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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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7월호

Glyn번역1차[1]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47

자본에 대한 도전들

 

 

우리 모두는 1976년 영국과 IMF 사이에 이루어진 구제금융 협상이 매우 심각한 방향으로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IMF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고 선동하는 토니 벤(Tony Ben)[역주: 영국 노동당 좌파의 리더 중 한 명]이 무척 우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국이 정말 급진적인 노선 변경을 선택했더라면, 서방의 금융 체제 전체가 산산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도 그랬을지 모르고, 그러면 프랑스도 영국을 따라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경제회복에도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결과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협상이 절체절명의 문제라고 보았죠. (1976년 영국과 IMF 사이에 벌어진 구제금융 협상에 대한 미 국무성 관리의 회고 -Sunday Times 1978521일자에서 인용)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최고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북미서유럽일본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는 낮은 실업률과 낮은 인플레이션과 생활수준의 급속한 향상 등 보기 드문 호황을 누렸다. 이 시기를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보인 안정적이고 수지맞는 성장 구조 전체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내내 무너질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글머리에 인용한 미 국무성 관리의 코멘트가 암시하듯, 자본주의 제도의 안정성 그 자체가 심각한 위협에 부닥친 것 같았다.

이 장(1)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바로 이런 이야기의 여러 측면을 개괄하려고 한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장기호황이 지속되자, 취업률은 매우 높았고 노동자들은 협상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는 임금인상과 그로 인한 이윤압박을 낳았으며, 강력한 노조들은 고용주들이 돈벌이와 투자를 제멋대로 운영하는 자유에 도전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미국이 관장한 상대적으로 질서 있던 국제경제 시스템은 유럽과 일본이 미국과의 생산성 격차를 따라잡으면서 해체되고 있었다. 이는 각국의 다종다기한 임금-이윤 압박과 결부되면서 고정환율체제의 해체를 낳았다. 1970년대 초에는 식량과 원자재 수요가 치솟고 투기까지 겹치자, 식량과 원자재의 가격상승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더욱 가중되었다. 1973년 말에는 OPEC 산유국들의 주도로 석유가격이 4배 뛰면서 더욱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기엔 또한 일부 구식민지 국가들이 자기 목소리를 더욱 뚜렷이 내기 시작한 것도 반영되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때부터 몇 년이 지나고 난 뒤 깨닫게 된 것이긴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생산성 증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생산성 증가야말로 삶의 질을 높이고 공공서비스를 개선하는 근본적인 원천이라는 점에서, 경기팽창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은 곧 총생산을 둘러싼 분배갈등이 악화될 것임을 뜻했다.

이렇게 겉보기에는 각기 상관없을 듯한 문제들의 공통적인 테마는 바로 황금시대의 성공 그 자체야말로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뜨린 게 아니냐는 인식이었다. 황금시대의 완전고용과 그것에서 비롯된 노동의 세력 강화, 에너지와 다른 원자재에 대한 높은 수요는 실제 가능한 공급량에 대한 큰 압박이었고, 유럽과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으면서 국제경제 관계는 파열되고 있었다. 기존 기술의 잠재력이 고갈되면서 생산성 증가는 활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소련과 여타 계획경제 국가들이 여전히 심각한 경제적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지만 계속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는 다른 대안적인 경제발전의 경로가 가능할 것이라는 바람이 남아있었다. 비록 계획경제가 개발도상국들의 발전 모델로서 특히 중요했긴 하지만, 계획경제가 어쨌든 생존해 나가는 현실에서 선진국의 노동운동이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급진적으로 제한하려고 제안하는 여러 가지 정책은 더욱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1970년대에 일어난 이런 혼란의 여러 측면을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로 널리 불리는 이런 사태의 기원과 속성에 대해서는 치열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많은 논자들은 아래에서 다루는 여러 요인에 대해 각기 다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나는 아래에서 P. ArmstrongA. Glyn , 그리고 J. Harrison1991년에 함께 쓴 1945년 이래 자본주의에서 했던 것처럼 수익성과 자본-임노동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자 한다.

 

 

조직된 노동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장기 호황 동안 선진국 경제에서 가장 두르러진 고용 추세는 농업부문 고용의 감소와 그에 따른 제조업서비스 부문 임노동자 수의 증가였다. OECD 나라들에서 총고용량 가운데 농업부문 고용은 1950년의 25%에서 1973년에는 9%로 떨어졌으며, 자영업자의 비중은 소농들이 도시로 이동함에 따라 1954년의 31%에서 197317%로 줄어들었다.

유럽에서 농업부문의 이런 쇠퇴가 일본만큼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농업 종사자가 적었던 미국보다는 훨씬 더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전반적인 경제활동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농업에서 이런 탈출로 말미암아 제조업서비스 부문의 가용 노동력은 늘어났다. 서비스부문의 고용은 제조업에서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났다. 이는 서비스부문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었다. 경제활동인구(15~64) 가운데 남성 취업률은, 교육과정을 밟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정년까지 근무하는 이들이 줄어들면서 떨어졌다. 그러나 이런 비경제활동인구의 증가가 남성을 위한 일자리가 전반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남성의 실업률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인구 가운데 제조업에서 일자리를 구한 비율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1950년과 1973년에 도시 여성의 14%가 제조업에서 일한 반면, 도시 남성의 경우 1950년에는 52%, 그리고 1973년에는 44%가 제조업에서 일했다.) 그러나 많은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서비스부문의 일자리로 옮겨감에 따라, 유럽에서 도시 여성의 취업은 남성에 견주어 볼 때 거의 두 배나 빠르게 늘어났다.

