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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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7월호

정세분석제4인터내셔날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48

[제4인터내셔널 창립 50주년]
오늘날 국제주의 혁명가들의 전망
ICU 팜플릿, 1988년 겨울


트로츠키가 제4인터내셔널 창립에서 추구한 목적

트로츠키가 긴급하게 새로운 세대로 계승해야겠다고 여겼던 ‘혁명적 방법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획득한 기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혁명세력과 여타 세력들을 활용하여 아무리 작은 투쟁이더라도 그것을 통해 사회변화를 성공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의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1917년에 레닌이 지도했던 러시아 혁명가들이 고안한 방법이다.
혁명적 물결은 갑자기, 그리고 급속도로 퇴조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들은 노동계급운동이라는 자산을 이용하여 역사의 흐름을 끊으려고 했다.
바로 이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은 전체노동자계급과 한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을 필요로 한 것이었다. 노동자계급과 공산주의자들은 몇 년 동안 잘못된 노선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지금까지도 파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아직 사악한 ‘인민의 아버지’를 위한 대포밥으로서 종말을 고할 것이 분명한 길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다가오는 혁명적 위기를 통해서 이들 공산주의 세대가 제 4인터내셔널로 합류하기를 바랐다.
노동계급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어 실망했지만, 여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대의 세대는 패배뿐만 아니라 성공도 경험했다. 어쨌든 그들은 파업과 봉기, 그리고 혁명을 경험했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를 완전히 추구했고, 그리고 나서는 공산주의의 정수인 볼셰비즘이라는 혁명적 운동을 받아들였다.
이들 세대는 혁명적 물결의 고양과 함께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같은 깃발아래서 함께 싸웠다. 그들은 이러한 공동의 투쟁을 통해서 진정한 국제주의자가 되었다.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의 탄생과 함께 새로운 조직으로 합류하고 새로운 강령을 받아들인 것, 그 자체가 트로츠키가 언급한 ‘혁명적 방법’을 실제로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들 세대는 좀 더 의식적인 국제주의자들로 성숙했다.
또한 이들 세대는 이 시기를 경험하면서 국제주의사상을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 여러 가지 사건들에 개입하는 합법 또는 비합법적인 조직화 방식들을 찾아냈다. 1920년대 초반에 공산주의 의식과 단결, 그리고 도덕을 기초로 정치-군사적 목적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세포들과 중핵들의 네트워크는 자본주의 전 세계를 뒤덮게 되었다. 그것들은 자본주의 질서에 반대하는 혁명적 효소로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들 세대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경험이 풍부한 부대는 소련에 있었다. 1920년대 말이 되자 볼셰비키 노장세대는 지치고 타락하여 점차 스탈린 관료체제에 굴복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활동적이었다. 바로 이들 세대가 처음에는 소련에서 트로츠키반대파에서 트로츠키가 축출되고 소련에서 추방당했던 1927~1929년 이후에는 국제좌익반대파에서 전투적 중추를 이루었다. 이들 세대는 제3인터내셔널의 다양한 부위에서 투사들에게 스탈린이 틀렸다는 점을 확신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투사들은 러시아 외무파견단원에 의해, 또는 심지어 모스크바로 여행이나 회의과정에서 접선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는 혼란스러워 했고, 일부는 영향을 받았고, 일부는 설득되었다.
1920년대 말까지도 스탈린독재체제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체제는 좀 더 신중하게 상황에 대처하면서 영향력을 강화했다. 인민들을 구속시키고 심지어 추방시켰다. 늙은 세대들과는 다르게 젊은 세대들은 오랫동안 스탈린에 반대해서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똑같이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이들 세대들의 활동을 지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단을 모두 잃게 되었고, 이들 세대들은 감옥과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고, 특히 보르쿠타 우랄산맥 북단의 구릉부를 흐르는 보르쿠타강(江)을 끼고 있는 탄광도시. 북극권에서 북으로 150㎞ 떨어진 곳에 위치.
에서는 1938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2천에서 3천 명 가량의 트로츠키반대파들이 소규모 단위로 체계적으로 처형당했다.
그럼에도 소련 내에서 토론과 논쟁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개적인 자리를 피해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게페우 국가정치보위부(1922~1935). 체카의 후신.
의 지도적 지위에 있었던 이그니스 라이스는 스탈린의 정책들에 반대하는 정당한 비판을 불러일으키면서 좌익반대파를 불러 모았다(곧바로 그는 바로 게페우의 요원에게 살해되었다). 아마도 다른 이들도 과거를 부정하고 정권에 굴종해온 생애의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정권에 대한 비굴한 굴종이 더 이상 삶을 보증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다.
1930년대 초에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해 무한한 가치를 가질 수 있었던 거의 수만 명에 달하는 투사들이 소련 안에 있었다. 심지어 과거 공산주의 활동가들이기도 했던 인물들이 소속되어 있는 비밀경찰조직 안에도 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억압을 받아 이들 투사들로부터 고립되면서, 그는 그 거대한 잠재력을 개봉하지 못하고, 당분간 다른 나라들의 노동계급운동에 희망을 쏟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세계적인 정당으로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에서, 트로츠키의 정책은 공산주의적 강령과 방법들의 힘, 그리고 볼셰비키에 의해 발전된 맑스와 엥겔스의 정치적 전통에 기초했다. 또한 그것은 전 세계를 통틀어 수 십 만은 안 되더라도, 수 만 명에 이르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공산주의 투사들과 이들 투사들이 이끄는 몇 백만 노동자를 바탕으로 삼고자 했다.
물론 이들 공산주의 투사들의 일부는 타락하여 교정이 불가능했고, 폭압적인 스탈린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스탈린은 이들을 통제하려고 그 일부를 인터내셔널과 각 부문들의 지도적 지위에 배치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투사들에 대한 지도력을 회복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1933년에 트로츠키는 제3인터내셔널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하면서, 필사적으로 노동계급 운동, 특히 독일 노동계급과 연결될 방법을 찾고자 했다.


