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사장 없는 노동자: 아르헨티나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8월호

사장 없는 노동자: 아르헨티나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11

사장 없는 노동자: 아르헨티나에서 노동자 자주관리1

 

José Antonio Gutiérrez D

 

라틴 아메리카에는 지난 30년에 걸쳐 신자유주의 정책이 도입되었다. 그 탓에 실업은 늘어났고 임금과 생활수준은 떨어졌다. 정부가 외채를 먼저 갚고, 국내외 기업 사장들이 높은 이윤을 얻도록 하는 정책을 우위에 두자, 사람들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여지없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80년대와 90년대에 사장들의 공격 때문에, 우리는 70년대와 80년대 초의 정세와 첨예하게 대조되는 상황에 다다랐다. 우리는 노동계급이 공세적이었던 상황에서부터 노동계급과 대중운동 전반이 수세적이었던 상황까지 분석할 것이다. 특히 90년대는 산발적인 투쟁과 여러 대중 행위자들의 투쟁에서 단결의 부족, 그리고 지배계급의 공격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활력을 잃은 모델 때문에 위기가 생겨나고 있다는 조짐은 대륙 전체에서, 즉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페루,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여러 봉기를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모든 이러한 봉기에는 공통의 조짐이 있었다. 즉 그것들은 어렴풋한 방식으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있다. 그 시나리오에 따르면, 대중운동은 한 번 더 공세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3년에 걸쳐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겪었던 것은 그러한 맥락에 새겨졌고, 내적인 모순에도 남미에서 지금의 선동이 지닌 잠재성과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의심할 나위 없이, 새로운 대중운동의 출현은 국제금융조직의 경제적 독재에 대한 지역적 반대가 강화되었음을 드러내준다. 지역 전체의 착취당한 사람과 억압당한 사람이 해방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알려준 그러한 운동은 혁명 정치를 확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유리한 순간을 제시한 것이다.

 

 

아르젠티나조(Argentinazo)”


 

아르헨티나는 20011220일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 자발적인 대중 봉기가 페르난도 드 라 루아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아마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경제가 갑자기 흔들리게 되었던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아르헨티나 위기의 증후가 그 이전부터 감지되었다는 것, 그리고 일어난 것이 그 날에 화산과 같은대중의 분노로 쏟아져 나왔던 축적 위기의 표현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대중의 분노는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모든 나라에 공통된 깊은 경제 위기의 표현이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지금 70년대의 독재에서부터 90년대에 카를로스 메넴 정부가 미친신자유주의 정책의 도입을 통해 악화되었던 탈산업화의 과정으로 넘어갔다. 90년대 말에 위기는 확실해졌다. 실업은 20퍼센트를 넘어섰고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중소규모 공업의 생산 활동이 완전히 정체에 빠졌다. 1996~2001년에 경기침체는 지속되었고 외채는 통제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것들 모두는 라틴 아메리카의 모델 경제에서 무언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뚜렷한 징후였다.



90년대 내내 위기의 발전은 아르헨티나의 대중 투쟁에서 새로운 주인공으로서 실업노동자운동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피케테로스는 새로운 형식의 조직 유형으로서 90년대 중반에 나타났고 도로 봉쇄를 통해 노동을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직접적인 행동과 많은 경우에 수평적인 조직 형식에 훨씬 더 기울어져 있었다. 곧바로 피케테로스는 관료화된 노동조합과 노동계급의 중요 부분이 노동조합에서 대표하지 못했던 늘어나는 문제에 대한 실질적 대안이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던 깊은 사회적 위기를 알리는 첫 번째 종소리였다.