이민자의 순유입(net inward migration)이 컸지만, 노동시장에서 노동자가 매우 부족하게 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까지 이민 때문에 선진국 총인구의 증가폭은 매년 0.1%, 경제활동인구 총 증가폭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유럽에서 이민자들의 순유입은 추가 노동인력의 원천으로서는 농업부문에서 생긴 인구 유출에 비해 1/5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적인 제조업서비스 부문의 일자리가 늘어난 배경에는 자본의 급속한 축적이라는 주요 동력이 있었다. 기업가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까지 연평균 약 5%씩 설비투자를 늘렸다. 따라서 노동자 1인당 자본량이 크게 늘어났지만 신규 공장과 사무실에서 여전히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도시 인구의 급격한 팽창과 더불어 노동조합 운동은 강해지고 노조의 교섭력에 우호적인 입법운동이 활성화되었다. <1-1>은 이와 관련한 여러 지표를 보여준다. 노조가입률도 OECD 나라들에서 전반적으로 늘어났다. 그 증가 속도는 완만했다. 이는 서비스부문의 고용이 확대되면서 서비스노동자가 상대적으로 제조업 노동자보다는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비율이 낮았기 때문이다 (점점 늘어나던 공공부문 노동자는 이 점에서 예외지만). 그러나 낮은 실업률이 꽤 오래 지속되면서, 노동조합 조직은 강력해졌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실업수당 수준이 임금에 견주어 볼 때 꽤 올랐으며, 실업수당을 받는데 필요한 자격 요건도 더욱 완화되었다. 실업을 당할 가능성뿐 아니라, 당사자들이 겪는 경제적 괴로움도 누그러져, 재취업 일자리들이 제안되는 대로 처우를 가리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압박도 줄어들었다. 정리해고를 비롯해 고용해고에 대한 고용주들의 특권을 일반적으로 제한하는 고용보호법(Employment Protection Legislation, EPL) 또한 OECD 지수(index)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시기에 확대되었다. 노동자가 얻어낸 중요한 성과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평균 노동시간의 감축이었다. 1950년 연 2,000시간 노동은 19731,750시간으로 줄었다. 이는 1주 당 반나절 이상의 노동을 감축한 것과 맞먹었다.

 

<1-1> 노동시장의 변화: 1960-1979

OECD 19개국 평균

노조가입률

고용보호법 지수

평균임금 대비 실업수당 비율

실업률(%)

1960-4

38.8

0.79

28.0

2.1

1965-9

39.1

0.85

31.0

2.1

1970-4

41.4

0.99

34.6

2.5

1975-9

44.8

1.09

43.2

4.3

자료: Baker et al.(2005).

 

 

노동 측의 세력이 강해지고, 노동자의 요구에 맞선 고용주의 저항이 드세졌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로 엄청나게 높아진 수준의 노사 갈등이었다. 노동 측의 전투성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1960년대 후반 파업의 물결이었다. 학생들의 데모를 강경 진압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촉발되어 노동자가 공장을 점거했던 19685~6월 프랑스에서 파업손실일수는 모두 15천만 일(days)이었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산업과 공장을 관리하자는 노동자의 급진적 요구를 협상력으로 이용했다. 그 결과 임금이 10% 올랐고 최저임금도 올랐으며 노동조합의 권리가 약간 늘어났다. 1969년 이탈리아에서는 공장의 작업 현장(shop floor)에서 시작된 잇따른 파업의 물결로 6천만 날 동안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 역시 10% 임금 인상, 노동시간의 단축, 블루화이트칼라 구별 없는 동등한 의료 혜택, 그리고 마침내는 공장 단위에서 노조 권리의 큰 확대로 귀결되었다. 영국에서는 전국적인 소득정책이 무너지고 나서 1970/71년 거의 2,500만 날을 파업으로 잃었다. 대체로 평화로운 독일의 노사관계마저도 비공식적인 파업으로 몸살을 앓았으며, 미국은 1970OECD 가입국들 가운데 노동자 1인당 파업일수로는 일등을 달렸다 (1954,1955,1959,1960,1967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1-1>OECD 나라들에서 일어난 파업의 더 장기적인 추세연간 변동 폭은 5개년 이동평균법을 이용해 매끄럽게 조정했다를 보여준다. 파업은 제조업부문 노동자 1,000명 당 파업일수로 측정했다. 파업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점점 늘어나다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1990년대는 겉으로 드러난 노사갈등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황금시대에 비하더라도 무척 평온해 보인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명목임금률(rate of money wage)은 이러한 거대한 파업 투쟁이 벌어지고 나서 2배 가까이 상승했고, 실질임금도 계속 상승해 OECD 나라들에서 1970년대 초에는 연 4% 이상의 상승세를 보였다 (<그림 1-2>를 참조). 명목임금의 급격한 상승은 1960년대 후반에 인플레이션이 증가하는 경향에 이바지했다. 인플레이션은 1970년대 초반 석유와 제1차 산품[농산물과 광산물: 역자 주]의 가격 상승에 따라 더욱 크게 증가했다 (이하 참조). 이 시기 인플레이션이 연 12%에 달했으니 월급봉투의 실질 가치는 매달 1%씩 떨어진 셈이다. 이것은 누구나 곧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사회 갈등이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인플레이션이 증가하자 실질임금의 증가율은 억제되었는데 이는 특히 1970년대 말에 그랬다.

