이라고 믿었다. 미디어 기업은 선거여론조사를 통해서 다른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얼마나 받지 못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 뒤에 비로소 룰라와 타협을 했다. 특히 글로보와 같은 매스미디어 복합체는 큰 부채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태도를 바꾸었다. 즉 선거 다음날 글로보는 가난한 소년이 대통령궁으로 가는 과정을 디즈니화해서 방송했던 것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노동자당의 분기점은 오염된 찌에테 강의 강둑에 위치한 상파울로의 노보텔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브라질 인민에게 보내는 편지또는 7월의 항복문서[강경노선의 포기옮긴이]가 언론을 향해서 낭독되었다. 카르도주 정부의 모든 공약을 실제로는 뛰어넘는 것이지만 존중하겠다는 노동당의 서약은 기업가 계급과 전지구적 금융기관에게 노동자당은 로마[달러제국옮긴이]에 경의를 표할 것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룰라 정부는 히베이로 프레토시 시장 재임시절부터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페티스타(petista) 안또니오 빨로씨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함으로써 그리고 보스톤 은행의 전()은행장이자 브라질사회민주당의 경력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엔리케 메렐레스를 중앙은행의 은행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이 메시지를 다시 단언하였다. 빨로시와 함께 전()당의장이자 노동자당 강령의 전환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조세 디르세우, 공보장관으로 임명된 루이즈 구쉬켄, 노동자당 의장으로 임명된 조제 제노이누가 핵심지도층에 포함되었다. 다른 대부분의 각료들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노동자당의 연정파트너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직책을 요구했고, 다른 직책들은 중요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한 옛 친구들에게 수고와 위로의 대가로서 수여되었다. 악명 높은 사업가들은 시민사회 대표의 자격으로 이해관계의 영역에 따라 그리고 수출실적 순위에 따라 적합한 각료직을 수여받았다. 카르도주 내각과 뚜렷하게 대조되고 브라질 좌파 인텔리겐챠의 풍부한 전통이 있지만 룰라의 내각에는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이 한 명도 없었다. 이 사실은 당의 노멘클라투라가 추진하는 당 전략의 공공연한 독점을 드러내준다.

아마도 룰라와 그의 마케팅 참모만이 반대세력[룰라의 옛 노동자 기반층]이 이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을 만큼 감소해왔기 때문에 룰라가 마음대로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변화는 70년대 말과 80년 초 군부독재에 멎선 저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1984년에 이르기까지 브라질 정치의 재창조를 위해 투쟁한 광범위한 운동의 주요한 참조점이었던 노동자 당에게는 사실상 너무나도 멀리 나아갔다. 그 때문에 이런 정책은 오직 룰라가 체현하고 있는 카르스마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럼에도 노동당이 정부에 참여하게 되면서 룰라의 카리스마는 강격한 마취제처럼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룰라의 카리스마는 젬 테라(Sem Terra: 땅 없는 농민들의 운동)를 비롯하여 코르도주 정부 시절 일어난 거의 모든 운동들의 마비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또한 룰라는 재빨리 노동조합총동맹(CUT)의 지도부를 교체하였다. 노동조합총동맹의 가장 큰 조합 중 하나이자 공적연금 개혁에 완고하게 반대했던 교사 노동조합의 위원장인 조앙 펠리시오는 노동조합총동맹 위원장직에서 사임할 것을 권고받았다. 그리고 룰라는 그 자리에 제철노동자들의 지도자였던 루이즈 마링요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제철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은 구조조정을 통해 아주 약해졌기 때문에 지금은 산업적인 중요성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두 명의 전() 은행노동자였던 구쉬켄과 히카르도 베르조이니는 내각의 요직에 앉게 되었다. 특히 히카르도 베르조이니는 연금개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물론 이 둘은 전()은행사무직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계급의 일원으로서 내각의 요직에 앉게 된 것이다. 얄궂은 것은 독재정권 시절에 어용노조에 맞서기 위해서 만들어진 노동조합총동맹이 룰라 정권 아래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위한 전달벨트로 변형되었다는 점이다.