독일공산당 안의 투사들

1932년 선거에서 거의 6백만 표를 얻은 독일공산당은 노동자정당이자 대중정당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노동계급의 정당인 독일공산당은 가난, 실업, 무자비한 공격의 힘든 시기를 지나 시위, 파업, 봉기와 함께, 죽음과 구속, 정치활동금지로 끝난 혁명을 경험했고 비합법 활동의 시기를 견뎌냈다.
독일공산당은 계속해서 일어난 이러한 파업들과 수많은 쓰디쓴 투쟁들 속에서 단련된 경험이 풍부한 투사들을 지녔다. 또한 그 당은 풍부한 정치의식과 문화를 지니게 되었으며,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조직화 기술의 보고가 되었다.
이들 공산주의 세대의 대다수는 1차 세계대전 때 10대 후반이었다. 1914년에서 1923년 사이에 그들은 감옥과 비밀활동을 모두 경험했다. 전쟁동안, 그리고 1919년의 베를린과 바바리아에서 일어난 봉기가 실패하고 나서, 또다시 1921년과 1923년에 터진 혁명적 사건들이 있고 난 뒤에도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억압과 탄압은 거의 중단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맞서 끝없이 투쟁했다. 그들은 노골적인 반동들에 맞서는 것만큼이나, 제국주의의 경비견인 사회민주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전혀 환상을 갖지 않게 되었다.
노동계급출신이건 또는 중간계급출신이건 간에 이들 젊은 공산주의자 대부분은 1917년과 1918년에 반전 유인물을 배포하려고 군대의 담을 넘었다. 그들은 이러한 활동과 군대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거나 또는 군에서 탈영했기 때문에 교도소에 갇혔다. 교도소에 갇히지 않은 이들은 1918년의 병사 봉기에 참여했다. 가장 어린 층을 포함하여, 그들 대다수는 선원들 사이에서 또는 베를린의 거대 군수품 공장에서 벌어진 파업을 이끌거나 참가했다. 특히 1918년 3월에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에서 트로츠키가 보인 태도를 지원하려고 그들은 파업을 이끌었다.
공산당은 처음부터 공세를 위한 준비로서 뿐만 아니라, 자위를 위한 비합법 군사조직을 설치하였다. 그것은 레닌이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가입조건으로 요구한 21개 조항들 가운데 하나였다. 공산당과 노동계급운동은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계급전쟁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을 얻었다.
독일공산주의자들 가운데에는 많은 혁명 투사가 있었다. 트로츠키는 그들의 가치를 알았고, 그러한 이유에서 그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고자 했다. 물론 그들에게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적 공산당에서 전투적 활동 덕분에, 미래의 투쟁들을 이끄는 혁명지도력, 또는 그것을 위해 필요했던 대중운동을 이끄는 중간지도력이 될 수 있었다.
노동계급운동은 자격 있는 지도부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것은 특히 독일에서 더욱 그랬다. 자본가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카우츠키, 그리고 레오 요기에스를 살해하면서 노동계급운동에서부터 지도자들을 빼앗아갔다 - 정치적 숙청은 스탈린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그러한 임무는 스탈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용한 방법들에 의해 완수되었다. 모스크바는 모든 정치적 전환을 독단적으로 결정했고, 인터내셔널은 모든 오류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거부했으며, 지도자들은 완벽하게 제거되었다.
스탈린이 추구했던 것은 오로지 ‘정책의 변화, 지도부의 교체’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독일공산당을 포함하여 모든 유럽의 공산당은 진정한 독자적 지도력, 모든 경험들을 빨아들여 훈련되고 숙련된, 단련된 지도력을 이룰 수 없었다. 모든 사건들은 공산당의 젊은 층에게 상처로만 각인되었고, 당의 지도부는 과거의 실수에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새로운 개종자들로 교체되었다.
스탈린 관료집단이 조종하는 장교들과 관리인들은 전혀 알맞지 않은 시점에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를 반복했다. 스탈린관료집단의 지시에 따라 그러한 이미지에 들어맞는 인물들이 독일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했다. 지도권은 레비-브란틀러-탈하이머에서 피셔-매슬로우로, 뉴만-텔만으로, 그리고 뉴만을 제거하고 텔만 등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스탈린주의적 방식은 지도력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명목상으로만 ‘좌익’인 불구화된 텔만은 급격한 상황변화를 움켜쥘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위기의 시기에 혁명정당을 이끌 능력이 전혀 없었다.
1933년 3월 한 달 사이에 히틀러는 이미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의사당 방화사건 히틀러와 나치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1933년 2월 27일. 히틀러가 수상이 된지 불과 1개월여 만의 일이었다)을 확대조작하여 그 범인으로 네덜란드 출신으로 정신병력을 가진 마리누스 반 데어 뤼베라는 청년을 현장에서 체포한 뒤 이를 공산당의 파괴 공작으로 이용했다. 나치는 그날 밤 안으로 4,000여 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좌익을 공범으로 몰아 체포했다. 놀라울 만큼 신속한 조치였다. 수상이 된 히틀러는 국가안보가 위태롭다며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겁박(劫迫)하여 '인신보호법'을 무력화시키는 '긴급명령' 법안에 서명토록 했다. 이 날 이후 독일에서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법은 없었다.
이 일어나고 나서 공산주의 활동가 수천 명의 가택을 습격했고 책들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다수는 감옥에 갇혔고 수천 명의 활동가들은 지하로 숨어 외진 곳에서 피곤한 잠을 청해야만 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허용한 마지막 선거에서 공산당은 여전히 5백만 표를 얻었다. 그것은 전보다 몇 백만 표가 적은 것이었지만, 그 당시 조건에서는 놀라운 성과였다.
독일에서 볼셰비키의 전통과 계급투쟁의 방법이 확산되는 동안, 불행하게도 러시아에서는 스탈린 관료주의가 젊은 독일공산주의 세대의 활력을 차단하면서 자리를 공고히 했다. 그것은 갈수록 우스꽝스러워졌다. 관료기구는 극단에 빠진 수만 명의 활동가들로 이루어졌다. 그러한 만큼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극좌 모험주의로 전환시키려고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레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중부유럽 전체에서 그 대다수가 경험이 부족했던 활동가 군단을 사로잡았고 이들을 훈련시켰다. 1919년과 1921년, 그리고 1923년에 독일에서는 당이 금지되었고 당원들이 박해를 받고 나서, 땅속의 개미들과 같은 작업을 통해 공산주의 연결망을 재건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경험은 비합법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기술처럼 공산주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평범한 것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 작업을 재개하려고 효과적인 길을 찾아 이주하는 것도, 볼셰비키 세대 전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곧 당연한 일이 되었다.


다른 유럽 공산당들 안의 투사들

무솔리니, 히틀러, 그리고 프랑코의 제복을 입은 깡패들은 유럽 혁명의 개미탑을 부수었고, 그 피해는 막심했다. 그러나 이들 갈색 또는 흑색제복의 독재 권력이 희망과 전통을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었다. 좀 더 큰 피해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노동계급운동 지도부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
나치의 테러가 곳곳에서 조직들을 재건하려는 공산주의 투사들, 그들 가운데 가장 활력 있고, 가장 확고하며, 철저히 준비되어 있는 투사들의 시도를 단념시키지는 못했다. 나치의 테러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트로츠키여 영원하라!’, ‘붉은 군대여 영원하라!’와 같은 공산주의 구호가 베를린의 담벼락에서 꽃피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나치의 테러가, 대부분이 공산주의 선전물인 지하의 저항 선전물이 전국에 걸쳐 배포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활동가들은 필요한 것들을 재창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과거보다 훨씬 더 확고한 정책이 필요했다. 그때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이미 정치적으로 죽어버렸고, 이미 오래전부터 올바른 정책을 제공할 수 없었다.
활동으로 복귀한 허약한 조직들 모두는 방향키 없는 배와 같았다. 각 나라들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부의 투사들은 그들의 이상이 침몰하지 않도록 열정과 능력을 모으려고 분투하면서 폭풍우에 맞섰다.
히틀러의 독일에 비해서는 억압이 덜했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 투사들은 소규모 지하지역조직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올바른 공산주의 노선에 기초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모스크바의 스탈린 관료기구는 이탈리아의 투사들을 보르디가-파시스트, 또는 보르디가-트로츠키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답했으며, 이탈리아공산당에게 정부에서 왕과 연합할 것을 강요했다.
스페인에서 프랑코가 승리했지만 일부 투사들이 포기하지 않고 정치적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루마니아에서 혁명운동을 경험한 당 중간간부인 키노네스와 같은 투사들은 1941년 4월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스페인공산당 지하지도부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보낸 교사로서 1931년에 스페인에 도착했다. 공화군이 패배한 뒤 감옥에 갔던 그는 정치활동과 지하활동에 대한 지식 덕분에 다른 투사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었다. 그는 모든 유용한 세력들을 재조직하려고 모든 지역에 대리인을 파견하기 시작한 스페인 공산당의 내부 지도력으로 인정받았다.
이들 공산주의 투사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제4인터내셔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이 그것에 대해 알았을 때에는 단지 증오와 경멸을 보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부가 그들에게 강요한 정치적 탈선에도, 그들은 거대한 가치를 지닌 투사들이자 핵심 공산주의자들로 남아 있었다. 그러한 수만 명의 투사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트로츠키는 그들의 현재 감정이 어떠하건 간에, 일정한 단계에서는 스탈린 관료체제의 배신적 정책이 재난으로 끝난다는 점에 대해 눈을 뜰 것이라고 바랐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정치적 깃발을 들어 올리는 것은 그것을 준비하는 것, 그들이 변화될 수 있도록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국 노동계급운동의 활력

트로츠키가 인터내셔널 재건의 기초로 삼고자 희망했던 노동계급운동 가운데 특별한 부위가 있었는데, 미국의 새로운 투사세대로서 그들은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개척자들’이라 불리는 직업적인 조직가들, 노조선동가들, 정치선동가들이었다.
유럽의 노동계급운동은 연계망과 지하활동을 재건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반면에 똑같이 커다란 위기에 빠졌지만 미국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운동이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규모로 벌어졌다.
미국의 억압적 상황에서 노조조직화의 불길은 목적의식적인 정치지향성을 받아들였다. 때때로 자연스레 공격적으로 변한 투쟁들은 많은 경우 한 지역에서 시작되어 좀 더 먼 곳으로 넓게 확대되었다. 보기를 들어 1934년에 섬유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남부의 외지에서 시작되었지만, 미국의 다른 지역들로 퍼져나갔고, 4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비행대대’라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공장에서 공장으로 옮겨 다녔다. 한 곳이 폐쇄되면 차에 올라타 다음 공장으로 이동했고, 피켓 대열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경찰의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스탈린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로 이루어진 공산주의 투사들은 CIO(산별노조회의)를 인정받으려는 투쟁의 물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새로운 산별노조는 오래된 AFL(미국노총)에 도전했다. 미국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계급투쟁에 개입함으로써 훈련되었다.
이러한 투쟁들은 혁명적 창조력을 배양시켰고, 대다수가 지식인들로서 노동계급운동에서부터 분리되어있던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을 자극했다. 트로츠키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모든 동지들이 당에 대한 보편적 교감을 갖도록 만들고, 한정된 지역, 특히 뉴욕을 넘어서서 전국적 기반을 갖는 당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이를 위해 뛰어난 동지들이 전국 도처의 산업중심지들에 파견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최선은 일정한 지역 또는 그 지역의 일정한 산업부문을 ‘획득’하려고 이들 동지들을 두세 명 정도씩 전담 조들로 편성하여 보내는 것이다.”
1939년에 트로츠키는 미국 동지들의 활동을 지도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미국공산당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던 혁명정당.
당원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을 필요성과 노력을 강조했다.
논쟁 과정에서 수많은 장애물들과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장애물들과 어려움들의 세부적 문제들에 대해 잘 알았고 신중히 고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논증 방법은 늘 일치했다. 제3인터내셔널과 관계하고 있는 공산주의운동을 건설할 제 4인터내셔널의 성장을 위한 비옥한 토양으로 삼고자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그 과업은 두 가지 측면에서 힘든 것이었다. 첫 번째는 노동자 시각에서 이 정당과의 타협에 관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이 정당이 할 수 있는 한 많은 대열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포기할 줄 모르는 끈기 속에서만 성공할 수 있었다. 조직이 각성시키지 못한 노동자, 특히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한 노동자의 협소한 시야를 깨뜨리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우리는 조급함 때문에 노동자를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것은 옳지 않다.
제3인터내셔널이 제2인터내셔널에서 나온 것처럼, 트로츠키의 제4인터내셔널은 대중 가운데 최고의 분자들, 투사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을 획득하면서 제3인터내셔널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세력을 그곳이 아니고서 다른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진실로 살아있는 운동, 이를 테면 여전히 공산주의의 이상과 역량을 가진 하나뿐인 조직인 제3인터내셔널의 정당들과 투사들에 다가갈 수단을 찾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전쟁전야, 트로츠키의 바람