 

<그림 1-1> 파업: 제조업 노동자 1,000명당 파업일수, 1953-2003

 

자료: 통계청(Office of National Statistics)

 

<그림 1-2> 인플레이션과 실질임금 증가율, 1963-2003

인플레이션(연간 %)

실질임금(연간 %, 5개년 이동평균)

 

자료: IMF

 

 

임금인상도 수익성을 압박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제조업부문의 총이윤 몫(gross profit share), 1960년대 후반까지는 꽤 안정된 추세를 보이더니 그 다음 10년 동안에는 1/4 넘게 하락했다(<그림1-3>을 보라). 총이윤은 투하자본의 감가상각을 빼기 전 수치로 계산한 값이다. 부가가치의 일부인 감가상각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는 자본 스톡의 상당 부분이 기계류로 이들이 공장 건물보다 더 빠르게 감가되는 탓에 일부 기인한다. 따라서 순이윤율의 하락은 총이윤율의 하락보다 훨씬 더 컸다. 더군다나 고용주들은 산출량 대비 이윤율이 아니라 자본지출액 대비 이윤율에 훨씬 더 신경을 썼다. 이들 자본지출액은 산출량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조업부문에서 자본지출액 대비 순이윤율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거의 1/2로 저하했다. 이 시기의 이윤압박은 분명 전투적인 임금인상 압력과, 가격 인상을 제한하는 국제경쟁을 반영한 것이었다. 수입원자재 비용의 상승과 생산성 증가율의 둔화(이하를 보라)는 분배투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그림 1-3> 제조업 부가가치 중 총이윤몫, 1960-2000

 

자료: OECD.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노사 갈등과 분배 갈등이 안겨주었던 놀라움을 30여 년이 지난 지금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영국에서 두 번째 광부 파업이 성공적으로 끝나 1974년 초 보수당 정권이 실각하자, ?더 타임즈(The Times)?(197485일자)에는 영국은 이제 군부 쿠데타를 기다리는가.” 라는 제목으로 이전 노동당 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챌폰 경(Lord Chalfont)의 기고가 실렸다. 챌폰은 그 글에서 거대한 노동조합의 강력한 힘과 이따금 무자비한 행동을 지적하며, “거대기업들은 노조의 쟁의행위와 전반적인 국유화를 합동으로 막아내는 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적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1974816) 그 당시 ?더 타임즈?의 국방 담당기자가 영국군대를 거리로 나오게 하는 데는 쿠데타까지는 필요 없을 듯이라는 제목으로 회답했다. 이 기자는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예상했다. 매년 20%의 인플레이션은 곧 모든 국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수반하는 안정화 정책이 불가피한 지점까지 우리를 몰고 갈 것이고, 또는 이런 안정화 정책이 없다하더라도 물가가 오르고 상품을 구할 수 없게 되면 거대한 혼란이 일어나 전통적인 경제적사회적 삶이 송두리째 파괴될 것이다.” 물론 이런 시나리오가 아직까진 전혀 터무니없는”(강조는 기자의 것)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그 기자는 파업을 진압하려고 군대가 동원됨으로써 정상적인 법에 의한 행정이 이루어질 수 없고 군부 사령관이 하나뿐인 공권력의 행사자가 되는 사태로 악화하는 시나리오까지 논의했다.

 

 

국제경제의 혼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미국은 OECD 나라들 가운데 경제적정치적 지도력에서 경쟁할 상대가 없었다. 1950년이면 전후 재건이 대부분 이루어졌을 시기인데도, 미국은 상위 7개 자본주의 나라들[이른바 G-7: 역자 주]의 총생산 가운데 약 60%를 생산했고, 미국 제조업은 종업원 1인당 생산성에서 영국의 2, 독일의 3, 일본의 9배에 달했다. 미국 경제력은 달러를 국제금융제도의 중심에 올려놓았고. 다른 나라들은 자국 통화 가치를 1949년의 평가절하 뒤 달러에 고정시켰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장기호황은 미국보다는 일본과 유럽에서 더 활기찼다. 상대적으로 값싼 노동인력이 풍부하게 공급되고 미국에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발전한 신기술과 경영기법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일본의 제조업은 자본스톡을 더 빨리 증가시킴으로써 생산성 격차를 점점 줄였고, 임금 수준이 낮아 그들의 수출 상품은 높은 경쟁력을 유지했다.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제조업부문에서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일본의 경우 연 10.3%, 독일은 연 6.7% 상승했으며, 이는 미국의 연 2.3%에 대비되는 수치였다. 비록 명목임금(과 실질임금)이 미국에서 더 느리게 증가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미국의 수출 경쟁력이 지탱될 수 없었다. 세계 공산품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950년에서 1970년까지 절반으로 줄었으며(33%에서 16%), 중공업에서 미국을 능가했던 일본철강을 포함한 기초금속부문에서 1980년 일본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이 미국에 비해 60% 더 높았다은 대량생산 제조업부문에서 세계 1위의 자리로 돌진하고 있었다. 전기기계기구 공업에서 일본의 생산성은 1980년 미국을 추월했다. 미국의 무역수지는 1960년대 말 적자로 돌아섰다. 이것은 미국 기업들이 생산 활동을 해외주로 다른 OECD 나라들로 확대함으로써 직접투자의 거대한 유출로 생긴 달러 가치의 약화를 더욱 진전시켰다.

