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평의회4장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7월호

평의회4장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3:50

4. 실패가 안긴 교훈

 

1916년 봄, 전투적 현장 활동가를 체포하여 클라이드에서 추방한 일은 한동안 스코틀랜드 노동운동을 억눌렀다. 그러나 클라이드에서 벌어진 일은 노동운동이 영국의 나머지 지역으로 퍼져나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191611월 초에는 현장조직 위원들(shop stwards)의 전국회의가 열릴 수 있었다. 이는 클라이드에서 추방된 아더 맥마누스가 지체 없이 소집했다. 맨체스터에 있는 하인드맨 홀에서 열린 이 회의에는 바로우(Barrow), 맨체스터, 런던, 버켄해드(Hirkenhead)의 현장조직 위원들뿐만 아니라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잔류 대표들도 모였다. 이들은 현장 노동자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선전선동을 하는 전투적인 현장조직 위원들의 집단으로서 성격을 지녔다.

이렇게 시작하여 자라난 현장조직의 전국적 운동은 전쟁이라는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주로 노동자(현장위원) 통제를 확대하는 문제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었다. 맥클래인의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한 생각은 클라이드 지역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19175월 들어, 설립된 지 6개월밖에 안 된 이 전국 조직은 총동원전쟁에 맞서 가장 큰 파업을 주도해야만 했다.

파업은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이 군수산업 이외의 산업부문에서 확대 실시되어 민간 공장들이 이를 도입했을 때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금속노동자는 병영에 나가 있는 군인들을 도우려고기꺼이 자신들의 권리를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2십여만 명의 노동자가 이를 쟁점으로 하여 파업에 나섰고, 19175월에 이 파업의 향방을 결정하려고 현장조직 전국회의가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하여 현장조직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투옥되지 않은 현장조직 위원들은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해 클라이드 출신 활동가가 참석하지도 않고 519일에는 파업을 종결시키게 되었다. 민간부문의 노동 계약에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의 쟁점은 단지 금속산업 숙련공들에게만 관심이었다. 이는 엄청난 규모를 지녔지만 19175월의 동맹파업이 분파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파업은 실패했지만 현장조직 위원들 사이의 전국적 네트워크는 계속 확대되어 갔다. 또 다른 회의가 19178월 맨체스터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현장조직 전국회의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이 191611월의 회의에 참석했던 지역뿐만 아니라 바로우(Barrow), 볼튼(Bolton), 브리스톨(Bristol), 컨벤트리(Conventry) 그리고 리드(Leeds)등 각지에서 참석했다. 그 뒤 전국통제위원회(National Administrative Commitee)’가 출범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주도적인 현장조직 대표자였던 머피가 나중에 드러냈듯이 이 조직은 현장조직 대표자들의 대의 기능을 강조했지, 저항행동의 촉진자들로서 역할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국통제위원회는 운동에 필요한 지도력 구성을 저해하는 이론을 채택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장조직 전국회의라는 운동이 보여준 폭넓은 잠재력은 머피의 노동자 위원회라는 팜플렛 판매를 통해 나타났다. 팜플렛은 단숨에 150,000 부가 팔려나갔다. 그것은 현장조직 위원의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까지를 모두 조직한다는 세부적인 청사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글래스고우에서는 노동운동이 부활했다. 19172월 갤래셔와 뮈르에 뒤이은 맥클래인의 밀접한 동맹자인 맥두갤(Macdougall)이 석방되자 글래스고우의 노동운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6월까지 다른 추방자들도 다시 돌아왔다. 1915년에 잘 알려진 글래스고우에서 벌어진 집세 거부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힘을 보여줬던 여성노동자들은 여성평화운동단(Women's Peace Crusade)을 설립했고 그들의 반전 주장들은 여름에 맥클래인이 복귀함으로써 꽤 보강되었다.

국제적인 사건들 역시 고취되었다. 19172월 러시아 짜리즘의 몰락은 각지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영국의 대부분 노동자들은 전쟁이 지속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전 세계 (노동) 지도자들에게 평화 정착의 타협점을 찾으려고 협상 테이블들을 설치하자는 요청에 의해 희망이 고무되었다. 그러나 극좌파에게 2월 혁명은 전쟁종식을 위한 도전 그 이상을 뜻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계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평화주의자나 급진주의자들 모두가 191763일 리드(Leeds)에서 평화 대회(Peace Convention)를 개최하였고 온갖 대표자들이 다 모였다. 독립노동당과 영국사회주의당에 의해 소집된 1,150명의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은 모순적인 행동강령에 서명했다.