1938년에 트로츠키는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재편하는 것이 곧바로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짧은 시기 안에 혁명적 상승기가 도래하리라고도 기대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나타나는 과정에 대한 많은 경로를 상상했는데, 심지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파시즘의 승리와 전쟁이 남긴 파편들과 폐허들 가운데서 등장하게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1938년에 트로츠키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제3인터내셔널의 공산주의 세대가 혁명의 길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찾는데 실패했다는 점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시기에 제국주의 자본가계급들은 서로를 패배시켰고, 자국의 노동계급을 무력화시켰는데, 이제 그들은 서로간의 청구서를 청산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을 전장으로 몰아내는 것을 뜻했다.
또한 그는 피할 수 없는 소련의 개입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제국주의 진영들은 전쟁 때문에 약화되어 가는 자신의 진영으로 소련을 편입시키려고, 갈등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이 적군을 장악한 상태에서 소련의 전쟁개입은 그 허약성을 드러내면서 사회적 폭발을 점화시킬 수 있는 패전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마땅히 러시아 부르주아 세력은 전쟁참여를 한쪽 제국주의진영을 도우면서 노동계급에게 도전할 기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반대로 러시아 노동계급도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관료체제에 도전할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임박한 전쟁이 러시아 노동자계급을 혁명의 길로 밀어붙였다면, 그것은 트로츠키가 러시아 노동자계급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트로츠키가 제4인터내셔널을 띄운 것은 오직 그러한 가능성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립 초기 제4인터내셔널의 상태

갓 탄생한 인터내셔널은 어떤 것이었나?
물론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분석과 전망, 그리고 계급투쟁의 방법론을 담은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자산은 그것뿐이었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 동안 가장 큰 반-나치 첩보망 가운데 하나였던 ‘붉은 오케스트라’(스탈린 관료체제는 히틀러에 맞서 싸우는 반대편 제국주의 진영의 이익을 위한 활동을 이 조직에 강요했다)의 설립자인 레오폴드 트레퍼 나찌 점령하의 유럽에 "붉은 오케스트라"라는 첩보망을 건설하고 지도했으며, 이런 영웅적 실천으로 루비앙카에서 10년 형을 받았던 폴란드 유태인 공산주의자.
마저도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기억에 찬사를 보냈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스탈린에 맞서 싸웠고, 그렇게 한 하나뿐인 사람들이었다. … 하지만 그들은 스탈린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일관된 정치체계를 가졌다는 우리에 비해 엄청난 이점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런 명예를 얻을 자격이 있다. 그들은 고집을 꺾지 않아 얼음 깨는 도끼에 의해 최후를 맞았던 그들의 지도자의 뒤를 이어 최후의 순간까지 스탈린주의에 맞서 투쟁했고, 그들은 그렇게 했던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 오늘날,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한 때 늑대들과 함께 울부짖는 소리를 냈던 자들을 비난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스탈린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일관된 정치체계를 가졌다는 우리에 비해 엄청난 이점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그들은 배반당한 혁명을 목격하는 깊은 고통 속에서도 무엇인가 매달릴 것을 가지고 있었다.” - 위대한 게임(1977) 中 -

물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이 귀중한 자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또한 그들은 설득을 위해서는 올바른 사상과 일관된 강령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1938년에 공표된 제4인터내셔널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이 약점은 그가 세계정치상황의 전반적 특징을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정치적 위기로 풍부하게 기술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제 4인터내셔널이 기초로 하고 있는 이행기 강령에서 매우 기본적인 요소였다.
그렇다. 세계적 노동계급 혁명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트로츠키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지도력을 형성하는데 실패했다. 그가 전망으로 삼았던 살아있는 노동계급운동, 심지어 그것의 한 부위라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제2, 제3 인터내셔널의 지도력에, 또는 노동조합운동의 지도력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던 시도는 실패했다.
이미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소속 투사들과 지부들이 세계적으로 산재되어 있지만, 그 숫자는 미미했다. 1936년에 파리에서 열린, 제4인터내셔널 출범을 위한 총회에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 소련, 미국에서 9개국 대표들이 참석했다. 출범총회 당시부터 이미 다른 22개국의 그룹들은 불참 사유서를 보내왔다. 이들 그룹들 가운데 일부는 독재와 억압 때문에 지부 대회를 여는데 실패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너무도 허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직 트로츠키주의 투사들은 거의 5개국에서만 존재했다.
하지만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주된 약점은 그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아진 투사들의 정치사회적 배경, 정치적 경험, 노동자계급 또는 노동계급운동과 관계에 있었다.
그럼에도 1928년에 트로츠키주의를 받아들인 미국공산당 설립자의 한사람인 제임스 캐논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들도 있었다. 1927년의 중국혁명이 패배하고 나서 트로츠키주의로 결합한 중국공산당의 설립자 진독수도 예외적인 경우이다. 어쨌든 일본 점령하의 중국에서 장개석에 의해 수감되고, 그 때문에 고립된 그는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단절되었고,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트로츠키주의 투사들의 압도적 대다수는 지식인들이었다. 과거 정치적 경험을 가지고 있던 투사들의 대다수는 공산당이 아니라, 사회민주당 출신이었다. 공산당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그 정당이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의 통제 하에 있던 짧은 기간 동안 당원으로 있던 투사들이었다. 그러한 당들에서 그들이 배운 정치는 레닌주의나 볼셰비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좌익반대파에 결합하기 전 몇 년 전에 제3인터내셔널에서 나온 투사들의 대부분은 이미 좌익이었다. 아직 그들은 볼셰비즘과 제3인터내셔널의 진실된 혁명적 전통을 젊은 투사들에게 계승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트로츠키의 아들 레온 세도프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지도부가 되었으며, 1938년 32세에 파리의 병원에서 유괴되어 병원침대에서 살해된다.
처럼, 독일의 투사 루돌프 클레멘트 NKVD(소련 비밀경찰) 간부. 1938년 5월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암살되어 센 강에서 머리없는 시체로 발견.
처럼, 히틀러의 깡패들에게, 그리고 주로 스탈린의 깡패들에게 살해되었다. 스페인의 안드레스 닌 스페인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의 지도자. 1937년 6월 체포되어 스탈린의 충복 오프센코에게 살해됨.
처럼 어떤 이들은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해갔다.
사실상 1938년의 제4인터내셔널은 1933년의 좌익반대파시절보다 더 허약했다. 게다가 1933년에 좌익반대파를 구성했던 이들 가운데 3/4은 그 뒤 트로츠키주의로부터 이탈했다.
트로츠키는 제4인터내셔널로 합류한 이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에 대해 항상 세심하게 평가했다. 1939년에 그는 이렇게 썼다. “이러한 상황이 독특한 그룹들을 우리의 깃발 주위로 모았다. 시류에 따라 휩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용기 있는 분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들의 기질이었다. 다음으로는 규율이 없고, 늘 좀 더 급진적이고 자율적인 경향을 찾았으며, 우리의 경향을 선택했지만 그들 대다수가 전체노동운동으로부터 다소간 분리되어 있는 나쁜 기질의 지식인 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중한 가치와 함께 불가피하게 부정적인 측면도 갖고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분자는 대중들과 연결되지 못한다. 또한 모든 혁명운동의 초기에 사회적구성은 노동자들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인들 또는 기존 조직들에 불만을 가진 지식인들과 연결된 노동자들이다. …… 우리 모두는 우리 조직의 사회적구성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 그것을 바꿔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구성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반대로 객관적 상황과 우리의 역사적 임무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트로츠키는 이 시기를 이렇게 서술한다. “새롭게 태어난 제4인터내셔널의 사회정치적구성이 객관적 상황 때문이란 점은 너무도 명백하다. 10년 또는 15년 전부터 혁명운동의 침체기는 물론, 노동계급운동의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파시즘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공식적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가장 강력한 조직이 되었을 때부터 끝없는 패배가 이어졌다.”
제4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을 때, 스탈린주의는 실제 노동계급운동에서부터 혁명적 맑스주의 운동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한편으로 이것은 전체 세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분자들을 구속시키거나 살해하는 물리적 방법으로 완수되었다. 또 다른 방법은 전 세계 노동계급 앞에서 러시아혁명과 볼셰비즘의 상속자가 스탈린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제3인터내셔널 내에서 좌익파에 대한 결정적인 투쟁의 시기동안 스탈린주의자들은 ‘제3기’의 극좌적 행보를 취했다. 이러한 기만적인 급진적 행보는 그 뒤 뒤따른 ‘인민전선’이라는 극우적 행보로 가는 길을 놓았을 뿐인 일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주의적 포장 때문에, 스탈린주의는 더 온건적이고 덜 혁명적이라는 악선동의 덫으로 좌익반대파를 잡는데 성공했고, 결국 고립시킬 수 있었다.
객관적 조건들이 혁명운동의 상태를 규정했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지적했던 것처럼 혁명가들의 임무는 상황을 분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거나, 자신들이 그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실패했고, 그 뒤 50년 동안 계속해서 실패해 왔다.
제4인터내셔널의 그러한 상태로 인해 트로츠키 암살이라는 비극이 벌어졌다. 트로츠키의 죽음으로 운동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지만, 그만이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지도자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제4인터내셔널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개별적 능력을 떠나서 혁명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한 전통의 하나뿐인 상속인이었다. 더욱이 트로츠키는 계급정책을 분명하게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운동의 경험을 지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만이 그러한 정책을 위해 전시 또는 전후에 제3인터내셔널의 투사세대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충분한 신뢰와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혁명적 노동계급운동, 특히 러시아혁명과 볼셰비즘운동에서 축적된 경험을 계승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은 이러한 경험과 연결될 수 있는 사활적 고리를 깨뜨렸다. 이것이 바로 1940년 8월 21일에 코요아칸에서 그가 살해된 이유였다.