 

 

금융화의 대가

현기증 나는 [사회관계의] 해체그런데 이 해체 덕분에 룰라의 당선이 가능했다뒤에 룰라는 권력 시스템을 다시 구성하기 시작했다. 룰라의 권력 시스템의 재구성은 대외적으로 정향된 그리고 금융화와 수출주도형 성장을 더 강하게 추구하는 [역자첨가: 정책적] 전환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지구화된 자본에 의해 과잉 결정된 지배관계와 보조를 맞추어 가는 것이다. 수출을 주도한 것은 팽창한 기업농업 분야이다. 다른 산업분야는 국가적인 규모에서 산업 간의 견고한 관계 또는 자립적인 성장 프로세스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수출증가세를 보이는 분야는 저부가가치 상품 분야였다. 이러한 분야들은, 토지를 빼앗긴 노동력에 근거하고 있는 기업 농업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인 이익과 부의 강한 집중으로 향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조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브라질의 반­주변적인 경제에서는 자본화란 언제나 국가와 단단하게 얽어 매여 있다. 얽어 매임의 가장 최근의 형태인 금융화도 공기업의 연기금을 매개로 국가와 연계된 자본(state­linked capital)에 의존해 왔다. 그리고 군부독재는 이러한 얽어 매임의 형태를 브라질은행의 프레비(Previ)제도를 본뜬 민영사회복지보험의 형태로 발전시켰었다. 1988년 헌법은 이 일을 지금은 브라질 사회경제개발은행(BNDES)의 주요 투자자인 노동자지원기금(FAT)을 설립함으로써 마무리 지었다. 요즘에는 새로운 국내의 금융도구, 즉 연기금과 정부가 채무보증한 거래에 제법 의존하고 있는 은행제도를 수단으로 더 많은 외국인 투자를 끌어 오려는 시도가 있다. 궁극적으로 이와 같이 외국자본의 흐름에 의존하는 것은 주변부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더 심화시킬 뿐이다. 10배로 불어난 국가 채무를 지켜보았던 카르도주가 말했듯이 ?채무를 통제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정부를 통제하는 것은 바로 채무이다.? 외부자금정책은 채무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자본축적을 방해할 것이다. 또한 외부자금정책은 수입(income)을 금융제도로 집중시키는 강력한 기제로서 작동한다. 은행의 이윤은 노동자당 정권 하에서 경이적인 신기록을 세울 만큼 상승하였다.

룰라 정부의 중요한 입법들은 브라질에서 금융화를 가속화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엘루이자 엘레나와 다른 당원들을 당에서 축출한 대가로 얻은 2004년의 연기금 개혁은 노동자당 정권하에서 새로운 투자­펀드 계급이 거둔 첫 번째 승리였으며, 확정급여형에서 확정기여형으로 두드러진 전환을 나타내준다. 우리가 보았듯이 하늘로 치솟는 이윤율은 은행이 사상 최고치의 이윤을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금융은 자본축적의 전반적인 상승세를 촉진할 수 있고 국내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아직 입증하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이자지급과 같은 금융 이윤은 제조업 분야의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친다. 금융 이윤이란 기업 엘리트의 수입을 금융제도로 이전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비용상승 때문에 회사는 실질임금을 삭감하게 되고, 다시 실질임금의 삭감은 일반적으로 사회활동의 축소나 노동력 착취율의 증가로 귀결된다.

노동자당 감시 아래에서 펼쳐진 룰라의 사회자유주의적 복지주의 정책들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코르도주의 정책의 연장이다은 제조업 분야와 산업노동자계급의 지속적인 파산과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룰라의 이러한 사회자유주의적 복지주의 정책들은 포메 제로(Fome Zero: 기아퇴치운동)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포괄적인 볼사 파밀리아로 통합되기 이전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증식되었다. 11백만이 넘는 가구들이 볼사로부터 1달에 1가구 당 최대 95헤알(40달러)의 지원금을 받는다. 유급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이에 비례해서 지원금을 받는 사람이 감소할 수 있다면, 볼사는 빈곤의 악순환, 즉 모든 브라질 국민을 포괄하는 국가발전주의 정책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볼사 파밀리아는 부가적인 선거 효과를 가지고 있는 기능화된 빈곤을 위한 정책이다. 볼사 파밀리아 또는 다른 국가 구제의 수혜자로 남기 위해서는 볼사 파밀리아를 포함한 국가 지원을 받기 위한 법적인 충족요건인 투표를 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이, 2006년 룰라의 지지자들은 볼소에스(bolsões: 최저생계비를 지원받는 사람들)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월급과 뇌물