 

노동자 병사 평의회의 대의원들은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대를 추구하며 …… 각 나라들의 사람들에 의해 평화를 이룰 것을 추구하며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완벽한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추구한다.

 

비록 제안자들에 의하면 이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뜻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이들은 자선사업을 위한 개량주의적 평의회를 설립하려고 했고 러시아의 노동자와 병사들의 평의회가 실제로 어떻게 활동했는지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리드(Leeds)에서 선언된 평의회는 그저 아래와 같은 것을 추구하는 노동관료들의 위원회에 지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 산업적 그리고 시민적 자유에 대한 어떠한 침해에도 저항한다. 산업에 고용되어 있는 여성들의 위치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노동조합들을 전면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상이군인들에 대한 연금 마련, 기초생활 대상자에 대한 생계비, 불구가 된 군인들에 대한 식량 지급 그리고 적절한 시민생활을 위한 일자리 창출의 문제에 대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강구한다.

 

리드에서 열린 회의는 서유럽에서 제도권 내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위로부터 노동자 평의회를 만들려고 했던 여러 실패한 시도들의 출발점이었다. 진정한 노동자 평의회는 이렇듯 위로부터 통제되어 하향식으로 설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평의회는 현장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투쟁으로 지도하는 전투적 선진노동자들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 졌다. 오로지 클라이드 노동자 평의회가 리드대회로 파견한 갤래셔만이 러시아의 사례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비에트를 지향하는 운동 속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그만이 하나뿐인 노동자 평의회를 부르주아 의회에 대한 대안적인 국가형태로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리드에서 열린 전국회의는 죽은 의회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위원회의 도움을 통해 국민 생활의 모든 것들에 대한 통제와 지도를 장악함으로써 혁명을 성취해낼 것을 역설했다.

리드에서 제도권 노동운동에 의해 제안되었던 노동관료적 형태의 평의회는 현장노동자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억압을 고취시키는 폭력의 한복판에서 그 이념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회는 전쟁개시 후 비참했던 3년이 지난 다음에 노동계급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줬다. 1917년 말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가 다시 만들어진 것은 노동운동의 활력이 다시 살아났다는 증표였다. 그것은 머지않아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만큼이나 잠재적인 폭발력을 가진 징병문제에 부딪쳤다.

비록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1916년 이후로 병력 소집령에 복종했었지만 이는 금속 숙련공들에게는 성공적으로 적용되지 못했다. 쉐필드(Sheffield)에서 이를 극복해보려는 진지한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빛나는 파업 행동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 파업의 성공은 영국의 현장조직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쉐필드 노동자 위원회(Sheffield Workers' Committee)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1917년 말에 정부는 다시 한 번 숙련노동자들을 소집할 것을 결정하여 소집의 범위를 고급 기술자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시켰다. 총알받이를 위한 요청은 국제적으로 중요한 국면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독일 노동자들은 여러 번 대중파업을 벌였고, 스위스의 침머발드(Zimmerwald)에서 열린 사회주의자들의 회의는 수많은 평화 요구 조항들을 제출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가 전쟁 종식을 위한 독자적(unilateral) 제안을 했다는 점이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영국에서 반전 파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영국에 특수한 현상만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수많은 금속 숙련공들은 숙련노조관료들의 엘리트주의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에도 나타났다. “나를 데려가지 말라. 나는 기술자연합협회(ASE) 소속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금속 숙련공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노동자도 강제 징집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여 클라이드 지역 노동운동 세력들은 다시금 반전운동의 희망을 제공하는 듯했다. 군수노동국 장관(Ministry of Munitions Labour Department)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글래스고우 지역은 강제 징집에 전투적으로 저항할 유일한 지역으로 판단되었다. 지역 신문들은 현장노동자들이 누구나 소집될 수 있다는 점을 거부했다고 전했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심지어 지역 노동조합 관료들마저도 파업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이러한 전투성은 경제적 쟁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강제징집과 더불어 새로운 노동인력 법안(Manpower Bill)까지 덧붙이는 것에 맞서면서 동시에 성과급 노동자들(pieceworkers)의 보수를 12.5% 높이기 위한 운동에, 그리고 주물노동자들(moulders)의 파업에 참여했고 비어드모어(Beardmore) 공장에서 두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던 것에 맞서 싸웠다.