트로츠키 사후 제4인터내셔널의 비극

1920년대의 혁명세대와 제4인터내셔널 투사들과 살아있는 고리는 트로츠키의 죽음과 함께 부서졌다. 트로츠키의 유산의 공식 상속인이 된 제4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제3인터내셔널이 살아있을 때의 현실적이고 조직적인 혁명경험을 빨아들여 전진해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트로츠키에 대해 충성했던 이들은, 기껏해야 혁명 강령을 담은 문서들을 떠받들면서 이론적 수준에서 혁명적 고리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트로츠키주의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다른 많은 이들과 비교했을 때, 이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동계급혁명을 위해서 싸우는 혁명적 공산주의자로서 스스로를 트로츠키주의자로 여기는 전 세계의 투사들과 그룹들이 존재하는 것은 이들 동지들 덕분이다. 하지만 노동계급혁명을 위한 새로운 세계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제4인터내셔널 건설의 목적이자, 존재이유였던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트로츠키가 죽고 나서 몇 년이 지난 뒤, 제4인터내셔널을 구성하고 있던 투사들과 조직들은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극적인 상황에 부딪혀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특히 전쟁 직후 제4인터내셔널의 무능력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 시기는 제4인터내셔널의 건설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기회의 시간이었다.
제4인터내셔널과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전 세계의 모든 지지자들에 대한 호소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운동 안에서 영향력이나 비중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실제적인 연결고리도 갖지 못했다.
혁명적 맑스주의에서 어떠한 영향도 받지 못했지만, 현실 계급투쟁은 계속되었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실질적인 개입능력이 없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는 과거의 유물이고 단지 작고, 무능력하며 어리석은 분파들의 형태로서만 유지될 뿐이라는 반대파들의 끊임없는 악선동을 피할 수 없었다.
제4인터내셔널의 역사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없을 때, 이것은 가끔 반대파를 기쁘게 하고 동지를 고통스럽게 하는 구호와 노선에 대한 논쟁, 분열로 트로츠키주의자를 이끌곤 한다. 실제 계급투쟁에서 전혀 중요한 위치에 있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노동계급운동에 관계해보지 못한 투사들은 행동을 말로서 대치하는 유혹으로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말만으로 성과를 얻을 수는 없다. 분열되건 아니건 간에 관계없이 영향력이 미미한 상황이라면, 투사들이 분열을 피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트로츠키 사후, 운동역사에서 최악의 모습은 제4인터내셔널의 정책에서 나타났다. 각자가 전통의 계승자임을 주장했던 수차례의 분열 이후, 각 나라 지부들 대부분은, ‘효과적 방식’이란 이름으로, 좀 더 정치적 영향력이 큰 경향들을 추종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흐름을 정당화했다. 어떤 때는 단지 전술적인 것이라며, 어떤 때는 정치적 또는 이론적으로 트로츠키주의의 전통이라며 정당화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전체적으로건 부분적으로건 혁명적 공산주의의 원칙 자체를 포기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이고 조직적인 독자성, 특히 장ㆍ단기적인 연합이 필요할지라도 지켜야만 하는 혁명적 노동자정당의 독립성을 보존하고 방어하고, 확립해야 할 의무를 어기고 상처를 입혔다.
이처럼 이들은 더 이상 노동계급을 대표하지 않았거나, 사실상 대표하지 않았던 사멸해가는 정치세력들에 휩쓸렸다. 이들은 트로츠키주의 투사들을 그러한 정치세력에 종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세력들이 강요하는 반노동자계급적 정책을 사실상 돕는 것으로 끝났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치하의 프랑스에서 몇몇 트로츠키주의 그룹들이 ‘레지스탕스’, 즉 스탈린주의자들과 드골파민족주의자들을 지지했던 것이 이러한 사례였다.
또 다른 사례는 미첼 파블로가 제4인터내셔널은 스탈린주의자들, 사민주의조직들과 통합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1950년 전후의 시기였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몇 년 또는 심지어 몇 세기 동안은, 이러한 조직들만이 자기도 모르게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블로가 주창한 전환은 냉전이 만들어낸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혁명가들이 느낀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10년 동안 성장했던 기회주의적 노선의 극적인 논리적 귀결이기도 했다.
그 뒤 1950년대에,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과 파블로 자신은 트로츠키로부터 받아들였던 정책들과 이론들을 조금씩 포기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는 데, 그것은 혁명적 공산당과 혁명적 노동자계급을 대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체계적으로 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혁명적 공산당의 건설을 포기했다.
이 때문에 이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연이어 티토, 마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카스트로, 호치민, 아라파트, ANC, 티바우, 신페인 티토:유고슬라비아의 민족주의지도자, 아라파트: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지도자, ANC:남아프리카민족회의,
티바우:뉴칼레도니아의 민족주의자, 신페인:아일랜드 민족주의정당
등등의 지도자들 또는 조직들에 편승하고자 했다. 이것들은 많은 사례들 가운데 단지 일부일 뿐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언제나 다른 트로츠키주의분파들로부터 비판받았다는 점도 지적해야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판은 근본적 차이가 아닌 사소한 입장차이일 뿐이었다. 1950년대에 프랑스에서 오늘날의 LCR과 PCI의 선배들인 ‘PCI’ LCR: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PCI:국제공산당
의 두 분파가 서로 싸웠던 것이 그러한 경우였다. 그들 가운데 한쪽은 알제리의 FLN을 지지한 반면, 다른 쪽은 MNA FLN:알제리민족해방전선, MNA:알제리민족운동
를 지지했다. 하지만 FLN과 MNA는 모두 사회주의나 노동자계급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민족주의 조직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제4인터내셔널은 설립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노동계급 안에서 지지자는 확대되지 못했고, 계급투쟁에 대한 영향력도 갖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그룹들은 더 이상 결속을 유지하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특히 트로츠키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면 비웃는 자들을 위해,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스탈린주의의 왼편에서 살아남은 오직 하나의 경향이라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은 트로츠키주의 강령의 타당성을 증명할 뿐이다. 그것은 또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심각한 정책적 오류에 맞서 강령을 방어한 투사들의 영예이다.
아무튼, 국제공산주의자동맹(ICU)은 제4인터내셔널의 전통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조직들 외부에서 발전해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혁명적노동자계급의 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이라는 근본문제에 대한 어떠한 타협에서부터도 자유로운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하나뿐인 길이었다. 그러나 ICU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트로츠키주의 강령을 기초로 발전해 왔고 트로츠키주의 운동과 가능한 많은 연계를 시도해 왔다. 트로츠키주의 강령에 의존하고 있는 세계의 모든 투사들과 조직들의 존재는, 그 강령과 관련하여 많은 모순이 있었지만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자신을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일부로 여기고, 모든 약점이 있지만 이들과 연대감을 느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이다.


국제주의 혁명가들의 희망의 기초

우리 운동의 대차대조표-자산과 채무-는 그러하다.
객관적으로 어려웠던 조건들에 대해서도 짚어야만 한다. 전반적으로 혁명적이지 못했던 역사적시기동안, 혁명적 작업을 통해 회원들을 훈련시키고 혁명조직을 단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난 몇 십년동안 혁명적 상황으로 이끌 수 있었던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움켜쥘 방법을 배우지 못한 혁명가들에게 용이한 단기간 안에 제2, 제3의 기회가 이어지는 역사적 시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부터는 그러한 면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에 유리한 긴 소강기는 식민지에서 벌어진 혁명의 물결로부터 사실상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시장경제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열광적으로 전 세계 곳곳을 휩쓰는 동시에 분출한 경제위기로 인해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상황은 세계노동계급혁명운동의 부활과 그 이름에 걸맞는 인터내셔널 재건을 위한 유리한 조건들을 형성시키고 있다.


