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나침반은 가리킨다. : 사회주의적 대안을 향하여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2월호

나침반은 가리킨다. : 사회주의적 대안을 향하여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09:45

나침반은 가리킨다. :  사회주의적 대안을 향하여(Compass Points : Towards a Socialist Alternative)1

에릭 올린 라이트(Eric Olin Wright)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생각하고 반자본주의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서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적 모태를 이루었다. 심지어 사회주의 질서의 수립이 즉각적인 정치적 목표가 아니었던 때에도 말이다. 만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와 관련되었던 특정한 제도적 장치(institutional arrangements)가 이제 더 이상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었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많은 전통적 사회주의적 비판은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알맞은 것으로 보인다.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 그리고 고용 불안정은 더욱 나빠지고 있고, 거대 기업은 미디어와 문화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 정치는 갈수록 거대한 돈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고 돈이 없는 이들에게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 자본주의에 대한 선명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그 어떤 때보다 훨씬 더 크다. 


나는 이 글에서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둘 다 쓰고 있는 ‘사회(social)’2라는 말을 고찰하는 것에서 시작하겠다. 그 다음 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모색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 ‘사회’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특정 엘리트의 좁은 이익에 봉사하기보다는 폭넓은 사회복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할 때 쓰인다. 좀 더 급진적인 견해에서, 사회적 소유는 ‘사적 소유’에 반대되는 개념이다(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이것은 국가 소유로 끝나고 말았으며, ‘사회’라는 용어는 상대적으로 거의 분석적 작업에 쓰이지 않았다). 나는 ‘사회’라는 용어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기획과 자본주의에 대한 대응으로서 순수한 국가주의적 대응양식과 구분시켜주는 원리와 비전들의 집합(cluster)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원리들은 내가 ‘사회 권력 강화(social empowerment)’라고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사회주의를 다시 생각하는 문제는 해방적 사회 이론의 좀 더 넓은 의제(agenda) 속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사회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는 문제들을 규정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개괄할 것이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현존하는 권력과 권위의 구조에 대한 대안으로서 믿을만한 제도적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한 일반적 문제들을 살펴보고,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 어떤 뜻을 가지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네 번째 부분에서는 ‘사회적’ 사회주의의 원리를 실현하도록 하는 사회적 권리를 되찾기 위해 나아갈 길을 제안할 것이다. 다섯 번째 부분에서는 변화의 문제를 논하면서 결론을 지을 것이다. 


I. 해방적 사회과학의 과업 


넓은 뜻에서 해방적 사회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는 것에 맞서는 집단적 기획에 알맞은 지식을 만들어내고 인간이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 비평이나 철학이라 부르지 않고 사회‘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의 과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것을 뜻한다.3 사회과학을 ‘해방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해방의 중심이 되는 도덕적 목적, 즉 억압의 제거와 인간 번영의 조건을 창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을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해방이 내적 자아가 아니라 사회적 세계의 전환에 달려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해방적 사회과학이든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본적 과업에 부닥치게 된다. 첫째로,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진단과 비판을 만들어내야 한다. 둘째로, 실행 가능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전환의 장애와 가능성들, 그리고 딜레마를 알아야 한다. 다른 역사적 순간에서 이것들 가운데 하나 또는 다른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으나, 포괄적인 해방 이론이 되려면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 


진단과 비판 


해방적 사회과학의 시작점은 단순히 세상에 고통과 불평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제도와 사회 구조의 특수한 속성에서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들을 설명하고 그런 병리적 현상들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들에게 체제적으로 해를 입히는가를 입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적 사회과학의) 첫 번째 과업은 이러한 해를 불러오는 인과관계를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흔히 해방적 사회과학이 지닌 가장 체계적이고 발달된 측면이다. 페미니즘을 보기로 들면, 많은 글은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와 제도들이 어떻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성을 억압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연구의 핵심은 성적 불평등이 ‘천성(nature)’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노동 시장에 대한 연구는 작업에서 성적 차별, 여성적 특성을 폄하하는 평가 시스템, 승진에서 차별, 노동하는 어머니에게 불이익을 주는 제도적 장치 등을 강조해왔다. 페미니즘 문화 연구는 미디어와 교육, 문학 등이 폭넓게 성적 정체성과 고정관념을 전통적으로 강화 해왔음을 밝혀냈다. 국가에 대한 페미니즘의 분석은 어떻게 국가 구조와 정책이 체계적으로 여성의 종속과 여러 가지 형태의 성적 불평등을 강화해왔는지를 증명했다. 그것 말고도 인종 억압과 급진적 환경주의 이론과 같은, 노동 운동의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비슷한 유형의 실증적인 연구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 


진단과 비판은 사회 정의와 규범 이론의 질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해’를 불러오는 사회 제도를 묘사하는 것은, 분석에 도덕적 판단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해방적 이론의 이면에는, 절대적인 정의 이론이 있다. 즉 사회제도가 공정하려면 어떠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을 다루는 것이다. 자본주의 비판의 기초가 되는 규범이론을 완전히 탐구하는 일은 이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간단하게나마, 아래에서 이루어질 분석은 정의에 대한 급진적 민주주의적 평등주의(radical democratic egalitarian)적 이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두 가지 넓은 도덕적 주장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 정의의 조건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정의에 대한 것이다. 


▶ 사회적 정의 : 공정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풍성한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물질과 사회적 수단에 똑같이 접근할 수 있다. 


▶ 정치적 정의 :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공동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들과 결정들에 대한 집합적 통제(collective control)에 서로 함께 이바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곧 정치적 평등과 집합적인 민주적 권리(collective democratic empowerment)의 원리를 말한다.


이 두 가지 주장은 두 급진적인 사회적․물질적 불평등의 조건 하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깊어지게 하고 행동의 범위를 좀 더 넓힐 것을 요구한다. 물론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원리들이 실행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안의 개발 


해방적 사회과학의 두 번째 과업은 현존하는 해로운 제도와 사회 구조를 완전히 제거하거나 또는 최소한 크게 줄일 수 있는, 설득력 있고 믿을만한 대안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다른 범주를 통해 정교하게 만들 수 있고 평가될 수 있다. 그 세 가지 범주란 ‘바람직함(desirability)’, ‘실행할 수 있는 것(viability)’, ‘이룰 수 있는 것(achievability)’이다. 이것들은 일종의 계서구조(hierarchy)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필요한 대안들이 실행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실행할 수 있는 대안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행할 수 있는 것이나 이룰 수 있는 것의 규제 없이, ‘바람직스러운’ 대안의 탐구는, 많은 규범적 정치철학과 유토피아적 사회 이론의 영역이다. 전형적으로 그런 담론들은 제도적으로 매우 빈약하며 실질적인 제도의 고안이라기보다는 추상적 원리들의 선언을 강조한다. 그래서 보기를 들자면 공산주의를 “각자의 필요에 따르고 각자의 능력에 따르는” 계급 없는 사회로 묘사하는 맑스주의의 경구(aphorism)는, 이러한 원리들이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못한다. 비슷하게 정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론들도 지속가능한지를 체계적으로 탐구하지 않고 공정한 사회 제도에 구체화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그러한 제도들이 드러냈던 순수한 형식으로 원리들을 실행하도록 실제로 고안될 수 있는 강고한 구조를 정교하게 만들 뿐이다.4 비록 이런 종류의 담론들이 우리의 가치를 뚜렷이 하고 사회 변화의 과업에 대한 도덕적 헌신을 강화시키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지라도, 그러한 담론들은 (대안적) 제도를 마련하는 데에서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며, 현존하는 제도에 대한 도전에 믿음을 주지도 않는다. 


