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맑스가 이야기한 진보의 변증법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2월호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맑스가 이야기한 진보의 변증법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3:23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맑스가 이야기한 진보의 변증법(Passage to Socialism : The Dialectic of Progress in Marx)1)

파레쉬 차토파디야이(Paresh Chattopadhyay)


서론


이 글의 기본 주제는, 낡은 사회의 혁명적 변혁을 통한 ‘인간사회의 전사’에서부터 인류의 역사를 향한 이행이다.2) 여기서 인류의 진보는 일종의 모순적 운동, 즉 부정성의 변증법이 전개된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이 글은 자본이 자신의 내적인 모순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붕괴의 조건과 함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건설하는 조건들을 만들어낸다는 맑스의 핵심명제를 다시 이야기하면서 논의한다. 그 다음에, 이 글은 맑스가 말년에 러시아인들과 나누었던 편지들에 비추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필요조건인지 아닌지를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시키는 문제가 맑스가 주장한 인류의 진보라는 넓은 전망에서 논의된다. 이 글에서 제시되는 주장의 핵심은 세 가지이다. 첫 째, 맑스는 진보에 대해 ‘새롭게 사유한’ 위대한 사상가라는 것이다. 둘째, 그의 전망은 인류의 진보(또는 퇴보)에 대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단선적인 견해가 아니라는 점이다. 셋째, 이러한 관점에서 진보란, 정치경제학비판을 꿰뚫고 있는 부정성의 변증법의 한 측면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 자본이 낳는 결과


맑스가 쓴 ‘정치경제학비판’(다음부터는 ‘비판’이라고 함)은 스피노자와 헤겔을 따로따로 언급한 두 가지 텍스트에 쓰여 있는 것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맑스는 『파리초고』3)(1844)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언급하면서 그 책의 위대함은 “운동과 창조의 원리인 부정성의 변증법”에 놓여 있다고 강조했다.4) 몇 년 뒤에 『자본론』제2권에 관한 첫 번째 원고에서 맑스는 스피노자가 쓴 잘 알려진 구절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규정했다. “모든 규정은 부정이며 모든 부정은 규정이다.”5) 맑스는 어떻게 자본이 자기 자신의 부정을 위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었고 그와 함께 자본을 극복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새로운 사회, 즉 사회주의의 요소들도 보여주었다. ‘비판’에서 사회주의(마찬가지로 공산주의)는 “결사체적 생산양식(associated mode of production : AMP)”을 바탕으로 삼은 “’자유롭게 결사를 이룬 생산자들의 사회”를 뜻한다. 개인들이 자본주의 이전 사회처럼 인격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자본주의처럼 물질적으로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union)”은 그 정의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도 배제하며,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임노동, 국가도 배제한다. 여기서 자유로운 결사를 이룬 “사회적 개인들”은 그들이 사회적 관계를 그들 스스로가 통제하는 자신들의 사회적 운동의 주인이다.6)


개인들이 물질적 종속에서 벗어나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 의한 생산조건의 집합적(사회적) 지배와 결부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물질적 부의 풍요에 달려 있다. 이는 보편적 수준에서 생산력이 아주 높게 발전한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 생산력 발전이 포함하는 것은 ‘세계사적 존재’로서 프롤레타리아트(변혁 계급), 즉 ‘최고의 생산력’의 양적, 질적 발전이다.7) 첫째, 생산력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목적 자체로서 인간본성이 풍부하게 발전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생산력의 발전은 ‘인간해방’을 위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천적인 (전제)조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다면 궁핍과 필요가 일반화될 것이며, 결핍과 함께 당연히 생필품을 위한 투쟁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8) 게다가 노동의 생산력이 성장함에 따라 필요노동시간을 넘어서는 가처분시간도 증가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들의 모든 창조적 활동의 토대인 사회의 자유로운 시간이 증가하는 것이다.9) 다른 한편으로 “오직 생산력의 보편적 발전을 통해서만 인류의 보편적 교류가 정립될 수 있다.”10) 거꾸로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의 (집합적) 지배는 그들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개인들이 지배하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규정하는 이러한 상황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발전의 길고도 고통스러운 역사”의 산물이다.11) 그에 더하여 프롤레타리아 (따라서 인간) 해방의 필수적인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본이다.


모든 계급사회에 나타나는 필요노동/잉여노동 관계의 모순적 성격은 자본에 노동이 포섭됨으로써 특별한 뜻을 갖게 된다.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가 지배적인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잉여노동은 일정한 범위의 필요로 한정된다. 이러한 이전의 계급사회에서 노동시간은 직접 생산자들의 생존을 넘어서는 일정량의 사용가치를 지배자들에게 생산해주려고 확대된다. 그러나 교환가치가 생산의 결정적인 요소가 됨에 따라 잉여노동은 좀 더 큰 중요성을 얻게 된다. 기본적으로 일반화된 상품생산인 자본 아래서 노동에 강제되는, 필요노동시간을 넘어서는 노동시간은 극대화된다.12) “이것은 제한된 필요에 따라서도 제한하는 필요에 따라서도 한계지어지지 않은 생산이다. 이는 이전의 생산양식과 구별되는 한 측면이며, 그렇게 부르길 원한다면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도 있다.”13) 노동에 대한 이러한 강제와 함께, 자본은 노동으로 하여금 자신의 필요를 다양하게 만들도록 부추기며 그 필요를 만족시키는 수단도 여러 가지로 만들어진다. 그런 정도로 “자본은 문화를 만들어내며, 역사적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14)


자립적 존재로서 부는 직접적으로 강제된 노동(노예제)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간접적으로 강제된 노동(임노동)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15) 직접적으로 강제된 노동은 자본으로서 부와 대면하지 않고 단지 (인격적) 지배관계로서 부와 대면할 뿐이다. 직접적으로 강제된 노동의 이러한 바탕 위에는 (인격적) 지배관계의 재생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지배관계에서 부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향유로서만 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 관계는 보편적인 산업을 만들어낼 수 없다.”16)


노동자와 생산조건의 근원적인 통일은 (노동자 자신이 객관적인 생산조건의 일부인 노예제를 제외하고) 두 가지 주요 형태를 갖는다. 그것은 아시아적 공동체 (자연적 공산주의)와 이러저러한 형태의 소가족 농업(가내공업과 결부된)이다. 둘 다 초기 형태로서, 마찬가지로 사회적 노동으로서 노동과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을 발전시키기에는 적합지 않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노동과 소유권(생산조건에서) 사이의 분리, 분열, 대립이 존재한다. 이러한 분열의 극단적 형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을 가장 강력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자본의 형태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물질적 토대 위에서, 그리고 노동계급과 전사회가 자본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겪는 변혁의 수단에 의해서 근원적인 통일이 복구될 수 있다.17)


자본주의 아래서 생산을 위한 생산은 ‘개인을 희생시키면서’ 이루어지며, 개인을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소외시킨다. 자본의 손 안에서 생산의 사회적 수단은, 노동과정 가운데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강탈하고, 공간, 공기, 빛을 강탈하며 생산과정의 위험과 유해한 환경에 대한 개인의 안전조건을 강탈하는 체계다. 즉 “노동의 정상적인 기능조건을” 가장 “추악하게 강탈하는 것”이다.18) 따라서 자본 아래서 “생산력은 오직 직선적인 발전만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파괴력이 되는 것이다.”19)


사회적 생산형태 내부에서 적대의 발전은 “그것의 해체와 변형을 향한 유일한 역사적(실질적) 길이다.”20) 자본 자신의 부정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본 자신이다. 노동자를 상대로 한 초기 텍스트에서 맑스는 그가 ‘자본의 긍정적 측면’이라고 부른 것을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다. 즉 대공업, 자유경쟁, 세계시장, 그에 상응하는 생산수단 등이 없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과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위한 물질적 자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덧붙이기를, “이러한 조건들이 없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통합의 길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며, 자기 자신과 낡은 사회 모두를 혁명화 시킬 수 있게 하는 발전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21) 그와 함께 자본은 분산적이고 고립적이며 소규모인 노동을 자본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서 대규모로 조직화된 사회적 노동으로 전환시키며 그렇게 해서 그러한 지배에 맞선 노동자의 직접적인 투쟁도 일반화시킨다. “물질적 조건 그리고 생산의 사회적 결합과 함께”, 자본은 동시에 모순과 적대를 발전시킨다. 즉 “낡은 사회의 파괴력과 새로운 사회 형성의 요소들을” 발전시킨다.22)


자본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물질적 장애를 만들게 된다. 자본의, 끊임없이 증식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그 한계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본이 사용해야만 하는 생산방법과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생산은 무제한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사회적 생산력의 무제한적 발전이라는 수단은 끊임없이, 기존 자본의 가치증식이라는 제한된 목적과 모순에 빠진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생산관계에 대해서 사회의 생산적 발전이 점점 더 부적합해지는 것은, 첨예한 모순, 위기, 경련으로 표현된다.


자본에 대해 외적인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 자체의 보존 조건으로서 자본의 폭력적 파괴는 자본이 무너지고 좀 더 높은 상태의 사회적 생산력을 위한 여지가 제공되는 가장 현저한 형태이다.23)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사회주의적 생산양식 또는 ‘결사체적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구성한다.24)


‘후기 맑스’와 사회주의를 향한 길.


맑스가 말년에, 특히 주로 러시아에 관한 글들에서,25) 자본 자신을 부정하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통해 자본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을 만들어 낸다는 자신의 초기 입장을 번복했다는 주장, 그게 아니라면 그 입장을 적어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널리 있어 왔다. 이는 특히 학자들에게 (맑스주의자이건 아니건 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테오도르 샤닌과 와다 하루키의 책을 통해 강조되었다.26) 이 글들에서 맑스는 편지를 주고받은 러시아 사람들이 그에게 제기한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거치지 않고 러시아에서 기존의 농촌코뮌이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의 토대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러시아는 새로운 사회에 도달하려면 자본주의적 단계를 거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맑스가 자신의 답장에서, 첫 번째로 『자본론』에서 그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분석한 것은 엄밀하게 ‘서부 유럽’에만 국한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것이다.27) 사람들이 처해 있는 특수한 역사적 환경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운명적으로 부과될 수 있는 일반적인 역사적, 철학적 이론이라는 해결책이 있다.”는 모든 주장을 맑스는 비웃으며 거부했다.28) 그러므로 자본론에 주어진 분석은 러시아의 편지왕래자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도 부정적인 답변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맑스는 러시아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러시아 농촌 공동체가 러시아에서 ‘사회적 쇄신’을 위한 출발점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음도 함께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행은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토지에 대한 공동체 소유가 이러한 ‘쇄신’을 위한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러한 체계를 붕괴시키는 (공동체 내부와 외부에서 작용하는) 적대적 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 구성원들에 의한 토지경작과 그 수확물의 사적 전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차르 국가가 이른바 ‘농노 해방’ 조치를 채택한 1861년 이래 자행되고 있는 국가의 세금징수와 고리대와 상인자본에 의한 사취가 있다. 따라서 ‘사회적 쇄신’은, 부정적 요인들이 제거되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농민대중이 선도하는 ‘러시아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코뮌은 서구의 기존 자본주의를 과학적이고 기술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로부터 샤닌은 맑스가 러시아에서 농민혁명은, 마치 영국이 자본주의 세계를 위한 원형으로 간주되듯이, 후진국에서 농업사회에서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을 위한 원형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29) 샤닌에게 러시아의 사례는 ‘맑스의 분석적 사유’에 일종의 네 번째 차원을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엥겔스가 제시했던 ‘세 가지 원천, 다시 말해 독일 철학, 프랑스 사회주의, 영국의 정치경제학’에 ‘네 번째 원천, 즉 러시아의 혁명적 인민주의’가 추가되는 것이다.30) 두셀은, 맑스가 러시아 농민공동체를 생각하면서 ‘방향전환’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는 ‘맑스의 이론적 입장에서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사회주의를 향한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경로에 대한 맑스의 담론 발전을 위한 광범위한 길이 열렸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하나는 좀 더 발전된 중심 자본주의를 위한 길이며, 다른 하나는 주변부의 덜 발전된 나라들을 위한 길이다.31) 몇 년 뒤에 뢰위는 맑스의 러시아 편지를 “1853년에 인도에 관한 글들에 나타난 진화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사유에 대한 해독제”로 간주했다. 이 글들에서 맑스는 인도에서 영국 부르주아의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사명’을 옹호하고 있다.32) 마찬가지로 두나에브스카야는 이 편지들이 러시아의 사례가 “경제적 법칙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으로서 혁명이라는 개념”을 바꾸어 서부 유럽의 경우에 버금가는 “다른 경로를 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33)


1877년과 1881년의, 러시아에 관한 맑스의 글들의 맥락을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하면, 맑스가 러시아 사례의 ‘특수성’이라고 했던 것을 강조했음을 특히 밝힐 필요가 있다. 이는 이 사례가,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되는 ‘자본의 운동법칙’처럼 후진농업사회에 적용가능한 일종의 ‘법칙’으로 일반화될 수 있는 경우일 가능성을 배제한다.