커져가는 저항을 잠재우려고 정부는 오클랜드 게디스(Auckland Geddes) 씨를 글래스고우에 파견했다. 1918128일에 그와 2,500여명의 지역 현장조직 위원들이 연 회의는 1915년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사건의 재연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수준은 더욱 높았다. 1915년 그 회의에서 주요한 관심사는 현장의 노동조건을 방어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전쟁이나 평화에 대한 문제가 두드러진 관심사였다. 그때 그 회의에서 논의되었던 모든 문제는 국제 정치에 대한 것들이었다. 현장조직의 대표들은 게디스(Geddes)에게 영국이 적국의 영토에 대한 약탈을 하면서 어떻게 휴전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더 맥마너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강력한 공격을 했다. “무역과 영토를 위해 하는 범죄적 전쟁 때문에 희생될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당장 전쟁을 끝내라. 우리는 이 점을 정부에게 촉구하는 바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한동안 클라이드 현장조직 위원들에 의해 광범위한 반전운동이 형성하는 듯했다. 게디스와 회의가 있기 바로 전에 전국의 현장조직 위원들은 더 이상의 강제 징집에 대항해 파업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그 운동은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곧 드러났다.

1918년의 첫째 주에 현장조직 운동에서 시작된 전국통제위원회(National Administrative Council)는 볼셰비키의 평화 제안들을 수용할 것과 이러한 요구들을 받아들일 전국적 행동을 추진했다. Solidarity라는 영국 현장조직의 신문은 이 최후통첩을 2월 호에 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만약 독일 노동자들이 합의사항을 따를 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계를 멈추고 결단을 내릴정책을 즉각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독일에 있는 노동자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 독일 노동자들은 우리의 섬들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면서 …… 자신들의 군사 지도자들의 명령에 기꺼이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때 독일 노동자들은 혹독한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위의 내용은 여러 가지 내용이 절충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내용은 노동자 국제주의의 정신이 전적으로 부재한 것으로서, 러시아 노동자의 경우를 보면 필요하면 혼자서라도 전쟁에 맞서 최초의 봉기를 일으키곤 했었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맥클래인은 전쟁이 결코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확고히 가졌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너무 제한적이었다. 머지않아 현장조직 위원들이 망설였기 때문에 비극적 결과들이 전국적 수준에서 나타났다. Solidarity에 기사가 나온 바로 그 순간에 50여만 명의 독일 노동자들이 평화를 위해 파업에 나섰다. 반전 투쟁 속에서 양국 노동자들이 결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현장조직의 전국적 운동이 취했던 모호한 입장은 클라이드의 노동운동세력을 고립된 상태로 만들었다. 게디스와 회의에서 보였던 분노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윽고 글래스고우에서 노동운동의 세력이 약한 공장들을 대상으로 정부는 체계적인 선전을 펼쳤고 이로 인해 반전 파업의 희망은 꺾여 버렸다. 결국 Solidarity가 상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독일의 노동자들이 실패하게 한 것은 오히려 영국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러한 좌절이 있었지만 클라이드 노동운동은 자신의 지역에서 애국주의(jingoism)가 발현되는 것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했다. 영국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반전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물리적인 위험에 부딪혔던 반면, 글래스고우에서는 전쟁에 찬성하는 집회가 혼란에 빠졌다. 100,000여명의 노동자들이 1918년 근로시간에 열렸던 노동절 집회에 참여했다. 히스테리적인 애국주의자이자 선원 노동조합의 지도자였던 하브록 윌슨(Havelock Wilsom)끝까지 전쟁에서 싸우자는운동을 클라이드에서 했을 때 완전히 무시되었다. 5,000여명이 참여하여 몇 시간 동안 시가전이 있고 나서 그는 도시에서 쫓겨났다. 이것은 그가 바랐던 종류의 전쟁이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 노동자 혁명이 제국(Kaiser)을 전복했던 19181111일에 급작스럽게 끝났다. 독일의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의 활동은 데모에 참여했던 30,000여명의 클라이드 주민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 기민하게 로이드조지는 전쟁에서 이긴 대가로 보통선거를 요구했다. 전국적으로 노동자 유권자수(다른 부문보다 유권자 수가 월등했다)1910년에 비해 5배가 늘어났다. 그에 비해 글래스고우에서는 15배가 늘어났다. 통계 수치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는 얼마나 많은 클라이드 노동자들이 전시 동안의 자주적 활동을 통해 발전했는가를 보여준다. 한때 변덕스런 신념을 지닌 소수 집단으로 여겨지던 혁명세력들은 공고한 지지 기반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전쟁 찬성 입장의 노동자 후보에 대항해 선거에 나왔던 맥클래인이 그 상대가 14,247표를 얻었던데 비해 7,436표씩이나 얻음으로써 이를 보여줬다.

