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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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7월호

(그림) 총파업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49

 

파업이란 무엇인가.

 

파업은 정확히 말하면 파업행위(strike action)이다. 우리는 파업행위를 간단히 파업으로 부른다. 파업행위는 노동자가 작업을 대대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생기는 작업 중단이다. 산업혁명 이래 파업은 중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 대규모 노동이 공장과 광산에서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나라에서 파업은 불법이었지만, 대부분 서구 국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파업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합법화시켰다.

파업은 때때로 정책을 바꾸도록 정부에 압력을 넣는데 쓰이기도 한다. 파업은 특정 정당의 지배를 불안정하게 한다. 가장 잘 알려진 보기는 레흐 바원사가 이끈 그단스크 파업이다. 이 파업은 폴란드에서 정치적 변화를 목적으로 한 투쟁에서 의미 있는 것이었고 동유럽 공산주의 정부가 무너지는데 이바지했다.

총파업(General Strike)이란 무엇인가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산업 전반에 걸쳐 노동자들이 계획적으로 조업을 중단하는 것.

한 산업체에서만 일어나는 파업은 엄밀히 말해서 총파업이라고 할 수 없다. 총파업은 영국에서 노동조합이 발전함에 따라 단체교섭 전략의 일부로서 이용되기 시작했다. 1820~1830년대에 급진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의회를 개혁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하려는 수단으로 조업의 전면적 중단이라는 개념을 옹호했다. 보통 선거권을 비롯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 확보운동을 벌이던 차티스트(Chartist)들은 1842년 랭커셔에서 일어난 파업을 총파업으로 확대시키려고 애썼다. 이들은 이웃 지역까지 조업중단을 확산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정부의 무력행사 앞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차티스트 운동이 실패한 뒤 영국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총파업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총파업을 사회개혁 수단으로 보는 이론은 주로 프랑스에서 전개되었다. 이 문제는 1866년 국제노동자협회 제네바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1893, 1902년 벨기에에서 성년 남자의 보통선거권 문제를 놓고 큰 파업이 2차례 일어났다. 1902년 스웨덴에서도 그와 비슷한 문제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뒤이어 1909년에는 이윤감소를 이유로 고용주들이 택한 임금동결정책에 맞서 당시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전체 노동자 가운데 거의 절반이 넘게 참가한 이 파업은 1개월 동안 계속되다가 수습되었다.

영국에서는 노동운동가 톰 맨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온 뒤 총파업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1911년 맨은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자 동맹을 결성했으며 1910, 1911, 1912년에 일어난 대부분의 대규모 파업에 관여했다. 1910~14년 산업별 노동조합주의 때문에 꽤 많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도로·철도·광산 노동조합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향상시키려고 삼자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1926년 영국에서는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꼽히는 총파업이 있었다. 파업은 석탄 산업에서 시작되어 철도·도로운송·철강 산업·건설업과 인쇄업으로 확산되었으며, 노동조합회의(TUC)가 광부들을 지지했다. 총파업은 9일 만에 끝났으나, 광부들이 거의 6개월 동안 파업을 계속했기 때문에 결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협상에 의한 타결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노동자는 단체협약의 불가침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원칙적으로는 총파업에 반대해왔다. 총파업은 이미 있는 협약을 전반적으로 파기할 수도 있고, 힘이 약한 노동조합은 고용주에게 보복당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역적인 총파업은 계속되었는데, 파업에 참가한 많은 노동조합의 전국 임원들은 이에 반대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노동조합은 독립운동세력과 연대하여 식민지배 기간에 정치적인 저항의 수단으로 총파업에 의존했다. 이들 나라는 산업규모가 작아 노동조합활동이 제한되어왔으나, 조직화된 노동조합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총파업은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줄곧 사용되었다.

 

 

 

 

 

1926: 영국 총파업(1926: British General Strike)

 

 

 

 

 

영국에 하나뿐인 총파업은 영국 지배계급을 그들의 권좌에서 끌어내려 놀라게 했고 집단적인 노동계급의 행동이 어떻게 사회를 바꾸어놓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또한 지배계급과 노동조합 지도자가 얼마나 싸우길 꺼려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비록 성가신 노동조합 관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926년 총파업은 1차 세계대전 이래 영국에서 잇달아 터진 계급투쟁의 절정이었다. 전쟁 동안 광부와 부두 노동자, 철도 노동자는 거의 150만 노동자를 단결시킨 삼자동맹(Triple Alliance)을 형성했다. 1919년에 노동조합과 정부의 책략은 파업을 총파업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았다. 1920년에 우리는 총파업을 새로운 러시아의 노동자 국가에 대한 영국의 공격을 중단하도록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1921년에 우리는 정부가 광산 매각을 발표하고 석탄 소유주가 임금삭감을 도입하고 나서 일어난 또 다른 대결을 보았다. 1921년에 우리는 군대가 광산에 파견되었고 검은 금요일로 알려진 사건에서 노동조합 지도부가 배반하는 것을 보았다. 동조 파업이 예고되었을 때 광부들을 떠나게 압력을 넣은 일과 나라 전체에 걸쳐 10~40% 가량 임금 삭감은 뒤집어졌다. 이것은 5년 뒤 훨씬 커다란 규모로 일어났던 사건과 무서울 정도로 비슷했다.

1925년에 토리당 수상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은 노동계급이 깊게 증오했던 적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임명했다. 그는 1921년에 일어난 광산 파업을 분쇄한 것으로 잘 알려졌다.

석탄 소유주는 임금삭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검은 금요일은 여전히 새로운 삼자동맹을 만들려 애썼던 광부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처참한 기억을 남겨 놓았다. 검은 금요일을 있게 한 파업은 노동조합회의(TUC: Trade Union Congress)의 지지를 받았다. 다른 노동조합은 전면적으로 노동자가 처칠이 계획한 새로운 예산안 때문에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분명해졌을 때 삼자 동맹에 결합하고 있었다. 커다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뚜렷했다. 볼드윈은 광산업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광산을 유지하려고 9개월 보조금을 도입했다. 지난날 이루어진 조사는 늘 국유화의 형식을 요구한 정부 또는 광산주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았다. 실제로 토리당은 보고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조사는 전면적으로 계급 전쟁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려는 책략이었다. 심지어 노동조합은 이 사실을 알았다. 전 공산당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였던 아서 제임스 쿡(Arthur James Cook)우리 노동조합은 가장 커다란 투쟁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이미 알려졌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에게 그러한 투쟁의 승리는 예견되었다. 그러나 노동자 측에서 중요한 장벽은 국가 또는 사장이라는 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조합 지도부의 동맹이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총파업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다. 전국과 시 노동자의 동맹(the General and Municipal Workers union)의 클리브네스(J. R. Clevnes)나는 자본가계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오직 하나의 계급은 우리 자신이다.”라고 뚜렷이 말했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타월을 막 던지려 하고 있었고(막 항복하려고 했고) 그동안 내내 자본가 계급은 그들의 글로브를 졸라매고 있었다. 로이드조지는 1919년에 비상 공급 및 수송 위원회를 만들었고 1921년에 검은 금요일을 위해 그것을 보강했다. 공급 유지 위원회(the Organisation for the Maintenance of Supplies: OMS)가 만들어져 비상 공급 및 수송 위원회에 결합했다. OMS는 무엇보다도 파시스트를 회원으로 포함한 우익 파업 파괴자였다.

영국 지배 계급이 영국 노동조합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싸움을 준비하고 있을 때 TUC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사장은 자신들의 요구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광부들이 51일에 직장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1926427일에 격돌이 시작되기 3일 전에 TUC 총회는 처음으로 열렸다. TUC는 이러한 갈등에서 벗어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수상에게 말할 것을 요청했다. 정부 관료에게 자비를 간청하면서 TUC는 투쟁을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조직했다.

51일에 백만 광부는 직장에서 쫓겨났고 TUC는 정부에게 대화의 압력을 넣으면서 논쟁을 접수했다. 오후 11시에 광부의 지도자들은 교섭에 나왔고 TUC가 협상했던 어리석은 배반행위를 거절했다. ‘타협이 이루어졌을 때, 국가는 우편 노동자가 비공식적인 파업에 오른 뒤 대화에서 손을 떼었다. 언제나처럼 TUC는 파업을 비난했다. 타협을 12-6으로 거절했던 광부 지도자들에게 타협이 강요되었다. 그러나 TUC 총회는 타협안을 이미 받아들였지만 이제 정부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TUC는 정부와 노동자 모두 기꺼이 싸우려고 한 가장 나쁜 악몽에 걸려 들었다.