인민의 하락하고 있는 생활수준과 악화되고 있는 경제상황을 다루는 데서 정부의 늘어나는 어려움과 별개로, 그 해의 정치적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요소, 즉 부르주아지(지배계급) 사이에 내부 불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새로운 통치당(자유당: UCR)과 페론주의자가 이끈 다른 당(대중주의 경향을 지녔지만 강한 우익 경향의 PJ, 민족주의 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되었다. 드 라 루아 정권 초기에서부터 PJ는 그의 정부(사장들의 연합, 노동조합, 의회 야당)를 반대하고 불안정하게 하기 위해 모든 힘을 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러한 행동에서 자신들의 잃어버린 권력과 정치적 영향을 되찾을 수 있는 그럴듯한 방법이자 다음에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길을 닦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폭발할 듯한 부르주아 사이의 갈등에 깊은 경제 위기, 성장을 막는 외채, 중간층의 소요, 은행의 파산(그것은 정부에게 코랄리토를 강요하게 만들었다.)과 노동계급의 참기 힘든 생활조건 등이 결합되면서, 20011219일에 봉기가 터져나왔다. 그때 여러 행위자(실업자, 중간층, 이웃 등등)코랄리토의 폐지와 정부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들고 일어났다. 갑자기 부유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가난한 빈민가 출신, 아르헨티나 도시의 이탈리아 거주지 출신의 도시 외곽에 사는 모로코인과 네그로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시위대는 거리를 덮쳤고, 경찰과 48 시간 투쟁한 끝에, 그들은 인기 없는 드 라 루아 정부를 끌어내렸다. 즉시 대중 회의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의 모든 마을에서 있었다. 피케테로스는 계속해서 공격했다. 그리고 좌파는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좌파의 많은 사람은 12월에 벌어진 사건에서 새로운 혁명주체를, 정부의 타도를 혁명적 말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데 필요했던 깊은 변화와 혼합한 혁명을 하는 새로운 방법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공평하게 말하면 이것은 낡은 자발성주의를 개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혁명적 투쟁은 거리에 있는 노동계급에 의해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 그것은 공장, 들판, 광산, 작업장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을 끌어내려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와 모든 다른 부르주아 제도를 파괴하고 동시에 밑으로부터 직접 민주주의의 새로운 제도를 세우면서 부르주아지를 몰수함으로써 확보될 것이다.



새로운 경제 상황

 

현실에서 정치적 시나리오는 훨씬 더 복잡하다. 아르헨티나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만 지배계급은 공세로 전환했다. 주민의 40 퍼센트는 빈곤 속에 살고 있고 주민의 25 퍼센트가 굶주리고 있다. 실업은 21 퍼센트이고 노동계급의 70 퍼센트는 고용의 불확실성을 걱정하고 있다. 주민의 10 퍼센트는 국가 수입의 51.7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불평등은 더 늘어나고 있다. 1991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부자의 20 퍼센트는 가장 가난한 사람 20 퍼센트보다 17.5배나 잘살고 있다. 2003년에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52.7배나 더 잘살고 있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외채는 20025월에 114,600,000,000 달러였고, 올 해 초(2003)에는 외채가 178,000,000,000 달러였다. 이런 맥락에서 아르헨티나는 지속적인 위기에 휩싸여 있다.

드 라 루아가 대중봉기로 몰락했을 때, 두할데와 그의 정부의 전체 임무는 정상을 유지하는 것, 즉 제도와 경제 모델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2003년에 취임한 새로운 대통령 키르히너는 이런 경향을 그대로 유지했다. 즉 신자유주의를 비난하고 있지만, 자본주의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두는 것. 가난한 나라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고발한 그 정부는 주민의 생활수준을 나아지게 하는 것보다 외채를 지불하는 것을 우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대중운동을 계속 탄압하고,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게임을 했으며 저항을 악마화했다. 몇몇 좌파가 키르치네르의 정치 스타일에서 진보적인 경향을 읽고 환상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럴듯하게 위장한 것일 뿐이었다. 실제로 키르치네르 정부는 실제로 낡은 세계와 그 제도를 유지하는 데 온갖 힘을 다 기울였다.

