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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7월호

03가두투쟁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46

3. 가두 투쟁

 

 

나는 당신이 그들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법정은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들이 스스로를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을 대단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도달한 지점입니다. 즉 그들 스스로 당신의 군대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힘이 정확히 자신들의 상상력에 놓여있다는 것은 정말 불행입니다. 그들을 여타의 모든 권력 형태와 상이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능력이고,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것[소중한 것]을 하기 위해 어떤 지점에 도달해 왔다고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 레 추기경, 회고록

 

 

53일 집회는 그 자체로 평범했다. 즉 평소처럼 3~4백 명의 측근들이 그 요청에 응했다. “서방파”(Occident) 집단에 속한 수 십 명의 파시스트들이 생-미셸 대로에서 정오 시작 무렵 반대 시위를 전개했다. 소르본의 몇몇 앙라제는 자기-방어의 조직화를 요청했다. 곤봉이 없자 비품을 부숴야 했다. 로쉐 학장과 그의 경찰들은 이것이 공격을 위한 충분한 구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찰과 기동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소르본 안마당을 침입했다. 학생들은 포위됐다. 그 다음 경찰은 학생들에게 안마당에서 나갈 수 있는 통행권을 제공했다. 학생들은 받아들였고 맨 먼저 떠난 자들은 실제 통과가 허용됐다. 통과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고 다른 학생들이 그 지구(quarter)밖에 모이기 시작했다. 모든 조직가들을 포함해 소르본 내에 남아있던 2백 명의 시위자들은 체포됐다. 닭장차들(police vans)이 시위자들을 낚아 채 가자 라땡 지구가 폭발했다. 두 대의 닭장차 중 한 대는 결코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3명의 경찰만이 두 번째 닭장차를 호위했다. 그들은 기습을 당했고, 수 십 명의 시위자들이 도망쳤다.

파리의 수 천 명의 학생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그리고 그와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경찰과 싸웠던 것은 수 년 만에 처음이었다. 빗발치는 포석(鋪石)들과 만난 끝없는 돌격대는 몇 시간 후 까지 생-미셸 대로와 그에 인접한 거리들을 소거하는데 실패했다. 600명의 사람들이 체포됐다. 전국고등교원조합과 전국프랑스학생연합의 즉각적인 반응은 고등교육의 무기한 파업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55일 네 명의 시위자에게 가해진 당치도 않은 감옥형은 대학 평의회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요청된 56일 시위를 확실하게 하는데 기여했을 뿐이었다.

당연히 스탈린주의자들은 운동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53?뤼마니떼?에 실린 조르주 마르셰(George Marchais)의 논설은 이 방침이 거의 패러디 수준에 있음을 드러냈으며 다수 학생들을 화나게 했다.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스탈린주의자들은 학생들이 창조하기 시작한 혁명적 소요의 모든 중심지에서 자신들이 거부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오후 일찍 폭동으로 변한 시위는 56일 전체를 특징지었다. 첫 바리케이드가 모베르 광장에 세워졌고 3시간 동안 방어됐다. 그 시각 경찰과의 싸움은 생-미셸 대로의 끝에서, 샤뜰레 광장에서, 그리고 레알에서 발발하고 있었다. 초저녁까지 시위자들의 수는 만 명 이상이었고 쎙-제르멩--프레를 둘러싼 지역을 주로 장악하고 있었다. 당페르 로슈에서 전국프랑스학생연합이 조직한 행진은 오후 6시에야 시위자들을 보강했다. 르몽드58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뒤이은 것은 이미 놀라운 날 내내 발생한 모든 것을 규모와 폭력에서 압도했다. 종종 격분한 행동에까지 이른 것은 일종의 가두 투쟁이었다. 그곳에서는 가해진 일격마다 즉각적으로 되돌아왔고, 가까스로 정복한 근거지는 순식간에 다시 빼앗겼다.…… 관찰자에게는 광기로 가득 찬 듯 보이는 극적이고 무의미한 순간들만이 있었다.

 

 

그리고 57?로로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시위대 옆으로 쇠파이프로 무장한 블랙 재킷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돕기 위해 파리 외곽에서 왔다.” 그 싸움은 특히 몽파르나스에서는 자정을 넘어서 까지 지속됐다.

무엇보다도 차들은 전복되어 불탔고, 포석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기 위해 파헤쳐졌으며, 상점들은 약탈당했다. 낭떼르에서 시작됐던 전복적인 구호들은 이제 파리의 몇몇 지역으로 확산됐다. 폭동자들이 바리케이드 따라서 그들 자신의 반격 능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한, 경찰은 공격적인 소화탄과 최루가스에 주로 의존하는 전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56일은 그날 아침의 중요한 시위들을 조직했던 노동자들, 블랙 재킷들, 실업자들, 고교생들의 최초의 개입을 특징으로 했다. 폭동의 자생성과 폭력성은 그들의 학문적 창시자들이 목표와 구호로서 내놓은 상투적인 말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블랙 재킷들소르본을 학생들에게!”라고 외치면서 거리에서 싸웠다는 바로 그 사실은 한 시대 전체의 종말을 의미했다. 일주일 후 이들 정치화된 블랙 재킷들은 소르본에 있었다.