이와 달리 실행할 수 있는 대안을 연구하는 것은, 만일 대안이 실행된다면, 그러한 대안이 그들의 제안에 동기 부여하는 해방적인 결과를 지속적인 방식으로 불러올 수 있는 지 현존하는 사회 구조를 전환시키는 제안에 대해 묻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연구의 가장 잘 알려진 보기는, 사회주의 원리의 실현에서 가장 고전적인 형태인 중앙계획경제일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무정부적인 시장 대신에 중앙화된 합리적 계획경제의 제도를 고안함으로써 합리적인 계획을 통해 인민의 삶이 크게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중앙계획경제는 원래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의도하지 않았던 “뒤틀린” 결과를 낳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실행할 수 있는 해방적 대안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다. 


물론 특수한 제도적 고안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완벽히 이루어지나 아무것도 안되거나’ 식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부차적 조건들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것일 수 있다. 보기를 들어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풍족한 기초소득을 보장해주는 일은 강한 집단적 의무감과 노동윤리에 문화적으로 뿌리를 둔 국가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아주 원자화된 소비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다. 또는 기초소득 보장이 이미 오랫동안 발달된 특정 대상을 겨냥한 프로그램들의 집합(patchwork)에 바탕을 삼고 있는 관대한 재분배 복지국가에서 있을 수 있고, 인색하고 제한된 복지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실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토의는, 특정한 [제도적] 구상이 잘 작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상황적인 조건 또한 포함하게 된다. 


실행할 수 있는 대안들에 대한 탐구는 그것들이 현존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포괄한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대안들이 전략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이론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고 논하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한 회의주의에 대한 대답은, 미래에 이룰 수 있는 대안들이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아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리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 너무나 많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주어진 이상, 실행 가능한 대안들의 범위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다음의 두 가지와 같다. 첫째로 만일 미래의 조건들이 ‘무엇이 가능한가.’의 영역을 더욱 넓힌다면, 그러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은 해방적 변화에 참여한 사회 세력들이 대안을 실현하는 데에 실제적인 전략을 좀 더 쉽게 정식화하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 결정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가능성의 사회적 제약은 한계에 대한 믿음에서 독립적이지 못하다. 물리학자가 어떤 사물이 이동하는 데에 최대속도의 제한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객관적이고 거스를 수 없으며 속도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회적 사건에서, 믿음은 무엇이 가능한가에 체계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실행가능한 대안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이들 한계 스스로가 변화될 수 있는 과정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세계는 있을 수 있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주장을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미 만들어져 있는 사회 속에서 태어난다. 그들은 자라면서 사회의 규칙들을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고 삶의 고통과 기쁨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나날의 과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 세계가 어떠한 근본적 방식으로 천천히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들을 에둘러 타격하는 것이다. 이는 극적인 변화를 마음속에 그리는 것, 아니 그보다도 작동할만한 대안을 생각하는 것이 더욱 어렵기 때문이며 그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권력과 권위의 구조에 성공적으로 도전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현존하는 제도에 대한 진단과 비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자연스런 반응은 아마도 세상을 결국 바꿀 수 없을 거라는 숙명론일 것이다. 


그러한 숙명론은 현존하는 사회 세계의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 물론 어떤 전략은 단지 과학적으로 믿을만한 급진적 사회변화의 시나리오들에 대해 너무 걱정하기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바탕으로 필요한 대안의 고무적 비전을 만들어내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다. 동시에, 그러한 카리스마적인 희망적 사고가 강력한 동원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가능한 해방적 대안을 만들어내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적절한 바탕이 되기는 힘들다. 역사는 기존의 억압 구조에 대한 영웅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새로운 형태의 지배와 불평등의 건설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진 수많은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에 해방적 사회과학의 두 번째 과업은, 실행할 수 있는 대안적 제도의 개념에 과학적으로 바탕을 둔 체계적인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룰 수 있는 대안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이론을 개발하는 것은 사회 변화 전략의 실제적인 작업에 중점을 둔다. 이것은 해내기 힘든 작업이다. 왜냐하면 이룰 수 있는 것에 대한 평가가 희망적 사고에 너무 취약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장기적 전략의 전망에 영향을 미칠 미래의 조건들이 매우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행할 수 있는 측면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이분법을 취하지 않는다. 각각의 제도적 변화의 기획들은 이제껏 이행된 적이 없는, 각자 다른 전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어떠한 실행 가능한 대안에 대해서도 미래에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확률은 두 가지 종류의 과정에 따라 정해진다. 그 첫 번째는 대안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의도적으로 추진한 전략과 상대적 힘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전략들의 성공기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구조의 시간에 따른 궤도(trajectory)이다. 이 궤도는 그 자체로 일부분 누적된 인간행동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이지만, 아울러 그것은 그들 자신의 행동의 조건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행위자들의 의식적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의 달성가능성은 미래에 대안들을 이행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고 그러한 조건들이 있을 때 대안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사회 세력을 동원할 잠재력을 갖는, 일관성 있고 설득력 있는 전략을 정식화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전환 이론(A theory of transformation)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해방적 사회과학의 세 번째 일반적인 과업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전환 이론이다. 우리는 해방적 사회과학을 현재로부터 가능한 미래로의 여정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회 비판은 우리에게 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며, 대안에 대한 이론들은 우리가 가길 원하는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전환 이론은 여기서 그곳으로 어떻게 갈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다양하고 서로 연관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현존하는 권력과 권위의 구조를 지속시키는 사회적 재생산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 사회 전환 전략의 가능성을 여는 체제의 모순과 한계, 틈새에 대한 이론, 그러한 전략의 조건들을 변화시키는 체제의 역동성에 대한 이론,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환 전략 그 자체에 대한 이론이 그것이다. 나는 이 글의 결론부에서 다시 전환 전략의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위에서 규정한 세 가지 핵심 과업 가운데 두 번째로 꼽은 것, 즉 자본주의에 대해 실행가능한 해방적 대안을 개발하는 문제이다. 이를 논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과 대안을 찾도록 하는 힘을 제공하는 자본주의 과정이 가져온 ‘나쁜 것’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II. 자본주의에 대한 핵심적 비판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특성을 가진 사회 조직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로 특징지을 수 있는 계급적 구조와 이에 의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을 노동 시장에 팔아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분산된 시장 교환 시스템을 통한 경제 조정 원리이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자유 시장경제’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계급 관계를 갖는 시장 경제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기술적 변화의 창출과 분명한 경제 성장의 측면에서, 이제껏 만들어진 적이 없는 가장 강력한 경제 체제로 입증되었다. 그렇지만 만일 그것이 정확하다면, 대안의 기초를 구성하고 모색하는 중요한 비판들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들 이면에 있는 증거와 분석에 대해 완전히 다루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나지만, 급진적 평등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다음의 비판들은 특히 틀림없다. 


▶ 자본주의 경제 성장의 동학은 체제적으로 부와 권력의 집중을 강화시키고 경제적 박탈과 주변화, 그리고 빈곤을 증대시킨다. 이는 국가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루어진다. 


▶ 심지어 가장 발전된 경제를 가진 곳에서도 자본주의는 세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번영과 발전을 체제적으로 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지배 하에서 보편적인 해방이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이 자본주의의 중심 덕목으로 드는 ‘선택의 자유’란 자본주의 하에서 오직 부분적으로만 가능하며, 불평등이 ‘진정한 자유’―자신의 삶의 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계획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효과적 능력을 가지는 것―를 많은 부분 제한한다. 