 

 

자주관리 공장의 경험

 

지난 몇 십 년에 걸쳐 신자유주의 모델과 그것의 재정적 강조가 낳은 결과로서, 산업 활동은 훨씬 더 줄어들었고 이는 자연적으로 아르헨티나 산업의 몰락을 뜻했다. “f·bricas recuperadas”의 첫 경험은 1219일과 20일의 사회적 폭발 이전인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부터 아르헨티나에서는 경제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그때 ‘f·bricas recuperadas’는 일자리를 잃지 않고, 실업 상태로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노동계급의 표현이었다.

1996년에 공장 점거의 첫 사례가 생겼다. 그 회사는 냉음료 회사 Yaguanè였다. 그리고 나서 1998년에 IMPA, 그리고 2000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베라네다 구역 출신의 90명의 금속노동자는 GIP 금속 회사를 점거했다. 그들은 [단결과 힘](Uniûn y Fuerza)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20011월에 배상하고 난 뒤 지난 10년에 1,000개가 넘는 기업을 도산시켰던 장소에 공장을 열었다. 같은 해에 네퀴엔에 있는 타일공장 자논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섬유공장 브루크만은 그들의 사장이 공장을 버리고 달아나자 노동자에 의해 점거되었다. 브루크만은 1218일에 점거되었다. 그 날은 아르젠티나조하루 전 날이었다. 자논은 생산성을 늘렸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었다. 이제 250명의 노동자가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브루크만의 전 사장인 야코보 브루크만은 그 해 418일에 노동자를 쫓아냈지만, 200310월에 회사는 끝내 파산을 선언했다. 그 뒤 회사는 몰수되어 1218일에 노동자 협동조합에 반환되었다. 노동자는 그들이 있는 곳, 여기에는 사장은 없고 노동자만 있다. ……

그 사이에 소유주는 기계를 부수었고, 노동자는 비조합원으로 생산을 재개하려는 사장의 시도를 막으려고 공장 밖에서 6개월 동안 천막을 쳤다. 오늘날, 170개의 점거된 기업이 있다. 10,000명의 노동자가 그곳에서 집단 작업의 실험에 참여하고 있다. 그 공장 모두에서 위계제가 사라졌고 수입은 모든 노동자에게 똑같이 분배되었다. 지난날에 몇몇 회사는 그들의 수입의 65~70 퍼센트를 사장과 관리자의 임금으로 써버렸다.

200112월에 아르젠티나조가 일어났을 때, 점거된 기업은 점거 공장의 노동자를 지지하기 시작했던 많은 활동가를 통해 그들을 중심으로 연대의 네트워크를 짜기 시작했다. 대중 집회는 그들 노동자에게도 문을 열어놓았다. 곧바로 노동자는 그들이 공통으로 가졌던 요구를 위해 집단적으로 싸우기 위해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것은 파산에 관한 법을 바꾸려는 것이었다. 이 법에 따르면, 기업이 파산을 선언하고 나서, 기업의 기계와 시설물은 빚을 청산하기 위해 한 달에 4번 경매에 부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공장을 점거했을 때에는 소유주는 잠시 동안 자신의 재산을 되찾을 수 있다. 노동자는 이 법이 노동권이나 생산의 지속보다 채무의 지불에 유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지금 그 법의 수정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노동자는 누구든지 노동의 조건을 자유로이 향유해야 한다는 노동자의 요구를 공격했던 기업에 주주 제도를 허용해야 한다는 노동자의 요구를 거부했다.

기업은 MNER (National Movement of Seized Enterprises)에서 조직했다. 이는 협동조합의 합법적 형식을 따랐고 이 법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운동으로 조직되지 않았던 몇몇 기업은 헌법 제17조의 적용을 요구했다. 그것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자논이다. 브루크만도 그것 가운데 하나였다. 이 조항에 따르면, 공공의 이익이 요구했을 때 기업은 몰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좀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몇몇 기업이 몰수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노동자의 의지, 그리고 아울러 의존과 계서제, 착취 관계를 상호부조와 평등의 관계로 급진적으로 바꾸려는 의지를 통해 단결했던 폭넓은 운동에서 중요한 논쟁점이다.