OECD 나라들의 국제경제 관계를 해체시키는 데 영향을 미친 두 번째 요소는 OECD 이외의 나라들로부터 수입해야 했던 원자재식량에너지 가격의 상승이었다. <그림 1-4>는 석유와 비()에너지상품의 가격을 미국 국내 인플레이션으로 나눈 실질가격을 보여주고 있다. 1974년에는 특히 석유를 필두로 거의 모든 상품의 가격이 급등했다. 식량농산물원재료(면화 등)금속의 종합가격지수는 1974년 이후 줄곧 완만하게 하락했다. 반면 석유가격은 1974년 이후 미국의 인플레이션 수준과 비슷하게 상승하다가 1979/80년에는 거의 두 배 가까이 뛰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비해 거의 7배나 높은 가격이었다.

1973년 말 OPEC의 유가 인상은 중동의 정치적 사태 때문에 촉발되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원인은 석유 수요의 급속한 증가이었다. OECD 나라들의 에너지와 금속 소비는 모두 1960-1973년에 연 5-6%씩 증가했고, 이 기간의 빠른 가격 상승은 로마클럽의 큰 영향력을 미친 1972년 보고서 ?성장의 한계?(Limits to Growth)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 보고서는 세계가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으므로 기존의 성장 패턴이 지속될 수 없다는 주장을 유행시켰다. 리비아의 원유 생산량과 맞먹는 새 유전을 매년 발견하지 않고서는 석유의 고갈 시점이 머지않아 닥칠 거라는 주장이 일반화되었다.

 

<그림 1-4> 1차산품의 실질가격, 1952-2004

석유의 실질가격

()에너지상품의 실질가격

 

자료: IMF. 1974=1.

 

1차 산품특히 석유의 가격 상승은 1960년대 중반 이래 사라져가던 인플레이션 압력을 크게 반전시켰다. 노동자는 자신들의 실질임금 증가가 벽에 부딪혔음을 알아차렸지만(<그림1-2> 참조), 실질소득 감소라는 부담의 일부를 고용주에게 전가해 이윤 몫을 낮출 수 있었다(<그림1-3> 참조).

브레튼우즈에서 형성된 전후 국제통화체제는 다른 나라들이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에 빠지지 않는 한 달러와 다른 통화 사이의 환율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환율 변경의 재량권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환율 변경은 매우 드물었다(1958년과 1959년의 프랑스 프랑화의 평가절하, 1960년대 초 독일 마르크화와 스위스 프랑화의 작은 평가절상 등). 다소 놀랍게도, 각국은 평가절상이나 평가절하 둘 모두를 꺼려했다. 평가절하는 수입가격을 올리고 실질임금을 하락시키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에 더 큰 압력을 추가했다. 영국의 경우 1967년 평가절하를 해야만 했을 때, 이로 말미암아 국제준비금으로서 파운드화의 역할과 국제금융 중심지로서 런던 시티[the City. 뉴욕의 월스트리트처럼 국제금융의 중심지로 역할 하는 런던의 금융지역: 역자 주]의 위상마저 흔들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일었다. 비록 실제로는 런던 시티가 다른 통화들(특히 유로달러)을 거래하면서 파운드화의 평가절하에 적응해나갔지만 말이다. 그와 함께 국제수지 흑자를 누리는 나라들도 평가절상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평가절상 때 수익성이 악화되고 그 때문에 자국의 강력한 수출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율이 나라마다 차이가 나면서 고정환율체제가 흔들리는 경향을 보였다. 1960년대 인플레이션은 OECD 모든 나라들에서 상대적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달러에 대한 고정환율을 유지하려는 욕구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높은 나라들은 수요를 축소하고 경제를 긴축했다. 그런데 선진국들에서 임금의 폭발적 상승이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강도로 일어났고 1차산품의 가격 상승의 효과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1970년대에는 인플레이션 율이 나라마다 큰 차이가 났다. 1973~1979년에 OECD 나라들에서 인플레이션율의 분산도(degree of dispersion)3배 넘게 커졌다. <그림 1-5>는 이 분산의 보기로 1970년대에 반()인플레이션 기조를 확고히 한 독일과 OECD의 강국들 가운데 가장 높은 인플레이션을 보이고 있는 나라인 이탈리아를 견준 것이다. 1960년대에 두 나라의 인플레이션 율은 국제통제체제의 중심국이었던 미국과 견주어 볼 때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명목물가수준은 인플레이션이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미국보다 점점 더 올라갔고, 독일의 물가수준은 낮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미국보다 꾸준히 낮아졌다.

나라들 사이에 생산성 증가와 인플레이션 율이 달랐기 때문에 고정환율체제를 무너뜨리는 국제수지 불균형이 지속되었다. 평가절하는 이런 인플레이션율의 격차를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또한 그 차이를 계속 유지시키고 심지어 확대하기까지 했다. <그림 1-6>은 독일의 마르크화와 이탈리아의 리라화의 가치가 달러에 대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마르크화의 가치는 크게 올랐고 리라화의 가치는 떨어졌다. 이것은 미국에 견주어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상대적으로 낮았고 이탈리아의 인플레이션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림 1-5> 미국과 비교한 독일이탈리아의 소비자 물가, 1960-2003

독일/미국

이탈리아/미국

 

자료: IMF. 1973=1

 

 

<그림 1-6> 독일 마르크화와 이탈리아 리라화의 대 달러 환율, 1950-1980

마르크화

리라화

 

자료: IMF. 1970=1

 

 

이탈리아독일미국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인플레이션과 환율이 대체로 서로를 상쇄시키는 운동을 한다고 해서, 변동환율제를 통해 국제 경쟁력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을 힘들이지 않고 풀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OECD 나라들의 평균 실질환율은 1970년대 연 평균 6% 등락했는데, 이는 1960년대 변동 폭의 두 배에 해당했다. 1970년대 명목환율의 변동은 1960년대처럼 매우 드문 일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플레이션 율 차이에서 비롯된 여러 효과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각국의 교역재(traded goods) 부문에서 경쟁력이 해마다 크게 변동하자, 좀 더 장기적인 투자가 제조업 부문에 이루어지는 것을 막았다.