비상상태가 선포되었다. 식량과 석탄과 가솔린이 비축되었다. 지역 시민 위원(regional civic commissioners)이 독재적인 권력을 받았고 이미 전보 전달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 전보는 52일에 전송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휴가가 취소되었고 증원 부대가 스코틀랜드, 사우스 웨일즈, 런던과 랭커셔로 파견되었다. 군함이 영국 전체를 에워쌌다. OMS는 자신의 공무를 정부로 넘겼다. 이제 4백만 노동자가 기꺼이 싸우려고 파업에 가담했다. 수송이 마비되자 런던은 확실히 불구가 되었다. 54일에 315개 지하철 가운데 15, 4,400대의 버스 가운데 300(주말에 이것은 40대로 줄어들었다), 2000대의 전차 가운데 9대만이 운영되었다. 파업 첫 날이 끝날 때, 건설, 인쇄, 부두, 철강, 금속, 중화학, 운송과 철도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섰다. 노동계급은 참으로 운전석에 있었다. 그 무엇도 노동자가 이동할 수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처칠은 파업에 대해 거짓 선전을 유포하고 지배계급의 선전을 퍼트리는 것을 하나뿐인 목적으로 지닌 브리티시 가제트(British Gazette)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응하여 TUC영국 노동자(the British Workers)신문을 만들어냈다. 이 신문의 목적은 노동계급을 파업 주위로 규합하고 운동의 전투성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했던 것은 주로 노동조합이 혁명을 조직하고 있다는 Gazette의 비난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파업에 연루된 수백만 남성과 여성 노동자를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TUC의 지미 토마스(Jimmy Thomas)513일에 만약에 파업이 몇몇 통제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면, 모든 제정신을 지닌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안다.……즉 두려움이 늘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을하원에서 동의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노동자는 매우 잘 조직되었다. 행동 위원회가 세워졌고 나라 전체에서 규모와 권위 모두 늘었다. 그들은 운송, 피켓팅, 오락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재정 지원을 조직했다. East Fife는 약 700명의 회원을 지녔고 국가 권력과 정규적인 충돌을 했던 노동자 방어군을 세웠다. 많은 지역에서 노동자들은 수준 높은 파업 게시판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TUC의 비난을 받았다.

도로와 운송과 분배에 대한 통제는 행동 위원회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결점은 전국적으로 통합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틀림없이 그들은 대안정부로 행동했고 투쟁을 광부의 임금을 둘러싼 수세적인 투쟁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세적인 투쟁으로 옮겼다. TUC와 공산당의 비활동에도 아랑곳없이 이러한 행동은 놀라운 일이었다. 러시아는 영국공산당에 그들의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단순했다. “이것은 혁명적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임금 투쟁이다.”

임금 투쟁! 총파업, 행동 위원회, 나라의 일부에서 이중권력. 그것은 광부의 임금을 둘러싸고 일어났을지도 모르지만 날마다 노동계급의 믿음이 증가하고 있었다. 회원들을 통제하려고 애쓴 TUC는 노동자들에게 확고히 서라. 지령에 충실하고 당신의 지도자를 믿어라!”는 것을 요구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그동안 내내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지배계급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을 때, 그들은 오직 하나의 선택, 즉 전면적인 항복을 알았다. 일터로 되돌아간 사람들처럼(더욱 많은 노동자가 날마다 파업하고 있을 때) 변명은 매각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다.

새로운 제안은 근본적인 노동조합의 초안을 해결하지도 못했다. 파업자들이 희생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보장도 없고, 또 다른 협상에 대한 보장도 없으며, 직장폐쇄를 끝낸다는 보장도 없다. 여하튼 파업이 점점 더 많은 신뢰를 받고 있던 때인 511일에 TUC는 파업을 철회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는 보장이 주어질 것을 요구했다. 약간의 보장! 파업 뒤에 3천명 이상이 기소되었고 임금은 삭감되었다. 노동계급은 배반당했고 사장들은 이익을 얻었다.

파업이 철회된 다음 날, 파업이 시작된 첫 날보다 더 많은 십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쫓겨났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줏대 없는 행동이 노동자들을 혼란시킨 커다란 실수였다. 파업이 철회되고 나서 노동자의 분위기는 전보다 훨씬 전투적이었고……모든 곳에서 지역의 열렬한 파업자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고용주에 대한 감정은 훨씬 더 냉혹했다. TUC총회에 대한 반감도 더 커졌다. 비록 파업이 끝났지만 혁명이 시작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주일 뒤 파업을 바란 노동자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한 채, 노동자들은 일터로 되돌아가는 것 말고는 앞으로 갈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지배계급은 파업을 막으려고 수백만 파운드를 쏟아 부었다. 노동자들이 독립된 일반조합원들의 조직으로 스스로 조직되었다면, 스페인의 노동자들이 10년 뒤에 했던 것처럼 똑같은 혁명적 전망을 지녔더라면, 결과는 아주 달랐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오늘날 급진적인 노동계급은 1926년의 총파업에서 아주 가치 있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옮긴이: 김민

1934년 미네아폴리스 파업(The 1934 Minneapolis Strike)

Carl Skoglund

 

 

 

미네아폴리스 이야기

 

화물운송산업에 고용된 운전사와 모든 노동자는 1934년 이전 미네아폴리스의 역사 전체에 걸쳐 지속되었던 비참한 삶의 조건을 견디며 살았다. 경제적 파산이 일어났을 때, 그런 비참함은 더욱 커졌다.

생산 시장 지역에서 새벽 2시나 3시에 일하기 시작해서 저녁 6시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운전사와 보조 노동자들에게 관행이었다. 그들은 낮은 임금을 받았고 때때로 추가 임금 없이 7일 동안 일을 해야만 했다. 만일 불평을 쏟아내면 그들은 곧 해고당할 것이다.

화물 노동자와 다른 산업 노동자는 1934년 이전에는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았고 고용주가 부과한 어떠한 조건이든 받아들여야만 했다. 많은 파업이 1922년과 1934년 사이에 있었지만, 모두 패배 당했다. 미네아폴리스는 나라 전체에 가장 악독한 파업파괴 도시로 알려졌다.

1920년대 초에 사장은 오픈숍(open-shop: 비조합원을 고용하는 사업장)으로 시작했다. 그들은 미네아폴리스를 노동조합 없는 도시로 유지할 목적으로 시민동맹(Citizen's Alliance)을 만들었다. 사장은 1934년까지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그들은 누구도 도시를 조합화하려는 운동을 결코 이끌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Local 574의 부의장이었던 V. R. Dunne, Miles Dunne, Grant Dunne, Harry DeBoer, George Frosig와 나는 같은 석탄 공장에서 일했다. 우리는 1933년 초에 석탄 산업을 조직하려는 계획을 토론하고 짜려고 회의를 열었다. 그러한 시도가 성공했다면 나머지 운송 산업에서도 조직화 작업을 계속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운송 산업이 파업파괴자들이 거리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파업파괴자들을 다루는 데 가장 강력하고 가장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는 수적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고 조직화의 과업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석탄 산업을 출발점으로 뽑았다. 이 산업은 미네소타의 영하의 겨울 때문에 전략적이었다.

우리는 고용주가 유혈 투쟁 없이 조합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든 할 수 있는 준비를 했고 중앙 노동 연맹(the Central Labor Union), 운전사 연맹의 행정위원회(the executive board of the drivers union), 그리고 팀스터의 연합회의(the Teamsters' Joint Council) 앞에 나타나서 법적으로 진행시키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러한 조직들의 대응은 우리의 제안에 젖은 담요를 던지는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운전사들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왜 그들은 와서 우리와 결합하지 않는가?” 이러한 태도는 맥 빠진 것이었지만, 우리는 우리가 적절히 준비했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여전히 우리의 계획을 가지고 나아갔다.

여러 회사의 노동자 위원회는 요구를 담은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계약서를 고용주들에게 제시했을 때, 예상했듯이 그들은 우리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뒤 우리는 우리가 애쓴 결과를 제시하려고 모든 노동자의 공개회의를 소집했다. AFL의 지도자가 이 회의와 파업의 가능성에 대해 알아냈다. 파업에 대한 소문은 산업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막으려고 우리를 집단적으로 습격했다. 500에서 600명가량의 석탄 운전사들은 이 회의에 나타나서 조합 책자를 찢어버렸고 조합 사령부를 종잇조각으로 어지럽혔다.

하나뿐인 행동은 회사 대리인들이 일요일에 출근하지 않아서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따라 일요일 낮 2시에 특별 회의를 여는 제안이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정확했음이 입증되었다.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우리의 모든 세력은 모든 광부를 이 회의에 나오게 움직였다. 회의는 열렸고 그 회의에서 월요일 새벽 5시에 파업하고 파업위원회를 세우자는 제안이 통과되었다.

 

 

성공

3일 동안 파업이 진행되고 나서 우리는 승리했다. 그 누구도 의사의 처방전 없이 석탄을 캐러 갈 수 없었다. 이 파업의 성공은 운전사와 노동자 사이에서 충격을 불러왔다.

대중 집회가 다른 운송 산업을 노동조합화하려는 실질적인 캠페인을 개시할 목적으로 큰 극장에서 조직되었다. 집회는 선전이 잘되었고 극장은 사람들로 꽉 찼다. 조직적 준비는 두 달 동안 이루어졌다. 100명의 잘 알려진 위원회는 파업에 참여했던 모든 부문의 대표자들로 이루어졌다. 이 위원회는 모든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지녔다. 요구를 담은 계약서는 고용주에게 제시되었다. 하나의 답변이 있었다. 딱 잘라서 안돼.’

우리는 파업의 승인과 파업 기금을 위해 팀스터 국제 조합(the Teamsters' International Union)에 호소했다. 우리는 협상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국제 조합이 결코 파업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 우리는 조합위원회와 모임을 거절한 고용주의 태도를 설명하는 또 다른 호소문을 보냈다. 대답은 또 다시 협상을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절차는 적어도 한 달 동안 행동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그 시간은 도래할 파업을 위해 노동자를 준비시키는 데 아주 가치 있었다. 거대한 투쟁이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조합의 인정일 것이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는 예상할 수 없었다.