제3세계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 소련과 동유럽 블록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지칭.
의 농업적 특성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30년, 특히 지난 20년 동안, 혁명적 변화는 대부분 제3세계 국가들, 보통 ‘신흥공업국’이라고 일컫는 나라들과 경제가 훨씬 낙후된 나라들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혁명과는 전혀 다르다. 산업혁명기에 견주어 볼 때 3배 이상 짧은 기간 동안 백배는 아니더라도, 열배 이상 큰 규모로 대중의 생활조건이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최근의 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정점에 있는 런던과 뉴욕이 지난 어느 때에도 도달하지 못했던 도시화와 노동계급의 집중화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카이로, 자카르타, 부에노스아이레스, 캘커타 각각 이집트,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의 수도와 인도 동북부 항구도시,
, 서울의 인구는 천만 명을 돌파했다. 마닐라, 테헤란, 이스탄불15) 각각 필리핀과 이란의 수도, 터키의 서북부도시
, 그리고 콜롬비아의 보고타도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 현재 이들 도시들은 모두 모스크바, 시카고와 같은 수준이며, 파리에 근접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로, 북경, 상해와 같은 새로운 거대도시들은 인구 천오백만 명으로 한 수준 더 높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상파울로와 멕시코시티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2천만 명 이상의 도쿄-요코하마 수준으로 단번에 뛰어올랐다.
이러한 혁명적 변화로 인해 지구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었다. 몇 가지 지표들을 보면 이러한 변화의 규모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기껏해야 18년 전인 1970년만 하더라도, 대다수 도시들은 이미 포화상태였지만 선진국들(Industrialized countries)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이제 끝났다. 1985년부터 균형은 극적으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제3세계의 도시인구는 이제 선진국 도시인구에 비해 3억 명이 더 많다. UN통계에 따르면, 2000년까지 부유한 나라들의 도시인구 증가율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했을 때, 제3세계의 도시인구는 선진국 도시인구의 두 배가 될 것이다.
짧게는 대략 50년 내에 제3세계의 주된 농업적 특성은 영원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노동자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은 약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어느 때 보다 성숙했다.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오랫동안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대한 의심에 시달려왔다. 그들은 세계의 미래가 더 이상 노동계급의 손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의 농민대중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뒤따르면서 자신의 생명수를 포기하였다. 이러한 뒤틀림과 전환은 결국 제3세계이론가들을 추종하고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지지하기 위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식민지혁명운동과 그 민족주의 지도부는 선진국의 좌파 지식인들이 기대했던 약속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대체로 새로운 정권들은 차례차례 새로운 독재 권력으로 변해갔다. 새로운 정권이 쟁취한 독립이란, 단지 그것을 수립하려고 싸웠던 대중에서부터 독립일뿐이었다. 그들은 서방고리대금업자들의 정치-경제적 강요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더 순응했다.
농민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난한 나라의 농민과 그곳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심지어 그것에 맞서는 농민들까지도 노동자혁명을 성공시키도록 만들 수 있는 환상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좌파 전략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답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제국주의로부터 나왔고, 그것은 결정적이었던 것만큼 무자비했다. 좋든 싫든 제3세계 정권에 강요된 세계자본주의시장의 질서와 불평등한 교환법칙은 시골과 산악지역을 공동화시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농촌인구를 도시로 몰아넣었고, 이들은 이미 거대해진 도시노동자계급으로 노동자, 또는 실업자로서 합류했다.
1917년에 레닌의 볼셰비키혁명은 농민들이 압도적이었던 러시아에서 짧은 역사적 지름길을 활용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영구혁명이 의도했던 것은 고도로 집중화된 젊은 노동자계급의 지도하에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뒤 퇴보하기는 했지만 소련에서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거의 10년 뒤에 중국에서는 스탈린주의로 인해 실패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혁명은 제3세계로 일컬어지는 나라들에서 변화를 위한 혁명적 원동력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혁명들이 배반을 당했거나, 패배했거나, 또는 실패했다는 사실은 이제 혁명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노동계급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들이 쇠퇴했는가? 아니다. 제국주의는 잔인한 수단을 이용해 역사를 뒤틀면서 결국 자신들의 고유한 방식, 이를 테면 한편으로는 식민지들을 해방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3세계 농촌을 대대적으로 공동화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혁명을 성취했다.
이러한 도시화는 어떤 실질적인 공업화도 창출하지 않았지만, 이들 나라들의 노동자계급을 그 나라 자본가계급보다 훨씬 강력하게 만들었다. 노동계급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은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성숙했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 혁명의 단계를 통과할 필요도 없게 됐다. 선진국의 노동자계급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나라들의 노동자계급은 이제 자신들을 집중시킨 거대도시로 변한 중심지들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노동자민주주의를 채택해야할 지위에 올랐다.
제국주의자들은 1973년부터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자, 그 위기를 제3세계와 동부유럽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모든 제3세계 국가들에서 급속도로, 그리고 거대한 규모로 노동계급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곧 가시화되었다. 1986년에 필리핀에서, 공산주의 게릴라가 18년에 걸친 산악지역에서 벌인 전투가 정권을 단 1인치도 움직이지 못한 반면에, 약 50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마닐라의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등 거대한 인파가 시위를 벌인 결과, 미군이 늙은 독재자 마르코스에 대한 지지를 중단키로 결정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다음해에 남한을 불 밝힌 노동자파업의 불꽃 역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냉전의 결과로 등장했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군기지 가운데 하나가 주둔하고 있는 이 분단국가는 지난 36년 동안 이른바 공산진영에 대항한 서방의 확고한 전초기지 역할을 해 왔다. 서방의 사장들은 남한노동자들의 순종성과 낮은 임금에 대해 칭찬하곤 했다. 바로 이 노동자들이 순식간에 전 세계 계급투쟁의 선봉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우리 사장들이 원하는 길은 아니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영감을 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이 나라 도시인구는 노동계급을 포함하여 두 배로 증가했다. 1985년에 전체인구가운데 60%를 차지했던 도시인구는 그 뒤 더 증가했을 것이다. 최근의 사건들은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증가와 떼어서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90년 전, 바로 짜르 러시아에서 일어난 발전을 떠오르게 한다. 그 때 자본주의의 발전은 공업중심지들로 수십만 농민들을 떼 지어 모이도록 몰아붙였다. 1905년 혁명은 그 당시 유럽노동계급운동의 전위를 강하게 자극했던 자발적인 대중파업물결의 시발점이었다.
현재와 그때의 유일한 차이점은 이들 나라들에서의 발전이 러시아에서 그랬던 것보다 더 빠르게 연이어 발생할 것이며, 훨씬 대규모적일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소련, 동유럽에서도 도시인구와 노동자계급의 증가는 가속화 되고 있다.
보기를 들어 루마니아의 도시인구는 20여년 사이에 두 배로 늘었다. 작년에는 차우셰스쿠의 억압적 지배에도, 정권을 몇 번이나 밀어붙이는 일련의 파업이 발생하여 거의 봉기수준으로까지 나아갔다.
폴란드에서의 사례는 훨씬 더 뚜렷하다. 이 나라의 산업화는 루마니아와 견주어 볼 때 오래 전에 이루어졌지만 도시인구의 비율은 잘 알려진 정치-사회적 변화 서방의 차관을 끌어들여 중공업중심의 공업화정책을 펴면서 급속도로 공업중심국가로 변해간다. 한편, 경공업과 소비재산업이 급속히 쇠퇴하고,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차관과 무역적자의 부담이 확대되고, 마이너성장이 발생하면서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불만 증대는 연대노조가 탄생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의 결과로 지난 20여 년 사이에 50%에서 60%로 증가했다.
마지막으로 관료 독재가 비교적 순탄하게 자리 잡은 소련도 그러한 사례이다. 지난 20여년 사이에 기존 도시들이 빠르게 성장했으며, 천 곳이 넘는 공업지대는 좀 더 활발해졌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은 1965년에는 단지 50%였지만, 오늘날에는 70%에 달한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훨씬 더 극적이다. ‘카라바흐 민족문제’ 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내의 아르메니아인 거주지로 소비에트연방 수립 후 자치공화국으로 인정되면서 어느 정도 잠잠해졌던 민족 간 분규가 연방해체 후 이 지역의 관할권을 놓고 양국 간 전쟁으로 치달을 정도로 격화되었다.
는 코카서스 산악지역에 사는 여러 민족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서로 다른 민족주의 게릴라들로 쪼개졌던 100년 또는 150년 전의 오래된 언어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이 지역은, 작은 넓이의 카라바흐에만 3천 개의 튼튼한 공장이 존재할 정도로, 거대한 생산력을 가진 단위들로 완전히 산업화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아르메니아대중운동 때문에 소련의 노동자계급이 지방 관료의 본 모습을 보면서 쉽게 민주적 요구에 공감하게 되는 것 보다는, 운동의 현 지도자들이 민주적 요구를 오래된 민족주의적 언어로 개사하는 것이 덜 우려스러웠을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정말 우려한 것은 이러한 요구들을 지지하는 데 쓰인 노동자계급 고유의 무기인 파업행동이었다. 노동계급의 다른 부위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페레스트로이카를 과제로 제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르메니아의 파업을 그리 나쁘지 않는 방식이라고 느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시화과정 모두가 소련, 동유럽, 한국 등과 같은 나라들에서처럼 공업노동자들의 필연적인 증가로 귀결된다고 할 수는 없다. 빈민가에 거주하는 대다수가 실업자인 하층노동자계급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증가하고 있다.