맑스에게 러시아의 ‘농촌코뮌’은 ‘역사에서 보기 드문 특수한 상황’을 제공하는 것이었다.34) 첫째, 외부 정복자가 ‘토지를 공동 소유하는’ 농촌공동체를 폭력적으로 파괴했던 인도와는 달리, 러시아는 어떤 외부 정복자도 경험하지 않았고, 그래서 러시아는 ‘지금까지도’ 코뮌들이 “전국적인 규모로 유지되어 온 유일한 유럽 국가”였다. 둘째로, 러시아는 자신의 역사적 환경, 즉 서부 유럽의 자본주의적 생산과 동시대성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유럽 자본주의 생산은 이미 완성된 물질적 조건을 ‘거대한 규모로 협동적 노동’에 제공했고 이로써 코뮌은 ‘자본주의 체계의 긍정적인 성취’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이 인류에게 제공한’ 과실로서 코뮌이 자본주의를 경유하는 것을 피하게 해주는 것이었다.35)


그렇지만 ‘러시아 코뮌 조직에 내재된 이원성’에서 유래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즉 토지의 공동소유와 함께, ‘사적 전유의 원천으로서 분할된 노동’이 있다. 이는 코뮌의 구성원이 ‘동산, 화폐를 축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때로는 코뮌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채 노예와 농노를 축적하는 것’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의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해체하는 요인’을 이루었다.36) 따라서 코뮌의 ‘이원성’은 일종의 양자택일을 제시한다. 즉 “자신의 공동체적 요소들을 그것의 (사적)소유가 지배하든지 아니면 그것의 공동체적 요소가 (사적) 소유보다 우위에 서든지 하는 것이다.”37)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원시적 사회구성의 마지막 단계”를 이루는 “농촌 코뮌”은 “그와 함께 노예와 농노에 바탕을 둔 사회들을 포함해서 사적 소유에 입각한 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38) “이론적으로 말해서” 러시아 코뮌은 토지의 공동소유라는 자신의 토대를 발전시키고 “그것이 마찬가지로 내포하고 있는 사적 소유의 원리”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토양을 바꿀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현대 사회가 지향하는 경제체제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될” 수도 있었다.39) 그러나 “이론에서 현실로 가게 되면” 그 누구도 “오늘날 러시아 코뮌이 강력한 권력과 이익의 음모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농민에게” 행사되고 있는 “지속적인 착취” 말고도, “국가는 (코뮌 안에서) 자본주의 체계의 일정한 부분, 즉 주식시장, 은행, 철도, 상업 등의 지배를 촉진시키고 있다.”40) 마찬가지로 코뮌은 “고리대에 의해 와해되고 있는 동시에 침략적인 자본가, 상인, 토지‘소유자’들에 의해서 기만적으로 착취되고 있다.” 이러한 상이한 요소들은 “코뮌 안에 이미 있는 이익갈등을 만연케 하고 그것의 해체를 향한 씨앗을 급속하게 발전시킬 것이다.”41) 이러한 “파괴적 영향들의 합류는 만일 강력한 반응을 통해 분쇄되지 않는다면 농촌코뮌의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될 것이다.”42) 이런 까닭으로 맑스는 “러시아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43) 그렇지만 이러한 “혁명”이 성공하고 코뮌이 자본주의로 변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하더라도, 농촌이 지배적인 (그리고 기술적으로 뒤쳐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일은 발전된 생산력의 도움, 즉 “자본주의 체계가 만들어낸 긍정적인 성취”를 꼭 필요로 할 것이다.44) 러시아는 이러한 물질적 지원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서부유럽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만 가능할 것이다. 이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러시아 외부에서 자본주의적 무장개입시도에 대한 보루로서도 기능할 것이다. 이는 공산당선언의 러시아어판에 대한 ‘서문’ - 그 저자들의 공동서명 아래 나온 최종판 - 이 보여주는 명백한 메시지인 듯이 보인다. 그곳에서 그들은 비록 러시아 코뮌이 “심각하게 파괴되었지만”, 러시아에서 “혁명”이 존재하고 그래서 서구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신호를 제공하면서 상호보완을 하게 되면, 코뮌이 직접적으로 “공산주의적 형태의 집합적 소유”로 이행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45)  


샤닌은 러시아 혁명이 그 보완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필요로 한다는 입장을 단지 엥겔스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여기고 “맑스는 그러한 견해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한다.46) 와다는, 잘 연구된 글에서 1882년의 ‘서문’이 “맑스보다는 직접적으로 엥겔스의 견해를 표현한다.”고 덧붙인다. 그에 따르면 “(아내의 죽음 때문에) 우울했던 맑스가 엥겔스에게 초안을 맡기고 자신은 단지 서명만을 했을 뿐”47)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엥겔스가 원하는 대로 초안을 쓰고 맑스는 손을 놓고 서명만 했다는 식이다. 두셀은 와다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이렇게 쓰고 있다.


 (1882년 서문)은 러시아 코뮌 문제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절충을 보여주는 텍스트(즉 맑스의 ‘러시아 혁명’과 엥겔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이의 절충)이며 그 ‘절충’은 미래에 나타날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48)


맑스는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의 여러 초고들과 최종본, 그리고 미카일로브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러시아의 (농민)혁명에 대한 보완으로서, 서구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드러내놓고)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 결과, 1882년 ‘서문’에 나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직 엥겔스로부터 유래된 듯이 보인다. 엥겔스는 1875년의 한 논쟁에서 “맑스의 요구에 따라 그리고 둘의 공통된 관점을 발전시키면서”49) 기존의 코뮌체계가 보다 높은 형태로 성공적으로 변화되기 위한 이러한 보완의 필요성에 대해서 뚜렷이 말하고 있다.50) 그러나 맑스가 쓴 초고를 면밀하게 읽어 보면, 러시아에서 혁명에 대한 보조로서 서구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문제는 비록 이후처럼 특별하게는 아니더라도 이미 주어져 있다. 바로 첫 번째 원고에서51) 맑스는 자본주의를 경유하지 않고 농촌 코뮌이 좀 더 높은 형태의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가장 우호적인 상황’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고 있다. 즉 자본주의 체계가 출현하는 시기를 온전하게 견디고 나서 그 기술적인 성과들을 전유한 채, 코뮌은 이제 이러한 (자본주의)체계가 


한편으로 노동하는 대중과 투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 그리고 그 체계 자신이 발생시킨 생산력과 투쟁하는 것, 한마디로 해서 가장 ‘낡은’ 유형의 집합적 소유와 생산의 보다 높은 형태로 현재의 사회가 복귀함으로써, 체계의 지양으로 종결되는 숙명적 위기 속에 있게 됨을52)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마치 유명하지만 너무 오해되고 있는 1859년의 ‘서문’을 바꾸어서 표현한 듯한 서구 자본주의 내에서 생산관계와 물질적 생산력 사이의 첨예한 모순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는 전체계의 ‘숙명적인 위기’로 귀결되며 ‘노동하는 대중’에 의한 혁명을 통해서 보다 높은 유형의 사회로 대체되게 된다. 만일 맑스에 대한 우리의 텍스트 읽기가 옳다면, 여기서 맑스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1882년의 ‘서문’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며 단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입장은 엥겔스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이 확실하다. 이는 우리가 엥겔스의 두 텍스트를 면밀하게 읽는다면 쉽게 입증될 수 있다. 이 두 텍스트란 1875년의 것과 1894년의 것을 말하는데, 첫 번째 것은 맑스의 요구에 따라 출판되었으며 맑스의 원고를 모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와 전적으로 일치하는(루벨은 이점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와다 조차도 이점을 인정하고 있다)53) 것이다.54)


여기서 가장 ‘낡은’ 유형이 좀 더 높은 형태로 복귀한 것으로서 미래의 사회주의사회에 대한 맑스의 서술에서 두 가지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는 실제로 맑스가 어떤 “미국인 저자”라고 말한 모건의 문장을 바꾼 것이다. 그 문장에서 이 저자는 ‘새로운 체계’를, “현대사회가 향해 가고 있는 것으로서, 낡은 유형이 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라고 말한다. 샤닌은 맑스의 표현을 인용하면서55) (맑스의 인용원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이것이 러시아 코뮌을 다루면서 맑스에게 일어난 일종의 (새로운) 통찰을 뜻한다고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맑스의 표현 밑바닥에 있는 사상이 전혀 새로운 입장이 아니라는 견해를 갖는다. 오히려 그는 모건의 진술에서 자신과 엥겔스의 이전 입장에 대한 재확인을 발견하고 있다. 물론 이 입장은 그다지 풍부한 경험적 증거 없이, 압축된 이론적 방식으로 주장된 것이기는 하다. 그래서 1865년 노동자를 상대로 한 강의에서 맑스는 그가 ‘노동의 인간과 노동의 수단’이라 부른 것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세 가지 ‘역사적 과정’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그들 간의 ‘근원적인 통일’, 다음이 ‘근원적 통일의 붕괴’를 통한 그것들의 ‘분리’, 세 번째가 ‘생산양식의 근본적인 혁명’을 통해 ‘근원적 통일이 새로운 역사적 형태로 복구된 것’이다.56) 앞에서 우리는 맑스가 1861년에서 1863년 사이에 쓴 원고에 나오는 구절을 말한 적이 있다. 이 구절에서 같은 방식으로 맑스는 가족농업과 ‘자연적 공산주의’에서와 같은 ‘노동자와 생산조건 사이의 근원적 통일’과 자본 아래서 그것들의 분리, 그리고 ‘노동계급의 혁명을 통한 근원적 통일의 복구’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57) 엥겔스는 『반듀링론』에 대한 예비적 노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인도 게르만 민족은 공동소유로 시작했다. 사회발전의 과정에서 이들 모든 민족의 경우, 이러한 형태로 이 공동소유는 제거되고 부정되고 폐기되었다. …… 이 부정을 부정하는 것 그래서 공동소유를 좀 더 높은 단계의 발전으로 복구하는 것이 사회혁명의 과제이다.58)  