룰라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라는 카르도주의 정책들을 이어가고 심화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은 조금 놀라울 뿐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은 노동자당이 지난 2년에 브라질 정치를 뒤흔들었던 일련의 부패스캔들에서 중요 등장인물로 떠올랐고 이로 인해 자신들의 윤리적 자산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부패스캔들이 경제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부패스캔들이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2005년부터 룰라의 핵심 수뇌부대부분은 부패스캔들에 연루되어갔다. 로베르투 제퍼슨 하원의원이 20056월에 노동자당의 관리들이 의원들에게 정부안에 지지하는 대가로 달마다 3만 헤알(12,675 달러)의 뇌물을 주었다고 폭로한 뒤 그리고 제노이누의 한 측근이 속옷에 10만 달러와 여행 가방에 2십만 헤알(85천 달러)을 지니고 있다가 체포되고 나서, 조세 디르세우와 노동자당의 재정위원장인 데루비우 소아레스, 그리고 조세 제노이우가 사임해야만 했다. 20057월에 구쉬켄은 그의 전()동료에게 수익성이 좋은 국가 계약을 수주해주었고 그로인해 장관직을 박탈당했다. 안또니오 빨로시는 20058월에 히베이로 프레토시의 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쓰레기수거 회사로부터 달마다 5만 헤알씩 받아온 혐의로 고발되었다. 결국 안또니오 빨로씨는 그가 브라질리아에 있는 호수가의 한 맨션에서 현금이 가득 담긴 여행 가방을 건네받는 장면을 진술한 목격자를 매수하려고 하다가 20063월에 사임하였다. 20069월초에는 노동자당 노동자들이 브라질사회민주당 상파울로주 주지자 후보인 조제 세하에게 17십만 헤알(8십만 달러)과 함께 서류를 건네는 장면이 발각되었다.

잘 알려져 있지만 대통령의 낙천적인 반응은 그들 모두는 비리를 저질렀다.”였다. 그러나 어쨌든 입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룰라의 낙천주의가 그저 표면적인 것이며 노동조합 시절부터 전통적인브라질 정치문화의 최악의 관습들에 익숙해진 한 정치가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브라질의 심각한 사회 불평등은 사회관계의 근대화가 이런 세습주의를 뿌리 뽑기보다는 새로운 형태로 바꾸었을 뿐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브라질의 정당정치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창당된 노동자당이 어떻게 이와 같은 마피화된 반­공화적인 부패의 기획자가 되어버렸는가? 2005년과 2006년의 스캔들을 예상했었다는 주장 없이도, 오리너구리 모델은 이러한 사건들을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노동자당과 노조의 지도층이 주요 연기금을 통제해 왔다는 사실을 주목해 본다면, 노동자당의 뻔뻔한 부패는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브라질의 금융체계 안에서 연기금이 갖고 있는 중요한 비중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경제 집단들 사이의 마피아스타일의 투쟁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1990년대 내내 브라질은행의 연기금인 프레비는 발레 두 리오 도체라는 광산회사의 사유화를 위한 입찰을 성사시켰던 채권국회의와 한통속이 되어서 일했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의 이와 같은 문란한(promiscuous) 접촉은 룰라의 집권 시기 동안 번성하였다. 즉 정부는 일상의 공적영역(concourse)을 재계와 관련시키고 부패의 모든 수단에 노출시켰다. 거대 국영기업을 경영하는 신계급은 곧 전지구화된 대부르주아들의 핵심층과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브라질경제사회개발은행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개발은행이고, 페트로브라스는 남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유회사이며, 민간은행 가운데 브라질 은행보다 규모가 큰 은행은 없다.

노동자당이 빠진 윤리적인 구렁텅이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예상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부패스캔들이 마른하늘에서 벼락 치듯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부패스캔들의 토대는 지방 관리들의 일련의 작은 스캔들에 의해, 당 지도층의 연기금 관리자로의 전환에 의해, 그리고 당의 관료화에 의해 형성되었다. 기번의 언급을 부연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당의 쇠락이 지난한 과정이라면, 노동자당의 타락은 갑작스러웠고 권력을 잡는 동시에 완료되었다. 2만 명의 관리를 임명하는 만년필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 대통령은 단지 3백 명 만을 임명한다은 투사를 공무원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에 부패의 주요한 원인이다. 당은 이제 정부의 전달벨트가 되었으며, “견고했던 모든 것은 정계의 실력자들을 위한 직책으로 녹아버렸다.” 정부 각료와 부처 공무원들의 대다수는 브라질 평균임금의 몇 배나 되는 임금을 받고 있으며, 거대 규모의 국영기업의 마하라쟈(Maharajah)’들은 최저임금의 30배가 넘을 정도로 임금을 끌어올렸다. 당이 국가기구를 장악하기는커녕 실제로 벌어진 일은 국가가 당을 장악한 것이었다.