전쟁에 대한 자기 헌신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휩싸였다. 일단 위기가 지나가자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자본가들 같은 사람들에 의해 요란스럽게 치켜세워졌던 노동과 자본 사이의 협조는 갑작스럽게 해체되었다. 과거의 삶으로 회귀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대중 실업이 다시 나타났던 점이었다. 군수산업이 침체되자 글래스고우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다. 해고와 동원된 병사들이 돌아오자, 19192월까지 군수산업 노동자의 실업률은 10%에 이르렀다. 금속숙련공의 실업률은 전시에는 평균 0.5%였는데 2월에는 11%로 상승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하나의 해법은 노동 시간 단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선전의 결과 그 지역 현장조직 대표자 회의가 191915일에 Shop Assistants' Hall에서 열렸다. 그때 자본가들은 보통 때 주당 47시간의 노동시간 수준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현장조직 위원들의 대답은 명쾌했다.

 

주당 47시간 노동제라는 것은 생산성 증대를 뜻하며, 생산성 증대는 실업의 증대를 Ent하고 실업의 증대는 더 낮은 임금 뜻한다. 더 낮은 임금이란 노동자들에게는 궁핍이 그리고 사용자들에게는 이익이 늘었음을 뜻한다 …… 또한 이는 거대한 산업예비군과 군대를 존속시킴으로 사용자들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것을 뜻한다.

 

조선 산업 노조와 금속 숙련공 노조의 연합체를 비롯하여 지역의 제도권 노동운동세력(official sections)은 이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산업 운동의 공식, 비공식 부문을 대표하는공동위원회(Joint Committee)가 구성되었다. 독립노동당의 고문이자 글래스고우 협상 위원회(Glasgow Trade Council)의 지도자였던 에마뉴엘 쉰웰(Emmanuel Shinwell)은 공동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또 다른 회의체를 통해 짧은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 각지에서 800여명의 대표자들이 참여하여 118일에는 주당 40시간 노동제를 요구하였고 127일 월요일 총파업을 예고하며 전투준비명령(Call to Arms)’ 160,000부가 배포되었다.

비록 이 운동은 그 성격상 지역적인 것으로 남았지만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신문은 다음과 같이 견해를 표명했다.

 

우리 영국의 볼셰비키들은 우리에게 방향성을 주는 러시아의 선례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혁명이 이루어지고, ‘모든 권력을 노동자위원회로라는 함성소리가 울려 퍼질 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때 갤래셔의 논조는 더욱 도전적이었다.

 

결단의 시간이 왔다. 앞으로 나아가자.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독일의 노동자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 소비에트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그러나 40시간 노동제를 요구했던 총파업은 혁명의 결정적인 순간은 아니었다. 127일에는 클라이드 벨리 노동의 대부분인 40,000여명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현장조직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은 훗날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에 적용되었던 피켓팅 방법은 새로운 것이었다. 5개의 피켓을 든 만여 명의 노동자들은 특정 작업장으로 행진했고 길 양편에 길게 늘어섰다. …… 이는 무엇보다도 성공적인 방법이었다. …… 파업의 또 다른 모습은 피켓시위에 파업동참자의 부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파업 5일째인 21일에 이르러 그 파업은 정점에 이르렀다. 이제 클라이드 지역에서는 100,000여명이 그리고 에딘버러 주변에서는 14,000여명이 참여했다. 이날은 피의 금요일로 불리었는데 왜냐하면 경찰은 글래스고우의 조지 스퀘어(George Square)에서 데모한 수만 명의 참여자들에게 폭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래와 같은 목격자의 진술에서 묘사되고 있다.