▶ 자본주의가 지닌 팽창주의적 추진력은 더없이 넓은 인간의 영역을 시장의 힘으로 내몰며 위협한다. 의료, 육아, 노인복지, 인간 재생산(human reproduction)과 기타 영역의 상품화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들을 불러온다. 


▶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 안에서 이해관계의 적대는 공동의 운명과 상호관용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착취 관계에서 착취하는 자들은 착취당하는 자들의 취약함과 박탈을 지속시키는 것에 적극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에 중요한 규제를 가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집단적 의사결정에서 경제 활동의 중요한 영역을 제거해버린다. 


이러한 비판들이 지닌 특징을 뚜렷이 하는 것은 중요하다. 각각에 담긴 주요 주장들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메커니즘이 불러오는 해악들이다. 이 말은 자본주의 사회, 즉 자본주의 경제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해악들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게 하려면, 자본주의 그 자체의 효과에 대한 대응으로 비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이 도입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경제 구조 그 자체의 자본주의적 속성을 변화시키는 데 대하여, 수많은 반자본주의적 메커니즘들을 점진적으로 도입하지 않고 이러한 해악들을 완화시키려고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세 번째 부분에서 살펴볼 중심 이슈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문제이다. 


III. 대안을 생각하기 


맑스의 접근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생각하는 문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접근은 칼 맑스(Karl Marx)의 사상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믿을만한 대안을 구체화시키는 문제에서 맑스가 제시한 해법은 궁극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할지라도, 지적으로 탁월한 것이었다. 그는 실행할 수 있는 해방적 대안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는 체계적인 이론적 모델을 개발하기보다는, 자본주의가 왜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가.’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내부의 동학과 모순 때문에 그 자신의 존재 조건을 파괴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다. 이는 결정론적인 이론(deterministic theory)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안목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사회 질서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대안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맑스의 논변이 시도하는] 책략은, 그러한 대안으로 경제와 사회의 민주적이고 평등한 조직이 그러한 대안을 위한 그럴듯한 형태라는 믿을만한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맑스의 이론은 특히 뛰어나다. 왜냐하면 자기 붕괴의 궤도를 따르게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모순이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이해관계와 그러한 이해관계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역량을 증대시키는 역사적 행위자, 즉 노동계급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주어진다면, 맑스의 실질적인 사회주의 이론은 창조적인 평등한 노동자들의 문제 해결 역량에 중점을 둔, 실용적인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장기적으로 지속됨에 따라 위기와 몰락은 강화되고 노동 계급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필요한 집단적인 정치 기구를 발전시키게 되며,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사회주의적 대안을 시험적으로 건설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맑스는 자본주의 몰락에 대한 아주 결정론적 이론, 즉 자본주의의 작동 법칙이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의 지속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이론과 대안 건설에 대한 주의주의(voluntarism)적 이론을 결합했다. 


그 이론은 특별한 지적 성취였고, 한 세기 넘어서까지 급진적인 사회적․정치적 운동을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점에서 나는 그 이론이 특정한 결정적 전망들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평등주의적 기획을 지속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거나 흠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여기서 네 가지 중심적 문제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려 한다. 첫째로, 이론의 중추적 명제들이 되는 고전적인 맑스주의의 주장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그 자신을 파괴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대안에 의해 교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불만족스럽다. 이와 같은 예측은 자본주의가 단순히 주기적 위기에 처할 경향이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기에 처하게 되는 체제적 경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주장의 이론적 밑바탕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둘째로, 자본주의적 계급 구조가 점차 단일하게 프롤레타리아화 될 것이라는 고전적 맑스주의가 한 예견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노동이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로 점점 더 예속될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적어도 선진자본주의 세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집중화’ 과정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단일성 또는 순결성’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계급 구조가 나타났다. 계급 관계 안에서 모순적 배치는 더욱 널리 퍼졌고, 자가 고용은 대부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1970년대 중반 뒤 꾸준히 증가했다. 노동 계급 가운데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우리사주신탁제도(ESOP)와 연금기금을 통해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고 좀 더 많은 기혼여성들이 가사노동 말고 ‘가정 밖에서’ 노동을 함으로써 가정은 계급적 뜻에서 좀 더 단일화되었다. 그리고 직업의 궤도는 계급 배치에 일시적 불확실성을 제공했다.5 이와 같이 계급 관계에서 복잡한 양상이 있다고 해서, 인간의 삶에서 계급이 덜 중요하다거나, 계급 구조가 근본적인 방식에서 덜 자본주의적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그러한 복잡한 양상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전환 때문에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대해 점점 더 동질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이론이 지닌 가치가 줄어들었다는 보여준다. 


셋째로, 자본주의에 대한 잠재적 도전자들의 집단적 계급 역량이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체제적으로 강화되지 않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광범위하게 정의된 노동계급의 이익의 다양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체제에 도전하는 역량을 침식하는 다양한 형태의 계급 타협의 강고함 때문이기도 하다. 끝으로, 파괴적 변환의 이론은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적이고 평등적인 극복을 위한 대안 건설에서 적절한 밑바탕이 되지 못한다. 지금껏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도전들이 있었지만, 파괴적 변환의 역사적 사례들은 민주적이고 실험적인 제도 마련 과정으로 확장될 수 있을 만큼 지탱되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활발하고 창조적이고 대안적이고 해방적인 제도 마련에 대한 주의주의(volantarist)적 이론은 숙의(deliberation)와 의사 결정 과정에 있어서 평범한 사람들의 활발하고 창조적이며 강화된 참여에 의존한다. 자본주의의 혁명적 변환에 있어서 그러한 참여에 대한 간단한 사례들은 있어왔지만, 언제나 그것들은 잠시 동안이었고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것들의 실패를 진단하기에는 복잡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방식은 자본주의적 제도의 혁명적 파괴를 성공시키기 위해 정치권력과 조직의 집중을 가져오는 경향을 띠었고 이것은 민주적 경험주의에 필요한 상호적 실행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혁명적 당은 특정한 상황 하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조직적 무기(organizational weapons)'일 수는 있어도, 그것들은 민주적이고 평등적 대안의 건설에 있어서는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그 결과,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등장했던 사회의 실증적인 사례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적이고 평등적 대안의 접근이 아니라 경제 조직의 국가관료적(state-bureaucratic) 형태의 결과로 나타났다. 