파업을 위한 모든 준비는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주요 고가도로와 거리에 피켓팅이 (picketing: 노동쟁의 때 방해자를 감시하는 조합원) 포진되었다. 피켓팅 대표를 위한 지령이 작성되었다. 피켓 라인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이용할 수 있는 전달 수단을 기입한 장부, 파업 사령부에 확성기 설치 등 모든 것은 계획에 따라 척척 이루어졌다.

19345월 이른 아침 파업은 시작되었다. 노동자는 실질적으로 100% 반응했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대응에 놀랐다. 고용주가 쓴 방법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들은 경찰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피켓을 때리고 체포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추어 모든 반동적인 사람들을 대행하게 했다. 첫 날 동안 수십 명의 파업자들은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구타당했고 체포되었다. 16명의 여성은 신문 배달원들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뒷골목으로 불러낸 뒤 구타당해 의식을 잃었다.

일간 신문은 시장 지역에 나타나지 않은 대중에 경고한 센세이셔널한 기사를 실었다. 그 날에 폭력이 난무했고 몇몇 죄 없는 동조자는 상처를 입었다.

여성이 구타당하고 나서 2일 뒤 노동조합 비가입자들과 거래를 터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일이 일어난 아침에 모든 라디오 방송국은 건물 지붕에 확성 장비를 설치해 트럭의 계획된 이동을 방송했다.

Deputy Run의 이야기는 나라 전체에 잘 알려졌고 실제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1,500명의 대의원과 500명의 정복 경찰은 파업자들의 우월한 힘의 압력 하에 그들의 삶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잘 알려진 오픈숍 고용주인 한 대표자는 전장에서 죽었다. 또 다른 사람은 며칠 뒤에 죽었다. 많은 다른 사람은 병원에 실려 갔다.

그때 시장 Floyd B. Olsen48시간 교섭과 이 시간 동안 트럭이 이동하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 끼어들었다. 양 측은 이러한 교섭 제안을 받아들였다. 48시간 동안 우리는 계속 협상을 했다. 이 방에는 조합 대표자들이, 저 방에는 고용주들이, 그리고 그 사이 방에는 시장이 있었다.

많은 시간 동안 협상이 진행되고 나서 조합의 승인과 약간의 임금 상승을 약속한 계약이 제시되었다. 그 때 쟁점이 된 큰 문제는 트럭 운전수, 보조원, 개별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내근 노동자(inside workers)를 대표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였다. 이 쟁점은 폐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매우 모호한 문단이 나왔다. 그 문단은 노동조합이 위에 언급했던 모든 계층을 다룰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는 시장의 보증으로 수락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파업은 2일 뒤에 끝났다.

도시에 있는 전체 노동계급은 거대한 승리에 환호했다. 그러나 명확한 계약을 협상하려고 소집된 첫 회의에서 고용주는 우리의 조합을 내근 노동자들의 협상 대리인으로서 인정하길 거부했다. 파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 고용주는 정말로 작업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도시의 모든 일간 신문에 전면 광고를 실었다. 조합 지도자를 미네아폴리스에 노동조합을 건설하려는 게 아니라 혁명을 실현할 의도를 지닌 트로츠키주의-공산주의자로서 그린 사악한 공산주의자 탄압 캠페인은 신문에 실렸다. 그것은 모든 비난을 해결하는 데 필요했다.

 

 

 

 

 

 

 

 

 

엽총(Shotguns)

 

 

 

 

파업은 척척 진행되었다. 모든 수송은 멈췄고 도시는 다시 일요일 같았다. 이번에 고용주는 소총과 산탄으로 장전된 총신을 짧게 자른 엽총으로 경찰을 무장시켰다. 많은 앞잡이 배달꾼은 중무장한 경찰의 보호 아래 병원에 쓰일 의약품이나 나이든 사람들의 집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했다. 목적은 그들을 중단시키려고 애쓰는 데 연루된 피켓을 제거하려는 것이고 이것을 피켓을 쏴 죽일 구실로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파업은 많은 행동 없이 몇 주 동안 진행되었다. 어느 날 아침 시도되었던 배달이 전매 상점 지역에서 계획되었고 엽총을 지닌 경찰이 운전사를 보호하려고 거기에 왔다는 보고가 나왔다. 피켓은 신속히 처리되었고 그들이 배달을 막으려고 했을 때 경찰은 총을 쏘아댔고 52명의 피켓이 쓸어졌다. 그 가운데 두 명이 죽었다. 이 날은 피의 금요일로 알려지게 되었다. 피의 금요일에 죽은 피켓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네스(Henry Ness)의 장례식에, 5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4열로 서서 나란히 행진했고 한 시간 동안 도시의 모든 교통이 마비되었다.

두 명의 정부 중개인은 어떤 조건에서든 분쟁을 해결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마침내 우리에게 내근 노동자에 대한 인정을 담은 제안을 주었다. 노동조합은 받아들였지만 고용주는 이러한 동의를 거절했다. 그때 시장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대는 파업 사령부를 포위했고 그것을 접수했다. 빌 브라운(Bill Brown), 레이 던(Ray Dunne), 마일스 던(Miles Dunne)은 영창으로 끌려갔다. 그 날 동안 2급 지도자들이 파업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들은 사령부와 지도자들이 석방될 때 까지 만나길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8주 동안 고통을 겪고 나서 노동조합이 얻으려고 투쟁했던 모든 중요한 쟁점을 규정한 해결안이 나왔다.

 

 

옮긴이: 김민

 

 

미네아폴리스 파업의 교훈

Mark Harris

 

 

미국 고용주들 사이에 오래된 전통이 하나 있다. 만일의 경우에는 그리고 회사의 파업파괴 전술이 실패할 때, 정부에 있는 당신의 친구에게 파업하는 노동자를 강하게 처벌해줄 것을 요구해라. 그리고 만일 그것이 무력에 의해 분쇄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렇게 하자.

그러나 심지어 무장한 군대와 부딪힐 때에도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다. 미네아폴리스 노동 운동의 역사는 그것을 입증했다.

 

실제로, 미네아폴리스를 노동조합 도시로 만든 잘 알려진 사건은, 1934년 팀스터 파업(the 1934 Teamsters strikes)은 파업파괴적인 주의 방위군(National Guard)과 불성실한 정치인들을 포함하여 어떻게 모든 종류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보기이다.

1934년이 시작되었을 때, 노동운동은 곤란한 상태에 있었다. 불황은 최악의 상태에 있었고, 실업은 만연해있었으며, 조직된 노동은 잇달아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해에 사정은 바뀌었다. 불황이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미네아폴리스와 다른 도시에서(특히 톨레도와 샌프란시스코) 노동자는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에 맞서 조직되기 시작했다.

1934년 겨울 동안, 팀스터 국제협회의 전국 운전사 지부 574(General Drivers Local 574 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IBT)는 노동조합을 승인받으려고 석탄공장에서 파업을 주도했다. 이 파업은 성공했고 지부가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모든 트럭운전사와 창고 노동자를 조직할 계획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추진하도록 고무했다. 지부 574의 지도자인 Carl Skoglund, V.R. Dunne, Miles Dunne, and Grant Dunne는 다른 타입의 노동조합 지도자였다.

 

 

정부에는 친구가 없다

 

사회주의자인 그들은 정부 안에 있는 친구들에 대해 전혀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노동자가 대대적인 감시선(picket lines), 고용주에 맞선 전투적인 투쟁, 미네아폴리스와 나라 전체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지지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많은 조치를 취했다. 석탄 공장의 파업 뒤, 그들은 모든 운송노동자, 즉 운전사, 승강장 노동자, 조수, 운반자를 하나의 산업 노동조합으로 의식적으로 조직하려고 애썼던 조직 위원회를 세웠다.

고용주들은 노동조합을 승인하길 거부했고 이미 5월경에 3000명의 새로운 회원을 지닌 지부 574의 지도자들은 파업에 요구했다. 팀스터 노동조합의 전국 지도자가 강력히 반대했지만, 그들은 파업을 강행했다.

지부 5745000명 회원은 재빠르고 효율적으로 도시에서 모든 트럭의 운행을 중단했다. 그들은 고용주가 모든 수단을 써서 파업을 깨트리려고 한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할 수 있는 돌발 사태를 대처할 준비를 했다.

어느 곳에서도 파업을 파괴하는 노동자가 이용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려고 지부 574는 도시 거리를 트럭과 자동차로 순시하는 감시원인 날으는 분대(flying squads)”를 조직했다.

파업지도자들은 일반 노동자들이 지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 목적을 위해 전체 회원 회의가 파업동안 가장 높은 결정체로 되었다.

나날의 결정은 100인 위원회(Committee of 100)라고 한 파업 지도부에 의해 조정되었다. 패럴 돕스(Farrell Dobbs)와 해리 드보아(Harry DeBoer), 제이크 쿠퍼(Jake Cooper)와 같은 평조합원이 파업동안 지도자로 떠올랐다.

지부 574는 여론의 지지가 그들의 성공에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왜 일간 파업 신문을 발행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 신문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설명하고 노동조합을 유지시키며 여론에 나날의 파업 상황을 알렸다.