 

금요일 밤 내내 기차 여러 대에 군대가 실려 도시로 왔다. 시민들이 아침에 곤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온갖 전투 장비에 포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주요 지점에는 총검을 무장하고 강철 헬멧과 완벽한 전쟁 장비를 한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기관총, 탱크, 비행기 등이 시내로 들어왔다. 마치 독일의 침략이 임박하기라도 한 것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실업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조치는 3년 전 갤래셔가 이야기 했던 내용, 즉 정부는 전쟁에서 패하는 것보다 노동계급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한다는 점을 입증시켜줬다.

공동위원회는 영국 전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주의를 파괴하려는 이 비열한 시도에 대해 저항할 것을 촉구하는 새로운 선언을 발표했다. 한동안 전면적 행동이 가능할 듯했다. 벨파스트(Belfast) 지역은 공동위원회가 주도하는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영향력 안에 있었고 런던지역에서는 전기 노동조합이 공장을 돌릴 전력을 26일 이후로 끊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들이 북쪽으로 보낸 전보 내용은클라이드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가고 있다고 전하라였다. 군대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글래스고우에서 파업은 공고하게 지속되었다.

가장 심각한 위협은 군대로부터가 아니라 전국노조(national unions)의 관료들로부터 왔다. 정부의 지원 하에 기술자연합협회(ASE)의 지도자들은 글래스고우, 벨파스트 그리고 런던의 지역 노동조합 위원회들에 침투해 들어갔다. 전기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26일로 계획되어 있는 집단행동이 불법임을 협박한 정부에 의해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그로 인해 예정되었던 파업은 연기되었다. 전국노조 관료들의 공개적 사보타지에 직면해 공동위원회는 파업의 종식을 권고했으며 이는 1919211일의 대중 회합에서 받아들여졌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현장 민주주의의 수준으로 높이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는 투쟁의 정치적 분석이나 (혁명정당에 의해 제공되어야 할 것들 같은) 투쟁이 어떻게 지도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치적 분석을 겨냥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러한 간극은 공동위원회로 하여금 전국적 전략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그 운동의 초기부터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주당 40시간 노동제 쟁취 운동에서 어떠한 독자적인 역할도 하지 못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자신들의 힘을 공동위원회에 통합시켰고 그럼으로써 파업이 권력에 대한 도전보다는 산업적 쟁의들에 더욱 치중하여 수행되게 만들었다. 그러한 도전이 실행가능한지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동위원회가 외부에서 지원을 받으려고 전국노조의 관료들에 의존했던 경향은 심각한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점이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파업의 패배로부터 회복될 수 없었고 곧 위원회를 만들었던 금속 숙련공 투사들은 자신들의 공장에서 내쫓겨 구호품을 타기 위한 행렬에 서야만 했다. 노동자 위원회의 신문인 노동자에서 온갖 허장성세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국조직 부재를 보충해줄 수 없었다. 이러한 전국조직은 클라이드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전후 영국의 대중적 전투성을 해체시키려던 노동조합관료들의 시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

그럼에도 유래가 없던 4년 동안 투쟁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그 교훈은 주당 40시간 노동제 파업이 벌어지기 2주 전에 제출되었던 사회주의 노동당의 선언문에 요약되어 있다. 이는 그 선언서의 서명자들의 개인적 표현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진술로서도 유의미하다. 4명의 제안자들 가운데 3명인 머피(Murphy), 맥마너스(McManus) 그리고 벨(Bell)은 대중적 현장조직 운동에서 탄생한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혁명집단인 사회주의노동당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혁명적 정치를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결합시켰다. 그 선언문에서 모든 항목들은 이러한 사회주의 이론과 현장투쟁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그 첫 번째 부분은 새로운 종류의 혁명적 실천문제를 다루고 있다.

 

교육과 활동은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 만약 교육과 실천 프로그램이 전체조직의 하나라면 그 전체조직은 교육과 실천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삼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과거의 복음주의적인 접근법으로부터의 단절이었다. 이것은 개입주의적인 접근을 주창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들과 투쟁 속에서 몇 천 명의 노동자들을 이끌었으며 이 대중 행동은 최고의 정치적 교육으로 판명되었다.