원고에서 우리는 가장 낡은 유형의 공동체에 대한 흥미로운 서술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자본론』(1867)에서 다소 거칠게 그려진, 맑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묘사에 대체적으로 상응하는 것이며 나중에 약간 상세하게 그려진 『고타강령비판』(1875)의 묘사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원고에서 가장 낡은 유형(그것의 파생물인 ‘농촌코뮌’과는 대조되는 것으로서)을 특징짓는 간결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좀 더 원시적인 공동체(토지공동소유 말고도)에서 노동은 공동으로 수행되며 역시 공동의 생산물은 재생산을 위해 비축할 부분을 제외하고 나서 소비의 필요에 따라 (구성원들에게) 배분된다.’59) 이 텍스트와 『자본론』(1권)에 나오는 구절이 비슷한 것은 눈에 띨 정도다. 『자본론』의 구절은 공동의 노동수단을 갖고 노동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 관한 것이며 이 연합에서 노동의 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로서 그것 가운데 일부는 생산수단으로 다시 사용되기 위해 비축되며 나머지는 소비를 위해서 구성원들 사이에 배분된다.60) 실제로 이는 맑스가 자신의 1881년 원고에서 모건을 인용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던, 좀 더 높은 단계에서 새로운 형태로 출현하는 원시적인 낡은 사회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러시아 코뮌에 대한 맑스의 입장이 자유롭게 연합을 이룬 노동자들의 사회로 이행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서 근본적으로 이탈한 것인가라는 점이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 사례의 특이성과 ‘특수성’(맑스가 여러 번 강조했던)은 이 사례를 모범인 듯이 결코 다른 전자본주의적 농업사회로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일무이한 사례는 맑스의 일반적인 입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61) 맑스의 편지에서 아주 분명한 것은, 성공적인 ‘러시아 혁명’을 통해 좀 더 높은 유형의 사회로 이행하려는 노력에서 코뮌은 자본주의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코뮌은 여전히 다른 곳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것을 필요로 하며 자신의 모순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조건을 촉진시킨다. 이는 코뮌이 자본주의가 발전된 생산력(이는 서구에서 승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사용가능해지는 것인데)을 만들어내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과 똑같다. 좀 더 높은 유형의 사회로 코뮌이 변화되는 것은 다른 곳에 자본주의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기 이전에 이미 코뮌은 음울한 미래를 맞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맑스는 이 미래를 ‘러시아의 현실’에 입각해서 그것의 ‘이원성’에 체화되어 있는, 그것의 해체요인의 해부에서 인식하고 있다.62) 맑스는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의 원고를 작성하기 전에 이미 미카일로브스키에게 보내는 편지(1877)에서 코뮌의 해체가능성을 지적하고 있고, 1861년의 경로가 만일 계속된다면 코뮌을 『자본론』의 일반적인 사례로 만들어 버릴 것임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63) 


오히려 러시아의 사례는 새로운 ‘자유결사체’를 건설하기 위한 기본적인 두 조건, 즉 사회적 노동으로서 노동의 발전과 노동생산력의 고도 발전은, 다른 형태의 자연적 ‘공산주의’(그리고 소가족 생산양식)에서는 발생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 노동의 생산력은 뒤쳐져 있을 뿐 아니라 농촌 코뮌은 “분할된 노동양식 말고도 일정한 취약점에 노출되어 있다. 즉 노동을 사회적 노동으로 발전시키기는커녕, 다른 코뮌과 접촉이 없는 지역화 된 소우주라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64)


코뮌체계의 이 ‘취약점’은 토지가 공동소유이지만 코뮌이 새로운 유형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이는 이미 『자본론』 첫판(1867)에서 맑스가 1860년대에 지녔던 태도를 되풀이하면서 이론적으로 확립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와다가 말하는 ‘맑스에게 전환점’이었던 1870년에, 체르니세프스키에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이전에 확립된 것이었다.65) 아주 흥미롭게도 맑스는 『자본론』의 두 번째 판(1872)과 불어판(1875)에서 이 구절을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유지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고대적 생산양식’ 등에서] 생산의 고대적 사회조직체들은 부르주아적 [양식]보다 아주 단순하고 훨씬 투명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연적 공동체(원시적 종족의) 안에서 한 개인을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키는 탯줄로 아직 기능하지 못하는 개인적 미성숙에 입각해 있거나 아니면 귀족과 노예라는 직접적 관계에 근거해 있었다. 그것들은 노동생산력의 낮은 단계의 발전에 제약되어 있었고 그에 상응해서 물질적 삶의 생산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서도 인간관계의 협소함에 제약되어 있었다.66) 


이미 보았듯이 낡은 코뮌체계에 대한 이러한 중심적인 사상의 상당 부분은, 맑스가 코발레프스키와 모건을 읽은 다음인 1881년에 쓴 편지에 나왔듯이 러시아라는 구체적인 사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며 또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맑스가 러시아 코뮌에 대한 생각한 것에 어떤 새로운 것도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분명히 그 당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 여전히 토지의 절반가량을 공동소유로 하고 있는 이러한 코뮌의 활력에 인상을 받았다.67) 이 점은 1870년대 초에 시작해서 적어도 20년 동안 유지된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반영되어 있다. 생산자들에 의한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는 새로운 사회의 토대 자체이기 때문에, 러시아 코뮌체계에서 공동소유는 맑스(그리고 엥겔스)에게 러시아 농민들이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의 단계를 건너 뛸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우호적인 요소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맑스가 가진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를 특수한 사례로 보았다하더라고,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입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은 한편으로 지역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전사회적 수준에서 사회적 노동의 존재(생산의 사회화와 함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생필품을 위한 투쟁에서 개인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자유 시간’을, 노동시간을 넘어 증가시키는 사회적 노동생산력의 고도발전68)이다. 이상적으로는 이러한 조건이 만들어지는 체계가 반드시 자본주의일 필요는 없으며, 실제로 그렇지 않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맑스가 되풀이해서 강조했듯이 자신의 모순을 통해서 이러한 조건을 발생시키는 것은 자본주의다. 토지공동소유와 함께 예외적인 경우로서 러시아 코뮌체계도 자본주의의 긍정적 성취들, 특히 ‘이미 이루어져 있는, 협동적 노동의 물질적 조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69) 마지막으로 1882년 ‘서문’에서 맑스가 말했듯이, 오직 서구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자신의 혁명을 통해 ‘유럽 반동의 선두’인 차르 체제에 맞서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성공적으로 확보하는 데 필요한 지원 세력의 보루로 이바지할 것이다.70) 간단히 말해서 맑스는 러시아 코뮌을 통해 한 사회가 자본주의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론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다. 이것이 맑스에게 새로운 생각이다. 그와 더불어 맑스는 러시아가 코뮌을 통해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러시아의 특수성으로 강조했다. 또한 러시아가 사회주의로 곧바로 나아갈 수 있긴 하지만, 코뮌이 갖고 있는 ‘이원성’은 그런 이행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부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결점도 지적했다. 힐퍼딩이 자주 말했듯이, ‘모든 맑스주의자 가운데 최고’인 역사의 여러 사건들은71) 맑스가 한 음산한 예언을 통해 확증되었다.


여기서 맑스가 쓴 러시아에 대한 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나타났다. 그런 글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읽어내면서 비롯된 심각한 혼란을 뚜렷이 해주는 것은 중요하다. 여러 학자들이 맑스가 쓴 편지들과 『공산당선언』 서문(1882)에서 ‘러시아 혁명’에 대한 그의 생각을 특히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으로 시작된, 맑스주의자가 이끈 20세기 혁명의 예상으로 읽었다. 샤닌에 따르면 맑스의 새로운 입장은, ‘레닌, 모택동, 호지명’ 같은 맑스주의자들이 “그 지도력과 결과들에서 사회주의적임을 입증했던,” 후진국에서 일어난 혁명을 통해 확증되었지만, “서구에서는 어떤 사회주의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72) 마찬가지로 두셀은 이렇게 쓰고 있다.


러시아는 분명히 맑스가 예견한 길을 따랐다.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러시아는 혁명을 실현함으로써, 1917년 혁명 뒤에 러시아의 농촌 코뮌이 대규모로 코뮌적 소유에서 직접 사회적 소유로 이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73)


마이클 레위는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잊혀지는 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의 러시아어판 서문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시작되어 서부유럽으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는 가설적 상황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74)


마찬가지로 라야 두나에프스카야는 1882년 ‘서문’을 ‘러시아가 서구를 앞질러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75) 


그렇지만 맑스는 여기서 논의된 글들에서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글들은 약칭 ‘러시아 혁명’으로서, 코뮌체계의 주요한 적, 즉 차르체제에 맞서 러시아 코뮌 농민들이 일으킨 혁명을 말했던 것이다. 물론 맑스(그리고 엥겔스)는 그의 유물론적인 역사관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의 작은 부문을 이루는 기술적으로 낙후된 사회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견해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효력을 지닌 이론을 통해 정당성을 얻었다. 그 이론이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세계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76)


좀 더 근본적으로, 한편으로 맑스가 생각한 생산자들 스스로가 이끈 사회주의 혁명과, 다른 한편으로 첫 단계에서는 대중적 지지를 요구할지라도 생산자들 스스로가 이끈 게 아니라, 생산자들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급진 인텔리겐차의 소그룹이 이끈 20세기에 실제로 일어난 혁명들 사이에 벌어진 틈은 크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공산당선언』에서 잘 알려진 표현처럼 “거대한 다수의 이익을 위한 거대한 다수의 통치”를 출범시키기는커녕, 처음부터 모든 실질적 권력에서 직접 생산자들을 배제했다. 이 글에서 논의된 맑스의 편지에서조차, 그가 사회의 변혁에서 직접 생산자들의 창조적 권력을 강조한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결코 대중들이 자신들의 해방을 향한 과정에서 자생적인 자기 활동성을 대체해버릴 특별한 기구의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는다.77) 따라서 맑스는 “통치제도를 코뮌 자체적으로 선출한 농민 위원회로 대체해서 그들의 이익을 위한 경제적, 행정적 기관으로 사용할” 필요성을 주장한다.78) 이것은 볼셰비키 체제에서 아주 급속히 일어났던 생산자 자치기관의 체계적인 제거와 아주 다른 것이다. 생산자 자치기관의 제거는 크론슈타트에서 일어난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대한 피로 얼룩진 제거에서 가장 또렷이 나타났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역사학자의 표현을 빌면, “파리 코뮌(1871) 이래 유럽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종류로서 활발하고 자치적이고 평등하며 고도로 정치화된 종류의 것이었다.”79) 1917년 2월 러시아의 인민봉기가 실제로 ‘러시아 혁명’에 관한 맑스의 생각에 좀 더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1917년 2월 인민봉기는 어떤 당의 지도도 없이 생산자들 스스로가 시작했고, 비록 그들의 직접적 목표로 ‘사회주의’를 천명하지는 않았지만, 개방적이고 복수적인 혁명적 과정으로 진행된 거대한 혁명적 대중운동이었다. 볼셰비키는 이 과정을 중지시켰고 이 혁명적 민주주의를 파괴했다.80)


맑스, ‘진보를 다시 생각한 사상가’


맑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연합체적 생산양식(AMP)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진보단계’ 가운데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비록 ‘진보적’이란 용어가 여기서 시대의 연대기적인 질서, 즉 코뮌적 생산양식, 노예제, 봉건제 그 다음 자본주의를 뜻하는 것일지라도 이것이 그가 베이컨, 데카르트, 파스칼, 백과전서파, 19세기 실증주의자 등과 결부된 진보 개념을 공유했음을 뜻하는 것일까? 좀 더 정확하게 맑스는, 주로 과학과 기술에서 지속적인 발전에 근거한 인류 상황의 누적적이고 연속적인 개선으로 간주되는 ‘진보’사상의 지지자였던가?81)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답변하기는커녕, 우리는 맑스가 진보를 급진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개념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맑스는 (인류의) 진보를 결코 직선적인 방향을 가진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범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의 역사적 맥락에 굳건히 위치시켰다. 그는 ‘진보의 개념을 상식적인 (관습적인) 추상적 의미로’ 파악하는 것을 경계했다.82) 그는 진보를 언제나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인, 모순적 운동으로 여겼다.83) 그러므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진보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맑스 이전의 직선적 진보개념에나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맑스는 이미 자본주의적 진보의 악행을 강조했다. 그의 비판은 진보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자들보다 훨씬 더 철저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자들의 적대자가 가진 생각만큼이나 마찬가지로 일직선적인 진보개념을 가진 이 비판자들과는 달리 맑스는 명확하게 자본 아래서 진보가 지닌 심각한 모순적 성격을 파악했다.