 

 

헤게모니를 위한 조건

 

사회변혁의 가능성은 다시 한 번 더 무한정 지연되었다. 그 탓에 브라질의 현재상태가 무한정한 연장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노동자당과 연계된 사회운동과 노동자당이 그람시적 의미에서 헤게모니적인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때는 바로 창안의 시대동안이었다. 노동자당의 슬로건은 시민개념을 확장하였고, 그로인해 노당자당의 슬로건의 영역은 사회투쟁의 일반화에서부터 시민권에 대한 요구로까지 확대되어 나아갔다. 즉 세습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인민에 의한 공공지출의 통제와 인민에 의한 국가업무의 감독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브라질 역사상 보기 힘든 공화주의적인 쇄신(republican renewal)이었다. 카르도주 정부만큼이나 신자유주의적인 현 정부조차도 이러한 요구들을 참작해야만 했다.

오늘날 존재하는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도 이와 같은 국가적인 헤게모니 프로젝트는 여전히 사고 가능한 것일까? 2003년에서 2004년 사이에 백만장자의 수는 6% 가까이 증가한데 비해서 경제규모는 0.3% 가량 축소되었다. 공공장소에 대한 일반적인 경험은 계급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에 때문에 환영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 편에서는 명문학교와 유명 브랜드 병원, 헬리콥터에 대한 항공교통 통제를 필요로 하는 상파울로의 200개가 넘는 헬리콥터 착륙장, 공권력보다 더 서열이 높은 청원경찰(private police)이 있다. 반면 파벨라스(favelas: 대도시의 빈민 판자촌)와 북동부의 빈곤한 농촌에서는 생존을 위한 냉혹한 쟁탈전이 존재한다. 지난 몇 년에 물질적 평등의 가능성이 너무나도 희박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상징적 질서에서마저 물질적 평등이라는 말을 그려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사회하층부로부터 들려온 대답은 사적인 폭력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이다. 즉 평등의 불가능성에 의해 거부된 것이 범죄를 통해 추구되고 있다.

 

브라질의 심각한 불평등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브라질은 끊임없는 신자유주의적인 사유화와 탈규제화의 폭격과 시민권에 대한 공격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은 민주화된 개인주의가 아닌 이제는 정치범죄로까지 확대된 야만(주의)의 강화를 낳았다. 산토 안드레시 시장인 깰로스 다니엘 살인사건, 캄피나스시 시장인 안또니오 다 코스타 산토스 살인사건과 같이 아직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은 노동자당의 과격파, 심지어는 지도부가 이 범죄에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남겨두었다. 이 의혹은 여전히 풍문으로 떠돌고 있다. 그런데도 노동자당은 즉시 이 사건을 보통의 범죄사건으로 처리했다. 희생자들의 가족은 계속 이 사건들이 정치적 살인이라고 주장했고, 그럴 때면 검찰은 언제나 동일선상에서 수사할 뿐이었다. 다른 남미 국가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는 정당 마피아주의의 한 형태는 브라질에서 풍토병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현존하는 계급관계의 신자유주의적인 전복에서 출현한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명민하게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해체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세력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투자­펀드 관리자라는 새로운 계급이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층위는 신자유주의 모델이 주변부에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에 대해 일관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다. 즉 수출과 금융화의 지향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분파를 넘어서 좀 더 광범위한 자본주의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다. 이러한 해결책의 부재와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압력의 결핍 때문에 노동자당은 대항­헤게모니 전략을 가지고 이 문제에 대응할 수 없다. 정부 행정직의 점유를 통해 공적자금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권을 갖고 있는 동안에만, 노동자당은 단지 네오­포퓰리즘 프로그램과 지도층의 철저한 국가(관료)화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 문제에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페티스모-룰리스모(Petismo-Lulismo)

 