제3세계 노동자계급, 세계노동자계급의 일부

자본의 새로운 예비군인 제3세계 노동자계급을 주변적이라거나, 정치적 중요성이 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1843년에는, 엥겔스가 묘사한 영국노동계급에 비해 어느 정도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바로 그 영국노동계급에 고무되어 자본론에서 자본가계급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경제적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오늘날, 어떤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않은 채 생존만을 추구하는 제국주의 때문에 세계적인 범위에서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로 집중한 것은 훨씬 더 폭발적인 성격을 갖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국의 톡스테스나 토트넘, 미국의 브롱크스나 와츠와 같은 도시의 빈민가에 살고 있는 노동자계급과 카라치, 다카, 멕시코시티, 킹스턴 각각 카라치, 방글라데시, 멕시코, 자메이카의 제1도시.
의 가난한 구역들에 살고 있는 노동자계급 사이에 도덕적, 정치적, 문화적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영국의 포드공장에서 10년 또는 15년 동안 일하고 나서, 친척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파키스탄 노동자는 고향의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많은 영국노동자들이 자신이 태어났던 곳을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본국으로 돌아간 자메이카 노동자, 또는 푸에르토리코 노동자들이 보게 되는 것은 길 양 옆으로 늘어선 빈민가들과 경작지로 이용되었던 곳에 세워진 빌딩들 이상은 아니다.
런던을 떠나 킹스턴으로, 로스엔젤레스를 떠나 멕시코시티로 돌아갔을 때, 타국에 비해 더 많은 빈민가들과 전기와 하수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집들을 보게 되지만, 전 세계의 모든 노동자계급 밀집지역에서는 똑같은 광경과 심정을 발견하게 된다. 칠레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판자촌은 똑같이 길거리가 진흙으로 뒤덮여있지만, 요금을 내지 못해 전기가 끊긴 곳들에서도 조금은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배선을 만들어 TV를 보고 있다. LA와 시카고, 워싱턴의 흑인 빈민가에서는 지방정부가 쓰레기 처리를 위한 비용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쥐들의 급증을 두려워해 지붕위에 쓰레기통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지난날과 같은 문화적 차이는 없다. 휴대용 라디오와 TV가 필요한 수준의 하수도나 위생시설보다 훨씬 더 빨리 빈민가에 도입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지리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해온 노동자가 고향으로 돌아가 옛 마을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옛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을 때때로 대도시 주변의 판자촌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식민지시절보다 그 수가 더 늘었지만, 남아프리카 백인들보다도 부유한 백인지구에서 거의 보호받으며 살고 있는 수만 명의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부르키나파소, 가나, 카메룬, 베넹 서부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들.
등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수십 개의 서로 다른 민족이 뒤엉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판자촌들에서는 한 해 동안 옛 마을들에서 평생에 걸쳐 배울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인종차별정책이 사회에 미친 실질적 결과는, 남아프리카의 도시들에서와 같은 독재가 아니다. (자본가들의 눈에) 민족격리정책, 사회 안에서 계급분할은 부유한 나라들은 물론, 가난한 나라들의 세계적 대도시들 모두에서 수립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 자본론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분석했는데, 그 때 그것은 여전히 대담한 이론적 예견이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그 모순들은 꼭 필요한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그 때부터 맑스의 분석은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모든 국면에서 노동자계급의 패배는 자본주의 질서를 더욱 연장시켜주었다.
오늘날 산업생산의 증대, 도시화, 통신과 무역의 확대로 인해 만들어진 엄청난 기술적 발전은, 인구를 급증시키면서 지구를 하나의 매우 작은 세계로 변형시켰다. 맑스의 전망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확실하게 물질적 현실이 되었다.


사회적 위기와 혁명의 시대를 향하여

맨 먼저 가난한 나라들이 세계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대가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치러야했다. 80년대 초반에 굶주림 때문에 카이로, 리우데자네이로, 상파울로, 튀니스, 카사블랑카 이집트, 브라질, 튀니지, 모로코의 도시들
등지에서 잇달아 일어난 폭동은 그 결과였다. 사실 훨씬 많은 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상황은 심각해졌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굶주림으로 인해 발생한 폭동이 일련의 사회적 항거로 바뀌어 갔다. 아이티에서, 필리핀에서, 한국에서, 버마에서 그들은 1905년, 또는 1917년의 러시아에서 제기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사회혁명의 문제를 제기했다.
루마니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 그리고 심지어 영국에서, 유럽 국가들을 강타하는 파업들이 점점 더 많이 발생했다.
이미 6년 또는 7년 전, 미국의 주도하에 제국주의 정부들이 함께, 가난한 나라들과 부유한 나라들의 가난한 계급들에게 두 번째 계산서를 발행했을 때부터 이미 세계는 위기국면에 다다랐다.
지금 서구 자본가계급은 자국 노동자계급에 대한 경제전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그들은 실업의 위협을 이용해서, 노동자계급에게 제3세계의 특징으로 여겨 온 바로 그 생활조건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있다. 불안정한 고용, 비정규직, 저임금, 모든 종류의 수당 삭감, 특히 실업수당의 삭감이 그것이다.
미국이 그 길을 가르쳐주었다. 미국정부는 실업을 이겨낸 것에 대해 자랑해왔다. 실제로 그들이 한 일이란 가난과 무주택자들의 확산을 실업자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도록 조작한 것뿐이다. 오늘날 미국노동자들은 가난 속에서, 심각한 가난 속에서 일하고 있다!
TV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파업들과 잠재적 혁명들은, 훨씬 작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 세계 경제력의 3/4을 차지하고 있는 잘 사는 나라의 노동자계급의 가까운 미래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제3세계 형제들의 희생을 대가로 서구 노동계급을 길들여온 사회적 안정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공손한 예의를 갖추었던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바보가 아니었다. 최근 미국과 소련 사이의 화해무드는 많은 갈등을 안정시키고, 1945년의 얄타회담과 식민지독립허용으로부터 물려받은 일부 화약통의 신관을 제거하고자하는 체계적인 시도이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정치-사회적 영향권 안에서 또 하나의 얄타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미국과 소련 사이의 상호협정은 미래의 폭발들에 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양측 권력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처신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부유한 서방 국가들과 소련 자국 안에서 절대적인 안정이 지속되는 동안에만 가능하다.

우리의 전통은 투쟁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계승되어야만 한다.