부불잉여노동의 착취가 적어도 역사의 일정 시기부터 지금까지 있어 온 모든 사회구성체의 공통된 바탕이라면, 맑스는 이전의 사회구성체보다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가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본은 이전의 어느 생산양식과 달리노동생산력의 보편적 발전, 즉 새로운 사회건설의 기본적인 조건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발전의 역사’를 겪는 사회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성취되는 것이다.84) 맑스는 노동생산력의 보편적 발전으로 나아가는 이러한 자본의 경향을 인류발전이 ‘오직 제한되고 지역적인 성격만을 갖던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견줄 때에만’ 자본에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여겼다.85) 그러나 맑스는 자본에 대한 그 어떤 비판자보다 더욱, 자본주의적 진보의 이러한 ‘긍정적 측면’이 지닌 적대적 성격을 강조했다.


진보에 대한 맑스의 태도는, 그가 “선과 악 사이의 독단적 구별”을 거부하고 “두 가지 모순적인 측면들이” 필연적으로 “공존하면서 그것들이 새로운 범주로 융합되어가는 것으로 구성된 변증법적 운동”을 옹호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86) 맑스는 리차드 존스의 한 구절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 구절에서 존스는 정확하게 ‘진보’가 현대 사회에서 분명히 “사물의 최선의 상태가 아니기”(노동자와 ‘축적된 주식’ 사이의 관계에 관련하여)는 하지만 “지금까지 선진적인 나라에서 진보를 특징짓는 산업발전에서 한 단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맑스는 존스가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을 고려할 때 이전의 모든 형태와 달리 엄청난 진보”를 이루는 것으로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몰락의 필연성”도 포함하는 이러한 진보의 “적대적 형태”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87) 


생산을 위한 생산이란 원리 자체가, 다시 말해 부 그 자체를 지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근대 세계’의 ‘긍정적 측면’을 특징짓는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의 보편적 발전으로 이끌고, 그와 동시에 ‘고대 세계’와 비교할 때 ‘근대 세계’에서 진보가 가진 또 다른 후진적이고 열등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산이 인간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이 생산의 목적이라는 고대적 관념은 “근대세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고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세계(‘부르주아 경제’)의 “전적인 공허함”과 견줄 때, …… “어린아이 같은 고대세계는 더 우월한 듯이 보인다.”88) 모건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맑스는 인류 진화의 초기를 언급하면서, 초기 인간의, 소유에 대한 열망의 부재를, 지금 인간정신을 지배하는 힘인 소유와 대비시킨다.89) 다시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의 첫 번째 원고에서 맑스는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원시적’이란 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원시 공동체의 활력은” 셈족, 그리이스인, 로마인들과 견줄 때만 ‘엄청난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견줄 때에도’ 대단한 것이었다. 한술 더 떠서 맑스는 “자본주의 체계에 열광하면서 그 체계를 찬양하고 그것의 우월성을 보여주려고 하는” 몇몇 부르주아 저자들은 “[이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인다.90) 몇 년 전에 맑스는 빈정거리면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키케로 시대에 그리스 시인 안티파트로스는 모든 생산적 기계의 기본 형태인 곡물 찧는 수차의 발명을 여자노예의 해방자이자 황금시대의 재건자로 칭송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이교도다, 그래 정말 이교도다! 그들은 현명한 바스티아가 발견했고 또 그에 앞서서 더욱 현명한 맥컬럭이 이미 발견했듯이, 정치경제학과 기독교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특히 기계가 노동일의 연장을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의 노예상태가 다른 어떤 사람의 완전한 인간적 발달을 위한 수단이라고 용인 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몇몇 촌스럽고 교양이 부족한 벼락부자들을 ‘우수한 방적업자’나 ‘대규모 소세지 제조업자’ 또는 ‘유력한 구두약 상인’으로 만들기 위해 대중의 노예화를 설교하기에는 그들에게는 특수한 기독교적 자선기관이 없었던 것이다.91)


자본 아래서 진보가 모순적인 것(적대적인 것)이라는 맑스의 견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서 노동생산력의 발전과 관련해서 위대한 고전 경제학자 두 명, 즉 리카도와 시스몽디의 각 견해에 대한 그의 고찰에서도 분명하게 나온다. 리카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생산의 절대적 형태라고 여기고 부를 위한 부의 창조, 생산을 위한 생산을 주장했다. 그는 “자본의 긍정적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스몽디는 자본의 ‘한계’와 그것이 지닌 “부정적인 일직선적 성격”을 “심오하게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순적이라는 점을 깊이 느끼면서”, 노동생산력이 성장함에 따라 모순들도 성장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리카도는 자본의 보편적 경향을 좀 더 잘 알고 있었고, 시스몽디는 그것의 한계를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리카도의 관점이 이전 사회와 관련하여 ‘혁명적’이었다면, 시스몽디는 자본주의 사회와 관련하여 ‘반동적’이었다.92)


몇몇 생태주의자들이 때때로 그러듯이 맑스가 가장 극단적인 생산주의자였다고, 즉 생산을 위한 생산에 대한 옹호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틀렸다.93) 자본 아래서 환경에 대한 맑스의 관심은 다음 구절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도시 노동자의 육체적 건강과 농촌 노동자의 정신적 삶을 파괴할 뿐 아니라 지구와 인간 사이의 유기적 교환을 위해 자생적으로 성장한 조건을 파괴한다. …… 공업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도 생산과정의 자본주의적 전환은 생산자들의 순교로 나타나며, 노동수단은 노동자를 종속시키고 착취하고 궁핍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노동과정의 사회적 결합은 노동자의 활력, 자유, 개인적 독립에 대한 조직화된 억압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회적 생산과정의 결합을 발전시키지만, 그것은 오직 모든 부를 낳는 두 원천, 즉 지구와 노동자를 동시에 탈진시킴을 통해서이다.94) 


이와 같은 관심이, 맑스가 프랑스 남성, 여성 노동자의 생활조건과 노동조건을 살피기 위해 만든 설문에서도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95)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공산당선언은 부르주아가 이룬 물질적 성취와 노동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을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맑스는 이러한 힘들의 성장을 인간해방을 위한 조건으로 중요시했다. 사실상 맑스는 개인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무제한적인 생산에 대한 필요를 주장한 리카도를 “정당하다”고 여겼고, 이런 면에서 리카도에 대한 비판자들을 “반동적”이라고 보았다.96) 그러나 우리는,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를 기계나 가축 또는 상품과 같게 보는” 리카도의 입장을 언급하면서, 이 관점은 “리카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토아주의적이고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까닭은, “리카도의 관점에서 볼 때 ‘생산’은 이런 식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그저 기계이거나 가축이며 부르주아 생산에서 실제로 단순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리카도의 무자비함은 과학적으로 솔직한 것일” 뿐 아니라, 리카도가 “바로 그의 시대에 적합하게” 부르주아적 현실에 대해 과학적으로 정직한 재현을 제공한 것인 한에서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부를 창조하는 데에 가장 효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97) 물론 리카도에 대한 이러한 칭찬은, 리카도가 ‘절대적 생산형태’라고 봄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적 성격을 부인한 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같이 주어진다.


맑스가 늘 강조하고 있듯이, 자본의 본성 자체는 내재적으로 적대적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극도로 파괴적인 차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맑스가 보기에는 이렇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부정적 또는 모순적 성격은 이 생산이 생산자에 대해 무차별적이고 대립되기 때문이다. 생산자는 단순한 생산수단일 뿐이고 물질적 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물질적 부의 발전은 개인에 대립되고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다.98)


그러나 자본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양자 모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적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시대까지 지속되어 온 문명의 법칙이다. 지금까지 생산력은 적대적 계급체제 덕분에 발전되어 왔다.”99)


맑스는 리카도가 알 수 없었지만 자본의 모순에 대한 시스몽디의 심오한 분석을 칭찬하면서도, 시스몽디가 이러한 모순을 ‘외부로부터’ 자본에 ‘도덕적, 법적 제한’ (이러한 제한은 ‘외적이고 인위적인 장애’로서 자본이 반드시 치워버릴 것인데)을 가함으로써 제거하려 한 점을 비난한다.100)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근대적인 관점인가!101) 실제로 생산력의 무제한적인 발전을 향한 자본주의적 경향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발전이 “처음에는 개인들 대다수를 희생시키면서, 심지어 전 계급을 희생시키면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러한 적대를 돌파함으로써 종결되며, 결국 개인의 발전과 일치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좀 더 높은 발전은 개인이 희생되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102) 물론 맑스는 이러한 파국적 상황, 즉 ‘진보’의 대가로 대다수가 파괴되는 것 을 모든 시대에 타당한 보편적 법칙으로 정립하지는 않았다. 이는 오직 맑스가 유명하게, ‘인류의 전사’라고 부른 시기 동안에만 타당하다. 맑스는 이점을 매우 명확하게 두 텍스트에서 거의 똑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실상 인류의 사회주의적 구성을 예고하는 역사적 시기에 일반적인 인간의 발전이 확보되는 것은 오직 개인적 발전의 엄청난 낭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103)


진보의 문제에 대한 최근의 두 논문


결론으로 가기 전에 우리의 토론 주제의 영역에서 최근의 두 글, 즉 보겔(Jeffrey Vogel, 1996)과 뢰위(Michael Löwy, 2000)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편의상 시간적 순서를 바꾸어 레위의 글을 먼저 보고 다음에 보겔의 글로 돌아가기로 한다. 뢰위는 맑스에게 두 가지 대립하는 진보개념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유럽중심적이고 헤겔적이며 목적론적인 것으로서 닫혀진 것”인 반면에 두 번째는 “비판적이고, 비목적론적이며 열려진 것”이다.104) 첫 번째 개념은 “유럽에서 발생한 생산력의 발전을 진보와 동일한 것으로, 즉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인도된다는 의미에서, 그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맑스의 몇몇 글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105) 이런 면에서 이 저자는 특별히 1850년대 쓰인, 인도에 대한 맑스의 글들을 언급한다.106) 이와 대립되는 두 번째의 개념은 역사를 진보와 함께 파국으로 간주한다. 즉 “역사적 과정의 결과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는 “러시아와 ‘원시 공산주의’에 관한 맑스의 후기 글들과 『자본론』의 몇 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107) 첫 번째 개념은 진보에 관한 ‘선형적’인 관점이며 그 ‘결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서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제2인터내셔널과 1924년 이후 제3인터내셔널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의 점증하는 모순으로)로서 사회주의라는 결정론적인 개념화”가 특징이다.108) 뢰위가 진보에 관한 ‘결정론적’ 견해에 반대하면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트로츠키와 다른 동시대의 맑스주의자들을 논하고 있지만, 지면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다른 ‘맑스주의자들’에 관한 그의 논의는 도외시하고 오직 맑스에 관한 그의 견해만을 다루기로 한다.


뢰위가 여러 좌파들과 공유하고 있는, 맑스의 ‘일정한 글’에 나타나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혐의에 관한 한, 그것은 맑스의 텍스트를 잘못 읽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물론 세계의 모든 지역 가운데 맑스는 유럽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이곳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나타났고 세계 지배를 향한 그 여정도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맑스가 공식적으로 ‘자본의 운동법칙의 발견’에 몰두하겠다고 선언하기(1867) 이미 오래 전에 ‘정치경제학비판’(1844)을 시작으로 해서 맑스가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맑스는 지금까지 있어 온 생산양식 가운데 자본이 가장 혁명적인 생산양식이라고 보았고, 자본이 이전의 생산양식이 지닌 모든 협소함과 국지성을 파괴하고 그 본성의 논리 자체에 의해서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적대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주체적이고 물질적인 조건들을 만들어낸 유일한 생산양식이라고 보았다. 맑스의 관점에서 이것이 그 생산양식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역사적 정당성’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어쨌든 유럽에서 발생해서 퍼져나갔다. 실제로 지리적으로 맑스는 유럽이 아니라 서부유럽이며 영국이 아니라면 저 멀리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에 준거점을 두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맑스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유럽이 아니라 자본이었기 때문이다.