 

생산성 증가의 둔화

 

1970년대 초 일어난 생산성 증가율의 하락은 당시에는 널리 인지되지 않았다. 예컨대 OECD 나라들이 그때 정세분석을 위해 전문가를 동원해 만든 맥크라켄 보고서(McCracken Report)“OECD 나라들에서 잠재적 경제성장이 향후 5~10년 동안 1960년대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것에 장애가 될 만한 공급 측면의 문제점은 전혀 없어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OECD 1977:16). 1974/75년에 경기침체 때문에 일어난 불황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은 1975~1980년에 총생산이 연 5.5% 가량 증가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경기둔화는 지속적인 것으로 판명되었고, 경기둔화는 1970년대의 혼란과 그 뒤의 안정화 형태에 크게 이바지했다.

생산성의 가장 기본적인 지표는 노동시간당 생산량이다(<그림 1-7> 참조). 미국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973년 이후 반 토막이 되었고, 신경제 벼락경기(new economy boom)가 생산성 회복을 촉발한 1990년까지이에 대해서는 6장에서 다룰 것이다줄곧 매우 낮았다. 1960년대에 미국보다 훨씬 빨랐던 유럽과 일본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973년이 지나고 나서 거의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1980년대에 다시 떨어졌다.

생산성 증가가 둔화된 데에는 낮은 투자율이 한 몫 했다. 1973년과 1990년 사이 자본스톡 증가율은 유럽과 일본에서 1960~1973년에 비해 1/3 넘게 떨어졌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미국 기업의 자본축적은 하향 추세를 걸었다(<그림 6-3 참조>). 축적의 저하는 수익성 하락과 인플레이션 상승, 그리고 다른 경제 불안정 지표들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자본 증가율의 둔화가 노동생산성에 미친 효과를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미국을 사례로 자세히 추계한 한 연구에 따르면, 노동생산성 증가율 둔화의 절반 정도가 자본스톡 증가율 둔화에 의해 설명된다. 그러나 다른 요인들 또한 분명 개입되었을 것이다.

 

<그림 1-7> 노동생산성의 증가율, 경제 전체, 1960-2004

 

자료: Groningen Growth and Development Centre.

 

유럽과 일본에서 생산성 증가율이 낮아진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 두 나라가 미국의 생산성수준을 따라잡아야할 거리가 이미 줄어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호황 동안 미국에서 먼저 발달한 기술이 급속히 유럽과 일본의 기업들로 이전되면서, 일본과 독일은 미국의 생산성 우위를 좁힐 수 있었다. 이것은 선두주자(미국)의 성장률에 후발주자들[일본과 독일: 역자 주]의 성장률이 점차적으로 수렴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1973년이 지나고 나서 일본과 독일의 생산성 증가율이 급격히 둔화되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더구나 캐치업(catch-up.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잡기: 역자 주) 이론은, 여전히 대부분의 분야에서 생산성의 선두주자인 미국의 노동생산성의 급격한 저하를 설명할 수 없다.

생산성 증가율의 둔화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설명은, 선두주자인 미국에 특히 적용되는 것으로, ‘포디즘(Fordism)’으로 불리는 대량생산체제(노동자가 되풀이 된 작업을 수행하는 조립라인생산)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추가적인 투자로 얻을 수 있는 생산성 성과가 줄어들면서 투자 의욕이 점차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이런 한계의 한 측면은, 협상력이 강해진 노동자가 작업 속도를 제한할 수 있게 되면서 공장의 규율이 무너진 것이었다. 자동차산업에서 꽤 광범위하게 일어난 생산성 둔화는 이런 문제들의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효과들은 생산성 증가율이 다소 완만하게 떨어지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진 몰라도 당시 발생했던 생산성의 급격한 하락을 설명하진 못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조립라인 산업에서만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1973년 이후 시절을 특징짓는 것은 다름 아닌 수요 증가율의 하락이었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거시경제적 불확실성의 결과였다. 소비자와 기업은 소비와 투자에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고, 유가를 비롯한 제반 물가가 오른 탓에 실질소득은 줄어들었으며, 이자율이 인플레이션 율만큼 높지는 않았어도 명목이자율로서는 너무 높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고용률이 높아서 아직도 노동조합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기업들이 생산성을 급속히 증가시키는 데 필요한 규모로 생산을 합리화하고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어려웠다. 미국의 경우 그런대로 믿을만한 통계적 추계가 가능한 모든 산업부문들에서 생산성 증가율 둔화의 2/31970년대 에너지 가격 쇼크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문인 파이프라인, 원유 추출, 공익사업, 자동차, 항공 부문들에서 일어났다. 생산성 증가율이 가장 크게 떨어진 이들 산업은 1973년 이후 20년 동안 산출량 증가율에서 연 5% 가량의 저하를 경험했다. 이것은 평균 저하율의 4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건대 생산성 증가율의 둔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규모의 경제를 누리던 산업들에서 산출량 증가율이 저하했기 때문이다”(Nordhaus 2004:14).

 

 

대안 체제?