선언문의 두 번째 부분은 대중 행동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전쟁에서 경험은 어떠한 커다란 쟁점과 관련하여 정치적 수준의 선동과 산업적 수준의 선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 오늘날 산업적 수준의 선동은 내일의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따라서 빈틈없는 전술을 준비하는 관점에서 노동운동에 긴급히 요구되는 것은 경제적 기능들과 정치적 기능들을 결합할 수 있는 운동의 즉각적인 창조이다.

 

여기서 선언문은 교조적 맑스주의와 생디칼리스트에 의해 갇혀 있었던 태도를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아래와 같이 혁명 이후의 …… 사회 운용을 다루고 있으며 영국에서 처음으로 의회 정치에 대한 대안을 진지하게 제시하고 있다.

 

모든 공장들과 생산단위들은 다양한 하위부분들로부터 대표를 직접적으로 선출하고 이들로 구성된 위원회들을 구비하도록 조직화되어야 한다. …… 이 조직은 전국을 걸쳐 확대되어 전국 각 지역의 자원들과 생산을 규제하게 될 것이다.

 

이 성명서에 담긴 단상들은 다소 제한적이었다. 영국 사회주의당의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노동당 당원들은 독자적으로 당을 건설하려는 사회주의자들로서가 아니라 현장 수준의 투사들로서 투쟁에 개입하되 부차적으로 정치조직에 몸담고 있었다. 결국 이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들은 혁명적 소수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구축하려는 방식들보다는 대중 투쟁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선언문은 목적의식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만들어 내는 맑스주의 정당으로서 역할과 노동자 평의회로 구체화되는 집합적 대중운동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하지 않았다. 성공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대중 투쟁을 지도하려고 혁명정당이 요구된다는 점은 러시아의 사례에서 배웠고 단지 1920년대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에 의해서만 선전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경험은 혁명가들에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을 성공할 수 있게 해줄 수단들에 대하여 몇몇 통찰을 제공해주었다. 오늘날 혁명은 비록 공허한 공식으로 머무르고 있지만 현장수준에서 노동자 투쟁이 노동자평의회나 소비에트를 통하여 노동자 계급의 자주관리로 조직되고 널리 유포된다면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사회주의자들에 의한) 궁극적 목표나 (생디칼리스트들에 의한) 단기적인 노동조합 수준의 쟁점들에 대한 강조는 그 두 가지가 결합되어 종합되어야 한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단순히 노동조합 수준의 운동을 개선했던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잠재력을 가진 어떤 것을 창조해왔다. 전시 동안 노동조합 관료주의가 무너진 것은 현장의 전투적 선진활동가들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힘이 새롭게 머물 수 있는 보유지들(reserves)을 찾을 수밖에 없게 했다. 그런 탐색과정에서 그들은 현장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을 발견했다. 이때 일어난 비공식적 노동운동들은 기존 노동조합의 가장 기본적인 수준, 예컨대 유일하게 현장의 감각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던 현장위원들을 활용했다. 만약 이 현장조직이 군수산업 노동자들로 하여금 작업장 수준의 일시적인 권력에만 만족하게 했다면 노동자 평의회로 발전할 수 없었으며,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영국에서 제조업분야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일종의 개별 작업장들에서 일어난 순수한 경제적 선동인 자생적(do-it-yourself)’ 개량주의의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모순의 충돌지역(edge)에 있었던 글래스고우가 제공해준 것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드러낸 광범위한 본성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이었다. 존 맥클래인이 제출한 생각들로부터 글래스고우의 전투적 노동자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융합하려고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결국 공장과 자본주의 국가의 통치(managerial) 권력을 위협했다. 오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만이 총체적 위기에 부딪힌 노동자 계급에게 유리한 고지를 선사하였던 것이었다. 경영과 통치 권력은 국가를 전복시키지 않고서는 분쇄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집합적 힘을 공장 수준의 현장투쟁에서부터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국가권력은 파괴될 수 없다.

비록 글래스고우에서 평의회 운동은 영국 사회주의의 유약함을 피할 수 없었지만 전시 위기는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쟁 이전에 사회주의적 정치학과 현장 활동은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클라이드 지역에서 맹아적인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그 둘이 결합되는 것을 본질로 하는 새로운 종류의 혁명적 실천방식을 알려주었다. 오로지 이런 방식만이 노동자 평의회와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이라는 수단을 바탕으로 삼아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운동을 재창조할 수 있게 했다.

 

 

옮긴이: 심용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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