지부 574는 농민들의 지원을 얻었고 실업자들의 지부 조직을 만들었다. 이것은 비조합원인 일자리 없는 노동자를 이용해 파업을 분쇄하려는 고용주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데 결정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이것과 다른 조치는 일반 노동자들을 긴밀하게, 높은 열성을, 그리고 공동체의 탄탄한 지지를 유지시키는 일을 했다.

시민 동맹(the Citizens’ Alliance), 즉 고용주 회의(the employers’ council)노동자의 친구로 선출되었지만 미네아폴리스 시장인 농장주이자 노동당 정부의 올센(Floyd B. Olsen)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파업이 1934년에 시작되었을 때, 경찰이 동원되었고 자원자들이 대리했으며, 그리고 파업자들은 체포당하고 구타당했다.

경찰이 농산물을 살 수 있는 도시 시장을 열려고 애썼을 때, 중요한 투쟁이 터졌다. 감시조는 거의 모든 트럭을 빼돌렸고 시장은 경찰력을 3배로 늘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200명이 체포되었고 여성 지지자 집단은 경찰과 고용된 폭력배에 의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몰매를 맞았다.

다음 날 35,000명의 건설 노동조합 노동자가 연대 파업을 했다. 고용주는 경찰이 놓쳐버린 노동자의 지도자를 박살내려고 2200명의 특별 대의원(special deputies)”인 사적인 군대를 보유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수천 명의 파업자와 지지자를 동원했고 전면 충돌은 계속되었다.

이틀 동안 노동조합은 모든 파업파괴자, 경찰, 고용된 폭력배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겼다. 트럭은 달리지 않았다. 525일에 파업은 해결되었고 노동조합은 승인되었다.

 

 

방위군을 접수하다

 

그러나 고용주는 새로운 합의에 따르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다시 한 번 파업은 716일에 있었다. 경찰과 고용주는 파업을 깨부수려고 방위군을 소집할 핑계를 찾았다. 그들은 매복해 있다가 고립된 파업자를 습격해 싸죽일 계획을 세웠다. 이 점은 나중에 정부 조사로 사실로 입증되었다.

720검은 금요일에 그 계획은 실행에 옮겨졌다. 경찰은 사격을 개시했고 두 명의 파업자가 살해당했으며 55명이 부상당했다. 한 시간 안에 방위군은 거리에 나타났다.

시장 올센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곧이어 트럭 수천 대가 파업파괴자들에 의해 달리기 시작했다. 방위군은 노동조합 사령부를 점령했고 지부에서 100명의 지도자와 회원을 체포했다.

여전히 일반 조합원은 유지되었고 40,000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행진은 감옥에 갇힌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석방하도록 당국을 강제했다. 마침내 5주 동안 이어진 격렬한 투쟁이 끝나고 나서 파업자들은 이겼다.

그 파업에 참여했던 해리 드보어(1927년에 호멜의 오스틴 공장Hormel’s Austin plant 에서 일했다)는 사회주의 행동을 위해 1934년의 교훈을 회상했다. 그러한 교훈은 파산한 호멜 노동조합에 비추어 볼 때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다.

 

 

노동자들이 부딪혔던 것을 보라고 드보어는 회상했다. “그들은 수천 명의 특별 대의원들에 부딪혔다. 그들은 정면에서 그들과 맞서 싸웠다. 그들은 우리 파업자들 가운데 두 명을 싸죽였을 때 경찰과 싸웠다. 시장은 방위군을 투입했다. 노동자는 방위군과 싸웠다. 나는 우리가 벽을 도배할 만큼 많은 지령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파업의 교훈, …… 그것은 여론을 우리 편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이 없이 우리는 파업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이해했던 지도부를 갖고 있었다.”

 

 

파업자들은 방위군을 패배시켰다. 그들은 경찰의 폭력을 중단시켰다. 그들은 계엄령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당에 있는 자신들의 친구를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파업자들은 노동조합의 힘과 전체 노동계급에 의지했다. 낡은 것은 그들에 맞섰지만, 그들은 이겼다.

1934824일에 미네아폴리스 노동당 리뷰 발행본에는 이렇게 써 있다. “이 파업의 승리는 지역 노동조합 운동의 연대기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특징지었다. …… 그 파업은 파업파괴자의 천국으로 알려진 미네아폴리스를 착취당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도시로 바꿔 놓았다.”

 

 

옮긴이: 김민

 

 

 

 

 

 

 

 

 

 

 

 

 

맑스주의와 총파업(Marxism & General Strike)

 

노동운동사의 교훈

 

총파업 문제는 맑스주의 운동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이 용어가 대대적인 대중 봉기부터 대단히 관료화된 1일 항의 파업까지 다양한 투쟁들을 포괄한다는 사실이다. 총파업은 경제적 목적, 국가 탄압에 대한 저항,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성과들을 쟁취하고 방어하는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일어났다.

1920년 독일에서는 노동자 총파업이 우익의 쿠데타를 저지했다(카프 폭동). 193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총파업으로 항만노동조합은 부두 하역 노동자들의 직업소개소를 장악했다. 1936년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장군의 파시스트 쿠데타에 저항하여 노동자들이 즉시 총파업과 반()자발적 봉기를 일으켰다. 이 투쟁으로 쿠데타 초기에는 프랑코의 반란군이 노동자 민병대에 압도당했다. 총파업의 역사가 긴 벨기에에서는 1950년대 초에 두 번의 정치 총파업이 일어났다. 1950년 총파업은 친나찌파 레오폴드 3세 국왕을 반대하기 위해 1952년 총파업은 징병 복무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일어났다. 1972년 캐나다 퀘벡주에서 일어난 총파업에서 노동자들은 3명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투옥에 저항하여 반()봉기를 일으켰다. 총파업의 예는 말 그대로 수백 건이 넘을 것이다.

총파업은 어떤 경우에도 체제에 대한 주요한 도전이 된다. 최소한 암묵적으로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 자본가인지 아니면 노동자인지를 묻기 때문이다. 잠재적으로 너무 많은 것이 걸려있기 때문에 총파업은 대개 더 큰 투쟁으로 격화되거나 아니면 항복으로 끝나도록 강요된다.

파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끝에 자본가 계급이 승리한 경우도 있었다. 노동자들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수입이 없이는 오래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가들이 탄압을 통해 총파업을 압살한 경우도 있었다. 또는 경찰의 압력과 대개 소부르주아 분자들로 구성된 대체인력을 결합하여 버스를 운행시키고 하역작업을 재개시켜 총파업을 깨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 탄압의 기구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것만으로 노동자의 기를 죽인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탄압이 투쟁에 불을 질러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급격히 상승시킨 때도 있었다. 노동운동이 강력하고 그 대의가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을 때 파업노동자들은 대체인력을 격퇴하고 자본가 계급의 억압기구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때에는 자본가 계급은 대개 협상을 통해 총파업을 끝내기를 간절히 바랐다.

 

총파업의 선구자들

 

총파업 문제와 관련하여 총파업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현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총파업을 주창한 인물은 장 멜리에였다. 그는 프랑스의 비주류 신부로서 1700년대 초에 활동했다. 그는 무신론자로 비난받았는데 아마 최초의 해방신학선구자였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명 남은 신부의 창자로 마지막으로 한 명 남은 왕을 목 졸라 죽이면인류는 마침내 해방될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고 한다. 그의 이 의미심장한 말을 볼테르는 대단히 즐겁게 반겼다. 또한 소문에 의하면 그는 평민이 노동을 그만두면 귀족과 성직자 계급은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귀족에 대항해 총파업을 벌이자는 멜리에의 제안은 약 60년 뒤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회자되고 있었다. 국민의회 의원 꽁스땅뗑 볼네이가 1791년에 출판한 영향력 있는 저서에는 사회에 필요한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인민노동하는 자들을 벗겨 먹으면서 빈둥거리는” “특권 계급사이의 대화가 실려 있다. 여기서 인민은 특권 기생충들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고 있다:

 

 

우리는 뼈 빠지게 일하고 그대들은 노동의 성과를 누린다. 우리는 생산하고 그대들은 써버린다. 우리에게서 부가 나오면 그대들은 이것을 흡수한다. 인민과 동떨어진 특권 계급의 작자들아, 나라를 따로 차려서 그대들끼리 통치하거라.” ― 「유적지, 또는 제국 안에서 일어나는 혁명에 대한 하나의 연구, 1819

 

 

장 폴 마라, 그락쿠스 바뵈프 같은 잘 알려진 혁명가들도 총파업을 언급했다. “영국의 자코뱅파로 알려진 런던편지클럽은 볼네이가 쓴 책을 번역하고 출판했다. 이들도 총파업을 주장했다.