 

노동인력이 부족한 노동시장, 노동조합의 전투성, 1차산품의 가격 상승, 인플레이션, 이윤압박, 그리고 심하게는 생산성 증가율의 둔화와 국제금융체제의 불안정성까지도 강력한 자본축적의 활기 넘치는 모습의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확실히 이런 상황은 일정 기간의 금융적 규율과 수요 억제 뒤에는 진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또한 자본주의체제 자체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도전의 전조가 되고 심하게는 이 도전을 오히려 자극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소련의 존재와 동유럽중국의 계획경제들은, 신생독립국들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과 더불어, 시장의 강제(market forces)와 사적 소유에 지배되는 경제체제의 대안(alternative)을 제시했다. 비록 공산주의체제의 비민주적인 성격을 OECD 나라들의 신좌파(New Left) 대부분이 심하게 비판하긴 했지만, 공산주의체제의 존재는 공공 소유와 중앙집중적 계획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구 1인당 성장률은 1960~1973년에 소련에서는 연 3.4%로써, 유럽의 연 4.4%와 미국의 연 3.0%에 비해 꽤 나은 편이었다. 하물며 경제활동의 우선순위를 민주적으로 정하고 노동자가 적극적으로 기업 활동에 참여한다면, 이 계획경제[자본주의체제를 위와 같이 개혁한 계획경제를 가리킨다: 역자 주]가 왜 (현실의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현실의 사회주의보다 더 잘 작동하지 못하겠는가?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 1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다소 공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1970년대에 그리고 1980년대까지도 소련경제 전문가들은 서방 자본주의와 견주어 소련경제를 부정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소련 경제에 관한 영국의 최고 권위자인 알렉 노브(Alec Nove)1977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서방의 선진국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로 인해 뒤흔들렸다. 소련식 경제는 점점 더 불안정한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보였다. 우리의 경제는 쇠퇴하거나 무너질 위험에 놓여있는 반면, 그들의 중앙집중화된 경제가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비록 낮은 성장률이긴 해도 계속 성장한다면, 이는 소련의 계획체제가 갖는 중요한 이점으로 숱한 미시적인 비합리성들을 상쇄시키는 셈이다(Nove 1977:8).

 

 

거의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미국에서 손꼽히는 교과서인 Soviet Economic Performance and Structure (1986)[역주: 이 책의 제4(1990)?러시아·소련·독립국가연합경제의 구조와 전망?(1992. 열린책들)으로 국역되었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소련의 경제적 성과에는 미진한 점들이 많지만, 문제의 핵심은 소련의 소비자들이 생활수준이 조금만 나아져도 만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련의 소비자들도 서방세계의 소비자들과 마찬가지로 불평하지만, 나아지는 것이 분명 있으며 대다수 인민들이 자신들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매우 좋아하고 있을 때, 이런 소비자들의 불평이 어떻게 의미 있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겠는가? (Gregory and Stuart 1986:430).

 

 

위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는 소련 지도층이 꽤 암담한 경제 전망에도 낙관하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방 세계는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1980년대에 들어가고 있다. 생산성 증가가 문제이고, 높은 인플레이션율이 높은 실업률과 공존하며, 실질임금이 실제 몇몇 나라들에서 떨어지고 있다”(위의 책: 432).

선진국들 자체 안에서도 자유 시장 자본주의에서 슬며시 멀어지게 하는 하나의 추세가 있었다. 그것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정부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의 증가다. GDP 대비 총 정부지출의 비율은 1950년대에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것은 군비지출의 감소가 비()군비지출(civil expenditure)의 약간의 증가를 상쇄했기 때문이다(<그림 1-8> 참조). 1960년대에 정부지출/GDP 비율은 4% 포인트 가량 늘어나 1970년에는 31%에 달했고 1974년에는 1/3을 넘어섰다. 그 뒤의 혼란의 기간에 정부지출의 비율이 비틀거리면서 상승해 1980년에는 40%에 이르렀는데, 이 때 의욕적인 정부지출 프로그램들은 GDP 증가율의 둔화와 충돌했다. 유럽에서는 이 비율이 제법 높아(45% 이상), 사회민주주의 체제인 스웨덴이 59.8%로 제일 높았고, 네덜란드가 그에 육박했다.

 

<그림 1-8> OECD 정부지출 규모, 1952-2003

 

자료: OECD.

 

총 정부지출에는 정부가 구매력을 재분배하는 것(세금을 거두어 연금실업수당 등을 지급하는 것)이 상당부분 포함되는데, 이런 범주의 정부지출은 (예컨대 연금수령자가 구매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을 민간부문의 손아귀에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국가가 교사의사사회복지사(social worker) 등을 고용해 서비스를 생산하는 복지국가 프로그램도 급속히 성장했다. 정부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고용주에게 이윤을 벌어다주기 위해 생산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수많은 나라들에서 총 취업자의 약 1/5을 차지했다. 이리하여 정부부문 취업자의 증가는 경제의 이윤추구 부문이 축소되는 것을 뜻했다. 또한 정부지출을 충당하는데 쓰이는 세금의 대부분은 민간부문의 이윤과 임금에 부과되어야 했고 이것은 분배투쟁을 악화시켰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세금 증가를 상쇄하고자 임금 인상을 추구했고, 고용주들은 임금 인상에 맞서 이윤 마진을 유지하려고 가격 인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정부지출이 겉보기에도 엄연히 오르는 가운데, 노동운동 진영은 자본 자체의 고유한 영역, 즉 사적 기업에서 자본의 특권을 제한하는 계획들을 제출했다. 일자리와 근로조건과 같은 관례적인 단체협약의 대상을 훨씬 뛰어넘는 다양한 계획들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등장했다. 이런 계획들이 어떤 내용을 가졌는가를 알리려고 독일의 공동결정제(co-determination), 스웨덴의 임노동자기금(wage-earner funds), 영국노동당의 계획협약(planning agreements) 구상, 그리고 1980년대 초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광범위한 국유화 계획들을 간략하게 논의해보자.

