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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2월호

[편집자의 말] ‘참세상’ 만드는 일에 의식적으로 참여해보자!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04:11

어제 봄을 느껴 보았다. 참 설레였다. 봄꽃이 눈에 밟히면, 나이 드는 증거라 했다. 아직 봄꽃은 피지 않았지만, 그렇게 봄은 나에게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봄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니까.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아직 봄은 아니다. 겨울의 끝자락에 있다. 올 겨울 날씨는 참 ‘요상’했다. 콧물이 얼어붙을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 날은 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다행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겨울 추위가 매서우면, 발을 동동거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을 이젠 보낼 준비를 해본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편치 않다. 왜일까. 겨울을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3이라는 숫자 때문일까. 아마 ‘3’이라는 숫자를 거론하기만 해도 그 뜻을 먼저 알아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약간 감이 떨어지는 ‘식구’들을 위해 이야기해보자.

그 ‘3’이 담고 있는 뜻, 그것은 우리의 출발이 ‘정착’되는 시점이다. 걸음마 연습을 하다 이제 혼자서 한 발작을 떼보는 그런 나이. 그 ‘정착’을 알리는 게 어떤 것이 있을까. 가장 상징적으로는 ‘실천’이라는 잡지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벌써 3번째다.


우리는 3번에 걸쳐 ‘왜 사회주의인가.’ 라는 화두를 잡고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그 시간과 공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너무 많은 글들이 있다. 그 많은 글 가운데 몇 꼭지만 추려내서 옮겨야 했다. 그런데도 여기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매듭짓는 일, 경계 짓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그 못된 버릇을 뛰어 넘을 수 없다. 아마도 ‘빨리 빨리’로 상징되는 자본주의가 낳은 결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시간과 공간이 모자랐지만, 그러면 과연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왜,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를 다시 말하는가. 


다시금 첫 마음으로 되돌아가 본다. 우리가 왜 여기에 모였는지, 우리가 왜 이 ‘둥지’를 틀었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사회주의’를 첫 화두로 잡아냈는지.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차분히 되짚어 볼 때가 아닌가.’라고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본다.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의 언어로 사회주의 말고 다른 것이 없다.” 출근길 아침, 지하철. 사람들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밝은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들의 모습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의 희망도 꿈꾸지 못하는 듯하다. 이렇듯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야만의 시대에 “야만에 맞서는 것은 사회주의 밖에 없지 않을까.”


이번 호에는 ‘사회주의’의 뜻을 되짚어 보는 글들이 많다. 특집에 실린 글보다는 다른 글에서 그 뜻을 좀 더 넓은 맥락에서 헤아려보게 만들었다.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 [실패한 국제주의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동양과 서양 역사 속의 반란자들에서 “사람이 무엇을 꿈꾸어왔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려 했으며, 그 실현의 경험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실패한’ 경험 속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낼 수 있는지.” 그 스펙트럼은 참으로 넓고 여러 가지다. 

[굿바이, 레닌!], 진정 지금 우리는 레닌에게 ‘안녕이라고 말할 때’인가. 레닌이 상징하는 20세기 사회주의 실험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이런 문제를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되는 과정을 한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낸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을 곱씹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혁명가인 빅토르 세르주, 그는 혁명과 전쟁의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던 20세기 전반기 유럽에서 활동했다. 러시아혁명, 새로운 세상을 여는 세계 혁명의 불길을 일으킨 첫 불꽃이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몸으로 겪으면서, 갖가지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 혁명의 변질 과정, 즉 “20세기 변혁운동의 최대의 비극”을 고스란히 글로 남겼다. 그는 그 비극을 언제, 어떻게 알았고 그 비극을 막고자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세히 남겨 놓았다. 그는 러시아혁명의 변질과 유럽의 파쇼화 등 야만이 판치는 속에서도 민중의 자기해방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세르주는 그 과정에서 죽은 동지들에 대한 송사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항로는 희망 행으로(The Course is on the Hope)!”라는 시다. 그 시를 여기 그대로 옮겨보겠다.


리가에서 죽임을 당한 앙드레

에스파냐에서 죽임을 당한 다리오

내가 붕대로 상처를 싸매준 보리스

내가 눈을 감겨준 보리스


프랑스의 어느 조용한 과수원에서

스무 살 된 심장에 총알 여섯 발이 박혀

영문도 모른 채 죽은

나의 이층 침대 친구 다비드


이미 흙이 다 되었을 때

내가 손톱을 보고 알아낸 카를

너, 높은 지성과 숭고한 사상을 가진 너를,

죽음이 너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검고 거친 인간 넝쿨


북쪽, 물결, 바다가

배를 뒤집고, 이제는 핏기가 사라진 네 사람이

고뇌를 깊이 들이켠다,

파리여, 잘 있거라, 너희 모두 다 잘 있거라,

삶이여, 잘 있거라, 제기랄!


바실리, 우리가 잠 못 이루던 한밤 내내

너에게는 상하이에서 온 투사의 넋이 있었다

그리고 아르마비에르의 옥수수 밭에 있는 너의 무덤이 바람에 씻겨 지워진다.


홍콩에 불이 들어오고, 때는 고층 빌딩의 시대,

종려나무 잎은 아랍의 반달칼을 닮았고

광장은 묘지를 닮았고,

저녁은 무더운데, 감옥 침대에서

응우옌, 너는 죽어가는구나


그리고 너희, 목 잘린 나의 형제여,

길 잃은 자, 용서받지 못한 자

학살당한 자, 르네와 레이몽

유죄이지만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오, 어둠 속에서 내리는 별들의 비,

죽은 형제들의 별자리!


나는 너희에게 나의 가장 암울한 침묵,

나의 결의, 나의 탐닉을 빚지고 있다.

텅 비어 보이는 이날을 생각하면,

그리고 내게 남은 긍지는 그 무엇이든지

사막에서 이는 불길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이물을 장식하는 이 숭고한 조상에

정적이 있으라!

맹렬한 항해는 계속되고,

항로는 희망행이다


언제 네 차례가 될까? 내 차례는 언제일까?


항로는 희망행이다1 

  

이 시는 패배주의자를 다룬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혁명의 승리에 대한 궁극적인 신념을 잃지 않은 한 ‘실패한 혁명가’ 또는 ‘목격자’가 뒤 따라오는 세대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사회주의자는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패했는지를 또렷이 알더라도 지나치게 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 뭐라 해도, 우리는 패배에 이골이 나 있고, 언젠가는 더는 패하지 않으려고 오랜 기간 동안 패자여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맑스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나침반을 내팽개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난관을 헤쳐 나가도록 뒷받침해주기에 충분한 승리들을 얻는다.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마땅히 온갖 오류들을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혁명가의 회고록』) 한 세기의 비극을 함께 안고 살았던 그의 인생의 값진 결론인 셈이다.


토마스 뮌처나 진승도 그런 꿈과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그것을 이겨 내려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그 미래를 움켜쥘 수 있다는……. 


우리도 삶에서 유일한 뜻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를 만드는 일에 의식적으로 참여해보자!


2007년 2월 7일

편집장 정인 씀.

  1. “죽은 형제들의 별자리 Constellation of Dead Brothers”(1935), Orenburg, Resistance, San Francisco, City Light Books, 1989, 34-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