대안에 대한 대안적 접근 


자본주의에 대한 고전적 맑스주의의 대안은 자본주의가 지나온 경로에서 나타나는 핵심적 특성에 대한 결정론적 이론에 깊이 근거하고 있다. 자본주의 미래의 기본적 윤곽을 예측함으로써, 맑스는 해방적 대안의 실현에 이바지하기를 바랐다. 그러한 이론이 없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실행할 수 있는 해방적 대안이 있음을 보여주는 믿을만한 사례를 만드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물론 한 전략은 사회주의적 제도의 수긍할만한 청사진을 개발하는 것, 이러한 제도들이 효과적으로 기능할 것임을 보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나아갈 목적지로 삼을 수 있는 길을 가리키는 로드맵을 개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로드맵을 손에 들었을 때, 이제 우리의 중심 과제는 여행을 지속하는 데에서 적절한 탈 것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현존하는 어떤 사회이론도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적 목적지라는 납득할만한 도표를 그려내는 것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하다. 그러한 이론은 원칙에 있어서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적 변화는 너무나 복잡하며, 또한 평면적으로 보여 지기에는 인과과정의 우연적 사슬로부터 너무나 깊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지도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해악과 불의 때문에 지금의 장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해줄 로드맵의 비유를 사용하는 대신에, 우리는 해방적 사회 변화의 기획을 일종의 탐사 여행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과 얼마나 출발지에서 멀어졌는지를 알려주는 항법장치들을 갖추고 친숙한 세계에서부터 길을 떠난다. 그러나 출발지에서 종착지까지 모든 길을 알려주는 지도는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전혀 계획한 적이 없는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붙이는, 이전에는 전혀 본적이 없는 장애물을 만날 수도 있다. 우리는 다시 돌아가 새로운 길로 여행을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아마도 기술을 통해 우리는 길을 가는 동안 인공적으로 고지를 만들어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볼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가에 대해 절대적인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해방적 대안을 이렇게 생각하는 방식은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를 이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미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강력한 규범적 대안을 제시한다. 이것은 민주적이고 평등적인 대안을 건설하는 데에서 넘어설 수 없는 한계는 없다는 잘못된 확실성을 함축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능성의 한계에 대한 견고한 지식부재는 급진적 대안에 대한 전망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영속성에도 해당된다. 그러한 탐사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의 항법장치가 쓸모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주의적 나침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바꿔 말해,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원칙들 말이다. 


사회주의의 개념들 


대부분의 사회주의 담론들은 자본주의에 대비되는 이항적인(binary) 용어들로 개념을 만들어낸다. 일반적으로는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교환을 통한 이윤 극대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 그리고 생산수단에서 제외된 노동자들이 삶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경제 구조로 정의된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조건들의 하나 또는 그것 넘게 반박의 용어들로 정의된다. 자본주의의 개념상 중심축이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하나 또는 다른 형태의(대개는 일반적으로 국가 소유의 제도적 도구를 통한) 공적 소유로 이해되어왔다. 여기서 나는 단 하나의 경제 구조가 아니라 두 가지 대안적 형태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사회주의의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대안적인 접근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두 가지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statism)이다. 


자본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는 경제적 자원의 배치와 통제, 그리고 사용을 통한 권력 관계의 조직에 대한 대안적 방법들로 생각될 수 있다. 첫 번째 접근방식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들 개념을 권력의 차원에서 정의할 수 있다. 


▶ 자본주의는 생산 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회적 목표를 성취하는 데, 경제적 권력이 자원의 배치와 사용을 결정하는 경제 구조이다. 투자와 생산 통제는 자본을 소유한 자의 경제권력 행사의 결과물이다. 


▶ 국가주의는 생산 수단이 국가에 의해 소유되고, 그럼으로써 각각의 다른 사회적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서 국가 권력의 행사를 통해 자원의 배치와 사용이 이루어지는 경제 체제이다. 국가 관료는 특정한 국가-행정 메커니즘의 형식을 통해 투자 과정과 생산을 통제한다.  


▶ 사회주의는 이와는 달리 생산 수단이 전체 사회에 의해 집단적으로 소유되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회적 목표들을 성취하는 데 있어 ‘사회적 권력(social power)'로 정의되는 것의 행사를 통해 자원의 배치와 사용이 결정된다. 사회 권력은 협력을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는 능력, 시민 사회의 다양한 자발적 집단행동에 뿌리를 둔다. 이것은 시민사회가 단순히 행동, 사회성, 커뮤니케이션의 장(arena)뿐만 아니라 실제 권력의 장이라는 것을 뜻한다. 사회 권력은 경제적 자원의 소유와 통제에 바탕을 둔 경제적 권력, 주어진 영토 내에서 입법과 사법 능력에 바탕을 둔 국가 권력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민주주의는 사회 권력과 국가 권력을 연결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이상(ideal)에서 국가 권력은 사회적 권력에 완전히 복종하고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원래부터가 사회주의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민주주의’가 사회적 권력에 대한 국가 권력의 종속의 표시라면, ‘사회주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한 경제적 권력의 종속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에서 투자와 생산에 대한 통제는 특정한 사회 권력 강화(empowerment) 메커니즘을 통해 조직된다. 


사회 권력에 근거한 사회주의의 이상은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다. 사실 많은 이들은 ‘사회주의’라는 말을 내가 지금 여기서 국가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개념화는 사회주의에 대한 중심적인 도덕적 사고를 포착한다. 사회주의란 엘리트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의 필요와 열망에 봉사하는 방식으로서 조직된 경제이다. 이러한 경제는 평범한 인간들에 의해 특정한 방식, 또는 다른 방식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즉, 사회적 권력에 종속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그리는 개념의 영역을 분명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들은 모두 경제 구조의 한 유형이지만, 오직 자본주의에서만 경제에 바탕을 둔 권력이 경제 자원의 사용을 결정하는 데에서 주요 역할을 해낸다. 국가주의와 사회주의에서 권력은 경제 그 자체에서 분리되어 경제적 자원을 대안적으로 할당하는 데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해낸다. 물론 자본주의적 국가 권력과 사회적 권력도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경제 자원의 직접적인 배치와 사용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내지 않는다. 


이들 각각의 세 가지 이상적 형태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극단적인 형태를 생각해볼 수 있다. 경제 자원을 통제하는 데에서 오직 한 가지 종류의 권력만이 영향을 미치는 상황 말이다. 이러한 뜻에서, 전체주의(totalitarianism)는 국가 권력이 경제 과정에서 단순히 중심적인 역할을 해내는 것을 넘어서서, 경제적 권력과 집합적 권력이 거의 사라져버린 초국가주의(hyper-statism)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순수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은 단지 ‘야경꾼’이며, 오직 소유권과 시민 사회의 모든 영역을 관통하는 상업 활동을 보장하고,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는 것이다.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자원을 배치하고 쓰는 것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 시민들은 시장에서 개인적 선택을 내리는 소비자이지만, 시민사회의 결합을 통해 경제영역에 대한 집합적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는 자들로서 원자화된다. 그리고 맑시주의에서 고전적으로 이해되었던 것과 같이, 공산주의는 국가가 사라지고 경제가 시민사회 속으로 흡수되어 연합된 개인들의 자유롭고 협동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사회 형태이다. 


이들 극단적 형태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사회 조직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할 수 없다. 전체주의는 결코 국가의 직접통제를 넘어서는 협력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의 기반이 되는 비공식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를 없애지 못했다. 그리고 경제 제도의 실제 기능은 한 번도 완전히 중앙 집중화된 명령과 통제 계획에 종속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만일 ‘자유주의적 환상을 통해 구체화된’ 국가가 최소한의 역할을 했다면, 재생산을 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사회질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폴라니(Polany)가 주장했던 것처럼, 시민사회가 경제 속으로 흡수되어 사회적 삶이 상품화되고 원자화된 장이 되었다면, 자본주의는 좀 더 불규칙하게 작동했을 수도 있다. 순수한 공산주의도 법률을 만들고 강제하는 특정한 권위적 수단(바로 ‘국가’) 없이는 상상하기 힘든 복잡한 사회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적 환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 규모의 사회 조직의 실행가능하고 지탱 가능한 형태는, 언제나 이러한 세 가지 형태의 권력들 사이의 상호 관계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일반적 개념화 속에서 자본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는 단순히 모호한 이상형일 뿐 아니라 변수들로 생각되어야만 한다. 생산적 자원들의 배치와 사용을 결정하는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둔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자들이 더 많은 결정을 하면 할수록, 경제적 구조는 더욱 자본주의화된다. 자원의 배치와 사용에서 국가 결정을 통한 권력 행사가 더욱 많이 나타난다면, 그 사회는 좀 더 국가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 사회에 바탕을 둔 권력이 그러한 배치와 사용을 좀 더 결정한다면, 그 사회는 좀 더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복잡한 혼합적 사례들과 혼성형(hybrid)들이 나타난다. 보기를 들어, 한 사회는 어떤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적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국가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다. 