그러나 총파업을 실현시키려는 최초의 시도는 18204월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졌다. 악명 높은 피털루 학살 사건이 일어난 뒤 자행된 정부의 탄압에 대해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저항했다. 처음에는 글래스고우의 급진주의자들이 영국에서 제안된 세금거부 반란에 합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820년 이들은 이렇게 결정했다:

 

 

돌아오는 31일 모든 곳에서 일을 중지하고 며칠 동안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 이것은 봉기가 될 것이다. 1977년 토미스와 홀트 공저, 1789~1848년 영국에서 혁명의 위협들에서 인용

 

 

이들의 목적은 급진 개혁, 보통 선거권, 매년 의회의 개원등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와 함께 잉글랜드에서도 동시에 파업을 벌이려고 했다. 파업은 일주일을 끌었고 처음에는 글래스고우와 인근 지역의 모든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 파업은 확산되지 못하고 정부에 의해 기선을 제압당했다. 곧이어 소규모 반란자들과 영국군 사이에서 보니무이어 전투(the Battle of Bonnymuir)”라고 명명된 총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반란자들은 패배하고 파업은 끝이 났다.

이 최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은 사회의 불평등을 시정하는 수단으로 계속 애용되었다. 1830년대에 총파업의 최고 주창자는 윌리엄 벤보우였다. 그는 급진 성향의 구두 수선공이자 퀘이커교 선교사를 역임했다. 총파업을 주제로 한 팜플렛 [거대한 인민 공휴일과 생산계급의 대회]를 그는 1832년에 출판했다. 인기를 누렸으며 널리 유포된 이 팜플렛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삶을 누리지만 동등하게 누리지는 못한다. 상당한 편의, 쾌락, 행복을 누리는 사회의 유일한 계급이 사회 전체에 필요하고 유용한 것들을 가장 적게 생산한다.

 

 

벤보우는 인류 대중에게 부족한 것은

 

 

우리 자신이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과 이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권리이다.1960년 크룩 저, 공산주의와 총파업에서 인용.

 

 

그는 약 한달 동안 노동자가 노동을 거부하는 거대한 인민 공휴일을 통해 사회 불평등을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계획은 해결해야할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보기를 들어 파업기간 동안 노동자가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노동계급 운동인 인민헌장운동의 주창자들(차티스트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18428월에 영국 북부지방에서 광산 노동자들과 섬유 노동자들이 가혹한 임금 삭감에 저항하여 파업에 돌입했다. 이 파업은 신속 대응 파업 방위대를 동원하면서 이 지역과 스코틀랜드, 웨일즈로 확산되었다. 이 파업은 이따금 플러그 음모라고 한다. 생산을 중단시키려고 모든 공장에서 파업노동자들이 증기 보일러의 플러그를 잡아 뺐기 때문이었다. 차티스트들이 이 투쟁을 지지했다. 그들은 투쟁을 지도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이 투쟁과 관련되어 연상되고 있다. 파업의 절정기에는 약 50만 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서서히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에 파업은 한 달이 지나자 흐지부지되었다.

1860년대에 제 1 인터내셔널의 영국 회원들은 개혁동맹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성) 노동자들의 선거권을 요구하며 노동을 완전히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토리당 정부는 이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선거권을 제법 확대하는 개혁법을 즉시 통과시켰다.

 

 

벨기에 총파업과 독일사민당

 

1891년 노동절, 벨기에의 왈룬 지역 탄광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참정권을 요구했다. 이 투쟁은 3주일 후에 요구를 쟁취하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는 엄청났다. 결국 벨기에노동자당(POB)의 개량주의 지도부는 총파업이 효과적인 전술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893년에 벨기에노동자당이 주도한 총파업이 성공했다. 파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정부는 혼비백산하여 남성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평등 선거권은 아니었다. 재산 보유, 교육 수준, 직업 등이 우수한 시민은 몇 표가 더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벨기에 총파업의 승리는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제 2 인터내셔널 내부에 총파업 전술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특히 인터내셔널의 종주 정당인 독일사민당(SPD) 내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3개 경향이 등장했다. 노동조합 지도부가 중심이 된 우파는 주로 총파업의 합법성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안정적이고 안락한 직책을 보유한 실리적노동관료들은 혁명을 위해 대중파업을 활용하는 것을 어리석으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총파업은 참정권을 획득하거나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 그리고 기타 민주적 권리들을 보호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총파업은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며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의해 확실히 통제되어야했다.

그러나 사민당 좌파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이들의 대표는 폴란드의 뛰어난 망명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녀는 대대적인 파업을 대중의 혁명 역량을 발휘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한편 당시 세계의 최고 맑스주의자로 인식된 카알 카우츠키는 중앙파지도자였다. 우파에 대항하여 카우츠키는 대대적인 파업이 이론적으로는 혁명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총파업은 노동자 조직의 공식 지도자들이 지도하고 통제해야하는 근본적으로 방어적인 무기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 세 경향 사이에서 일어난 분열은 총파업 전술 뿐 아니라 더 광범위한 정치 전략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수정주의우파의 주요 인물 베른슈타인은 점진적 개량주의 노선을 드러내놓고 옹호했다. 그는 잘 알려진 말을 남겼다: “운동은 모든 것이며 사회주의의 최종 목적이라고 보통 얘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1918년 독일공산당을 창당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좌파 지도자로서 혁명이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수 있다고 믿었다. 카우츠키는 우파와 좌파의 중간에 위치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필요하고 불가피하지만 언제 도래할 지 알 수 없는 미래에나 가능한 사건이다.

1902년에 벨기에 노동자들은 또 다시 총파업을 벌였다. 이번에 이 운동의 목표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성인에게 평등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투쟁 참가 대중의 숫자는 1893년보다 훨씬 높아서 35만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번보다 준비를 훨씬 철저히 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인력을 조직해 놓았으며 1893년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동요했던 군대를 확실히 단속했다.

정부가 완강하게 나올 것을 눈치 챈 벨기에노동자당 지도부는 즉시 물러서기 시작했다. 우선 이들은 여성참정권을 요구사항에서 제외시켰다. 그 다음에는 일련의 양보조치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들이 양보할 때마다 정부는 더 강경하게 나왔다. 벨기에노동자당이 후퇴하자 동요하던 중간 계급은 더욱 정부의 편에 붙었다. 이 사실이 뜻하는 것은 아주 크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당 지도부는 마지막 체면치레용 술수를 부렸다. 이들은 국왕이 의회를 해산하여 정부를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마땅히 국왕은 정부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노동자당 관료들은 승리를 선언하고 파업을 철회했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파업을 독일사민당의 당원들은 모두 면밀히 관찰했다. 이 파업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참가했으며 처음에 노동조합은 꽤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전반적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파업이 실패작이라고 규정했다. 그녀는 총파업 실패의 책임을 노동자당 지도부에 돌렸다: 이들은 파업 초기부터 을 지킬 것이라고 비겁하게 선언했다. 이 선언을 정부는 이렇게 해석했다: 우리가 어떻게 나오든 노동조합 지도부는 저항하거나 보복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언제든지 계산을 하게 마련이다: 어떤 때에는 탄압이 효과를 발휘하지만 잘못하면 대중의 분노에 불을 질러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몰고 갈 수 있다. 이것은 위험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어떻게 나오든 반격하지 않겠다고 상대방이 미리 선언하면 정부는 당연히 대담하게 탄압에 나서기 마련이다.

1902년 벨기에 총파업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벨기에 노동자당의 겁먹은 합법주의 때문에 매순간 노동자들은 사기가 저하되었으며 정부는 더욱 강하게 나왔다. 룩셈부르크는 패배의 이유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1905년 러시아 총파업: 총파업에서 봉기까지

 

1905-6년 러시아 총파업으로 국제사회주의운동은 또다시 총파업에 대해 격렬히 논쟁을 벌였다. 차르의 러시아는 압도적 다수의 농민 위에 군림하는 봉건적 전제체제였다. 그러나 동시에 해외 자본에 의해 대단히 현대적인 자본주의 공업 부문도 존재했다. 공장들은 첨단 기술과 잠재적으로 강력한 노동계급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노동계급은 젊고 대단히 밀집되어 있었으며 악랄한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권리가 전혀 없었으며 가끔 육체적 폭력에 시달렸다.

벨기에, 영국, 독일의 노동운동을 지배했던 특권 노동귀족층이 러시아에 나타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노동자가 노동조합 조직에 관련될 때 감옥에 갇힐 각오를 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편안한 사무실, 판공비, 꽤 많은 봉급을 누리는 서구의 노동조합 관료들과 러시아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전혀 다른 유형이었다.

차르의 경찰은 노동자들의 파업 대오를 말을 타고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구타, 체포, 살해를 예사로 저질렀다. 다수의 파업은 깨졌으며 많은 노동조합원들은 감옥에 갇혔다. 이웃 공장에서 일하는 자기 친구나 친척들이 경찰의 공격을 받자 노동자들은 이에 분노하여 자발적으로 동조파업에 나섰다. 이것은 탄압을 막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곧 드러났다. 왜냐하면 분쟁에 직접 관련이 없는 공장주들이 경찰이 개입을 자제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여러 공장의 노동자들이 동시에 파업을 할 때 이들은 같이 모여서 상황을 논의하고 다음 투쟁을 공동으로 계획하였다. 이 모임은 1905소비에트즉 노동자 평의회의 시초가 되었다.

1904년 차르는 일본과 전쟁을 벌이다 참패를 당했다. 이로써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고 정권은 불신을 당했다. 19051월 페테르부르크의 중요한 공장인 푸틸로프 제철소에서 가폰 신부가 주도한 파업이 벌어졌다. 그는 신부이면서도 경찰의 첩자였는데 파업을 통해 투쟁을 통제하려했다. 아울러 그는 파업노동자들에게 성과를 가져다 주어야할 압력에 부딪혔다. 따라서 그는 노동자들에게 동궁에 있는 차르에게 청원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대규모로 대오를 형성하여 성상과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가폰의 지도하에 행진에 나섰다.