지난시기동안 해마다 잠재적인 혁명적 상황은 발전해 왔다. 이미 도시노동자계급으로부터 새로운 투사 세대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젊음을 바쳐온 이들 노동자계급출신의 수십만 투사 세대는 칠레에서, 케이프타운과 요하네스버그의 빈민가에서, 마닐라와 서울, 랭군의 교외에서, 점령지 팔레스타인에서, 그리고 심지어 제국주의의 요새와 다름없는 북아일랜드에 있는 웨스트벨파스트의 노동계급지구에서 발생한 파업과 시위들을 통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들 젊은 투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기와 미래가 자신들에게 달려있으며,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모든 혁명적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다양한 전후 민족주의운동이 필요에 의해 채택한 스탈린주의 방법론을 계승한 정치-군사 기구들에 의해 선발되어 훈련되었으며 조직되었다. 이 세대의 깃발은 민족주의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영웅적 행동은 ‘무장투쟁’ 또는 ‘테러리즘’이다.
트로츠키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투사 세대는 1차 세계대전에 이어 일어난 혁명적 폭풍을 직접 경험했다. 그들은 이러한 폭풍들 속에서 훈련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전 과정을 함께했다. 진짜 비극은 스탈린주의 관료체제가 맑스주의를 훼손시키고 레닌의 방법론을 희화화하면서, 노동계급운동 안에서 가장 나쁜 정책을 적용하려고 이들 투사 세대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이상으로 함께 모여 단결한 이들 혁명 세대는 정치적 실천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에 벌어진 일은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자산을 다음 세대로 계승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때부터 역사는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 세계 각지에서 새로운 투사 세대들이 반복해서 등장했지만, 그때마다 그들의 정치의식 수준은 이전 세대보다 낮았다. 그들 지도자는 공산주의에서 민족주의로 이동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벗어나 자본가계급의 편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마침내 계급적 언사를 전혀 쓰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에는 노동계급운동 바깥에서 활동했다가 그 뒤 점점 더 노동계급운동 내부로 영향력을 확대해간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는, 특히 2차 세계대전의 파멸적 흐름에 이바지하면서 그 임무를 완수했다. 그들은 세대와 세대 사이에 정치적 단절을 만들었으며, 그 덕분에 혁명적 전통들은 전승될 수 없었다.
오늘날 칠레에서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에까지, 아르헨티나에서부터 필리핀에까지, 폴란드에서부터 아제르바이잔과 북아일랜드에까지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정치사회적 투쟁의 선두에 서 있는 세대는 대부분 노동자계급이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의 유품으로서도, 또는 추상적 문구로서도 노동자국제주의 사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과거 혁명의 역사적 경험 전체는 이들 세대들에 이르러 소실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의 국제노동계급운동은 50년 전보다 훨씬 후퇴된 상황이다.
이제 더 이상 투사들이 따르고 있는 민족주의는 노동자계급에게 자연스럽거나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깃발을 제시하는 세력이 오직 민족주의 지식인들뿐이기 때문에 이들 세대는 민족주의 깃발을 따르게 되었다. 자신을 노동자국제주의자라고 자임하는 이들이 자신의 사상에 대한 방어를 거부하는 대신,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지지했기 때문이다.
젊은 투사들이 조국의 국경내로 제한된 민족주의적 요구들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은 결코 빈민가와 판자촌의 삶의 조건들과 관계가 없다.
25년 전에 말콤 엑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미국에서 가장 무서운 흑인들은 빈민가출신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도, 도덕관념도, 국민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좌절해왔기 때문에, 언제나 무엇인가 강구하기 위해 초조해하고 참지를 못한다. 그리고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언제나 극도로 헌신하면서 그것을 행한다.”
흑인 민족주의 투사였던 말콤 엑스는 빈민가 흑인들에 대한 자신의 묘사가 일반적인 노동자계급에 대한 맑스의 묘사와 매우 일치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종교, 도덕, 시민권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갖지 않는, 아직은 매우 협소한 시각에서도 그러한 헌신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이들 빈민가 출신의 노동자계급이, 조국이 없기 때문에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전 세계를 얻을 수 있다면 왜 그들이 국제주의자가 되지 않겠는가?
흑인거주구역으로 몰아넣어진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왜, 마치 국가의 명칭을 바꾸는 것이 가난은 물론 백인지배를 끝낼 수 있는 것처럼, 미래의 ‘아자니아’ 남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이 ‘남아프리카’를 지칭하는 용어
에서는 그들이 해방되리라고 믿어야만 하는가? 결국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은, 과거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바뀌었지만, 흑인민족주의자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스스로 보게 될 것이다!
문맹률이 높고 절반이 실업자이던 시기에, 젊은 유대인 노동자는 1903년에 바르샤바 슬럼가에서 자신들의 용기와 헌신성을 보여주었고, 동맹들, 볼셰비키들, 폴란드사회당, 또는 사회주의운동 내 다른 여러 경향들(대중의 수준에 있는 대부분의 젊은 노동자들은 이들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로부터 주목을 받으면서, 노동조합들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룹들이 조직화를 위해 준비한 교육에 참가하도록 초대받았다. 그리고 노동조합들 안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경쟁이 불붙었다.
민중은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해외의 사회주의 조직들, 국제주의를 주장했던 조직들에 친숙해졌다. 그것은 아직 투사적 시야를 갖지 못한 모든 노동자가 의식적인 노동자로 성장하려면 기본적으로 배워야만 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국제주의적이지 못하다고 의심받는 것은 경멸로 여겨졌던 반면에, 국제주의를 인정받는 것은 자긍심의 상징이었다.
젊은 사회주의 노동자는 대부분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추어졌던 감옥에서 자신의 정치교육을 진전시키곤 했다. 투사들의 표현으로 감옥은 ‘혁명가를 위한 대학’이었다.
지하활동의 복구가 너무 힘든 시기에 감옥에서 나온 투사들은, 때때로 당의 도움을 받아 해외로 나갔다. 그들은 활동의 기회, 국경을 가로지르는 지하연계망, 접촉선을 찾아서 프랑스, 영국, 독일, 또는 스위스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벌어질 일들은 개인의 운에 따르는 문제였다. 하지만 노동자 혁명가들은 의지만 있다면, 그 당시 유럽의 다른 지역에 존재했던 합법적 조직들과 연계를 만들면서 자신의 정치적 훈련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극도의 가난 속에서 살아온 경험을 가진 망명 혁명가들은, 처음으로 독일의 정치모임에 참가하여, 자본가과 똑같은 투사들의 옷차림을 보거나, 방랑하는 폴란드투사들과 같은 모습을 보면서 당황했다.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진 후에 투사들은 대중 집회, 선거캠페인 등과 같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배우고자 했다. 가끔 정치적 망명자들 사이에서 도덕적 타락과 고독의 시기를 겪는 투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그들이 러시아나 폴란드로 되돌아갈 때, 그들의 정치적 자산은 꽤 풍부해져 있었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말하곤 했던 국제주의가 그들의 삶을 밀어가는 힘이 되곤 했다.
오늘날 민족주의 조직들에 속해 있는 젊은 혁명가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감옥도, 심지어 남아프리카의 감옥도 혁명가들을 위한 대학의 역할을 한다. 물론 오늘날의 투사들이 감옥에서 배우는 것은 지난 세기에 혁명가들이 배웠던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70년대의 미국 흑인운동은 젊은 흑인 중간계급 죄수들에게 정치문화를 제공하면서 감옥에서 회원을 모집했다.
진정한 차이는 다음 단계에서 시작된다. 보통 경찰의 일상적인 감시로 인해 반 지하활동을 강요받는 요하네스버그 빈민구역 출신의 젊은 흑인 노동조합활동가들은 결국 성공하지 못한 시위 이후 떠나게 될 때, 그들의 망명자로서 경험은 1900~1910년 사이에 혁명가들이 경험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
그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바깥에서 어떤 정치그룹의 지하연결망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될 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경우는 소련,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쿠바가 제공하는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받는 ANC나 다른 조직들이 만든 캠프들 가운데 하나에서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보츠와나, 앙골라, 짐바브웨로 가는 길 밖에 없다.
이러한 종류의 민족주의 군사캠프에서 받는 훈련은 심지어 그 교관들이 전 세계로부터 왔다고 하더라도, 이들 젊은이들이 국제주의를 자신의 삶을 밀어가는 힘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그것은 그들을 훈련시키는 목표가 아니다. 오늘날의 무장투쟁은 그 자체의 기구들과 국제적 군사요원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들에게 국제주의 혁명의 이상은 더 이상 혁명적 자각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다.
북아일랜드민족주의운동의 현 지도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학들에서 혁명사상을 접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일부는 영국 또는 아일랜드에 있는 트로츠키주의운동과 연결된 혁명조직의 회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아직까지도, 그들이 웨스트벨파스트의 공영주택단지로 들어가 영국군대에게 돌을 던지는 젊은 투사들에게 제공하는, 혁명의 학교는 단지 음모적으로 고립된 IRA 군사조직과 흐리멍텅한 가짜 사회주의의 언어를 쓰는 신페인 민족주의정당뿐이다.
아울러 영국의 트로츠키주의 그룹 대부분은 신페인당의 집회들 가운데 하나에 초대받아 발언권을 얻었을 때, 무언가 성취한 것으로 느끼면서 민족주의자들에게 충고를 했다는 자만심에 빠진다. 무슨 충고를 말하는가? 신페인당이 여성이나 동성애자들에 대해 좀 더 급진적인 태도를 취해야하며, ‘아일랜드 사회주의 연방’이라는 슬로건을 채택해야 한다는 충고를 말하는가? 마치 노동자 국제주의를 단지 민족주의에 몇 가지 급진적 구호를 추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가진 중간계급의 원죄에 대해 말하는 영국트로츠키주의자들의 설교적 지지로부터 젊은 아일랜드 투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젊은 투사들은 신페인의 정책들을 몇 가지 결점을 제외한다면 고려할 가치가 있는 오직 하나의 대안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과거 세대가 일궈 논 노동자국제주의의 지식과 기술들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달하여, 마침내 국제주의노동계급운동이 1930년대의 그것보다 정치적으로 발전된 기초로부터 재출발하도록 만드는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달려있다.
그것은 과업인가? 그렇다. 그것은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인류의 과업이다. 트로츠키주의 그룹들이 그 조각들을 긁어모은 트로츠키가 남긴 정치적 유산은, 그저 지금 상황에 적용하기만 하면 되는 이미 만들어진 계획에 관한 공식이나 교의가 아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즘을 교의가 아니라, 노동자계급혁명 달성을 위한 혁명가 교육체계라고 말하곤 했다. 트로츠키주의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인 우리가 지적-정치적인 대담성과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투사적 활동과 혁명적 행동을 통해, 트로츠키가 언급했던 혁명가 교육의 체계를 재창조-재고안하여, 결국 그것이 지금 억압받는 계급에서부터 탄생한 싸우는 세대들에게 스며들게 할 수 있는가가 그것이다.