서로 다른 권력관계들이 합성되어 있는 경제구조에 대한 사고는 이들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생각에서 근본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국가주의의 속성을 크게 띄고 있고, 국가가 사회적 잉여들을 모든 곳에 배치한다. 공공재, 국방, 교육 등이 그렇다. 더욱이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이들로부터 특정한 권력을 제거한다. 그 한 보기로 자본주의 국가는 기업에 대해 위생과 안전에 대한 규제를 가한다. 경제적 권력보다는 국가적 권력이 생산의 특정한 부분을 통제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소유가 국가로 이전되기도 한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는 최소한이라도 약간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시민사회의 집단적 행위자들이 국가에 대한 압력(입법과정에 대해), 자본주의 기업에 대한 압력(고용과 노동조건에 대해)을 통해 경제적 자원의 배치에 대한 간접적 영향력을 미치기도 한다. 실증적인 사례를 단순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묘사하는 것은, 마치 ‘자본주의가 경제 활동을 조직하는 지배적인 방식으로 갖춰져진 경제 구조’라는 말처럼 부족하다. 


IV. 사회 권력 강화(Social Empowerment)로 나아가는  길 


앞서 제시한 개념적 제안들을 다시 요약해보자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와 경제활동, 즉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를 결정짓는 권력 방식의 원리에서 대비된다. 특히 한 사회의 경제적 자원과 활동에 대한 통제에서 사회 권력 강화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한 경제를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제도적 고안의 측면에서 이것이 실제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는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회들에 대한 풍부한 사례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경제 구조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제도적 조정(institutional arrangement)들에 대해 합리적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경우는 어떤가. 어떤 종류의 제도적 고안이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고, 시민사회 안에 자발적 연합에 근거를 둔 권력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사회 권력 강화가 중심적인 경제 구성원리가 되는 사회로 향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생산수단이 국가가 아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집단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제도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경제 활동에서 사회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려줄 원칙들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주의적 나침반의 과제이다. 이러한 나침반은 세 가지 주요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우리가 이미 이야기한 권력의 양식들에 근거하고 있다. 


▶ 사회 권력 강화는 국가 권력이 경제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 이상의 방법이다. 


▶ 사회 권력 강화는 경제 권력이 경제 활동을 형성하는 것 이상의 방법이다. 


▶ 사회 권력 강화는 직접적으로 경제 활동을 넘어서는 것이다. 



위의 그림 1에 나타난 것처럼, 이 같은 사회 권력 강화의 세 가지 방향은, 사회 권력이 자원의 배치와 생산과 분배의 통제에 대한 권력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는 일련의 경로(pathway)들을 만들어낸다.6 


다섯 가지 경로가 특히 중요하다. 이들 각각의 경로들 속에서 우리는 좀 더 큰 사회 권력 강화의 방향으로 우리를 움직일 수 있는 일련의 특정한 제도적 제안들을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제도적 제안들을 정리하는 것을 ‘현실적 유토피아 계획(envisioning real utopias)’이라 한다. ‘유토피아’는 그것이 해방적 이상을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것은 해방적 이상을 실행할 수 있는 제도적 디자인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우리는 사회 권력 강화를 위한 다섯 가지 길의 각각의 특성을 간단하게 살펴볼 것이다. 


국가주의적 사회주의 


전통적인 사회주의 이론에서 대중 권력(popular power), 즉 시민사회의 연합적 행동에 뿌리를 둔 권력은 국가에 의한 생산과 지배 통제로 해석되었다. 



그러한 비전들은 국가주의적 사회주의(statist socialism)의 한 원형으로 볼 수 있다. 기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정당은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시민사회에서 연합적으로 형성된다. 당원들은 특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동참하며, 그들의 권력은 다양한 종류의 집단적 행동을 동원할 수 있는 역량에 달려있다. 만일 사회주의 정당이 노동 계급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공동체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면, 그리고 노동계급(또는 좀 더 넓은 집단)을 대변하는 도구들에 의한 개방적인 정치적 과정을 통해 민주적 책임감이 있다면, 그리고 만일 당이 국가를 통제한다면, 그리고 국가가 경제를 통제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강화된 시민사회가 생산과 분배의 경제 체제를 통제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국가주의적 사회주의의 고전적 모델은 그림 2에 잘 나타나있다. 여기에서 경제적 권력은 소외되어 있다. 이것은 행위자들이 생산을 조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산에 대한 직접적 소유권 때문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집단적인 정치적 조직화와 그를 통한 국가 권력의 행사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국가주의적 사회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적 맑스주의 사상의 심장부에 위치해왔다. 그 시나리오는 당이 노동계급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연합된 노동자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책임을 질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국가에 대한 당의 통제가 곧 시민사회(계급적 관점에서 이해했을 때의 개념)가 국가를 통제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될 것으로 보았다. 더욱이 혁명적 사회주의는 혁명기 러시아에서는  소위 ‘소비에트(soviets)'라 불린, 참여위원회 형태의 조직을 통해 국가와 경제 제도의 급진적인 재조직화를 그려내었다. 그것은 국가와 생산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노동자들의 연합을 직접적으로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들 위원회는 완전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강화되었고 자율적인 시민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연합적 권력 강화의 메커니즘으로서 생각될 수 있었다. 다시 당은 이러한 과정의 핵심 축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시민 사회를 효과적인 사회 권력으로 연합적으로 전환시키려는 당이 지도(‘전위’로서)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실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 3 참조) 혁명적 당 기구들이 최고위부에 권력을 집중했기 때문이든, 아니면 러시아 혁명과 그 뒤의 역사적 환경이 아주 부정적인 제약을 가했기 때문이든, 그나마 있었던 볼셰비키 당이 자율적 시민사회에 복종할 만한 가능성은 1917년이 지난 뒤 10여년 만에 무너졌다. 새로운 소비에트 국가가 권력을 완전히 집중시키고 그것을 경제적 전환을 위한 노력에 쏟기 시작하자, 당은 시민사회에 침투하는 도구이자 경제적 조직을 통제하는 국가 지배의 메커니즘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은 사회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의 이념적 깃발 아래 선 권위주의적 국가주의 체제의 전형이 되었다. 경제구조의 혼합적 특성에 남아있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조직화의 핵심 원리는 국가주의였지 사회 권력 강화가 아니었다. 그 뒤 여러 가지로 등장했던 성공적인 혁명적 사회주의당도 모두 넓게는 비슷한 경로를 따랐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주의를 만들어냈지만, 그것들은 결코 강화된 시민사회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오늘날, 국가주의적 중앙계획체제가 사회주의적 목표를 실현하는 데에서 실행할 수 있는 구조가 되리라고 믿는 사회주의자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국가주의적 사회주의는 사회 권력을 강화시키는 과정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국가는 의료부터 교육, 공공 교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공공재의 중요한 공급자로서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앙계획식 명령 경제가 실패한 기록이 남았지만, 재화 생산에 대한 특정한 종류의 민주적 형태의 효과적 중앙 계획은 가까운 미래의 대안적 역사조건 하에서는 실현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주의자들에게 결정적인 질문은, 국가가 제공하는 요소들이 민주적으로 강화된 시민사회의 통제 하에 효과적으로 통제되도록 그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에 의한 공공재 제공은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 제도를 통해 약하게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국가 정책에 대한 자본주의적 경제 권력의 영향력이 아주 크기 때문에, 그러한 공공재들은 사회적 필요보다는 자본 축적의 요구에 더욱 자주 좌우된다. 국가의 민주적 질을 깊게 만드는 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직접적인 국가 제공이 사회 권력 강화의 진정한 길이 되도록 하기 위해 풀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이다. 