그러나 차르는 모든 파업들에 짜증이 났기 때문에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시위자들에게 발포하라고 군대에 명령했다. 군대의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800명이 죽었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차르는 무력 진압을 통해 누가 주인인지를 서민들에게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학살은 전국의 인민을 분노시켜 파업의 물결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파업은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다. 노동자와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투쟁은 마침내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의 반란을 촉발시켰다. 귀족의 영지가 불에 타고 지주들이 살해되었다. 반란이 전국에 확산되었기 때문에 차르 정권은 대책이 없었다.

이 대중적 분노는 군대에도 확산되었다. 귀족의 장원에 군대가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이 농민 출신이었던 병사들은 반란 농민이 아니라 장교들과 하사관들을 총살시켰다.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의 1926년 영화 전함 포템킨19056월에 일어난 잘 알려진 수병 반란을 묘사했다.

원래 이 반란들은 거의 전부 자발적이었다. 각 지역의 좌익 정당들이 투쟁에 참여했으나 투쟁 계획이나 중앙의 지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투쟁을 억누르기는 더 힘들었다. 각기 다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함께 비공식적으로 회의를 갖는 것이 초기의 소규모 투쟁에서는 흔한 일이 되었는데 이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 회의는 많은 지역에서 투쟁의 구심 역할을 했다.

1906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대중파업론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사건들이 지닌 유동적 성격을 이렇게 포착했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주듯이 대규모 파업은 너무도 가변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모든 측면들과 혁명의 모든 단계들과 요인들을 반영한다. …… 정치파업, 경제파업, 대규모 파업, 부분 파업, 시위성 파업, 투쟁적 파업, 개별 산업 부문의 총파업, 도시 전체의 총파업, 평화적 임금투쟁과 거리의 학살, 바리케이드 투쟁 등이 서로 연이어지고 겹치고 넘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하는 투쟁의 바다이다.

 

 

이 투쟁의 절정은 전국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19059월 모스크바의 인쇄공 파업으로 시작하여 10월 모스크바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 뒤 기관사, 전신, 우편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국에 걸쳐 터져 나왔다. 곧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도 모두 파업에 참여하여 전국의 수송과 통신이 마비되었다. 이 때문에 군대는 이동할 수도 없었고 통신을 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이제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는 더욱 정치성을 띠었다.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기본 시민권을 보장하라!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그리고 기타 도시의 파업공동위원회(소비에트)가 파업을 지도했다. 각 지역 공장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소비에트는 식량 공급과 사회질서 유지에 책임을 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식 정부와 함께 나란히 노동자 정부가 초보적인 형태로 등장했음을 뜻했다.

사태를 통제하려고 차르는 “10월 선언을 통해 주요한 정치적 양보조치처럼 보이는 것을 내놓았다. 그는 자신이 기적과 같은 변화를 겪었으며 이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말했다. 이제부터 의회가 개원될 것이며 시민들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그는 밝혔다. 이 발표는 마땅히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곧 대부분의 파업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며 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투쟁의 파고가 가라앉자마자 정부는 탄압하기 시작했다. 반란지역들에 대한 징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제국 전체에서 가장 말썽이 많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대는 반란의 지도자들을 군사법정에 회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좌익 조직들은 11월 총파업을 촉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파업투쟁이 다시 상승하자 정부는 다시 전술적 후퇴를 했다. 군사법정을 폐지하고 계엄령을 해제하며 다른 양보조치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파업의 준비가 소강상태에 들어가자마자 정부는 다시 공세로 돌아섰다. 이번에 경찰은 트로츠키를 포함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지도자들과 다른 유명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다시 한 번 노동운동은 총파업을 재개하려했다. 이번에 정부는 페테르부르크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와 다른 지역에서 투쟁은 새롭게 가열되었다. 투쟁이 가라앉자마자 정부가 약속을 거둔다면 정부의 양보조치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볼셰비키들의 지도를 받아 모스크바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봉기는 몇 주일의 시가전과 함께 패배로 끝났다. 그 뒤 투쟁은 18개월 동안 산발적으로 터졌으나 차르 정권은 서서히 통제력을 되찾았다.

모스크바 봉기는 총파업을 봉기의 가교로 삼은 최초의 진지한 시도였다. 이로부터 15년이 지나고 나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1905년의 총 예행연습이 없었다면 1917년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치의식을 가진 광범위한 노동자들이 정권의 정체를 알았으며 이것을 개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경험을 통해 혁명가들은 대중투쟁의 정치역학과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실제적인 방식들을 배웠다.”

또한 1905년의 경험은 총파업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총파업으로 국가권력을 뒤흔들고 최소한 서류로나마 양보조치들을 받아냈다. 그러나 결국 정부가 통제력을 다시 장악하면 개혁은 헛수고가 되었다.

레닌은 10월이 되어서야 러시아에 돌아올 수 있었으나 사건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정부를 마비시키고 노동계급 주위로 피억압 대중을 결집시킬 수단인 대규모 파업의 중요성을 그는 명확히 인식했다. 또한 맑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예측하지 못한 노동계급 결집체 소비에트의 중요성을 그는 인정할 수 있었다.

반란의 중심이었던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주도했던 트로츠키는 레닌과 똑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전제정을 마비시키고 일부 양보조치들을 강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피억압 인민의 선두에 선 노동계급이 차르의 경찰과 군대를 제압하고 지주와 자본가들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고 나서 노동계급의 권력기관을 세우는 것이 필요했다.

룩셈부르크도 레닌과 트로츠키와 대체로 견해를 같이했다. 190512월에 대규모 파업을 넘어서서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했다고 그녀는 인정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러시아 노동자들의 영웅적 투쟁에 경의를 표했다. 다만 그녀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 대중의 자발적 혁명 에너지를 발휘시키는 대규모 파업이 지닌 위력을 더 많이 강조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공식 지도자들이 인위적으로 선언한다고 총파업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을 그녀는 올바르게 보았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주었듯이, 대규모 파업은 노동자 투쟁을 좀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섬세한 논리로 개발한 기발한 방식이 아니다. 이것은 노동계급 대중 투쟁의 방식이며 노동계급 혁명투쟁의 모습이다.― 『대중파업론

 

 

총파업의 종류들

 

1905년 혁명이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트로츠키는 영국독립노동당(ILP)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1893년 엥겔스가 한 말을 인용했다:

 

 

군대가 대단히 동요한 벨기에의 총파업처럼 정치파업은 협박을 통해 즉시 승리해야한다. 아니면 대대적인 실패로 끝난다. 아니면 바로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리는 봉기로 나아간다.

 

 

1905년 러시아 총파업, 1893년 벨기에 총파업 등은 첫 번째 경우에 속한다고 트로츠키는 말했다. 즉 정부는 진지하게 싸워보지도 않고 미리 겁을 집어먹고 양보조치들을 게워 내었다.

대대적인 실패의 경우는 정부가 충분한 대비를 하고 군대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때 일어난다. 또한 파업이 관료적으로 진행되어 결정적 전투가 아니라 적을 겁주는목적을 위해 계산되었을 때에도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자본가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보유하여 노동운동 지도부가 진지하게 투쟁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금방 알게 된다. 그러면 이들은 유화조치를 거두고 좀 더 공격적으로 나온다.

총파업의 세 번째 유형은 바로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리는 봉기로 나아간다.” 트로츠키는 이 총파업 봉기가 승리하거나 실패하는 요인들을 이렇게 들고 있다:

 

 

사회의 계급 분화, 노동계급의 사회적 비중, 소부르주아 계급 하층의 정서, 군대의 계급적 구성과 정치적 정서 등. 그러나 봉기가 승리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올바른 혁명적 지도부와 이들의 명확한 정세 파악 그리고 총파업에 이은 공개적인 혁명투쟁이다.영국독립노동당과 제 4 인터내셔널”, 1935918(강조는 원저자)

 

 

다른 가능성들도 존재한다. 혁명가들은 국가권력 장악을 즉각적 목표로 설정하지 않은 채 총파업을 촉구할 수 있다. 트로츠키는 1935년 프랑스의 상황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현재의 과도적 정권이 대단히 불안정하다는 사실, 바로 이것 때문에 총파업은 커다란 부분적 성공을 성취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정부는 보나파르트 체제의 포고령, 2년 군복무 등의 문제에서 양보조치를 내놓도록 강제될 수 있다.다시 한 번, 프랑스는 어디로?”

 

그러나 좀 더 낮은 목적들을 위해 시도되더라도 총파업은 최소한 암묵적으로는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총파업을 시작한 구호와 동기가 무엇이든, 진정한 대중을 투쟁에 포함시키고 대중이 투쟁의지가 확고하다면 총파업은 나라의 모든 계급들 앞에 이 문제를 필연적으로 제기한다: 누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인가?위의 책에서

 

 

영국독립노동당에 보내는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다른 유형의 총파업을 하나 더 제시한다. 이것은 최근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벌어진 행동의 날투쟁과 훨씬 비슷하다. 이런 유형의 총파업에서 노동조합 지도부는:

 

 

파업의 경과와 결과에 대해 자본가들과 미리 합의한다. 의회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대중의 축적된 분노가 어느 순간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이런 경우 이들은 정부의 뒷문으로 들어와 총파업을 지도할 허락을 얻는다. 물론 국가기구에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은 채 될 수 있으면 빨리 투쟁을 끝낼 의무가 이들에게 있다.