맑스가 사회적 발전을 미리 정해져 있는 목적이나 의도에 봉사하는 것으로서 목적론적인 방식으로 보았다고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맑스의 역사관은 분명히 목적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109) 맑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초기부터 “진리가 스스로를 입증해 나가는 자동기계로서 인간은 그에 그저 따를 뿐이라는” 헤겔의 견해를 논하면서 이점을 분명히 했다. 맑스는 초기에 “역사가 진리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인 주체(이에 대해 현실적 인간은 단지 그것을 지탱하는 담지자일 뿐인데)”가 된다는 ‘낡은 목적론자들’의 관점을 헤겔이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맑스는 덧붙여 말하기를.


분명히 ‘역사’가 마치 자신이 별개의 한 인간인 듯이, 인간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부를 생산하지 않는다. 전투를 하지도 않는다. 역사는 단지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활동일 뿐이다.110)


이것에 이어지는 텍스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종교, 도덕, 형이상학 그리고 모든 나머지 이데올로기들은 역사도 갖지 않으며 발전도 하지 않는다. 거꾸로 물질적 생산과 소통을 발전시키면서 자신들의 현실을 따라 자신들의 사상과 그 산물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111)


이러한 유물론적인 역사관에 허용되는 유일한 전제조건은 “선행하는 역사적 발전”뿐이다.112) 다시 말해서 “일정한 조건 아래서 실제의 진화과정을 통해 현실적이고 경험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실제 활동을 하는” 개인들뿐이다. 여기에 “역사적 시기를 조정하기 위한 처방이나 의도 따위”를 위한 여지란 없다.113) 맑스와 엥겔스가 유물론적 역사관에 대한 자신들의 첫 작업에서 공산주의를 ‘이론’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표현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반목적론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공산주의의 ‘출발점’은 


이론적으로 규정된 원리가 (아니라) 사실이다. ……  그것이 이론적인 한에서 공산주의란 계급투쟁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입장의 이론적 표현이며, 프롤레타리아 해방조건들의 이론적인 종합이다.114)


공산주의는 현실이 그에 맞추어야 하는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 운동”이다.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되는” “이 운동의 조건”은 “이미 주어져서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선행조건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115) 15년이 지난 다음 맑스는 다음을 강조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유일하게 굳건한 토대는 [기존] 부르주아 사회의 경제구조에 대한 과학적 통찰이다. 어떤 유토피아적 체계를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회의 역사적인 혁명적 과정에 자기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116)


이와 같은 역사개념은 그 정의상 목적론적인 세계관을 배제한다.


맑스의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이며 경제주의적인 접근’의 한 사례로서 뢰위는 인도에 관한 맑스의 두 논문(1853) 인용한다. 그 가운데 하나에서 그는 맑스가, 영국 부르주아지가 인도의 낡은 사회구조를 파괴하고 증기와 과학을 도입함으로써 인도에 “일종의 사회혁명을 발생시키는” 데에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음을 지적한다.117) 우리는 맑스가 여기서 말한 것이, 그(와 엥겔스)가 쓴 다른 글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유물론적 역사관의 중심주제의 한 변주일 뿐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맑스가 쓴 초기의 텍스트중 하나에서 그는 이미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적 소유는 그 경제적 형태에서 자신을 자신의 해체 쪽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이는 그것과는 독립되어 있고,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오히려 그것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이루어지는 운동을 통해, 즉 사물의 본질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118)


그리고 『공산당선언』(1848)에서 부르주아지는 이전의 생산양식을 파괴함으로써 생산력과 생산수단을 지속적으로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으로 묘사되고, 부르주아지는 산업진보의 “수동적이고 무의식적인 담지자”로 기능하면서, 부르주아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묘사된다.119) 몇 년 뒤에 『자본론』 제3권의 원고에서 노동생산력의 발전을 “자본의 역사적 과제이자 정당화”라고 말하면서 맑스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럼으로써 자본은 무의식적으로 좀 더 높은 생산양식의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 낸다.”120) 그리고 『자본론』 제1권의 유명한 부분인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은 바로 앞에서 인용했던 『공산당선언』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1853년에 쓰인 인도에 관한 맑스의 글들은 위에서 언급된 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비목적론적이다.


인도에 관한 글들과 달리 맑스가 “비판적이고 비목적론적이며 근본적으로 열려져 있는” ‘진보의 변증법’을 말하는 글들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121) 뢰위는 『자본론』 제1권에서 “모든 경제적 진보는 동시에 재난이라”는 문장을 인용하고 나서 자본의 파괴적인 생태학적 기록에 관한 긴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첫째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텍스트가 『자본론』의 동일한 장(‘대공업’)에 나오는 것으로 이는 전체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뢰위가 달랑 인용한 한 문장(위에 주어진 대로)에, 맑스는 바로 같은 구절에서 그것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부정적 측면’이라고 제한을 가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맑스가 그와 동일한 구절에서, 이전의 생산양식 중에 모든 고정된 것과 유서 깊은 것을 파괴하는 부르주아지의 탁월하게 ‘혁명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공산당선언』(1848)의 몇 줄을 이용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공업이 낳은 파국은 노동의 변화에 대한 인정을 강요하며 그렇게 해서 사회적 생산의 일반법칙으로서 노동자의 최대 가능한 전면성을 강제한다는 것이다. …… 대공업은 사회로 하여금 파편화된 개인, 즉 세부 노동의 단순한 담지자를 총체적으로 발전된 개인으로 대체할 것을 강요한다.


같은 단락에서 맑스는 총체적인 접근법을 멋지게 요약하고 있다. “역사적 생산형태의 모순의 발전은, 자신의 해체와 변화를 향한 유일하게 역사적인 길이다.” 그리고 난 뒤 의미심장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불어판에서) “그곳에, 교조주의자들, 유토피아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역사적 운동의 비밀이 놓여 있다.”122) 우리는 이것이 맑스가 1850년대에 인도에 관해 썼던 글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진보에 대한 맑스의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이며 경제주의적인 접근”을 예시하기 위해서 뢰위가 선택한 바로 그 글들을 살펴  보자.


영국의 부르주아지가 어쩔 수 없이 했던 모든 것은, 인민대중의 사회적 조건을 해방시키는 것도 물질적으로 개선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두 가지를 위한 물질적 전제의 초석을 놓는 것이었다. 부르주아 산업과 상업은, 마치 지리학적 혁명이 지표면을 만들어내었던 것과 똑같이, 새로운 세계의 이와 같은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그 이상의 것을 했던 적이 있을까? 개인과 사람들을 피와 오물로, 빈궁과 타락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진보가 이루어진 적이 있을까?123)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맑스의 일반적 테제가 어떻게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작업에 관철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이전의 계급과 비교해서,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의 도래와 관련하여 부르주아의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인 역사적으로 혁명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뢰위는, 맑스가 강력하게 주장한 (과거 역사에 대한 면밀한 연구에서 도출된) 사상,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모든 사회동학(혁명을 포함하여)의 어머니라는 사상과 마찬가지로 인류 진보의 근본적인 요인으로서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맑스의 강조를 모두 ‘선형적’이고, ‘유럽중심적’이며 ‘목적론적’이라고 기각한다.124) 맑스가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듯이, “우리 시대 생산력과 사회관계 사이의 적대는 명백하고도 압도적인 사실이며 결코 반증될 수 없는 것이다.”125) 불행하게도 뢰위는, 제2인터내셔널과 스탈린이 이러한 사상의 복합체를 사(오)용한 것을 비난하는 것 말고는 자신의 태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는 맑스 자신의 텍스트에 입각한 엄밀한 논증을 빈곤하게 대체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실상 뢰위의 태도는 우리가 맑스(와 엥겔스)에서 찾아낸 것과 같은 전체적인 유물론적 역사관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거부하는 것에 해당할 뿐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생산력을 어떤 식으로 고려하고 있는가? 맑스는 자신의 ‘새로운 유물론’에 대한 첫 번째 작업의 하나에서 “생산력의 역사는 개인 자신의 능력이 발전된 역사임”을 지적했다.126) 그에 바로 뒤따르는 저작에서 맑스는 “혁명적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모든 생산수단 가운데 가장 큰 생산력”이라고 특징지었다.127) 그 텍스트에서 맑스는 이렇게 썼다.


사회적 관계는 생산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생산력을 획득함으로써 인류는 자신의 생산양식을 변화시키고 이 생산양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인류는 그들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킨다.128)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이 ‘긴밀한 연결’은 그것들의 점증하는 적대와 함께, 그 가장 엄밀한 표현을 유명한 1895년의 ‘서문’에서 발견한다. 맑스는 이것을 다시 『자본론』 제1권에 있는 중요한 방법론적 노트에서 다룬다.


기술은 어떻게 인간이 능동적으로 자연에 관계하는가를 드러낸다. 즉 (인간의) 물질적 삶의 생산과정과 결국에는 사회관계의 기원, 그에 따르는 이념의 기원을 드러낸다.


이런 견해는 맑스가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따라서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여겼던 것을 논하는 맥락에서 제시되었다.129)


생산력의 발전이 갖는 중요성으로 다시 돌아가면, 우리는 맑스가 제한된 생산력은 인간해방을 가능하게 하지 못한다고 단언했음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인간은 기존의 생산력이 ‘처방하고 허용하는’ 한도에서만 자신의 해방을 획득했다.


지금까지 모든 자유는 제한된 생산력에 바탕을 삼고 있었다. 모든 사회를 만족시키기에는 충분치 않은 그 생산은 오직 몇몇 개인이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한에서 진보를 허용했다. 즉 일부(소수)가 진보의 독점권을 얻는 반면에, 다른 일부( 다수)는 그저 생필품을 위한 끝없는 투쟁 때문에 잠정적으로 모든 진보에서 배제되었다.130)


1856년 맑스는 ‘영어로 된 짧은 담화’라고 부른 글에서 영국 노동자들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증기, 전기, 자동기관은 바르베, 라스페, 블랑키 같은 시민보다도 더 위험한 성격을 가진 혁명가들이다.”131) 대략 10년 뒤 맑스는 “부 자체의 창조, 즉 사회적 노동의 무제한적인 생산력만이 자유로운 인간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132) 이미 알고 있듯이, 그러한 부의 창조가 자본의 유일한 ‘역사적 정당성’이다.