월요일 시위 내내 폭력을 비난하던 전국프랑스학생연합은 완전히 불신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온건한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다음날 자신의 수사(rhetoric)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 노동총연맹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완전히 포기한 채, 그 싸움에서 여전히 분리되었던 자신의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학생들과 완전히 단절하기로 했다. 세기(Seguy)는 저녁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공포했다. “노동자계급을 모욕하고,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지에게 매수당했다고 비난하며, 노동자계급에게 혁명적 이론을 주입하여 그들의 투쟁을 이끌려고 시도하는 사고뭉치들과 선동가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아량도 없다. 여타 좌파들과 함께 특정 분자들은 학생 조합주의에서 그 정당한 요구들을 그리고 전국프랑스학생연합을 골려먹기 위해 그 대중 민주주의적인 본성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성 권력의 이해관계 속에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제스마르, 소바죠, -벤디트가 지도자 없는 운동의 외견상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 이런 맥락에서였다. 지도자들을 찾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은 그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지도자도 찾지 못했다. 그들은 혁명적 현실에 급하게 붙여진 스펙타클의 불가분하고 포토제닉한 스타들이 됐다. 그들은 그런 역할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 운동의 이름을 빌어 말했다. 물론 이를 위해 그들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한 이 혁명적 경향의 더 큰 부분을 받아들여야 했다(-벤디트는 그나마 이런 급진적 내용을 반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신-좌파주의의 이러한 신성 가족은 다만 현실 운동의 스펙타클한 왜곡형태일 수 있기 때문에, 신성 가족은 자신의 가장 풍자화된 이미지를 재현했다. 대중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제공된 그 삼위일체(*역주 : 제스마르, 소바죠, -벤디트)는 투쟁 속에서 추구되고 실현되고 있던 진정한 소통을 사실상 재현했다. 819개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마력(魔力)을 가진 이 삼인조는 그러한 전달 수단들이 용납하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 따라서 왜곡되고 회수되는 것 만을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을 추동했던 그 순간이 지닌 실질적인 의미는 어디에서도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전국프랑스학생연합과 전국프랑스학생연합의 압박당한 감독자들은 57일 시위를 아주 잘 통제했다. 그들은 당국이 허가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걷는 것으로 스스로를 제한했다. 즉 당페르에서 에트왈을 거쳐 돌아오는 것. 조직가들은 소르본의 재개방, 라땡 지구에서 경찰의 철수, 투옥된 학생들의 석방 외에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여기저기 정처 없이 돌아다녔고, 그러는 동안 작은 난투극만 발생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온건한 요구조차 마지못해 수용했다. 정부는 소르본의 재개방을 약속했다. 그러나 참을성 없는 일반 대중(rank-and-file)에 의해 배신자라고 이미 비난받고 있던 소바죠와 제스마르는 연좌 농성과 대학 문제에 관한 토론을 위해 하루 동안 소르본을 점거할 것이라고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피트 장관은 소르본에 경찰을 유지시킨 반면 학생들의 선의”(goodwill)를 측정하기 위한 시험으로서 낭떼르를 재개방했다.

510일 금요일,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당페르 로쉐에서 만났다. 동일한 조직가들은 시위대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지 논의했다. 장시간의 논쟁 후 그들은 프랑스국영방송으로 결정했지만, 처음 우회하면서 법무부를 지나쳤다. 라땡 지구에 도착한 시위대는 경찰이 쎄느강에 이르는 모든 거리를 차단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 어처구니없는 여정을 비난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소르본이 자신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라땡 지구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오후 9시쯤, 첫 바리케이드가 자생적으로 세워졌다. 모든 사람들은 그 행동 속에서 자신들의 욕망의 실재를 즉각 인식했다. 파괴를 위한 열정은 결코 그리 창조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모든 사람들은 바리케이드로 달려갔다.

지도자들은 완전히 통제를 상실했다. 그들은 기정 사실(fait accompli)을 받아들여야 했던 반면 그것을 최소화하려는 어설픈 시도를 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는 순전히 방어적이어야 하고 경찰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고 주장했다. 확실히 질서 세력은 바리케이드를 파괴하기 위한 공격을 즉각 감행하지 않고 바리케이드가 세워지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서투른 전술적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지구(quarter) 전체를 굳건하게 방어하는 바리케이드 체계의 구축은 이미 국가의 부정을 향한 용서받을 수 없는 일보였다. 즉 어떤 형태의 국가주의적 권력도 자신의 권력에서 벗어나는 바리케이드 지대를 가능한 한 신속하게 재정복하거나 해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바리케이드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경찰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그들의 바보 같은 대변인들이 주장한 과도한 이데올로기적 왜곡 때문이었다.)