움켜쥐어야 할 과업

모든 민족주의 혁명들의 역사적 증명과 종말에도, 지금 싸우고 있는 세대는 민족주의가 진보적일 수 있다고 말하는 새로운 전통을 부자연스럽게 뒤따르고 있다. 우리는 이들 세대를 국제주의사상으로 되돌릴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오늘날 국제주의 혁명가로서 우리가 움켜쥐어야 할 과업이다.
제2, 제3인터내셔널의 시대에, 노동자계급 조직들은 계급의식과 국제주의의 전송수단들이었다. 오늘날 제국주의 경제체제의 발전은 명백히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국제주의적 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필요성은 대중과 대중조직에 대한 지도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사기구들, 또는 관료기구들에 의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거부되고 있다.
1905년과 1917년 이전에 레닌은 똑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그 자신이 말하곤 했던 것처럼, 그는 폭탄으로 무장한 자유주의자들의 정책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그들은 혁명적 사회주의가 우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혁명이 의제로 올라있는 나라들에서 우리는, 이제는 폭탄과 함께 작은 군사기구를 이용하고 있는 똑같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의 정책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또한 그들은 아직 이러한 기구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책략을 쓰지 않고도 대중을 조직하거나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반대파로서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 확고하게 확신한다면, 우리는 모든 곳, 모든 상황, 심지어 매우 작은 투쟁에도 개입해야 한다.
우리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대중이 행동하고 있을 때, 그 지도력을 차지하려고 달려드는 기회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기구들과 그들 지도자들을 대중이 포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와 상황은 필연적으로 다가 오는데, 그것은 이들 기구들과 지도자들이 대중에게 민족, 민족경제, 또는 민족종교를 위해서 규칙, 즉 부르주아 질서의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고 말할 때이다.
이 임무를 자각하고 있는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약점이 매우 커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객관적 상황은 좀 더 나아졌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그것의 달성이 쉬울 수 있다. 지금 상황은 1902년의 레닌시절보다 나쁘지 않다. 게다가 지금은 계급과 연결고리를 만들고,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만들도록 매개할 수 있는 많은 문제가 존재하는 상황이다.
1988년 9월에 폴란드에서 일어난 파업들을 보자. 야루젤스키 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는 노동자계급은 그때까지도 바웬사를 완전히 믿었다. 바웬사는 재빠르게 서구 노동조합관료들의 속임수를 배워야만 했다. 그는 정치적 소방수의 역할을 했고, 불속에 뛰어들어 파업 중인 노동자를 작업대로 돌아가게 하려고 파업이 벌어지고 있는 광산과 공장으로 찾아갔다.
여전히 2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지키고 있었다. 바웬사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거의 대부분 20대였고, 매우 결의가 충만했으며, 1980년의 파업 때보다도 훨씬 더 전투적이었다. 그러나 결국 바웬사는 그들이 빈손으로 작업대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고,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어쨌든 여전히 파업노동자가 바웬사를 믿었기 때문에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찾아갔던 모든 곳에서 노동자의 반응은 냉냉함과 적대적인 침묵이거나 ‘배신’에 대한 분노의 항의, 경멸과 고함이었다.
사건들은 자주 그런 방식으로 역전된다. 폴란드의 파업노동자는 분노했지만 일터로 되돌아갔다. 노동자가 가장 믿는 지도자에게서 배신을 당했을 때,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서 파업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다른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단스크 폴란드 북부의 항구 도시. 연대노조의 거점지역 중 하나이다.
에는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젊은 파업노동자가 몇 백 명 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없었던 것은 바웬사의 역할을 대체해야 할 가능성에 대해 알고, 노동자의 사상을 자긍심을 갖고 공개적으로 지키려고 할 뿐만 아니라, 연대노조의 지도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현장 동료들에게 각인된 엄격하게 조직된 10여명의 젊은 노동자 그룹이었다. 바웬사가 평조합원들에게서 돌아섰을 때, 그러한 그룹은 전진의 발걸음을 내딛어 이렇게 말하면서 파업의 지도부로 설 수 있었다. “우리는 파업을 실행하기 위한 새로운 파업지도부를 선출할 것을 제안하며, 1980년과 마찬가지로 다른 현장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파업위원회의 대표들을 선출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한 그룹이 없었던 이유는, 폴란드 어디에도 작더라도 노동자 투사를 교육하여 그러한 임무를 자각하도록 만드는 노동자혁명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폴란드 노동자는 자신들의 계급 안에서 대안 지도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파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작은 투사그룹이 한발 전진했었더라면, 500만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연대노조 지도부의 장악력은 몇 일안에 무너졌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역사 속에서 늘 되풀이 되어왔다. 1988년 9월의 폴란드에서처럼, 노동자의 힘이 강할 때, 그와 같은 배신이 있었다. 하지만 또한 그러한 상황은, 노동자가 승리하도록 목적의식적으로 이끌고 노동자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폭로함으로서, 노동자를 최대로 결집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혁명가에게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소수일지라도 최고의 기회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대중의 선두에서 그들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는 기예의 일부이다.
우리는 우리의 과업이 개량주의 기구들의 힘과 그들 지도자들이 가진 권위를 압도하고 있음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적인 상황은 항상 목표가 거의 손에 잡힐 수 있는 순간에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그 상황은 단순히 주도권이 관료기구가 아니라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넘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대중 속에서 활동하고 있고, 아직 그러한 기회를 움켜잡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투사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혁명적 훈련을 계속해야만 한다.
폴란드에서 벌어졌던 일은 내일 이곳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우리도 임금에 대한 투쟁이 사장들과 그들의 정치가들을 두렵게 만드는 방식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시기에 또 다시 영국의 스카길 Arthur Scargill(1938~ ). 84년 전후 석탄생산을 줄이고 고용인력을 2만 명 줄이려는 대처의 시도에 맞선 광부파업당시 전국탄광노조 위원장.
또는 미국의 러더 Walter Philip Reuther(1907~1970). 포드자동차 출신으로 미국 자동차 노동조합(UAW) 설립에 참여하여 관료가 되었다.
, 그리고 바웬사가 그랬던 것처럼, 파업만이 최선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상황에서 배신에 항의해 조합원증을 찢어버리고 고함을 지르는 노동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혁명가들이 동료노동자들을 앞에서 이끌고 전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하며, 필요한 책임들을 떠맡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사상은 장애물이 아니라, 가장 좋은 조건을 만들도록 도울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맑스에게서 배운 것처럼, 우리의 사상이 납득될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대중이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할 때, 사상은 틀림없이 힘으로 전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연쇄적인 반응이 일어날 수 있으려면, 그전에 이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에 확고부동하게 충성해야만 한다.

-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
- 잃을 것이 없는, 조국이 없는, 지켜야할 재산이 없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노동자계급만이 끝까지 혁명적일 수 있는 하나뿐인 계급이다.
- 노동자계급은 승리를 위해서 다른 사회계층들과 동맹을 맺어야만 하지만, 공동투쟁을 유지할 때조차도 결코 그들의 지도권을 받아들이지 말아야만 한다.
- 사회주의혁명이 고립된 일국에서 터져 나올 수 있지만, 어떤 나라도 그 자신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자본가계급의 역사적 역할, 사실상 오직 하나의 진보적 역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국경 없는 경제를 창조한 것이었다. 거대한 소련에서건, 중국대륙에서건, 작은 쿠바에서건, 제한된 국경 내에서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는 가난에 기반한 사회주의, 결국은 반동적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다.
- 제국주의단계에 도달한지 거의 1세기가 된 자본주의는 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한 번의 위기가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지고, 한 번의 세계전쟁이 또 다른 세계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통해서 생존을 유지할 뿐이다. 20세기 초반 이후, 자본주의의 위기는 어느 정도 영구적인 것이 되었고 생활 조건은 어느 정도 참을 만하다. 오늘날 베를린에서 생활은 멕시코의 생활에 비해 훨씬 더 편안할 수 있지만, 1944~45년에 연합군이 독일을 폭격할 때는 그 반대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세계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심지어 1982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정말 멀리 있고 작은 말비나스 섬 1982년 계속되는 경제 침체와 60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중들의 군사정부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자 갈티에리 정권은 3월 26일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말비나스 제도(포클랜드 제도)를 점령,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도 안전하지 않다. 도망칠 곳은 없다.
- 모든 노동자계급의 요구는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오직 국제노동자계급만이 국경이 강요한 족쇄를 깨부술 수 있다.
- 가장 발전된 기술을 바탕으로 한 세계적 규모로 조직된 계획경제만이, 인류가 그 역사와 진보를 지배하는 것으로 한 걸음 더 전진하도록 이끌 수 있다. 이것은 사회의 물질적 욕구와 지구의 천연자원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마침내 모든 인간의 지적이고 예술적인 욕구의 무제한적인 발전을 보장하면서,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조직된 생산을 뜻할 것이다. 자본주의사회는 다수에게는 절대적인 궁핍을 강요하면서 소수를 위한 구역질나는 풍요를 만들어낼 뿐이다. 인류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생존을 지속할 수 없다. 유럽에서는 땅이 휴경지로 남아있는 반면 수단에서는 굶주리고 있다. 가뭄은 최근의 화폐가치 하락과 뒤이어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빈곤이 잔인하게 확산되고 있는 아르헨티나로 밀을 수출하는 것을 통해, 한줌도 안 되는 미국인 밀 거래상들이 재산을 긁어모으도록 보장한다. 그리고 세금이 집 없는 이들과 의학연구에 쓰이는 대신에, 인민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독재자를 위한 중무기들을 공급하는데 쓰이고 있다. 불평등과 부정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 전체 인민들이 중세시대로 되돌아가도록 강요하는 국경사이의 광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들은 오랫동안 끝나지 않을 것이고 끝날 수도 없다.

바로 이것이 전 세계 수만 명 개인의 역할이 단호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혁명정당은 일상적 시기에 대중정당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혁명 그 자체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가 아닐 때에는, 소수 투사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결정적이다. 착취계급은 언제나 이것을 알고 있었고, 늘 비판적 시기에 혁명적 소수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고자 노력해왔다.
혁명정당, 인터내셔널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들 수만 명 개인의 조직이다. 모든 개인의 조직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목표를 선택한 사람의 조직, 다른 말로 대중조직이 될 때, 다른 조직들은 단지 퇴보했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조직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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