마지막으로 뢰위는 ‘후기’ 맑스의 글들이 근본적으로 그것의 ‘비목적론적’이고 ‘열려진’ 진보관 때문에 초기의 글들과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앞에서 상세하게 논의한 것에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러시아에 대한 맑스의 글들이 기본적으로, 1840년대 초부터 계속해서 맑스의 모든 텍스트를 지배하고 있는 유물론적 역사관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맑스의 진보관의 한 사례로서 뢰위는 『자본론』 제1권에서 이런 인용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법칙적인 불가피성에 따라 그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그것은 부정의 부정이다.”133) 그러나 ‘후기’의 맑스는 러시아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자본축적에 관한 자신의 분석이 오직 서부 유럽에만 적용됨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바로 뢰위가 인용한 것의 첫 문장을 재차 말하고 있다. 게다가 만일 맑스 자신이 이러한 주장에 대한 어떠한 ‘증명’도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장들에 (이미) 주어져 있는 장구한 발전을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134)


이제 진보의 문제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택하고 있는 보겔의 논문을 보기로 하자. 이 논문의 핵심은 (맑스가 주장했다는 것인데) 생산력의 발전이 다수의 희생을 대가로 성취되는, ‘완전히 인간적인 사회질서’의 객관적, 주관적 조건을 만들어 내는 ‘역사의 비극’이라는 것이다.135) 이 논의는 계몽주의에서 나온 ‘기본적인 두 가지 가치’라는 틀 안에 맑스를 위치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인권 또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진보 또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보겔은 맑스의 역사이론 안에서 이 두 가치의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을 말하면서 인류의 진보는 “불가피하게 고통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를 보기로 들어 설명하려고 보겔은 고대 그리스 노예제에 대한 맑스의 ‘복잡한 태도’와 ‘좀 더 중요하게는’, ‘시초축적’과 식민지정복을 포함해서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상반되는 태도들을 언급한다.136) 그렇지만 앞으로 보게 되듯이, 보겔은 이 두 현상에 관한 맑스와 엥겔스의 글들을 일관성 있게 해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137) 보기를 들어,  이 점은 특히 맑스가 노예제를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진보적 시기’라고 한 것을 해석할 때에 그렇다.138) 그와 더불어 보겔은, 기록이 보여주듯이 소수의 문화적, 물적 진보를 위해서 다수의 억압과 노예화가 요구된다는 맑스의 논점을 언급하고 있다. ‘맑스에게 이것은 역사의 비극이다.’ 비록 보겔이 쓴 논문의 상당부분이 맑스의 진보관과 관련된 몇몇 동시대 진보사상가와 가진 논쟁을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맑스에 관한 그의 논의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첫째, 만일 ‘비극’이 불행한 결말을 가진 드라마를 뜻한다면, 왜 맑스가 이 과정을 비극이라고 여겼다는 건지 명확하지가 않다. 이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맑스가 쓴 책에서 찾을 수 없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만일 그것이 인간사회를 영원히 지배하도록 정해진 숙명적 법칙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생산력의 발전이 지금까지 다수를 희생으로 삼았다는 인식이 ‘비극’일 수는 있다. 그러나 만일 이 발전과정이 단지 이행적인 단계로 여겨지고, 그 단계의 끝에 가서 인류는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에서 자신의 현실적인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극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139) 보겔은 계속해서 자신이 “일관된 것으로 해석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고대 노예제와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취급을 다룬다. 특히 그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노예제의 ‘진보성’이다.140) 그러나 노예제에 대한 이러한 표현을 보겔이 따온 문장은,141) ‘진보적’이라는 용어 사용에 어떠한 가치평가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오히려 그것은 ‘진보’를 연대기적인 연속적 질서로 뜻하고 있다. 이는 전체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렇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진보적인 시기들’로서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부르주아적 생산양식.’ 우리의 해석이 맑스와 엥겔스가 다른 곳에서 썼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민과 노예’라는 계급이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출발점’이었다는 『공산당선언』(1848)의 주장에 대해서, 엥겔스는 그것의 1888년 영어판에서, 1848년 이후의 연구가 보여준 바에 따르면 (물론 자유민과 노예를 포함해서) 계급들은, 인도에서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의 사회형태로서 앞서 존재했던 ‘농촌공동체’의 ‘해체’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덧붙였던 것이다.142) 맑스 자신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최초의 공동소유형태라고 말하는 곳에서 “노예제, 농노제 등은 …… 비록 공동체에 입각한 소유와 공동체에서 노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온 결과이기는 하지만, 항상 부차적인 것이지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143) 


보겔은 “전반적인 경제적, 정치적, 지적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고대) 노예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엥겔스의 구절을 언급하고 있다.144) 맑스는 자신의 시대에 남미와 북미에서 흑인들의 ‘직접적 노예제’에 관해 쓰면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노예제의 ‘나쁜 측면’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설명해야 할 것은 노예제의 좋은 측면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직접적 노예제가 지금 산업화의 중심이며 …… 노예제가 없다면 북미는 가부장적인 나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예제는 극도로 중요한 범주이다.”라고 강조했다.145) 여기서 ‘좋은 측면’이란 인류의 발전에, 비록 비참한 지배 상태이긴 하지만 노예노동이 한 긍정적인 이바지를 맑스가 강조한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노예제가 지닌 ‘긍정적’ 측면에 대한 관점은, 만일 우리가 유물론적 역사관이 노동에 부여한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매우 이상한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관점에서 노동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즉 그것은 자연의 도움을 받아 행해지는 물질적 삶의 생산과 재생산의 능동적인 담지자이며, 모든 사회의 토대이다.146) 그러나 계급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사회의 진화에서 노동은 종속되어 왔다. 직접적 노예(농노)에서처럼 ‘인신적’으로 또는 ‘임금노예’의 경우처럼 ‘물질적으로.’147) “아주 부정적으로 노동을 가축으로만 여기는 정치경제학”과는 달리 실제로 유물론적 역사관은 노동 안에 동시적으로 그리고 분리할 수 없게 있는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 다시 말해 노예화시키는 측면과 창조적인 측면을 모두를 받아들인다.148)


더군다나 보겔이 왜 특별히 초기 자본주의와 자본의 ‘시초축적’에만 관심을 가졌는지 명확하지 않다. 보겔이 “거대한 고통에 대한 맑스의 공포와 인간 발전의 잠재성에 대한 맑스의 의심”149)이라고 부른 것은 자본주의의 모든 단계에 적용되는 것이지 단지 그 ‘초기단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류의 추상화, 심지어는 인류의 외양의 추상화도 완료된다. ……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조건은 비인간성의 경련에 도달한 현재 사회의 모든 조건을 차지한다.150)


보편적 소외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그 존재의 모든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적용되는 맑스의 일반적인 견해다. 마찬가지로 자본 아래서 노동자를 ‘기계의 부속물’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노동자가 “부르주아의 전제정치”151) 아래로 종속되는 것을 말한 『공산당선언』의 규정은 그 모든 단계에서 자본 아래 있는 노동자의 상황에 같게 적용되는 것이지 그 ‘초기’ 단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진보’라는 넓은 전망 안에서 자본에 관련된 노동을 맑스가 다루면서 보여주는 소위 ‘긴장’이란 것은 1840년대에 그가 쓴 글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사실상 ‘긴장’은 현실 자체 안에 있는 것이며, 그것을 맑스의 분석이 단지 이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맑스 개인의 의식에 있는 어떤 ‘긴장’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이 분석은 본 논문의 시작부분에서 인용했던 (헤겔을 경유한) 스피노자-맑스의 표현에 압축되어 있는 변증법적 원리에 굳건한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본 논문의 앞부분에서 우리는 맑스의 몇몇 텍스트에서 자본이 부정적인 것인 동시에 긍정적인 것으로 설명되는 것을 보았다. 노동도 마찬가지이다.


부정적으로 파악하면, 살아 있는 노동은 모든 객관성의 완전한 침식이다. …… 노동은 절대적 빈곤이다. 이 빈곤은 결핍이 아니라, 객관적 부에서 전적인 배제다. …… 긍정적으로 파악하면, 노동은 객체가 아니라 활동이며, 객체의 보편적인 가능성이다. 달리 말해서 노동은 한편으로는 객체로서 절대적인 빈곤이며 다른 한편으로 주체로서 부의 보편적 가능성이다.152)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 자체가 긍정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힘들다. 맑스는 ‘유토피아 이론가들’이 “빈곤을 단지 빈곤으로 여기고 낡은 사회를 뒤집어  엎을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측면이 그 안에 있음”을 보지 못한다고 비난했다.153) 따라서 “비인간성의 경련”의 희생자인 “프롤레타리아트는 불가피하고, 전제적이며 더 이상 은폐할 수 없는 비참함에 의해서 이와 같은 비인간성에 저항하도록 강요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154) 맑스는 더 나아간다. 그가 20년의 시간을 두고 자본-노동의 적대를 다룬 두 원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소유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같은 인간소외를 나타낸다. …… [그러나] 소외의 과정에서 …… 처음부터 노동자는 자본가보다 더 우월하다. 자본가는 소외의 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안에서 절대적인 만족을 찾는 반면에 희생자인 노동자는 처음부터 반란의 상태에 있다.155)


결론


1865년에 맑스는 노동자들에게는 그 어떤 맹목적인 숙명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태도를 잘 요약해서 말했다.


근대 공업의 발전 자체가 노동하는 인간에 적대적으로, 자본에 우호적인 규모를 점진적으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 그렇다고 그것이 이 체계 안에서 사물의 경향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본의 침투에 대해 자신들의 저항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일시적 향상을 위한 그때그때의 최선의 기회를 만들어낼 시도도 포기해야 하는가? 만일 그렇게 포기했다면, 그들은 구원이 불가능한 비참한 사람들로 전락했을 것이다. ……  자본과 그들의 갈등에서 비겁하게 물러섬으로써 노동계급은 분명 어떤 커다란 운동의 주도권도 잡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 노동계급은, 그들이 처한 비참함을 만들어내는 것과 함께, 현재의 체계가 그와 더불어 사회의 경제적 재구성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형태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156)


자기 자신의 부정의 조건과 함께 자유롭게 연합을 이룬 생산자들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조건을 모순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앞 서 있던 사회 그 자체다. 이런 면에서 두 가지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은 노동생산력의 거대한 발전과 사회적 노동으로서 노동의 발전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생산양식 가운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만이 이러한 조건들을 창조한다. 생산수단에서의 일정한 공동소유형태가 아직 내부로부터 붕괴되지 않은 경우에 사회주의가 본질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인 사회로부터 출현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은 그것이 외부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물질적 성취라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도움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승리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재하는 경우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아래서 해당의 물질적 조건의 창조, 보통 물질적 진보라고 부르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특정한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환경을 포함한 인간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자본은 티무르같이 ‘무수한 인간 영혼’을 먹어치우지 않고는 자신의 부정을 위한 조건도,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조건도 만들어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 아래서 진보의 긍정적 측면을 단선적으로 강조했듯이 역시 많은 사람들이 자본 아래서 퇴행적인 또는 부정적인 진보를 단선적으로 강조했다. 맑스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같은 과정에 속하는 이러한 모순적 측면들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아마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심오하고 명확하게 진보를 ‘다시 사유했다.’ 이런 엄청나게 적대적인 사회구성체에는, 단지 진보의 ‘좋은’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긍정적 측면이 필연적으로 나쁜 측면을 만들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측면 자체가 긍정적인 측면을 만들어 내어 자본의 희생자들이 대중적인 저항과 투쟁을 통해서 근본적 원인 자체를 뿌리 뽑게 한다.157) 『자본론』 불어판에서 맑스는 “자연에서처럼 역사에서도 부패작용이 삶의 실험실이다.”라고 강조했다.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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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 박성수




1) 이 글의 출처는 Historical Materialism, vol. 14 : 3, pp. 42-84이다. 

 

2) 이 글은, 이전에 베를린과 런던에서 발표했던 글을 본질적으로 다시 쓰고 확장시킨 것이다. 이 글은 2003년 11월 6일에 앰허스트에 있는 매사츄세츠 대학에서 열린 맑스주의와 세계단계회의에서 ‘맑스와 비서구세계’라는 주제로 MEGA가 조직한 세션에서 발표되었다. 알프레도 자아드 필로의 격려에 감사드리며, 『역사적 유물론』의 편집자들과 익명의 독자들이 보내준 조언에도 감사드린다. 

 

3) 원본 이름은 『경제학철학초고』- 편집자 주 

 

4) Marx 1973d, p. 575. 

 

5) Marx 1988, p. 316. 이 원고는 엥겔스가 편집한 『자본론』 제2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6) Marx 1987, p. 110; 1965, p. 614. 

 

7) Marx 1965, p. 135; Marx와 Engels 1973, p. 34. 

 

8) Marx와 Engels 1973, pp. 34-5; Marx 1959a, p. 107. 

 

9) ‘진정한 부는 모든 개인들의 발전된 생산력이다. 따라서 부의 척도는 더 이상 노동시간이 아니라 가용시간이다.’(Marx 1953, p. 596) 

 

10) Marx와 Engels 1973, p. 33. 

 

11) Marx 1953, p. 79;1987, p. 110. 

 

12) Marx 1976, p. 174. 

 

13) Marx 1988, p. 107. “그렇게 부르길 원한다면”(if you like)이라는 표현은 원래 텍스트에서 영어로 되어 있다. 

 

14) Marx 1976, pp. 173, 175. 

 

15) Banaji 2003의 흥미롭고도 적절한 논문을 참조. 

 

16) Marx 1953, p. 232. 

 

17) Marx 1962, p. 419. 강조는 원문. “생산력을… 발전시키고”와 “전사회가 … 겪는”은 원문에 영어로 되어 있다. 