바리케이드 지구는 생-미셸 대로의 동쪽, 무프타르 가의 서쪽, 클로드 베르나르 가의 북쪽, 팡데옹 광장의 남쪽으로 제한되었다. 방어선은 일보 앞까지 왔지만 바리케이드 지구의 방어물들에 의해 통제되지 않았다. 바리케이드 지구의 주요 도로들은 북서-남동 방면의 개이 루작 가, 로몽 가와 북-남 방면의 들름 가였다. 피에르 퀴리 가와 우슬린-튈러 가는 동-서 방면의 유일한 통행로였다. 반란자들의 수중에 있는 지역은 오후 10시부터 오전 2시 직후까지 독자적으로 실존했다. 오전 215분 모든 방면에서 밀고 들어온 무장 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은 그 지구는 서쪽 구역의 기반을 지속적으로 빼앗기고 무프타르 가의 접근로들에서 오전 530분까지 버티면서 3시간 이상 동안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다.

1,5002,000명의 사람들이 공격의 순간에 바리케이드에 남아있었다. 학생들은 그 수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다수의 고교생들, 블랙 재킷들, 수 백 명의 노동자들, 그리고 청년 노동자들만이 있었다. 이들은 정예(精銳)였다. 이들은 인간쓰레기였다. 많은 외국인들과 여성들이 이 싸움에 참여했다. 거의 모든 좌파 집단들의 혁명적 분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주로는 아나키스트들이 다수였고, 심지어는 몇몇 아나키스트연맹의 구성원들까지도 있었다. 이들은 흑기(黑旗)를 들고 56일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고 에스트라파드, 블랭빌, 투앙의 교차점에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그 지역의 거주자들은 그들에게 음식, 최루가스의 효과를 제거할 물, 경찰로부터의 피신처를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의 차를 불태우고 있던 바로 그 폭동자들에게 자신들이 동조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60개의 바리케이드 그 가운데 20개는 매우 견고했다 는 어느 정도 장기적인 방어와 제한된 경계선 내에서 전투로부터의 얼마간의 휴식까지도 제공했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무기들의 허약함, 특히 전투 지대를 넓히기 위한 어떠한 반격도 불가능하게 만든 조직화의 결여로 인해 폭동자들은 대량 검거되었다.

 

이 운동을 이끌길 희망한 자들의 최후의 요구들은 그날 밤의 치욕스런 단념과 순전한 무능력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가장 잘 훈련된 집단인 혁명적 학생 연맹은 사건의 전모는 도발의 결과였고 따라서 떠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기 위해 자신의 5백 명의 전사들을 바리케이드까지 행진시켰다. 그 시각 스타로서 자신들의 의무에 여전히 갇혀있던 콘-벤디트와 소바죠는 로쉐 학장에게 찾아가 유혈 참사를 피하기 위해서경찰이 라땡 지구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상황에서 어떠한 힘도 갖지 않은 한 남자에게 그와 같은 순간에 가해진 이러한 지나친 요구는 그것이 가장 순박한 환상의 1시간 동안 견딜 수 있을 뿐이었던 사건들에 의해 압도당했다. 로쉐는 자신과 상의하러 왔던 자들에게 학생들에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말하라고 충고했을 뿐이었다.

전투는 매우 격렬했다. 폭동진압경찰(CRS), 경찰, 기동대는 바리케이드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기 전, 인화성을 띤 공격적인 염화성의 가스탄을 집중적으로 퍼부음으로써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폭동자들은 포석과 화염병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적의 전진을 늦추려고 지그재그 방어선에서 전복된 차들에 불을 질렀다. 일부는 지붕위로 올라가 던질 수 있는 것은 뭐든지 경찰에게 떨어뜨렸다. 경찰은 몇 차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혁명가들은 그들이 더 이상 지킬 수 없었던 바리케이드에 자주 불을 질렀다. 수 백 명이 부상당했고, 5백여 명이 체포됐다. 4~5백 명은 경찰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들름 가의 파리고등사범학교 건물로 피신했다. 2~3백 명은 몽즈 가로 후퇴하거나 라땡 지구 거주자들의 집으로 피신하거나 지붕 위로 도망칠 수 있었다. 경찰은 정오까지는 라땡 지구를 쓸어버렸고, 의심스러워 보이는 자는 누구나 두들겨 패고 잡아갔다.

 

옮긴이 : 다혁(多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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