많은 이들이 이를 성취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일 것이다. 국가-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에서 나타난 명령-통제(command-and-control)식 관료제의 실패는, 국가 서비스의 민주화가 아닌 민영화 요구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러나 혁신적 디자인의 범위는 좀 더 활력 있는 참여적 형태가 가능하다는 근거를 제공한다. 특히, 지방과 지역적 수준에서 이러한 것들은 공공재 제공의 효율성과 민주적 제도의 책임성을 강화될 수 있다.7 1990년대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Porto Alegre)에서 만들어진 참여예산제(participatory budgeting)는 다수의 일반 시민들과 이차적 집단들이 실제 시(市)예산, 특히 지역 공공재의 국가적 생산에 대한 의사 결정에 참여했다.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참여예산제는 지방 정부가 빈자와 노동계급의 필요에 따라 사회간접자본 투자의 방향을 돌리도록 크게 이바지했다. 


사회 민주주의적 규제 


사회 권력 강화를 위한 잠재적 경로의 두 번째는 경제적 권력에 대한 국가의 제한과 규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림 4 참조) 심지어 탈규제화와 자유 시장 경제 이데올로기가 승리를 누리고 있는 지금도, 국가는 자본주의적 경제 권력을 침해하는 생산과 분배의 규제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환경 규제, 직장에서 위생과 안전 규칙, 생산품 안전 표준, 노동시장에서 기능 증명서 발급, 최소임금제 등 광범위한 개입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국가 권력의 개입은 특정한 자본가 권력을 규제하고, 그럼으로써 경제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적극적 국가 개입을 확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 권력에 효과적으로 종속되게 하며, 그럼으로써 사회 권력 강화의 한 가지 방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자본주의 경제 권력을 규제하는 것은 반드시 중대한 사회 권력 강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문제는 국가의 규제활동이 진정한 민주적 권력 강화로 나타나도록 어떻게 그 넓이와 깊이를 확장할 것인가이다. 실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경제 규제는 사실 시민 사회보다는 자본 권력의 필요에 더욱 맞춰져 있다. 그 결과는 그림 5와 그림 4에 나타난 것과 같이, 국가 권력이 자본을 규제하지만, 그것은 체제적으로 자본 그 자체의 권력에 적합한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자본 권력을 억제하고 사회 권력을 넓히는 방향으로 국가 규제를 민주화시키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가 된다. 이를 실현하는 한 가지 방법을 우리는 연합체 민주주의(associative democracy)라고 한다. 



연합체 민주주의


세 번째 길인 연합체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부 활동, 보통은 국가기구의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시민사회의 집단적 연합을 통한 넓은 범위의 제도적 도구들을 포함한다.8 이것은 경제적 권력에 대한 사회 권력과 국가 권력의 연합적 효과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그림 6 참조) 이에 대한 가장 친숙한 형태는 아마도 몇몇 사회민주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네오 코포라티즘적(neo-corporatist) 삼자기구이다. 여기에서는 조직화된 노동자들과 고용자 연합, 국가가 경제적 규제, 특히 노동시장과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함께 만나 협상한다. 연합체 민주주의는 다른 영역까지 확장될 수 있다. 보기를 들어 하천유역위원회(watershed council)는 시민 단체와 환경운동 집단, 개발자들과 국가 기구가 생태계 관련 규제를 논의한다. 의료 위원회(health council)는 의료 단체와 공동체 기구, 공공의료 관료들이 함께 의료문제를 계획한다. 이처럼 연합들이 포함된 확장은 엘리트와 국가가 조작하기보다는 내적으로 시민사회의 이익을 민주적․대표적으로 반영하며, 의사결정과정에서도 개방적이고 신중하다. 그럼으로써 연합체 민주주의는 사회 권력 강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 



사회적 자본주의 


경제적 권력은 사적 소유와 다양한 자본의 배치, 조직, 사용에 대한 통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시민사회의 이차적 연합들은 여러 가지 메커니즘을 통해 그러한 경제 권력을 사용하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림 7 참조) 보기를 들어 노조는 자주 연금기금을 통제한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기금의 수혜자들을 위한 연금 제공이 아닌 기금의 잠재적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신탁책임의 규정에 따라 운용된다. 그러나 그러한 규정들은 달라질 수 있다. 노조는 그러한 기금의 관리를 통해 기업에 대해 잠재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좀 더 야심차게,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은 기업에 대한 주식 징수(share-levy)를 통해 조달되고 시민 사회의 좀 더 광범위한 일련의 이차적 연합들이 자본 축적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종류의 연금기금을 제안했다. 오늘날 캐나다에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통제하는 벤처자본기금(venture capital fund)을 만들어 특정한 사회적 요건을 갖춘 창업기업들에 이권을 제공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사회적 자본주의는 시민사회 연합체가 통제하는 자본 기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적 권력을 제한할 수 있도록 시민 사회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다른 제안들은 노동자들이 작업장 관리에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노동자 대표로 하여금, 기업 이사회의 1/2 내지 1/3을 차지하도록 한 독일의 공동결정제도(co-determination rule)는 하나의 보기라 할 수 있다. 기업 이사회를 통제하는 주주(share-holder) 위원회를 이해관계자(stake-holder) 위원회로 교체하려는 시도는 좀 더 급진적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일반적으로는 정부 규제 기구가 감시자를 보내서 그러한 규정을 지키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작업장 위생과 안전 규제에 대해 작업장 안의 위생과 안전 조건들을 강화하도록 모니터하는 노동자위원회를 생각해볼 수 있다. 후자는 경제적 권력에 대한 사회적 권력 강화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기업에 압력을 가하는 소비자 지향적 사회 운동 또한 시민 사회 권력 강화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대학 캠퍼스에 근거를 둔 노동착취산업 불매운동(anti-sweatshop)과 노동표준운동(labour-standards movement), 몇몇 두드러진 사회적 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생산품에 대한 조직적 불매운동 등을 포함한다. 


사회적 경제(The social economy)