 

18) Marx 1987, pp. 413; pp. 959-60;1988, p. 107. 

 

19) Marx와 Engels 1973, p. 60. 

 

20) Marx 1987, p. 467; 1965, p. 993. 

 

21) Marx 1973a, p. 555. 

 

22) Marx 1965, pp. 995-6;1987, p. 475. 

 

23) Marx 1953, pp. 635-6 

 

24) Marx 1962, p. 426; 1992, pp. 504, 662; 1964, pp. 456, 621. 

 

25) 이런 글들로는, 1877년 미카일로프스키에게 보낸 맑스의 편지, 1881년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와 몇 가지 편지초안들, 『공산당선언』에 대한 1882년 러시아어 판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공동서문, 맑스가 불어로 쓴 러시아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이 있다. 

 

26) Shanin 1983. 

 

27) 맑스는 여기서 ‘자본의 시초축적의 비밀’이라는 장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연관해서 ‘서부유럽’에 대한 언급은 불어판에는 있지만 독일어판에는 없다. Marx 1965, p. 1170을 참조할 것. 

 

28) 미카일로프스키에게 보낸 편지. Marx 1968, p. 1555. 

 

29) Shanin 1983, p. 18. 

 

30) Shanin 1983, p. 20. 

 

31) Dussel 1990, pp. 260-1. 

 

32) Löwy 1996, p. 200. 

 

33) Dunayevskaya 2002, p. 259. 강조는 원문.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꽤나 강력한 입장을 상당히 완화시키는, 저자의 다른 진술도 주목해야 한다. 즉 ‘맑스가 자본축적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는 축적이 자본주의에서 보편적인 것이 아님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세계에 대해서 그것이 보편적이지 아님을 뜻한 것이고 따라서 발전되지 않은 비자본주의 나라는 다른 형태의 발전을 경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그는 그러한 나라들이 그와 함께,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이 겪는 것들을 마찬가지로 겪어야 한다는 말로, 그 주장을 완화시키고 있다.’(Dunayevskaya 2002, p. 312); 강조는 원문. 이러한 진술을 참조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Peter Hudis에게 감사드린다. 

 

34) Marx 1968, p. 1566. 강조는 필자. 

 

35) Marx 1968, pp. 1561, 1565, 1566. 

 

36) Marx 1968, pp. 1564. 

 

37) Marx 1968, p. 1565. 

 

38) Marx 1968, PP. 1564-5. 

 

39) Marx 1968, p. 1565. 

 

40) Marx 1968, p. 1570. 맑스는, 미카일로브스키에게 편지를 보낸 다음 일 년이 지나서 쓴 자본론 3권의 마지막 원고에서 “러시아 농촌의 모순적 현실을 드러내는” 이러한 이원성에 주목한다. 거기서 그는 “이른바 ‘농노해방’이 이루어진 다음에 러시아 지주들이 이제 자유롭지 못한 농노 대신에 임노동자를 다루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 지주들이 “농촌의 공동토지소유 때문에 노동자들이 아직 생산수단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고 그 결과 필요할 때 곧바로 사서 쓸 수 있는 충분한 노동력, 자유로운 임금노동자를” 가지고 있지 못함을 보고 있다. (1973b, p. 39) 

 

41) Marx 1968, p. 1570-1. 이는 최근의 연구를 통해 확인된다. “코뮌의 실제 모습을 보면, 도구와 목축은 사적으로 소유되고, 좀 더 수입이 큰 사람들이 농촌 회의의 의사결정과정을 지배할 수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심지어는 그들로부터 토지를 박탈할 수도 있다.”(Kingston-Mann 1990, p. 31) 

 

42) Marx 1968, pp. 1570-2. 

 

43) Marx 1968, p. 1573. 

 

44) Marx 1968, p. 1566. 

 

45) Marx와 Engels, 1972b, p. 576. 

 

46) Shanin 1983, p. 22. 

 

47) Shanin 1983에 수록된 Wada, p. 70. 와다와 정반대되는 입장은 Dunayevskaya 2002의 편집자에 의해 제기되었다. p. 316. 이 편집자는 맑스가 1882년 ‘서문’의 유일한 저자라고 보며 어디서도 공저자로서 엥겔스를 언급하지 않는다. 

 

48) Dussel 1990, p. 262. 

 

49) Marx 1968에 있는 Rubel의 글, p. 1552. 

 

50) 이 논쟁에서 엥겔스는 기존의 코뮌 체계가 “부르주아적인 분할 소유라는 중간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좀 더  높은 형태로 변화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가능성이 서부유럽에서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움 없이는 실현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서부유럽에서 혁명만이 러시아 농민들에게 그들이 “전체 농업체계에서 혁명을 관철시키는” 데에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1964, pp. 47-8. 그와 동시에 엥겔스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러시아는 혁명 전야에 있다. …… 여기서 혁명의 모든 조건은 통일되어 있고 …… 유럽에 아주 중요한 혁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번에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럽 반혁명의 저수지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1964, pp. 49-50) 맑스가 2년 지난 뒤에 쓴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혁명의 문턱에 서 있었다. 그 모든 요소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 …… 이제 혁명은 반혁명 예비군들의 보루가 그대로 남아 있는 동유럽에서 시작된다.”(Marx 1973c, p. 296). 

 

51) 엥겔스는 이 원고들을 알지 못했다. 이는 나중에 랴자노프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52) Marx 1968, p. 1570. 강조필자. 

 

53) Shanin 1983에 있는 글. pp. 53-4. 

 

54) Engels 1964, 1972a. 

 

55) Shanin 1983, p. 17. 

 

56) Marx 1988, p. 412. 강조원문. 

 

57) 크레이더는 이 구절을 원용하면서 이것을 자술리치에게 보낸 맑스 편지의 초안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같이 ‘낡은 것’과 관련된 새로운 사회의 구성에 관한 맑스의 일반적인  입장에 대한 예시로서가 아니라 (또한 맑스의 1865년 런던 강의를 언급하면서도) 특별하게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한 언급과 관련시키고 있다.(Krader 1973, p. 178) 

 

58) Engels 1962, p. 583. 

 

59) Marx 1968, p. 1563. 

 

60) Marx 1987, p. 109. 

 

61) 러시아 사례를 농촌 세계 일반으로 확대시키려는 샤닌과 두셀의 노력은 맑스의 텍스트 안에서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앞서 언급된 두나에브스카야의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도 맑스의 텍스트에는 별로 없다. 이것을 농촌사회로 일반화시키려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상당한 규모의 공동소유의 존재를 보여주어야 하며 그들을 위한 자본주의의 긍정적 성취의 가용성을 입증해야 한다. 이에 대한 텍스트 상의 증거는 거의 없다. 

 

62) 공산주의로 직접 이행하는 ‘러시아적 길’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맑스가 그렇게 불렀던, 바로 코뮌의 ‘이원성’에 내재된 ‘부정성의 변증법’에 그다지 주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독자들은, 맑스가 반복해서 강조했던 이원성에 내재된 모순의 요소들은 못보고 주로 ‘이원성’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았다. 좀 더 최근의 사례로는 다른 면에서는 중요한 글인 Anderson 2002를 참조할 것. 어떤 러시아 학자의 최근의 저작은 광범하게 맑스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1860년대의 개혁은 부르주아적 발전경향을 강화시켰다. 농촌은 이러한 진보에 영향을 받았다. 농촌은 상품-화폐 관계의 강력한 성장을 경험했으며 농민들이 농촌시장에 일정하게 개입되는 것을 겪었다. …… 코뮌의 이러한 현상적 활력에도 불구하고 그 전성기는 곧 퇴색했다. 왜냐하면 코뮌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진공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뮌 자체 안의 일정한 현상(‘상품-화폐 관계’, ‘집합주의에 대해 투쟁하는 개인주의의 성장’ 등과 같은 것)이 이러한 발전에 기여를 했다. 아직까지는 경향에 불과했던 이러한 현상들은 그렇지만 코뮌을 잠식했으며 그것에 대한 파괴 위험이 되었다.”(B. Eklof와 S. Frank 엮음, 1990에 있는 Mironov의 글, pp. 28, 31, 32) 

 

63) 10년도 더 지나서 엥겔스는 다니엘슨에게 보낸 편지(1892)에서 맑스가 미카일로브스키에게 보낸 편지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저자는 만일 1861년에 도입된 노선이 지속된다면 농민들은 파괴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지금 이것이 실현되고 있는 과정으로 보인다. …… 나는 우리가 ‘농민’을 과거의 꿈으로 간주해야만 하고 미래에는 자본주의 러시아와 함께 생각해야만 하지 않을까 두렵다. 의심할 바 없이 이렇게 해서 거대한 기회는 사라졌다.”(Marx 1972c에 있는 엥겔스의 글, pp. 431, 435.) 

 

64) Marx 1968, p. 1567. 

 

65) Shanin 1983, p. 45. 

 

66) Marx 1983, p. 48; 1987, pp. 109-10; 1965, p. 614. 

 

67) 몇 년 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 학교에서 행한 정치경제학 강의 뒤 (그리고 단편적인) 출판에서, 1890-1990년 사이 유럽 쪽 러시아에서 공동토지소유의 점진적인 부식에 대한 자료를 제시했다. 이 자료에 따라 계산을 해보면, 공동토지소유는 이 시기에 유럽 쪽 러시아에서 전체 토지소유 가운데 34퍼센트 정도에서 31퍼센트로 하락했던 것으로 나타난다.(Luxemburg 1972, P. 97) 룩셈부르크는 그 자료의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역사에 대한 현대의 권위자들이 인용한 그에 관련된 공식자료는 룩셈부르크의 자료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 자료는 19세기 말에 러시아의 전체 토지 중에 농촌코뮌의 토지 범위는 34.3퍼센트임을 보여준다.(Grünwald 1975, p. 169). 그에 이어지는 1905년경에서 1917년까지의, 러시아 전체토지에서 코뮌토지소유의 비율에 관한 자료는 논쟁 중에 있다(좀 더 중요하게는 그 자료들의 해석에 관해서). Atkinson 1973, pp. 773-89에 있는 비판적 검토를 참조할 것. 러시아 코뮌에 대한 차르의 정책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견해가 맑스의 것과 직접적으로 대립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녀는, 코뮌이 “유럽 자본주의와의 충돌”을 통해 파괴된 다른 곳(예를 들어 인도)의 농촌코뮌의 운명과 비교할 때, 러시아에서는 “역사가 다른 경로를 통과하며” 여기서 “국가는 농촌 코뮌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려 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그것을 구하고 보존하려고 노력했다.”고 썼다.(Atkinson 1973, p. 95) 

 

68) Marx 1962, p. 255. ‘자유 시간’과 ‘자유 활동’이라는 표현은 원문에 영어로 되어 있다. 

 

69) Marx 1968, p. 1566. 

 

70) Marx와 Engels 1972b, p. 576. 맑스가 해당 편지를 작성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정확하게는 1880년에  그가 다른 맥락에서 “생산수단의 집합적 형태의 물질적, 지적 요소들이 자본가 계급 자신의 발전에 의해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Marx 1965, p. 1538) 

 

71) Howe 1972, p. 517. 

 

72) Shanin 1983, pp. 25, 254. 

 

73) Dussel 1990, p. 261. 

 

74) Löwy 1998, pp. 18-19. 

 

75) Dunayevskaya 1991, p. 187. 

 

76) 그러나 그 뒤 많은 맑스주의자들이나 비맑스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때에 이 생각의 주요 주창자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그러한 혁명을 예견하지 않았다고 올바르게 받아들였다. 

 

77) 이와 관련된 것을 보려면, Rubel 1971, p. 419. 

 

78) Marx 1968, p. 1567. 

 

79) Getzler 1983, p. 246. 

 

80)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을 참조할 것. Anweiler 1958; Daniels 1967; Ferro 1967; 1980. 