 

 

이러한 합의는 공개적으로 또는 몰래 체결될 수 있다. 온타리오 주에서 일어난 총파업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핵심 요소는 똑같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항의의 날을 이용하여 정치적 발언을 하고 대중이 분노를 배출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이들은 조합원들에게 진지하게 투쟁에 임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미리 자본가들에게 불편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신호를 보낸다. 프랑스 노동조합은 이런 유형의 총파업1934212일 우익의 쿠데타 시도 일주일 뒤 촉구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계급의식이 있는 모든 노동자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해야한다: (노동조합 최고지도자) 주오가 잠시 만이라도 활발히 움직였다면 아래로부터의 압력은 상당히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얘기하고 있는 총파업은 본래의 의미에서 총파업이 아니라 24시간 항의 시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시한은 대중이 정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지도부가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다시 한 번, 프랑스는 어디로?”

 

 

온타리오 주의 행동의 날투쟁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아주 면밀히 통제되었으며 대체로 진지한 총파업이라기보다는 도시 전체의 시위가 연속해서 벌어진 형태였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이 시위들을 우익 토리당의 수상 마이크 해리스 정권과 진지하게 대결하기보다는 압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의 목표는 협상 테이블에 자리를 배정받아 토리당의 정책이 어떻게 시행에 옮겨질 것인지에 대해 자기 예기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삭감은 어느 부문에서 언제 이루어질 것이며 어느 학교와 병원이 삭감 대상이 될 것인가 등등. 대중동원의 성격과 방식은 이들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행동의 날투쟁은 노동조합 기구들을 동원시키는데 크게 의존했다. 노동조합들은 직원을 더 많이 고용했으며 기존 직원들은 초과임금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또한 이들은 광고와 홍보에 자원을 쏟아 부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투쟁을 정치화시킬 용의도 능력도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진지한 전투성을 격려할 생각이 없었다. 이 투쟁이 자본가들이나 해리스 정부에 대항하는 진지한 투쟁이라는 인상을 주기 않기 위해 이들은 면밀하게 투쟁을 통제했다.

온타리오 주 노동연맹(OFL) 지도부는 아주 제한적인 행동의 날투쟁조차 약화시키려는 사이비노동조합들에게 공손하게 굴기까지 했다. 지난 선거에서 노동조합 파괴를 획책한 신민주주의당(NDP)과 이 정당 지도자 밥 레이에게 표를 주지 않은 자들이 혼이 나야 된다고 말하면서 철강노동조합과 제지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토리당의 공격을 거의 환영하는 듯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마치 수도꼭지를 다루듯이 노동조합운동의 분노를 풀어주고 잠그는 일을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한다. 또한 이들은 좀 더 전투적인 분자들이 좌파로 등장하여 자신들의 투쟁성을 우습게 만드는 것을 피하려한다. 지금까지 드러난 대로 이들이 운동을 통제할 수 있다면 자본가들은 크게 불편을 겪을 일어 없다.

이제 행동의 날투쟁을 많이 보았으므로 이런 종류의 투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는 모두 뻔히 알고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투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도시 전체가 마비된 경우는 199512월 온타리오 주 런던 시에서 처음 있었다. 그런데 런던 시는 급진노동운동의 메카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기업들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저항할 것을 시민들에게 격려하는 공격적인 광고를 하느라 많은 돈을 들였다. 도시 노동조합들도 이들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나름대로 사전에 노력했다. 이들은 미리 몇 번의 집회를 개최했는데 높은 지지도에 깜짝 놀랐다.

가장 심각한 대결은 도시 바깥의 포드사 소속 탤보트빌 공장에서 일어났다. 이 공장은 규모가 꽤 크며 포드사를 위해 많은 이윤을 남겨주는 곳이다. 캐나다자동차노동조합(CAW)은 하루 동안 공장 조업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포드사는 하루의 생산량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파업방위대의 대오를 금지하는 법원의 명령서를 미리 받아 놓았다. 그리고 회사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출근 명령을 내리고 이것을 어길 경우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온타리오 주 경찰청(OPP)은 법원의 명령서를 강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하고 필요하다면 시위진압 경찰을 공장 내로 투입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아무도 법을 어길 생각이 없었으며 포드사 공장은 조업을 계속해야했다. 그러나 캐나다자동차노동조합 위원장 하그로우브는 공장이 조업을 중지하게 될 것이라고 평온히 말했다.

모든 것이 대단히 극적이었다. 이날 밤 우리는 토론토시에서 런던 시로 차를 몰았다. 이 동안 라디오를 통해 10분마다 뉴스를 들었다. 확실히 큰 충돌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현장에 도착하자 공장문은 확실히 닫혀 있었으며 경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150명 정도의 잘 조직되고 규율이 확실한 캐나다자동차노동조합원들이 공장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상황을 어떻게 요리할 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멋진 광경이었다. 이것이 바로 노동계급의 세상이었다.

자동차노동조합은 명확히 했다: 포드사가 파업을 법에 의거해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생산손실은 훨씬 커질 것이다. 마침내 일 년 정도 지나 이 문제가 법원에 회부되자 일부 기술적인 문제로 소송이 기각되었다. 이 사건은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은 널리 선전되지 않았다. 경제난에 조그만 소식으로 실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떤 전술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중요한 모범이 된다. 사실 처음 노동조합을 수립할 때의 전술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투쟁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진정한 총파업이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었다.

행동의 날투쟁은 199610월 토론토시가 마비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포드사의 탤버트빌 공장처럼 자본가들은 개별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 대해 징계조치와 법원의 명령서 등을 들먹이면서 협박을 가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노동조합은 이 협박을 무시했다. 그리고 하루 동안 토론토시를 마비시키는 행동에 들어갔다.

이 투쟁의 핵심은 대중교통이었다. 법원은 명령서를 발부하여 버스와 지하철이 정상운행 되도록 조치를 취해놓았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20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진지한 파업 방위대를 낮 시간 운행 조가 교대되기 전 한 밤중에 주요 교통 요충지에 보냈다. 이들은 유인물이나 배포하기 위해 파견되지는 않았다. 출근한 몇 명의 멍청한 열성 관리자들과 일부 노동자에 대해 이들은 당연히 계급투쟁의 현장교육을 실시했다. 이렇게 해서 대체인력은 완전히 차단되었고 법원의 명령서는 무시되었으며 대중교통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경찰은 긁어 부스럼이 되지 않으려고 파업노동자들과 대결을 회피했다.

토론토시의 대중교통이 정지되면 자가용 운전자들의 출근 러시로 시내 교통이 엄청난 체증을 겪을 것이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그러나 그날 토론토시 시내는 유령도시 같았다. 출근을 시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몇 개월 동안 고함을 지르고 협박을 하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과 대결하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회사 문을 하루 동안 닫아걸기로 작정했다. 물론 토론토 시는 캐나다의 금융 중심지이고 특히 노동조합이 강력한 도시는 아니다. 온타리오 주 노동연맹 지도부도 처음에는 토론토시를 마비시키는 것을 꺼려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노동조합의 단결력이 확실히 과시했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토론토시 1일 총파업 직후 해리스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급락했다. 대신 노동조합에 대한 지지도는 급상승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현상이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그 동안 정부의 공격을 괜히 참고만 있었네. 우리에게도 힘이 있구나.” 그리고 다음 투쟁 계획에 대해서 논의들이 분분했다. 이제 온타리오 주 전체에 대한 행동의 날을 계획할 차례가 된 듯했다. 이 정서는 널리 주목받았으며 토리당 지지기반인 자본가들은 해리스 정부가 노동자들을 너무 자극한 것 같다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노골적인 공세가 이익보다 해가 더 많을지 모른다고 이들은 계산했다.