시민사회 권력 강화의 마지막 길은 여러 가지 경제 활동 부문의 조직에서 시민사회의 이차적 연합체들이 단순히 경제적 권력의 전개를 형성하는 것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그림 8 참조)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는 자본주의적 시장 생산, 국가에 의해 조직된 생산, 가계생산과는 별개의 경제 활동을 조직하는 대안적 방식들을 이룬다. 이것의 특징은 인간 필요를 직접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집단적으로 조직된 생산이라는 점, 그리고 이윤 극대화나 국가-기술 관료적(state-technocratic) 합리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9 이것은 공동체가 조직한 의료시설과 탁아 시설 등을 포함할 뿐 아니라, 중간 상인의 착취 방지를 통한 상품 무역에서 공정성 확보에 힘쓰는 NGO들, 토지로부터 시장성을 제거하여 구입 가능한 주택을 만들어내는 공동체적 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도 포함한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사회 경제의 생산이 자금을 조달하는 가장 주된 방법은 자비로운 기부를 받는 것이다. 종교 단체가 이러한 활동들을 빈번히 펼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국가 측면에서 또 하나의 대안은 조세 능력을 통해 사회적으로 조직된 광범위한 비시장적 생산에 자금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술 분야에서는 일반적이다. 많은 예술단체들은 비영리를 바탕으로 삼아 특정한 종류의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려고 만들어졌고, 시장의 압력에서 벗어나려고 막대한 국가적 보조금을 받는다. 퀘벡(Quebec)에는 생산자 협동조합을 통한 광범위한 가택양로체계와 양육자협동조합에 의한 육아 체제가 구축되어 있다. 지역 정부는 이들 협동조합에 많은 보조금을 지급하고, 영리를 쫓는 기업들이 보조금의 지원을 받는 사회적 경제 부문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는 규정을 제정한다. 이들 협동조합(co-operatives)은 Chantier de l'économie sociale라는 시민사회 연합이 만든 사회 경제적 운동에서 자라났다.10 캐나다의 단일 지불식 의료체계(single-payer healthcare system)도 사회적 경제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국가는 사실상 모든 의료와 규제 표준에 자금을 대지만, 일반적으로 영국의 국가의료보장제도(British National Health Service)처럼 직접 제공하는 것들을 조직하지는 않는다. 공동체에 바탕을 둔 조직을 포함한 몇 가지 종류의 시민사회 주체는 병원과 클리닉, 치료소를 운영한다. 이것은 보건 의료 부문에서 사회적 경제의 공간을 만들어냈으며, 앞으로 더욱 큰 역할을 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풀뿌리 참여 협동조합의 바탕 위에서 운영된다. 


사회적 경제를 아주 넓히는 것을 가장 크게 가로막는 장애물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게 하는 문제이다. 이 장애물을 뛰어넘는 한 가지 방법은 기초 소득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후자는 사회 정의의 평등주의적 원칙에 바탕을 두고 일반적으로 옹호되었다. 그러나 평등주의적 원칙은, 동시에 모든 생산자들의 삶의 수준을 제공하려고 사회 경제의 집단적 연합체에 대한 압력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잉여를 자본 축적으로부터 이른바 사회 축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옮기는 한 가지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적 경제의 길을 따라 사회 권력은 끊임없이 강화될 것이다. 


사회 권력이 지닌 문제점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다섯 가지 길은 사회 권력이 이론적으로 경제적 생산과 분배에 대한 효과적 통제로 전환될 수 있는 원칙적 방식들을 이룬다. 이러한 경로를 따라 사회 권력 강화를 넓힘으로써, 우리는 사회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생산과 분배를 위한 자원의 배치를 통제하려면, 시민사회에 뿌리를 둔 권력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다. 여기서 특히 두 가지 문제가 말썽을 일으킨다. 첫째로, 활기가 넘치는 시민 사회는 각기 다른 목표와 다른 연대에 바탕을 둔 여러 가지 연합들과 네트워크, 공동체들의 복합물이다. 이것은 복잡한 경제 체제를 통제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일관된 권력을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한다. 둘째로, 시민사회를 이루고 있는 많은 자발적 연합체들은 좁고 배타적인 이익과 권익 보호에 바탕을 두고 있다. KKK와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가 그 대표적 보기다. 왜 우리는 그러한 연합체들을 강화하는 것이 인간 해방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해악들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두 가지 반대 가운데 첫 번째는 여기서 제시된 사회주의의 개념이 아나키즘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이유이다. 아나키즘이 제시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견해는 시민사회의 집단적 행동을 통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세계가 국가 없이 자연스럽게 사회 질서와 사회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충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회주의는 국가를 필요로 하며, 시민사회가 지닌 집단적 힘이 국가나 경제를 통제하는 데 필요한 통합을 이룰 수 없는 게임의 룰과 조정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낼 실질적 권력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자본주의적 경제 권력을 끊임없이 휘두를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려고 자본주의적 국가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리고 국가주의 경제가 적어도 일관성을 지니려면 ‘국가주의적 국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경제 영역에서 지속될 수 있는 사회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은 사회주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시민사회가 평등주의적 해방의 이상과는 모순된 많은 연합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두 번째 반대는, 그것이 배제와 억압에 뿌리를 둔 사회주의의 망령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된다.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권력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회가 급진적이고 민주적이며 평등주의적인 이상을 가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며 민주적 제도 일반의 특성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자주 지적하듯이, 자본주의는 그 본성상 다수의 폭정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자유 민주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다수의 이익 모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만드는 데 있어서 성공적이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비슷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그 도전이란 해방의 급진적, 민주적, 평등주의적 개념을 강화시킬 민주화의 발전과 연합적 권력 강화의 제도적 틀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나는  사회적 권력 강화의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이러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것이라기보다는, 사회 권력을 강화시키는 길을 따르는 변화가 자본주의나 국가주의가 아닌 다른 이상을 향한 투쟁에서 좀 더 유리한 지형을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V. 전 환(Transformation)


사회적 권력 강화의 다섯 가지 경로를 따르는 현실적 유토피아에 대한 일련의 제안들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에 대해 납득할만한 청사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라는 이상에 완전히 바탕을 둔 공고한 사회주의 경제 국가의 건설을 위해 다른 많은 제도적 전환들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경제 구조 밖에서 실현되는 만큼 민주적이고 평등한 해방의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검증한 일련의 제도적 제안들이 진지하고 철저히 이행된다면, 자본주의는 깊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제안들 가운데 몇 가지가 사회적 권력 강화의 경로를 따르는 오직 온건한 운동일 뿐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집합적으로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계급 관계와 그것들이 뿌리 내리고 있는 권력과 권위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이룬다. 자본주의는 경제 활동을 지배하는 권력 관계의 혼합적 배치의 한 요소로서 계속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국가와 경제의 심화된 민주성의 한계 안에서 엄격히 제한된 종속된 자본주의일 것이다. 


현실적 유토피아에 대한 디자인의 개발은 현존하는 사회적․정치적 조건들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들은 필요하고 실행할 수 있지만, 아울러 한 묶음으로써 실현이 가능한 대안들을 구성한다. 성취가능성은 사회적 행위자들의 권력과 그것들이 행사되는 환경에 따른다. 이 문제들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것은 해방적 사회 과학의 세 번째 일반적 과업의 목적이다. 바로 전환 이론(theory of transformation)이 그것이다. 


전환 이론의 중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재생산의 과정이 일으켰던 해방적 전환이 지닌 장애물과 기회들이, 그러한 과정에서 생기는 틈, 그리고 사회적 변화의 불확실한 미래의 궤도가 주어지면, 어떤 종류의 집단적 전략이 우리를 사회 해방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울 것인가. 민주적, 평등적, 해방적 이상을 향한 투쟁은 역사적으로 사회 권력 강화라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을 통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적 전환 방식으로 몰려든다. 즉 파열적이고 침투적이며, 공생적 방식이 그것이다. 