네오­포퓰리즘은 룰라가 발전시킨 통치스타일, 심지어는 자신의 정당 내에서의 논의까지도 생략하는 짧은 주기의 정치과정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대통령은 가상에 지나지 않겠지만 정치적인 지도력을 가장하기 위해서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프로그램과 사회 프로젝트를 발표함으로써 매번 생생한 현장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다. 미디어는 이러한 포퓰리즘 정치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미디어는 날마다, 심지어는 하루에 몇 번씩 대통령의 모습을 방송하기 때문이며, 대통령이 나오는 장면을 빨리 지나가는 장면으로 처리해서 대통령을 화면에 고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다음에 나오는 대통령의 모습이 새로운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몇몇 측면에서 페티스모­룰리스모(Petismo-Lulismo)는 바르가스, 페론 그리고 까르데나스의 고전적인 경우보다도 훨씬 더 순수한 포퓰리즘조직된 계급에 근거한 정치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포퓰리즘은 남미의 저개발이라는 전통적인 도식을 깨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계급을 정치로 포섭하는 권위주의 형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퓰리즘의 물질적인 기초는 정확하게 노동자, 특히 제조업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놓여있다. 오늘날의 포퓰리즘은 권위주의적으로 계급을 정치로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계급을 정치에서 배제한다.

포퓰리즘은 브라질에서만 발생한 현상이 아니며, 포퓰리즘의 기원이 이데올로기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현상이 명백하게도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노동자계급을 해체하는 기능을 한다. 메넴에 의한 전지구화의 내면화와 바로 그 뒤를 잇따른 마르티네즈 드 호즈의 [국가를옮긴이] 황폐화한 탈­산업화가 진행되고 나서 키르히너는 전통적인 페론주의 노동자의 지지 없이도 당선되었다. 2001년의 금융 붕괴 뒤 아르헨티나 정치에서 중심적인 행위자는 분산된 실업자와 피케테로스(piqueteros)이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수적으로는 매우 적지만 잘 조직된 페트로레움 노동자가 석유산업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대자본과 결합되어 있다. 챠베스는 이제 더는 사회계급이 아닌 사람들을 묶어내기 위해서는 볼리바리안니스모(bolivarianismo)에 의지해야만 했다. 두 나라의 경우 모두 체계는 브라질보다 훨씬 더 재앙적인 정치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두 나라에서 벌어졌던 일은 권력관계의 무너짐이 아니라 기업 엘리트 안에서 권력균형의 이동이었다. 그럼에도 챠베스와 키르치네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루비콘 강을 건너가기 위해서 경제적인 위기와 정치적인 붕괴에 의해 촉발된 불확정 상태를 이용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룰라가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노동자당이 항복한 결과는 브라질을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룰라 정부가 시작한 사회주의적인 편향을 덧댄 민주주의적­공화주의적 프로젝트는 다른 남미 국가에 신자유주의적인 곤궁과 전지구화된 자본주의 질서 안의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남미 정치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표시하고 있다. 룰라 정부는 그저 달러 제국에 항복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브라질의 세습주의라는 최악의 전통 속에서 노동자당은 국가기구에 자신들의 지도부를 채워 넣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의 경영과 연기금과 같은 준국영기업의 경영을 포함해서. 그리고 그저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중앙은행과 브라질은행의 요직이다. 겉모습은 비록 당에 의한 국가의 전체적인 부패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와 반대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국가의 과제와 의무와 존재이유가 당 관료들에게 부과된다는 의미에서 당은 국가로 용해되고 있다. 이것은 지배질서에 도전함으로써 성장했던 노동자당이 질서유지를 자신의 제일의 과제로 삼고 있는 정부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그 다음으로 할 일은 정치의 가능성, 즉 주어진 일련의 결정들 안에서 이의, 선택이 발생할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는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을 노골적으로 매수하는 것은 [이러한 당의 국가화의] 논리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노당자당의 국가화는 노동자당의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조짐을 말고도 더 많은 뜻을 갖고 있다. 국가화된 당은 자본주의 주변부에서는 지배적인 정치형태이다. 정권을 잃은 뒤 브라질사회민주당이 쇠퇴했다는 사실은 동일한 과정을 증명해 준다. 브라질사회민주당이 이끌고자 하는 [노동자당에 대한 정치적] 반대파는 대중적인 중요성이나 또는 기업 엘리트의 지지가 없기 때문에 생기를 잃어 가고 있다. 브라질사회민주당이 제랄도 알키민과 같이 당선 가능성이 없는 대통령 후보를 선출했다는 사실은 브라질사회민주당의 위기의 징후를 보여준다. 자신을 전지구화된 새로운 부르주아의 정당으로 공표하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브라질사회민주당은 효과적으로 자신이 정부의 말단부로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승리는 브라질 내의 좌파를 완벽하게 파괴한다. 룰라의 경력에 대한 모든 비판은 즉각적으로 우파가 제기한 것으로 확인될 수 있으며, 보수주의적인 요소와 신보수주의적인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 정부를 마지못해 옹호하는 것은 브라질사회민주당과 인민당(Partido Popular)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글로보 텔레비전은 비교적 룰라에게 호의적이었던 반면, 브라질의 주요 신문인 폴랴 데 상파울로와 에스타도 데 상파울로는 좌파의 비판과 상파울로 미디어의 반응을 혼돈하게끔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인 사나움을 가지고 노동자당 정부를 몰아대었다. 숙고되지 못한 적의는 독립적인 좌파와 노동자당 사이의 관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엘리트의 동의