 

81)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권위 있는 철학백과사전(제6권, Macmillan, New York, 1967)은 맑스를 존 스튜어트 밀, 그리고 오귀스트 콩트와 함께 묶어 놓고 있다. 

 

82) Marx 1953, p. 29. 

 

83) 1840년대 초의 한 저작에서 맑스는 이렇게 썼다. “‘진보’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퇴보와 순환운동을 본다. …… 진보라는 범주는 전적으로 추상적이며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 …… 모든 공산주의적 그리고 사회주의적 저자들은 …… 모든 정신의 진보가 지금까지 비인간적 상황을 어쩔 수 없이 증대시키는, 인류대중에 반하는 진보라는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보가 부적절하고 추상적인 표현이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이것이] 문명세계의 근본적인 불행이라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현대 사회의 실질적인 토대를 결정적인 비판에 회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산주의적 비판에 상응하는 것이 위대한 대중의 운동이었다. 예전의 역사발전은 이러한 대중에 반하여 이루어졌다.”(Marx와 Engels 1972a, pp. 88-9) 강조는 원문. 

 

84) Marx 1987, p. 110. 

 

85) Marx 1953, p. 313; 1988, p. 107. 

 

86) Marx 1965, p. 81. 

 

87) Marx 1962, p. 425. 

 

88) Marx 1953, p. 387. 

 

89) Krader 1974, p. 128. 강조원문. 이 표현은 영어로 되어 있다. ‘근대적 가족은 맹아적으로 노예적 예속만이 아니라 농노제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축소된 형태로, 이후에 사회와 그 국가에서 광범하게 발전될 모든 적대를 자기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Krader 1974에 있는 맑스의 글, p. 120.) 

 

90) Marx 1968, p. 1568. 

 

91) Marx 1987, pp. 396-7. 

 

92) Marx 1953, p. 314; 1962, pp. 48, 50. 강조는 필자. 

 

93) 예를 들어 Benton 1989, Sikorski 1993을 참조할 것. 벤튼의 ‘신맬더스주의적 맑스주의’에 대한 탁월한 반론은 Burkett 1998 참조. 

 

94) Marx 1987, pp. 476-7; 1965, pp. 998-9. 

 

95) Marx 1965, pp. 1527-36. 

 

96) 자신의 Urtext(1858)에서 맑스는 이러한 생산을 위한 생산에 대한 주장을 리카도보다 훨씬 앞서서 “17세기에 영국의 부를 향한 정열적이고 무자비하고 보편적인 충동”을 다룬 페티에서 찾고 있다. 

 

97) Marx 1959a, pp. 106, 107, 108. 강조는 필자. 『자본론』제2권에 대한 첫 번째 원고(영어판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적 생산의 자연적이고 절대적인 형태”라고 보고, “생산적인 노동계급은 대체적으로 노동조건의 소유자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기계로서만 존재한다.”고 본  리카도가 ‘대공업의 경제학자’였고 ‘사물을 대부르주아의 관점에서 바라’ 보았음을 주목했다.(1988, p. 376) 그 좀 더 20여 년 전에 맑스는 “리카도의 이론이 근대 부르주아의 전형이랄 수 있는 영국 부르주아 전체를 엄밀하고 무자비하게 요약한 것”임을 지적했다.(1965, p. 21) 

 

98) Marx 1988, p. 107. 강조는 필자. 

 

99) Marx 1965, pp. 35-6. 강조는 필자. 

 

100) Marx 1953, p. 314. 

 

101) 자본의 생태적인 파괴는 제거하면서도, ‘화폐, 임노동, 시장과 사적소유기업의 합리적 특성’ 등은 보존하려는 생태학적 사회주의,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나쁜’ 면이 아니라 ‘좋은’ 면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보존하려는 생태학적 사회주의의 사례는 다음을 참조할 것. Kovel 1995. 프루동의 영향력은 여전한 듯이 보인다. 

 

102) Marx 1959a, p. 107. 강조는 필자. 

 

103) Marx 1976, p. 327; 1992, pp. 124-5. 영어로 된 전체 문장이 두 원고에서 거의 같다. 강조는 필자. 엥겔스가 편집한 자본론 제3권에서 원래의 영어 표현은 아주 정확하게 독일어로 번역되지는 않았다. 특히 ‘인류의 사회주의적 구성’이 ‘인간사회의 의식적 재구성’으로 바뀐 점이 그렇다. Marx 1964, p. 99. 참조할 것.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에 관해 맑스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썼다. “역사적으로 고려할 때, 폭력에 의한, 그리고 대다수를 희생시키는 이러한 전도는 이행의 필요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 상태의 부의 창조, 사회적 노동의 무제한적인 생산력, 이것만이 자유로운 인간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 힘에 종교적 형태를 부여한 다음에 그 힘을 자신과 대립되는 독자적 힘으로 정립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적대적 형태는 가로 질러 가야만 하는 것이다.”(1988, p. 65. 강조는 원문. 

 

104) Löwy 2000, pp. 35, 37. 강조는 원문. 

 

105) Löwy 2000, p. 35. 

 

106) Löwy 2000, pp. 35-6. 

 

107) Löwy 2000, pp. 37-8. 

 

108) Löwy 2000, pp. 36, 40. 

 

109) 루카치가 설득력 있게 논의했듯이, 맑스의 위대한 선행자들, 즉 아리스토텔레스나 헤겔과 달리 맑스는 자신의 역사관에 어떤 목적론도 내포시키지 않았다.(Lukács 1971) 흥미롭게도 뢰위는 헤겔을 단지 (역사에 관한) 목적론적 개념(이는 맑스가 전적으로 거부했던 것인데)과 관련해서만 언급하고 있으며, 맑스가 헤겔을 ‘전도시킴으로써’ 이어받은 개념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110) Marx와 Engels 1972a, pp. 83, 98. 강조는 원문. 훨씬 나중에 다윈을 읽고 나서 엥겔스는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1859년 12월 11일 또는 12일)에서 “지금까지 어떤 측면에서 목적론은 아직도 파괴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Engels 1973, pp. 26-7. 

 

111) Marx와 Engels 1973, pp. 26-7. 

 

112) Marx 1953, p. 387. 

 

113) Marx와 Engels 1973, p. 27. 

 

114) Engels 1972b, p. 321. 강조는 원문. 

 

115) Marx와 Engels 1973, p. 35;1979, p. 70. 

 

116) Marx 1972, p. 439. 대략 10년 뒤 맑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자들은, 미리 만들어져 있어 이제 도입해야 할 유토피아도, 실현시킬 이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붕괴하고 있는 낡은 부르주아 사회가 잉태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여러 요소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Marx 1971, p. 36. 

 

117) Löwy 2000, pp. 35-6. 

 

118) Marx와 Engels 1972a, p. 37. 여기서 『파리초고』(1844)에서 ‘사적 소유’란 자본을 뜻한다. 

 

119) Marx와 Engels 1979, pp. 61, 62, 69. 

 

120) Marx 1992, p. 333. 첫 번째 강조는 맑스의 것이고 두 번째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121) Löwy 2000, p. 37. 강조는 원문. 

 

122) Marx 1965, pp. 992, 993; 1987, pp. 466-7. 불어판에서 ‘모순’은 좀 더 강한 단어인 ‘적대’로 바뀌어 있다. 1965, p. 993. 우리는 여기서 맑스가 쿠겔만에게 썼던 것을 인용할 수 있다. (1868년 3월 17일) “나는 적대의 어머니로서 대공업만이 아니라, 이 적대를 해결하는 물질적, 지적 조건의 창조자로서의 대공업도 제시한다.” Marx와 Engels 1972c, p. 162. 강조는 원문. 

 

123) Marx 1959b, pp. 85, 87. 

 

124) Löwy 2000, pp. 36, 40. 

 

125) Marx 1980b, p. 655. 

 

126) Marx와 Engels 1973, p. 72. 

 

127) 10년 후, 맑스는 ‘개인’이 ‘주된 생산력’이라고 말한다.(1953, p. 325) 뢰위에게서는 이처럼 특별히 맑스적인 의미의 ‘생산력’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128) Marx 1965, p. 79. 

 

129) Marx 1965, p. 915. 독일어판에서 ‘삶의 사회적 관계’라는 용어는 불어판에서는 ‘사회적 관계’로 대체된다. Marx 1987, p. 364. 

 

130) Marx와 Engels 1973, p. 417. 

 

131) Marx 1980b, p. 655. 

 

132) Marx 1988, p. 65. 

 

133) Löwy 2000, p. 39. 

 

134) Marx 1968, p. 1554. 

 

135) Vogel 1996, p. 41. 

 

136) Löwy 2000, pp. 39, 46. 

 

137) Vogel 1996, p. 37. 

 

138) Vogel 1996, p. 37. 

 

139) Marx 1980a, p. 101; 1987, p. 109. 

 

140) Vogel 1996, p. 37. 

 

141) 맑스의 1859년 ‘서문’. 

 

142) Marx와 Engels 1970, pp. 35-6. 

 

143) Marx 1953, p. 395. 보겔은 자신의 주장을 근거 지으려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맑스는 ‘다른 사람의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한 사람의 노예제를 옹호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맑스의 텍스트를 잘못 읽은 것이다. 이 특정한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두 세기 뒤에 태어났던 어떤 시인을 언급하는 구절(이글의 앞에서도 인용된 적이 있다)에 나온다. 실제로 맑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인용한 것은 바로 안티파트로스에 대한 이 언급 바로 앞에 나오는 것으로서 그것은 적절하게 작동할 수 있는 도구가 발명된다면 노예제가 전면적으로 소멸할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Marx 1987, p. 396) 

 

144) Vogel 1996, p. 37. 

 

145) Marx 1965, p. 1438. 

 

146) 엥겔스는, “맑스(와 자신)이 시작한 ‘새로운 지향’은 노동의 발전이라는 틀에서 모든 사회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를 인식했다.”고 썼다. (Engels 1979, p. 222) 

 

147) Marx 1953, p. 75. 

 

148) Marx 1953, p. 505; 1979a, p. 23. 헤겔은 자연의 구속을 초월하는 노동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 점에서 정치경제학을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동에는 해방의 계기가’ 있다.(Hegel 1972, p. 177) 

 

149) Vogel 1996, p. 39. 

 

150) Marx와 Engels 1972a, p. 38. 

 

151) Marx와 Engels 1979, p. 65. 

 

152) Marx 1953, p. 203. 필자강조. 이와 동일한 생각은 다음의 텍스트에도 거의 같은 말로 나타나고 있다. Marx 1976, p. 35. 

 

153) Marx 1965, p. 93. 

 

154) Marx와 Engels 1972a, p. 38. 

 

155) Marx와 Engels 1972a, p. 37; Marx 1988, p. 65. 강조는 원문. 이 두 원고 가운데 맑스가 먼저 쓴 것에서 그는 ‘비참 안에서 비참에 대한 반란’에 관하여 헤겔을 인용하고 있다. 사실상 헤겔은 지배와 종속 관계에 관한 유명한 논의에서 지배자의 유일한 관심거리가 직접적 욕망충족 (“이 충족은 단지 순간적인 것인 만큼 인간의 발전에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인 반면에 “대상을 형성하는 행위는 이제 영구성의 요소를 획득하는 의식의 순수한 자기표현인” 이상, 지배자 좀 더 종속된 자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1987, pp. 147-8.) 다른 곳에서 헤겔은 이렇게 쓰고 있다. “쟁기는 쟁기가 생산한 직접적 향유보다 더 우월하다. 향유는 사라지지만 도구는 보존된다.”(1963, p. 398) 

 

156) Marx 1988, pp. 431-2. 

 

157) “사회적 노동이 발전하는 것에 비례해서, 그 노동은 노동자들의 부와 빈곤, 타락의 원천이 되고 비노동자들의 부와 문화는 발전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역사의 법칙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 하여금 이러한 역사적 저주를 파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고 또 강제하는 물질적 조건은 결국 만들어진다.”(Marx 1979b, pp. 175-6) 

 

158) Marx 1965, p. 995, 독일어판에는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