그러나 온타리오 주 노동연맹 지도자들은 이들보다 더 걱정이 컸다.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자극하지 않았나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대중의 자신감은 급상승했으며 토론토시 총파업의 성공에 이어 토리당에 대한 반격이 강화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이 나돌았다. 이들은 이에 대해 겁에 질려버렸다. 그러자 이들은 재빨리 이렇게 선언했다: 그 동안의 투쟁으로 노동조합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했으므로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는 투쟁은 없을 것이다. 그러자 곧 대중의 전투성이 차츰 사그라졌다. 그리고 토리당에 대한 지지도는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세 번의 결정적 시점

 

지난 3년간 노동조합은 반격을 통해 해리스 정부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기회를 세 번 맞이했다. 물론 이때마다 위험부담은 있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주요한 승리를 따낼 수 있는 확률은 50%보다 훨씬 높았다. 온타리오 주 공공노동연맹(OPSEU) 소속 5만여 조합원들은 19963월 파업에 돌입했다. 이때가 첫 번째 기회였다. 최악의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공공노동자들의 대오가 무너지지 않자 노동운동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몇 대의 텔레비전 뉴스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온타리오 주 경찰청 소속의 시위 진압조가 해리스의 지시를 받고 퀸즈 공원에서 평화 시위를 하고 있는 10여명의 파업노동자들을 공격했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경찰의 공격을 지켜본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고 했다. 평범한 공무원들이 평화적으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는데 시위진압 경찰들이 시커먼 복장을 하고 이들을 공격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광경은 충격이었다. 경찰이 민주적 권리 등에 신경을 쓸 필요 없이 노동자와 시민을 공격하는 곳은 세계에 널려있다. 그러나 캐나다는 민주적 권리가 존중되는 곳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온타리오 주 노동연맹의 지도자 고드 윌슨은 경찰의 공격이 계속되면 노동조합이 정당방위대를 조직하여 반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물론 이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렇게 할 생각은 그에게 없었다. 그러나 해리스 정부의 폭력행위에 대해 분노한 쪽은 노동조합만이 아니었다. 신부, 목사, 랍비 등 유명한 인사들이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자 주하원 의장인 토리당 의원이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습을 당한 해리스 역시 조사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조사를 통해 드러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토리당과 파업파괴자들에 대해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동조파업을 일으켰을 경우 해리스 정부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토론토시 파업과 함께 다가왔다. 해리스 정부, 법원, 자본가들에 대항해 노동조합이 토론토시를 하루 동안 마비시킨 다음날 25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것은 캐나다 역사상 최대의 시위였다. 이때 노동조합은 잠시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노동계급과 노동 조직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에 비해 해리스 정부와 토리당은 지저분한 소인배들로 보였다. 토론토시의 총파업은 이들과 이들이 대변하고 있는 대기업 자본가들을 뒤흔들어 놓았었다. 이제 모두에게 질문 거리는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떤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가?”였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부가 여세를 몰아 밀어붙일 의도가 없다는 점이 명백해지자 토리당은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몇 주일 내에 모든 상황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그 동안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세 번째 기회는 199710월 교사들의 파업과 함께 찾아왔다. 인민과 노동계급은 해리스 정부의 공격을 받아 의식이 급격히 좌경화되고 있었다. 물론 노동조합 지도부의 성격상 이 현상은 계속 될 수 없었다. 온타리오 주는 미국혁명 과정에서 영국의 국왕에게 충성한 자들이 미국에서 쫓겨난 후 캐나다에 건설한 보수적인 지역이었다. 이 주에서 125천 여 명의 보수적 교사들이 2주일 간 정치파업을 통해 공교육에 대한 토리당의 공격을 패배시키려 나섰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토리당은 교사들의 파업을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위험하고 불법적인행위라고 비난했다. 또한 이들은 파업이 어린이들의 교육권을 침해했다고 공격했다. 주요 신문들과 방송 시사 해설가들도 전부 이런 식으로 떠벌렸다.

그러나 이들의 공격은 먹혀들지 않았다. 대중은 교사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토리당의 교육 개혁에 대해서는 대단히 불만이 많았다. 이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지배계급은 대형 광고, 집중 연구 그룹, 자문위원 등을 대거 동원했다. 우익에게 법과 질서라는 구호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파업에 대한 자본가 언론의 거의 만장일치식 공격도 소용이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해리스 정부 자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법치에 대한 인민의 환상을 깨는데 큰 기여를 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토리당은 의회의 규정들을 뜯어 고쳤으며 야당의 역할을 격하시켰다. 이것을 본 다수 대중은 소위 민주주의 과정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교육 체제를 파괴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를 넓히려는 토리당의 시도에 저항하여 교사들이 법을 어기고 있었다.” 이에 대해 대중은 이들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잠재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현상이었다.

교사들의 파업이 2주 째 접어들 무렵 이들에 대한 지지는 확고했고 지지도가 상승하는 경향마저 보였다. 파업 10일 째인 1997115일 전통적으로 토리당을 대변하는 캐나다 자본주의의 최대 대변지 [글로우브 앤드 메일]지는 해리스 정부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정부는 여론의 지지를 얻는 싸움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교사들의 명백한 불법파업은 수백만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일상생활을 파탄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온태리오주 주민들은 정부보다 교사들의 현실인식을 선호하고 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기 시작하자 이 신문의 사설 위원들은 해리스에게 교사들에 대한 양보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사설이 인쇄에 들어갈 순간 속보가 날아 들어왔다. 이 속보는 즉시 신문의 일면 톱기사가 되었다: “교사들이 파업을 끝낼 지도 모른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굴복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치적 지도력의 위기가 전형적으로 드러났다. 교사들은 투쟁을 원했고 지도자들의 정치적 근성만 있었으며 투쟁은 승리로 귀결될 수 있었다. 크나큰 기회가 이렇게 허비되었다.

 

 

온타리오 주 행동의 날이 남긴 교훈

 

행동의 날투쟁으로부터 중요한 교훈들이 도출될 수 있다. 첫째, 조직된 노동계급은 사회억압에 대한 투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이다. 이 점은 이미 널리 인식되고 있다. 역으로 노동계급이 토리당과의 주요 결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장애인, 병자, 홀 부모, 원주민, 이주민, 피난민, 인종적 언어적 소수자, 경찰 폭력의 희생자, 생활보호대상자 등 억압당하고 있는 계층의 이해를 옹호하여 이들을 해리스 정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한다.

세 번째의 명백한 교훈은 현재 노동조합 지도부가 대단히 보수적이며 근본적으로 친자본적이라는 사실이다. 노동관료집단은 소부르주아 계층으로 노동운동 내부에서 자본의 앞잡이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존 자체가 노동계급 조직의 보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들은 모순적이다. 따라서 대중의 압력을 받으면서 자신의 이해가 위협 당한다고 느끼면 제한적이나마 노동 관료의 일부는 자본주의 합법성의 틀을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경우는 자주 있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동의 날투쟁의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다: 투쟁의 필요성을 누가 제시한다면 평조합원들과 노동 대중은 투쟁할 것이다. 뭔가 중요한 것이 걸려 있으며 소속 조직이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끼면 노동조합 대중은 위험을 마다하고 투쟁한다. “행동의 날투쟁은 이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이것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 지도부의 소심함 때문에 행동의 날투쟁은 토리당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이렇다하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투쟁은 참여했던 대중과 심지어 단순히 투쟁을 목격한 대중들에게 아주 중요한 실전 체험이 되었다. 이것은 측정하기는 약간 힘들 것이지만 앞으로의 투쟁에 매우 중요할 수가 있다. 이 제한된 투쟁은 노동계급이 진정한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총파업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온타리오 주 수백만 대중은 이점을 아주 명확히 인식했다.

교사 노동조합이 파업을 철회하고 나서 이들은 퀸즈 공원에서 마지막 집회를 열었다. 주로 교사들로 이루어진 5만여 대중이 이 집회에 참여했다. 이들 다수가 지도부의 굴복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연단에서 관료들이 연설을 하자 대중의 절반은 분노에 차 총파업! 총파업!”을 외치며 혐오감을 표출했다. 투쟁을 접기는커녕 투쟁이 확대되기를 원한다는 이들의 열망이 이렇게 표현되었다. 이들은 이 투쟁을 총파업으로 전환시켜 법안 160(공교육을 공격하는 토리당의 법안)을 폐기하고 해리스를 타도하기를 원했다.

 

총파업과 혁명 지도력

 

미국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캐나다 조직인 트로츠키주의 동맹(TL) 등 일부 좌익 그룹들은 지금 시점에서 토리당을 타도하려고 총파업을 촉구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전술이라고 생각한다. 해리스 정부가 타도될 경우 사회혁명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대중의 혁명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리스 정부를 타도하는 대대적 파업 투쟁이 혁명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행동의 날투쟁 기간 동안 총파업을 촉구한 것은 혁명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당면 과제로 제기된 목표를 이루려고 총파업을 촉구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투쟁의 다음 단계였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당면 목표로 제시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투쟁이 한층 더 진전되어야 한다.

국제노동운동의 경험에 의하면 대규모 파업은 즉시 혁명 상황을 조성하지 않더라도 상당한 것을 성취할 수 있다. 대담하고 능력 있는 지도부와 기술적 정치적으로 적절한 준비가 필요하다. 대규모 파업은 소규모일지라도 혁명조직들에게 중요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보기를 들어, 1934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줌의 트로츠키주의 투사들은 투쟁을 촉발시켜 공격적인 트럭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 전체에서 총파업이 터져 미니애폴리스는 노동조합운동의 아성으로 돌변했다. 이 도시는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중서부 노동운동의 강력한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트로츠키주의 동맹의 동지들은 동맹이 대중 정당으로 발전하고 나서야 총파업 구호를 제기할 계획인 것 같다. 이들이 그렇게 하겠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레닌, 트로츠키, 미국 트로츠키운동의 역사적 지도자 캐넌 등이 이 문제를 접근한 방식은 결코 아니다.

노동조합 내부의 맑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를 대변하는 강령을 제시해야한다. 노동조합 관료들이 좀 더 전투적이 되도록 압력을 가하는 대신 혁명가들은 자본가들에 대한 이들의 근본적 충성심을 폭로하고 새로운 유형의 지도부를 수립할 필요성을 제기해야한다. 새로운 지도부는 자본가들의 규칙을 준수하는데 헌신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 비이성적 사회체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만들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 I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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