따라서 위기의 한 가운데서, “점령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의 표어 아래, 노동자는 고용주가 도망쳤을 때, 사회를 계속 유지하는 그들의 기술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문제점과 전망

 

1. 정치 행위자와 새로이 나타나는 사회운동 사이의 관계

 

200112월 아르헨티나 봉기는 좌익 정당에 의해 지도되지 않았다. 많은 좌익 정당과 그룹은 많은 노동계급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반란은 자발적으로 일어났고 이는 노동자 조직의 자율성 때문이었다.

이것은 조직의 새로운 행동계획을 열어놓은 것이었다. 그 조직은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 정당과 아주 다른 정치 형태를 찾으려고 애썼던 대중회의와 같이 그러한 반란에서 직접 태어났다. 그러나 자발적이긴 하지만, 그런 조직은 밑으로부터의 조직화라는 전체 경험에 장기적으로 보아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좌파 정당의 대부분은 정치 집단과 사회운동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 사회운동이 적극적 역할을 맡는 형태가 있고, ‘정치적행위자가 모든 책임을 지는 형태가 있다.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직관은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은 결국 관료적 정당이나 좌파 정당의 전통적 역할을 받아들이게되었거나 또는 그들의 경험이 그들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대중 회의에 벌이진 일이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고전적인 투쟁 슬로건인 그들 모두 쓸어버리자!”(¡Que se Vayan Todos!)는 부패관료들과 정치 계급과 단절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 슬로건대로 그들은 벼랑 끝으로 몰렸음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는, 아나코-코뮤니스트적 대안이 거론될 운명이다. 왜냐하면 이 경향이 국가와 전통적인 정치 형태를 거부하고, 직접 민주주의와 직접 행동을 옹호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코-코뮤니즘은 그들 스스로의 경험에 바탕을 삼고 있지만 이전의 혁명적 국제 경험이 제공한 자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전략적 혁명론과 정치 강령의 발전에 정치적 틀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 경향이었다. 그런 경향은 아직은 만들어지고 있지만, 많은 동지가 아르헨티나에서 그런 과업을 계속하고 있다.

 

 

2. 소유와 경영

 

점거 기업을 놓고 좌파에서 주된 논쟁 가운데 하나는 혁명적 계획과 조화될 수 있는 것에 따른 직접적 해결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즉 공장이 협동조합으로서 노동자의 손아귀에 있어야 하는가 또는 공장이 노동자에 의해 경영되지만 국가에 의해 소유되어야 하는가. 아르헨티나의 아나코-코뮤니스트 그룹 OSL(Socialist Libertarian Organisation)의 신문 엔 라 깔레(EN LA CALLE)에 실린 기사의 인용문은 매우 정확하게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좌파 흐름은 노동자 통제 대 협동조합 논쟁을 제기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국유화를 위해 싸운다. …… 우리는 협동조합을 바라지 않는다. ……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경쟁의 유령을 갖지 않는다. ……고 브루크만의 내부 위원회의 셀리아 마르티네즈(Celia Mart"nez)는 말했다. 그는 몰수에 필요한 협동조합의 합법적 지위를 코포라티즘이라는 정치적 전망과 혼동했다. 국가가 초기 자본을 제공하고 임금 지불의 과업을 떠맡으며, 국가가 생산물을 사들이는 그들의 제안은 지불 없는 몰수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는 제공하지만 노동자는 계획하고 관리한다. 몰수는 노동자가 보기를 들면 협동조합과 같은 합법적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을 필요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위를 택했던 150명이 점거한 공장 가운데 브루크만, 자논, 겔코(Ghelco), 파니피카시운 5(Panificaciun 5), 그리시누폴리스(Grisinupolis)에도, 문제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자 관리 하에 국가화는 국가가 노동자와 인민의 권력에 종속된다는 맥락에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 맥락에서 해결일 되지 않지만 공장을 노동자에게 되돌려줌으로써 노동자 권력의 실행으로 전환될 수 있는 몰수를 부르주아 국가에 요구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코포라티즘은 노동자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결을 제공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코포라티즘은 많은 노동자에게 답변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코포라티즘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결코 문제 삼지 않았다. 코포라티즘은 오직 특수한 국면(독점, 경쟁 등)만을 문제 삼았다. 코포라티즘은 자본주의에 필적하는 하위 체제인 협동조합의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생산과 사회에 대한 노동자 관리의 이상은 혁명적 사회에서 유일한 권력이 노동계급 조직의 권력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 관리는 소수가 실행하는 모든 권력의 폐지, 부르주아 권력의 폐지, 즉 모든 형태의 국가의 폐지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우리, 노동자는 들판과 공장과 작업장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의 나머지 부문에서 노동자 관리를 떠맡아야 한다.”