독일에서 노동자는 1950년대 초에 공동결정제를 얻어냈다. 이것은 종업원과 주주가 철강기업의 이사회에 같은 수의 대표를 보내는 것이다. 노동자는 다른 기업에서는 좀 더 작은 대표권을 얻었지만, 인사문제를 다루는 노동자 이사를 임명할 권리를 보유했다. 1970년대에는 공동결정권을 확대하려는 강한 압력이 있었다. 그에 따라 고용계약과 직업훈련도 포괄하게 되었고, 1976년에는 노동자 대표의 비율이 대기업의 경우 1/3에서 1/2로 늘어났다(비록 주주가 임명한 의장이 의사결정권을 쥐긴 했지만). 이런 공동결정제의 확대에 대해 고용주들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강하게 반발했다. 독일 공동결정제가 경영자의 자유에 미친 영향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잘 알려진 미국 경제학자 아먼 엘치언(Armen Alchian)1984년에 행한 다음과 같은 논평은 주주 주권(shareholder sovereignty)의 옹호자들이 공동결정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 “이사회에서 공동결정을 주장하는 …… 운동은 주주들의 풍부한 특별한 자산을 통제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 ()를 몰수하려는 계획이다” (Gorton and Schmid 2000:1에서 인용).

공동결정제에 대한 우려는 그것이 경영자의 특권을 제한하고 그리하여 노동자에게 사회복지나 더 좋은 근로조건 등의 형태로 부가가치를 이전하게 될 잠재성 때문이었다. 1976년 스웨덴 노동조합이 제안한 임노동자기금은 이보다 잠재적으로 훨씬 더 급진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일정 규모(50명 또는 100명의 종업원) 이상의 기업들은 연간 이윤의 20%에 해당하는 신주(new stocks)를 반드시 발행해야 하며 …… 이 주식들은 임노동자 집단을 대표하는 기금이 소유해야 한다. …… 이런 개혁은 …… 또한 부()의 집중 경향을 저지할 것이고 산업민주주의를 위한 법률들을 보완할 것이다. …… 이 계획에서는 이윤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임노동자 집단에 의한 기업 소유가 그만큼 더 빨리 이루어질 것이다. 기업이 해마다 10%의 이윤율을 거둘 때 임노동자 집단이 이 기업의 주식 가운데 49%를 획득하는 데에는 35년이 걸릴 것으로 우리 위원회는 계산했다(Pontusoon 1987:13).

 

 

임노동자기금안을 기획한 위원회의 의장인 루돌프 마이드너(Rudolph Meidner)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자본가가 소유권에 따라 행사하는 권력을 박탈하고자 한다고 밝혔다(Pontusson 1987:14). 이 위원회는 또한 노동자의 소유가 기업들로 하여금 정부의 산업정책을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주식 소유로 받는 배당의 일부는 노동자들과 특히 노조 활동가들이 새로운 노동법을 활용하고 소유권자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행사하는 것을 지원하려고, 성인교육, 노동자 상담자 및 기타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사용될 것이다. 이리하여 소유권의 점진적인 이전은 노조운동의 구성원들 안에서 생기는 새로운 역량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Pontusson 1992:192).

이런 제안들이 그때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중요하다. 스웨덴의 잘 알려진 경제학자 에릭 룬트베르크(Erik Lundberg)1985Journal of Economic Literature에 실린 스웨덴 모델의 흥망(Rise and Fall of the Swedish Model)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임노동자기금은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의 실용주의 전통 이 전통은 이전에는 사회화나 중앙집중적 계획을 위한 급진적인 제안들을 일찌감치 폐기시켰다 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난 행보라고 주장했다. “지금 스웨덴 경제의 기능에 위기가 닥쳤으므로, 적어도 사민주의자들의 강력한 소수파에게는 사회주의적 목표들은 더욱 진지하며 이들 계획은 무척 호소력을 갖고 있다” (Lundberg 1985: 31). 그는 또한 지적하기를, “부르주아 정당들은 어떤 형태의 집단적 기금 제안도 받아들이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 이 반대파에는 민간 법인의 경영자 조직뿐 아니라 중소기업의 경영자 조직도 가세했다. 반대파의 적대감은 하늘을 찌른다”(위의 책: 31). 이들의 반대운동은 크게 성공해 임노동자기금의 매우 완화된 형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재계가 임노동자기금 기획에 크게 놀랐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 영국 노동당은 산업현대화를 지향하는 개입전략을 세웠다. 1973년의 당 대회에서 차기 노동당 정부가 제조업 생산량의 거의 1/3을 차지하는 제조업 최대 기업들의 20~25%를 강제로 국유화하는 계획이 통과되었다. 이 계획은 각 제조업 부문의 선도적이고 수익성 높은 기업을 인수해 이 기업에 신제품이나 새로운 공정을 도입하게 하고, 경쟁적인 압력을 통해 그 부문 안의 다른 기업들이 이를 따라하게 하는 것이었다. 다른 기업들은 자신들의 생산량투자고용에 관한 계획들을 정부의 전반적인 경제목표들과 일치하도록 세우는 계획협약을 맺도록 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노동당이 집권하기 이전에 희석되어, 실제 노동당이 집권하고 나서 주요 대기업이 국유화되지도 않았고 심각한 수준의 계획협약이 맺어지지도 않았다.