 

계급 기반의 해체, 바로 이러한 해체를 통해서 등장한 네오­포퓰리즘, 금융자본의 지배를 통해서는 통일될 수 없는 부르주아 계급, 투자기능에 의해 정의되는 신계급’, 이 모든 것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시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아마도 주변부에서 전지구화 시대의 정형(定型)반전된 헤게모니의 구축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점점 더 견고해지는 반면 피억압자들이 사회에 대한 도덕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마도 이러한 현상의 첫 번째 공시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흑인 인구층과 동일시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피지배계급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분쇄했지만, 결국은 요하네스버그의 급증하는 슬럼가들이 증명해주듯이 신자유주의에 항복하고 말았다. 따라서 무자비한 자본주의가 합법적으로 아무 방해 없이 착취를 일삼고 있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의 분쇄는 적을 패배시킬 수 있는 인민의 능력이라는 신화를 유지시켜 주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브라질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당은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시기에는 빈곤의 문제와 불평등의 문제를 전면에 제기함으로써 브라질에서 도덕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룰라의 대통령 당선은 계급적 특권에 종지부를 찍는 것만 같았으며, 볼사 파밀리아의 확장은 브라질에서 심각하게 근본화된 빈곤의 타파로서 선언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일들은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종류의 [압제]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볼사 파밀리아는 모든 국가발전주의 프로젝트 또는 사회관계의 완전한 변혁의 가능성을 닫는 동시에 불평등의 문제를 그저 행정상의 문제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빈곤의 문제를 탈정치화하는 데 이바지한다. 만일 볼사 파밀리아가 유의미하게 확대이것을 위해서라면 단지 기초잉여금을 0.1% 가량만 축소하면 된다된다면, 이러한 반전된 헤게모니의 토대는 좀 더 굳건해 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거의 지배형식이 아닌 새로운 현상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세습주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연기금 관리자들이 통제하는 것은 금융자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옛 브라질 노예제도 시대의 온정주의(paternalism)가 아니다. 왜냐하면 룰라는 제뚤리오 바르가스를 따라서 자기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지만 그는 결코 가부장(patriarch)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파의 비판가와 좌파의 몇몇 비판가들이 이야기하듯이 페티스모­룰리스모는 포퓰리즘의 전통적인 형태가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 아래에서 피지배계급이 도덕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사람들로 국가기구를 채우기 때문에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대 국영기업의 연기금이 브라질 금융제도의 중핵이기 때문에 이들은 자본가들처럼 보인다. 또한 이들은 상원과 하원에서의 파벌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룰라 정부의 정책 덕분에 경제는 마침내 안정된 것 같이 보이고, 브라질은 견고한 통화를 갖게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겉모습은 우리가 아직까지는 명명하지 못한 무언가를 은폐한다. 피지배자들은 도덕적 혁명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분쇄, 브라질에서는 노동자당의 집권이 이제는 구속받지 않는 착취에 항복함으로써 변형되고 훼손되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그람시의 공식인 강제력+동의=헤게모니는 거꾸로 뒤집혔다. 왜냐하면 강제력은 사라지고 동의만 남았기 때문이다. 종속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더는 피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 대표의 표면적인 지배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배자이다. 단 이 대표들이 자본주의적인 관계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전지구화된 자본주의에 잘 들어맞는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이것은 인식론적인 혁명이며, 이 혁명 앞에서 현존하는 모든 정치이론들은 무력해진다.

 

 

옮긴이: 이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