파열적 전환은 현존하는 사회 구조 양식을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사회 권력 강화의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낼 것을 계획한다. 직접적인 대결과 정치적 투쟁이 짧은 시간 안에 기존 제도의 파괴와 새 제도의 건설을 가져올 급진적 분리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 그 핵심적 아이디어다. 사회주의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혁명적 시나리오는 이것의 우상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결정적이고 완전히 이루어진 대중 세력의 승리는 기존 경제 구조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파열적 전환은 혁명과 같다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사회 체제의 바탕이라기보다는 제도들의 집합을 포함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들은 또한 전체라기보다는 부분적일 수 있다. 밑바탕에 깔린 사상은 오랜 기간에 걸친 변화보다는 급격한 단절과 빠른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침투적 전환은 자본주의 사회의 틈새와 공간, 한계 속에서 사회 권력을 강화시키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보통 지배계급과 엘리트에 즉각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대부분 시민 사회에 깊이 새겨진 전략이고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의 레이더에 미치지 못한다. 침투적 전략은 사회 변화에 대한 아나키즘적 접근의 중심에 있고 많은 공동체 운동가들의 노력에서 큰 실질적 역할을 하는 반면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러한 노력을 평가절하하고 그것들을 단지 상징적이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보며 현 상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의 전망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진적으로 그러한 발달은 사람들의 삶에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사회 전체의 사회 권력을 강화시키는 전환의 폭을 넓히는 데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공생적 전환은 대중적 사회 권력 강화의 제도적 형식을 넓히고 깊게 하는 일이 또한 지배 계급과 엘리트가 부닥친 특정한 실질적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전략을 포함한다. 보기를 들어,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화는 자본주의 지배의 안정성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생각되었던 아래로부터 합의된 압력과 투쟁의 결과였다. 환상이 아니라 사회 권력 강화의 증대는 실제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의 안정성에 이바지하고 있는 자본가들과 다른 엘리트들의 이익에 봉사했던 방식으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공생적 전환은 그 자체로 모순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제도 변화의 단기적․장기적 변화 사이의 긴장에서 자주 이점을 가진다. 단기적으로 사회 권력 강화의 단기적 형태는 엘리트와 지배계급의 이익 속에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것들은 권력의 균형을 좀 더 넓은 사회적 권력 강화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의 세 가지 방식은 전환의 정치에 대한 아주 다른 태도를 암시하는 것이다. 파열적 전환은 적어도 그 자체의 좀 더 급진적 형태(‘국가를 분쇄하는 것’)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핵심 제도들이 해방적 목적을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없다고 전제한다. 사회적 재생산의 핵심 제도들은 파괴되어야 하고 질적으로 새롭고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침투적 전환(‘국가를 무시하는 것’)은 밑바닥에서부터 낡은 것 안에서 대안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마도 거기에는 세워진 제도들이 이러한 과정을 촉진하는 데 이용될 때가 있지만, 갈라진 틈의 전환은 주로 권력의 중심을 피해간다. 공생적 전환(‘국가를 활용하는 것’)은 해방적 변화가 사회적 재생산의 핵심 제도들, 특히 국가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희망은 해방적 사회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넓혀진 영역의 방향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톱니바퀴 같은 특성을 가진 새로운 혼종적 형태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 모두 문제가 없지 않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 전략들 모두 위험과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 또는 다른 하나가 가장 효과적일 수 있지만 전형적으로는 이들 가운데 어떤 것도 그 자체로 효과적이지 못하다. 활동가들이 이러한 전략적 비전 가운데 하나에 깊이 심취하여, 그것이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모델에 맞선 싸움에 많은 힘을 써버린다. 성공에 대한 어떤 전망을 지닌 장기적 기획은 전략의 결합이 어쩔 수 없이 서로 모순적인 투쟁을 뜻하는 것일지라도, 이러한 전략들을 결합시키는 성가신 문제와 씨름해야 하는 것이다.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사회 권력 강화라는 사회주의에 대한 미래의 전망에 비관적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 이러한 제안 가운데 많은 것이 이미 시도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틈새 속에서 새로운 제도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그리고 슬프지만 파괴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국가가 사회적 혁신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승리가 일어나고 있다. 사회 권력을 강화시키는 새로운 형태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그러한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실험들과 혁신들이 가지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 사회 권력 강화는 한계선까지 다다라서 궁극적으로는 제한되거나, 책략을 위한 공간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틀림없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러한 한계에 이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방적 대안을 체계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과정에서 하나의 요소이다. 지금으로서 남은 것은 실행할 수 있는 변화가 일관적인 정치 기획으로 될 수 있게 하는 통찰력일 뿐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사회 권력을 강화시키는 일에 착수함으로써, 우리는 사회 권력이 강화된 세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침내는, 그러한 세계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옮긴이 : 정인(丁人)

  1. 이 글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Eric Olin Wright, “Compass Points : Towards a Socialist Alternative,” New Left Review 41 (Sep-Oct 2006). pp. 93-124. 에릭 올린 라이트는 분석적 맑스주의자로 분류되는데, 이론적으로는 사회 민주주의적 전망에 호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여러 가지 견해를 소개한다는 점, 지금을 ‘읽어내는 데’ 시사점을 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 글을 실었다. 이 글에 대한 비판적 ‘읽기’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본문으로]
  2. 기존의 정치 용어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적 전환의 기획을 뜻하는 반면, ‘사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조절하는 데 필요한 강제를 받아들이는 사회주의적 이상에 영향을 받은 개량주의적 기획을 뜻한다. 실제로 많은 사회주의 정당들은 엄격히 말해 사회 민주주의 의제들을 추구하며, 일부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좀 더 반자본주의적 전환이라는 비전을 좀 더 강고하게 추진한다. 지금의 맥락에서 나는 두 가지 형태 모두를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적이고 평등한 도전이라는 넓은 스펙트럼 안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본문으로]
  3. ‘과학’이라는 용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시각을 강요하려고 하는 소수 전문가들만이 진실에 접근할 권리가 주어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과학’이 가끔 이런 방식으로 주장된다 하더라도, 나는 과학이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주장을 거부하고 개방적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꽤 민주적이라고 보며, 오류의 수정과 지식 발전의 바탕으로서 특정 세력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4. 도덕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해야 한다(ought)'가 ‘할 수 있다(can)'을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불가능한 도덕적 의무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암묵적으로, 무엇이 현재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대안들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그 주장들은 이론상으로 실행가능한 제도가 그 원리들을 실체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이슈들은 정치 철학에 거의 어떠한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존 롤즈(John Rawls)는 그것이 과연 실제 제도에서 가능한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자유원리(liberty principle)’가 ‘차등원리(difference principle)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5. 확장된 논의를 보려면 Wright, Class Counts: comparative studies in class analysis, Cambridge 1997. [본문으로]
  6. 화살표들은 한 영역의 다른 영역에 대한 우위를 표시한다. 그래서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국가 권력으로의 화살표는 시민사회에 근거한 권력이 국가 권력의 행사를 직접적으로 형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그림은 오직 사회적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만을 표현한 것이며, 경제 활동에 대한 모든 권력 관계에 대한 그림이 아니다. 국가주의와 자본주의 경제 권력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의 경로들이 그려진 지도를 만들 수 있다. [본문으로]
  7. Archon Fung and Erik Olin Wright, Deepening Democracy: institutional innovations in empowered participatory governance, London 2003. [본문으로]
  8. 좀 더 확장된 논의를 보려면 Cohen and Joel Rogers, Associations and Democracy, London 1995. 를 참조할 것. [본문으로]
  9. 그림 8에서는 국가 자신이 직접적으로 생산과 분배에 관여하지 않는 이상, 국가로부터 생산과 분배로 향하는 화살표가 없다. 물론 국가는 사회 경제적 기능과 관련한 법적 척도들을 마련하는 데에서 아직도 중요하다. [본문으로]
  10. 퀘벡의 사회적 경제의 혁신적 전망에 대한 탁월한 논의는 Marguerite Mendell, "The Social Economy in Québec: Discourses and Strategis', in Abigail Bakan and Eleanor MacDonald, eds, Ciritical Political Studies: Debates From the Left, Kingston 2002, pp.319-43; 그리고 Nancy Neamtan, 'The Social Economy: finding a way between the market and the state', Policy Options, July/August 2005, pp.71-6.에서 볼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