노동당의 계획은 민간부문의 국유화를 통해 얻는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세부계획이 미흡했을 뿐 아니라, 그 계획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지지와 결단력을 갖지도 못했다. 그러나 고용주들은 노동당의 구상을 심각한 위협으로 여겼다. 영국 경총(Confederation of British Industry)은 노동당 수상에게 산업부문에 국가개입을 더 늘리거나 추가로 국유화하는 방안에 대해선 타협이나 협상의 여지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파이낸셜 타임스, 1974916일자).

1976년 노동당 정부와 IMF와의 구제금융 협상 도중, 토니 벤(Tony Benn)이 주도하는 노동당의 좌파는 내각에서 정부지출 삭감과 디플레이션의 대안으로 수입 통제와 기타 조치를 취할 것을 밀어붙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좌파는 경제팽창을 이어가는 것과, “부와 권력의 균형을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 편으로 근본적으로 그리고 되돌릴 수 없게 옮기자는 선거강령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바랐던 것이다.

영국에서 노동당 정부가 실각한 지 2년 뒤인 1981년에 프랑스에는 미테랑(Mitterrand)이 이끄는 사회당 정부가 등장했다. 사회당 정부는 전기화학 산업의 5개 주요 집단, 2대 철강집단, 39개 은행(은행의 공적 소유 비율을 90%로 증가시킨다)과 여타 많은 산업의 주요 기업 하나씩을 인수함으로써, 전체 산업 노동자 수에서 국유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을 11%에서 22%로 두 배 늘리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계획은 이들 국유화된 기업들로 하여금 산업현대화에 앞장서게 하는데, 이를 위해 경영진과 정부 사이에 5개년 계획합의(plan contract)’를 맺는 것이었다.

국유화가 민간 자본가를 위협한 정도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5개 기업집단의 주주들은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의 표현을 빌리면 너무나 후한”(1982524일자) 보상금을 받았다. 미테랑은 오직 조금만 더 혼합경제가 되길”(파이낸셜 타임스, 1981103일자) 바랄 뿐이라며 재계를 안심시켰다. 계획부 장관은 시장이 모든 것을 포괄하며 대체할 수 없다”(파이낸셜 타임스, 1981722일자)는 견해를 갖고 있음을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국유화 계획에는 민간 기업들이 프랑스 경제를 멋지게 현대화할 수 없으며 국가가 현대화과정을 힘 있게 끌고 나가야 한다는 믿음이 반영되어 있었다. 결국 대부분 손실을 내고 있었던 국유화된 기업들은 국가로부터 거액의 자본을 받았고 이를 통해 각각의 산업부문의 합리화 프로그램들을 실행했다. 그 덕분에 국유화된 기업들이 나중에 민간부문으로 쉽게 되돌아갈 수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2장을 보라).

 

 

도전들은 격퇴되었는가?

 

다른 아무런 일들이 없다면, 주가 수준은 산업가금융가투자매니저들의 낙관적 전망의 정도를 보여주는 좋은 지표다. 주가는 이윤 획득의 전망,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생존 전망까지도 반영한다.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운명을 견주어보는 확실한 방법은 주가가 노동자 임금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림 1-9>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1970년대 중반에 평균임금 대비 주가의 비율은 황금시대가 한참 진행되던 1960년대 초의 최고수준에서 약 3/4 정도 떨어졌다. 이 하락폭은 유럽에서 가장 컸다. 1970년대 후반에 이 하락폭은 약 5/6에 이르렀다. 일본이나 미국에서조차 하락폭은 약 1/2에 달했다.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은 앞서 논의한 모든 것, 이를테면 노사갈등이 불러온 불확실성, 인플레이션율의 증가, 이윤압박, 생산성 증가의 둔화, 국제경제의 혼란, 노사갈등, 그리고 국가가 산업에 더 깊이 개입하겠다는 위협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림 1-9> 평균임금 대비 주가의 비율, 1950-2002

 

 

자료: IMF. 2000=1.

 

그러나 2000년까지는 계속 떨어지던 주가가 이전의 하락폭을 거의 만회했고(<그림 1-9>), 파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만큼 줄어들었으며(<그림 1-1>), 급상승하던 인플레이션은 억제되고 실질임금은 위협적이지 않을 만큼 약간 올랐을 뿐이었으며(<그림 1-2>), 이윤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그림1-3>). 1차 산품과 석유의 가격은 1960년대보다 크게 높다고는 할 수 없는 실질수준으로 떨어졌으며(<그림 1-4>), 달러는 강세를 보이고 유로화 사용 지역(Eurozone)이 생겨나면서 환율이 안정된 지역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정부지출의 증가는 멈췄다(<그림 1-8>). 소련은 국가 소유와 중앙집중적 계획에 따른 자신의 경제체제와 더불어 붕괴하고, 사적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급진적인 조치들은 폐기되었다. 이어질 장들에서 자세히 논의할 새로운 위협들이 나타날 것이지만, 1970년대의 도전들은 결정적으로 격퇴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4개의 장에서는 이처럼 자본주의의 힘과 안정이 결정적으로 회복되는 데 핵심적인 요소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필 것이다. 2장에서는 정부정책의 극적인 전환을 조명하고, 이어서 금융부문의 힘이 커지고 기업 운영에서 주주의 이익이 지배하게 된 것을 분석할 것이다. 정부개입에서부터 후퇴해 시장의 강제에 다시금 의존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적인 작동을 재천명하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이토 마코토(Itoh Makoto)의 생생한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는 역사의 필름을 뒤로 돌리며 상영하는 듯하다.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추세를 녹여 없애고’, 그 이전의 자유주의 단계로 돌아가고 있다.”(Itoh 1990:14).

 

 

옮긴이: 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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