 

 

따라서 동지에 따르면, 해결은 이러 저러한 정치적 기획(코포라티즘, 또는 국유화한 노동자관리)이 아니다. 해결은 협동조합이라는 합법적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노동자의 일자리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직화를 위한 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노동자에게 제공하는 것과 사회를 조직하는 전지구적 대안 방식에 대한 집단적 모색에 있다. 그리고 또한 해결책은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는 개혁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대중 투쟁에서 다른 행위자의 투쟁을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는 부분적인 조치일 뿐임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3. 관리자와 자본가에서부터 자유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것?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부닥친 많은 모순과 문제가 있지만, 아르헨티나의 경험은 지배계급 또는 관리자 계급의 부적절한 본질을 뚜렷이 보여준 것이다. 사장이 산업을 관리할 수 없고 생산을 유지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을 때, 언제나 노동자는 조직했고 그것을(관리와 생산) 훨씬 더 잘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피착취계급의 운동의 역사는 그런 보기로 가득 차 있다. 보기를 들면, 칠레의 산업 네트워크, 스페인 혁명에서 공업과 농업 집단조직(collectives), 1917년 러시아에서 소비에트와 노동자 평의회 등등이다. 아르헨티나 경험은 노동계급이 1세기 반의 프롤레타리아 투쟁 뒤에 고유의 능력을 전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들의 경험은 생산의 본질적 요소를 우리에 보여준 것이다. 노동자 없이, 사장은 산업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사장 없이 노동자는 그것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러한 경험은 대중봉기의 결과로서 아나키스트가 모든 곳에서 부닥친 많은 문제를 눈에 띄게 해준다. 그것은 또한 자유의지론적인 사회의 건설이 진부한 표현과 슬로건을 되풀이하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답변은 쉽지 않다. 혁명은 느닷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다른 곳과 시간에서 일어난 여러 요소의 축적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혁명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인 전략으로 일관된 방식으로 연결시켜야만 한다. 그러한 전략은 우리 아나코-코뮤니스트들이 인민 투쟁을 위한 촉매로 이바지하기 위해 지지했듯이 아나키스트 조직을 건설하는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다. 순수한 자발성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혁명 이전 시기에 노동계급 저항의 경험이 부닥쳤던 여러 종류의 문제, 보기를 들면, 점거된 공장의 경험에 의해 제기되었던 것으로서 소유관계와 생산의 관리 사이의 관계, 대중운동과 정치조직 사이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명확한 정책과 실천적 답변을 지니려면 투쟁의 구체적 조건과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의 특수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경험은 경제정치적 관리자와 자본가에서부터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열망이 공허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재에, 즉 노동계급의 능력 그 자체에 뿌리내린 실질적 가능성임을 입증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역사는 사회정의와 자유를 위한 순간이 지금 여기에서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이 순간을 준비하고 그것을 곧 현실이 되도록 조직하고 싸우는 것임을 입증한 것이다.

  1. http://struggle.ws/wsm/rbr/rbr8/argentina.htm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